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억울함을 꾹 눌렀다.이 대표는 여전히 주효진을 칭찬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자리에 앉아 담담하게 얘기했다.“잘했네요.”주효진을 칭찬하는 말에 주효진은 눈에 기쁨이 가득했다.안시연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우울함을 달랬다.임유정은 그 소리를 듣고 입술을 작게 끌어올렸다.임유정은 주효진 같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그녀는 그저 연정훈이 안시연을 대하는 채도를 보고 싶었다.아까 안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임유정이 봤으니 연정훈도 봤을 것이다. 하지만 연정훈은 안시연의 편을 들어주고 있지 않았다.그렇다면 연정훈에게 안시연도 그저 그런 사람일 뿐인 것 같았다.연정훈은 그저 잠깐 시간을 내서 온 것이었다. 주효진의 보고를 들은 후 그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가 떠나자 이 대표가 바로 그를 따라 나가며 배웅해 주었다.주효진도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이때를 틈타 회의를 주최했다.안시연은 손에 쥔 서류를 천천히 보고 있었다. 주효진이 하는 말은 하나도 듣지 못했지만 연정훈이 나갈 때, 임유정이 그에게 하는 말은 들었다.“오늘 밤 같이 저녁 먹을래요?”연정훈의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연정훈이 거절할 것 같지는 않았다.미인과 밥을 먹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까.“팀은 일단 이렇게 나누겠습니다. 1팀에서는 이번 주 안에 세 가지 기획안을 내오길 바랍니다.”주효진이 명령을 내렸다.동료가 또 주효진을 욕하면서 안시연에게 얘기했다.“미친 거 아니에요? 우리 팀을 죽이겠다는 거 아니냐고요.”안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동료가 힘들게 된 건, 어쩌면 안시연의 탓일지도 모르니까....임유정은 연정훈을 떠나보낸 후 기분이 좋지 않았다.왜냐하면 연정훈이 그녀를 거절했기 때문이다.사무실에 돌아오니 주효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저급한 출신에 연정훈과 엮이고 싶어 하는 여자들과는 전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하지만 주효진은 최대한 임유정에게서 점수를 따려고 했다.말을
안시연은 침착하고 담담하게 얘기했다.“임 대표님, 제게는 아버지가 있어요.”임유정은 흠칫하더니 바로 사과를 했다.“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저 시연 씨의 신세가 불쌍해서 그래요.”아까까지만 해도 안시연은 임유정이 안시연과 연정훈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임유정의 행동은 주지혁과 비슷했다.임유정은 그녀를 연정훈한테서 떼어내려고 했고, 주지혁은 그녀를 소유하려고 했다.“다 같은 여자로서, 시연 씨보다 두 살 큰 언니로서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다 시연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고요. 사람을 멀리 볼 줄 알아야 해요. 사업은 남자보다 훨씬 중요하니까요.”임유정은 부드럽게 얘기하면서 뜻을 숨겼다. “이런 기회 흔치 않아요.”그냥 들었을 때는 확실히 그럴듯했다.이 기회가 안시연의 실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안시연은 최선을 다할 것이다.하지만 다른 사람이 던져주는 기회라면 그게 꿀인지 독인지는 모르는 일이다.입술을 말던 안시연이 부드럽게 얘기했다.“임 대표님, 저를 생각해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하지만...”안시연은 시선을 약간 돌리고 얘기했다.“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임유정의 입꼬리를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의아해하면서 물었다.“왜죠?”“저는 정인 과학기술의 직업을 좋아해요. 착실하게 노력해서 인턴 기간을 버텨야죠.”안시연이 얘기했다.임유정은 표정이 약간 굳었다.“정인 과학기술은 좋죠. 하지만 정인 과학기술은 창립된 지 얼마 안 되는 회사예요. 게다가 회사 직원보다는 철밥통인 공무원이 좋지 않아요?”“저 같은 평범한 사람은 재정부에 가도 공무원 대접을 못 받을걸요.”임유정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묵묵히 안시연을 쳐다보았다.‘하, 내가 너무 얕봤네.’하지만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그래도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쉽지 않은 기회니까요.”“알겠습니다, 임 대표님.”“괜찮아요.”임유정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웃더니 눈짓했다.“가서
