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연과 연정훈의 냉전은 여 아주머니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처음에 여 아주머니는 무조건 양시연 편을 들며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며칠이 지나도 연정훈이 전혀 화를 내지 않자 여 아주머니는 오히려 민망해졌다.여 아주머니는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처음에는 불평했지만, 점점 좋은 말들로 대화를 이어갔다.“제 생각엔 연정훈 씨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런데 시연 씨가 좀 무심한 것 같아요. 아침 식사할 때도 표정이 안 좋고 연정훈 씨가 여러 번 말을 걸려고 해도 휴대폰만 보면서 눈길도 주지 않더라고요.”양시연은 그 말을 우연히 듣고 일부러 가볍게 기침했다.여 아주머니는 뒤를 돌아 민망한 듯 웃음을 지었다.양시연은 전화가 끊기자 일부러 질투하는 척하며 한숨을 쉬고 불평했다.“아주머니는 엄마 쪽 분인데 왜 외부인 좋은 말만 해요?”“외부인이라니요?”여 아주머니는 양시연을 노려보며 말했다.“그건 시연 씨의 남편이에요. 우리 집안 식구이죠!”양시연은 웃으며 들고 있던 차를 내려놓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아무 문제 없어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정말요?”“네. 그냥 정훈 씨를 살짝 놀리는 중이에요.”여 아주머니는 말없이 양시연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좋은 걸 배워야죠. 아씨처럼 남편을 괴롭히고...”양시연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엄마가 아빠를 어떻게 괴롭히는데요?”“에이. 그게 중점이 아니잖아요.”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부엌을 빠져나갔다.사실 그녀와 연정훈의 냉전은 진지한 것도 아니었고 큰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애들처럼 서로 삐쳐 있는 상태였다.연정훈이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은 알고 있었다.하지만 왜 양혁수 이야기만 나오면 민감해지고 긴장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전에 그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정훈이 앞으로도 무슨 일이 생기면 벙어리처럼 입을 닫아버릴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양시연은 냉전을 좋아하지도
“연정훈 씨에게 삼계탕을 끓여주세요. 연정훈 씨가 돌아오면 아주머니께서 직접 가져다주세요.”양시연이 조용히 여 아주머니에게 말했다.여 아주머니는 기쁘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연정훈 씨를 생각하면서 앞에서 좀 웃어줘요. 연정훈 씨 답답해서 쓰러지겠어요.”“싫어요. 정훈 씨가 먼저 냉전 시작했잖아요.”여 아주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양시연의 입가에 살짝 번진 미소를 보고는 이 부부가 그저 서로 장난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다지 심각한 갈등이 아니라 일상에 재미를 더하려는 정도였다.연정훈이 주차장에서 올라오자 양시연은 거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나비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나비는 기운차게 먹이를 먹으며 주위를 뛰어다녔다.둘 다 고집스러운 성격답게 연정훈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하.’연정훈은 차가운 얼굴로 계단으로 향하려다가 여 아주머니가 불려 세워졌다.여 아주머니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특별히 삼계탕을 끓였어요. 한 그릇 드셔보세요!”연정훈은 여 아주머니에게는 늘 예의를 갖추었다. 장모님 댁에서 오래 함께한 식구였기에 괜한 감정을 상하게 할 이유는 없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의 양시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쳐다보다가 그가 자신을 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여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여 아주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양시연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 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어린아이 대하듯 탕을 각각 한 그릇씩 가져다주었다.연정훈에게 그릇을 건넬 때 여 아주머니는 사실 이 삼계탕이 양시연이 부탁한 것임을 말하고 싶었지만, 뒤에서 들려온 양시연의 가벼운 기침 소리에 말을 삼켰다.마침 연정훈이 고개를 들었다.여 아주머니는 양시연을 등지고 조용히 연정훈에게 다가가 그녀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씨가 끓이라고 한 거예요.”연정훈은 잠시 멍해졌다.여 아주
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을 살폈다.연정훈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전화를 받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간간이 차가운 대답만 내뱉으며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겉으로는 업무 통화를 하는 듯 보였다.반대편에서 이승우는 갑작스럽게 엉뚱한 제안을 내놓았다.“간단하지 않아? 네가 양시연 씨한테 과감한 셀카 이미지를 보내봐. 시연 씨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지 않냐?”연정훈은 이마를 찌푸렸다.그의 첫 생각은 분명 양시연이 엔을 바로 차단할 거라는 것이었다.그러나 이승우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근데 혹시 시연 씨가 재빨리 캡처해서 저장이라도 하면? 그러면 너희가 온라인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 거지. 은근히 짜릿하지 않아?”연정훈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끊는다.”“야야야!”이승우는 급히 웃으며 말렸다.“농담이지.농담. 왜 이렇게 진지해?”“진지하게 말하자면 네가 해봐. 보내고 나면 시연 씨는 바로 너를 차단할 거야. 