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연정훈에게서 두려움을 본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연정훈이 아무리 재빨리 감정을 숨기려 해도 안시연은 그것을 발견했다.그는 땀을 많이 흘렸고 얼굴이 창백해 보였으며, 그 모습은 매우 무섭게 느껴졌다.연정훈이 화장실 가서 얼굴을 씻고 돌아오니,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안시연이 물었다.“악몽 꿨어요?”“응.”연정훈은 여전히 안시연의 뒤에 누워, 한쪽 다리를 굽히고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작은 삼촌 꿈을 꿨어.”안시연은 놀라며 물었다.“작은삼촌이 있었어요?”연정훈은 당황했다.그는 너무 빨리 말을 꺼냈고 의식했을 때 자신도 놀랐다.연정훈은 연서명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안시연과의 대화 속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연정훈의 머리를 마사지해 주었다.“정훈 씨의 작은 삼촌에 관한 정보가 비밀인가요? 왜 외부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죠?”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조용히 말했다.“...작은삼촌이 세상을 떠났어.”안시연의 동작이 멈췄다.안시연이 질문하기도 전에 연정훈은 천장에 있는 크리스탈 조명을 바라보며 말했다.“작은삼촌은 나보다 열두 살 더 많아. 우리 할머니의 늦둥이 아들이야. 우리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어.”안시연은 연정훈의 슬픔을 느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가족의 죽음은 어떤 말로도 그 아픔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정훈 씨가 작은삼촌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어요.”“그건 오래전 일이라.”연정훈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이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눈을 감으며 말했다.“오랫동안 작은 삼촌을 꿈에서 본 적이 없었어.”안시연은 휴지를 꺼내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향초 하나 켜 줄까요? 정훈 씨 한참 자고 있었잖아요.”“괜찮아.”연정훈은 옆으로 돌아서 안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머리카락에 뭘 사용한 거야?”“머리카락?”“응. 좋은 향기가
한숨 자고 난 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연정훈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기분 좋게 해줄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 “...”연정훈은 잠시 침묵하더니 휴지를 꺼내 입을 닦았다. “왜요?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으니까 밥도 안 먹으려고요?” “선비는 죽어도 굴욕을 참지 않는다고 하지.”안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이 정도의 난이도로 끌어올릴 만큼 심각한 일은 아니다. “정훈 씨가 안 해주면 저도 안 만들어 줄 거예요.”안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침착하게 휴지를 던지며 안시연을 바라보았다.“난 잔치국수 먹고 싶어. 채소도 듬뿍 넣어줘.”연정훈은 추가 주문을 하며 덧붙였다. “계란 두 개 더 삶아줘. 최대한 반숙으로 부탁해.”안시연이 말했다.“제가 꼭 만들어 줄 거라고 확신하세요?”연정훈은 웃으며 말없이 안시연을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침묵했다.“...”그래.안시연은 패배를 인정하듯 고개를 돌렸다. “계란이 꼭 반숙일지는 장담 못 해요.” “나는 널 믿어.”안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계란을 완벽하게 반숙으로 만들기 위해 두 개의 냄비를 동시에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두 사람이 짧게 눈을 붙인 후, 시계는 아직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모든 것이 고요한 그 순간, 안시연은 바깥에서 딱딱하는 소리를 들었다.그 소리는 잠 못 이루는 나비가 나타난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재료를 모두 냄비에 넣고 안시연은 몸을 돌려 거실을 보았다.연정훈이 바의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긴 다리와 반듯한 허리 덕분에 그는 더욱 우아해 보였다. 나비는 연정훈을 둘러싸며 그 주변을 맴돌다 목도리를 물어 그의 손에 가져다주었다. “더러워졌어.”연정훈이 말했다.나비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목도리를 물고 연정훈의 주변을 맴돌았다.연정훈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하다가 안시연에게 물었다. “깨끗한 거 있어?”안시연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저 작은 서랍
