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안시연은 주지혁과 생리에 관한 얘기를 했었다. 하지만 주지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안시연은 그저 그를 붙잡기 위해 말한 것이라고 했으니 주지혁도 그 말을 믿었다.하지만 안시연의 행동을 보면서, 주지혁은 안시연이 임신했다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그 생각에 주지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그는 손도 대지 않은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니.”주지혁은 순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안시연!”애증이 가득한 그 이름이 주지혁의 입에서 뱉어져 나왔다. 안시연은 요즘 위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저녁에 술까지 마셨으니 토를 할 법도 했다.몸을 일으킨 안시연은 주지혁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차갑게 얘기했다.“꿈꾸지 마. 난 해외로 나가지 않을 거야. 경인은 내가 어릴 때부터 살아온 곳이야. 난 어디도 가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안시연이 그대로 돌아섰다.주지혁은 따라가지 않았다.그는 멀어져가는 안시연을 보면서 붉어진 눈으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미친 것처럼 핸들을 쾅쾅 내리쳤다. 고막을 찢을 듯한 클랙슨 소리는 꽤 듣기 싫었다.지나가던 사람이 창문을 두드려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주지혁은 크게 고함을 질렀다.“꺼져!”행인은 깜짝 놀라 미친놈이라고 욕하면서 지나갔다.주지혁은 분노를 뿜어내다가 맥이 풀려 조수석에 누웠다.그는 차 천장을 보면서 안시연과 함께했던 나날들을 떠올렸다.떠올릴수록 더욱 그리워졌다.안시연... 그의 안시연...그래, 안시연은 주지혁의 것이다.임신을 했어도, 더러워졌어도 안시연은 주지혁의 여자다.안시연의 날개를 꺾고 발을 묶어 주지혁 밖에 볼 수 없도록 하면 된다.그때가 되면 주지혁은 낙태 수술을 시킬 것이다.안시연은 주지혁의 아이만 임신해야 한다! 안시연은 주지혁의 여자니까!그렇게 생각한 주지혁은 얼른 이성을 찾고 조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조이현은 매우 기뻤다. 금방 그녀를 바래다준 후 또 전화까지 해서 안부를 전하다니, 얼마나 다정한
“대표님, 저 찾으셨나요?”안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임유정이 정신을 차렸다. 어젯밤 조이현과 한 통화를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임유정은 서류를 꺼내며 담담하게 말했다.“이 서류 차 대표님 사무실로 보내요. 차 대표님 사인이 필요해요.”임유정은 건네받으며 내용을 힐끔 스캔했다.아주 일반적인 의향서였다.일반적으로는 온라인으로 결제하는 서류에 해당하였다.하지만 어젯밤 일로 안시연은 임유정에게 경각심을 더 세웠지만 티 내지 않고 서류를 잘 챙겼다.“언제까지 제출하면 될까요?”임유정이 말했다.“오늘 퇴근 전이요.”“네.”안시연이 공손하게 대답하더니 몸을 돌려 사무실에서 나왔다.그때 임유정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안시연이 다시 몸을 돌렸다.“다른 지시 사항 있으신가요?”임유정이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더니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그냥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길래. 혹시 어디 아파요?”안시연은 가식적인 임유정의 태도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관심 감사합니다.”“다행이네요.”둘은 서로 미소를 주고받았다.안시연은 그제야 문을 열고 나왔다.안시연이 나가자마자 임유정은 얼굴이 굳어졌다.솔직히 말해서 임유정은 연정훈이 그렇게 쉽게 여자를 임신시킬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시연의 여우 같은 얼굴을 확인하니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원래는 바로 연정훈의 어머니 김세연에게 알리려 했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것 같아 고민 끝에 먼저 시험해 보기로 했다.그 시험에 이용하기 좋은 사람이 바로 차시훈이었다. -안시연은 임유정과 차시훈을 똑같이 경계했다.같은 여자지만 안시연에게 차시훈이나 임유정이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안시연은 차시훈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싫었기에 LC그룹으로 가기 전에 차시훈에게 연락했다.“지금 바쁘신가요?”“괜찮아요. 회사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서 기다릴게요. 커피도 한잔 같이할 겸요.”“네, 그럼.”전화를 끊고 나서야 안시연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커피
