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의 앞에서 양시연은 어떻게든 연기를 이어가야 했다.그래서 변백호를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뭘 하자는 거야!”변백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 잔금 받기는 틀렸네.’변백호를 믿고 따르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양시연이 덥석 변백호의 팔에 팔짱을 꼈다.그러자 느슨해졌던 연정훈의 입꼬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어쭈?’양시연은 그 여자를 향해 말했다.“릴리 씨가 어떻게 여기에?”여자는 여전히 울먹거리며 말했다.“언니, 선생님이 한국 이름 지어줬어요.”“아... 그래요? 이름이 뭔데요?”“노지혜요. 지혜롭다는 그 지혜요.”애교가 철철 흘렀다.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양시연을 향했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은 채로 변백호를 꼬집었다.‘지혜롭다? 아주 애정이 넘치네.’고통을 참지 못한 변백호가 빠르게 팔을 빼냈다.“시연 씨가 데리고 오라고 했잖아요. 잊었어요?”양시연은 속으로 온갖 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내색 없이 미소를 지었다.“아, 깜빡했네요.”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노지혜에게 말했다.“자, 여기로 와서 앉아요. 디저트 먹을래요?”“언니, 감사합니다...”“...”‘말꼬리 늘리지 말라고!’양시연은 잠시 자리를 떠나 디저트 챙기러 갔다.그러자 노지혜는 바로 쪼르르 변백호 앞으로 다가가 양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잔뜩 불쌍한 표정을 지었으며 큰 눈으로 뚫어져라 변백호를 바라보았다.“...”변백호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그때 소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변백호의 팔짱을 꼈다.“...”디저트를 챙겨 돌아오던 양시연도 입을 딱 벌렸다.‘젠장!’양시연은 한숨을 내쉬고 디저트를 근처 테이블에 올려두었다.‘먹긴 뭘 먹어!’분위기는 아주 기묘해졌다.양시연은 더 이상 연기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변백호처럼 의리 없는 녀석을 믿은 자신을 탓해야 했다.노지혜는 아무 말도 없이 변백호 옆에 찰싹 붙었고 죽어도 떠나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다른 사람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해도 반우희는 아니
반우희는 노지혜와 대화가 통하지 않자 아예 무력으로 처리하려 했다.그러자 노지혜는 아야, 하고 작게 신음을 뱉었으며 잡힌 곳이 아픈 듯 인상을 찌푸렸다.변백호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무의식적으로 반우희에게 이렇게 말했다.“잡아당기지 마요.”이에 반우희가 깜짝 놀랐다.잠시 숨을 고른 반우희가 다시 용기를 내어 말을 이어가려는데 부승원이 반우희를 불렀다.“아직도 오지랖 넓은 걸 고치지 못한 거야?”반우희가 반박하려고 하자 부승원이 계속 말을 이었다.“길거리에서 싸우는 두 강아지를 말리다가 하마터면 물릴 뻔했던 건 잊었어?”반우희가 고개를 갸웃했다.‘강아지 싸움?’‘내가 언제?’부승원이 무표정으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양이랑 강아지 싸움에는 끼어드는 게 아니야.”반우희는 그제야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그리고 노지혜를 잔뜩 노려보았다.‘이 강아지!’그러나 노지혜는 반우희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멍멍!’반우희는 어이가 없었다.변백호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고 부승원에게 한번 당했으니 당연히 되갚아주려 했다.부승원은 평소 말수가 적었지만 입만 열면 공격력이 상승했다.누군가 말리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하루 종일 말다툼할 것이다.양시연은 속으로 변백호를 욕하며 다시 표정을 고쳤다. 그리고 좋아하는 과일을 챙겨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노지혜가 양시연의 자리를 꿰찼지만 양시연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대신 그 맞은편 자리에 앉으려 했는데 그러려면 연정훈의 앞으로 지나가거나 테이블을 빙 둘러 걸어야 했다.양시연은 빙 둘러 돌아가는 걸 택했다.연정훈은 미리 다리를 안으로 접어 양시연이 편하게 지나가도록 했다.양시연이 힐끗 쳐다보자 연정훈은 턱을 살짝 돌려 이곳으로 지나가라는 시늉을 했다.‘흥. 내가 왜.’넓은 홀은 꽤 북적거렸다.이승우는 혼자 이 재밌는 구경을 보다가 왠지 쓸쓸해졌다. 그래서 변백호와 부승원 사이에 끼어들어 몇 마디를 하다가 또다시 연정훈과 양시연 사이에 머리를 빼꼼 내밀고 분위기를 살폈다.양
