“정말 죽었어요.”연정훈의 단호한 대답에 표세연은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이 사실에 은근히 안도하는 듯했다.아마도 공휘 사건이 그녀에게 남긴 충격이 꽤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연정훈은 소현주에 관한 이야기를 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양시연의 마음에 불필요한 부담을 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하필 표세연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고 양시연도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소현주 씨에게 가족이 있나요?”“잘 모르겠어.”양시연은 그의 대답이 성의 없다고 느꼈는지 이번엔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소현주 씨가 갑자기 죽었는데 장례는 어떻게 치르죠?”표세연 역시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그래. 누가 소현주의 일을 마무리해 주는 거야?”연정훈은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전국에서 매년 이름 모를 시신이 얼마나 많은데 꼭 누군가가 수습해 줘야만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시연에게 말했다.“내가 욕조에 물 받아 놓을 테니까 넌 아래층에 잠시 나가서 산책하고 있어.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기다려.”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몇 걸음이나 된다고 굳이 데리러 와요?”연정훈은 그녀와 논의할 생각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기다려.”“알겠어요.”양시연은 순순히 응했고 연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연정훈이 자리를 뜨자 표세연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기분이 상했나 보네.”양시연은 고기를 한 입 더 먹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표세연은 그녀가 괜히 마음 쓰지 않도록 차분히 다독였다.“걱정하지 마. 연정훈은 단순히 소현주를 잊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소현주 얘기를 듣는 것 자체가 싫은 거야.”양시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혹시 마음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그럴 리가 있나.”표세연은 비웃듯 말했다.“소현주가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연정훈은 소현주를 역겹게 생각하는 것도 모자랄걸.”표세연은 혀를
소현주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고 양시연은 이미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누군가 지방에 한 통의 고소장을 보냈고 고소장에는 두 부부가 권력을 이용해서 한 멀쩡한 사람을 미치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적혀 있었다.사실 소현주의 사망 원인을 조사하던 사람들은 이미 영상 자료를 통해 소현주가 죽기 전에 양시연을 만났고 양시연이 험악한 경호원들을 데리고 갔으며 대화 중 몇 차례 소현주를 제압하려 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다른 사람 같았으면 최소한 조사를 위해 경찰서에 불려 갔을 일이었지만 양시연의 신분 덕분에 아무도 이 문제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고소장이 접수되자 연재혁은 분노한 나머지 연정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조사팀에 응답하라고 했다.아침 일찍 양시연은 연정훈이 밖에서 전화를 받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하고 담담했다.양시연은 문 쪽으로 걸어가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문제없겠죠? 누가 고소했는지 알아요?”연정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녀를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익숙한 사람이긴 한데 네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야.”“누군데요?”“조이현.”양시연은 정말로 뜻밖의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조이현 씨가 아직도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네요.”‘정말 정신 나갔구나.’“만약 조이현 씨 혼자 한 짓이라면 오히려 별일 아닐 거야.”연정훈은 담담하게 말했다.“문제는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누구라고 생각해요?”“굳이 의심할 필요 없어. 곧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그는 언제나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예전엔 그의 이런 태도가 오만해 보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든든했다.그날도 두 사람은 평소처럼 각자의 일터로 출근했고 스트레스받을 일도 많았지만 재미있는 일도 적지 않았다.양시연은 회사로 돌아온 뒤 사무실 분위기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