안시연이 걸음을 멈췄다.“뭐라고요?”주효진은 진작에 조이현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안시연이 연정훈을 꼬셨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효진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 올라온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안시연이 생각나 순간 화를 참지 못했다.주효진은 심호흡을 하더니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안시연에게 말했다.“발랑 까진 여자가 많다고요.”안시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안시연은 오늘 화장에 조금 힘을 주었기에 평소와 다르게 청초함보다는 여성미가 더 돋보였고 눈동자가 매우 매혹적이었다.주효진이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예상한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맞아요. 참 발랑 까진 여자가 많아요.”안시연은 이렇게 말하더니 주효진을 아래위로 훑으며 눈으로 욕했다.주효진은 안시연이 자기를 비웃을 줄은 몰랐기에 순간 눈동자가 커졌다.하지만 주효진이 화를 내기도 전에 안시연은 오만하게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그녀를 지나쳤다.주변에 사람이 많았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기에 주효진은 일을 크게 벌일 엄두가 나지 않아 안시연을 그냥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일단 입씨름에서라도 이겼으니 안시연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하지만 그래도 살 도리는 해야 했다.약속 시간에 맞춰 LC그룹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차시훈을 기다렸다.밥때가 거의 되었기에 차시훈은 자리에 앉자마자 일보다는 안시연에게 밥을 사겠다고 했다.안시연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 점심에는 샐러드만 먹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시연은 커피숍의 메뉴를 가리켰다.“괜찮으시면 제가 사겠습니다.”차시훈은 웃더니 장난기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안시연 씨는 전혀 틈을 안 주네요.”안시연은 대꾸하지 않았다.메뉴가 나오기 전에 안시연은 서류를 꺼냈다.안시연은 대수롭지 않게 사인했지만 딱히 서류를 돌려주지는 않고 오히려 그녀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 사이에 메뉴가 전부 나왔다.차시훈은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다가 실수로 커피를 건드려 절반쯤 흘러나왔다.
병원.안시연은 의자에 기대 의사의 진료를 기다렸다.테이블에 놓인 각종 보고서는 모두 아까 진행한 검사 결과였다.이승우가 옆에서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는 의사의 판단도 듣기 전에 맞은편에 앉은 부부에게 물었다.“거기 두 분, 제 친구가 심각한 부상을 당했는데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이씨 가문 일곱째라는 신분이 있는데 누가 감히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있을까.차시훈의 ‘와이프’는 성질을 내려 했지만 차시훈이 이를 억지로 잡아 눌렀다.“이승우 씨,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차시훈이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이승우는 안시연 옆으로 다가가더니 말했다.“여신님, 배상은 얼마나 받으면 될까요?”안시연은 어안이 벙벙했다.하지만 약값을 생각해 그나마 합리한 금액을 말했다.“육...(십만 원)”이승우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육천만 원이요.”안시연은 화들짝 놀랐다.차시훈은 금액을 듣고 많이 쓰리긴 했지만 그래도 한시름 놓았다.돈으로 다른 수모를 막을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다. 만약 안시연이 이승우와 썸씽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으면 안시연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젊은 여자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더 난리를 피우려 했지만 차시훈은 아예 욕설을 퍼부으며 쫓아내 버렸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안시연에게 수표를 건네주었다.한번 당한 걸로 6,000만 원을 번 안시연은 멍해졌다.돈을 받은 걸 확인한 이승우는 손을 저으며 그 두 ‘부부’에게 꺼지라고 했다.검사실이 다시 조용해졌다.안시연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녀는 이승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승우 씨, 감사합니다.”“이게 뭐라고, 별말씀을요.”이승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의사에게 자세한 상황을 확인했다.“뼈는 문제없어요. 근데 멍은 좀 들 것 같네요. 약 잘 먹고 파스 잘 붙여요.”“별문제 없다니 다행이네요.”이승우는 사람을 시켜 약을 가져오라고 하고는 안시연의 퇴원을 도왔다.주차장으로 가는 길 내내 안시연은 연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이승우가 물었다.“
