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찻집을 떠나면서 부승희에게만 메시지를 보냈다.부승희는 안시연을 붙잡으려 따라나섰지만, 안시연은 거절했다.이승우는 대나무집 위에서 망원경으로 상황을 살펴보며 혀를 차며 말했다.“아가씨, 정말 고집이 세네. 양 두 마리 데리고 길을 나서는 것이 마치 아이들 데리고 가출하는 것 같잖아.”부승원은 속으로 생각했다.‘아마 멀지 않아 아이를 안고 뛰게 될 것 같은데 지금 연정훈이 하는 짓을 보면 아무리 마음을 다 준 여자라도 떠나게 되었어.’안시연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었다.안시연은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양 두 마리도 힘들 것 같았다. 영준이는 아직 한 달밖에 되지 않았고, 나비는 술이 깬 지 얼마 되지 않았다.연정훈이 없어도 괜찮지만, 이 사랑스러운 양 두 마리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안시연은 돌아갈 시간을 조금 미루기로 했다.하지만 침실로 들어가 핸드백 안에서 USB를 찾지 못했다.‘이게 무슨 일이야?’안시연은 방을 몇 번이나 뒤졌지만, 허탕이었다. 결국 연회를 주최한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혹시 착오가 있었던 건가요? 말씀하신 USB를 찾지 못했어요.”프런트 직원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말했다.“아마 저희 쪽에서 실수한 것 같아요...”안시연은 어이없었다.전화를 끊고 안시연은 짐을 싸면서 연정훈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 이렇게 해야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것 같았다.안시연은 오후에 잠깐 눈을 붙였다.일어나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우리 이제 집에 가자.”안시연은 나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나비는 머리로 안시연의 배를 살짝 밀었다.“착한 아기.”안시연의 마음이 따뜻해졌다.안시연은 룸서비스를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양혁수의 전화가 걸려 왔다.“여보세요?”“어디야?”안시연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왜요?”“나 양주에 도착했어. 너 보러 갈게.”안시연은 황당하면서도 무심하게 말했다.“저 이제 경인시로 가려고 차를 탈 준비 중이에요.”“
소현주는 성산시의 아파트에서 손목을 그었다. 소현주를 발견한 것은 맞은편 이웃이었고 그때 소현주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상태였다. 소현주는 믿을 만한 가족도 없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위급 상황을 알릴 사람조차 없었다.간호사에 따르면 소현주는 계속 휴대폰을 쥐고 있었지만 연락처 목록에는 몇 명뿐이었다. 그중 누구에게도 연락이 닿지 않았고 유일하게 최근 통화한 사람은 연정훈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화도 통하지 않아 경찰에게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원장은 연정훈의 신분을 고려해 연정훈이 일찍 도착한 것을 보고 소현주는 연정훈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연정훈은 부하에게 소현주에게 간병인을 붙여주라고 지시한 후, 떠날 준비를 했다. “소현주가 깨어나면 이렇게 전해줘요.”연정훈은 간병인에게 말했다. “정말 죽고 싶다면 다음번엔 커튼을 닫고 아무도 못 보게 해.”간병인은 당황했다.이 말은 너무도 차가웠다.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마치 선녀처럼 보였고 아직 의식을 잃은 상태인데 이 남자는 너무 냉정했다.연정훈은 간병인에게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정리한 후 병원을 떠났다. 소현주를 한 번 보러 온 것으로 연정훈은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한때 사랑했던 사람인데, 그녀의 생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다음번에 소현주가 정말 죽는다면 연정훈은 돈을 내서 소현주의 시신을 수습해 줄 생각이었다. “이제 양주로 돌아가시겠습니까?”진수빈이 물었다.“그래.”연정훈은 짜증스럽게 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기대고 휴대폰을 꺼냈다. 안시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정훈 씨 일이 있어서 먼저 간 건가요?]안시연이 물었다.연정훈은 그때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다. 마음이 가라앉은 후 연정훈은 신속하게 답장을 보냈다. “곧 양주로 돌아갈 거야. 찻집에서 기다려.” 메시지를 보내고 다른 알림을 확인해 보니 이승우가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네 여자 친
