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첫걸음은 연정훈이 내민 말이었다.“오늘 저녁에 작은 모임이 있어. 같이 가자.”양시연은 속으로 살짝 기뻐하며 유치하게 연정훈이 먼저 말을 꺼낸 거로 생각했다.“어디에서 열려요?”“우리 외삼촌이 계신 민씨 가문에서.”양시연은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할머니 쪽 친척인가요?”“응. 그분들은 경인에 잘 안 계셔. 우리가 결혼해서 온 거야.”양시연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결혼 후 신부를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젊은 세대에서는 이런 풍습이 잘 지켜지지 않지만, 연씨 가문처럼 대가족을 중요시하는 가문에서는 이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양시연과 연정훈이 신혼여행을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친척들은 며칠 동안은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약속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예를 들어 연정훈 어머니의 친정 쪽인 표씨 가문에서는 이미 약속을 잡았지만, 그쪽에서는 배려심을 발휘해 날짜를 다음 달로 미뤘다. 새로 결혼한 부부의 신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민씨 가문은 조금 이상했다. 저녁 식사 초대는 양시연에게 직접 알리지 않고 연정훈에게만 급히 약속을 잡은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나랑 같이 가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해.”양시연은 죽을 한 숟가락 떠먹으며 그를 쳐다보지 않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어떤 사람들은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정작 본인들이 저에게 눈치를 주죠.”연정훈은 어이없었다.“...”그는 이참에 변명하려 했지만,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훈 씨라고 한 적 없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연정훈은 침묵했다.“...”결국 그는 침묵을 택하고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양시연은 콧노래를 부르듯이 살짝 기분이 풀려 그가 준 반찬을 집어 먹었다.두 사람은 절반쯤 화해한 상태가 되었다.오후에는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며 여러 번 대화를 나누었고 마침내 관계는 평소처럼 정상적인 소통 상태로 돌아왔다.여 아주머니는 몇 번이나
민지연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양시연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연정훈의 뒤로 몸을 숨긴 민지연은 또 나비의 목줄을 당겼다.이에 깜짝 놀라버린 나비가 상대를 확인하고 민지연과 민지연의 개를 향해 침을 뱉기 시작했다.민지연은 화들짝 놀라며 개를 안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연정훈을 향해 말했다.“정훈 오빠, 시연 언니가 키우는 알파카 엄청 사나워요!”‘허.’‘그래봤자 네가 키우는 개보다 더 사납겠어?’양시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연정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키우는 개가 나비를 놀라게 한 거야. 나비는 정말 착한 아이야.”민지연은 씩씩대며 자기 개를 변호했고 연정훈은 이런 민지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개 목줄이나 잘해.”명령 시조의 말은 짧지만 강했다.목줄을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 협박한 것도 아니었는데 민지연은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알겠어요.”민지연이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그때, 저택에서 중년 부부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드디어 왔구나. 미리 준비하고 너희 둘만 기다리고 있었어.”연정훈이 ‘삼촌’, ‘숙모’라 호칭하며 인사를 했고 또 양시연을 소개했다.양시연도 기죽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양시연이 인사를 건네자 숙모 방미선은 바로 양시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양시연과 과거 친분이 있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고 활기찬 나비를 보며 칭찬도 했다.“어머, 너무 예쁜 알파카네. 이렇게 예쁜 알파카는 이름이 뭐야?”“나비예요.”“이름 잘 지었네. 이름이 참 어울려.”양시연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고 옆으로 밀려난 민지연이 개 목줄을 잡고 입을 삐죽이는 걸 지켜봤다.삼촌 민병식은 연정훈과 나란히 정원으로 걸어갔고 고개를 돌려 민지연에게 경고를 날렸다.“지연아, 랑이 목줄 꼭 쥐고 있어. 네 새언니 놀라게 하지 말고.”그러자 민지연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양시연은 방미선의 손에 이끌려 정원으로 향했다.그리고 나비는 아주 기세등등하게 개를 향해 침을 칵