차는 한 개인 별장 앞에서 멈췄다. 이승우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어갔다.“외국으로 연수 가라고 했는데 거절했다면서요?”“네...”“그럼 기대해요. 앞으로 많은 일이 일어날 거예요.”이승우는 안전벨트를 풀더니 편한 자세로 고쳐 앉고는 선글라스를 낀 채 나른하게 안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어떻게 대처할 거예요?”안시연이 말했다.“닥치는 대로 해결해야죠 뭐.”이승우가 고개를 저었다.“그런 생각으로 응하면 안 돼요. 내가 방법 알려줄게요. 단번에 해결할 방법.”안시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방법이라면 오늘 밤 바로 정훈이랑 잠자리를 가지는 거예요.”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안시연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확인한 이승우는 계속 그녀를 부추겼다.“임유정이 당신을 괴롭히면 당신은 임유정이 좋아하는 남자를 괴롭히는 거예요. 말 되죠?”안시연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임유정이 안시연 씨를 그렇게 괴롭히는 데 그냥 참고만 있을 거예요?”“사람이 참고만 살면 안 돼요. 다혈질로 살 필요도 있다니까요.”“내가 안시연 씨면 지금 당장 정훈이를 찾아서 잠자리를 가질 거예요.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게, 엄청 시끌벅적하게요. 다른 건 몰라도 임유정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으니까요.”이 말에 안시연이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이승우는 어여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내 말 틀려요?”“모르겠어요. 근데 자꾸만 나쁜 짓 하게 부추기는 것 같아요.”“그럴 리가요. 저는 다 시연 씨를 위해서 그러는 거죠.”창밖에서 누군가 지나가더니 도어를 두드렸다.이승우가 도어를 열더니 그 사람과 몇 마디 너스레를 떨었다.“그래. 먼저 들어가. 금방 갈게.”이승우는 이렇게 말하더니 안시연을 돌아봤다.“내려서 같이 밥이나 먹을래요?”안시연은 차시훈을 얼버무리기 위해 점심에 대강 샐러드만 먹었더니 지금 배고파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저는 다시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해요...”“다시 들어가기는, 지각하든 안 하든 임
안시연은 아직 벙찐 상태였다. 하지만 이승우는 그녀를 끌고 사람들 앞으로 다가갔다.그녀는 심장이 덜컹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연정훈의 시선을 피했다.연정훈 옆에 선 젠틀해 보이는 남자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정훈 씨가 자기라고 부르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처음 보는 이분은 누구세요?”이승우는 연정훈을 한번 쓱 훑더니 일부러 안시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안시연은 숨을 들이마시더니 놀란 토끼 눈으로 이승우를 쳐다봤다.하지만 이승우는 이를 무시한 채 오버하며 말했다.“자기 중에서도 제일 아끼는 자기죠. 일반적인 장소에는 아까워서 부르지도 않아요.”질문을 던진 남자는 분칠하지 않아도 빼어난 안시연의 미모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럴만하네요.”“그렇죠?”이승우는 입을 샐쭉거리더니 연정훈을 향해 턱을 빼 들며 말했다.“연 대표는 어떻게 생각해?”연정훈은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안시연에게는 아예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괜찮네.”사람들이 놀랐다.연정훈이 여자를 칭찬하는 건 드물었기 때문이다.이승우는 속으로 그런 연정훈에게 콧방귀를 뀌었다.‘괜찮네? 좋아 죽으면서.’이승우가 입을 열려는데 연정훈이 그를 쳐다보며 유유히 입을 열었다.“너랑 있기엔 아깝다.”연정훈의 허를 찌르는 공격에 이승우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화제의 중심에 있는 안시연은 말할 틈이 없었다.이 자리가 너무 불편해 살짝 몸을 돌려 이승우에게서 벗어나려 했다.그때 위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무슨 말 하는데 이렇게 즐거워요?”여자 목소리였다.그 소리를 들은 안시연은 순간 얼굴이 굳었다.여느 사람들처럼 위로 시선을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임유정이 2층에 서있었다.임유정도 안시연을 보고 멈칫하더니 이내 긴장한 듯한 기색이 스쳤다.안시연은 당하지 않아도 될 변을 당한 걸 생각하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승우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이에요. 한 방 제대로 먹어야죠.
