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이 고의로 언급한 후에야 안시연은 어젯밤 그들의 관계가 다시 정의되었음을 떠올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좋아한다고 했다.안시연도 동의했고 연정훈이 과거의 불성실함을 용서했다.그래서 지금 그들은...연인인 걸까?아침에 그의 품에서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아직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은 그 관계가 구체화되고 있었다.예전 일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였다.안시연은 눈을 떨구고 연정훈의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어느 게 나아?”연정훈이 다시 물었다.안시연은 서둘러 두 셔츠를 살펴보고 가까이 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이게 나아?”“네...”“어떤 점이?”안시연은 침묵했다.“...”다시 셔츠를 살펴보며 차이점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런 차이도 찾지 못했다.“핏이 좀 더 좋은 것 같아요.”안시연은 진지하게 대답하며 구체적인 칭찬을 덧붙였다.그 말에 연정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안경 너머 눈동자에 미소가 번졌다.그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조용히 안시연을 지켜보았다.안시연은 그제야 셔츠 두 개를 집어 들고 연정훈을 다시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똑같은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 들킨 듯 긴장하며 스스로 답답함을 느꼈다. 연정훈이 두 번만 쳐다봐도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안시연은 옷을 연정훈에게 던지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연정훈은 그런 안시연을 서두르지 않고 물었다.“몸은 어디 불편한 데 없어?”너무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안시연은 반응이 늦었고 연정훈을 올려다보았다.막 입을 열려던 찰나 아침에 연정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시선이 마주치자 안시연은 연정훈의 눈 속에 장난기가 가득 차 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낀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두 사람 사이에 있던 아침의 일들과 그때 느꼈던 욕망이 떠오르며 안시연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그녀는 연정훈을 째려보며 말했다.말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나
연정훈이 이미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그는 몸을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안시연이 계단 입구에 서서 난간을 잡고 연정훈을 바라보고 있었다.“무슨 일이야?”안시연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잠시 망설였다. 몇 초 후, 안시연은 고개를 들고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저녁 같이 먹어요. 기다릴게요.”연정훈의 가슴이 살짝 뭉클해졌다.“...알겠어. 금방 돌아올게.”말을 마치고 연정훈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안시연의 맨발을 보았다.“신발은?”안시연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선생님에게 잘못을 들킨 초등학생처럼 고개를 돌려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뒤에서 연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천천히 뛰어.”안시연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속으로 너무 참견한다고 투덜거렸다.방으로 돌아갔지만 다시 잠들지 않고 창가에 기대어 연정훈을 지켜보았다.연정훈이 차에 탔다.그가 떠났다.연정훈의 차가 사라졌다.안시연의 마음도 연정훈의 행동에 따라 출렁거렸다.창밖에서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고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은 걱정이 됐지만, 연정훈의 할머니는 그의 친할머니니까 연정훈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안시연은 기운을 내어 활기차게 움직이며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연씨 가문에서.연정훈은 거실 한쪽에 앉아 있었고 집사는 조용히 다가와 차를 내왔다.“사모님께서 어젯밤 여사님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여사님께서 늦게 주무셔서 오늘 아침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쉬고 계십니다.”연정훈은 할머니를 바로 뵙기 힘들 거라 이미 예상하였기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할머니께서 푹 쉬게 해주세요.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집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눈치껏 물러났다.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고 그날 날씨는 흐려서 밖은 어둡고 음침해 보였다.연정훈은 홀로 거실에 앉아 있었지만, 냉대를 받아도 여전히 침착하고 여유로웠다.그러나 뒷마당에 있던 김세연은 연정훈과 다르게 차분할 수 없었다