안시연은 알파카 두 마리와 함께 호텔 로비에서 양혁수를 만났다.오늘 식사는 안시연이 쏘기로 했고 둘은 근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들어선 지 얼마되지 않아 부승희 일행도 도착했다.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주고받은 뒤 각자 주문했다.양혁수는 스스럼없이 한 상 가득 주문했다.“우리 둘만 먹을 거예요.”하지만 양혁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어차피 연정훈 돈인데 뭣 하러 아껴.”“...”식사 도중 양혁수가 갑자기 물었다.“연정훈은 어디 간 거야?”안시연은 당황하며 대답했다.“급한 일이 생겨 경인을 떠났어요.”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른 여자 만나러 간 건 아니고?”안시연의 손이 뚝 멈췄다. 그러자 양혁수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진짜인가 보지?”안시연은 양혁수를 힐끗 노려보았다.“밥 먹을 때 조용히 밥만 먹는 게 어때요?”“방금까진 그럴 생각이었는데 지금부터는 말 좀 하려고.”“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요?”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겨우 연정훈의 카드를 손에 쥐게 되었는데 계속 놀려먹어야지.”“...”안시연이 한 입 크게 입에 넣으며 말했다.“연정훈 씨가 누굴 만나든 그 사람 자유니까 나와 아무런 상관없어요.”“그런데 뭔가 심통 난 것 같은데?”양혁수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속은 말이 아니었다.“선배 연정훈한테 진심이지?”“아니요? 저도 지금까지 연기한 거예요.”양혁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상관없어. 연정훈한테 진심이 아니라면 차라리 나한테 와. 난 진심이거든.”또 시작된 양혁수의 플러팅.“그쪽 어머니를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 우리의 인연은 딱 이 정도예요. 그러니까 포기하세요.”“누가 그래? 우리 엄마가 반대한다고?”양혁수가 수저를 내려놓았다.“선배만 좋다면 우리 엄마는 내가 바로 해결할 수 있어.”안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도련님, 지금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프니까 제발 저 숨 쉴 틈은 주세요.”“내가 숨통이 되어줄게.”안시연은 더 이상 얘기를 이어가
“읍읍”‘조심해!’안시연은 몸부림치며 양혁수에게 알려주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칼이 몸을 찌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들려왔다.양혁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칼을 휘두른 상대는 한 번으로 부족했는지 칼을 빼 들고 또 한 번 더 찌르려 했다.양혁수는 고통을 참으며 상대의 손을 내리쳤고 다시 몸 다툼이 생겼으나 양혁수는 힘에 부쳤다.그렇게 칼이 다시 그의 복부를 찌르려는 순간 안시연은 끝내 차로 끌려갔다.“가자!”“빨리 가!”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도록 차 문이 굳게 닫혔다.안시연은 문을 열려고 몸통으로 들이박았으나 맞은편의 남자에 뺨을 맞고 말았다.입가가 찢어지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으나 안시연은 바로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양혁수를 바라봤다.바닥에 쓰러진 양혁수를 내버려두고 방금까지 몸 다툼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 양혁수 주변을 둘러쌌다.흐릿한 시야에서 왠지 이승우의 모습이 보인 것 같았다.그리고 차량은 주차장을 벗어났다.안시연의 코를 막은 수건에 약물이 묻어 있었고 약효가 올라오자 그녀는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눈이 감기고 그녀는 오직 단 한 사람만 떠올랐다.연정훈.살려줘.세상이 온통 하얀색이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안시연이 눈을 번쩍 떴다.눈을 떠보니 온몸이 푹 젖어 있었다.사납게 생긴 어느 사내가 깨어난 안시연을 보며 손에 쥔 물컵을 내려놓았다.“빨리 철수 형님 모시고 와.”안시연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철수 형님이라는 지칭에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자 텅 빈 방에는 안시연이 묶여있는 의자와 그녀 맞은편의 소파밖에 없었다. 창밖으로는 오직 나무 한 그루만 보였다.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이 파편이 되어 떠오르고 안시연은 점점 두려움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내가 납치된 건가?’방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 안시연이 깜짝 놀라 얼어붙
연명걸은 이철수를 죽이지 못해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연명걸은 예전과는 달리 괴팍해진 모습으로 소리쳤다.“미쳤어? 안시연을 납치하려고 양혁수를 칼로 찔러?”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양혁수는 양석진 의원의 조카였다!이철수도 사건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표정을 구겼다.“그 녀석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먼저 덤벼들었어요!”그러자 연명걸이 신경질적으로 안경을 벗어 던졌다.젠장! 젠장!이철수와 한 배를 탔으니 연명걸도 같이 연루될 가능성이 컸다.“정보는 이미 연정훈에게 흘렸으니 저 여자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려면 제가 시킨 대로 할 겁니다.”이철수의 말에 연명걸이 냉소를 터뜨렸다.‘멍청한 녀석. 안시연만 잡고 있으면 뭐든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양혁수를 칼로 찔렀으니 하느님에게 빌어도 내버릴 목숨이었다.연명걸이 차가운 얼굴로 이철수에게 물었다.“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연정훈에게 딜을 할겁니다. 조건은 날이 밝기 전까지 주식을 모두 넘기는 것입니다.”연명걸은 이철수의 멍청한 생각에 헛웃음만 나왔다.“넌 네 목숨보다 주식이 더 중요해?”이철수는 야비한 얼굴로 말했다.“양혁수를 찔렀으니 당연히 한국에서는 지낼 수 없겠지요. 그러니 도망갈 퇴로를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주식만 넘어오면 제가 저가로 대표님께 되팔겠습니다.”