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억울함을 꾹 눌렀다.이 대표는 여전히 주효진을 칭찬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자리에 앉아 담담하게 얘기했다.“잘했네요.”주효진을 칭찬하는 말에 주효진은 눈에 기쁨이 가득했다.안시연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우울함을 달랬다.임유정은 그 소리를 듣고 입술을 작게 끌어올렸다.임유정은 주효진 같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그녀는 그저 연정훈이 안시연을 대하는 채도를 보고 싶었다.아까 안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임유정이 봤으니 연정훈도 봤을 것이다. 하지만 연정훈은 안시연의 편을 들어주고 있지 않았다.그렇다면 연정훈에게 안시연도 그저 그런 사람일 뿐인 것 같았다.연정훈은 그저 잠깐 시간을 내서 온 것이었다. 주효진의 보고를 들은 후 그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가 떠나자 이 대표가 바로 그를 따라 나가며 배웅해 주었다.주효진도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이때를 틈타 회의를 주최했다.안시연은 손에 쥔 서류를 천천히 보고 있었다. 주효진이 하는 말은 하나도 듣지 못했지만 연정훈이 나갈 때, 임유정이 그에게 하는 말은 들었다.“오늘 밤 같이 저녁 먹을래요?”연정훈의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연정훈이 거절할 것 같지는 않았다.미인과 밥을 먹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까.“팀은 일단 이렇게 나누겠습니다. 1팀에서는 이번 주 안에 세 가지 기획안을 내오길 바랍니다.”주효진이 명령을 내렸다.동료가 또 주효진을 욕하면서 안시연에게 얘기했다.“미친 거 아니에요? 우리 팀을 죽이겠다는 거 아니냐고요.”안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동료가 힘들게 된 건, 어쩌면 안시연의 탓일지도 모르니까....임유정은 연정훈을 떠나보낸 후 기분이 좋지 않았다.왜냐하면 연정훈이 그녀를 거절했기 때문이다.사무실에 돌아오니 주효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저급한 출신에 연정훈과 엮이고 싶어 하는 여자들과는 전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하지만 주효진은 최대한 임유정에게서 점수를 따려고 했다.말을
안시연은 침착하고 담담하게 얘기했다.“임 대표님, 제게는 아버지가 있어요.”임유정은 흠칫하더니 바로 사과를 했다.“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저 시연 씨의 신세가 불쌍해서 그래요.”아까까지만 해도 안시연은 임유정이 안시연과 연정훈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임유정의 행동은 주지혁과 비슷했다.임유정은 그녀를 연정훈한테서 떼어내려고 했고, 주지혁은 그녀를 소유하려고 했다.“다 같은 여자로서, 시연 씨보다 두 살 큰 언니로서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다 시연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고요. 사람을 멀리 볼 줄 알아야 해요. 사업은 남자보다 훨씬 중요하니까요.”임유정은 부드럽게 얘기하면서 뜻을 숨겼다. “이런 기회 흔치 않아요.”그냥 들었을 때는 확실히 그럴듯했다.이 기회가 안시연의 실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안시연은 최선을 다할 것이다.하지만 다른 사람이 던져주는 기회라면 그게 꿀인지 독인지는 모르는 일이다.입술을 말던 안시연이 부드럽게 얘기했다.“임 대표님, 저를 생각해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하지만...”안시연은 시선을 약간 돌리고 얘기했다.“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임유정의 입꼬리를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의아해하면서 물었다.“왜죠?”“저는 정인 과학기술의 직업을 좋아해요. 착실하게 노력해서 인턴 기간을 버텨야죠.”안시연이 얘기했다.임유정은 표정이 약간 굳었다.“정인 과학기술은 좋죠. 하지만 정인 과학기술은 창립된 지 얼마 안 되는 회사예요. 게다가 회사 직원보다는 철밥통인 공무원이 좋지 않아요?”“저 같은 평범한 사람은 재정부에 가도 공무원 대접을 못 받을걸요.”임유정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묵묵히 안시연을 쳐다보았다.‘하, 내가 너무 얕봤네.’하지만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그래도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쉽지 않은 기회니까요.”“알겠습니다, 임 대표님.”“괜찮아요.”임유정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웃더니 눈짓했다.“가서