안시연은 연정훈이 고작 한두 시간 늦을 거로 생각했지만, 네다섯 시간을 그렇게 앉아 기다렸다.밤 10시가 될 때까지도 연정훈은 돌아오지 않았다.안시연은 거실 창가에 앉아 간간이 창밖을 내다보았다.그때 아주머니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안시연 씨, 먼저 식사하세요. 대표님께서 아마 너무 바빠서 오늘은 못 돌아오실 것 같아요.”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저 이미 먹었어요.”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먹었다고 할 수 없었다. 고작 몇 조각 간식을 입에 댔을 뿐,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은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시간이 갈수록 안시연의 불안은 커졌지만, 연정훈에게 자꾸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부담스러워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두 번만 보냈다.소파에 누워 잠시 졸고 있던 안시연은 새벽 무렵 연정훈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핸드폰 배터리가 거의 다 돼서 메시지를 못 보낼 거야. 걱정하지 마.]안시연은 그 메시지를 보고 잠시 멍해졌다.‘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핸드폰 충전도 못 하는 곳인가?'더 묻고 싶었지만, 답장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 후로는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결국 안시연은 진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진수빈의 목소리는 무기력하게 들렸다.“대표님께서는 연씨 가문에 들어가신 이후로 나오지 않으셨어요. 저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네요.”안시연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어둠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아침이 밝기를 기다렸다.아침이 되자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며 안시연을 보고 말했다.“밤새 주무시지 않으셨어요?”안시연은 겉옷을 두른 채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며 연정훈이 돌아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아침을 준비해 주세요.”그녀는 아주머니에게 지시했다.“아...네.”밖에서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안시연은 흐릿한 하늘을 바라보며 답이 없는 메시지를 확인하며 더 불안해졌다.할 수 없이 안시연은 부승희에게 연락해 소식을 물어봤다.부승희도 상황을 잘 모르겠다고 하며 잠시 생각에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연정훈은 차 몇 잔만 마셨고 아침엔 밥 한 숟갈도 뜨지 못했어요!”김세연이 목소리를 높였다.연재혁은 머리가 지끈거려 김세연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을 내저었다.“목소리를 낮출 생각 없어요!”김세연은 문을 가리키며 재촉했다.“지금 당장 가서 어머니와 얘기하세요. 반 시간 드릴게요. 그때까지 내 아들이 여전히 아래에 앉아 있다면 우리 아버지한테 전화 받을 각오 하세요!”“연정훈은 연씨 가문의 일원이자 내 아들이기도 해요! 내가 어머니를 그토록 정성껏 모셨는데 최소한 내 체면은 세워줘야 하지 않나요!”연재혁은 두 손을 들며 김세연을 진정시키려 했다.“제발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요. 연정훈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에요.”“당신도 그걸 알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어머니도 연정훈의 말을 한 번은 들어주셔야죠!”연재혁은 말문이 막혔다.“...”밖에서는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곧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김세연은 소리를 지르고 난 뒤,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아 아들을 걱정하며 눈물을 흘렸다.“어머니께서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막내아들을 잃고 이제 우리 아들한테 화풀이하시는 거잖아요.”“그 말은 하지 말아요!”연재혁의 얼굴이 굳어졌다.그건 연씨 가문에서 절대 언급해서는 안 되는 금기였다.아래층에서는 연정훈이 하루 종일 굶고 앉아 있었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그는 여전히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끔 일어나 두세 걸음을 걷곤 했다.집사는 속으로 불안에 떨고 있었다.할머니와 손자는 모두 지독하게 고집스러웠다. 한 사람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유일한 손자가 고통받는 것을 묵인하고 있었다. “도련님, 일단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집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물었다.“지금 몇 시죠?”“여섯 시입니다.”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집사는 본능적으로 연정훈을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허리를