연명걸이 침묵했다.이철수도 완전히 멍청한 건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너무 순진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0분 안으로 이 별장은 벌써 표적이 되었다!연명걸이 찾아온 것도 미리 계획된 것이었으며 사건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었다.그러니 이철수가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연명걸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이철수는 시한폭탄이 되었으니 이철수의 손을 빌려 주식을 쥐고 연정훈과 양석진의 손을 잡고 다시 이철수를 처리하면 되었다!두 눈을 감고 고민하다가 결정한 연명걸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넌 안시연에게 손 떼. 내가 직접 연정훈이랑 딜 할 테니!”“빨리!”안시연은 1분 1초가
“안시연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마.”“20분 안으로 주식 넘겨줄 테니까.”“이철수한테 전해. 양혁수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살고 싶으면 안시연 건드리지 말라고!”연명걸은 연정훈의 흥분한 목소리에 안심할 수 있었다.역시 안시연은 연정훈에게 꽤 중요한 사람이었다.연명걸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요. 나와 이철수가 어떤 사이인데 그건 해줄 수 있죠. 이철수는 그쪽이 체면을 구긴 것에 화가나 안시연에게 화풀이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양혁수를 다치게 할 계획은 없었는데 지금은 양씨 가문의 보복이 두려워 빨리 현금 챙겨 해외로 도망가려고 생각하고 있어요.”주식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 건 자신의 리스크를 덜기 위해서였다.연정훈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안시연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쪽과 이철수는 똑같은 결말을 맞을 겁니다.”연명걸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뭐라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통화는 종료되었다.그 통화는 양주시의 어느 경찰국에서 이뤄졌다.핸드폰을 내려놓은 연정훈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연정훈이 양주시로 막 도착했는데 이승우의 연락을 받았고 바로 안시연의 일을 전해 들었다.그래서 경찰국으로 달려가 상황을 진두지휘했다.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경찰서 서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전투복 차림인 주정민이 합계였다.양주시에서 벌어진 사건에 서장은 잔뜩 당황한 얼굴이었으며 연정훈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연정훈의 시선은 오직 주정민에게 닿았다.“언제쯤 구할 수 있어요?”주정민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이미 주변을 포위했고 1시간을 넘긴다면 이 옷 벗겠습니다”!연정훈은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한시 빨리 안시연이 무사한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같이 가시죠.”연정훈의 말에 주정민이 고개를 돌렸다. 이런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었다.“네, 알겠습니다.”주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피해자를 구하고 옆을 지킬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그렇게 다정하게 챙길 시간은 없습니다.”별
펑!안시연은 의자가 뒤로 넘어가도록 발버둥 쳤다.허리가 부서질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녀는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가 버렸고 입이 막혀 있는 탓에 소리 지를 기회도 없었다.이철수는 욕을 지껄이며 그녀의 옆으로 주저앉으려 했다.그때 소란을 들은 연명걸이 빠르게 달려와 방문을 열었다.현장을 목격한 연명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이철수를 발로 뻥 차버렸다.이철수는 바닥으로 쓰러졌고 몸을 일으켜 세운 후 바로 달려들었다.연명걸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와 몸 다툼을 이어갔다.쓰러진 안시연은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지금 대체 무슨 상황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보이지 않는 어둠이 그녀를 잡아먹고 있었다.그때.펑!갑자기 여러 차례 굉음이 들려오더니 뜨거운 액체가 안시연의 목 언저리와 옆선에 튀었으며 시야를 흐리게 했다.숨을 들이쉬면 온통 피비린내가 느껴졌다.안시연은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수건을 꺼냈다.정신을 차리자, 자기 얼굴에 튄 액체가 피였다는 걸 깨달았고 안시연은 온몸이 덜덜 떨렸다.“시연아!”“나야, 연정훈!”연정훈...안시연은 얼마 남지 않는 이성을 되찾고 흐려진 눈을 비벼 앞에 선 사람을 쳐다봤다.연정훈.정말 연정훈이었다!안시연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그의 목을 꽉 껴안았다.그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연정훈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이었다.못 본 사이 핼쑥해진 그녀의 얼굴과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주정민이 달려왔을 때 연정훈은 한 손으로 안시연을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 권총을 이철수의 몸으로 겨누고 있었다.“형!”주정민이 빠르게 다가와 총을 빼앗아 들었다.“형, 손 더럽히지 마요!”“제가 할게요!”주정민은 연정훈 눈의 살기를 보며 절로 소름이 돋았다.다행히 주정민이 제시간에 도착했다.그는 연정훈의 실제 신분을 알고 있었기에 절대 연정훈이 잘못된 행동을 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래서 안시연을 보며 머리를 굴렸