그동안 유지해 온 냉철하고 전문적인 이미지가 느끼한 남자 이미지로 추락하겠지. 그러면 넌 앞으로 시연 씨 앞에서 연기할 필요도 없어지잖아. 숨어있던 가상 라이벌도 제거되고.”이승우의 마지막 한마디가 연정훈을 잠시 고민하게 했다.결국 그는 전화를 끊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회사가 파산 위기에 몰린 것 같은 심각한 분위기를 느꼈다.‘그러지 마. 아직 내 손에 오지도 않았다고.'양시연은 노트북을 품에 안고 연정훈의 움직임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았다.연정훈은 서재로 향했다.양시연은 문득 궁금해졌다. 정말 중요한 일이 있나 싶어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약 15분이 지나자 그녀의 화면이 갑자기 흔들렸다.양시연이 클릭하자 한 장의 이미지가 번쩍 떴다.이미지 속에는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셔츠의 목 부분 단추 두 개가 풀려 있었고 물잔을 든 손가락의 관절이 또렷하게 보였다. 컵이 그의 입술 가까이에 놓인 상태였고 날카롭고 뛰어난 턱선이 매끄럽게 드러나 있었다.물 마
서재에서.연정훈은 같은 자세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눈을 감고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여러 번 의심했다.‘양시연...’속으로 양시연의 이름을 되뇌며 좋아서 미소가 번지다가도 이내 이를 갈았다.‘진짜 당해낼 수가 없네. 내가 졌네. 양시연한테 완전히 넘어갔어.'연정훈은 잠깐 양시연이 자신이 엔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괴롭힌 게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곧바로 침실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엔인 척하며 사진을 찍었던 옷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서둘러 옷을 벗어 던졌다.옷을 벗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버렸다. 옷만이 아니라 물을 마셨던 컵조차 그대로 버렸다.그리고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안타깝게도 손은 잘라버릴 수 없네.’다행히 사진은 몇 초 만에 사라지는 플래시 이미지였고 양시연도 연정훈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몇 초만 더 있었어도 양시연은 알아봤을 수도 있다.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서재에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린 뒤에야 침실로 돌아갔다.침실에서 양시연은 일련의 일을 마무리한 뒤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인터넷 속 노련한 남자들에게 한 방 먹인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는 어린 여자애를 만만하게 보거나 함부로 아무에게나 치근덕대지 못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연정훈을 걱정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혹시 회사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었다.소리가 나자 양시연은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연정훈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고 마음속으로 준비했다.양시연이 올린 게시물의 문구가 떠올라 연정훈의 가슴에 억누를 수 없는 흥분이 밀려왔다.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지만, 그의 눈빛은 설렘과 흔들림으로 가득했다.그가 침대 옆으로 다가갔을 때 방 안은 어두운 조명으로 부드럽게 물들어 있었다. 양시연은 조용히 자는 척하며 침대에 누워 있었고 연정훈 쪽으로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똑바
화해의 첫걸음은 연정훈이 내민 말이었다.“오늘 저녁에 작은 모임이 있어. 같이 가자.”양시연은 속으로 살짝 기뻐하며 유치하게 연정훈이 먼저 말을 꺼낸 거로 생각했다.“어디에서 열려요?”“우리 외삼촌이 계신 민씨 가문에서.”양시연은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할머니 쪽 친척인가요?”“응. 그분들은 경인에 잘 안 계셔. 우리가 결혼해서 온 거야.”양시연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결혼 후 신부를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젊은 세대에서는 이런 풍습이 잘 지켜지지 않지만, 연씨 가문처럼 대가족을 중요시하는 가문에서는 이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양시연과 연정훈이 신혼여행을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친척들은 며칠 동안은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약속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예를 들어 연정훈 어머니의 친정 쪽인 표씨 가문에서는 이미 약속을 잡았지만, 그쪽에서는 배려심을 발휘해 날짜를 다음 달로 미뤘다. 새로 결혼한 부부의 신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민씨 가문은 조금 이상했다. 저녁 식사 초대는 양시연에게 직접 알리지 않고 연정훈에게만 급히 약속을 잡은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나랑 같이 가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해.”양시연은 죽을 한 숟가락 떠먹으며 그를 쳐다보지 않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어떤 사람들은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정작 본인들이 저에게 눈치를 주죠.”연정훈은 어이없었다.“...”그는 이참에 변명하려 했지만,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훈 씨라고 한 적 없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연정훈은 침묵했다.“...”결국 그는 침묵을 택하고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양시연은 콧노래를 부르듯이 살짝 기분이 풀려 그가 준 반찬을 집어 먹었다.두 사람은 절반쯤 화해한 상태가 되었다.오후에는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며 여러 번 대화를 나누었고 마침내 관계는 평소처럼 정상적인 소통 상태로 돌아왔다.여 아주머니는 몇 번이나