남자의 말은 대체로 신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연정훈의 대답은 완벽에 가까웠다. “나는 너와 항상 이렇게 있고 싶어.”연정훈이 가문에서의 압박을 느끼거나 최근 여러 일을 겪으며 안시연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결혼과 미래에 대한 그녀의 생각도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그들은 서로를 깊이 좋아하며 연애하고 있었다.어느 날 안시연이 결혼을 원하고 연정훈이 원치 않으면 안시연은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미래의 선택이 현재의 결정을 바꿀 수는 없다.적어도 지금 안시연은 연정훈이 진심으로 자신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괜찮다.‘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사랑을 즐기자.’연정훈과 함께 야식을 먹고 난 후, 안시연은 러그 위에 앉아 기분 좋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연정훈은 소파에 앉아 안시연의 핸드폰을 슬쩍 들여다보았다.[외상 환자를 위한 레시피]말하지 않아도 이것은 양혁수를 위해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연정훈은 질투를 감추고 물었다.“양혁수는 지금 어때?”안시연은 말했다.“상처가 아직 아프고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대요. 꽤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요.”“양혁수가 너에게 말했어?”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은 속으로 비웃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두 번 바라보며 고의로 떠보았다.“양혁수가 너를 위해 그렇게 큰 고생을 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당연히 혁수 씨에게 감사하죠.”안시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동안 저를 위해 목숨을 걸어준 사람은 없었어요. 그날 사실 혁수 씨는 떠날 수도 있었는데 저를 구하려다가 다치게 된 거예요.”연정훈은 양주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자책감에 사로잡혔다.안시연을 위험에 처하게 둬서는 안 됐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양혁수가 안시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연정훈 역시 할 수 있었다.안시연의 눈에 담긴 죄책감과 감사의 감정을 본 연정훈은 결국 질문을 참지 못했다.“내가 없었다면 너는 양혁수에게 마음이 끌렸을까?”안시연은 잠시 멈칫했다.어떻게
연정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별일 아니야. 그냥 두 명의 협력사를 만났을 뿐이야.”“그럼 왜 내 메시지는 안 읽었어요?”연정훈은 잠시 멈칫했다.안시연은 그를 살피며 물었다.“가기 전, 운동장에서 전화 한 통 받았었죠? 누가 건 거예요?”‘역시 여자는 사랑에 빠지면 셜록 홈즈가 된다더니...’연정훈은 심리전의 고수답게 절반의 진실을 말했다.“소현주한테서 온 전화였어.”안시연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럼 그날 현주 씨를 만나러 간 거예요?”“아니야.”안시연은 말없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 확인하려 했지만 연정훈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해 한 치의 빈틈도 찾을 수 없었다.잠시 실망했으나 안시연은 동시에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만약 그날 연정훈이 소현주를 만나러 갔다면, 자신이 납치된 그 순간에 그와 소현주가 함께 있었다면 차마 용납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연정훈은 그녀의 의심 가득한 표정을 보고 되레 물었다.“그날 아침, 부승희랑 룸 안에서 무슨 얘기 했는지 기억나?”안시연은 금세 기억이 떠올랐다.그녀가 부승희와 나눈 대화를 그들이 엿들었을 것이라 부승원이 경고한 적이 있었다.그제야 상황이 이해됐다.“화났어요?”“조금.”연정훈의 말은 사실이었다.그녀가 자신을 이승우와 비교하며 때가 되면 떠날 준비를 한다는 말을 듣고 크게 상처받았다.마침 그때 소현주 쪽에서 일이 터졌다는 전화가 온 것이다.안시연은 설명했다.“그 전날 정훈 씨가 현주 씨의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 날 대하는 게 차가워졌어요.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다음 날 또 이승우 씨가 어떤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보고 기분이 더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부승희 씨랑 얘기할 때 그냥 승희 씨 말에 맞춰서 말했을 뿐이에요.”연정훈은 내심 후회했다.그날 소현주의 전화를 받은 게 실수였다.그 감정이 그녀에게까지 번져 이런 문제를 일으킨 것이니 말이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들어 올려 품에 앉혔다.“지금도 떠날 생각 있어?”