연정훈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몸이 버티기 힘들었다.안시연이 갑자기 달려오자 연정훈은 잠시 균형을 잃을 뻔했다.그녀의 긴장을 느낀 연정훈은 이를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손을 들어 안시연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그 소리에 안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지나치게 반응했음을 깨달았다.그녀는 연정훈을 놓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괜찮아요?”“괜찮아.”연정훈은 주방 쪽을 힐끗 보며 물었다.“저녁 뭐 했어?”“수제 면이에요.”안시연의 대답에 연정훈은 의아한 듯 물었다.“저녁 안 먹었어요?”“밖에서 먹을 생각이 없었어. 일이 끝나서 바로 돌아온 거야.”연정훈이 말했다.“그럼 내가 밥을 차려줄게요!”“좋아.”연정훈은 소파 앞에서 찬 외투를 벗으며 대답했다.그가 다시 몸을 돌리자, 주방에서 안시연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을 들고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연정훈의 마음속에 있던 찬 기운이 대부분 사라졌다.아주머니가 잠시 나왔다가 한 번 쳐다보고는 조용히 사라졌다.식당 안은 따뜻한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연정훈이 자리에 앉았을 때 젓가락은 이미 연정훈의 앞에 놓여 있었다.안시연은 큰 그릇에 면을 담아 연정훈 앞에 놓고 자신을 위해 작은 그릇에 면을 담았다.연정훈이 비교하듯 면을 살펴보더니 농담처럼 말했다.“아껴서 나 주려고 그러는 거야?”“아니요. 저는 배고프지 않아요.”안시연은 감정에 따라 식욕이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 연정훈을 하루 종일 걱정하느라 속이 계속 허전했다.연정훈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오후에 뭐 맛있는 거 먹었는데 지금도 안 배고파?”“...간식이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대화가 오가는 동안 연정훈은 계속해서 면 국물을 마셨다.안시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면이 입에 맞지 않아요?”“국물이 아주 맛있어.”안시연이 답했다.“네.”안시연은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채, 주방으로 가서 따로 면 국물을 덜어 주었다.연정훈은 국그릇을 받아 들
“정훈 씨 가문의 가훈은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밥을 주지 않는 건가요?”안시연이 물었다.연정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나는 이제 곧 서른이지만, 여전히 아이처럼 다뤄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다가 목이 메어오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죽이라도 끓여 줄게요.”안시연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 하였다.연정훈이 손을 뻗어 안시연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연정훈은 손으로 안시연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하루 굶은 것뿐이야. 그동안 내가 너를 힘들게 한 벌이라 생각해. 그래도 나에겐 이득이야.”안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답답하게 말했다.“정훈 씨가 나한테 진 빚을 왜 할머니가 대신 갚게 하시는 거예요?”“그럼, 네가 나한테 벌을 준다면 어떻게 할 건데?”“어쨌든 밥은 줄 거예요.”연정훈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고개를 숙여 안시연의 머리에서 나는 샴푸 향기를 맡으며 평온함을 느꼈다.“할머니가 내린 벌은 나와 할머니 사이의 일이야. 넌 나를 아껴줄 수 있지만, 그 책임까지 지려 하지는 마.”“누가 정훈 씨를 아껴준다고 그래요...”안시연은 허리를 펴며 말했다.“나는 그 면이 아까워서 그래요. 원래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정훈 씨가 돌아와 다 먹어줄 줄 알았더니, 겨우 몇 젓가락만 먹었잖아요.”연정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나중에 다 먹을게.”안시연은 연정훈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지금 쉬려고요?” “나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서 잠깐 앉아 있자.”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계단에 다다랐을 때 안시연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아. 정훈 씨 어머니 전화 끊는 걸 깜빡했어요.”연정훈이 답했다.“네가 끊지 않아도 엄마가 이미 끊었을 거야.”“그래도 한 통 해줘요. 어머님이 정훈 씨 많이 걱정하실 텐데.”“알겠어.”아래층에 도착하자, 연정훈은 김세연에게 전화를 걸었고 안시연은 주방으로 가서 음식을 준비했다.김세연은 전화를