민지연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양시연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연정훈의 뒤로 몸을 숨긴 민지연은 또 나비의 목줄을 당겼다.이에 깜짝 놀라버린 나비가 상대를 확인하고 민지연과 민지연의 개를 향해 침을 뱉기 시작했다.민지연은 화들짝 놀라며 개를 안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연정훈을 향해 말했다.“정훈 오빠, 시연 언니가 키우는 알파카 엄청 사나워요!”‘허.’‘그래봤자 네가 키우는 개보다 더 사납겠어?’양시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연정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키우는 개가 나비를 놀라게 한 거야. 나비는 정말 착한 아이야.”민지연은 씩씩대며 자기 개를 변호했고 연정훈은 이런 민지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개 목줄이나 잘해.”명령 시조의 말은 짧지만 강했다.목줄을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 협박한 것도 아니었는데 민지연은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알겠어요.”민지연이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그때, 저택에서 중년 부부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드디어 왔구나. 미리 준비하고 너희 둘만 기다리고 있었어.”연정훈이 ‘삼촌’, ‘숙모’라 호칭하며 인사를 했고 또 양시연을 소개했다.양시연도 기죽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양시연이 인사를 건네자 숙모 방미선은 바로 양시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양시연과 과거 친분이 있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고 활기찬 나비를 보며 칭찬도 했다.“어머, 너무 예쁜 알파카네. 이렇게 예쁜 알파카는 이름이 뭐야?”“나비예요.”“이름 잘 지었네. 이름이 참 어울려.”양시연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고 옆으로 밀려난 민지연이 개 목줄을 잡고 입을 삐죽이는 걸 지켜봤다.삼촌 민병식은 연정훈과 나란히 정원으로 걸어갔고 고개를 돌려 민지연에게 경고를 날렸다.“지연아, 랑이 목줄 꼭 쥐고 있어. 네 새언니 놀라게 하지 말고.”그러자 민지연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양시연은 방미선의 손에 이끌려 정원으로 향했다.그리고 나비는 아주 기세등등하게 개를 향해 침을 칵
“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방미선이 인상을 찌푸리며 민지연을 향해 한소리를 하더니 또 양시연을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아이를 오냐오냐 키워서 얘가 버릇이 없어. 시연이 네가 이해해 줘.”“괜찮아요.”양시연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 어리니 그럴 수 있죠.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닌걸요.”민지연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양시연이 만만하다고 느껴지자 민채영도 말을 얹었다.민채영의 동서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양시연더러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양시연은 그저 말없이 디저트를 먹거나 차를 마시며 민채영의 말에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민채영은 양시연이 자신의 말을 여겨듣지 않자 바로 얼굴을 구겼다.그러자 옆자리의 민지연이 잽싸게 말했다.“언니, 작은 엄마가 얘기 중이잖아요. 왜 대답을 안 해요?”양시연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자 민지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언니는 우리 정훈이 오빠랑 결혼한 게 다행인 줄 알아요. 집안 어른이 얘기 중인데 대꾸도 하지 않는다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저도 어릴 땐 이런 문제로 참 많이 혼이 났어요.”“그러게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가끔은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훈 씨가 외동이라 철없이 태클 거는 시누이가 없거든요. 시어머니도 저를 많이 챙겨주시고 절대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거든요.”민채영과 민지연은 한순간에 말문이 막혔다.정신을 차린 민지연이 바로 대꾸하려고 하자 방미선이 먼저 눈치를 채고 얼굴을 굳혔다.“자꾸 랑이만 데리고 이곳저곳 다니지 말고 위층으로 올라가 있어!”민지연은 사람들 앞에서 한 소리 듣자 바로 얼굴이 시뻘게졌다. 참지 못하고 말대꾸를 하려는 찰나 연정훈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여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방금까지 말을 쉬지 않고 하던 민채영도 조용해졌고 아예 단청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새로 생긴 프로젝트에 관해 얘기 중인데 너도