“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방미선이 인상을 찌푸리며 민지연을 향해 한소리를 하더니 또 양시연을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아이를 오냐오냐 키워서 얘가 버릇이 없어. 시연이 네가 이해해 줘.”“괜찮아요.”양시연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 어리니 그럴 수 있죠.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닌걸요.”민지연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양시연이 만만하다고 느껴지자 민채영도 말을 얹었다.민채영의 동서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양시연더러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양시연은 그저 말없이 디저트를 먹거나 차를 마시며 민채영의 말에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민채영은 양시연이 자신의 말을 여겨듣지 않자 바로 얼굴을 구겼다.그러자 옆자리의 민지연이 잽싸게 말했다.“언니, 작은 엄마가 얘기 중이잖아요. 왜 대답을 안 해요?”양시연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자 민지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언니는 우리 정훈이 오빠랑 결혼한 게 다행인 줄 알아요. 집안 어른이 얘기 중인데 대꾸도 하지 않는다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저도 어릴 땐 이런 문제로 참 많이 혼이 났어요.”“그러게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가끔은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훈 씨가 외동이라 철없이 태클 거는 시누이가 없거든요. 시어머니도 저를 많이 챙겨주시고 절대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거든요.”민채영과 민지연은 한순간에 말문이 막혔다.정신을 차린 민지연이 바로 대꾸하려고 하자 방미선이 먼저 눈치를 채고 얼굴을 굳혔다.“자꾸 랑이만 데리고 이곳저곳 다니지 말고 위층으로 올라가 있어!”민지연은 사람들 앞에서 한 소리 듣자 바로 얼굴이 시뻘게졌다. 참지 못하고 말대꾸를 하려는 찰나 연정훈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여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방금까지 말을 쉬지 않고 하던 민채영도 조용해졌고 아예 단청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새로 생긴 프로젝트에 관해 얘기 중인데 너도
민지연은 양시연이 다른 사람을 불러 함께 알파카를 구조할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 상황에 대한 변명을 미리 생각을 해 두었다. 아무도 본인이 알파카를 개울가로 밀어 넣는 걸 보지 못했으니 말만 잘하면 누구도 본인을 탓하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양시연은 온몸이 젖도록 아무도 찾지 않고 홀로 알파카를 물 위로 끌어당겼다.민지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깜짝 놀라버린 아이들은 다른 어른들을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양시연은 나비를 안아 들고 개울가 옆의 풀밭에서 거센 숨을 내쉬었다.“언니...”민지연의 부름에 양시연이 고개를 휙 돌렸다. 개울가에서 한참 실랑이하다 보니 머리는 물에 푹 젖어버렸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지만 눈빛만은 살벌했다.그 눈빛에 민지연은 심장이 철렁했다.“뭐, 뭐예요? 알파카 스스로 개울가에 빠졌고 난 구하려고 했던 것뿐이에요!”양시연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치맛자락의 물을 쭉 짜냈다.민지연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했다.그때, 양시연이 성큼성큼 민지연 쪽으로 걸어가더니 머리카락을 낚아채고 미친 것처럼 민지연의 머리를 개울가에 처박았다.민지연은 비명을 질렀다.옆의 나비도 꽥꽥 울고 있었다.정신을 차린 민지욱은 동생을 시켜 어른을 불러오게 하고 직접 양시연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시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민지욱은 바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양시연은 고통을 참으며 민지연을 기어코 개울가에 빠뜨렸고 바로 몸을 돌려 남자아이의 옷깃을 잡고 함께 개울가에 넣어버렸다.나비는 큰 돌멩이 위로 서서 힘차게 발을 굴렀다.정원에서 뒤뜰까지 겨우 몇 걸음이면 도착할 거리였기에 사람들은 빠르게 이곳으로 몰려왔다.연정훈과 민병식이 가장 먼저 달려왔고 양시연이 민지욱을 개울가에 넣는 걸 보며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민병식은 제 손자를 끔찍하게 아꼈다. 그래서 바로 달려가 양시연을 밀어내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이 한 발 더 빨랐고 먼저 양시연의 앞을 막아섰다.“시연아!”양시연은 이제 힘에 부쳤고