“안시연 씨?”차시훈은 입속에서 이 이름을 굴렸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안시연의 얼굴을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이름이 예쁘네요.”“얼굴도 예쁘죠?”옆의 사람이 장난스레 얘기했다.안시연은 자연스레 차시훈 옆에 앉게 되었다.같은 여자이긴 하지만, 차시훈이 다가와서 얘기할 때, 안시연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어디 사람이에요?”“경인시요.”“어쩐지, 경인시 사람들은 다 예쁘더라고요.”듣기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대화였다.하지만 상대방에게서 느껴지는 남자 향수의 향이 안시연을 덮쳐오자 안시연은 불편함을 느꼈다.차시훈은 확실히 안시연에게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안시연에게만 말을 걸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러다가 식사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안시연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최대한 적게 마시고 있었다.하지만 그러다 보니 누군가가 불만을 품고 안시연 더러 두 잔을 마시라고 했다.차시훈이 웃으면서 막아 나섰다.“왜 굳이 시연 씨한테 그래요?”“아이고, 우리 차 대표님이 아주 애지중지하네요!”이리저리 장난스레 얘기하는 말에도 차시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안시연은 몸 위에 벌레가 가득한 기분이었다. 메스꺼움이 점점 올라오고 있었다.차시훈은 안시연에게로 몸을 돌려 낮게 얘기했다.“크게 신경 쓰지 말아요. 이 사람들이 좀 투박해서 그래요.”차시훈의 뜨거운 숨결이 안시연의 귀에 닿았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실수인지는 아무도 몰랐다.안시연이 밀어내려고 할 때, 차시훈의 손이 안시연의 허벅지에 닿았다.안시연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차시훈도 눈치챈 것 같았다. 차시훈은 또 안시연에게 음식을 짚어주며 얘기했다.“먹어봐요. 맛있으니까.”“감사합니다, 차 대표님.”안시연은 메스꺼움을 꾹 참고 젓가락을 들었다.맞은 편의 임유정은 앉아서 직원들이 권하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면서 안시연 쪽의 상황을 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경인시에 남아서, 정인 그룹에 남
안시연은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중개상과 밥을 먹는데 메인 요리는 바로 안시연이었다.안시연은 연정훈과 멀어지겠다고 얘기하면서 홀로 직장을 찾았다. 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에게 놀아나고 있었다.안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정훈은 담담하게 얘기했다.“어느 중개상?”“LC 그룹이요.”연정훈은 머릿속을 뒤집으며 생각했다.“출시를 맡은 사람의 성이 차씨던가?”여기까지 얘기하자 안시연은 알 것만 같았다. 연정훈도 차 대표에 대해서 잘 알 것이다.그 순간, 안시연은 그녀의 밑바닥까지 공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그녀가 연정훈이었다면 큰 소리로 비웃을 것이다.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바람이 또 불어왔다.안시연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연정훈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턱을 잡았다.안시연이 멍하니 서 있을 때, 연정훈은 손수건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연정훈은 마치 기계를 닦아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안시연과 시선을 마주쳤을 때도 그저 담담하게 지나칠 뿐이었다.손을 뗐지만 연정훈의 담배 냄새가 안시연의 몸에 남았다. 그 담배 냄새는 차시훈이 뿌린 저급한 남자 향수의 냄새와 크게 비교되었다. 거의 하늘과 땅 차이였다.안시연은 마음이 약간 설렜다.연정훈은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물었다.“그 데이터 정리, 혼자 한 거야?”안시연은 약간 놀랐다.연정훈이... 알고 있었다.안시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무슨 대답을 할지 생각했다.그녀를 놀리고 비웃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고발할 기회를 주는 것인지 몰랐다.하지만 어느 쪽이든지, 안시연은 그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용기가 없었다.처음부터 그를 떠나려고 한 건 안시연이다.“... 다 같이 한 거예요.”연정훈이 침묵했다.그의 시선은 오랫동안 안시연에게 닿았다. 그러다가 이내 시선을 떼고 얘기했다.“돌아가.”그는 여전히 차갑게 얘기했다. 안시연은 그 말투에서 연정훈이 불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안시연은 그 자리에서