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안겨 천천히 소파에 눕혀졌다.연정훈의 손을 베개 삼아 기대어 그와 깊은 애정이 담긴 키스를 나눴다.“어딜 가든... 그건 제 자유예요.”“넌 못 가. 한번 가볼 수 있나 해봐.”연정훈은 안시연의 귓불을 살며시 입에 물고 빨았다.그러자 안시연은 얇게 신음소리를 흘렸고 날씬하고 곧은 다리가 그의 다리를 스치고 있었다.“이건 너무 억지잖아요.”“다른 건 몰라도 이건 억지여도 돼.”그는 안시연의 셔츠 단추를 풀며 부드러운 입맞춤을 아래로 이어갔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머리를 감싸며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집어넣었다.몸은 점점 뜨거워졌지만 차가운 공기가 살짝 스쳤다.연정훈은 담요를 꺼내 자신과 안시연 위로 덮었다.속박은 하나씩 풀렸고 안시연은 소파의 팔걸이에 기대 몸을 살짝 웅크리더니 위에 달린 크리스털 등을 바라보며 입술을 벌려 숨을 내쉬었다.아직 아래층에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부끄러워 몸이 붉어졌고 손톱은 연정훈의 어깨에 꽉 박혀 있었다.곧 안시연이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양옆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코끝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왜 그래?”“위층으로 가요.”안시연은 그의 어깨를 잡고 조심스럽게 아래층 계단 입구를 쳐다보며 말했다.“만약 누가 올라오면 어떡해요?”“안 와.”“그래도... 만약에요.”안시연은 그의 품에 숨으며 장난스럽게 투덜댔다.“누가 보면 다 정훈 씨 탓이에요.”“알았어. 내 탓으로 할게.”연정훈은 모든 걸 받아들이며 그녀의 턱을 잡고 피하지 못하게 했다.가볍게 신음소리를 내며 안시연은 도무지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 두 손으로 연정훈의 가슴을 밀었다.마치 위층으로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결국 연정훈은 그녀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그는 안시연의 목에 강하게 입을 맞추고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까탈스럽긴.”안시연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뭐가 까탈스럽다는 거야. 내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유혹을 걸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쳤다.안시연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어 조용히 연정훈의 품에 파묻혀 있었다.연정훈이 살짝 움직이자 안시연은 가볍게 소리를 내며 그의 팔을 붙잡아 그가 떠나지 못하게 했다.모든 것이 끝난 후의 달콤한 순간, 안시연은 적당히 그에게 의지했고 연정훈은 기꺼이 받아들였다.그는 안시연을 안아 깨끗이 씻기고 나서 침대로 돌아왔다.여전히 안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베고 그의 품에 안긴 채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그녀가 마음을 놓자 연정훈도 마음이 놓였다.침대 옆 탁상 등이 꺼지고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잠들었다....경인의 날씨는 갑자기 추워졌고 하늘도 맑아졌다.안시연은 집에서 한동안 요양한 후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고 운전 연습도 재개했다.이 시기는 유난히 평온했다.모든 걱정이 마치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듯했다.그녀와 연정훈 사이에는 그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고 심지어 최미란을 보러 병원에 갈 때도 소현정을 보지 않았다.안시연의 주변에는 연정훈과 최미란이 있었고 가끔 부승희의 초대에 응해 함께 식사하는 일상이 이어졌다.이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나중에 이 시기를 회상할 때마다 그녀는 마치 꿈을 꾼듯해 믿기지 않았다.첫눈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그날, 안시연은 운전 연습을 마치고 차장 밖에서 이승우를 만났다.이승우는 막 부승원을 만나고 연정훈을 만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연정훈이 거절했다는 것이다.“잘됐네요. 타세요. 시연 씨가 있으면 정훈이도 내 약속 거절 못 할 거예요.”안시연은 망설였다.“정말로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가서 확인해봐야 해요.”“뭘 확인해요. 걘 분명 집에 가서 시연 씨랑 따뜻한 방에 같이 누워있으려는 거예요.”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이승우의 말은 늘 이렇듯 대처하기 어려웠다.마침 부승희에게도 전화가 와서 이승우와 함께 가자고 했다.그들은 겨울의 첫 소고기 전골을 먹기로 했고 한우빈이 최고급 술을 협찬해줬다고 했다.거절할 수 없었는지라 안시연은 결국 이승우의 차에 올라탔다.
