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연은 민수희가 참 웃긴다고 생각했다. 한가해서 손주 신혼부부에게 괜히 불편을 주려는 건지 의심스러웠다.연정훈이 아래층에서 정 할머니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양시연은 여 아주머니와 함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여 아주머니가 말했다.“아직 눈치 못 채셨나요?”“뭘요?”여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아씨께서 이미 다 예상하셨어요. 예전에 결혼 전 연호민 씨가 주식 천천히 넘겨준다고 한 거 기억 안 나세요? 최소 3개월은 걸린다던 그거요. 3개월이라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반년은 걸릴 거라니까요!”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엄마가 혹시 할머니가 중간에서 방해해서 나랑 연정훈이 이혼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그럼요!”“설마요. 할아버지는 저희 가문과의 관계를 더 단단히 묶고 싶어 하시잖아요.”“연호민 씨는 그렇지만, 민수희 씨는 또 다르죠!”여 아주머니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 바닥에서 결혼하고 바로 이혼하는 게 흔한 일인 거 모르세요?”양시연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연정훈은 정 할머니를 정중하게 내보내려 했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오랫동안 연씨 가문에서 일해온 터라 아무리 연정훈이라도 너무 모진 말은 하지 못했다.결국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정 할머니는 아래층에서 반나절을 앉아 있다가 스스로 짐을 챙겨 보모 방에 정착해 버렸다.양시연은 정 할머니가 연세가 많다는 걸 고려해 연정훈에게 표세연을 통해 설득해 보자고 제안했다.연정훈은 그날 밤에는 비교적 온화하게 동의했지만, 다음 날 저녁에는 폭발하고 말았다. 직접 정 할머니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정 할머니를 데려가라고 했다.사실 연정훈이 24시간 넘게 참은 것만 해도 그는 충분히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첫날 정 할머니는 연정훈과 양시연의 키스를 방해했다.‘좋아.’연정훈은 참았다.밤에 양시연과 침대에 기대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첫날밤을 보냈다.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연정훈은 양시연을 품에 안고 추천한 영화를 함께 보았다. 양시연은
정 할머니의 아들과 손자가 함께 경인으로 와 그날 오후 바로 정 할머니를 데려갔다. 떠나면서도 정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연정훈에게 사과 했다. 혹시라도 연루될까 봐 두려운 모습이 역력했다.양시연은 부승희와 통화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연정훈이 몇 번이나 분위기를 잡으려다 방해받고는 약이 올라 보였던 표정을 떠올리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그때 부승희도 기다렸다는 듯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부 변호사께서 쓰레기통 뒤졌다고요?”양시연은 충격을 받았다.잠시 후 부승희는 라이브 사진을 보내왔다.라이브 사진도 모자라 이모티콘까지 만들어 보냈다.사진 속에서 부승원은 종이봉투를 들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고 부승희는 여기에 자막까지 넣었다. [가방 어디 갔어? 내 이만큼 큰 가방 어디 간 거냐고?]양시연은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했다.“혹시 반우희 씨 가방이라도 찾아주려던 거예요?”그럴 리가 없었다.양시연은 예전에 부승원이 반우희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쏟아냈던 독설을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부승원은 더없이 차가웠다.부승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오빠는 진짜 지독한 츤데레에요.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더 싫다고 하는 타입이라니까.”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말을 잃었다.“...”‘진짜 독특한 성격이네...’이틀 후 만날 약속을 잡은 뒤 전화를 끊고 양시연은 고개를 들었다. 마침 연정훈이 윗층에서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양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피식 웃음을 지었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살짝 냉기가 도는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며 그녀 옆에 천천히 앉았다.양시연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가 말했다."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그래도 정 할머니는 정훈 씨 잘되라고 그러신 거잖아요. 그 약재로 만든 한약 엄청 좋은 거라던데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째려보며 말했다."대낮이라 내가 너를 어쩌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양
