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단순히 취해서 토한 것이었다.안시연은 나비를 안전하게 동물병원에 맡기고 다음 날 다시 데리러 가기로 했다.소란을 피우느라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어 있었다.병원 밖으로 나오고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왔다.찻집으로 돌아오니, 차향이 가득한 상쾌한 분위기였다.안시연은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찻집 안을 걸으면서 냄새를 없애는 게 좋겠어요.”“차라리 빨리 돌아가서 씻는 게 좋겠어.”연정훈은 그렇게 말했지만, 안시연의 제안대로 찻집의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밤이 깊어 정원사들은 이미 퇴근한 상태였다.가로등이 켜져 있었지만, 모든 구석을 비추지는 못했다.가장 어두운 구간에서는 손전등이 필요했다.안시연은 걷다 보니 어느새 연정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차나무는 생각보다 훨씬 컸고 뒤를 돌아보니 끝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안시연은 약간 무서워졌다.고개를 돌려보니 연정훈이 멀리 있는 것 같아 안시연은 서둘러 연정훈을 따라갔다.그러다가 실수로 연정훈의 뒤꿈치를 밟고 말았다.연정훈은 방비할 틈도 없이 안시연에게 밟혀 신발이 벗겨졌고, 맨발로 진흙을 밟으며 미끄러운 땅에 휘청거렸다. 결국 연정훈은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뒤따르던 안시연도 피하지 못했다넓은 차밭에서 두 번의 쾅 소리만 들렸다.작은 찻잎들이 흔들리며 흙 속으로 떨어졌고, 풀숲의 새들이 놀라 날아갔다....긴 정적이 흘렀다.안시연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일어섰다.안시연의 시야는 캄캄했고 연정훈을 부축하려고 어리둥절하게 손을 뻗었다.“그만둬.”차분하면서도 무기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안시연은 대답하며 손을 거두었다.연정훈은 풀밭에 누워 머리 위의 달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편안히 누웠다.안시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여기 깨끗하지 않아요.”연정훈이 대답했다.“그냥 좀 쉬자.” 안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안시연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휴대폰을
안시연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연정훈에게 다가가 입술을 맞추었다. 두 손으로 연정훈의 얼굴을 감싸며 눈을 감은 채 안시연은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입술이 닿는 순간, 연정훈은 자연스럽게 안시연의 뒷머리에 손을 얹고 안시연을 감싸 안으며 주도권을 잡았다.안시연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 세상이 연정훈 하나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에 떠 있던 달조차 보이지 않았다.연정훈은 조심스럽게 외투를 안시연의 머리 뒤에 놓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 입맞춤을 했다.“음...”안시연은 조용히 연정훈의 부드러움을 받아들이며 숨결을 맞췄다. 주변을 둘러싼 차나무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열정은 마치 풀밭 위로 끝없이 번져 나갔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뜨겁게 키스했다.입술이 스치고 코끝이 닿으며 두 사람의 숨결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안시연은 몸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차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연정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안시연은 자연스럽게 몸을 밀착시키며 연정훈의 다리를 따라 움직임이 전해졌다.연정훈의 손길이 점점 더 대담해지며 안시연의 옷 아래로 부드럽게 스며들어 자유롭게 탐색했다.안시연은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한 숨소리를 내었고 고양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연정훈은 안시연이 흥분한 것을 알아차렸다.연정훈은 장난스럽게 멈추며 손에 힘을 주고 겁을 주듯 말했다.“누군가 와서 보면 어떡해요?”안시연은 눈을 겨우 뜨고 그 말에 놀란 듯 연정훈의 품에 파고들었다. 연정훈의 목을 감싼 손이 더욱 강하게 조여졌고 안시연은 다시 키스하려는 듯 고개를 들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도발에 이끌리며 더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고 외투로 그녀를 감싼 채 일어섰다. 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살짝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신발은 찾을 수 있을까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안시연은 그가 맨발로 돌아갈까 봐 걱정하며 입술을 적시고 신발을 찾아주겠다고 말하려 했다
“세상에, 두 분께서 얼마나 격렬하셨길래 계단을 올라갈 시간도 없으셨던 건가요?”아침 식당에서 부승희가 혀를 차며 말했다.안시연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수프를 마셨다.연정훈은 멀리서 몇몇 대표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 중이었다.아침에 연정훈은 안시연과 함께 샤워했고 그들이 원래 묵던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안시연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샤워를 마친 후, 집사가 그들의 휴대폰을 가져다주었다.“정원사가 찻집에서 찾았습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안시연은 카메라로 모든 장면을 확인했으리라는 것을 즉시 알았다.그 순간 안시연은 멍한 상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연정훈은 태연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안시연을 바라보더니 힌트처럼 말했다.“나무가 꽤 높았잖아.”안시연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그 상황은 정말 자업자득처럼 느껴졌다.