“안시연 씨?”차시훈은 입속에서 이 이름을 굴렸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안시연의 얼굴을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이름이 예쁘네요.”“얼굴도 예쁘죠?”옆의 사람이 장난스레 얘기했다.안시연은 자연스레 차시훈 옆에 앉게 되었다.같은 여자이긴 하지만, 차시훈이 다가와서 얘기할 때, 안시연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어디 사람이에요?”“경인시요.”“어쩐지, 경인시 사람들은 다 예쁘더라고요.”듣기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대화였다.하지만 상대방에게서 느껴지는 남자 향수의 향이 안시연을 덮쳐오자 안시연은 불편함을 느꼈다.차시훈은 확실히 안시연에게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안시연에게만 말을 걸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러다가 식사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안시연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최대한 적게 마시고 있었다.하지만 그러다 보니 누군가가 불만을 품고 안시연 더러 두 잔을 마시라고 했다.차시훈이 웃으면서 막아 나섰다.“왜 굳이 시연 씨한테 그래요?”“아이고, 우리 차 대표님이 아주 애지중지하네요!”이리저리 장난스레 얘기하는 말에도 차시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안시연은 몸 위에 벌레가 가득한 기분이었다. 메스꺼움이 점점 올라오고 있었다.차시훈은 안시연에게로 몸을 돌려 낮게 얘기했다.“크게 신경 쓰지 말아요. 이 사람들이 좀 투박해서 그래요.”차시훈의 뜨거운 숨결이 안시연의 귀에 닿았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실수인지는 아무도 몰랐다.안시연이 밀어내려고 할 때, 차시훈의 손이 안시연의 허벅지에 닿았다.안시연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차시훈도 눈치챈 것 같았다. 차시훈은 또 안시연에게 음식을 짚어주며 얘기했다.“먹어봐요. 맛있으니까.”“감사합니다, 차 대표님.”안시연은 메스꺼움을 꾹 참고 젓가락을 들었다.맞은 편의 임유정은 앉아서 직원들이 권하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면서 안시연 쪽의 상황을 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경인시에 남아서, 정인 그룹에 남
안시연은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중개상과 밥을 먹는데 메인 요리는 바로 안시연이었다.안시연은 연정훈과 멀어지겠다고 얘기하면서 홀로 직장을 찾았다. 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에게 놀아나고 있었다.안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정훈은 담담하게 얘기했다.“어느 중개상?”“LC 그룹이요.”연정훈은 머릿속을 뒤집으며 생각했다.“출시를 맡은 사람의 성이 차씨던가?”여기까지 얘기하자 안시연은 알 것만 같았다. 연정훈도 차 대표에 대해서 잘 알 것이다.그 순간, 안시연은 그녀의 밑바닥까지 공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그녀가 연정훈이었다면 큰 소리로 비웃을 것이다.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바람이 또 불어왔다.안시연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연정훈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턱을 잡았다.안시연이 멍하니 서 있을 때, 연정훈은 손수건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연정훈은 마치 기계를 닦아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안시연과 시선을 마주쳤을 때도 그저 담담하게 지나칠 뿐이었다.손을 뗐지만 연정훈의 담배 냄새가 안시연의 몸에 남았다. 그 담배 냄새는 차시훈이 뿌린 저급한 남자 향수의 냄새와 크게 비교되었다. 거의 하늘과 땅 차이였다.안시연은 마음이 약간 설렜다.연정훈은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물었다.“그 데이터 정리, 혼자 한 거야?”안시연은 약간 놀랐다.연정훈이... 알고 있었다.안시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무슨 대답을 할지 생각했다.그녀를 놀리고 비웃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고발할 기회를 주는 것인지 몰랐다.하지만 어느 쪽이든지, 안시연은 그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용기가 없었다.처음부터 그를 떠나려고 한 건 안시연이다.“... 다 같이 한 거예요.”연정훈이 침묵했다.그의 시선은 오랫동안 안시연에게 닿았다. 그러다가 이내 시선을 떼고 얘기했다.“돌아가.”그는 여전히 차갑게 얘기했다. 안시연은 그 말투에서 연정훈이 불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안시연은 그 자리에서
주지혁이 일어나서 정리를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조이현이 그의 팔을 잡고 애교를 부렸다.“지혁 씨, 나 새우 좀 까줘.”주지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1초 동안 생각한 주지혁은 바로 안시연을 도우려는 생각을 접고 조이현을 그러안으며 얘기했다.“알았어.”안시연은 그 모습을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외치는 소리는 여전했다.흥분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안시연은 메스꺼움을 느꼈다.차시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됐어요, 됐어. 그만 해요. 다른 사람들이 컴플레인을 걸겠어요.”차시훈은 자기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일어나서 안시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얘기했다.“얼른 마시고 저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자고요.”“오~”사람들은 또 소리를 질렀다.안시연은 살짝 굳어서 고개를 들었다. 