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서.양시연은 소파에 앉아 눈앞의 차를 보며 한참 침묵했다.이건 연정훈이 수납장에서 꺼낸 차로 직접 우린 것이었다.“한번 와봤는데 집이 너무 텅 빈 것 같아서 채워 넣었어.”양시연은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래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아래로 내려갔다.연정훈은 계속 양시연의 뒤를 따랐다.늦은 밤이 되자 밖은 꽤 시원했다.동네의 낡은 주차장을 떠나 어두운 구역까지 걸어가자 오랜 세월 고장 난 가로등 아래에서 한 커플이 키스하고 있는 게 보였다.양시연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변백호...소녀는 변백호의 목에 팔을 걸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변백호는 그 손길을 두어 번 피하더니 곧 가만히 노지혜의 손길을 받아들였다.연정훈도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양시연이 연정훈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도 양시연을 바라보았다.이제 굳이 해명할 필요가 없었다.양시연은 말을 꺼내기도 귀찮아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길가에는 연정훈의 차량이 세워져 있었다.“차에 타. 할 말 있어.”양시연이 걸음을 멈췄다.‘그래. 이번엔 확실하게 끝내는 거야.’양시연이 좌수석 손잡이를 당겨 안으로 앉았다.문이 닫히고 밀폐된 공간에는 두 사람만 남겨졌다.연정훈은 외투를 벗어 뒷자리에 두었다. 그리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편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양시연은 차창을 내렸다.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담배라도 피울 줄 알았는데 연정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 사람이랑 무슨 사이야?”“말했잖아요. 연인 사이라고.”양시연은 될 대로 되라는 심산이었다.연정훈은 이에 화를 내지도 않고 침착하게 변백호의 신상을 읊었다.“멕하든의 최고 권력 가문인 변씨 가문. 무기 장사로 일떠선 가문이지. 지금도 티후아엔에서 가장 큰 검은 세력이고 변백호는 3년 사이 4번의 암살 위협을 받았어. 변백호의 주변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양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그렇게 위험한 사람을 왜 굳이 조사한 거예요?”“여기는 경
“거절할게요.”차 안에서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연정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덤덤했다.지금 연정훈은 유독 담배가 당겼지만, 손에는 담배가 없었다.양시연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문 열어줘요.”연정훈은 미동조차 없었다.양시연 역시 당황하지 않았다.“정훈 씨가 재결합을 부탁해서 거절했어요. 저를 못 가게 막는 건 정말로 끝까지 매달리겠다는 뜻인가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정훈은 버튼을 눌러 양시연 쪽 창문을 닫았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의 행동은 갈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예전엔 자존심이 강해서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 믿었지만, 강남시티 사건에서 이미 그 믿음은 깨졌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연정훈이 입을 열었다.“재결합을 거절하는 이유를 말해줘.”양시연은 연정훈의 자존심을 잘 알기에 망설임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이유는 없어요. 이제 당신을 찾고 싶지 않거든요. 당신에게 권력과 지위가 있어도 나에겐 이제 아무 의미 없어요. 어느 가문이든 그런 정도는 있잖아요? 연애할 거라면 당연히 젊고 활기찬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나요? 왜 하필 당신이어야 하죠?”연정훈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입꼬리가 살짝 내려가는 걸 보고 연정훈의 아픈 곳을 찔린 걸 눈치챘다.연정훈이 그녀를 한 번 쳐다봤고 양시연은 그 시선에 물러서지 않고 똑바로 맞섰다.오래도록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연정훈은 여전히 차 문을 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양시연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연정훈 씨, 이렇게 굴면 정말 품위가 떨어지는 거 아시죠? 이렇게까지 매달리면 내가 당신을 가지고 놀까 봐 걱정 안 되세요?”“걱정 안 해.”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깊고 어두운 눈빛을 띠고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나는 네가 나를 가지고 놀기를 바라고 있어. 어떻게 가지고 놀거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역시