양시연은 몰래 엿보다가 순간 멍해졌고 부승원에게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보였다.반면 반우희는 아이스크림을 절반이나 먹었음에도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부승원 옆에 꼬리처럼 붙어 있었다.양시연이 보기엔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반우희는 아마 부승원에게 달라붙어 키링처럼 매달렸을 것이다.양시연이 일부러 헛기침하자 반우희는 곧바로 양시연 쪽을 힐끗 보더니 티가 나지 않게 어색하게 부승원에게서 약간 떨어져 고개를 숙이고 아이스크림의 과자 부분을 먹기 시작했다.부승원은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자기 일을 계속했다.잠시 후 그는 양시연의 맞은편에 앉아 최근 계획을 이야기하며 현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이 정도 사소한 일로 연씨 가문이 흔들릴 정도라면 그 집안은 진작에 망했을 겁니다.”양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성장 환경이 다르면 사고방식도 달랐다. 양시연은 소현주가 죽었다는 사실에 사람이 죽은 이상 그 일을 잘 이용하면 큰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정훈이나 부승원은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그러던 부승원이 갑자기 말했다.“그래도 불안하면 외출할 때 조심해요.”“안전 문제인가요?”부승원은 짧게 대답했다.“네.”“연씨 가문 같은 대가문은 큰일이 벌어지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고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어요.”양시연은 곧바로 평화로운 시기를 떠올리며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간 연서명을 떠올렸다. 물론 그 후에 조씨 가문은 사실상 몰락해 미래가 없어졌지만 연정훈의 가족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양시연은 배를 어루만지며 이 말을 마음에 새겼다.오후엔 바빴지만 저녁이 되자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 처리 결과를 물었다.연정훈은 가볍게 이미 다 처리했다고 말하며 저녁엔 경인의 현직 고위 임원을 만나야 해서 그녀를 데리러 가지 못한다고 했다.“괜찮아요. 저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요.”양시연이 말했다.“우리 애아기 오늘 착했어? 발길질 안 했어?”양시연은 부드럽고 차분
연재혁이 연정훈에게 시간을 비우라 한 건 마봉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던 연정훈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다시 양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양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문씨 가문에 간 거 아니었어요?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어요?”“아직 아버지를 만나기 전이라 그냥 너랑 얘기나 좀 하려고.”연정훈의 목소리에는 다정함과 부드러움이 묻어났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살며시 내려놓았다.“오늘 밤엔 술 마실 일 없죠?”“안 마셔도 돼. 그 자리에 계신 분들은 차만 마시거든.”“그 말 들으니 안심되네요.”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난 이런 자리 자주 가는 거 별로 걱정 안 해요.”연정훈이 답했다.“나도 자주 가고 싶진 않아. 약속만 없었으면 지금쯤 집에서 널 안고 있었을 텐데.”“정말 한심해요.”양시연은 핀잔을 주며 말했다.“집 생각 그만하고 일에 집중해요.”“집중이 안 돼. 지금 당장 유턴해서 집에 가고 싶어.”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러다 당신 아버지께 혼나면 어쩌려고요?”연정훈은 눈을 감고 양시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까지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창문에 톡톡 빗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빗소리가 퍼졌다.양시연은 우산 꼭 챙기라며 몇 번이고 당부했지만 연정훈에게 그 잔소리는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그녀가 부승원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며 통화를 끝내야겠다고 했을 때 연정훈은 괜히 기분이 상했다.“부승원이 요즘 연애한다면서 어쩜 그렇게 야근까지 열심히 해?”양시연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런 얘기 제발 하지 마세요. 지금은 의지로 버티면서 일하고 있어요. 그런 말이라도 들으면 진짜 손 털고 나갈지도 몰라요. 그러면 제가 죽어나겠죠.”"정 안 되면 내가 양원의 일을 그만두고 네 회사로 가서 일해줄게."“어떻게 감히 당신한테 일을 시키겠어요.”양시연은 볼이 발그레해지며 사람이 없을 때를 틈타 휴대폰 화면에 입맞춤을 가볍게 흉내 냈다.“알겠어. 밤에 집에 가서 얘기하자. 나 이제 일해야 해.”연
연씨 가문과 마씨 가문은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두 가문의 노인들은 오랜 파트너였다. 그러나 연호민이 서울로 자리를 옮기고 마씨 가문의 노인이 지방에 남게 되면서 두 가문은 점차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얼마 후 마봉식은 경기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했고 이 시점에서 두 가문이 만나는 이유를 연정훈은 잘 알고 있었다.연정훈은 원래 많은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지만 차에서 내리기 전 그 이메일들이 그의 머리에 쌓여서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마음속은 뒤집혔다. 그는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싶었지만 연재혁을 화나게 할까 봐 휴대폰을 보지 않기로 했다.거실에 들어서자 마봉식이 차를 끓이고 있었고 그가 그들이 도착한 것을 보고 자리를 안내했다.연정훈이 마봉식에게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인사하자 마봉식은 무척 기뻐하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결혼식 날 바빠서 현장에 가지 못했었는데 언제 한번 네 아내를 데리고 와서 꼭 만나게 해줘.”“기회가 되면 꼭 같이 인사드리겠습니다.”