억지로 성인 남자처럼 만들어진 여자의 얼굴을 역광으로 보면서 메스꺼움이 가슴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그녀는 약간 입을 열었다.“차 대표님, 저...”“그냥 술 한 잔일 뿐이에요.”차시훈은 이미 그녀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팔을 잡고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 올렸다. 안시연은 그저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옆의 주효진과 임유정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주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새우만 까고 있었다. 차시훈은 억지로 안시연의 손에 술잔을 밀어 넣어주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 뜨거운 온도에 안시연은 불쾌함이 밀려왔다.“러브샷! 러브샷!”사람들이 또 분위기에 휩쓸려 외쳤다.“괜찮아요. 걱정하지 말고...”토닥이는 차시훈의 말에 사람들은 더욱 흥분했다.안시연은 사람이 이렇게 추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천천히 술잔을 들어 올렸다. 쿵. 쿵. 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안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술잔을 내려놓고 입구를 쳐다보았다.“음식이 온 건가요?”누군가가 얘기했다.안시연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차시훈은 아무 이유나 찾아 떠났다.그러자 사람들은 금세 재미를 잃었다.임유정은 화를 꾹 참고 있느라 다른 사람들을 관여할 사이가 없었다.주효진은 사람들을 시켜 안시연에게 술을 먹이려 했지만, 주지혁의 눈짓에 그만두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식은 끝났다.룸에서 걸어 나온 안시연은 마치 100년이 지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이때 핸드폰이 울렷다. 꺼내서 확인해 보니 연정훈이 위치를 보낸 것이었다.한남원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안시연은 핸드폰을 꼭 쥐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외진 곳으로 도망간 후 목적지로 향했다.하이힐을 신고 있었지만 발걸음만은 가벼웠다.아파트의 가로등 아래에서 검은색 벤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진수빈은 옆에 서 있다가 안시연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연정훈은 술을 많이 마셔 의자에 기대앉아있었다. 문이 열리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밖을 쳐다보았다. 먼저는 연약한 몸이 눈에 들어왔고 이내 급박한 호흡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뛰어온 건가?안시연이 몸을 숙이고 차에 탔다. 그리고 안경 너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를 마주했다.약간의 침묵이 흘렀다.진수빈이 먼저 얘기해 주었다.“시연 씨, 연 대표님께서 술을 많이 드셔서 바람을 쐬면 안 좋습니다.”안시연은 작게 대답한 후 차에 올라탔다.차 문을 닫고 진수빈은 운전석으로 가 천천히 차를 운전해서 떠났다.뒷좌석은 조용하기만 했다.안시연은 약간씩 깊어지는 남자의 호흡을 들으면서 술을 많이 마셔서 힘든가 보다 생각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시연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차 안의 빛은 어두웠다. 그래도 몇 번이나마 멀리서 마주 오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덕분에 시야가 환해지기는 했다. 연정훈은 조용히 눈을 뜨고 그 빛을 빌려 거울 속에서 안시연의 얼굴을 마주했다.창문이 굳게 닫혀있어서 야경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안시연은 창문을 보면서 멍을 때리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연약함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았다. 안시연만 보면 그녀
연정훈은 그 검은색 머리끈을 버리지 않고 호주머니에 넣었다.안시연은 하루 종일 머리를 매고 있다가 풀어헤쳤다. 보지 않아도 머리가 헝클어졌을 것이 분명했다.연정훈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하니 괜히 어색해져서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계속 만졌다.그 행동은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더욱 여성스럽게 느껴졌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안아 자리에서 일으켜 자기 몸 위로 안시연을 앉혔다.안시연은 순간 손을 어디다 놔야 할지를 몰랐다.시선을 들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얼굴이 약간 붉어진 안시연이 아랫입술을 핥았다.원래는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면 이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하지만 시선이 부딪힌 그 순간, 연정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머금었다.“읏...”자물쇠와 열쇠처럼. 입술이 닿는 순간, 안시연은 자연스럽게 연정훈의 목을 그러안았다.연정훈은 섬세하게 안시연의 입술을 훑었다. 그리고 약간 힘을 주어 그녀의 턱을 잡았다.