정원사가 풀밭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봤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연정훈이 안시연을 안고 일어나는 모습을 봤을 가능성은 높았다.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게다가 안시연은 옷을 입을 때 몸에 남아 있는 자국을 발견했고 연정훈의 허리 쪽에 남은 긁힌 자국을 떠올리며 어젯밤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정말 미쳤던 것 같다.침대 위의 일은 그렇다 치고 더 골치 아픈 것은 침대 밖의 일이었다.안시연은 연정훈과의 관계가 분명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서로 눈을 마주칠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몇 번이나 안시연이 고개를 들면 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안시연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부승희는 혀를 차며 다시 말했다.“두 분 정말 애틋하시네요...”안시연은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접시에 있는 음식을 쿡쿡 찔러가며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반우희 씨는 어디 갔어요?”“택배 부치러 갔어요.”“네?”부승희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까 반우희 씨를 봤는데 몸집은 작지만 힘은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큰 가방 몇 개를 짊어지고 물건을 챙기듯이 가장
부승희가 말하자 안시연은 얼굴이 붉어졌다.아침에 일어난 이후로 안시연은 연정훈과의 어색한 관계에만 신경을 쓰느라 양 두 마리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 양을 데리러 가달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연정훈은 바쁘고, 테니스를 치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에 양을 데리러 가게 하는 것은 자원을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저 혼자 가면 돼요.”연정훈이 말했다.“나는 너를 위해서 가는 게 아니야.”안시연은 의아해했다.“나비에게 이제 마음의 빚을 지게 해야지. 내가 얼마나 자비로운지 깨닫게 하고 앞으로는 나에게 덜 침 뱉게 하려는 거야.”안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영훈 씨가 굳이 직접 갈 필요는 없어요. 어젯밤 나비를 병원에 데려갔다는 건 제가 자세히 설명할 수 있거든요.”“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낫지. 게다가, 누가 네가 이 기회를 독차지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겠어?”안시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이 정도로 말했으니, 이제는 말릴 수 없었다.양아버지가 자신의 평판을 개선하려는 이상, 아무도 연정훈을 막을 수 없었다.밖에는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연정훈이 차를 가지러 간 사이, 안시연은 정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부승원과 반우희는 마주 보고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부승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반우희는 급히 부승원을 막으며 간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아 빌었다.부승원은 안시연을 힐끗 보더니 불편한 듯 표정을 굳히며 차 문을 열어 반우희를 태웠다.안시연은 그 상황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마침 연정훈이 차를 몰고 안시연 앞에 도착했다.안시연은 차 문을 열고 탑승한 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바람을 쐬었다.연정훈이 말했다.“머리를 밖으로 내밀지 마.”안시연이 대답했다.“밖으로 내밀지도 않았어요.”“거의 절반이 밖으로 나와 있어.”안시연이 반박했다.“영훈 씨도 어젯밤에 밖으로 내밀었잖아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테니스는 연정훈이 즐기는 운동 중 하나라, 그를 이길 상대가 거의 없었다.안시연이 함께하자 허 대표는 여러 파트너를 바꿔가며 맞섰지만, 결국 패배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죠. 당신들 부부 팀을 상대하는 건 너무 버겁네요.”허 대표의 말에 안시연은 운동 후의 열기로 더욱 들떴다.연정훈은 물을 마시며 자연스럽게 반응했고 아무 일도 없는 듯했다.파라솔 아래에는 부승희와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잠깐 앉아 있어.”연정훈이 안시연에게 말했다.안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안시연은 혼자서 보충식이 마련된 곳으로 가, 연정훈을 위해 몇 가지 음식을 골랐다.뒤돌아보니, 연정훈이 휴대폰을 꺼내며 전화를 받으려 하고 있었다. “연정훈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음료부터 마셔요.”부승희가 농담하듯 말했다.그제야 안시연은 시선을 돌리며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멀리서 연정훈은 몇 번이나 걸려 온 낯선 번호를 보고 누군지 직감했다.연정훈은 질질 끄는 걸 싫어하는 연정훈은 전화를 받았다.이곳은 맑은 햇살과 차 향기로 가득했지만,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거칠고 냉랭해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듯했다. “연정훈...”듣기 거북한 목소리였지만, 연정훈은 금방 누구인지 알아챘다.소현주였다.연정훈은 감정이 복잡했다. 불쾌함은 있었지만, 예상보다 크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전화 너머에서는 아무 말 없이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용인시에 있어. 날 데리러 올 수 있어?”“...”“연정훈...”“안 돼.”소현주는 연정훈이 자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연정훈의 차가운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소현주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이 흐려졌다.연정훈은 이미 소현주의 상황을 알고 있었고 소현주가 왜 갑자기 전화했는지 짐작했다.다름 아닌 결혼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연정훈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연정훈은 겉으로는 냉담하고 속마음도 차가웠던 연정훈은 가차 없이 말을 내뱉었다. “다시는 전화하지 마. 잘 살고 싶다면 최고의 변호