양시연은 자신의 청각에 문제가 생겼거나 아니면 연정훈이 미쳤다고 생각했다.‘뭐라고? 정인 그룹을 나에게 준다고?’양시연의 관심은 오로지 정인 그룹에 쏠려 있었지만, 연정훈의 관심은‘결혼’에 맞춰져 있었다.양시연이 얼떨떨해하는 모습을 보며 연정훈이 덧붙였다.“이번 주 내로 하자.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하고 모든 절차를 마치면 정인 그룹은 네 것이 될 거야.”양시연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래. 내 청각엔 이상이 없어. 연정훈 씨가 미쳤어.’양시연은 연정훈이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주도권을 쥐고 연정훈을 조롱할 생각이었지만, 그가 이렇게 모든 걸 뒤집는 결정을 내리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난 필요 없어요!”양시연은 한쪽 발을 차 밖으로 내밀며 미간을 찌푸렸다.“나는 돈이 부족하지 않아요. 돈 때문에 결혼할 일은 없어요.”연정훈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살짝 눌렀다.양시연은 순간 당황했다.???연정훈이 말했다.“네가 먼저 요구했잖아. 내가 동의했는데 이제 와서 번복하려고?”“번복하면 어쩔 건데요?”양시연은 당당하게 말했다.“아까 경고했잖아요. 너무 매달리면 결국 내가 당신을 가지고 놀 거라고요. 연정훈 씨, 너무 방심 하신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응시했다.양시연은 좌석에 기대어 옆으로 앉아 있었다.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섬세한 힐을 신고 하얀 손목으로 머리를 받치며 도전적인 미소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보며 이가 갈릴 듯했다. 그녀를 품에 안아 단단히 제압하고 싶었다.긴 대치 끝에 갑자기 멀리서 강한 불빛이 그들을 향해 비춰왔다.둘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돌려 눈이 부신 빛을 피했다.양시연은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며 몇 번 깜빡인 후 손가락 틈 사이로 빛의 방향을 살폈다.검은색 SUV가 가까운 곳에 멈춰 섰고 차 문이 열리며 젊은 남자가 내렸다.그는 검은 반소매 티셔츠에 부드러운 소재의 캐주얼 바지를 입고 밤인데도 검은 야구
양시연은 묵묵히 양혁수의 뒤를 따랐다.뒤에서 연정훈은 운전석에 느긋이 앉아 그들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양시연은 슬쩍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힐끗 바라보았다.양시연은 확신할 수 있었다.연정훈의 교활한 여우 같은 성격을 떠올리며 그는 분명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적어도 자존심 상할 일을 연정훈이 가만히 넘기진 않을 터였다.양시연이 마음을 정리할 새도 없이 양혁수가 그녀의 손을 잡고는 투덜댔다.“왜 그렇게 쳐다봐? 이미 가져봤던 남자면서 아직도 신선한 느낌이라도 들어?”양시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양혁수는 양시연의 손을 꼭 쥐고 주차된 차 쪽으로 걸어갔다.양시연은 양혁수의 걸음에 맞춰 다소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차에 오르고 나서야 양시연은 백미러를 통해 겨우 연정훈의 차를 확인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거울을 닫아버렸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쾅!차 문이 닫히자 양혁수는 재빨리 시동을 걸어 양시연을 데리고 멀리 사라졌다.뒤에서는 연정훈도 주저하지 않고 차를 돌려 연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가는 내내 차 안은 고요했고 양시연은 양혁수를 몇 번 슬쩍 쳐다봤다.양혁수는 예전보다 한층 성숙해 보였다. 자유롭고 거침없는 매력이 더해져 있었다.갑자기 양혁수가 고개를 휙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았다.양시연은 딱 걸린 듯 입꼬리를 씰룩거렸다.양혁수는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보려면 두 눈으로 실컷 보라고 나처럼 젊고 생동감 넘치는 얼굴을 많이 보면 네 안목도 높아지지 않겠어? 연정훈 씨 같은 늙은이 그만 포기해.”양시연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양시연은 좌석에 기대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었다.양혁수는 여전히 예전 그 모습 그대로였고 느낌도 예전과 변하지 않았다.그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덜 갚을 수 있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뒤를 돌아보니 차에 가득 실린 꽃과 선물들 그리고 커다란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너 원래부터 올 계획이었구나?”“방금 비행기에서 내렸어. 이 물건들은 미
“그냥 소소한 물건일 뿐이에요.”양석진이 무심하게 대답했다.양홍두는 노안경을 밀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이 부자는 본래 말수가 적어 함께 있으면 서로 말없이 눈빛만 주고받는 사이였다.그때 마당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먼저 양지원이 들어왔다. 오늘 그녀는 자연스러운 볼륨이 살아 있는 웨이브 머리로 우아함을 더했다.환한 미소가 양지원의 얼굴에 평온하고 온화한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다.양지원은 양석진을 보자 반가운 기색이 얼굴에 가득 번졌다.양시연도 잠시 뒤 따라 들어와 뜻밖의 모습에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다.양혁수는 여유롭게 그들 앞을 지나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농담을 던졌다.“외삼촌, 몇 년 만에 뵙는데 우리 집 여자들 앞에서는 여전히 최고 인기남이시네요.”