안시연은 입을 살짝 벌려 연정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숨결이 섞이고 거친 호흡을 내뱉고 다시금 입술을 머금는다.차 안에서는 야릇한 소리가 더욱 커졌다.안시연의 얼굴은 아예 새빨갛게 되었다.“교수님...”어느새 연정훈 밑에 깔린 안시연은 살짝 떨리는 동공으로 그를 불렀다.차 안의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연정훈이 팔로 받치고 있다고 해도 안시연과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거의 가슴과 가슴이 닿을 거리였다.연정훈의 눈은 감정을 알 수 없이 깊었다. 그래서 안시연은 그의 기분을 종잡을 수 없었다.고개를 숙인 그는 오피스 룩을 입은 그녀의 몸을 훑었다. 적당한 핏이 그녀의 가슴을 감싸고 있었다.연정훈은 손을 뻗어 천천히 단추를 풀어갔다.안시연은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서늘한 감각이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연정훈의 손가락은 우연히 그녀의 피부를 훑으며 지나갔다.손으로 눈을 막은 안시연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그저
안시연은 연정훈을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멈추라고 하고 싶었을 뿐이다.하지만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간 바람에 비릿한 피 맛을 느끼게 되었다.약간의 신음을 흘린 연정훈이 안시연을 놓아주었다.안시연의 입술에 닿는 그의 호흡은 여전히 뜨거웠다.정신을 차린 안시연은 연정훈의 입술 위의 붉은 자국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 옷차림도 신경 쓰지 못한 안시연은 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보려고 했다.연정훈은 몸을 약간 세워 그녀의 손을 피했다.안시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라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어디부터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연정훈은 그녀를 보더니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여전히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이었다.차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여유롭게 몸을 일으켜 안시연이 아까 앉았던 곳에 앉았다.벨소리는 꺼진 지 오랬다. 연정훈은 핸드폰을 옆자리에 놓았다.안시연은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받아서 들었다. 누가 전화를 건 것인지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교수님,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내가 오늘 술을 좀 많이 마셨어.”연정훈이 담담하게 얘기했다.안시연은 그대로 굳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그러니까,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려주는 건가?안시연은 마음속이 꽤 복잡해졌다.자기는 빚은 진 사람이니까, 연정훈이 자기를 원하는 건 당연한 줄 알았다.하지만 연정훈은 그냥 취했을 때만 그녀를 떠올린다는 것이었다.안시연은 시선을 내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정훈은 눈을 감고 담담하게 얘기했다.“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 봐.”차가운 그의 말투는 처음 그녀와 밤을 보냈을 때보다 더욱 멀게 느껴졌다. 아까의 일은 그저 취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더욱 확실하게 알려주는 기분이었다.안시연은 목이 바짝 말라 들어가 겨우 입을 열었다.“교수님도 일찍 들어가세요.”말을 마친 그녀가 차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아까의 일 때문에 놀란 건지
이승우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동생이라니? 내 작은고모!”부승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안 믿어.”이승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갈아입는 대신 양시연과 잡담을 나누며 웨이터에게 간단한 간식을 부탁했다.“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 있어?”그러다 부승희가 갑작스레 이승우를 향해 돌직구를 던졌다.양시연은 호기심을 숨길 수 없었지만, 부승희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질문할 줄은 몰랐다.옆에서 연정훈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이 상황을 구경했다.이승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왜? 내 약점을 들춰내려는 거야?”부승희는 물러설 기미 없이 말을 이었다.“전에 말했잖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결혼한다고.”이승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힐끔 바라보며 이승우의 어색한 침묵을 지켜보았다.그러나 이승우는 언제나 자신만만한 성격답게 대답을 내뱉었다.“헤어졌어.”부승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과장되게 반응했다.“그래? 왜?”