양혁수가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안시연은 양혁수를 거의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딸은 어디 있어? 카메라 좀 돌려봐.”안시연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양혁수의 목소리를 듣고 잠시 멍해졌다.딸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일어섰다.연정훈은 방에 없었지만, 아침 식사로 양주의 특산 요리를 가득 차려놓고 간 듯했다. “나비는 자고 있어요. 조금 있다가 영상으로 보여줄게요.”안시연이 대답했다. “연정훈이 내 애기들 학대하지 않았겠지?”연정훈의 이름을 듣자, 안시연의 마음이 다시 답답해졌다.“연정훈 얘기는 그만 해요. 누가 나비를 학대하겠어요? 기분 나쁘면 침부터 뱉는데.”안시연이 말했다.양혁수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역시 내 딸이야.”안시연은 양혁수가 나비의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양혁수는 답답했던 모양인지 다시 곧 놀러 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미리 알렸다. “양혁수 씨, 그냥 쉬세요.”안시연이 다급히 말했다. “너희는 잘 놀면서 나보고 쉬라고?” “양주에는 딱히 재미있는 것도 없어요.”“재미없는데 왜 너희는 계속 양주에 있는 거야?”안시연이 대답했다. “저도 곧 돌아가려고요.” “너 경인시로 돌아간다고? 그럼 난 안 갈래.”안시연은 어이없었다.이 도련님은 정말 철부지 같다.양혁수가 다시 말했다.“양주에 특산품 좀 사다 줘.”안시연은 살짝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양주랑 경인시가 겨우 두 시간 거리인데 무슨 특산품이 있겠어요?” “디저트.”“경인시에서도 충분히 먹을 수 있잖아요...” “특산품 안 사 오면 나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알 거다.”안시연은 솔직히 양혁수를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다른 일들로 마음이 복잡했던 안시연은 양혁수와 말다툼할 기분이 아니었고 나비와 연정훈을 생각하며 일단 부탁을 받아들였다.전화를 끊고 나서 안시연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를 주문해 포장한 후, 특급 배송으로 양혁수에게
부승희는 이승우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안시연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이승우가 연정훈과 겹치며 한층 더 깊은 쓸쓸함이 밀려왔다. “승희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 승우 씨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예요.”안시연은 부승희를 위로했다.그러나 부승희는 고개를 저었다.눈을 감고 과감한 디자인의 소파에 몸을 기대며 나지막이 말했다. “다 똑같아요.”안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든 남자를 한꺼번에 그렇게 치부하지 마세요.” “세상 모든 까마귀가 검은색인 건 사실이죠. 하얀 까마귀를 찾으러 다닐 만큼 여유도 없고요.”부승희는 차분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거죠. 어차피 손해 볼 것도 없고 얼마 안 있으면 유럽으로 떠날 거예요.” “유럽으로요?”“네, 석사 공부하러 가요.” “그러면 국내 사업은 어떻게 할 건데요?” 부승희는 웃으며 말했다.“이승우한테 맡겨둘 거예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꼼꼼하게 챙겨놓겠죠. 제가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더라도 오빠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한 푼도 빠지지 않게 돌려줄 거예요.”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부승희가 말을 이었다.“이승우가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면 저도 진심으로 대할 수 있어요. 하지만 만약 이승우가 저를 속이고 놀아난다면 굳이 엮일 필요 없죠. 세상에 이승우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승희 씨가 충분히 생각했으면 됐어요…”안시연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슬프게 들렸는지 부승희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연정훈은 이승우랑 달라요.” “뭐가 다르죠?”부승희는 잠시 멈칫했다.부승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연정훈 역시 안시연을 진정한 아내로 맞이할 생각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적당한 시점에서 멈추고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고요.”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대답했다.“승희 씨 말대로 할게요. 정훈 씨 돈을 쓰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모든 호의를 즐기다가, 때가 되면 부자가 되어 떠날