안시연은 연정훈에게서 두려움을 본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연정훈이 아무리 재빨리 감정을 숨기려 해도 안시연은 그것을 발견했다.그는 땀을 많이 흘렸고 얼굴이 창백해 보였으며, 그 모습은 매우 무섭게 느껴졌다.연정훈이 화장실 가서 얼굴을 씻고 돌아오니,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안시연이 물었다.“악몽 꿨어요?”“응.”연정훈은 여전히 안시연의 뒤에 누워, 한쪽 다리를 굽히고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작은 삼촌 꿈을 꿨어.”안시연은 놀라며 물었다.“작은삼촌이 있었어요?”연정훈은 당황했다.그는 너무 빨리 말을 꺼냈고 의식했을 때 자신도 놀랐다.연정훈은 연서명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안시연과의 대화 속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연정훈의 머리를 마사지해 주었다.“정훈 씨의 작은 삼촌에 관한 정보가 비밀인가요? 왜 외부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죠?”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조용히 말했다.“...작은삼촌이 세상을 떠났어.”안시연의 동작이 멈췄다.안시연이 질문하기도 전에 연정훈은 천장에 있는 크리스탈 조명을 바라보며 말했다.“작은삼촌은 나보다 열두 살 더 많아. 우리 할머니의 늦둥이 아들이야. 우리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어.”안시연은 연정훈의 슬픔을 느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가족의 죽음은 어떤 말로도 그 아픔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정훈 씨가 작은삼촌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어요.”“그건 오래전 일이라.”연정훈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이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눈을 감으며 말했다.“오랫동안 작은 삼촌을 꿈에서 본 적이 없었어.”안시연은 휴지를 꺼내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향초 하나 켜 줄까요? 정훈 씨 한참 자고 있었잖아요.”“괜찮아.”연정훈은 옆으로 돌아서 안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머리카락에 뭘 사용한 거야?”“머리카락?”“응. 좋은 향기가
한숨 자고 난 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연정훈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기분 좋게 해줄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 “...”연정훈은 잠시 침묵하더니 휴지를 꺼내 입을 닦았다. “왜요?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으니까 밥도 안 먹으려고요?” “선비는 죽어도 굴욕을 참지 않는다고 하지.”안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이 정도의 난이도로 끌어올릴 만큼 심각한 일은 아니다. “정훈 씨가 안 해주면 저도 안 만들어 줄 거예요.”안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침착하게 휴지를 던지며 안시연을 바라보았다.“난 잔치국수 먹고 싶어. 채소도 듬뿍 넣어줘.”연정훈은 추가 주문을 하며 덧붙였다. “계란 두 개 더 삶아줘. 최대한 반숙으로 부탁해.”안시연이 말했다.“제가 꼭 만들어 줄 거라고 확신하세요?”연정훈은 웃으며 말없이 안시연을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침묵했다.“...”그래.안시연은 패배를 인정하듯 고개를 돌렸다. “계란이 꼭 반숙일지는 장담 못 해요.” “나는 널 믿어.”안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계란을 완벽하게 반숙으로 만들기 위해 두 개의 냄비를 동시에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두 사람이 짧게 눈을 붙인 후, 시계는 아직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모든 것이 고요한 그 순간, 안시연은 바깥에서 딱딱하는 소리를 들었다.그 소리는 잠 못 이루는 나비가 나타난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재료를 모두 냄비에 넣고 안시연은 몸을 돌려 거실을 보았다.연정훈이 바의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긴 다리와 반듯한 허리 덕분에 그는 더욱 우아해 보였다. 나비는 연정훈을 둘러싸며 그 주변을 맴돌다 목도리를 물어 그의 손에 가져다주었다. “더러워졌어.”연정훈이 말했다.나비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목도리를 물고 연정훈의 주변을 맴돌았다.연정훈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하다가 안시연에게 물었다. “깨끗한 거 있어?”안시연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저 작은 서랍
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고 연씨 가문의 본가에서 표세연이 전화를 받았다.“좋아. 알았어.”양시연은 2층에 서서 표세연의 기쁜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짐작했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표세연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괜찮아. 연정훈의 아버지가 다 해결했어.”‘아이고.’“맞아. 오늘 양석진 씨께서 모습을 보이셨대.”표세연이 덧붙였다.양시연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었음을 실감했다.그녀는 연정훈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후속 처리할 일이 남아 있는 듯했다.집에서 기다릴까 했지만 마침 반우희가 세 아이를 데리고 가려 하자 그녀도 차라리 반우희를 태우고 연정훈을 데리러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너무 서두르지 마. 연정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표세연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살짝 받치며 계단을 내려갔다.