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양측은 미묘하게 탐색을 끝내고 그제야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원래라면 마봉식이 물러나고 연재혁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컸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은 확실하지 않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다.“이 시점에서 너의 아버지의 발목을 잡힐 실수를 하면 안된다.”마봉식이 그렇게 말하자 연정훈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조이현의 고소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봉식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가 말한 것은 연정훈에게 중요한 사람들을 간과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다.실제로 이런 일들을 다루는 것은 연재혁과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연정훈은 아직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옆에서 듣고 가끔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뿐이었다.연정훈의 마음속은 여전히 이메일을 모두 읽어보고 진짜 상황을 파악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중도에 마봉식이 그에게 물었다.“네 장인어른 몸 상태는 어떠냐?”양석진과 양지원의 결혼은 그들 사이에서 비밀이
양시연은 회의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연정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부승원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하아. 연 교수님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네.’양시연은 침을 삼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도 덜 쓰일 거로 생각하며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한편 연정훈은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뜻밖에도 연결되지 않았다.잠시 화면을 응시하던 연정훈은 다시 두 번 더 전화를 걸었으나 여전히 받지 않았다.양시연에게 당장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마음이 순식간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연달아 네 번이나 전화했으니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 번쯤 받을 법한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렇게 고민하던 순간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고 이번엔 마침내 연결되었다!“시연아!”“대체 무슨 일이에요?”양시연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나 지금 회의 중이에요. 부승원 씨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고요.”“할 말이 있어.”“알았어요. 그러니까 얼른 말해봐요.”연정훈은 입을 뗐지만 정작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양시연이 답답한 듯 다그쳤다.“빨리 말해요.”“나...”“됐어요. 그렇게 급한 거 아니면 집에 가서 이야기해요. 나 먼저 끊을게요. 안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시연.”양시연이 전화를 뚝 끊어버리자 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눈을 감고 잠시 말없이 숨을 골랐다.밖에서는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어 자리를 비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양시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 수도 없었고 마음은 공처럼 이리저리 튕겨 다니며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도련님?”임성원의 목소리인 것을 확인한 연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뭐 하러 들어왔어?”“도련님 혹시 배탈 나신 건 아니죠?”연정훈은 황당했다.“...”“나 괜찮아.”“정말 괜찮으세요? 약이라도 챙겨드릴까요?”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며 단
“사무실로 올라갈게.”연정훈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분위기가 마치 따지러 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살짝 웃으며 다시 서류를 살펴보았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양시연은 당연히 연정훈일 거로 생각하며 그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그러나 돌아보니 문을 연 사람은 몇몇 임원들이었다.회의가 끝난 직후라 개별적으로 이야기할 일이 있을 법도 했지만 양시연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앞장선 사람은 익숙한 인물 권준호였다.예전에 주지혁 남매에게 몰려 궁지에 빠졌던 그녀는 원칙을 저버리고 연정훈을 찾아가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그에게 키스를 했는데 사무실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주지혁 부부 외에 그중 한 명이 바로 권준호였다.몇 년이 흐르고 권준호는 해외 파견을 마치고 돌아왔으며 그사이 양시연은 그의 대표 부인이 되어 있었다.권준호는 사람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 그때의 일은 언급하지 않았고 양시연에게는 늘 공손했다. 