하나도 잘못이 없는 듯 당당하게 말하던 민지연은 연정훈의 차가운 시선에 점점 목소리가 낮아졌다.민지욱은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울고 있었지만 연정훈을 힐끗 보다가 점점 울음소리를 낮췄다.그러자 뒤뜰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졌다.민태용도 소식을 듣고 달려와 불만이라는 듯 양시연을 노려보았다.“그만하거라. 어린아이끼리 장난에 지금 뭐 하는 짓이냐!”그리고 이번 일을 가볍게 무마시키고 사람을 시켜 아이들의 옷을 갈아입히게 했다.그때 연정훈이 말했다.“서로의 얘기가 다르다면 누구의 말이 맞는지 제대로 확인을 해봐야죠.”연정훈이 끝까지 파고들 줄 몰랐던 사람들은 조금 당황해했다. 두 가문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이런 일로 서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었다.민태용이 연정훈을 말렸다.“정훈아, 너무 파고들지 말거라. 이건 사소한 일이지 않으냐?”“사소한 일이요?”연정훈이 말을 자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키우던 알파카가 물에 빠진 일이 사소하다는 건가요? 아니면 민지연과 민지욱이 거짓말을 하는 게 사소한 일이란 말씀인가요?”“난 거짓말한 적 없어요!”민지욱이 빠르게 반박했다.민지연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정훈 오빠, 그렇게 무턱대고 언니 말만 듣지 마요. 언니가 나와 지욱이를 물에 빠뜨리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봤잖아요!”민병식도 고민에 빠졌다.“그래 정훈아, 이미 벌어진 일이고 네 아내 말만 믿고 막무가내로 굴지 말 거라. 네 아내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제 아내는 거짓말하지 않아요.”연정훈은 아주 덤덤하고 냉철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점점 화가 가셨고 차츰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그래서 연정훈의 옆에 서서 물었다.“할아버님, 혹시 집에 감시 카메라가 있을까요?”민병식은 침묵했다.그러자 사람들은 생각에 잠겼다. 민씨 가문 뒤뜰에 감시 카메라가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양시연이 거짓말을 한다면 먼저 카메라를 확인해 보자고 말할 리가 없었다.
연정훈의 말에 민병식과 방미선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연정훈을 다시 설득해 보려고 했으나 기회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 방금 상황을 전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두 녀석을 혼내려 했다!강남 시티로 돌아오자 여 아주머니가 물에 푹 젖은 양시연과 나비를 보고 깜짝 놀라 했다.전체 상황을 전해 들은 여 아주머니는 제 일인 듯 불같이 화를 냈다.양시연은 곧 연정훈의 대처 방식을 말해주었고 여 아주머니의 표정이 확연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양시연을 연정훈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이렇게 소곤거렸다.“오늘 밤엔 정훈 씨에게 잘해줘요. 시연 씨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봐봐요.”여 아주머니의 말을 들은 양시연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알겠어요.”그리고 샤워를 하러 간 양시연은 나비를 연정훈에게 맡겼다.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나비는 따뜻한 카펫 위로 자리를 잡았다. 영준이 나비의 옆을 꼭 지키고 있었는데 모자 사이가 오늘따라 더 가까워 보였다.연정훈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면봉으로 나비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줬다.나비는 계속 끙끙 소리를 냈지만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이 광경을 몰래 지켜보던 양시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비에게도 이렇게 지극정성인데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에게 얼마나 사랑을 쏟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바로 생각을 멈추고 마른기침했다.연정훈은 진지한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다친 곳은 없어?”“없어요.”양시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머리가 좀 뽑혔을 뿐이에요.”“머리카락을 잡아당겼어?”연정훈의 표정이 굳었다.“그 남자아이가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주먹질하는 걸 개울가에 집어 던졌어요.”연정훈은 점점 화가 났다.7살 먹은 남자아이가 멋모르고 주먹질했을 게 뻔했다.양시연을 찬찬히 살피던 연정훈이 물었다.“따끔거리는 곳은?”양시연이 고개를 젓자 연정훈은 직접 한곳 한곳 살피려 했다.그러자 양시연은 소파에 자리를 찾아 앉으며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뭐예요? 직접 확인이라도 해야 안심이 되겠어
“이건 그냥 평범한 보약이에요. 부족한 혈기를 보충해 주는 약이라고요!”여 아주머니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양시연은 입을 삐죽이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이불을 펄럭이며 자리에 누웠다.“아이참, 말 좀 들어요. 빨리 마셔요.”“난 아주 건강하니까 그런 보약은 마실 필요가 없어요.”“그게 아니라...”“오늘 밤 꼭 정훈 씨랑 같이 지낼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양시연은 패드를 꺼냈다.하지만 여 아주머니는 포기도 하지 않고 구구절절 말을 이어갔다.양시연은 아예 노래를 틀었다.여 아주머니는 화가 나 양시연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쭉 밀었다.그러자 양시연은 웃음이 터졌고 멀어지는 여 아주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아주머니, 이 약은 꼭 버려주세요. 그리고 다시 사 오지 마세요. 아주머니도 이런 약 사러 갈 때 안 쑥스러웠어요?”“...”‘이 녀석이!’여 아주머니는 방 밖으로 나가면서 양시연의 말을 곱씹었다.‘그래.’‘내가 얼마나 힘들게 구해온 약인데 절대 낭비하면 안 되지!’그래서 고민하다가 탕약을 한 그릇에 담아 서재로 향했다.