주삿바늘이 안시연의 팔을 찌르고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도저히 진정할 수 없는 안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가슴이 찢겼다. 그래서 그녀를 꽉 껴안아 그녀가 몸부림치다가 자신을 다치지 못하게 했다.진정제가 투여되고 의사는 작은 소리로 약효가 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린다고 언질을 주고 병실을 나섰다.안시연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흐릿한 시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가에 물린 듯한 상처를 발견했다.손을 뻗어 그의 입가를 어루만지고 싶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제 몸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에 안시연이 또 공포를 느꼈다.연정훈은 점차 진정되고 있던 안시연이 또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두려워하자 손등을 토닥였다.“무서워하지 마. 지금 진정제 투여 중이고 내가 있으니,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해.”그의 목소리에 안시연은 점차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리고 두 눈이 감길 때까지 연정훈을 눈에 담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이 깊은 잠이 들 때까지 다독였고 쌕쌕 숨을 쉬는 그녀를 보며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어 간호사를 불러 검사를 이어가도 된다고 전했다. 그는 안시연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여러 검사실을 오갔다.모든 검사를 마치고 나니 벌써 세 시간이 지나갔다.연정훈은 그녀를 병실에 눕히고 직접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닦았다.옷은 얼룩지고 피부는 긁히고 멍들었으며 연정훈은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며 연정훈은 분노가 들끓었다. 아까 그렇게 쉽게 이철수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니었다!안시연이 잠에 들었음에도 연정훈의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다.몸을 닦고 나니 어느새 아침이 밝아왔다.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연정훈은 그녀 혼자 두고 떠난 게 후회되어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성산에 가지 않았다면, 아니 그녀를 홀로 양주에 두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연정훈...”침대에 누워있던 안시연은 꿈속에서도 그의 이름을 외쳤다.연정훈은 침대에 앉아 그녀를
얼떨결에 기차에 탄 양혁수는 왠지 뾰로통했다.이건 양혁수의 추억 여행이었으나 변여름이 양혁수보다도 에든베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으며 본인과 양시연 사이의 이야기도 속속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역에 도착하자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양혁수는 추위에 절로 몸이 움츠러지고 옷매무새를 다시 여몄다.그러나 변여름은 그 옆에서 한껏 과장하여 감탄하고 있었다.“여기 너무 예쁜데요?”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에든베타의 눈밭은 양혁수가 다녔던 여행지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다.그런데 변여름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그래서 오빠가 이곳에서 시연 언니를 좋아하게 됐나 봐요.”“나였어도 시연 언니한테 반했겠다.”“...”방금까지 센치하던 기분이 또 와장창 깨져버렸다.오늘 일정에도 마중을 온 사람이 있었고 변여름은 아예 지낼 곳을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마을로 골랐다.“거긴 여행객이 많아서 남은 방이 많지 않을 거야.”양혁수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은 패드로 남은 방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요. 남은 방이 없긴 하지만 오빠가 그곳을 많이 그리워할 테니 기사더러 빙 둘러대려고 하려고요. 오빠 추억 여행 좀 하게요.”“...”양혁수가 싸늘한 표정으로 변여름을 바라봤다. 이젠 변여름이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는 게 확신이 들었다.용산 거리를 지나쳐 눈이 뒤덮인 에든베타 건축물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이 분위기에 알맞은 노래를 틀어 양혁수가 한껏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했다.그러나 익숙한 풍경을 보며 양혁수가 든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아, 추워 죽겠네.’그때,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집을 지나치게 되었고 주변엔 온통 눈이 쌓여 있었으며 여행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양혁수는 눈을 반짝이며 그 풍경을 눈에 담으려 애썼고 왠지 이 집이 몇 년 전보다 많이 낡았고 정원도 생각보다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기억 속의 집은 늘 해가 잘 들고 넓은 곳이었는데