덕분에 양시연도 그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이야기를 나누던 양시연은 연정훈이 곧 도착할 거로 생각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임원들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누군가 일어나 문을 열려 하자 양시연이 손짓으로 제지했다.“앉아계세요. 제가 열게요.”그녀는 이미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었고 문을 열자 급하게 걸어오던 연정훈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양시연이 갑자기 시야에 나타나자 환한 미소로 그를 마주했다.짧은 순간 연정훈의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휘둘렸고 인연이 정말 신기하다고 느꼈다. 사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미 얽혀 있었고 누군가가 방해하려 해도 결국 연정훈은 양시연을 다시 만나 그녀의 손을 잡을 운명이었다.양시연과 함께할 운명이라 믿어지는 그 순간 그의 마음은 벅찬 감동으로 가득 찼고 온몸이 그 감정을 받아들였다.마침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이 감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양시연이 말할 틈도 없이 고개를 숙여 입술
양시연은 무슨 일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순간 얼어붙었다.연정훈은 너무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만약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다면 아예 품속에 파묻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정신을 차린 양시연은 무의식적으로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무슨 일이에요?”‘설마 밖에서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온 건가?'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고 있었다.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양시연은 바로 물어보지 않고 조용히 손을 그의 등에 올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잠시 후 연정훈은 그녀를 조금 놓아주었고 양시연은 그의 턱에 입술을 가볍게 닿게 한 뒤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연정훈은 얼굴을 돌려 깊은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았다.너무 가까워서 연정훈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건물 안은 에어컨이 세게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급히 달려왔다 해도 이렇게까지 땀을 흘릴 리 없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너무 조급했던 것일 것이다.양시연은 다시 한번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아무 말 없이 연정훈의 손을 잡아 책상 쪽으로 데려갔다.그리고 티슈를 꺼내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이렇게까지 급해하는데 도대체 무슨 큰일인가요?”연정훈은 여전히 양시연을 깊게 바라보았고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양시연은 살짝 놀랐다.‘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이런 거야?’양시연이 묻기도 전에 연정훈은 그녀를 자기 가슴과 책상 사이로 끌어당겼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이마를 양시연의 이마에 맞대며 다행이라는 듯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안도감과 기쁨이 느껴졌어. 다행히도 하늘은 내 편이었던 거야.’양시연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지만 연정훈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뭔데 그래요? 나한테 말해 줘요. 이렇게 말 안 하면 나도 초조해진단 말이에요.”연정훈은 천천히 눈을 뜨고 그녀
얼떨결에 기차에 탄 양혁수는 왠지 뾰로통했다.이건 양혁수의 추억 여행이었으나 변여름이 양혁수보다도 에든베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으며 본인과 양시연 사이의 이야기도 속속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역에 도착하자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양혁수는 추위에 절로 몸이 움츠러지고 옷매무새를 다시 여몄다.그러나 변여름은 그 옆에서 한껏 과장하여 감탄하고 있었다.“여기 너무 예쁜데요?”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에든베타의 눈밭은 양혁수가 다녔던 여행지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다.그런데 변여름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그래서 오빠가 이곳에서 시연 언니를 좋아하게 됐나 봐요.”“나였어도 시연 언니한테 반했겠다.”“...”방금까지 센치하던 기분이 또 와장창 깨져버렸다.오늘 일정에도 마중을 온 사람이 있었고 변여름은 아예 지낼 곳을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마을로 골랐다.“거긴 여행객이 많아서 남은 방이 많지 않을 거야.”양혁수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은 패드로 남은 방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요. 남은 방이 없긴 하지만 오빠가 그곳을 많이 그리워할 테니 기사더러 빙 둘러대려고 하려고요. 오빠 추억 여행 좀 하게요.”“...”양혁수가 싸늘한 표정으로 변여름을 바라봤다. 이젠 변여름이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는 게 확신이 들었다.용산 거리를 지나쳐 눈이 뒤덮인 에든베타 건축물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이 분위기에 알맞은 노래를 틀어 양혁수가 한껏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했다.그러나 익숙한 풍경을 보며 양혁수가 든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아, 추워 죽겠네.’그때,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집을 지나치게 되었고 주변엔 온통 눈이 쌓여 있었으며 여행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양혁수는 눈을 반짝이며 그 풍경을 눈에 담으려 애썼고 왠지 이 집이 몇 년 전보다 많이 낡았고 정원도 생각보다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기억 속의 집은 늘 해가 잘 들고 넓은 곳이었는데