“언제나 환영이에요. 누나랑 시간 의논하고 저한테 알려주세요. 두 분이 오지 않으면 생일 파티는 시작하지 않을 거예요.”“...”반우희가 승주를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그만해. 그게 무슨 생일 파티냐? 뭐 라면으로 파티하게?”“누나 왜 그래요.”승주는 섭섭하다는 듯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충분히 준비했다고요.”“너 사이다 겨우 한 병 살 돈밖에 없잖아!”“아니거든요! 두 병 샀거든요!”그러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연정훈은 몰래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양시연을 지켜봤다.그리고 지금 보니 승주라는 아이가 왠지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사실 오늘 이 자리에서 승주가 가장 관심이 생긴 사람은 바로 노지혜였다. 노지혜는 아이의 눈에 인형처럼 예뻐 보였다.그래서 초대장을 노지혜에게 주려고 하는데 반우희가 막아섰다.“저 사람은 안 돼!”‘부적절한 관계가 있는 사람은 우리 집 출입 금지라고!’승주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반우희를 나무랐다.“초대장은 내가 주지만 참가하고 안 하고는 받은 사람이 결정하는 거잖아요.”그리고 꿋꿋이 초대장을 변백호와 노지혜에게 건넸다.“누나, 매형 꼭 와요.”“...”모든 사람에게 초대장을 돌리고 승주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그리고 동준과 희주가 동시에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그럼 있다가 뵙겠습니다.”이승우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저 녀석 이제 큰 인물 되겠어.”볼일을 마치고 승주는 동생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그리고 문 앞까지 걸어가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마른기침했다.“저기, 형 누나들 생일 파티에 선물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굳이 준비하고 싶다면 너무 값비싼 선물은 사절합니다. 저는 마음만 받으면 돼요.”이어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열고 나섰다.반우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창피는 반우희의 몫이었다.그러나 양시연은 이 상황이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어린 녀석이 뭘 하나 했더니 생일 선물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었다.방금 건넨 초대장을 펼치니 꼬물꼬물 작은 글씨가
양시연은 빠르게 손을 빼냈다.그리고 한 발 멀어지려는데 연정훈이 또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연정훈 씨!”양시연이 손을 앞으로 뻗어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했다.“여긴 제 구역이니까 조심해요.”연정훈은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양시연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손님맞이로 정신없이 돌아다녔더니 인내심이 떨어진 양시연이 바로 연정훈을 톡 쏘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의 시선은 양시연의 손가락으로 향했다.“손톱은 어쩌다가 부러졌어?”양시연이 멈칫하다가 손을 돌려 확인했다. 그러자 작은 고통이 전해졌고 손톱이 부러진 게 보였다.“실수로 부딪혔나 봐요.”그리고 다시 손을 빼냈다.끊어진 손톱이 연정훈의 손바닥을 스치자 옅은 고통이 느껴졌다.양시연은 손목을 살짝 돌리고 연정훈을 힐끗 쳐다봤다.연정훈이 행여나 변백호에 대해 물을까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은 빠르게 앞길을 막았고 양시연은 경계를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그리고 연정훈은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남자 친구?”“무슨... 문제라도?”“문제는 아니지만 한 번에 여자 친구가 한 명인 경우는 많아도 둘은 좀 색달라서 말이야.”“...”양시연은 모르는 척 넘어가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이 한 걸음 더 다가왔고 양시연은 바로 숨을 멈추고 뒷걸음질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마음이 많이 넓은 편인가 봐? 그런 제자가 옆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걸 보면.”‘날 바보로 아나?’‘그 사람이 무슨 남자 친구? 짜고 쳐서 날 속이려는 거지.’연정훈은 그날 밤 술에 취한 양시연에게 된통 맞은 게 잊혀 지지 않았다.양시연은 꿋꿋이 모르는 척 연기했고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이기는 판이라 생각했다.“무슨 제자요? 연 대표님 말 가려서 하세요. 그 친구 이제 성인이 되었고 멀쩡한 가문 자식이에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비꼬았다.“그래. 어느 가문의 딸이겠지.”“네. 그렇고 말고요.”양시연이 고집을 피우는데 연정훈이 갑자기 양시연의 허리를 잡았다