밤 열두 시 반.양혁수는 침대 왼쪽 끝에 누웠고 오른쪽엔 변여름이 누워 있었다.아까 변여름은 대화를 하자며 양혁수를 기어코 침대에 데리고 왔다.평소에 말수가 적은 변여름이었지만 대화를 이어가야 할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수다스러울 수 있었다.지금도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최근에 봤던 아재 개그를 알려주고 있었다.“너 예능도 봐?”양혁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일반적으로 제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이라면 예능 많이 보잖아요.”또 자신을 일반적인 소녀로 묶으려 애쓰는 모양이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왜 굳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변여름의 대화에 꽤 흥미가 생겼기에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래. 무슨 아재 개그인데? 너무 썰렁하면 안 들어줄 거야.”변여름이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딸기가 회사에 잘리면 뭐가 되는지 알아요?”양혁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백수.”“아니요. 딸기시럽이요.”양혁수는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왜?”변여름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딸기가 실업했으니까 딸기시럽이죠!”“...”양혁수는 썰렁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 어떤 개그보다도 자신을 웃기려 애쓰는 변여름이 가장 재밌게 느껴졌다.“나 다른 아재 개그도 알아요.”변여름은 은근슬쩍 양혁수에게 다가갔고 거의 딱 붙기 직전이었다.양혁수는 재빨리 이를 발견하며 변여름을 다시 원위치로 밀었다.“자꾸 선 넘으면 네 방으로 확 던져 버리는 수가 있어.”양혁수가 변여름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대화하자며 데려와 놓고 자꾸 수작 피울래?”변여름은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이불을 고쳐 덮었다.“너무 멀어서 오빠한테 잘 들리지 않을까 봐 그랬죠.”“나 겨우 서른이야. 이 정도 거리에서 듣지 못할 정도 아니거든?”“오빠 귀가 먹는다고 해도 난 오빠 옆에 있을 거예요.”변여름은 시도 때도 없이 플러팅을 했고 양혁수는 거의 무감각해졌다.“그만해.”양혁수는 이불을 쭉 당겨 변여름의 얼굴을 가렸다.
양혁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변여름이 마침 가장 외롭고 힘든 시간에 나타나 줬다는 것이었다.화로의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실에서 변여름과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양혁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이렇게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는 기분은 스물다섯이 넘은 뒤로 다시 느낄 수가 없었다.스물다섯 전의 양혁수는 출생의 비밀도 몰랐고, 양시연을 만나지도 못했으며 총으로 제 친어머니를 쏴 죽이는 일도 겪지 않았다.변여름이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해 주고 아무 이유 없이 옆을 지켜주는 걸 보며, 어쩌면 변여름이라면 최악의 모습을 들켜도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자 양혁수도 변여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대체 뭔지 고민하게 되었다.‘내가 정말 여름이를 좋아하는 건가? 아닌데...’결국 양혁수는 본인이 변여름의 아낌없는 사랑에 점점 응석받이가 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시간이 차츰 흐르고 변여름의 뜨개질도 점점 스웨터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정말 밤을 새우기라도 할까 봐 밤 열한 시가 되자 서둘러 변여름을 제지하며 잠을 잘 시간이라 다독였다.변여름은 아까 호박죽을 끓였고 양혁수를 시켜 가스레인지를 끄고 두 그릇 떠오라고 부탁했다.양혁수가 고분고분 두 그릇을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는데 변여름이 제 방에서 꼬물거리는 게 보였다. 옆방의 변여름 침대에 베개 하나가 사라졌고 그건 양혁수의 침대 위에서 다시 포착되었다.‘쯧. 또 시작이군.’양혁수의 발걸음 소리에 변여름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몸을 돌려 호박죽을 받아쥐었다.그리고 테이블로 걸어가 겉으론 침착한 얼굴을 하고 한 입 떠먹었다.양혁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리다가 또 제 침대를 가리켰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변여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오빠랑 같이 자려고요.”“꿈도 꾸지 마. 얼른 베개 들고 네 방으로 돌아가.”“새벽에 몰래 오빠 방으로 기어들어 오는 건 너무 변태 같잖아요.”그 말에 양혁수는 웃음이 터졌다.