밤 열두 시 반.양혁수는 침대 왼쪽 끝에 누웠고 오른쪽엔 변여름이 누워 있었다.아까 변여름은 대화를 하자며 양혁수를 기어코 침대에 데리고 왔다.평소에 말수가 적은 변여름이었지만 대화를 이어가야 할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수다스러울 수 있었다.지금도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최근에 봤던 아재 개그를 알려주고 있었다.“너 예능도 봐?”양혁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일반적으로 제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이라면 예능 많이 보잖아요.”또 자신을 일반적인 소녀로 묶으려 애쓰는 모양이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왜 굳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변여름의 대화에 꽤 흥미가 생겼기에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래. 무슨 아재 개그인데? 너무 썰렁하면 안 들어줄 거야.”변여름이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딸기가 회사에 잘리면 뭐가 되는지 알아요?”양혁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백수.”“아니요. 딸기시럽이요.”양혁수는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왜?”변여름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딸기가 실업했으니까 딸기시럽이죠!”“...”양혁수는 썰렁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 어떤 개그보다도 자신을 웃기려 애쓰는 변여름이 가장 재밌게 느껴졌다.“나 다른 아재 개그도 알아요.”변여름은 은근슬쩍 양혁수에게 다가갔고 거의 딱 붙기 직전이었다.양혁수는 재빨리 이를 발견하며 변여름을 다시 원위치로 밀었다.“자꾸 선 넘으면 네 방으로 확 던져 버리는 수가 있어.”양혁수가 변여름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대화하자며 데려와 놓고 자꾸 수작 피울래?”변여름은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이불을 고쳐 덮었다.“너무 멀어서 오빠한테 잘 들리지 않을까 봐 그랬죠.”“나 겨우 서른이야. 이 정도 거리에서 듣지 못할 정도 아니거든?”“오빠 귀가 먹는다고 해도 난 오빠 옆에 있을 거예요.”변여름은 시도 때도 없이 플러팅을 했고 양혁수는 거의 무감각해졌다.“그만해.”양혁수는 이불을 쭉 당겨 변여름의 얼굴을 가렸다.
양혁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변여름이 마침 가장 외롭고 힘든 시간에 나타나 줬다는 것이었다.화로의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실에서 변여름과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양혁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이렇게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는 기분은 스물다섯이 넘은 뒤로 다시 느낄 수가 없었다.스물다섯 전의 양혁수는 출생의 비밀도 몰랐고, 양시연을 만나지도 못했으며 총으로 제 친어머니를 쏴 죽이는 일도 겪지 않았다.변여름이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해 주고 아무 이유 없이 옆을 지켜주는 걸 보며, 어쩌면 변여름이라면 최악의 모습을 들켜도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자 양혁수도 변여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대체 뭔지 고민하게 되었다.‘내가 정말 여름이를 좋아하는 건가? 아닌데...’결국 양혁수는 본인이 변여름의 아낌없는 사랑에 점점 응석받이가 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시간이 차츰 흐르고 변여름의 뜨개질도 점점 스웨터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정말 밤을 새우기라도 할까 봐 밤 열한 시가 되자 서둘러 변여름을 제지하며 잠을 잘 시간이라 다독였다.변여름은 아까 호박죽을 끓였고 양혁수를 시켜 가스레인지를 끄고 두 그릇 떠오라고 부탁했다.양혁수가 고분고분 두 그릇을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는데 변여름이 제 방에서 꼬물거리는 게 보였다. 옆방의 변여름 침대에 베개 하나가 사라졌고 그건 양혁수의 침대 위에서 다시 포착되었다.‘쯧. 또 시작이군.’양혁수의 발걸음 소리에 변여름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몸을 돌려 호박죽을 받아쥐었다.그리고 테이블로 걸어가 겉으론 침착한 얼굴을 하고 한 입 떠먹었다.양혁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리다가 또 제 침대를 가리켰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변여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오빠랑 같이 자려고요.”“꿈도 꾸지 마. 얼른 베개 들고 네 방으로 돌아가.”“새벽에 몰래 오빠 방으로 기어들어 오는 건 너무 변태 같잖아요.”그 말에 양혁수는 웃음이 터졌다.