연정훈은 양시연을 안아 들고 가장 가까운 방으로 향했다.“슬리퍼 달라고 할까?”양시연은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언제 내 발목까지 본 거야?’잠시 고민하던 양시연이 말했다.“도우미에게 대신 말해줘요.”연정훈은 말없이 방을 나서더니 2분 뒤 퍼 슬리퍼를 챙겨 돌아왔다.양시연은 허리를 숙여 하이힐을 벗으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이 한 발 더 빨랐으며 먼저 양시연의 발목을 잡았다.하이힐이 벗겨지고 연정훈의 손 온도가 느껴지자 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양시연은 천천히 퍼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한 여름이지만 시원한 에어컨이 틀어진 방에서 퍼 슬리퍼가 아주 편안하게 느껴졌다.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향했다.화장실에서 돌아오기 전 양시연은 빠르게 방을 떠나려 했다.그런데 연정훈이 도망치려는 양시연의 목덜미를 살짝 잡으며 말했다.“승주한테 갈 거야?”“상황... 보고요.”“아이가 직접 초대를 했는데 안 가면 되겠어?”양시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승주 생일 파티에 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연정훈 씨 만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뒤에 서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머리를 두어 번 쓸어내렸다.양시연은 깜짝 놀라 빠르게 뒷걸음질하며 연정훈을 노려보았다.그러자 연정훈은 덤덤하게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진이 빠진 양시연은 곧장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하지만 연정훈은 그 자리에 남아서 조용히 물었다.“진짜 남자 친구인 건 아니지?”양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그 사람이 내 남자 친구가 맞든 아니든 그쪽은 이미 제 전 남자 친구이잖아요.”“남자 친구가 아니라면 내가 하고 있는 건 정상적인 대시일 테고 남자 친구라면 그 사이에 끼어드는 거잖아.”“...”“나도 도덕이 뭔지는 아는 사람이야.”양시연은 눈을 흘겼다.그리고 다시 몸을 돌리며 말했다.“얼굴에 난 상처는 아직 채 낫지 않았죠?”‘그 주제에 무슨 도덕을 논한다고
양시연이 몇 초간 제자리에 얼어붙었다.변백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내 말이 맞지?”“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했잖아.”양시연은 변백호를 흘겨보다가 그 뒤에 선 사람을 보며 말했다.“너나 잘해. 다른 사람 연애사에 관심 가지지 말고.”변백호가 말했다.“정곡을 찌른 사람들은 강한 부정을 한다는 대량의 데이터가 있어.”“...”양시연은 팔짱을 척 끼며 당당하게 말했다.“내가 무슨 정곡이 찔렸다고 그래? 양혁수가 뭐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만나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니잖아.”“그래서 만났어?”“맞춰봐.”변백호는 김이 빠진 듯 벽에 몸을 기댔다.“그 연 대표님이란 사람이 귀찮으면 가짜 남자 친구 찾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 알려줄게. 그냥 그 사람한테 양혁수랑 사귀었었다고 해. 그러면 포기할걸.”양시연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너 참 스승이네. 이거 나쁘지 않은데?”그러나 양시연은 바로 표정을 바꾸고 몸을 돌렸다.“먼저 네 사랑하는 제자나 챙겨. 낯선 곳에서 상처받지 않게.”“...”승주와 약속을 했으니 양시연은 승주의 집을 다녀와야 했다.양지원의 생일 연회는 저녁 만찬이 가장 성대했고 곧 양석진도 도착할 것이다.양시연은 다시 양지원을 찾아갔는데 양지원은 다른 유명 인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편하게 놀다가 일찍 집에 돌아와.”양시연은 마지막으로 양지원을 안아 주고 볼에 뽀뽀했다.모녀 사이가 아주 가까워 보이자 사람들은 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아무리 양지원의 친딸이라 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친딸인지 양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양지원은 양민아보다 양시연을 훨씬 더 아꼈다.사람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했지만 양시연이 양지원과 양석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것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 자리에서 벗어난 양시연은 바로 승주를 찾으러 떠나려 했다. 그런데 반우희가 먼저 전화를 걸어와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승주가 차도 구했어요?”“네. 이승우 씨한테 빌렸어요.”양시연은 의아해했
차량은 천천히 양씨 저택을 떠났다.반우희는 양시연의 옆에 찰싹 붙어 몰래 물었다.“언니, 변백호 씨가 정말 언니 남자 친구 아니죠?”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아니에요.”반우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시연 언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아무나 만나겠어?’‘이제 안심이야.’반우희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편히 눈을 감았다.그 모습에 양시연도 한결 기분이 가벼워졌고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때, 차량이 멈춰 섰다.승주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익숙하게 손님을 맞았다.양시연은 경고음이 귓가에 울렸다.이어 승주가 아부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형부, 볼일 마치셨어요?”“그래.”연정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양시연은 바로 눈을 흘겼다.‘연정훈이 왜 갑자기 애들 장단에 맞춰주고 난리야?’