“마침 답답했는데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 네가 답답해할 줄 알았어.”표세연은 결국 운전사를 불러 그들을 밖으로 데려가 바람을 쐬게 했다.주차장에서는 세 아이가 여러 차를 구경하고 있었고 반우희가 좋아하는 마이바흐는 승주도 탐을 내는 차였다.“아니면 우리 이 차를 타고 나갈까요?”양시연이 제안했다.“그래도 돼요?”반우희와 승주가 동시에 묻자 양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아싸.”탁승호는 없었고 표세연이 정해준 운전사는 오랫동안 일해온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안전을 위해 희주와 동준은 다른 차에 태웠다.반우희는 마이바흐의 조수석에 앉았고 승주는 양시연과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나도 이제 출세했네요. 마이바흐를 타보다니.”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사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출발!...단 15분만에 양원 그룹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누구도 그 전화의 내용을 직접 듣진 못했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결과는
“괜찮아요. 반우희 씨는 그냥 한 번 올라가서 볼 거예요. 탁승호 씨는 차 시동 켜고 조수석에 앉아요. 우희 씨가 잠깐이나마 만족할 수 있도록 해줘요."양시연이 웃으면서 말했다.탁승호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네.”반우희는 기분 좋게 차에 올라탔고 양시연은 차 밖에서 앉아 있었으며 실내는 시원하게 느껴졌다.탁승호는 계속해서 옆에서 지켜보았고 반우희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그의 눈빛이 다소 불친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음대로 만지지 않았다.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양시연은 웃으면서 물었다.“마음에 들어요?”“네. 마음에 들어요.”“사법시험 끝나면 부승원 씨에게 차 한 대 사달라고 해요.”반우희는 진지하게 한숨을 쉬었다.“시연 언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물어보길래 차 한 대 선물해 줄 생각인 줄 알았어요.”양시연이 일어나서 반우희 코를 살짝 쥐었다.“욕심쟁이네요.”반우희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그때 또 한 번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반우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곧 폭우가 올 것 같아요.”“그럴 것 같네요.”...양원 그룹 회의실에서 6시가 다 되어가지만 사람들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회의라지만 사실 중요한 사항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윗사람들의 연설뿐이었다.회의는 이 회장이 직접 참석했고 그의 말 속에는 일부 얌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5분 전 누군가가 또다시 창고에서 발생한 사고를 언급했다.“지금까지 사망자 가족은 아직 보상안을 받지 못했습니다.”이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책임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보상안이 나올 수 있나요?”“우리는 어쨌든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누군가 말했다.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죠. 사람들의 입이 무섭죠.”정 회장은 표원정의 의견을 지지했고 그는 이미 조재민과 얽히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이 회장과 연정훈과 대립 중이었다.이 회장은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웃을 듯한 표정으
양시연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양혁수는 그녀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마음 한구석이 살짝 쓰렸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었다.“이제 곧 출산인데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 요즘 같은 때는 한 발짝 덜 움직이는 게 안전한 법이야.”양혁수가 걱정스레 말했다.“어쩜 정훈 씨랑 하는 말이 똑같아?”“연정훈 씨랑 나를 비교하지 마. 난 그 사람이랑 상종도 안 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 너머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변여름이야?”“응. 변백호가 볼일 있어서 왔는데 변여름도 같이 따라왔어. 한강시에 한 번도 안 와봤다길래 데리고 놀러 왔지.”“잘됐네.”“혹시 처리할 일 있으면 말해. 너희가 직접 움직이기 어려운 건 내가 대신 해줄게.”전화를 끊기 전 양혁수가 덧붙였고 양시연은 그의 배려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저녁 무렵 반우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세 아이를 데리고 복숭아를 따러 갔다가 양시연에게도 좀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다.마침 무료하던 참이라 양시연은 주소를 알려주며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아이들이 도착하자 집안 분위기가 한층 활기차졌다.표세연은 특히 동준이가 작은 몸집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만화 캐릭터 같다며 귀여워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반우희는 대게를 한입 베어 물며 무심히 말했다.“요즘 다들 너무 바쁜 것 같아요. 벌써 이틀이나 부승원 씨 얼굴을 못 봤네요.”“내가 없으니 많이 힘들겠죠.”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게 아니라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았는데 요즘은 뭔가 이상해요.”양시연은 부승원이 왜 바쁜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반우희를 달래며 더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오늘 부승원 씨의 생일이에요. 이따가 그