주지혁이 일어나서 정리를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조이현이 그의 팔을 잡고 애교를 부렸다.“지혁 씨, 나 새우 좀 까줘.”주지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1초 동안 생각한 주지혁은 바로 안시연을 도우려는 생각을 접고 조이현을 그러안으며 얘기했다.“알았어.”안시연은 그 모습을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외치는 소리는 여전했다.흥분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안시연은 메스꺼움을 느꼈다.차시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됐어요, 됐어. 그만 해요. 다른 사람들이 컴플레인을 걸겠어요.”차시훈은 자기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일어나서 안시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얘기했다.“얼른 마시고 저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자고요.”“오~”사람들은 또 소리를 질렀다.안시연은 살짝 굳어서 고개를 들었다. 억지로 성인 남자처럼 만들어진 여자의 얼굴을 역광으로 보면서 메스꺼움이 가슴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그녀는 약간 입을 열었다.“차 대표님, 저...”“그냥 술 한 잔일 뿐이에요.”차시훈은 이미 그녀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팔을 잡고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 올렸다. 안시연은 그저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옆의 주효진과 임유정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주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새우만 까고 있었다. 차시훈은 억지로 안시연의 손에 술잔을 밀어 넣어주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 뜨거운 온도에 안시연은 불쾌함이 밀려왔다.“러브샷! 러브샷!”사람들이 또 분위기에 휩쓸려 외쳤다.“괜찮아요. 걱정하지 말고...”토닥이는 차시훈의 말에 사람들은 더욱 흥분했다.안시연은 사람이 이렇게 추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천천히 술잔을 들어 올렸다. 쿵. 쿵. 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안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술잔을 내려놓고 입구를 쳐다보았다.“음식이 온 건가요?”누군가가 얘기했다.안시연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차시훈은 아무 이유나 찾아 떠났다.그러자 사람들은 금세 재미를 잃었다.임유정은 화를 꾹 참고 있느라 다른 사람들을 관여할 사이가 없었다.주효진은 사람들을 시켜 안시연에게 술을 먹이려 했지만, 주지혁의 눈짓에 그만두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식은 끝났다.룸에서 걸어 나온 안시연은 마치 100년이 지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이때 핸드폰이 울렷다. 꺼내서 확인해 보니 연정훈이 위치를 보낸 것이었다.한남원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안시연은 핸드폰을 꼭 쥐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외진 곳으로 도망간 후 목적지로 향했다.하이힐을 신고 있었지만 발걸음만은 가벼웠다.아파트의 가로등 아래에서 검은색 벤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진수빈은 옆에 서 있다가 안시연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연정훈은 술을 많이 마셔 의자에 기대앉아있었다. 문이 열리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밖을 쳐다보았다. 먼저는 연약한 몸이 눈에 들어왔고 이내 급박한 호흡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뛰어온 건가?안시연이 몸을 숙이고 차에 탔다. 그리고 안경 너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를 마주했다.약간의 침묵이 흘렀다.진수빈이 먼저 얘기해 주었다.“시연 씨, 연 대표님께서 술을 많이 드셔서 바람을 쐬면 안 좋습니다.”안시연은 작게 대답한 후 차에 올라탔다.차 문을 닫고 진수빈은 운전석으로 가 천천히 차를 운전해서 떠났다.뒷좌석은 조용하기만 했다.안시연은 약간씩 깊어지는 남자의 호흡을 들으면서 술을 많이 마셔서 힘든가 보다 생각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시연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차 안의 빛은 어두웠다. 그래도 몇 번이나마 멀리서 마주 오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덕분에 시야가 환해지기는 했다. 연정훈은 조용히 눈을 뜨고 그 빛을 빌려 거울 속에서 안시연의 얼굴을 마주했다.창문이 굳게 닫혀있어서 야경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안시연은 창문을 보면서 멍을 때리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연약함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았다. 안시연만 보면 그녀