민지연은 양시연이 다른 사람을 불러 함께 알파카를 구조할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 상황에 대한 변명을 미리 생각을 해 두었다. 아무도 본인이 알파카를 개울가로 밀어 넣는 걸 보지 못했으니 말만 잘하면 누구도 본인을 탓하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양시연은 온몸이 젖도록 아무도 찾지 않고 홀로 알파카를 물 위로 끌어당겼다.민지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깜짝 놀라버린 아이들은 다른 어른들을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양시연은 나비를 안아 들고 개울가 옆의 풀밭에서 거센 숨을 내쉬었다.“언니...”민지연의 부름에 양시연이 고개를 휙 돌렸다. 개울가에서 한참 실랑이하다 보니 머리는 물에 푹 젖어버렸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지만 눈빛만은 살벌했다.그 눈빛에 민지연은 심장이 철렁했다.“뭐, 뭐예요? 알파카 스스로 개울가에 빠졌고 난 구하려고 했던 것뿐이에요!”양시연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치맛자락의 물을 쭉 짜냈다.민지연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했다.그때, 양시연이 성큼성큼 민지연 쪽으로 걸어가더니 머리카락을 낚아채고 미친 것처럼 민지연의 머리를 개울가에 처박았다.민지연은 비명을 질렀다.옆의 나비도 꽥꽥 울고 있었다.정신을 차린 민지욱은 동생을 시켜 어른을 불러오게 하고 직접 양시연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시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민지욱은 바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양시연은 고통을 참으며 민지연을 기어코 개울가에 빠뜨렸고 바로 몸을 돌려 남자아이의 옷깃을 잡고 함께 개울가에 넣어버렸다.나비는 큰 돌멩이 위로 서서 힘차게 발을 굴렀다.정원에서 뒤뜰까지 겨우 몇 걸음이면 도착할 거리였기에 사람들은 빠르게 이곳으로 몰려왔다.연정훈과 민병식이 가장 먼저 달려왔고 양시연이 민지욱을 개울가에 넣는 걸 보며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민병식은 제 손자를 끔찍하게 아꼈다. 그래서 바로 달려가 양시연을 밀어내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이 한 발 더 빨랐고 먼저 양시연의 앞을 막아섰다.“시연아!”양시연은 이제 힘에 부쳤고
탁호연은 눈앞의 탁승호를 찬찬히 살폈다.비록 멀쩡한 옷차림이었으나 금방 갈아입힌 흔적이 있었고 드러난 얼굴이나 다른 부위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친동생이었으니 탁승호의 멍청함을 탓하다가도 마음이 아파졌다.“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벌인 거야?”탁호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탁승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착하고 바르던 탁승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이건 누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상관하지 말고 돌아가.”탁호연은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우리 가문 모든 사람이 양씨 가문에서 먹고 사는데 네가 그런 일을 벌인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망한다는 생각 안 해봤어?”탁승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할머니 때문에 널 보러 온 거야. 그러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알고 있는 거 모두 말해! 다행히 아가씨 모자가 멀쩡하니 넌 잘하면 살 수 있을 거야!”양시연 모자가 평안하다는 말에 탁승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해 미안하네.”“멍청한 놈!”탁호연은 화가 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양민아가 시킨 거지? 맞지?”탁승호는 대답이 없었다.“대체 왜? 전에 양씨 가문에서 지낼 때 양민아가 너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준 적 있어?”“누나는 몰라!”탁승호는 탁호연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없다는 듯 천장의 불빛을 직시하며 말했다.“모두가 날 무시해도 그 사람은 달랐다고.”“우리 사이엔 아이가 있어. 이번에 복수만 제대로 해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탁호연은 너무 화가 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너 정말 제정신이니? 그 사람이 뭘 잘못 먹었다고 네 아이를 낳아줘?”그 말에 탁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거봐, 누나도 날 무시하잖아.”“...”‘이렇게 멍청한 일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널 인정하겠어?’친동생만 아니었다면 탁호연은 바로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그
반우희는 세 동생과 함께 병실을 찾았다. 승주의 목에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었고 일부러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습이 꽤 우스꽝스러웠다.네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병실안의 모든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양석진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번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으니 다들 감격해했다.표세연은 직접 의자를 당겨와 양시연의 옆자리에 두며 네 명 더러 편히 앉게 했다.양석진은 지금껏 보배처럼 안고 있던 아이를 반우희에게 넘겨줬다.반우희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며 말했다.“세상에...”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너무 작고 소중해요.”반우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아이의 향기를 맡았고 또 고개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정말 아기 향이 느껴지는데요!”그 말에 사람들은 웃음이 터졌다.반우희의 뒤에 서 있던 부승원도 사차원다운 반우희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승주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기 정말 대단해요.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태어났잖아요.”그러자 동준이 바로 말을 이었다.“당연하지. 머리카락 몇 올 없으니까.”“...”양시연은 웃음이 터져버렸고 상처가 땅겨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예민하게 발견한 연정훈이 허리를 숙여 양시연에게 물었다.“아파?”양시연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너무 웃다가 상처가 땅겨서 그래요.”반우희는 바로 고개를 돌려 동준이를 교육했다.“말 함부로 하지마. 금방 태어난 아기는 머리카락이 적어도 곧 자랄 거야.”동준은 발꿈치를 쳐들고 반우희처럼 킁킁거렸다.“정말 아기 향이네요.”“...”아이의 천진난만함에 분위기는 한층 더 화기애애해졌다.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양시연이 반우희를 향해 말했다.“우리 아기가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태어날 수 있었던 건 모두 우희 씨랑 승주 덕분이에요.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좋은 이모를 알아봤어요.”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가슴팍을 툭툭 내리치며 말했다.“이모 대단하지?”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승