‘오늘 할 일 없어?’승주는 미리 양시연의 옆자리를 비워두고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었다.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오고 양시연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작은 재스민 꽃이 연정훈의 어깨에서 톡 떨어지는 게 보이고 연정훈에게서 좋은 향이 느껴졌다.연정훈의 차량은 밖에 세워져 있었는데 아마 다른 일을 처리하고 대문 앞에서 기다릴 때 재스민이 어깨 위로 떨어진 것 같았다.차 문이 닫히고 차 안 가득 향이 풍겼다.반우희는 코를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향이 엄청 좋네요.”양시연도 눈을 감고 몰래 향을 느꼈다.향이 오래 지속될수록 연정훈의 존재감은 커졌다.재스민 향은 연정훈에게서 비롯되었고 자꾸 향을 느낄수록 왠지 연정훈의 품에 안겨 향을 맡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향을 모른 척 외면했다.예전 동네 근처에 오자 재스민 향은 줄어들고 치자나무 향이 물씬 풍겼다.여름이 오면 동네는 치자나무의 향기로 물들었다.그러자 양시연은 외할머니가 치자나무를 참 좋아했던 게 떠올랐다. 치자나무 꽃을 따서 양시연의 머리에 꽂아주기도 했다.외할머니와의 추억에 양시연은 코끝이 시큰거렸다.외할머니가 떠난 것도 벌써 몇 해 전의 일이 되었다.
“이 사람은 장서진이고 저와 어릴 때부터 함께 큰 친구예요!”반우희는 사람들에게 장서진을 소개했다.장서진은 밝은 사람이었고 활짝 웃는 모습이 반우희와 많이 닮았다.노지혜가 턱을 괴고 눈을 반짝였다.“남자 친구예요?”“당연히 아니죠.”“그럼 저 사람이 남자 친구예요?”노지혜는 부승원을 가리켰다.반우희는 더 세차게 고개를 저었고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제 사장이거든요!”“아 그렇군요...”노지혜는 또 말꼬리를 늘렸다.반우희는 양팔을 쓸어내리며 장서진을 이끌고 주방으로 향했다.소파에 앉은 부승원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오늘 이 자리에 변백호와 노지혜가 참석하는 건 의외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척 보아도 정상의 범주는 아니었으나 부승원이 여길 온 건 연정훈보다도 더 의아한 일이었다.승주도 같은 생각인 건지 오늘따라 유난히 부승원에게 친절하게 물을 따라주며 챙겼다.양시연은 방안을 빙 둘러보다가 창가에 자리 잡고 창밖을 구경했다. 그리고 반우희에게 주변 상가의 변화를 물었다.“다 비슷해요. 몇 년 동안 큰 변화는 없어요.”반우희의 말에 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각자 떠들었다.승주는 부승원과 연정훈이 무리에 어울리지 못할까 봐 바둑을 가져왔다.“자, 마음껏 해요!”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무뚝뚝한 성격의 두 사람은 숨겨진 바둑 고수의 느낌이 있었다.그때 반우희 동생 중 가장 어린 동준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와 진지한 얼굴로 게임을 지켜봤다.“지금 마음대로 두는 거예요?”“...”“누가 먼저 지나 내기하는 거죠?”그 소리에 희주가 다가와 부승원과 연정훈에게 말했다.“바둑은 마음을 비우고 신중하게 둬야 해요.”“그래. 알겠어.”아이들이 떠나고 부승원은 재차 그 말을 반복했다.“마음을 비우고 신중하게.”“난 마음이 어지러운 게 아니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넌 왜 그래?”부승원은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네 생각하느라.”“...”양시연은 여전히 창가에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
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고 연씨 가문의 본가에서 표세연이 전화를 받았다.“좋아. 알았어.”양시연은 2층에 서서 표세연의 기쁜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짐작했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표세연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괜찮아. 연정훈의 아버지가 다 해결했어.”‘아이고.’“맞아. 오늘 양석진 씨께서 모습을 보이셨대.”표세연이 덧붙였다.양시연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었음을 실감했다.그녀는 연정훈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후속 처리할 일이 남아 있는 듯했다.집에서 기다릴까 했지만 마침 반우희가 세 아이를 데리고 가려 하자 그녀도 차라리 반우희를 태우고 연정훈을 데리러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너무 서두르지 마. 연정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표세연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살짝 받치며 계단을 내려갔다.“마침 답답했는데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 네가 답답해할 줄 알았어.”표세연은 결국 운전사를 불러 그들을 밖으로 데려가 바람을 쐬게 했다.주차장에서는 세 아이가 여러 차를 구경하고 있었고 반우희가 좋아하는 마이바흐는 승주도 탐을 내는 차였다.“아니면 우리 이 차를 타고 나갈까요?”양시연이 제안했다.“그래도 돼요?”반우희와 승주가 동시에 묻자 양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아싸.”탁승호는 없었고 표세연이 정해준 운전사는 오랫동안 일해온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안전을 위해 희주와 동준은 다른 차에 태웠다.반우희는 마이바흐의 조수석에 앉았고 승주는 양시연과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나도 이제 출세했네요. 마이바흐를 타보다니.”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사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출발!...단 15분만에 양원 그룹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누구도 그 전화의 내용을 직접 듣진 못했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결과는