연정훈은 그 검은색 머리끈을 버리지 않고 호주머니에 넣었다.안시연은 하루 종일 머리를 매고 있다가 풀어헤쳤다. 보지 않아도 머리가 헝클어졌을 것이 분명했다.연정훈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하니 괜히 어색해져서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계속 만졌다.그 행동은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더욱 여성스럽게 느껴졌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안아 자리에서 일으켜 자기 몸 위로 안시연을 앉혔다.안시연은 순간 손을 어디다 놔야 할지를 몰랐다.시선을 들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얼굴이 약간 붉어진 안시연이 아랫입술을 핥았다.원래는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면 이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하지만 시선이 부딪힌 그 순간, 연정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머금었다.“읏...”자물쇠와 열쇠처럼. 입술이 닿는 순간, 안시연은 자연스럽게 연정훈의 목을 그러안았다.연정훈은 섬세하게 안시연의 입술을 훑었다. 그리고 약간 힘을 주어 그녀의 턱을 잡았다.안시연은 입을 살짝 벌려 연정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숨결이 섞이고 거친 호흡을 내뱉고 다시금 입술을 머금는다.차 안에서는 야릇한 소리가 더욱 커졌다.안시연의 얼굴은 아예 새빨갛게 되었다.“교수님...”어느새 연정훈 밑에 깔린 안시연은 살짝 떨리는 동공으로 그를 불렀다.차 안의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연정훈이 팔로 받치고 있다고 해도 안시연과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거의 가슴과 가슴이 닿을 거리였다.연정훈의 눈은 감정을 알 수 없이 깊었다. 그래서 안시연은 그의 기분을 종잡을 수 없었다.고개를 숙인 그는 오피스 룩을 입은 그녀의 몸을 훑었다. 적당한 핏이 그녀의 가슴을 감싸고 있었다.연정훈은 손을 뻗어 천천히 단추를 풀어갔다.안시연은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서늘한 감각이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연정훈의 손가락은 우연히 그녀의 피부를 훑으며 지나갔다.손으로 눈을 막은 안시연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그저
안시연은 연정훈을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멈추라고 하고 싶었을 뿐이다.하지만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간 바람에 비릿한 피 맛을 느끼게 되었다.약간의 신음을 흘린 연정훈이 안시연을 놓아주었다.안시연의 입술에 닿는 그의 호흡은 여전히 뜨거웠다.정신을 차린 안시연은 연정훈의 입술 위의 붉은 자국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 옷차림도 신경 쓰지 못한 안시연은 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보려고 했다.연정훈은 몸을 약간 세워 그녀의 손을 피했다.안시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라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어디부터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연정훈은 그녀를 보더니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여전히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이었다.차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여유롭게 몸을 일으켜 안시연이 아까 앉았던 곳에 앉았다.벨소리는 꺼진 지 오랬다. 연정훈은 핸드폰을 옆자리에 놓았다.안시연은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받아서 들었다. 누가 전화를 건 것인지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교수님,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내가 오늘 술을 좀 많이 마셨어.”연정훈이 담담하게 얘기했다.안시연은 그대로 굳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그러니까,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려주는 건가?안시연은 마음속이 꽤 복잡해졌다.자기는 빚은 진 사람이니까, 연정훈이 자기를 원하는 건 당연한 줄 알았다.하지만 연정훈은 그냥 취했을 때만 그녀를 떠올린다는 것이었다.안시연은 시선을 내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정훈은 눈을 감고 담담하게 얘기했다.“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 봐.”차가운 그의 말투는 처음 그녀와 밤을 보냈을 때보다 더욱 멀게 느껴졌다. 아까의 일은 그저 취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더욱 확실하게 알려주는 기분이었다.안시연은 목이 바짝 말라 들어가 겨우 입을 열었다.“교수님도 일찍 들어가세요.”말을 마친 그녀가 차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아까의 일 때문에 놀란 건지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