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그는 결국 혀를 차며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부승희의 머리를 밀칠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그때 모연준이 화원에서 종이봉투를 들고 들어왔다.이승우는 손을 주머니에서 빼려다 잠시 멈칫하고 다시 넣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이승우에게 건네며 말했다.“됐어. 동생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아니지, 고모에게 고맙다고 전해줘.”말을 마치기 무섭게 부승희는 이승우가 받기도 전에 손을 놓아 종이봉투가 떨어질 뻔했다.양시연은 연정훈 옆에 기대어 앉아 이승우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정훈과 눈을 맞췄다.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그녀의 시선에 연정훈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의 불편한 상황이 더 길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그는 조용히 양시연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옷 갈아입어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알게 될 거야.”부승희는 ‘으악’소리를 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무서워. 진짜 무서워.”부승희는 팔을 내밀어 양시연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요. 소름 돋는 거 봐요. 완전 실시간 소름 돋았어요.”양시연은 연정훈이 무심코 던진 고백 같은 말에 이미 당황해 심장이 두근거리던 참이었다.부승희의 말에 더해 머리까지 뜨거워진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부승희의 팔을 잡고 살짝 움켜쥐었다.부승희는 침묵했다.“...”‘정말 어이없네.’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어딘가 묘하게 어울리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승우가 젊은 여자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훈남 훈녀 조합이라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부승희는 헉하는 소리를 내며 관심을 보였다.양시연은 이 틈을 타 어색함을 벗어나려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물었다.“이승우 씨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건가요?”연정훈은 힐끔 그쪽을 보며 답했다.“잘 모르겠어. 별 얘기 없었는데.”대화하는 동안 이승우와 그 여자가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부승희는 의자에 기대어 미소를 띤 채 말없이 그들을 바라봤다.이승우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고 살짝 눈썹을 올렸다가 가벼운 태도로 여자를 소개했다.“윤린아 씨, 내 친구야.”부승희는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친구라고?”이승우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왜? 친구가 뭔지 몰라?”“다른 사람 친구는 아는데 넌 잘 모르겠네.”“...”윤린아는 가볍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정확히 말하면 이승우 도련님은 제 클라이언트예요. 아주 중요한 고객이죠.”그녀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밝게 웃었고 말을 마치자마자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떠났다.윤린아가 떠나자 부승희는 이승우를 힐끔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여자친구야?”이승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너는 생각이 왜 이렇게 복잡해? 친구라고 했잖아.”부승희는 어이없다는 듯 표정을 짓고 양시연과 연정훈을 번갈아 바
주변은 다시 한번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부승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술잔에 과일 주스를 채우려 했다. 이승우의 주책을 떠드는 입을 막으려 했다.하지만 연정훈은 술잔을 살짝 옮겨 부승희의 손길을 피했다.다들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했다.부승원은 차분한 얼굴로 부승희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됐어. 앉아. 연정훈의 작전 방해하지 마. 인생에서 한 번뿐인 대사건이라고.”부승희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시연 씨, 내가 도우려 했는데 소용없네요. 오늘 밤 스스로 조심해야겠어요.”양시연은 침묵했다.“...”주변 사람들이 또 한 번 들고 일어나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연정훈은 얼굴 하나 붉어지지 않은 채 양시연의 손을 잡고 다음 테이블로 향했다.술잔을 올리는 틈을 타서 연정훈은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가리고 낮게 말했다.“술 좀 적게 마셔요. 아직도 많은 사람이 남아 있잖아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바라보았다.