양석진이 가볍게 받아쳤다.“너보다는 조금 나은가 보네.”“조금은 아니죠. 우리 집 큰아씨가 삼촌을 보는 눈빛이 정말 특별하던데요.”양지원은 당황했다.!!!“이 녀석,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고 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어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과장한 건지 시연한테 물어보세요. 아마 맞는 말일 겁니다.”“집에 돌아오자마자 쓸데없는 소리만 하는구나.”“네.”양혁수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억양을 늘리며 대답했다.“제가 헛소리하는 게 아니고 누군가를 좀 보세요.”양지원은 어이없었다.“...”양홍두가 가볍게 헛기침했다.이를 본 양혁수가 일부러 놀리듯 말했다.“아이고. 할아버지도 여기 계셨군요.”양홍두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사실 큰손자가 친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양홍두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하지만 지금은 이미 많은 것들을 내려놓은 듯했다.양홍두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말을 꺼냈다.“이제는 결혼할 사람을 찾아서 너도 좀 잡아놔야겠구나. 그렇게 오래 밖에 나가 있다가 우리 얼굴 보러 올 생각도 안 하고.”“아직 부족하신 거예요? 보물 같은 손녀가 곁에서
연씨 가문에서.김세연은 저녁 만찬까지 양씨 가문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민망함에 그 자리를 견디기 힘들었다.연정훈이 집에 들어섰을 때 김세연은 연재혁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당신 아들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친엄마를 망신 줬어요! 양지원 씨가 나를 보고 웃을 때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알아요?”김세연이 고개를 들자 연정훈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연재혁에게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당신 아들이 돌아왔어요!”연재혁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왜 그런 소리를 해요? 내 아들이면 당신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요?”“당신 아들이라고요!”김세연은 화가 치밀어 목소리를 높였다.연재혁은 어이없었다.“...”연재혁과 말이 통하지 않자 김세연은 전화를 끊고 화난 눈빛으로 연정훈을 노려보았다.연정훈은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아주머니가 가져다준 야식을 먹으려 했다. 그는 반우희 집에서 거의 밥을 먹지 못했다.그가 한 숟가락 들었을 때 김세연은 그릇을 뺏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소리쳤다.“이제 와서 먹을 염치가 있어? 내 얼굴 좀 봐 얼마나 상태가 안 좋은지!”연정훈은 엄마를 잠깐 보고 나직하게 말했다.“붓긴 하셨네요. 이젠 밤새우지 말고 피부 관리에 신경 좀 쓰셔야죠. 나이도 있으시니.”김세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정말 이 아들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연정훈은 다시 죽을 먹으려 했다.김세연은 가까이 다가서 물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시연이 어떻게 양씨가 된 거냐?”“그건 중요하지 않아요.”“중요하지 않다고? 그러면 뭐가 중요해?”연정훈은 죽을 한 모금 먹으며 나직하게 말했다.“저는 시연과 결혼할 거예요.”김세연은 잠시 침묵하며 당황한 듯 깊게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잠시 후 그녀가 눈을 뜨며 낮게 물었다.“지금은 시연이...”“시연은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으려 해요.”김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한 듯 말했다.“그래. 네가 그래도 정신은 차린
연정훈은 침묵했다.김세연은 우아하게 앉아 두 손을 살짝 모은 채 가볍게 마주쳤다. 자신의 제안이 너무나 기발하다고 느껴졌다. 어차피 평소 남을 괴롭혔는데 좀 고생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김세연은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할머니가 싫다고 하셔도 내가 직접 얘기할 테니까. 만약 할머니가 동의하지 않으시면 앞으로는 아무 말도 못 하게 해야지. 언제 나설 땐 안 나서면서 자꾸 참견은 뭐야?”연정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알아서 하세요.”김세연은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연정훈이 위층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요즘 집에 별로 없었으니까 엄마가 방을 정리해 두라고 할게.”“괜찮아요. 제가 할게요.”김세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방문 앞에 다다르자 김세연은 재빠르게 나서며 말했다.“엄마는 양시연을 먼저 달래는 게 좋을 것 같아. 예전에 왜 헤어진 건지 솔직히 얘기하고 소현주 일은 양시연한테 얘기했니?”연정훈은 대답 없이 방문을 열었다.김세연은 곧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말해야지. 소현주가 우리를 얼마나 속였는지 알아? 