부승원은 정인 본사에서 업무를 보다 연정훈에게 몇 가지 확인 사항을 메시지로 보냈다.연정훈은 짧게 답했다.[바빠. 좀 일이 있어.]부승원은 다시 짧게 응답했다.[응.]굳이 세부적인 걸 묻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정훈이 먼저 상황을 털어놨다.[방금 양시연 사진 찍어줬는데 내가 못 찍었다고 잔뜩 투덜대더라. 수정해 달라길래 지금 차 안에서 고치는 중이야. 밤에는 아무것도 못 할 듯 싶어. 오늘은 계속 사진 수정만 하다 끝날 것 같아.]부승원은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자세히 말하는 거야? 완전 어이없네.’“이거 괜찮은데요!”차 안에서 양시연은 연정훈이 수정한 사진을 보고 고개를 쭉 내밀며 강하게 긍정했다.연정훈은 그녀를 힐끔 바라보다가 물었다.“보내줄까?”“네.”양시연은 들뜬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사진을 받을 준비를 했다. 몇 장이 저장되지 않아 다시 요청했고 저장한 후에는 나중에 인쇄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연정훈은 그녀의 모습을 힐끗 살폈다. 양시연이 사진을 친구들에게 공유하거나 인스타에 올릴 법도 했지만, 의외로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는 무심하게 물었다.“너 인스타에 게시물이 많지 않네?”양시연은 태연히 대답했다.“난 일상을 공유하는 습관이 없어요.”“...그래.”연정훈은 더 묻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양시연은 잠시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그의 속내를 깨달았다.잠깐 생각에 잠긴 양시연은 일부러 태연한 척 물었다.“오랜만에 나왔는데 우리 셀카 찍을까요? 인스타에 올리게요.”연정훈은 순간 설렜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말했다.“앞으로 가서 더 좋은 배경을 찾아보자.”양시연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생각했다.‘배경은 무슨 배경? 그냥 셀카잖아.’잠시 후 그녀는 차를 세우라고 하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손에 작은 미니 탕후루를 들고는 연정훈에게 건넸다.“이거 들고 있어요.”연정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양시연을 바라봤다.
신혼 초기였던 만큼 양시연이 올린 하루치의 인스타 게시물은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돈독하다는 소문을 빠르게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날 밤늦게 연정훈이 양시연의 사진을 모두 저장한 뒤 자신의 계정에 다시 업로드한 것이 화제를 더욱 증폭시켰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이야기가 뜨거운 화두가 되었다.부승희는 댓글을 남겼다.[낡은 집에 불이 붙으니 걷잡을 수 없구만요.]하지만 양시연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생각했다.‘불이 붙긴커녕 지금까지 우리 사이는 정말 순수하다고.’그럼에도 양시연과 연정훈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어디를 가든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연정훈은 늘 양시연과 함께였다. 양시연이 밖에 놀러 갈 때면 그는 운전기사 역할을 자처했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그녀를 데리러 왔다.양시연은 가끔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어느 날 오후 연정훈은 양시연을 데리고 정인 그룹 본사로 향했다. 자신의 측근 팀을 미리 양시연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였다.마침 부승원도 개인 자산 일부를 연정훈에게 넘기기 위한 서류 작업 때문에 와 있었다.부승원은 몇 명의 변호사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중에는 송 변호사와 반우희도 포함되어 있었다.며칠 만에 다시 만난 반우희는 조금 초췌해 보였다. 얼굴은 한층 더 홀쭉해져 있었다.“반우희 씨,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양시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반우희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요. 혼자 끙끙 앓지 말고요.”양시연은 그녀에게 조언했다.반우희는 고마운 눈빛으로 양시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공적인 대화가 끝나자 양시연은 가져온 과자와 간식을 꺼내 반우희에게 건네며 손님용 대기실에서 저녁으로 먹으라고 권했다.그 시각 옆방에서는 연정훈과 남자들 몇이 모여 한창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반우희가 케이크를 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돈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양시연이 여러 번 도와준 덕분에 반우희는 이를 악물