화로에는 장작이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들려오고 거실에는 그 소리를 제외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양혁수는 도라미 인형을 베개 삼아 누워 맞은편에서 열심히 뜨개질하고 있는 변여름을 바라봤다.“너 정말 뜨개질할 줄 알아?”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뜨개질하는 방법 다 익혔고 생각보다 쉬워요.”그리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쏘아붙였다.“오빠, 도라미 베개로 쓰지 마요!”양혁수는 상체를 살짝 들며 말했다.“좀 쓴다고 안 망가져.”그러자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를 보였고 양혁수를 혀를 차며 어쩔 수 없이 인형을 머릿밑에서 빼냈다.변여름은 그제야 다시 자리에 편하게 기대 다시 뜨개질에 집중할 수 있었다.“오늘 밤을 새우면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정말?”양혁수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이건 굵은 실이라 빠르거든요.”꽤 전문가처럼 느껴지는 말투에 양혁수는 긴가민가해졌다.그래서 그 옆에 앉아 모바일 게임을 하며 변여름의 완성품을 기다렸다.변여름은 스웨터 말고 먼저 목도리를 뜨려고 했는데 양혁수는 변여름이 스웨터를 만드는 줄만 알고 이렇게 비아냥거렸다.“이게 스웨터라고? 왜 이렇게 네모난 거야?”“스웨터는 너무 어려워서 담요로 바꾼 건가?”그리고 양혁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여름아, 오빠가 하나 조언해 줄까? 차라리 담요 두 장 만들어. 그다음에 가위로 옷 모양으로 자르고 테두리만 꿰매면, 그러면 그게 스웨터잖아.”“...”변여름은 처음으로 양혁수가 말이 많다고 느껴졌다.“담요를 그렇게 자르면 실이 다 풀린다고요!”“본드로 붙이면 되지.”“...”‘정말 못 말려.’양혁수가 말이 많아진 건 꽤 진지해 보이는 변여름의 모습이 조금 웃기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변여름은 무언가 집중할 때면 연구 실험을 하듯 한껏 굳은 표정이었는데 뜨개질할 때도 그 표정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그리고 양혁수도 변여름이 목도리를 뜨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회색 실을 보아하니 본인의 몫으로 뜨고 있는 것
고작 인형 하나 받았다고 변여름의 입이 귀에 걸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혁수의 옆에 찰싹 달라붙던 변여름은 어느새 인형을 들고 뛰어다니며 평범한 소녀처럼 사진 찍기에 바빴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찍은 사진을 아마 노지혜에게 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사진을 찍고 변여름은 해가 잘 드는 곳을 찾아 도라미를 눕히고 얇은 이불까지 덮어줬다.“오빠, 저녁에 먹고 싶은 거 있어요?”변여름의 관심사가 다시 양혁수로 돌아오고 있었다.양혁수는 베란다에 앉아 국내 회사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양혁수가 변여름의 질문에 대충 대답을 하자 변여름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옷을 든든히 입고 출입문 앞에 선 변여름을 보고 양혁수가 불러세웠다.“어딜 가려고?”“마트요.”“이렇게 추운 날에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오빠가 소갈비찜 먹고 싶다면서요. 그건 양파가 꼭 들어가야 하는데 집에 없어요.”양혁수는 아까 일에 정신이 팔려 본인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잊었고 소갈비찜에 양파가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 있는 재료로 만들어 먹으면 돼.”“안 번거로워요. 마트가 멀지도 않고요.”고집 피우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나 양파 별로 안 좋아해.”“그러면 빵가루 사와 내일 빵 구워줄게요.”‘쯧. 어떻게든 나가겠다는 생각이군.’양혁수는 성큼성큼 걸어가 변여름의 목도리를 풀어 헤쳤고 고개를 숙인 채로 타이르듯 말했다.“집 밖에선 어른 말 들어야 한다고 네 오빠가 안 가르쳤어?”변여름은 순수 무구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고 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심심하면 책 보거나 드라마 봐. 교수님이랑 프로젝트 의논을 하든지. 왜 종일 나 뭐 먹일 건지만 고민하고 있어?”“책이나 드라마, 그리고 프로젝트 의논을 해서는 오빠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잖아요.”양혁수는 목도리를 아예 훌렁 잡아당겨 소파에 곱게 눕혀진 도라미 위로 던졌다