공휘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지 너뿐만 아니라 나도 양시연에게 평생 죄책감을 느꼈을 거야!”“이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내가 신경 쓰고 싶어서 그런 거로 생각해?”김세연은 방으로 들어가며 멈추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이러고 있지 말고 제대로 말해. 양시연을 원한다면 솔직하게 고백하고 제대로 대시해.”연정훈은 김세연을 등지고 손목시계를 풀며 방을 정리했다.김세연은 한숨을 쉬었다.‘그만하자.’“나에게 귀한 금박 팔찌 한 쌍이 있어. 며칠 후에 진 선생님께 가서 받아올 테니까 네 할머니가 그것을 가지고 양씨 가문에 가게 할게.”김세연은 만족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연정훈은 쓰레기통을 내려놓고 담담히 말했다.“필요 없어요.”“마음에 안 들어?”김세연은 다급해졌다.“그 팔찌 상태가 아주 좋은데.”연정훈은 김세연 앞을 지
“잘 지내고 있어.”양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밤의 고요함을 즐겼다.문 옆에 서서 양혁수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너는?”“그냥 그래.”양혁수는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양시연이 웃으며 말했다.“아까 테이블에 놓은 담배 엄마가 쓰레기통에 버렸어.”양혁수는 혀를 차며 말했다.“정말 철저하네.”“담배는 좋은 게 아니니까 끊는 게 좋겠어.”양시연이 조용히 말했다.“우리 큰 아씨께서는 최대한 적게 피우라고 하는데 넌 아예 끊으라고 하는 거야?”양혁수는 난간에 기대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리더로서 살다 보니 말투가 강력해진 건가?”“나는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끊을 수 없어.”양혁수는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히며 어깨를 풀었다.“너...무슨 걱정 있어?”양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양혁수는 한숨을 내쉬고 동작을 멈춘 채 양시연을 한 번 흘깃 쳐다봤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양혁수는 주먹을 입술에 대며 하품하고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어. 그냥 피우면서 즐기고 있어.”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래도 끊는 게 좋아.”“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이어갔고 양시연은 다시 무심코 양혁수가 손목에 찬 팔찌를 바라보았다.그 팔찌는 한 뼘 정도의 넓은 중성적 디자인이었다. 처음 양시연이 찼을 때는 다루기 힘들었지만, 이제 양혁수가 차니까 오히려 잘 어울렸다.“내가 돌아오기 전에...”양혁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가 말을 멈췄다.양시연은 양혁수가 계속 말할 줄 알고 기다렸으나 양혁수는 말을 돌려서 말했다.“원래 너한테 선물 좀 사려고 했는데 마음에 드는 게 없었어.”“그렇구나.”양시연은 부드럽게 대답했다.“괜찮아. 선물은 언제든지 줘도 돼. 며칠 후에 내가 마음에 드는 걸 보면 그때 네가 결제해 줘.”양혁수는 웃었다.“알았어. 네가 골라. 내가 결제할게.”양혁수는 양시연 뒤에 있는 문을 보며 말했다.“이제 가자. 나도 자야 해.”양시연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양지원이 집에 있는 탓에 양혁수는 변여름에게 더 조심스러워졌다.화서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맞출 만큼 가까워졌지만 집으로 돌아온 순간 그는 그녀의 손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그는 가장 먼저 양지원에게 밥그릇을 건넸다.변여름은 젓가락을 가만히 깨물며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렸다.식탁에 앉은 양혁수는 입을 다물거나 아니면 양지원이 눈빛으로 놀려대지 않도록 일부러 업무 이야기를 꺼냈다.양지원은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가 일부러 찾아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하나는 오성호 문제로 힘들어할 아들이 걱정돼서였고 다른 하나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가 어디까지 진전됐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다.오랜 세월 동안 양혁수는 한강시에 홀로 있었고 양지원은 그런 아들이 안쓰럽기만 했다. 수없이 많은 여자를 소개해 줬지만 단 한 번도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았다.양시연은 그녀에게 소중한 딸이었고 양혁수 역시 다르지 않았다.만약 연정훈이 없었다면 두 아이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인연이 아닌 하늘의 장난일 뿐이었다.그러던 중 나타난 변여름은 친한 가문의 딸일 뿐만 아니라 양혁수를 진심으로 아꼈다. 그녀는 기뻤지만 양혁수가 또다시 그 기회를 흘려보낼까 걱정스러웠다.두 사람 사이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혁수야.”“네?”양혁수가 고개를 들었다.“게살 좀 발라줘.”순간 그는 어리둥절했다.‘갑자기?’예전에는 이런 사소한 부탁들을 곧잘 들어주곤 했지만 마지막으로 게살을 발라준 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집에서 식사할 때면 새우나 게 같은 음식은 늘 손질된 상태로 나왔는데 오늘따라 이상했다.양혁수가 양지원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고 하는 수 없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고 도구를 들었다.변여름은 그가 이런 일을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능숙했고 그의 손끝에서 게 껍데기는 깔끔