10시를 넘기자 병실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춰왔다.양시연은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훈도 눈을 떴다.“더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고작 몇 시간 눈 붙인 거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그러나 연정훈은 세수를 마치고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양시연에게 다가가 이마에 키스했다.“오후에 시간 봐서 또 눈 붙일게. 아버님도 오셨는데 일단 얼굴 뵙는 게 좋겠어.”양시연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지만 연정훈의 말을 듣고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리고 연정훈을 마음 아파하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좀 쉬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 시켜서 음식 주문해요. 정훈 씨도 밥 챙겨 먹고 아버님도 드셔야죠.”그 말에 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어머님이 지금껏 아버님을 굶겼을까 봐?”“정훈 씨 부모님은 생각도 안 해요?”그러자 연정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표세연은 아마도 손자에 정신이 팔려 연재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그래. 아들 노릇이나 하지 뭐.’“잠시 나갔다 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그래요...”비록 병원에서 지냈지만 연정훈이 있어 병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따뜻한 햇살이 느껴져 어제의 악몽 같은 시간은 차츰 잊혀갔다.어젠 정말 악몽 같은 하루였고 오늘은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었다.병실을 비웠다가 다시 찾은 연정훈은 양석진과 양지원, 그리고 표세연이 함께 있는 걸 발견했다. 아이는 양석진의 품에 안겨 있었고 연재혁은 보이지 않았다.부모님을 보고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조금 버거워 보였다.“움직이지 말고 편하게 누워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가 해줄게.”그 모습에 표세연이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양시연은 기운이 없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평소 무표정이던 양석진도 오늘만큼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막 태어난 손자를 안고 있는 모습이 아주 조심스러웠다.“자, 시연이한테 보여줘야죠.”양지원이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그
반우희는 얼굴이 뜨거워져 몰래 손등으로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 부승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반짝거렸다.“오늘따라 변호사님이 다르게 보여요.”“뭐가 다른데?”“칭찬을 너무...”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솔직하게 하셔서 말이에요!”“...”부승원은 과거와는 달리 부드러운 얼굴로 반우희를 빤히 바라봤다.“우리 변호사는 증거 없이 허튼 말 하지 않아.”‘헤헤.’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부승원의 품에서 나오지 않았다.“전에는 왜 그렇게 칭찬을 아꼈어요?”“네가 거만해질까 봐.”“그럼 오늘엔 걱정 안 돼요?”부승원은 잠시 뜸을 들이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있는 순간에도 부승원은 반우희의 연락이 끊기던 공포가 불시에 찾아왔고, 반우희가 불길이 가득한 차량에 있었다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철렁했다.부승원은 폭탄이 터지는 순간을 직접 목격했고 불길이 한순간에 반우희를 집어삼키는 걸 봤었다.하마터면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부승원은 다시 반우희에게 깐깐하게 대할 수 없었다.그리고 전에는 반우희가 마냥 어린 친구로 보여 더 빨리 성장하라고 채찍질을 한 것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반우희는 이미 성숙하고 용감한 사람이라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양시연을 구하던 반우희는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눈치채고 가장 빠르게 상황을 안정시켰다.양시연을 구한 뒤 언제 또 폭발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기사를 포기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키우다시피 한 동생 승주와 함께 불길에 달려들었다.“변호사님.”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부승원의 볼을 콕콕 찔렀다.그러자 부승원은 반우희에게 이렇게 말했다.“앞으론 마음대로 거만해도 돼.”“네?”“거만하게 사는 게 뭐 흠도 아니잖아. 적어도 넌 독립적이고 강한 사람이라는 의미니까.”반우희는 이게 꿈속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평소의 부승원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말이었다.하지만... 부승원의 이런 변화에 반우희는 너무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