한 고위 임원이 말을 꺼내며 반우희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보자고 제안했다.부승원은 차갑게 받아쳤다.“36세 박사가 아직 결혼도 안 했다고요.”그 말에는 상대방에게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송 변호사는 단호히 말했다.“제 동창이고 사람은 믿을 만한 분입니다!”부승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반박했다.“7~8년 동안 못 본 사람을 어떻게 믿을 만하다고 단정할 수 있나요?”이때 양시연이 눈치를 채고 송 변호사를 향해 물었다.“송 변호사님, 올해 몇 살이세요?”송 변호사는 질문의 의도를 눈치채고 머뭇거렸다. 주변 사람들도 장난스레 덧붙였다.“어라, 송 변호사님도 조건에 딱 맞는데요?”송 변호사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사실 저도 반우희 씨가 참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회사는 사내 연애 금지잖아요. 아니었으면 대시한 지 오래됐죠!”그의 말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슬쩍 부승원을 힐끗 봤지만, 그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있었다.송 변호사는 농담 섞인 말투로 부승원을 향해 말했다.“대표님, 저희 오랜 친분을 생각해서 한 번만 봐주세요.”부승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때 연정훈이 양시연의 허리를 감싸며 미소 지었다. 주변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즐기며 말했다.“송 변호사님은 인품도 훌륭하시고 우리와 오래 함께 일한 분이니 한 번 봐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송 변호사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덧붙였다.“연 대표님까지 제 편을 들어주시는데 대표님, 이번 한 번만 좀 봐주세요.”부승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냉랭한 기운을 풍겼다.“연 대표는 당연히 당신 편을 들겠죠. 마치 늙은 호랑이가 새끼 사슴을 노리며 신데렐라를 구한 척하는 것처럼요. 그런 의도에 대한 발언권은 연 대표가 더 많을걸요.”주변 사람들과 양시연은 동시에 침묵했다.“...”연정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양시연을 더욱 가까이 끌어안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같은 나이 많은 호랑이라도 어떤 사람은 노리기는커녕 그저 신경만 쓰게
변여름은 변씨 가문에서 가장 어린 딸로 올해 겨우 13살이다. 양시연은 그저 두 번 만난 적이 있다.갑자기 전화를 받자 잠시 멍하니 있었다.“여보세요. 여름아?”“시연 언니, 안녕하세요.”양시연은 더 부드럽게 말하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변여름은 잠시 멈칫한 뒤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말했다.“언니, 혁수 오빠 다쳤어요. 알고 있어요?”양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또 다쳤다고?”그녀가‘또’라고 말한 것에 불만을 느낀 변여름은 약간 기분 나빠하며 대답했다.“비행기가 추락했어요. 응급실에 들어갔어요. 매우 심각해요.”양시연은 충격을 받았다.“뭐라고?”“모르세요?”변여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빠가 언니가 알고 있다고 했어요.”양시연은 결혼식 날 양혁수가 전화를 받았을 때 상태가 아주 좋았던 것을 기억했다.혹시...그녀는 이마를 손으로 쳐내며 즉시 깨달았다.“지금 상태는 어때?”“이제는 회복 중이에요. 양 이모도 오셨어요.”변여름은 잠시 멈추고는 물었다.“언니는 왜 안 와요? 오빠가... 어제 잠들 때까지 언니 이름을 계속 불렀어요.”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잠깐 목이 탁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시연 언니?”변여름은 그녀를 부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언니, 올 수 있나요?”양시연은 깊은숨을 쉬며 답했다.“이틀 안에 갈게.”변여름은 기뻐하며 말했다.“그럼 기다릴게요!”“응.”전화를 끊고 양시연은 잠시 아래층에 앉아서 생각했다.그녀는 결정을 내리고 바로 연정훈에게 말하려 했다.연정훈은 막 욕실에서 나왔고 양시연이 얼굴이 좋지 않자 그동안 품었던 작은 생각들을 잠시 멈추었다.“무슨 일이야?”양시연은 입술을 핥으며 드라이어를 그에게 건네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내일 외국에 다녀와야 해요.”연정훈은 잠시 멈췄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어떤 가능성이 떠올랐다.“양혁수 보러 가는 거야?”양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양혁수가 최근에 비행기 사고를 당