연정훈은 민수희의 전화에 시달리다가 귀찮은 듯 전화를 끊고 이만 방으로 돌아가 양시연을 보살피려 했다.혹시 상처가 있으면 연고를 발라주고...상처가 없으면...그래도 꼼꼼히 살필 것이다.두 사람의 사이가 많이 풀어졌기에 오늘 밤엔 꼭 껴안고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똑똑똑.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연정훈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의 여 아주머니와 시선을 마주했다.“...”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그래서 안경을 자연스레 위로 올리며 예의를 차려 물었다.“무슨 일이시죠?”“별일은 아니고 보약을 새로 달여왔는데 따뜻하게 데워 왔어요. 빨리 마시고 얼른 쉬세요!”숨을 크게 들이쉬니 연정훈은 왠지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이게 보약이라고?’여 아주머니는 아직도 미소를 지은 채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자, 빨리 마셔요.”“...”연정훈은 잠시 뜸을 들이다
조금의 과장을 보탠다면 연정훈은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양시연이 빠르게 몸을 돌리지 않았다면 새로 산 파자마에 피가 튀었을지도 모른다!“왜 그래요?”그러나 연정훈은 그 질문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코 위로 덮은 휴지가 또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깜짝 놀란 양시연이 다급하게 사람을 불렀다.여 아주머니는 이어질 상황을 숨죽여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인기척이 들려오자 몰래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양시연이 피로 물든 연정훈을 밖으로 끌어내는 게 보였다.“세상에!”“빨리, 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여 아주머니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의사 부르지 말고 당장 병원으로 가요.”그리고 여 아주머니가 기사와 경호원을 찾기도 전에 연정훈을 이끌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연정훈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냅킨으로 얼굴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양시연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졌다. 갑자기 이렇게 많은 코피를 흘리다니 정말 몸에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 아주머니도 병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 아주머니는 한 움큼의 약재와 함께 나타났다...의사는 연정훈에게 정밀 검사를 시키려다가 여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침묵에 빠졌다.그건 양시연도 마찬가지였다.양시연은 눈앞이 아찔해 머리를 잡고 천장만 바라봤다.‘정말 어이가 없어서!’“바보예요? 아니면 코가 잘못된 거예요?”링거를 맞기 전 양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연정훈에게 말했다.연정훈은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의 피가 빠진 듯 많이 허약해졌다. 그리고 안경 너머로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아주머니가 알아서 적정량으로 주셨을 거로 생각했어.”양시연은 눈을 희번덕희번덕했다.“여 아주머니는 정훈 씨가 탕약을 전부 마실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대요!”양시연은 빠르게 연정훈의 안경을 끌어내렸다.그러자 연정훈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두 눈을 꼭 감았다.“이제 안경도 끼지 마요. 사람이 반듯하게 생겨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속셈이 들통나자 연정훈은 자세를 고쳐 누우며 이렇게 말했다.“빨리 휴지나 챙겨서 갈아줘. 코피가 아직도 멈추지 않은 것 같아.”양시연이 쯧하고 혀를 찼다.“말하지 마요. 코피를 그렇게 흘렸는데 아직도 힘이 남아 있어요?”“...”“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이렇게 치졸한 방법을 써야겠어요?”양시연이 재차 속을 긁자 연정훈은 다시 눈을 감았다.“뭐예요? 눈만 감으면 장땡이라는 건가?”“...”‘체면을 이렇게 구기다니!’다시 등을 돌린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드디어 의사가 병실을 찾았다.그리고 그 뒤로 여 아주머니도 함께였는데 양시연과 달리 여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요즘 들어 여 아주머니는 연정훈이 꽤 마음에 들었는데 오늘 연정훈을 다치게 만든 게 본인이다 보니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여 아주머니는 자책하며 마른 입술의 연정훈을 향해 물었다.“차가운 음료수라도 가지고 올까요?”연정훈은 생각보다 덤덤했고 방금 양시연이 팥빙수 얘기를 꺼낸 걸 떠올리며 가볍게 부탁했다. 왠지 자꾸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네네. 바로 만들어 올게요.”여 아주머니는 드디어 안심이라는 듯 말했다.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1인분만 만드시면 돼요. 수고스럽게 많이 만드실 필요 없으세요.”여 아주머니는 양시연을 힐끗 바라봤고 연정훈이 바로 말을 이었다.“시연이는 안 먹을 거예요. 저 놀리느라 먹을 시간이 없거든요.”여 아주머니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이었다.연정훈의 말에 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노려보았다.하지만 여 아주머니는 아픈 아이를 달래듯 연정훈을 달래며 양시연더러 옆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당부했다.“알겠어요.”양시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여 아주머니가 병실을 나섰다.그렇게 병실에는 양시연과 연정훈만 남겨지고, 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연정훈을 바라봤다.연정훈은 아예 이불을 쭉 당겨 얼굴까지 가렸다.눈 감고 자는 척하는 연정훈의 속셈을 눈치챈 양시연은 혀를 쯧쯧