“오늘 운전 연습은 어땠어?”연정훈이 묻자 안시연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코치님이 내가 엄청 빨리 늘고 있다고 하셨어요. 아마 한 번에 면허 딸 수 있을 거예요.”“어느 코치?”“전에 그 코치요.”“내일 사람 시켜서 바꾸라고 해야겠네.”안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왜요?”“필기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는데도 너한테 빨리 늘었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좋은 코치겠어?”연정훈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안시연은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건 단순 실수였어요!”이 말에 연정훈은 살짝 웃었고 안시연은 그의 팔을 붙잡으며 계속 말했다.“게다가 밤에 연습하게도 안 해주잖아요. 난 낮에 일도 해야 하는데 이 정도 속도면 정말 빠른 거예요!”연정훈이 안시연의 밤 운전 연습을 금지한 이유는 그녀가 밤에 연습을 하고 나면 집에 와서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들어버리기 때문이었다.그러면 그와 함께할 시간이 없어지니 참기 힘들었다.사실은 이런 이유였지만 연정훈은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다.“밤에 연습하는 건 효율이 안 좋지. 다음날 업무에도 영향이 갈 거고.”“그리고 밤에 너 수업 있잖아.”안시연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오늘 밤엔 이미 수업 예약했어요. 꼭 다 들을 거예요.”그러더니 연정훈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그러니까...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연정훈은 너무도 쉽게 수락했다.“알았어, 너는 서재에서 공부해. 난 침실에서 기다릴게.”“...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요.”“그래서 지금 일부러 나한테 암시하는 거야?”“아니거든요!”두 사람이 방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안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어보니 부승희와 그 친구들뿐만 아니라 낯선 얼굴들도 몇몇 보였다.연정훈이 들어가자 모두 그를 보며 인사했고 안시연에게는 형수님이라며 인사했다.안시연은 아직 그런 호칭이 익숙하지 않아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예전에는 연정훈이 안시연을 데려와도 사람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모두가 안시연을 공손하게 대하고
사람들은 이승우가 반우희를 아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그녀가 이승우의 ‘애인’인 줄 알았고 다들 한 목소리로 ‘우희 씨’라고 부르며 반우희에게 잠시 앉아 놀다 가라고 권했다.“아니요. 저 아직 일해야 해서요.”반우희는 자신의 명찰을 가리키며 거절했다.누군가 이승우에게 농담을 던졌다.“너 남자로서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야? 우희 씨가 이렇게 고생하는데.”이승우는 부승원의 쪽을 힐끗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에이 그럴리가. 우희 씨가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네.”그는 뒤돌아 세 개의 선물 가방을 들어 반우희와 그녀의 동료들에게 주었다.반우희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감사합니다, 도련님!”그녀는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떠났고 그 과정에서 부승원을 쳐다보지 않았다.반우희가 나가자 방안은 다시 떠들썩해졌고 아무도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이 방 안에 있는 도련님들은 미인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에 반우희와 같은 앳된 얼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안시연은 이승우가 부승원 옆으로 가서 무언가를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내심 궁금해하며 그쪽을 계속 쳐다보았다.그러다 고개를 든 이승우가 안시연이 몰래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윙크를 보냈다.안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승우한테 그렇게 뚫어져라 볼만한 데가 있나?”연정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안시연은 입가를 닦고는 그의 얼굴 옆에 바싹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정훈 씨는 궁금하지 않아요?”“그 여자애 말이야?”“네!”“궁금하지 않아.”“...”연정훈은 그녀가 궁금해하는 표정을 보고 꿀 고구마 한 조각을 안시연의 입에 넣으며 말했다.“이승우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 자기가 알아낸 거 있으면 와서 너한테 말해줄 테니까.”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그 사이, 이승우는 부승원에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고 부승원은 짜증이 났는지 바로 화장실로 가버렸다.방 밖은 고요했고 안은 따뜻했다.부승원은 복도 모퉁이