부승희와 안시연이 이승우를 만났을 때, 옆에는 부승원만 있었다.“연정훈은 어디 있어?”부승희가 물었다.이승우는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경인시로 돌아갔어.”“뭐라고요?”안시연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부승원이 이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연정훈의 아버지에께서 전화가 왔어. 연정훈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부승희는 그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께서 전화하셨다면 분명 큰일이겠지. 연정훈도 안 갈 수는 없었을 거야.”부승희는 안시연을 위로했다.“아마도 너무 급해서 시연 씨에게 인사할 시간조차 없었을 거예요. 일이 끝나면 분명히 전화할걸요.”안시연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왠지 안시연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 두 번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메시지를 확인할 시간조차 없는지 안시연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긴장이 가시지 않은 안시연은 방으로 돌아가 두 마리 알파카를 데리고 경인시로 돌아갈 차를 부르기로 했다.그때 갑자기 방문이 두드려졌다.안시연이 문을 열어보니, 뜻밖에도 부승원이 서 있었다.“부 변호사님, 안녕하세요.”부승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시연의 옷차림을 보며 말했다. “경인시로 돌아가려는 거예요?”“네...”“짐은 싸지 마세요. 하루만 더 기다렸다가 저희와 같이 가죠.”“괜찮아요.”안시연은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부승원은 말했다.“굳이 사양하실 필요는 없어요. 연정훈이 떠나기 전에 저희에게 시연 씨를 잘 부탁해 달라고 하셨어요.”‘정말 그런 걸까?’그렇다면 왜 연정훈은 메시지 하나 남기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안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안시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승원은 이미 두 마리 알파카를 보며 말했다. “시연 씨, 혼자서 두 마리 양을 데리고 가는 건 차를 빌린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부승원의 말이 사실임을 안시연은 인정했다.안시연은 침묵했다.
탁호연은 눈앞의 탁승호를 찬찬히 살폈다.비록 멀쩡한 옷차림이었으나 금방 갈아입힌 흔적이 있었고 드러난 얼굴이나 다른 부위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친동생이었으니 탁승호의 멍청함을 탓하다가도 마음이 아파졌다.“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벌인 거야?”탁호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탁승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착하고 바르던 탁승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이건 누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상관하지 말고 돌아가.”탁호연은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우리 가문 모든 사람이 양씨 가문에서 먹고 사는데 네가 그런 일을 벌인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망한다는 생각 안 해봤어?”탁승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할머니 때문에 널 보러 온 거야. 그러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알고 있는 거 모두 말해! 다행히 아가씨 모자가 멀쩡하니 넌 잘하면 살 수 있을 거야!”양시연 모자가 평안하다는 말에 탁승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해 미안하네.”“멍청한 놈!”탁호연은 화가 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양민아가 시킨 거지? 맞지?”탁승호는 대답이 없었다.“대체 왜? 전에 양씨 가문에서 지낼 때 양민아가 너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준 적 있어?”“누나는 몰라!”탁승호는 탁호연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없다는 듯 천장의 불빛을 직시하며 말했다.“모두가 날 무시해도 그 사람은 달랐다고.”“우리 사이엔 아이가 있어. 이번에 복수만 제대로 해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탁호연은 너무 화가 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너 정말 제정신이니? 그 사람이 뭘 잘못 먹었다고 네 아이를 낳아줘?”그 말에 탁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거봐, 누나도 날 무시하잖아.”“...”‘이렇게 멍청한 일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널 인정하겠어?’친동생만 아니었다면 탁호연은 바로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그
반우희는 세 동생과 함께 병실을 찾았다. 승주의 목에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었고 일부러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습이 꽤 우스꽝스러웠다.네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병실안의 모든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양석진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번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으니 다들 감격해했다.표세연은 직접 의자를 당겨와 양시연의 옆자리에 두며 네 명 더러 편히 앉게 했다.양석진은 지금껏 보배처럼 안고 있던 아이를 반우희에게 넘겨줬다.반우희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며 말했다.“세상에...”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너무 작고 소중해요.”반우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아이의 향기를 맡았고 또 고개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정말 아기 향이 느껴지는데요!”그 말에 사람들은 웃음이 터졌다.반우희의 뒤에 서 있던 부승원도 사차원다운 반우희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승주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기 정말 대단해요.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태어났잖아요.”그러자 동준이 바로 말을 이었다.“당연하지. 머리카락 몇 올 없으니까.”“...”양시연은 웃음이 터져버렸고 상처가 땅겨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예민하게 발견한 연정훈이 허리를 숙여 양시연에게 물었다.“아파?”양시연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너무 웃다가 상처가 땅겨서 그래요.”반우희는 바로 고개를 돌려 동준이를 교육했다.“말 함부로 하지마. 금방 태어난 아기는 머리카락이 적어도 곧 자랄 거야.”동준은 발꿈치를 쳐들고 반우희처럼 킁킁거렸다.“정말 아기 향이네요.”“...”아이의 천진난만함에 분위기는 한층 더 화기애애해졌다.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양시연이 반우희를 향해 말했다.“우리 아기가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태어날 수 있었던 건 모두 우희 씨랑 승주 덕분이에요.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좋은 이모를 알아봤어요.”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가슴팍을 툭툭 내리치며 말했다.“이모 대단하지?”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승