조금의 과장을 보탠다면 연정훈은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양시연이 빠르게 몸을 돌리지 않았다면 새로 산 파자마에 피가 튀었을지도 모른다!“왜 그래요?”그러나 연정훈은 그 질문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코 위로 덮은 휴지가 또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깜짝 놀란 양시연이 다급하게 사람을 불렀다.여 아주머니는 이어질 상황을 숨죽여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인기척이 들려오자 몰래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양시연이 피로 물든 연정훈을 밖으로 끌어내는 게 보였다.“세상에!”“빨리, 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여 아주머니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의사 부르지 말고 당장 병원으로 가요.”그리고 여 아주머니가 기사와 경호원을 찾기도 전에 연정훈을 이끌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연정훈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냅킨으로 얼굴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양시연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졌다. 갑자기 이렇게 많은 코피를 흘리다니 정말 몸에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 아주머니도 병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 아주머니는 한 움큼의 약재와 함께 나타났다...의사는 연정훈에게 정밀 검사를 시키려다가 여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침묵에 빠졌다.그건 양시연도 마찬가지였다.양시연은 눈앞이 아찔해 머리를 잡고 천장만 바라봤다.‘정말 어이가 없어서!’“바보예요? 아니면 코가 잘못된 거예요?”링거를 맞기 전 양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연정훈에게 말했다.연정훈은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의 피가 빠진 듯 많이 허약해졌다. 그리고 안경 너머로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아주머니가 알아서 적정량으로 주셨을 거로 생각했어.”양시연은 눈을 희번덕희번덕했다.“여 아주머니는 정훈 씨가 탕약을 전부 마실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대요!”양시연은 빠르게 연정훈의 안경을 끌어내렸다.그러자 연정훈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두 눈을 꼭 감았다.“이제 안경도 끼지 마요. 사람이 반듯하게 생겨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이건 그냥 평범한 보약이에요. 부족한 혈기를 보충해 주는 약이라고요!”여 아주머니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양시연은 입을 삐죽이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이불을 펄럭이며 자리에 누웠다.“아이참, 말 좀 들어요. 빨리 마셔요.”“난 아주 건강하니까 그런 보약은 마실 필요가 없어요.”“그게 아니라...”“오늘 밤 꼭 정훈 씨랑 같이 지낼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양시연은 패드를 꺼냈다.하지만 여 아주머니는 포기도 하지 않고 구구절절 말을 이어갔다.양시연은 아예 노래를 틀었다.여 아주머니는 화가 나 양시연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쭉 밀었다.그러자 양시연은 웃음이 터졌고 멀어지는 여 아주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아주머니, 이 약은 꼭 버려주세요. 그리고 다시 사 오지 마세요. 아주머니도 이런 약 사러 갈 때 안 쑥스러웠어요?”“...”‘이 녀석이!’여 아주머니는 방 밖으로 나가면서 양시연의 말을 곱씹었다.‘그래.’‘내가 얼마나 힘들게 구해온 약인데 절대 낭비하면 안 되지!’그래서 고민하다가 탕약을 한 그릇에 담아 서재로 향했다.연정훈은 민수희의 전화에 시달리다가 귀찮은 듯 전화를 끊고 이만 방으로 돌아가 양시연을 보살피려 했다.혹시 상처가 있으면 연고를 발라주고...상처가 없으면...그래도 꼼꼼히 살필 것이다.두 사람의 사이가 많이 풀어졌기에 오늘 밤엔 꼭 껴안고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똑똑똑.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연정훈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의 여 아주머니와 시선을 마주했다.“...”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그래서 안경을 자연스레 위로 올리며 예의를 차려 물었다.“무슨 일이시죠?”“별일은 아니고 보약을 새로 달여왔는데 따뜻하게 데워 왔어요. 빨리 마시고 얼른 쉬세요!”숨을 크게 들이쉬니 연정훈은 왠지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이게 보약이라고?’여 아주머니는 아직도 미소를 지은 채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자, 빨리 마셔요.”“...”연정훈은 잠시 뜸을 들이다