양시연은 무슨 일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순간 얼어붙었다.연정훈은 너무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만약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다면 아예 품속에 파묻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정신을 차린 양시연은 무의식적으로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무슨 일이에요?”‘설마 밖에서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온 건가?'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고 있었다.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양시연은 바로 물어보지 않고 조용히 손을 그의 등에 올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잠시 후 연정훈은 그녀를 조금 놓아주었고 양시연은 그의 턱에 입술을 가볍게 닿게 한 뒤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연정훈은 얼굴을 돌려 깊은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았다.너무 가까워서 연정훈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건물 안은 에어컨이 세게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급히 달려왔다 해도 이렇게까지 땀을 흘릴 리 없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너무 조급했던 것일 것이다.양시연은 다시 한번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아무 말 없이 연정훈의 손을 잡아 책상 쪽으로 데려갔다.그리고 티슈를 꺼내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이렇게까지 급해하는데 도대체 무슨 큰일인가요?”연정훈은 여전히 양시연을 깊게 바라보았고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양시연은 살짝 놀랐다.‘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이런 거야?’양시연이 묻기도 전에 연정훈은 그녀를 자기 가슴과 책상 사이로 끌어당겼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이마를 양시연의 이마에 맞대며 다행이라는 듯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안도감과 기쁨이 느껴졌어. 다행히도 하늘은 내 편이었던 거야.’양시연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지만 연정훈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뭔데 그래요? 나한테 말해 줘요. 이렇게 말 안 하면 나도 초조해진단 말이에요.”연정훈은 천천히 눈을 뜨고 그녀
“사무실로 올라갈게.”연정훈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분위기가 마치 따지러 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살짝 웃으며 다시 서류를 살펴보았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양시연은 당연히 연정훈일 거로 생각하며 그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그러나 돌아보니 문을 연 사람은 몇몇 임원들이었다.회의가 끝난 직후라 개별적으로 이야기할 일이 있을 법도 했지만 양시연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앞장선 사람은 익숙한 인물 권준호였다.예전에 주지혁 남매에게 몰려 궁지에 빠졌던 그녀는 원칙을 저버리고 연정훈을 찾아가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그에게 키스를 했는데 사무실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주지혁 부부 외에 그중 한 명이 바로 권준호였다.몇 년이 흐르고 권준호는 해외 파견을 마치고 돌아왔으며 그사이 양시연은 그의 대표 부인이 되어 있었다.권준호는 사람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 그때의 일은 언급하지 않았고 양시연에게는 늘 공손했다. 덕분에 양시연도 그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이야기를 나누던 양시연은 연정훈이 곧 도착할 거로 생각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임원들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누군가 일어나 문을 열려 하자 양시연이 손짓으로 제지했다.“앉아계세요. 제가 열게요.”그녀는 이미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었고 문을 열자 급하게 걸어오던 연정훈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양시연이 갑자기 시야에 나타나자 환한 미소로 그를 마주했다.짧은 순간 연정훈의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휘둘렸고 인연이 정말 신기하다고 느꼈다. 사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미 얽혀 있었고 누군가가 방해하려 해도 결국 연정훈은 양시연을 다시 만나 그녀의 손을 잡을 운명이었다.양시연과 함께할 운명이라 믿어지는 그 순간 그의 마음은 벅찬 감동으로 가득 찼고 온몸이 그 감정을 받아들였다.마침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이 감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양시연이 말할 틈도 없이 고개를 숙여 입술
양시연은 회의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연정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부승원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하아. 연 교수님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네.’양시연은 침을 삼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도 덜 쓰일 거로 생각하며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한편 연정훈은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뜻밖에도 연결되지 않았다.잠시 화면을 응시하던 연정훈은 다시 두 번 더 전화를 걸었으나 여전히 받지 않았다.양시연에게 당장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마음이 순식간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연달아 네 번이나 전화했으니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 번쯤 받을 법한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렇게 고민하던 순간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고 이번엔 마침내 연결되었다!