마음속에 남아 있던 질투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홍조 띤 얼굴을 보자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연정훈은 입술을 살짝 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루는 피할 수 있어도 그 후에는 못 피할 거야.”양시연은 당황했다.???아직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주변에서 누군가 빠르게 외쳤다.“다들 들었어요? 신랑이 신부를 협박했어요! 하루는 피할 수 있어도 이후에는 못 피한다네요!” “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짓고 말을 꺼낸 사람과 잔을 부딪치며 술을 단숨에 비웠다.그 사람도 금방 눈치를 채고 한 잔을 비우며 웃었다.“형, 신혼여행 가서는 너무 심하게 굴지 말아요!”양시연은 어이없었다.“...”‘이 사람들 정말...’양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술잔을 다른 손으로 옮겨 잡으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했지만, 손을 내밀기 무섭게 연정훈이 양시연의 손을 꽉 잡았다.연정훈의 손바닥은 건조하고 따뜻했다. 그의 강한 손길에
양지원은 계속해서 양시연 쪽 상황을 신경 쓰고 있었다. 비록 민수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기분이 상한 양지원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양석진이 양지원을 붙잡았다.“뭐 하는 거예요? 가서 시연을 좀 봐야겠어요.”“거기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시연을 도와줄 사람이 없을 수 없어.”양지원은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 앉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맞은편 테이블에 고정돼 있었다.연씨 가문의 테이블에서는 모두가 동시에 민수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듯했지만, 그 안에 비난의 기류가 느껴졌다.‘제발 이성적으로 행동해 주시길.’민수희는 침묵했다.“...”사실 민수희는 오늘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기분까지 엉망인 상태에서 억지로 이 자리에 나왔다. 그런 와중에 이런 상황을 마주하자 갑작스레 서러움이 밀려왔다.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민수희의 가족이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이해해 주지 않는 듯했다.“시연아, 할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오늘은 술을 마시기 힘드신가 보다.”표세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양시연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표세연은 직접 민수희의 잔에 주스를 따르며 다정하게 몇 마디를 건네려 했다.그러나 민수희는 고개를 들어 차갑게 그녀를 바라봤다.표세연의 손이 멈췄고 분위기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때 한쪽에 앉아 있던 연호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민수희의 얼굴이 굳어졌다.“할머니가 오늘 몸이 좀 불편하시니 이 잔은 할아버지가 대신할게. 너희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연호민은 말을 마치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잔을 두 사람을 향해 들어 올렸다.양시연과 연정훈은 눈길을 주고받으며 동시에 잔을 낮춰 깊이 예를 표했다.연호민이 자리에 앉자 민수희는 무언가 말하려다 연호민의 단호한 태도에 말을 삼켰다.“세연아,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아 보이신다. 안으로 가서 쉬실 수 있도록 부축해 드리거
양시연은 연정훈의 이마를 만져보고 자기 이마도 만져보며 온도를 비교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양시연의 맑고 진지한 눈빛과 마주친 연정훈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더구나 그녀는 도망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변명까지 해주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괜히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결국 문제는 자신의 질투심이었다.특히 양혁수와 얽힐 때마다 몸이 시큰거리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걸 느꼈다.“별일 아니야. 며칠 밤새웠더니 좀 어지러워서 그래.”“밤새웠어요?”양시연은 한숨을 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밤새우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잖아요...저도 이틀 전부터 일부러 일찍 자고 있었는데.”그녀는 가방을 열어 에너지 음료 몇 개를 꺼냈다.포장을 뜯어 하나씩 연정훈에게 건넸다.“이거 마셔요.”연정훈은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이게 다 뭐야?”“청심환이에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마셔요. 우리 이제 결혼까지 했잖아요. 제가 결혼하자마자 과부 되려고 정훈 씨를 해코지라도 하겠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양시연은 직접 음료 하나를 집어 들어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옷에 흘리지 않으려 양시연의 손목을 살짝 잡고 음료를 마셨다.“남은 것도 다 마셔요.”양시연이 단호히 말했다.연정훈은 잠시 양시연을 바라보다가 마치 독약이라도 마시는 듯한 표정으로 남은 음료를 들이켰다.전부 마시고 나서 양시연은 활짝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연정훈은 짧게 생각한 뒤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달달하네.”양시연은 두 손을 모으며 과장된 표정으로 감탄했다.“세상에! 맛까지 맞히다니 정말 대단한데요. 맞아요. 달달하죠.”연정훈은 침묵했다.“...”양시연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단맛이요. 제가 물어