사실 양혁수는 변여름이 허예나와 어떻게 친해졌는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차 안에서 심심했던 그는 무심코 몇 마디 물었고 변여름은 처음에는 대답하려 했지만 그의 질문이 계속되자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오빠 혹시 허예나 같은 스타일 좋아해요?”“어떤 스타일?”“착하고 여성스러운 스타일.”양혁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턱을 잡아 조심스럽게 얼굴을 돌렸다.변여름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여름이보다 더 착하고 여성스러운 사람이 있어?”변여름은 순간 멍해졌다.자신이 착하거나 여성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양혁수는 그녀를 ‘우리 여름이’라 불렀다. 그 순간 얼굴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양혁수는 그녀의 반응을 즐기듯 느긋하게 시트에 기대어 웃음을 터뜨렸다.변여름이 얼굴을 숙여 식어가는 열기를 숨기자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질투쟁이.”그는 혀를 찼다.“내가 허예나랑 같이 지낸 적도 없는데 걔가 착하고 여성스럽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착하긴...너랑 붙어 다니며 사기나 치고 말 몇 마디로 사람 현혹해서 네 돈까지 빼갔잖아.”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아니에요. 허예나 씨는 사람을 말로 속이거나 현혹하지 않아요. 언제나 진실만 말해요.”허예나는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했다.양혁수는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기분 좋게 집에 도착한 그는 마치 익숙한 일인 양 가정부 앞에서 자연스럽게 변여름의 손을 잡고 문을 열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앞쪽에서 일부러 낸 듯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양혁수가 시선을 돌리자, 장난기 어린 양지원의 눈빛이 그와 마주쳤다.‘!’양지원은 그들의 손을 흘긋 본 뒤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돌아왔구나?”양혁수는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거기 일은 다 끝났어요.”“
‘어. 신발 끈 풀렸네.’변여름은 빨대를 문 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묶어주는 양혁수를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양혁수가 한쪽 신발 끈을 묶고 일어서려 하자 변여름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고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이쪽도 풀렸어요.”양혁수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신발 끈 한 번 묶어줬을 뿐인데 이젠 완전히 맛 들였나? 나 부려 먹는 재미라도 붙였나 보지?’그는 다른 쪽 신발 끈도 풀어 더 단단히 묶어주었다.그가 일어서자 변여름은 곧바로 그에게 레몬티를 건네며 말했다.“오빠, 날씨 추워요. 오빠도 좀 마셔요.”양혁수는 빨대를 살짝 물고 한 모금 마신 뒤 차에 기대어 담담히 말했다.“너희 집에 전화했어. 설날에 안 간다고.”변여름은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양혁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말을 이었다.“어차피 너희 집은 설날 크게 챙기지도 않잖아. 굳이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어.”그는 늘 핵심을 돌려 말했고 변여름은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걸 싫어했다.그녀는 조용히 차에서 내려 그의 앞에 섰다.서로의 눈이 마주쳤고 양혁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왜?”변여름은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오빠, 나를 한강시에 데려가 줄 거예요?”양혁수는 웃음을 참듯 입술을 다물고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봤다.“나와 같이 한강시에 가서 설 보내고 싶어?”“...”변여름은 드물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끝내 표정을 풀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손을 들어 그녀의 두 볼을 잡고 좌우로 살짝 흔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한강시에 안 데려가면 널 여기 두고 가야 하잖아. 근데 너 성격이 얼마나 불같은데. 또 한강시까지 쫓아와서 날 잡아먹을지도 몰라.”변여름은 예전에도 세 번 미래에 대해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첫 번째는 그가 진실을 알기 전날 그녀가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고 두 번째는 그가 멕하든을 떠나던 날 비행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