화로에는 장작이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들려오고 거실에는 그 소리를 제외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양혁수는 도라미 인형을 베개 삼아 누워 맞은편에서 열심히 뜨개질하고 있는 변여름을 바라봤다.“너 정말 뜨개질할 줄 알아?”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뜨개질하는 방법 다 익혔고 생각보다 쉬워요.”그리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쏘아붙였다.“오빠, 도라미 베개로 쓰지 마요!”양혁수는 상체를 살짝 들며 말했다.“좀 쓴다고 안 망가져.”그러자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를 보였고 양혁수를 혀를 차며 어쩔 수 없이 인형을 머릿밑에서 빼냈다.변여름은 그제야 다시 자리에 편하게 기대 다시 뜨개질에 집중할 수 있었다.“오늘 밤을 새우면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정말?”양혁수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이건 굵은 실이라 빠르거든요.”꽤 전문가처럼 느껴지는 말투에 양혁수는 긴가민가해졌다.그래서 그 옆에 앉아 모바일 게임을 하며 변여름의 완성품을 기다렸다.변여름은 스웨터 말고 먼저 목도리를 뜨려고 했는데 양혁수는 변여름이 스웨터를 만드는 줄만 알고 이렇게 비아냥거렸다.“이게 스웨터라고? 왜 이렇게 네모난 거야?”“스웨터는 너무 어려워서 담요로 바꾼 건가?”그리고 양혁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여름아, 오빠가 하나 조언해 줄까? 차라리 담요 두 장 만들어. 그다음에 가위로 옷 모양으로 자르고 테두리만 꿰매면, 그러면 그게 스웨터잖아.”“...”변여름은 처음으로 양혁수가 말이 많다고 느껴졌다.“담요를 그렇게 자르면 실이 다 풀린다고요!”“본드로 붙이면 되지.”“...”‘정말 못 말려.’양혁수가 말이 많아진 건 꽤 진지해 보이는 변여름의 모습이 조금 웃기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변여름은 무언가 집중할 때면 연구 실험을 하듯 한껏 굳은 표정이었는데 뜨개질할 때도 그 표정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그리고 양혁수도 변여름이 목도리를 뜨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회색 실을 보아하니 본인의 몫으로 뜨고 있는 것
고작 인형 하나 받았다고 변여름의 입이 귀에 걸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혁수의 옆에 찰싹 달라붙던 변여름은 어느새 인형을 들고 뛰어다니며 평범한 소녀처럼 사진 찍기에 바빴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찍은 사진을 아마 노지혜에게 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사진을 찍고 변여름은 해가 잘 드는 곳을 찾아 도라미를 눕히고 얇은 이불까지 덮어줬다.“오빠, 저녁에 먹고 싶은 거 있어요?”변여름의 관심사가 다시 양혁수로 돌아오고 있었다.양혁수는 베란다에 앉아 국내 회사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양혁수가 변여름의 질문에 대충 대답을 하자 변여름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옷을 든든히 입고 출입문 앞에 선 변여름을 보고 양혁수가 불러세웠다.“어딜 가려고?”“마트요.”“이렇게 추운 날에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오빠가 소갈비찜 먹고 싶다면서요. 그건 양파가 꼭 들어가야 하는데 집에 없어요.”양혁수는 아까 일에 정신이 팔려 본인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잊었고 소갈비찜에 양파가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 있는 재료로 만들어 먹으면 돼.”“안 번거로워요. 마트가 멀지도 않고요.”고집 피우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나 양파 별로 안 좋아해.”“그러면 빵가루 사와 내일 빵 구워줄게요.”‘쯧. 어떻게든 나가겠다는 생각이군.’양혁수는 성큼성큼 걸어가 변여름의 목도리를 풀어 헤쳤고 고개를 숙인 채로 타이르듯 말했다.“집 밖에선 어른 말 들어야 한다고 네 오빠가 안 가르쳤어?”변여름은 순수 무구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고 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심심하면 책 보거나 드라마 봐. 교수님이랑 프로젝트 의논을 하든지. 왜 종일 나 뭐 먹일 건지만 고민하고 있어?”“책이나 드라마, 그리고 프로젝트 의논을 해서는 오빠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잖아요.”양혁수는 목도리를 아예 훌렁 잡아당겨 소파에 곱게 눕혀진 도라미 위로 던졌다