이전에는 민수희가 있었기 때문에 표세연은 민씨 가문의 기생충 같은 사람들을 참을 수 있었지만 민수희가 떠나고 나서는 이제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요즘 마음도 편치 않아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참이었다.그때 민지연이 버릇없이 덜컹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본 표세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뺨을 한 대 때렸다.‘팍!’양시연은 위층에 있었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동 소리를 듣고 급히 문을 열였다. 그곳에서는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방미선은 아마도 체면이 상했는지 표세연에게 기어이 몇 마디 반박하며 말했다.“혹시 갱년기 아니야?”“갱년기? 너야말로 갱년기야!”“나는 곧 손자를 볼 거야. 갱년기는 이미 다 지나갔다고.”민지연과 방미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표세연은 화가 나서 말이 거칠어졌다.“앞으로 너희는 이 집에 다시 발 들이지 마. 어머님도 돌아가셨고 이제 이 집엔 민씨는 없어. 정인은 이미 내 며느리와 함께 성을 바꿔서 양씨가 되었어. 만약 돈을 원하고 손자 행세를 하려면 양씨 가문에 가서 해.”“사모님.”가정부들은 놀라서 표세연에게 말을 그만하라고 했지만 표세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덧붙였다.“내가 하나만 말해줄게. 우리 사부인 성격이 나보다 더 안 좋아. 가서 손자 행세하고 싶으면 절이라도 소리 크게 내서 해.”방미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당장이라도 화병이 날 듯했고 얼굴이 붉어진 채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고 욕을 하려 했지만 자신이 남의 집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이빨을 꽉 깨물며 참았다. 그런 다음 표세연에게 정신과 약을 먹으라고 권한 후 떨리는 손으로 민지연을 끌고 나갔다.가정부 중 한 명은 원래 표세연을 말리려 했지만 방미선의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저희 사모님은 건강하세요. 오히려 당신이나 민지연 씨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표세연은 한바탕 화풀이를 끝내고
10시가 지나서야 양시연은 집으로 돌아온 연정훈을 맞이했다.“안 죽었어요?”양시연이 의아해하자 연정훈은 외투를 벗으며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아직 숨은 붙어 있지만 의식이 없어. 그래서 임성원에게 사람을 옮기라고 했어.”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사람들은 책임자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정훈 씨와 연관 짓는 데 집중할 테니까요.”소현주의 사건처럼 연정훈도 사망 원인을 깊이 파헤치지 않았고 심지어 소현주의 시신도 따로 보관하지 않았다.“하지만...”양시연은 말을 잠시 멈추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조재민 씨 일당이 먼저 움직여서 이번 사건을 더 크게 키워 아버님께 압박을 가하려는 건 아닐까요?”“그럴 가능성은 적어. 설령 조재민이 그런 속셈을 품었더라도 직접 나설 인물은 없을 거야. 이런 일들은 보통 결정타를 날릴 만큼 치명적이지 않고 최대한 상대의 발목을 잡는 수준에서 이용될 뿐이지.”양시연은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그쪽 사람들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아버님께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면 그때 서야 일제히 공격할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침대 머리맡에 앉히며 물었다.“소식 들었을 때 많이 놀랐어?”양시연은 살짝 한숨을 쉬며 연정훈의 품에 기대 조용히 말했다.“놀라진 않았어요. 다만 당신이 걱정돼서 자꾸 이것저것 생각하게 돼요.”“아. 참.”양시연은 고개를 들고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러면 아버님 쪽은 언제쯤 소식이 올까요?” “이번 주 안에는 결론이 날 거야. 하지만 임명까지는 아직 이르고 최종 결정은 위에서 내려야 해.”결정이 내려진다는 건 곧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양시연은 그제야 양석진이 종적을 감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아빠는 지금 한강시에 계실 거예요. 이번 일은 결국 서운에서 벌어지는 정치 싸움이겠죠?”“맞아.”“이번 일을 계기로 양원에서는 당신의 직위를 어떻게 조정하려고 해요?”“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양시연은 약간 놀라며 물었다.“휴직 안 해요?”