연정훈의 말에 민병식과 방미선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연정훈을 다시 설득해 보려고 했으나 기회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 방금 상황을 전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두 녀석을 혼내려 했다!강남 시티로 돌아오자 여 아주머니가 물에 푹 젖은 양시연과 나비를 보고 깜짝 놀라 했다.전체 상황을 전해 들은 여 아주머니는 제 일인 듯 불같이 화를 냈다.양시연은 곧 연정훈의 대처 방식을 말해주었고 여 아주머니의 표정이 확연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양시연을 연정훈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이렇게 소곤거렸다.“오늘 밤엔 정훈 씨에게 잘해줘요. 시연 씨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봐봐요.”여 아주머니의 말을 들은 양시연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알겠어요.”그리고 샤워를 하러 간 양시연은 나비를 연정훈에게 맡겼다.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나비는 따뜻한 카펫 위로 자리를 잡았다. 영준이 나비의 옆을 꼭 지키고 있었는데 모자 사이가 오늘따라 더 가까워 보였다.연정훈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면봉으로 나비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줬다.나비는 계속 끙끙 소리를 냈지만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이 광경을 몰래 지켜보던 양시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비에게도 이렇게 지극정성인데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에게 얼마나 사랑을 쏟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바로 생각을 멈추고 마른기침했다.연정훈은 진지한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다친 곳은 없어?”“없어요.”양시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머리가 좀 뽑혔을 뿐이에요.”“머리카락을 잡아당겼어?”연정훈의 표정이 굳었다.“그 남자아이가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주먹질하는 걸 개울가에 집어 던졌어요.”연정훈은 점점 화가 났다.7살 먹은 남자아이가 멋모르고 주먹질했을 게 뻔했다.양시연을 찬찬히 살피던 연정훈이 물었다.“따끔거리는 곳은?”양시연이 고개를 젓자 연정훈은 직접 한곳 한곳 살피려 했다.그러자 양시연은 소파에 자리를 찾아 앉으며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뭐예요? 직접 확인이라도 해야 안심이 되겠어
하나도 잘못이 없는 듯 당당하게 말하던 민지연은 연정훈의 차가운 시선에 점점 목소리가 낮아졌다.민지욱은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울고 있었지만 연정훈을 힐끗 보다가 점점 울음소리를 낮췄다.그러자 뒤뜰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졌다.민태용도 소식을 듣고 달려와 불만이라는 듯 양시연을 노려보았다.“그만하거라. 어린아이끼리 장난에 지금 뭐 하는 짓이냐!”그리고 이번 일을 가볍게 무마시키고 사람을 시켜 아이들의 옷을 갈아입히게 했다.그때 연정훈이 말했다.“서로의 얘기가 다르다면 누구의 말이 맞는지 제대로 확인을 해봐야죠.”연정훈이 끝까지 파고들 줄 몰랐던 사람들은 조금 당황해했다. 두 가문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이런 일로 서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었다.민태용이 연정훈을 말렸다.“정훈아, 너무 파고들지 말거라. 이건 사소한 일이지 않으냐?”“사소한 일이요?”연정훈이 말을 자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키우던 알파카가 물에 빠진 일이 사소하다는 건가요? 아니면 민지연과 민지욱이 거짓말을 하는 게 사소한 일이란 말씀인가요?”“난 거짓말한 적 없어요!”민지욱이 빠르게 반박했다.민지연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정훈 오빠, 그렇게 무턱대고 언니 말만 듣지 마요. 언니가 나와 지욱이를 물에 빠뜨리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봤잖아요!”민병식도 고민에 빠졌다.“그래 정훈아, 이미 벌어진 일이고 네 아내 말만 믿고 막무가내로 굴지 말 거라. 네 아내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제 아내는 거짓말하지 않아요.”연정훈은 아주 덤덤하고 냉철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점점 화가 가셨고 차츰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그래서 연정훈의 옆에 서서 물었다.“할아버님, 혹시 집에 감시 카메라가 있을까요?”민병식은 침묵했다.그러자 사람들은 생각에 잠겼다. 민씨 가문 뒤뜰에 감시 카메라가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양시연이 거짓말을 한다면 먼저 카메라를 확인해 보자고 말할 리가 없었다.