“네. 맹세합니다.”양시연의 맑은 목소리가 들리자 연정훈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객석에서는 이승우와 다른 하객들이 저마다 속삭이며 미소를 지었다.‘다행이다. 모든 게 완벽해.’단상 위에서 사회자가 말했다.“이제 양가의 신랑과 신부가 결혼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부승희가 조심스럽게 반지 상자를 들고 단상으로 올라왔다.상자 안에는 양시연의 외할머니가 남긴 유품인 반지가 담겨 있었다.그 반지는 결혼식 며칠 전 연정훈이 직접 양시연에게 부탁해 받아 간 것이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외할머니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셈이라 생각해.”양시연은 처음에는 과거에 대한 원망으로 인해 반지를 내어주기 꺼렸지만, 결국 마음을 열었다.그녀는 결혼이라는 큰 순간이 단순히 계약이 아니라 외할머니의 유산으로 증명되는 한 조각의 따스함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위안을 삼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들어 천천히 반지를 끼웠다.그 반지는 그녀의 손에 완벽히 맞았다.분명 그의 세심한 배려로 조정되었을 것이다.“이제 신부님 차례입니다.”부승희가 조용히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들어 올렸다.잠시 연정훈을 바라본 뒤 그의 손을 가만히 떠받치며 반지를 그의 손가락에 끼웠다.그 순간 그녀는 베일 너머로 나지막이 속삭였다.“이번엔 절대 잃어버리지 마세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과거의 잘못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잠긴 무거운 감정을 씻어내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감정은 한순간 억눌리며 불쾌함보다는 죄책감과 후회가 밀려왔다.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입술을 열었다.“그럴 일 없을 거야.”양시연은 그제야 반지를 끝까지 밀어서 끼워줬다.현장에는 박수갈채가 울려 퍼졌다.사회자가 위쪽에서 말했다.“신랑님, 이제 신부에게 입맞춤하셔도 됩니다.”이때 관객석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승우 등 하객들이 여기저기서 장난스럽게 외쳤다.부승희는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시끄럽게 굴긴.”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부승희를 힐끗 보
결혼식 입구 모퉁이에 서서 바깥 햇빛이 발끝에 딱 맞게 드리워졌다.양시연은 결혼행진곡 멜로디를 가볍게 흥얼거리며 잠시 후 발을 잘못 내딛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양석진이 부드럽게 말했다.“긴장하지 마. 설령 실수하더라도 괜찮아.”양시연은 베일 너머로 고개를 돌려 양석진을 바라봤다.“긴장되세요?”양석진은 잠시 멈칫했다.오늘에 이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양석진은 오랜 세월 동안 충분히 단련되었기에 긴장할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양시연의 말에 맞춰 양석진은 이렇게 말했다.“긴장되지.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마침내 잔디 쪽에서 음악이 울려 퍼졌다.양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양석진의 팔을 잡았다.그녀가 첫발을 내딛자 뒤따르던 두 명의 브라이드 메이드가 양시연의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야외에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차양이 설치되어 있었고 위에는 냉방 장치가 있어 온도는 적당했으며 햇살은 길 전체에 찬란히 비추고 있었다.잔디 구역 모퉁이를 돌며 걸을 때까지는 양시연도 비교적 평온했지만, 연정훈을 향해 곧바로 이어지는 하얀 실크 러그 위에 발을 디딘 순간 양시연은 자기 심장 소리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주변의 시선은 모두 차단되었다.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연정훈에게 조금씩 가까워졌다.그 순간마다 양시연의 머릿속에는 그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장면이 떠올랐다.첫 만남은 대학교에서였다.그 당시 그는 교양 강의를 맡은 교수였고 멀리서 보았을 때 양시연은 연정훈이 젊고 준수하며 뛰어난 기품을 지닌 인물이라고만 생각했다.그렇게 쉽게 남다른 천재성을 지닌 연정훈을 부러워했었다.그 후로 이어진 만남은 하나하나 양시연에게 뚜렷하게 기억되고 있었다.심지어 황당했던 재회조차 양시연은 연정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 후로는 더 황당한 관계가 지속되었다.연정훈과의 만남과 사랑은 마치 꿈과 같았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꿈은 깨어났고 남은 것은 참담한 기억과 되돌아보기 힘든 고통뿐이었다.양