“시연아!”“대체 무슨 일이에요?”양시연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나 지금 회의 중이에요. 부승원 씨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고요.”“할 말이 있어.”“알았어요. 그러니까 얼른 말해봐요.”연정훈은 입을 뗐지만 정작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양시연이 답답한 듯 다그쳤다.“빨리 말해요.”“나...”“됐어요. 그렇게 급한 거 아니면 집에 가서 이야기해요. 나 먼저 끊을게요. 안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시연.”양시연이 전화를 뚝 끊어버리자 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눈을 감고 잠시 말없이 숨을 골랐다.밖에서는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어 자리를 비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양시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 수도 없었고 마음은 공처럼 이리저리 튕겨 다니며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도련님?”임성원의 목소리인 것을 확인한 연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뭐 하러 들어왔어?”“도련님 혹시 배탈 나신 건 아니죠?”연정훈은 황당했다.“...”“나 괜찮아.”“정말 괜찮으세요? 약이라도 챙겨드릴까요?”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며 단
연씨 가문과 마씨 가문은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두 가문의 노인들은 오랜 파트너였다. 그러나 연호민이 서울로 자리를 옮기고 마씨 가문의 노인이 지방에 남게 되면서 두 가문은 점차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얼마 후 마봉식은 경기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했고 이 시점에서 두 가문이 만나는 이유를 연정훈은 잘 알고 있었다.연정훈은 원래 많은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지만 차에서 내리기 전 그 이메일들이 그의 머리에 쌓여서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마음속은 뒤집혔다. 그는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싶었지만 연재혁을 화나게 할까 봐 휴대폰을 보지 않기로 했다.거실에 들어서자 마봉식이 차를 끓이고 있었고 그가 그들이 도착한 것을 보고 자리를 안내했다.연정훈이 마봉식에게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인사하자 마봉식은 무척 기뻐하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결혼식 날 바빠서 현장에 가지 못했었는데 언제 한번 네 아내를 데리고 와서 꼭 만나게 해줘.”“기회가 되면 꼭 같이 인사드리겠습니다.”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양측은 미묘하게 탐색을 끝내고 그제야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원래라면 마봉식이 물러나고 연재혁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컸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은 확실하지 않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다.“이 시점에서 너의 아버지의 발목을 잡힐 실수를 하면 안된다.”마봉식이 그렇게 말하자 연정훈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조이현의 고소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봉식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가 말한 것은 연정훈에게 중요한 사람들을 간과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다.실제로 이런 일들을 다루는 것은 연재혁과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연정훈은 아직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옆에서 듣고 가끔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뿐이었다.연정훈의 마음속은 여전히 이메일을 모두 읽어보고 진짜 상황을 파악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중도에 마봉식이 그에게 물었다.“네 장인어른 몸 상태는 어떠냐?”양석진과 양지원의 결혼은 그들 사이에서 비밀이
연재혁이 연정훈에게 시간을 비우라 한 건 마봉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던 연정훈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다시 양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양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문씨 가문에 간 거 아니었어요?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어요?”“아직 아버지를 만나기 전이라 그냥 너랑 얘기나 좀 하려고.”연정훈의 목소리에는 다정함과 부드러움이 묻어났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살며시 내려놓았다.“오늘 밤엔 술 마실 일 없죠?”“안 마셔도 돼. 그 자리에 계신 분들은 차만 마시거든.”“그 말 들으니 안심되네요.”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난 이런 자리 자주 가는 거 별로 걱정 안 해요.”연정훈이 답했다.“나도 자주 가고 싶진 않아. 약속만 없었으면 지금쯤 집에서 널 안고 있었을 텐데.”“정말 한심해요.”양시연은 핀잔을 주며 말했다.“집 생각 그만하고 일에 집중해요.”