새벽이 되어서야 양시연은 사건의 전말을 들었고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표세연처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일곱 명 모두 구조되었고 여섯 명은 이미 의식을 되찾아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나 팀장을 맡은 이가 가장 위독한 상태였으며 아직도 응급 치료 중이라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임성원이 보고했다.“깨어난 사람들 모두 책임자가 오후에 연 대표를 만나 서명을 받은 승인 문서를 들고 창고에 들어갔다고 증언했습니다.”“그럼 그 승인 문서는 어디 있나요?”“없습니다. 모두 봤다고는 하지만 문서는 책임자가 보관하고 있었고 현재 그가 응급실에 있어 찾을 수 없습니다.”양시연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승인 문서도 없이 그냥 입 맞추고 연정훈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겠다는 거죠?”“그 사람들의 말이 일관되게 똑같아서 거짓말 같지는 않습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겠죠. 그 책임자는 그냥 가짜 승인 문서를 직원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됐을 테니까요. 그러면 직원들은 실제로 봤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증언할 테고. 하지만 승인 문서가 진짜라는 걸 누가 증명하죠?”‘한심하다. 이렇게 조잡한 수작을 부리다니.’이 사람들은 연재혁이 패배할 거로 생각하고 양시연의 아버지가 위중하다고 생각하니 막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그 책임자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임성원은 사실대로 말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상태가 위독했습니다.”양시연은 욕이 나올 뻔했다.세상이 참 잔혹하다. 해당 라인의 최고 책임자는 연정훈이었고 규칙에 따라 사고가 발생하면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책임을 져야 했으며 그 책임의 경중이 다를 뿐이었다.그런데 이 사람들은 승인 문서도 없이 증거도 없이 오직 입을 맞추고 연정훈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표세연은 냉정하게 말했다.“그 책임자가 살아 있기만 하면 조사를 통해 연정훈과의 연관성이 크지 않다는 걸 밝힐 수 있어.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죽으면 비록 연정훈이 주범이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억울한 오명을 쓸 가능성이
옛집에 도착하자 표세연은 서둘러 양시연을 맞이하여 앉히고 다양한 간식들을 차려주며 소파를 정리해 편안하게 앉게 했다.“이쁜 얘기야, 한 달 넘으면 할머니랑 만날 수 있겠네.”표세연은 양시연의 배를 보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옆에서 아주머니가 나와 간식을 놓으면서 말했다.“도련님, 요즘은 사모님과 함께 집에서 지내시면 좋겠어요. 도련님께서 오시면 사모님께서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몰라요.”양시연은 표세연의 얼굴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챘고 표세연이 불면증에 걸린 것 같다고 느꼈다.표세연은 아줌마를 보내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별일 아니야. 아주머니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연정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말했다.“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수많은 풍파를 겪으셨는데 어머니께서는 아직 심리적으로 훈련이 덜 된 거 같네요.”표세연이 연정훈을 가볍게 째려보았다.“그 전과는 달라. 예전엔 할아버지가 도와주셨지만 지금은 여기서 할아버지도 손을 쓸 수 없어.”양시연은 위로하며 말했다.“사실 더 승진하지 않더라도 다른 기회는 있을 거예요.”표세연은 고개를 저었다.“이기지 않으면 지는 거지. 무승부는 없어.”양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의 주제를 아기의 이름으로 전환했다.표세연은 확실히 기뻐하며 말했다.“성씨는 네가 선택할 권리를 줬으니 이름을 지을 때는 아이의 할아버지 의견도 좀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좋아요. 이름은 아버님께서 정하게 하세요.”양시연은 여유 있게 말했다.표세연은 다시 양시연의 배를 만졌고 거실은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연정훈은 전화를 받고 회사에 가야 했다.“주말인데 전혀 시간이 없네.”표세연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으며 연정훈에게 차 조심히 운전하고 저녁에는 최대한 일찍 돌아오라고 말했다.“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자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그들의 사이가 좋아 보이자 표세연도 기뻐했다.연정훈이 떠난 후 양시연