어디 도라에몽뿐이겠는가? 양혁수는 변여름이 신기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고개를 돌리자 뿌듯한 표정의 변여름이 칭찬을 갈구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리고 옆자리 변여름의 테이블 위로 여러 장의 카드에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게 보였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 번이고 다시 그린 것 같았다.양혁수는 저도 모르게 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캐릭터 사진을 보며 카드에 옮겨 그리는 장면이 떠올랐다.‘음. 드디어 마음에 드는군. 이걸 오빠한테 보여줘야겠어!’양혁수는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고 대답 대신 펜을 찾아 도라에몽에게 귀를 두 개 그린 뒤 그걸 다시 변여름에게 돌려줬다.카드를 돌려받은 변여름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이건 무슨 의미지?’양혁수는 변여름이 애니메이션에 큰 관심이 없고 도라에몽을 그린 것도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의아한 변여름을 내버려두고 양혁수는 문을 닫고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맞은편의 변여름이 잠잠한 걸 보니 도라에몽에게 정말 귀가 있는지 없는지 검색하고 있는 것 같았다.양혁수가 수프를 다 먹고 나니 변여름이 카드 한 장을 틈새로 보냈다.[도라에몽에게 도라미라고 여동생이 있었네요!]‘어릴 때 애니메이션도 안 봤냐 정말...’양혁수는 카드를 테이블 위로 내려두고 여유롭게 칵테일을 즐겼다.편하게 먹고 즐기고 착륙 전에 두 사람은 샤워까지 마치고 비행기에서 내렸다.에든베타로 직행하는 비행기가 없어 두 사람은 일단 뉴델리에서 하룻밤 묵고 이튿날에 다시 떠나기로 했다.마중 온 사람을 찾아 차에 타려는데 마침 백인 가족이 두 사람을 지나쳤고 가족 성원 중 가장 어린아이가 인형을 안고 있는 게 보였다.변여름은 바로 양혁수의 팔을 살짝 꼬집으며 그곳을 바라보게 했다.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돌려 확인했고 표정을 찡긋거렸다.‘도라미네?’유럽 쪽엔 아시아권 애니메이션이 크게 유행하지 않았고 테마파크도 아닌 공항에서 캐릭터를 만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그런데 비행기에서 막
“뭐가 더 좋냐고?”양혁수가 변여름의 손을 떼어내며 낮게 말했다.“내가 너 보고 반가워하길 바랐냐?”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떨어뜨렸다.“혹시... 안 반가웠어요?”“그럼 어떤 기분이었는데요?”양혁수는 자세를 편하게 고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싶었어.”변여름은 말없이 양혁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거짓말.”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방금 나랑 눈이 마주쳤을 때, 오빠 눈이 반짝거렸어요.”“사람 눈이 무슨 조명이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변여름은 입을 삐죽거렸다.‘그래 안 반가워하면 뭐 어때. 내가 이렇게 반가운데.’변여름은 고민도 하지 않고 다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감고 찰싹 들러붙었다.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변여름에는 자꾸 마음이 약해졌고 어느새 속수무책이 되어버렸다.그때 지나가던 스튜어트가 변여름을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이어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빨리 일어나.”변여름은 꼼짝도 하지 않고 품에 가만히 안겨있었다.“...”스튜어트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바로 낮은 소리로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닌지 물었다.양혁수는 고개를 숙여 변여름과 시선을 마주했다.‘네 생각엔 내가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변여름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로 문을 열고 문밖의 스튜어트를 바라봤다.당황한 스튜어트를 보며 양혁수는 어이가 없어 눈을 감았다.변여름이 스튜어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뿐더러 한참 뒤 다시 돌아온 변여름의 품에는 담요가 들려 있었다.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양혁수의 품에 안겼고 직접 양혁수의 손을 움직여 자기 허리에 감았다.양혁수는 벌써 어깨가 시큰거렸고 아직 착륙까지 열 몇 시간이나 더 있었는데 계속 이러다가는 어깨가 끊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한참 고민하다가 양혁수가 자세를 고쳤다.“여름아.”“네?”다정하게 이름 한번 불렀을 뿐인데 변여름이 번쩍 고개를