“집중이 안 돼. 지금 당장 유턴해서 집에 가고 싶어.”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러다 당신 아버지께 혼나면 어쩌려고요?”연정훈은 눈을 감고 양시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까지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창문에 톡톡 빗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빗소리가 퍼졌다.양시연은 우산 꼭 챙기라며 몇 번이고 당부했지만 연정훈에게 그 잔소리는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그녀가 부승원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며 통화를 끝내야겠다고 했을 때 연정훈은 괜히 기분이 상했다.“부승원이 요즘 연애한다면서 어쩜 그렇게 야근까지 열심히 해?”양시연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런 얘기 제발 하지 마세요. 지금은 의지로 버티면서 일하고 있어요. 그런 말이라도 들으면 진짜 손 털고 나갈지도 몰라요. 그러면 제가 죽어나겠죠.”"정 안 되면 내가 양원의 일을 그만두고 네 회사로 가서 일해줄게."“어떻게 감히 당신한테 일을 시키겠어요.”양시연은 볼이 발그레해지며 사람이 없을 때를 틈타 휴대폰 화면에 입맞춤을 가볍게 흉내 냈다.“알겠어. 밤에 집에 가서 얘기하자. 나 이제 일해야 해.”연
양시연은 몰래 엿보다가 순간 멍해졌고 부승원에게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보였다.반면 반우희는 아이스크림을 절반이나 먹었음에도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부승원 옆에 꼬리처럼 붙어 있었다.양시연이 보기엔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반우희는 아마 부승원에게 달라붙어 키링처럼 매달렸을 것이다.양시연이 일부러 헛기침하자 반우희는 곧바로 양시연 쪽을 힐끗 보더니 티가 나지 않게 어색하게 부승원에게서 약간 떨어져 고개를 숙이고 아이스크림의 과자 부분을 먹기 시작했다.부승원은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자기 일을 계속했다.잠시 후 그는 양시연의 맞은편에 앉아 최근 계획을 이야기하며 현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이 정도 사소한 일로 연씨 가문이 흔들릴 정도라면 그 집안은 진작에 망했을 겁니다.”양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성장 환경이 다르면 사고방식도 달랐다. 양시연은 소현주가 죽었다는 사실에 사람이 죽은 이상 그 일을 잘 이용하면 큰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정훈이나 부승원은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그러던 부승원이 갑자기 말했다.“그래도 불안하면 외출할 때 조심해요.”“안전 문제인가요?”부승원은 짧게 대답했다.“네.”“연씨 가문 같은 대가문은 큰일이 벌어지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고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어요.”양시연은 곧바로 평화로운 시기를 떠올리며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간 연서명을 떠올렸다. 물론 그 후에 조씨 가문은 사실상 몰락해 미래가 없어졌지만 연정훈의 가족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양시연은 배를 어루만지며 이 말을 마음에 새겼다.오후엔 바빴지만 저녁이 되자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 처리 결과를 물었다.연정훈은 가볍게 이미 다 처리했다고 말하며 저녁엔 경인의 현직 고위 임원을 만나야 해서 그녀를 데리러 가지 못한다고 했다.“괜찮아요. 저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요.”양시연이 말했다.“우리 애아기 오늘 착했어? 발길질 안 했어?”양시연은 부드럽고 차분
소현주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고 양시연은 이미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누군가 지방에 한 통의 고소장을 보냈고 고소장에는 두 부부가 권력을 이용해서 한 멀쩡한 사람을 미치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적혀 있었다.사실 소현주의 사망 원인을 조사하던 사람들은 이미 영상 자료를 통해 소현주가 죽기 전에 양시연을 만났고 양시연이 험악한 경호원들을 데리고 갔으며 대화 중 몇 차례 소현주를 제압하려 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다른 사람 같았으면 최소한 조사를 위해 경찰서에 불려 갔을 일이었지만 양시연의 신분 덕분에 아무도 이 문제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고소장이 접수되자 연재혁은 분노한 나머지 연정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조사팀에 응답하라고 했다.아침 일찍 양시연은 연정훈이 밖에서 전화를 받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하고 담담했다.양시연은 문 쪽으로 걸어가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문제없겠죠? 누가 고소했는지 알아요?”연정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녀를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익숙한 사람이긴 한데 네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야.”“누군데요?”“조이현.”양시연은 정말로 뜻밖의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조이현 씨가 아직도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네요.”‘정말 정신 나갔구나.’“만약 조이현 씨 혼자 한 짓이라면 오히려 별일 아닐 거야.”연정훈은 담담하게 말했다.“문제는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누구라고 생각해요?”“굳이 의심할 필요 없어. 곧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그는 언제나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예전엔 그의 이런 태도가 오만해 보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든든했다.그날도 두 사람은 평소처럼 각자의 일터로 출근했고 스트레스받을 일도 많았지만 재미있는 일도 적지 않았다.양시연은 회사로 돌아온 뒤 사무실 분위기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