민지연은 양시연이 다른 사람을 불러 함께 알파카를 구조할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 상황에 대한 변명을 미리 생각을 해 두었다. 아무도 본인이 알파카를 개울가로 밀어 넣는 걸 보지 못했으니 말만 잘하면 누구도 본인을 탓하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양시연은 온몸이 젖도록 아무도 찾지 않고 홀로 알파카를 물 위로 끌어당겼다.민지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깜짝 놀라버린 아이들은 다른 어른들을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양시연은 나비를 안아 들고 개울가 옆의 풀밭에서 거센 숨을 내쉬었다.“언니...”민지연의 부름에 양시연이 고개를 휙 돌렸다. 개울가에서 한참 실랑이하다 보니 머리는 물에 푹 젖어버렸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지만 눈빛만은 살벌했다.그 눈빛에 민지연은 심장이 철렁했다.“뭐, 뭐예요? 알파카 스스로 개울가에 빠졌고 난 구하려고 했던 것뿐이에요!”양시연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치맛자락의 물을 쭉 짜냈다.민지연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했다.그때, 양시연이 성큼성큼 민지연 쪽으로 걸어가더니 머리카락을 낚아채고 미친 것처럼 민지연의 머리를 개울가에 처박았다.민지연은 비명을 질렀다.옆의 나비도 꽥꽥 울고 있었다.정신을 차린 민지욱은 동생을 시켜 어른을 불러오게 하고 직접 양시연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시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민지욱은 바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양시연은 고통을 참으며 민지연을 기어코 개울가에 빠뜨렸고 바로 몸을 돌려 남자아이의 옷깃을 잡고 함께 개울가에 넣어버렸다.나비는 큰 돌멩이 위로 서서 힘차게 발을 굴렀다.정원에서 뒤뜰까지 겨우 몇 걸음이면 도착할 거리였기에 사람들은 빠르게 이곳으로 몰려왔다.연정훈과 민병식이 가장 먼저 달려왔고 양시연이 민지욱을 개울가에 넣는 걸 보며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민병식은 제 손자를 끔찍하게 아꼈다. 그래서 바로 달려가 양시연을 밀어내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이 한 발 더 빨랐고 먼저 양시연의 앞을 막아섰다.“시연아!”양시연은 이제 힘에 부쳤고
“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방미선이 인상을 찌푸리며 민지연을 향해 한소리를 하더니 또 양시연을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아이를 오냐오냐 키워서 얘가 버릇이 없어. 시연이 네가 이해해 줘.”“괜찮아요.”양시연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 어리니 그럴 수 있죠.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닌걸요.”민지연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양시연이 만만하다고 느껴지자 민채영도 말을 얹었다.민채영의 동서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양시연더러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양시연은 그저 말없이 디저트를 먹거나 차를 마시며 민채영의 말에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민채영은 양시연이 자신의 말을 여겨듣지 않자 바로 얼굴을 구겼다.그러자 옆자리의 민지연이 잽싸게 말했다.“언니, 작은 엄마가 얘기 중이잖아요. 왜 대답을 안 해요?”양시연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자 민지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언니는 우리 정훈이 오빠랑 결혼한 게 다행인 줄 알아요. 집안 어른이 얘기 중인데 대꾸도 하지 않는다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저도 어릴 땐 이런 문제로 참 많이 혼이 났어요.”“그러게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가끔은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훈 씨가 외동이라 철없이 태클 거는 시누이가 없거든요. 시어머니도 저를 많이 챙겨주시고 절대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거든요.”민채영과 민지연은 한순간에 말문이 막혔다.정신을 차린 민지연이 바로 대꾸하려고 하자 방미선이 먼저 눈치를 채고 얼굴을 굳혔다.“자꾸 랑이만 데리고 이곳저곳 다니지 말고 위층으로 올라가 있어!”민지연은 사람들 앞에서 한 소리 듣자 바로 얼굴이 시뻘게졌다. 참지 못하고 말대꾸를 하려는 찰나 연정훈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여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방금까지 말을 쉬지 않고 하던 민채영도 조용해졌고 아예 단청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새로 생긴 프로젝트에 관해 얘기 중인데 너도