“다행히 따로 준비한 웨딩드레스가 있어서요. 게다가 지금 메이크업이랑도 딱 어울리네요.”직원이 말했다.양시연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며 주변 사람들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여러분, 정말 죄송해요. 조금만 더 고생해 주세요. 나중에 제가 모두에게 작은 감사 선물을 준비할게요.”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힘들다고 말하던 사람들도 다들 최선을 다해 움직이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시간을 계산해 보며 크게 지연되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휴대폰을 꺼내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하자 연정훈의 답장은 단 한 글자였다.[응.]‘응?’양시연은 의아했다.연정훈을 하루 이틀 아는 것도 아니고 특히 최근엔 그가 이렇게 건성으로 대답한 적이 거의 없었다.‘무슨 일이지?’아까의 상황을 곰곰이 떠올리던 양시연은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맙소사. 정훈 씨, 혹시 내가 도망치려고 한 거로 생각한 건 아니겠지?’그런 게 아니었고 양시연은 양지원을 찾으러 간 거였다!양시연은 황급히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 아까 엄마를 찾으러 간 거예요.]도망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연정훈의 답장은 짧았다.[알았어.]연정훈은 이모티콘 하나 없이 대답했지만, 양시연은 그가 딱딱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고 있을 것 같아 괜히 긴장되었다.얼굴을 한 번 비비며 다시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저 정말로...]도망가려던 게 아니라는 말이 채 쓰이기도 전에 연정훈의 답장이 먼저 왔다.[괜찮아. 어머니 찾는 거 도와줄까? 아까 우연히 뵀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그 메시지를 보고 한 글자씩 천천히 해독하듯 읽어보았다.‘겉으로 보기엔 문제없어 보이는데?’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결혼식 끝나고 말할게요. 여기 거의 다 준비됐어요.][알았어. 기다릴게.]마지막 메시지를 보자 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다행이다. 다행이야.’그녀는 다시 한번 연정훈은 이렇게 예민할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
양지원이 전화를 받지 않자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웨딩드레스를 움켜쥐고 급히 걷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코너를 돌자마자 연정훈을 마주쳤다.연정훈은 양시연의 다급한 표정과 웨딩드레스를 움켜쥔 모습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어디 가는 거야?”“저...”말끝이 채 맺히기도 전에 양시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하였고 그것이 양혁수였다!그녀는 얼굴이 밝아지며 급히 전화를 받았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여보세요?”“응...”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연정훈과 눈을 마주친 후 옆으로 밀고는 물었다.“괜찮아? 부하가 너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이어갔다.연정훈은 옆에서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시선을 돌렸다.양혁수는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그 친구가 좀 과장했나 봐.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약간 흔들렸는데 내가 안전벨트를 안 매고 있어서 허리를 살짝 부딪혔어.”“정말 괜찮은 거지?”“응. 멀쩡해. 그냥 검진받고 이따가 협력사랑 식사 약속도 있어.”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행이다. 네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셨겠어.”“알았어. 알았어. 그 정도로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끊을게. 검진받아야 하거든.”“그래. 검사 다 끝나고 아무 이상 없으면 나랑 어머니한테 안부 꼭 전해.”“알았어.”양혁수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전화를 끊었다.양시연은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연정훈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방금 양혁수가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아무 일 없대요.”‘다행히 아무 일 없다. 하지만 방금 일이 있었으면 양시연은 결혼식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려 했던 걸까?’연정훈은 목이 마른 듯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어서 다행이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돌아서려다 갑자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