“괜찮아요. 반우희 씨는 그냥 한 번 올라가서 볼 거예요. 탁승호 씨는 차 시동 켜고 조수석에 앉아요. 우희 씨가 잠깐이나마 만족할 수 있도록 해줘요."양시연이 웃으면서 말했다.탁승호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네.”반우희는 기분 좋게 차에 올라탔고 양시연은 차 밖에서 앉아 있었으며 실내는 시원하게 느껴졌다.탁승호는 계속해서 옆에서 지켜보았고 반우희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그의 눈빛이 다소 불친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음대로 만지지 않았다.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양시연은 웃으면서 물었다.“마음에 들어요?”“네. 마음에 들어요.”“사법시험 끝나면 부승원 씨에게 차 한 대 사달라고 해요.”반우희는 진지하게 한숨을 쉬었다.“시연 언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물어보길래 차 한 대 선물해 줄 생각인 줄 알았어요.”양시연이 일어나서 반우희 코를 살짝 쥐었다.“욕심쟁이네요.”반우희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그때 또 한 번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반우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곧 폭우가 올 것 같아요.”“그럴 것 같네요.”...양원 그룹 회의실에서 6시가 다 되어가지만 사람들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회의라지만 사실 중요한 사항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윗사람들의 연설뿐이었다.회의는 이 회장이 직접 참석했고 그의 말 속에는 일부 얌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5분 전 누군가가 또다시 창고에서 발생한 사고를 언급했다.“지금까지 사망자 가족은 아직 보상안을 받지 못했습니다.”이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책임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보상안이 나올 수 있나요?”“우리는 어쨌든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누군가 말했다.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죠. 사람들의 입이 무섭죠.”정 회장은 표원정의 의견을 지지했고 그는 이미 조재민과 얽히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이 회장과 연정훈과 대립 중이었다.이 회장은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웃을 듯한 표정으
양시연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양혁수는 그녀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마음 한구석이 살짝 쓰렸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었다.“이제 곧 출산인데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 요즘 같은 때는 한 발짝 덜 움직이는 게 안전한 법이야.”양혁수가 걱정스레 말했다.“어쩜 정훈 씨랑 하는 말이 똑같아?”“연정훈 씨랑 나를 비교하지 마. 난 그 사람이랑 상종도 안 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 너머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변여름이야?”“응. 변백호가 볼일 있어서 왔는데 변여름도 같이 따라왔어. 한강시에 한 번도 안 와봤다길래 데리고 놀러 왔지.”“잘됐네.”“혹시 처리할 일 있으면 말해. 너희가 직접 움직이기 어려운 건 내가 대신 해줄게.”전화를 끊기 전 양혁수가 덧붙였고 양시연은 그의 배려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저녁 무렵 반우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세 아이를 데리고 복숭아를 따러 갔다가 양시연에게도 좀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다.마침 무료하던 참이라 양시연은 주소를 알려주며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아이들이 도착하자 집안 분위기가 한층 활기차졌다.표세연은 특히 동준이가 작은 몸집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만화 캐릭터 같다며 귀여워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반우희는 대게를 한입 베어 물며 무심히 말했다.“요즘 다들 너무 바쁜 것 같아요. 벌써 이틀이나 부승원 씨 얼굴을 못 봤네요.”“내가 없으니 많이 힘들겠죠.”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게 아니라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았는데 요즘은 뭔가 이상해요.”양시연은 부승원이 왜 바쁜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반우희를 달래며 더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오늘 부승원 씨의 생일이에요. 이따가 그