“정말 죽었어요.”연정훈의 단호한 대답에 표세연은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이 사실에 은근히 안도하는 듯했다.아마도 공휘 사건이 그녀에게 남긴 충격이 꽤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연정훈은 소현주에 관한 이야기를 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양시연의 마음에 불필요한 부담을 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하필 표세연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고 양시연도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소현주 씨에게 가족이 있나요?”“잘 모르겠어.”양시연은 그의 대답이 성의 없다고 느꼈는지 이번엔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소현주 씨가 갑자기 죽었는데 장례는 어떻게 치르죠?”표세연 역시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그래. 누가 소현주의 일을 마무리해 주는 거야?”연정훈은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전국에서 매년 이름 모를 시신이 얼마나 많은데 꼭 누군가가 수습해 줘야만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시연에게 말했다.“내가 욕조에 물 받아 놓을 테니까 넌 아래층에 잠시 나가서 산책하고 있어.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기다려.”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몇 걸음이나 된다고 굳이 데리러 와요?”연정훈은 그녀와 논의할 생각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기다려.”“알겠어요.”양시연은 순순히 응했고 연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연정훈이 자리를 뜨자 표세연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기분이 상했나 보네.”양시연은 고기를 한 입 더 먹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표세연은 그녀가 괜히 마음 쓰지 않도록 차분히 다독였다.“걱정하지 마. 연정훈은 단순히 소현주를 잊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소현주 얘기를 듣는 것 자체가 싫은 거야.”양시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혹시 마음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그럴 리가 있나.”표세연은 비웃듯 말했다.“소현주가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연정훈은 소현주를 역겹게 생각하는 것도 모자랄걸.”표세연은 혀를
날씨가 점점 더워졌고 양시연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 하늘은 더욱 우중충했다.연정훈은 그녀를 데리러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바로 본가로 향했다.표세연은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아들이 보고 싶었던 건지 일부러 두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차 안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일들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했잖아. 정말 말 안 듣는다니까.”양시연은 연정훈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걱정을 털어놨다.“누가 우리를 함정에 빠뜨려서 당신에게 해를 끼칠까 봐 무서워요.”“괜한 걱정이야.”연정훈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쉽게 당했으면 벌써 몇백 번은 죽었을 거야. 경인에서는 물론 경인 밖에서도 나한테 시비 걸 사람 몇이나 되겠어.”“말은 그렇지만...”“말이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양시연은 그의 단호한 말에 살짝 안심하며 그의 품에 기대 눈을 감았다.집에 도착하자 연재혁은 없었고 표세연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표세연은 임신한 양시연을 보자 아들보다 더 반가운 표정으로 맞으며 자리에 앉아 음식을 권했다.“음식들 맛 좀 봐봐. 입맛에 안 맞으면 내가 말해서 새로 차리게 할게.”양시연은 식탁 위에 놓인 각 지역의 신선한 음식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충분합니다. 그만하시고 어머님도 앉으세요.”표세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자는 양시연에게 음식을 챙기는 데만 집중하며 한동안 대화가 거의 없었다.양시연이 거의 다 먹고 나서야 표세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너의 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니?”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끔 바라봤고 연정훈은 그녀의 눈빛을 이해한 듯 표세연에게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네 아빠가 알려줬어.”양시연은 잠시 침묵하며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양지원의 태도로 보아 이번 양석진의 건강 문제는 비밀리에 처리되고 있을 터였다. 연재혁이 높은 위치에 있긴 하지만 양석진의 측근도 아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