복도는 적당히 어둡고 분위기도 완벽했다.부승원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반우희에게 입을 맞췄다.처음엔 가볍게 입을 맞췄지만 반우희가 발끝을 들자 부승원은 그녀의 머리 뒤로 손을 돌려 깊게 키스했다.반우희의 몸에서 오래 스며든 듯한 강한 딸기 향이 났고 부승원은 그 향이 가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반우희는 식사 후 화장실에서 거의 반병을 썼고 혹시 음료처럼 한 통을 다 마신 게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입술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숨결이 얽혔고 쉽사리 떼어낼 수 없었다.반우희는 자기 입술을 핥으며 부승원의 입술도 스치듯 지나갔다.두 사람의 코끝이 부딪히자 반우희는 살짝 부끄러워졌는지 더욱 세게 끌어안고 얼굴을 부승원의 가슴에 묻었다.“이제 가야 해. 승주가 널 찾을 거야.”부승원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반우희는 가볍게 대답하고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불빛은 어두웠지만 부승원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된 걸 느낄 수 있었다.‘정말 좋다.’반우희는 부승원을 마주 보며 뒷걸음치자 부승원이 말했다.“넘어지지 말고 조심히 걸어.”“네.”반우희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두 걸음 더 뒤로 걸어가며 기분 좋게 계단을 올랐다.부승원은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기분이 좋아졌고 입안의 딸기 향이 한층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발소리가 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가 갑자기 멈추자 부승원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부승원 씨.”그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고 마치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살짝 몸을 숨겼다.부승원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뭐 하는 거야?”반우희는 두 손을 입가에 모아 확성기처럼 만들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오늘 밤에 문제집 다 풀 거예요.”부승원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적당히 해. 문제집이 너한테 질려서 도망가겠어.”반우희는 키득키득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고 부승원은 그녀가 집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차로 향했다.차에 다가가자 그는 잠
두 사람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운전사는 이미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대기하고 있었다.부승원은 반우희를 건물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그녀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려 했지만 반우희는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반우희는 부승원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말없이 매달렸다.부승원은 마음이 약해져 반우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집에 가기 싫으면 한 바퀴 더 돌면서 간식이라도 사줄까?"“싫어요.”반우희는 부승원을 더욱 꼭 안았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옆얼굴에 살짝 입을 맞췄다.반우희는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재빠르게 그의 턱에 가벼운 키스로 응답했다.주변은 어두컴컴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부승원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으며 평소의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고 따스한 너그러움만이 남아 있었다.“마라 새우를 많이 먹으면 원래 이렇게 집착하게 되나?”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새우 탓이 아니라 달이 문제에요.”“달이 뭘 잘못했는데?”“나는 인정해 이건 전부 달 때문인 것을.”반우희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부승원은 그녀의 엉뚱한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조용한 밤의 고요 속에서 그녀는 한 구절을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불렀고 그 음성은 살랑이는 바람에 실려 그의 마음을 간질였다.‘달빛이 너무 아름다웠고 너는 너무 다정했어. 그 순간 오직 너와 함께 영원을 약속하고 싶어.’가사가 꽤 마음에 들었고 부승원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이 정도면 달이 욕을 좀 먹어도 억울하지 않겠네.’“부승원 씨.”반우희가 그의 품 안에서 부르자 부승원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반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흔들리지 마세요. 부모님께 휘둘리지 말고 날 외국으로 유학 보내지 마요. 난 당신과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부승원은 반응 없이 달콤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져 그녀를 놀리고 싶어졌다.“아닌데? 너 승주한테 돈만 많이 주면 나랑 헤어지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