이전에는 민수희가 있었기 때문에 표세연은 민씨 가문의 기생충 같은 사람들을 참을 수 있었지만 민수희가 떠나고 나서는 이제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요즘 마음도 편치 않아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참이었다.그때 민지연이 버릇없이 덜컹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본 표세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뺨을 한 대 때렸다.‘팍!’양시연은 위층에 있었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동 소리를 듣고 급히 문을 열였다. 그곳에서는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방미선은 아마도 체면이 상했는지 표세연에게 기어이 몇 마디 반박하며 말했다.“혹시 갱년기 아니야?”“갱년기? 너야말로 갱년기야!”“나는 곧 손자를 볼 거야. 갱년기는 이미 다 지나갔다고.”민지연과 방미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표세연은 화가 나서 말이 거칠어졌다.“앞으로 너희는 이 집에 다시 발 들이지 마. 어머님도 돌아가셨고 이제 이 집엔 민씨는 없어. 정인은 이미 내 며느리와 함께 성을 바꿔서 양씨가 되었어. 만약 돈을 원하고 손자 행세를 하려면 양씨 가문에 가서 해.”“사모님.”가정부들은 놀라서 표세연에게 말을 그만하라고 했지만 표세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덧붙였다.“내가 하나만 말해줄게. 우리 사부인 성격이 나보다 더 안 좋아. 가서 손자 행세하고 싶으면 절이라도 소리 크게 내서 해.”방미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당장이라도 화병이 날 듯했고 얼굴이 붉어진 채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고 욕을 하려 했지만 자신이 남의 집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이빨을 꽉 깨물며 참았다. 그런 다음 표세연에게 정신과 약을 먹으라고 권한 후 떨리는 손으로 민지연을 끌고 나갔다.가정부 중 한 명은 원래 표세연을 말리려 했지만 방미선의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저희 사모님은 건강하세요. 오히려 당신이나 민지연 씨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표세연은 한바탕 화풀이를 끝내고
10시가 지나서야 양시연은 집으로 돌아온 연정훈을 맞이했다.“안 죽었어요?”양시연이 의아해하자 연정훈은 외투를 벗으며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아직 숨은 붙어 있지만 의식이 없어. 그래서 임성원에게 사람을 옮기라고 했어.”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사람들은 책임자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정훈 씨와 연관 짓는 데 집중할 테니까요.”소현주의 사건처럼 연정훈도 사망 원인을 깊이 파헤치지 않았고 심지어 소현주의 시신도 따로 보관하지 않았다.“하지만...”양시연은 말을 잠시 멈추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조재민 씨 일당이 먼저 움직여서 이번 사건을 더 크게 키워 아버님께 압박을 가하려는 건 아닐까요?”“그럴 가능성은 적어. 설령 조재민이 그런 속셈을 품었더라도 직접 나설 인물은 없을 거야. 이런 일들은 보통 결정타를 날릴 만큼 치명적이지 않고 최대한 상대의 발목을 잡는 수준에서 이용될 뿐이지.”양시연은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그쪽 사람들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아버님께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면 그때 서야 일제히 공격할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침대 머리맡에 앉히며 물었다.“소식 들었을 때 많이 놀랐어?”양시연은 살짝 한숨을 쉬며 연정훈의 품에 기대 조용히 말했다.“놀라진 않았어요. 다만 당신이 걱정돼서 자꾸 이것저것 생각하게 돼요.”“아. 참.”양시연은 고개를 들고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러면 아버님 쪽은 언제쯤 소식이 올까요?” “이번 주 안에는 결론이 날 거야. 하지만 임명까지는 아직 이르고 최종 결정은 위에서 내려야 해.”결정이 내려진다는 건 곧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양시연은 그제야 양석진이 종적을 감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아빠는 지금 한강시에 계실 거예요. 이번 일은 결국 서운에서 벌어지는 정치 싸움이겠죠?”“맞아.”“이번 일을 계기로 양원에서는 당신의 직위를 어떻게 조정하려고 해요?”“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양시연은 약간 놀라며 물었다.“휴직 안 해요?”