“뼈는 안 다쳤대요. 큰 문제 아닙니다.”안시연이 대답했다.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비용은 회사에 청구해요.”“감사합니다. 대표님.”무미건조한 대화였다.이승우는 성에 차지 않는 듯 앞으로 걸어와 말했다.“비용만 처리해 주면 끝인가? 연 대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은데? 우리 자기 다친 거 안 보여? 심각한 문제 아니라 이거지?”이승우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안시연의 옷깃에 갖다 대더니 단추를 풀려는 시늉을 했다.안시연이 화들짝 놀랐다.맞은편에 있던 연정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옆에 선 사람도 이를 말렸다.이승우는 중도에서 동작을 멈췄다. 그는 주위를 빙 둘러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연정훈을 바라봤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진짜 보여주기라도 할까 봐요? 그러기엔 너무 아깝지.”이승우는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참 꿈도 야무져.”구경하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안시연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정훈 쪽을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연정훈은 이미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이리 와 앉아요.”이승우는 그제야 장난을 멈추고는 그녀를 소파로 데려가 음식을 이것저것 적지 않게 집어줬다.안시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임유정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친절하게 다친 상황에 대해 물었다.“약은 받았어요?”안시연은 덤덤한 태도로 대꾸했다.임유정도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안색이 별로인데 다른 불편한 데는 없어요? 약은 함부로 먹으면 안 돼요. 아는 한의사가 한 분 계시는 데 조금 있다 같이 가볼래요?”“의사가 준 약인데 왜 먹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이승우가 유령처럼 나타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임신한 것도 아닌데.”임신이라는 두 글자에 임유정은 가슴이 조여왔다. 하여 얼른 안시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안시연은 고개를 들더니 이승우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장난이 짓궂으시네요.”그 말은 임신을 부정하는 것과
이승우가 말하면 할수록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고 분위기도 야릇해졌다.남자들끼리 모여있으면 평소에 얼마나 점잖든 간에 살짝만 긴장을 풀어도 화제가 이상한 쪽으로 튀게 된다.안시연은 화제가 계속 연정훈의 입에 난 상처를 둘러싸고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자 핑계를 찾아 자리를 비켰다.“야야, 그만해. 아가씨가 부끄러워하잖아.”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그러면서 임유정을 쳐다봤다.“임유정 씨야 뭐 우리랑 하도 오래 봐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지만 말이야.”임유정은 허를 찌르는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수줍어하는 안시연과 다르다는 건 임유정의 낯이 두껍다는 말과도 같았다.임유정은 입을 앙다물고는 말했다.“어쩔 수 없죠. 어떤 사람인지 다 아니까 습관이 된 거지.”이승우는 입을 샐쭉거렸다. 임유정의 민낯을 까밝히기 귀찮은 듯한 눈치였다.그의 앞으로 연정훈이 그를 등진 채 살짝 고개를 돌리고 창문 쪽을 바라봤다. 그 각도에서 마침 떠나가는 안시연을 관찰할 수 있었다.안시연은 화장실에서 나왔지만 그렇게 빨리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이승우가 그렇게 쉽게 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이승우는 나쁜 마음은 없어 보였지만 장난기가 너무 심했다.이렇게 생각한 안시연은 주방으로 들어가 직접 야채 과일 주스를 한잔 만들려고 했다.과일을 잘 썰어 믹서기에 넣었다.그러고는 싱크대에 기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돌아보니 연정훈이었다.안시연은 약간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이내 연정훈의 태도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아까 밖에서 봤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왠지 모를 실망감이 그녀를 덮쳤지만 이내 다시 차분해졌다.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물 뜨러 왔어요?”“커피.”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원두를 찾았다.하지만 몸을 돌리자마자 아까 연정훈이 술을 마셨던 게 떠올랐다.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금방 술 마셔놓고 또 커피 마시게요?”연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안시연은 믹서기를 가리키며 말했다.“야채 과일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