민지연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양시연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연정훈의 뒤로 몸을 숨긴 민지연은 또 나비의 목줄을 당겼다.이에 깜짝 놀라버린 나비가 상대를 확인하고 민지연과 민지연의 개를 향해 침을 뱉기 시작했다.민지연은 화들짝 놀라며 개를 안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연정훈을 향해 말했다.“정훈 오빠, 시연 언니가 키우는 알파카 엄청 사나워요!”‘허.’‘그래봤자 네가 키우는 개보다 더 사납겠어?’양시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연정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키우는 개가 나비를 놀라게 한 거야. 나비는 정말 착한 아이야.”민지연은 씩씩대며 자기 개를 변호했고 연정훈은 이런 민지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개 목줄이나 잘해.”명령 시조의 말은 짧지만 강했다.목줄을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 협박한 것도 아니었는데 민지연은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알겠어요.”민지연이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그때, 저택에서 중년 부부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드디어 왔구나. 미리 준비하고 너희 둘만 기다리고 있었어.”연정훈이 ‘삼촌’, ‘숙모’라 호칭하며 인사를 했고 또 양시연을 소개했다.양시연도 기죽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양시연이 인사를 건네자 숙모 방미선은 바로 양시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양시연과 과거 친분이 있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고 활기찬 나비를 보며 칭찬도 했다.“어머, 너무 예쁜 알파카네. 이렇게 예쁜 알파카는 이름이 뭐야?”“나비예요.”“이름 잘 지었네. 이름이 참 어울려.”양시연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고 옆으로 밀려난 민지연이 개 목줄을 잡고 입을 삐죽이는 걸 지켜봤다.삼촌 민병식은 연정훈과 나란히 정원으로 걸어갔고 고개를 돌려 민지연에게 경고를 날렸다.“지연아, 랑이 목줄 꼭 쥐고 있어. 네 새언니 놀라게 하지 말고.”그러자 민지연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양시연은 방미선의 손에 이끌려 정원으로 향했다.그리고 나비는 아주 기세등등하게 개를 향해 침을 칵
화해의 첫걸음은 연정훈이 내민 말이었다.“오늘 저녁에 작은 모임이 있어. 같이 가자.”양시연은 속으로 살짝 기뻐하며 유치하게 연정훈이 먼저 말을 꺼낸 거로 생각했다.“어디에서 열려요?”“우리 외삼촌이 계신 민씨 가문에서.”양시연은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할머니 쪽 친척인가요?”“응. 그분들은 경인에 잘 안 계셔. 우리가 결혼해서 온 거야.”양시연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결혼 후 신부를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젊은 세대에서는 이런 풍습이 잘 지켜지지 않지만, 연씨 가문처럼 대가족을 중요시하는 가문에서는 이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양시연과 연정훈이 신혼여행을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친척들은 며칠 동안은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약속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예를 들어 연정훈 어머니의 친정 쪽인 표씨 가문에서는 이미 약속을 잡았지만, 그쪽에서는 배려심을 발휘해 날짜를 다음 달로 미뤘다. 새로 결혼한 부부의 신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민씨 가문은 조금 이상했다. 저녁 식사 초대는 양시연에게 직접 알리지 않고 연정훈에게만 급히 약속을 잡은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나랑 같이 가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해.”양시연은 죽을 한 숟가락 떠먹으며 그를 쳐다보지 않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어떤 사람들은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정작 본인들이 저에게 눈치를 주죠.”연정훈은 어이없었다.“...”그는 이참에 변명하려 했지만,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훈 씨라고 한 적 없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연정훈은 침묵했다.“...”결국 그는 침묵을 택하고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양시연은 콧노래를 부르듯이 살짝 기분이 풀려 그가 준 반찬을 집어 먹었다.두 사람은 절반쯤 화해한 상태가 되었다.오후에는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며 여러 번 대화를 나누었고 마침내 관계는 평소처럼 정상적인 소통 상태로 돌아왔다.여 아주머니는 몇 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