10시를 넘기자 병실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춰왔다.양시연은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훈도 눈을 떴다.“더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고작 몇 시간 눈 붙인 거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그러나 연정훈은 세수를 마치고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양시연에게 다가가 이마에 키스했다.“오후에 시간 봐서 또 눈 붙일게. 아버님도 오셨는데 일단 얼굴 뵙는 게 좋겠어.”양시연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지만 연정훈의 말을 듣고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리고 연정훈을 마음 아파하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좀 쉬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 시켜서 음식 주문해요. 정훈 씨도 밥 챙겨 먹고 아버님도 드셔야죠.”그 말에 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어머님이 지금껏 아버님을 굶겼을까 봐?”“정훈 씨 부모님은 생각도 안 해요?”그러자 연정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표세연은 아마도 손자에 정신이 팔려 연재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그래. 아들 노릇이나 하지 뭐.’“잠시 나갔다 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그래요...”비록 병원에서 지냈지만 연정훈이 있어 병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따뜻한 햇살이 느껴져 어제의 악몽 같은 시간은 차츰 잊혀갔다.어젠 정말 악몽 같은 하루였고 오늘은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었다.병실을 비웠다가 다시 찾은 연정훈은 양석진과 양지원, 그리고 표세연이 함께 있는 걸 발견했다. 아이는 양석진의 품에 안겨 있었고 연재혁은 보이지 않았다.부모님을 보고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조금 버거워 보였다.“움직이지 말고 편하게 누워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가 해줄게.”그 모습에 표세연이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양시연은 기운이 없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평소 무표정이던 양석진도 오늘만큼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막 태어난 손자를 안고 있는 모습이 아주 조심스러웠다.“자, 시연이한테 보여줘야죠.”양지원이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그
반우희는 얼굴이 뜨거워져 몰래 손등으로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 부승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반짝거렸다.“오늘따라 변호사님이 다르게 보여요.”“뭐가 다른데?”“칭찬을 너무...”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솔직하게 하셔서 말이에요!”“...”부승원은 과거와는 달리 부드러운 얼굴로 반우희를 빤히 바라봤다.“우리 변호사는 증거 없이 허튼 말 하지 않아.”‘헤헤.’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부승원의 품에서 나오지 않았다.“전에는 왜 그렇게 칭찬을 아꼈어요?”“네가 거만해질까 봐.”“그럼 오늘엔 걱정 안 돼요?”부승원은 잠시 뜸을 들이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있는 순간에도 부승원은 반우희의 연락이 끊기던 공포가 불시에 찾아왔고, 반우희가 불길이 가득한 차량에 있었다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철렁했다.부승원은 폭탄이 터지는 순간을 직접 목격했고 불길이 한순간에 반우희를 집어삼키는 걸 봤었다.하마터면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부승원은 다시 반우희에게 깐깐하게 대할 수 없었다.그리고 전에는 반우희가 마냥 어린 친구로 보여 더 빨리 성장하라고 채찍질을 한 것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반우희는 이미 성숙하고 용감한 사람이라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양시연을 구하던 반우희는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눈치채고 가장 빠르게 상황을 안정시켰다.양시연을 구한 뒤 언제 또 폭발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기사를 포기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키우다시피 한 동생 승주와 함께 불길에 달려들었다.“변호사님.”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부승원의 볼을 콕콕 찔렀다.그러자 부승원은 반우희에게 이렇게 말했다.“앞으론 마음대로 거만해도 돼.”“네?”“거만하게 사는 게 뭐 흠도 아니잖아. 적어도 넌 독립적이고 강한 사람이라는 의미니까.”반우희는 이게 꿈속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평소의 부승원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말이었다.하지만... 부승원의 이런 변화에 반우희는 너무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