새벽이 되어서야 양시연은 사건의 전말을 들었고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표세연처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일곱 명 모두 구조되었고 여섯 명은 이미 의식을 되찾아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나 팀장을 맡은 이가 가장 위독한 상태였으며 아직도 응급 치료 중이라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임성원이 보고했다.“깨어난 사람들 모두 책임자가 오후에 연 대표를 만나 서명을 받은 승인 문서를 들고 창고에 들어갔다고 증언했습니다.”“그럼 그 승인 문서는 어디 있나요?”“없습니다. 모두 봤다고는 하지만 문서는 책임자가 보관하고 있었고 현재 그가 응급실에 있어 찾을 수 없습니다.”양시연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승인 문서도 없이 그냥 입 맞추고 연정훈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겠다는 거죠?”“그 사람들의 말이 일관되게 똑같아서 거짓말 같지는 않습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겠죠. 그 책임자는 그냥 가짜 승인 문서를 직원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됐을 테니까요. 그러면 직원들은 실제로 봤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증언할 테고. 하지만 승인 문서가 진짜라는 걸 누가 증명하죠?”‘한심하다. 이렇게 조잡한 수작을 부리다니.’이 사람들은 연재혁이 패배할 거로 생각하고 양시연의 아버지가 위중하다고 생각하니 막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그 책임자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임성원은 사실대로 말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상태가 위독했습니다.”양시연은 욕이 나올 뻔했다.세상이 참 잔혹하다. 해당 라인의 최고 책임자는 연정훈이었고 규칙에 따라 사고가 발생하면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책임을 져야 했으며 그 책임의 경중이 다를 뿐이었다.그런데 이 사람들은 승인 문서도 없이 증거도 없이 오직 입을 맞추고 연정훈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표세연은 냉정하게 말했다.“그 책임자가 살아 있기만 하면 조사를 통해 연정훈과의 연관성이 크지 않다는 걸 밝힐 수 있어.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죽으면 비록 연정훈이 주범이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억울한 오명을 쓸 가능성이
옛집에 도착하자 표세연은 서둘러 양시연을 맞이하여 앉히고 다양한 간식들을 차려주며 소파를 정리해 편안하게 앉게 했다.“이쁜 얘기야, 한 달 넘으면 할머니랑 만날 수 있겠네.”표세연은 양시연의 배를 보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옆에서 아주머니가 나와 간식을 놓으면서 말했다.“도련님, 요즘은 사모님과 함께 집에서 지내시면 좋겠어요. 도련님께서 오시면 사모님께서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몰라요.”양시연은 표세연의 얼굴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챘고 표세연이 불면증에 걸린 것 같다고 느꼈다.표세연은 아줌마를 보내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별일 아니야. 아주머니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연정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말했다.“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수많은 풍파를 겪으셨는데 어머니께서는 아직 심리적으로 훈련이 덜 된 거 같네요.”표세연이 연정훈을 가볍게 째려보았다.“그 전과는 달라. 예전엔 할아버지가 도와주셨지만 지금은 여기서 할아버지도 손을 쓸 수 없어.”양시연은 위로하며 말했다.“사실 더 승진하지 않더라도 다른 기회는 있을 거예요.”표세연은 고개를 저었다.“이기지 않으면 지는 거지. 무승부는 없어.”양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의 주제를 아기의 이름으로 전환했다.표세연은 확실히 기뻐하며 말했다.“성씨는 네가 선택할 권리를 줬으니 이름을 지을 때는 아이의 할아버지 의견도 좀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좋아요. 이름은 아버님께서 정하게 하세요.”양시연은 여유 있게 말했다.표세연은 다시 양시연의 배를 만졌고 거실은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연정훈은 전화를 받고 회사에 가야 했다.“주말인데 전혀 시간이 없네.”표세연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으며 연정훈에게 차 조심히 운전하고 저녁에는 최대한 일찍 돌아오라고 말했다.“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자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그들의 사이가 좋아 보이자 표세연도 기뻐했다.연정훈이 떠난 후 양시연