변백호는 양혁수의 말을 듣더니 눈썹을 살짝 올렸다.“변여름이 너한테 잘 가라고 했다고?”양혁수는 옆에 서서 트렁크에 짐이 실리는 걸 지켜보다가 뒷좌석으로 향했고 변백호가 바로 그 뒤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두 팔짱을 척 끼더니 단정 지어 말했다.“그 꼬맹이, 지금 너 낚는 중이야. 내 생각엔 벌써 비행기 안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사실 양혁수도 방금까지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변여름은 그 연락을 끝으로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들러붙던 변여름의 연락이 갑자기 딱 끊기니 양혁수도 괜히 기분이 뒤숭숭해졌다.변백호의 말에 양혁수는 마음이 조금 동요했으나 그래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잘 좀 챙겨줘. 우리 여름이 또 여기저기 도망 다니게 하지 말고.”변백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제 마음 꽁꽁 숨기는 것도 참 양혁수답다니까.’그래도 변혁수는 이 말을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자존심 강한 양혁수의 체면을 모르는 척 지켜주기로 했다.그리고 오후 네 시가 조금 넘는 시간에 두 사람은 공항에서 헤어졌고 양혁수는 비행기에 올랐다.퍼스트 클래스 좌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앞뒤로 천천히 지나가며 확인했지만, 변여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도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승무원이 몇 번이나 다가와 필요한 게 있는지 물었지만, 양혁수는 건성으로 넘겨버렸다.눈을 감아도 마음은 불편했고 딱히 뭘 하기도 귀찮아 그냥 대충 시간이나 보내려 했다.그때, 바로 옆자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유창한 스페인어로 식사를 주문하고, 이어 샤워 예약까지 잡는 목소리에 양혁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가림막을 내리고 상대와 시선을 마주했다.이 목소리의 주인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예상이 갔다. 변여름이었다.변여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고 당연하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었다.양혁수는 이게 무슨 감정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변여름을 몇 번 힐끔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양혁수가 어제 에든베타에 가고 싶었던 건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린 탓이었고 실은 아직 그곳으로 향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지금 그냥 떠나는 것은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변여름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그는 어른이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했다. 무엇보다 순간적인 충동에 휘말렸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변여름은 아침 일찍 나간 뒤 몇 시간째 돌아오지 않았다.떠나겠다고 해놓고도 한낮이 되도록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이 양혁수는 조금 어색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집을 비운 둘째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했다.한 상 가득 차려진 식사 자리였지만 변여름만 보이지 않았다.마크가 갑자기 양혁수의 왼쪽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함은화가 곧바로 타일렀다.“삼촌이라고 불러야지.”“삼촌, 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마크는 즉시 호칭을 바꾸었다.양혁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침묵했다.“...”잠시 후 그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추워서.”“집은 안 추운데요.”하니가 반대쪽에서 다가와 그를 유심히 살폈다.“땀까지 나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칼과 포크를 내려놓고 하니를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천천히 드세요.’라고 한 마디 남기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거실 창가로 향했다.두 꼬맹이는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다 마크가 마침내 그의 목에 난 자국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다쳤어요.”하니도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보라색이에요. 엄청 커요.”양혁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멀리서 변백호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엄격한 표정으로 두 아이를 불렀다.식탁에서 함은화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행히 너희들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속상해하지 않으시겠네.”변여름의 셋째 형수는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