어디 도라에몽뿐이겠는가? 양혁수는 변여름이 신기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고개를 돌리자 뿌듯한 표정의 변여름이 칭찬을 갈구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리고 옆자리 변여름의 테이블 위로 여러 장의 카드에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게 보였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 번이고 다시 그린 것 같았다.양혁수는 저도 모르게 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캐릭터 사진을 보며 카드에 옮겨 그리는 장면이 떠올랐다.‘음. 드디어 마음에 드는군. 이걸 오빠한테 보여줘야겠어!’양혁수는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고 대답 대신 펜을 찾아 도라에몽에게 귀를 두 개 그린 뒤 그걸 다시 변여름에게 돌려줬다.카드를 돌려받은 변여름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이건 무슨 의미지?’양혁수는 변여름이 애니메이션에 큰 관심이 없고 도라에몽을 그린 것도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의아한 변여름을 내버려두고 양혁수는 문을 닫고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맞은편의 변여름이 잠잠한 걸 보니 도라에몽에게 정말 귀가 있는지 없는지 검색하고 있는 것 같았다.양혁수가 수프를 다 먹고 나니 변여름이 카드 한 장을 틈새로 보냈다.[도라에몽에게 도라미라고 여동생이 있었네요!]‘어릴 때 애니메이션도 안 봤냐 정말...’양혁수는 카드를 테이블 위로 내려두고 여유롭게 칵테일을 즐겼다.편하게 먹고 즐기고 착륙 전에 두 사람은 샤워까지 마치고 비행기에서 내렸다.에든베타로 직행하는 비행기가 없어 두 사람은 일단 뉴델리에서 하룻밤 묵고 이튿날에 다시 떠나기로 했다.마중 온 사람을 찾아 차에 타려는데 마침 백인 가족이 두 사람을 지나쳤고 가족 성원 중 가장 어린아이가 인형을 안고 있는 게 보였다.변여름은 바로 양혁수의 팔을 살짝 꼬집으며 그곳을 바라보게 했다.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돌려 확인했고 표정을 찡긋거렸다.‘도라미네?’유럽 쪽엔 아시아권 애니메이션이 크게 유행하지 않았고 테마파크도 아닌 공항에서 캐릭터를 만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그런데 비행기에서 막
“뭐가 더 좋냐고?”양혁수가 변여름의 손을 떼어내며 낮게 말했다.“내가 너 보고 반가워하길 바랐냐?”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떨어뜨렸다.“혹시... 안 반가웠어요?”“그럼 어떤 기분이었는데요?”양혁수는 자세를 편하게 고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싶었어.”변여름은 말없이 양혁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거짓말.”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방금 나랑 눈이 마주쳤을 때, 오빠 눈이 반짝거렸어요.”“사람 눈이 무슨 조명이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변여름은 입을 삐죽거렸다.‘그래 안 반가워하면 뭐 어때. 내가 이렇게 반가운데.’변여름은 고민도 하지 않고 다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감고 찰싹 들러붙었다.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변여름에는 자꾸 마음이 약해졌고 어느새 속수무책이 되어버렸다.그때 지나가던 스튜어트가 변여름을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이어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빨리 일어나.”변여름은 꼼짝도 하지 않고 품에 가만히 안겨있었다.“...”스튜어트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바로 낮은 소리로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닌지 물었다.양혁수는 고개를 숙여 변여름과 시선을 마주했다.‘네 생각엔 내가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변여름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로 문을 열고 문밖의 스튜어트를 바라봤다.당황한 스튜어트를 보며 양혁수는 어이가 없어 눈을 감았다.변여름이 스튜어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뿐더러 한참 뒤 다시 돌아온 변여름의 품에는 담요가 들려 있었다.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양혁수의 품에 안겼고 직접 양혁수의 손을 움직여 자기 허리에 감았다.양혁수는 벌써 어깨가 시큰거렸고 아직 착륙까지 열 몇 시간이나 더 있었는데 계속 이러다가는 어깨가 끊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한참 고민하다가 양혁수가 자세를 고쳤다.“여름아.”“네?”다정하게 이름 한번 불렀을 뿐인데 변여름이 번쩍 고개를