복도는 적당히 어둡고 분위기도 완벽했다.부승원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반우희에게 입을 맞췄다.처음엔 가볍게 입을 맞췄지만 반우희가 발끝을 들자 부승원은 그녀의 머리 뒤로 손을 돌려 깊게 키스했다.반우희의 몸에서 오래 스며든 듯한 강한 딸기 향이 났고 부승원은 그 향이 가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반우희는 식사 후 화장실에서 거의 반병을 썼고 혹시 음료처럼 한 통을 다 마신 게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입술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숨결이 얽혔고 쉽사리 떼어낼 수 없었다.반우희는 자기 입술을 핥으며 부승원의 입술도 스치듯 지나갔다.두 사람의 코끝이 부딪히자 반우희는 살짝 부끄러워졌는지 더욱 세게 끌어안고 얼굴을 부승원의 가슴에 묻었다.“이제 가야 해. 승주가 널 찾을 거야.”부승원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반우희는 가볍게 대답하고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불빛은 어두웠지만 부승원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된 걸 느낄 수 있었다.‘정말 좋다.’반우희는 부승원을 마주 보며 뒷걸음치자 부승원이 말했다.“넘어지지 말고 조심히 걸어.”“네.”반우희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두 걸음 더 뒤로 걸어가며 기분 좋게 계단을 올랐다.부승원은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기분이 좋아졌고 입안의 딸기 향이 한층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발소리가 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가 갑자기 멈추자 부승원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부승원 씨.”그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고 마치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살짝 몸을 숨겼다.부승원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뭐 하는 거야?”반우희는 두 손을 입가에 모아 확성기처럼 만들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오늘 밤에 문제집 다 풀 거예요.”부승원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적당히 해. 문제집이 너한테 질려서 도망가겠어.”반우희는 키득키득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고 부승원은 그녀가 집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차로 향했다.차에 다가가자 그는 잠
두 사람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운전사는 이미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대기하고 있었다.부승원은 반우희를 건물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그녀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려 했지만 반우희는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반우희는 부승원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말없이 매달렸다.부승원은 마음이 약해져 반우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집에 가기 싫으면 한 바퀴 더 돌면서 간식이라도 사줄까?"“싫어요.”반우희는 부승원을 더욱 꼭 안았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옆얼굴에 살짝 입을 맞췄다.반우희는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재빠르게 그의 턱에 가벼운 키스로 응답했다.주변은 어두컴컴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부승원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으며 평소의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고 따스한 너그러움만이 남아 있었다.“마라 새우를 많이 먹으면 원래 이렇게 집착하게 되나?”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새우 탓이 아니라 달이 문제에요.”“달이 뭘 잘못했는데?”“나는 인정해 이건 전부 달 때문인 것을.”반우희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부승원은 그녀의 엉뚱한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조용한 밤의 고요 속에서 그녀는 한 구절을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불렀고 그 음성은 살랑이는 바람에 실려 그의 마음을 간질였다.‘달빛이 너무 아름다웠고 너는 너무 다정했어. 그 순간 오직 너와 함께 영원을 약속하고 싶어.’가사가 꽤 마음에 들었고 부승원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이 정도면 달이 욕을 좀 먹어도 억울하지 않겠네.’“부승원 씨.”반우희가 그의 품 안에서 부르자 부승원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반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흔들리지 마세요. 부모님께 휘둘리지 말고 날 외국으로 유학 보내지 마요. 난 당신과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부승원은 반응 없이 달콤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져 그녀를 놀리고 싶어졌다.“아닌데? 너 승주한테 돈만 많이 주면 나랑 헤어지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