연정훈은 화가 난 채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보는 척하며 양시연 쪽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몇 번 훔쳐보다가 그의 냉담한 태도를 보고 입을 삐죽이며 시선을 돌렸다.원래 두 사람의 감정은 그리 단단하지 않아 작은 문제에도 금세 냉랭해졌다.양시연은 엔의 답글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질문을 찾아 키보드를 두드렸다.탁탁 탁.연정훈은 키보드 소리를 들으며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유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결혼 전에는 양시연의 메시지에 즉각 답하며 밤새 이야기를 나눴고 마지막엔 늘 기분 좋게 잠들곤 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을 제쳐 두고 양시연이 다른 남자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의문스러웠다.엔이 답장하지 않은데도 양시연은 여전히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십중팔구 다른 사람에게 답장을 쓰고 있는 듯했다.이런 상황을 보면 양시연이 신경 쓰는 남자 네티즌이 자신뿐만은 아닐 것 같았다.연정훈이 속이 좁아서가 아니라 양시연이 예전에 온라인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온라인 교류를 선호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지식인 같은 앱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공간이었다.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서로 깊은 교감을 나누는 곳이라고 믿었다.이전에는 이런 감정을 나름 잘 다스렸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조금 전까지 좋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했다. 연정훈은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결국 등을 돌린 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내일 비행기 표는 빨리 준비해. 공항까지는 내가 사람을 보내줄게.”양시연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평소에는 직접 차로 데려다주던 그가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다는 말이다. 그의 마음이 상했음이 분명했다.양시연은 한 번쯤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속이 상해서 참았다.어차피 몰래 양혁수를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미 모든 상황을 그에게 솔직히 이야기한 터였다.게다가
다음 날 아침 결혼 후 처음으로 양시연이 혼자 일어났다.‘하. 정말 대단하네. 냉전을 하겠다는 거지? 좋아 끝까지 가 보자.’양시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나 아침을 먹으러 갔다.식탁에 앉아 있던 양시연에게 양혁수의 전화가 걸려 왔다. 연정훈은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그녀의 연락처에 저장된 이름을 흘깃 바라보았다.양시연은 태연히 전화를 집어 들고 옥수수 하나를 챙겨 들며 옆으로 걸어가며 전화를 받았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여보세요?”양시연은 잠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뭐 하고 있어?”양혁수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잠시 양혁수의 의도를 가늠하며 물었다.“너 괜찮은 거야? 상태는 어때?”“괜찮지.”양혁수는 말을 하며 양시연에게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영상 속에서 양혁수는 병상에 누워 있었지만, 상반신을 일으킬 정도로 상태가 호전된 모습이었다. 옆에서는 양지원이 석류를 까고 있었다.“변여름이 어제 너한테 전화했었어?”“응.”양시연은 약간 미안해하며 말했다.“네가 그렇게 심하게 다쳤다는 걸 몰랐어. 왜 그날 얘기하지 않았어?”“말했으면 네가 날 보러 왔을 거 같아?”“...”“네가 미안해서 나를 보러 온다면 그건 도망치겠다는 의미 아니야? 연정훈, 그 속 좁은 녀석은 그 자리에서 분해 죽겠지.”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시연은 살짝 연정훈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연정훈은 여전히 꼿꼿하게 앉아 진지하게 식사하며 양시연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맞아. 속 좁은 녀석, 짠돌이야!’“나 비행기 표 예매해서 널 보러 갈 거야. 네 정확한 주소 좀 보내줘.”양시연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맞은편의 연정훈은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 만두를 세게 베어 물었다.전화 너머로 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만둬. 며칠만 더 있으면 네 얼굴도 기억 못 할 거야. 지금 날 보러 오면 내 수련에 방해만 될 텐데. 게다가 네가 이제 막 결혼했는데 갑자기 날 보러 온다고 하면 연정훈은 밤새 이불 속에서 울지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