변백호는 양혁수의 말을 듣더니 눈썹을 살짝 올렸다.“변여름이 너한테 잘 가라고 했다고?”양혁수는 옆에 서서 트렁크에 짐이 실리는 걸 지켜보다가 뒷좌석으로 향했고 변백호가 바로 그 뒤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두 팔짱을 척 끼더니 단정 지어 말했다.“그 꼬맹이, 지금 너 낚는 중이야. 내 생각엔 벌써 비행기 안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사실 양혁수도 방금까지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변여름은 그 연락을 끝으로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들러붙던 변여름의 연락이 갑자기 딱 끊기니 양혁수도 괜히 기분이 뒤숭숭해졌다.변백호의 말에 양혁수는 마음이 조금 동요했으나 그래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잘 좀 챙겨줘. 우리 여름이 또 여기저기 도망 다니게 하지 말고.”변백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제 마음 꽁꽁 숨기는 것도 참 양혁수답다니까.’그래도 변혁수는 이 말을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자존심 강한 양혁수의 체면을 모르는 척 지켜주기로 했다.그리고 오후 네 시가 조금 넘는 시간에 두 사람은 공항에서 헤어졌고 양혁수는 비행기에 올랐다.퍼스트 클래스 좌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앞뒤로 천천히 지나가며 확인했지만, 변여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도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승무원이 몇 번이나 다가와 필요한 게 있는지 물었지만, 양혁수는 건성으로 넘겨버렸다.눈을 감아도 마음은 불편했고 딱히 뭘 하기도 귀찮아 그냥 대충 시간이나 보내려 했다.그때, 바로 옆자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유창한 스페인어로 식사를 주문하고, 이어 샤워 예약까지 잡는 목소리에 양혁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가림막을 내리고 상대와 시선을 마주했다.이 목소리의 주인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예상이 갔다. 변여름이었다.변여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고 당연하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었다.양혁수는 이게 무슨 감정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변여름을 몇 번 힐끔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양혁수가 어제 에든베타에 가고 싶었던 건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린 탓이었고 실은 아직 그곳으로 향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지금 그냥 떠나는 것은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변여름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그는 어른이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했다. 무엇보다 순간적인 충동에 휘말렸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변여름은 아침 일찍 나간 뒤 몇 시간째 돌아오지 않았다.떠나겠다고 해놓고도 한낮이 되도록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이 양혁수는 조금 어색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집을 비운 둘째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했다.한 상 가득 차려진 식사 자리였지만 변여름만 보이지 않았다.마크가 갑자기 양혁수의 왼쪽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함은화가 곧바로 타일렀다.“삼촌이라고 불러야지.”“삼촌, 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마크는 즉시 호칭을 바꾸었다.양혁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침묵했다.“...”잠시 후 그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추워서.”“집은 안 추운데요.”하니가 반대쪽에서 다가와 그를 유심히 살폈다.“땀까지 나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칼과 포크를 내려놓고 하니를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천천히 드세요.’라고 한 마디 남기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거실 창가로 향했다.두 꼬맹이는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다 마크가 마침내 그의 목에 난 자국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다쳤어요.”하니도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보라색이에요. 엄청 커요.”양혁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멀리서 변백호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엄격한 표정으로 두 아이를 불렀다.식탁에서 함은화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행히 너희들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속상해하지 않으시겠네.”변여름의 셋째 형수는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