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다른 사람이 했으면 별거 아니었을 말이지만, 진중하고 성숙한 이미지의 연정훈이 이런 말을 하니 너무 웃기게 들렸다.게다가 연정훈은 나비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나비는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입을 삐죽거리며 침을 뱉으려 했다.연정훈은 재빠르게 손을 뻗어 나비의 입을 막았다.안시연은 어이없었다.“?”그리고 이번엔 참지 못하고 깔깔거리며 웃었다.나비는 성인 알파카답게 발버둥을 치며 연정훈에게 들이받으려 했다.안시연은 급히 말리며 연정훈에게 웃으며 말했다. “정훈 씨가 영준이를 너무 잘 챙기니까, 얘가 질투하는 걸지도 몰라요.”연정훈은 나비를 힐끔 쳐다보았다.나비는 두 번이나 침을 뱉으려 했으나 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뱉게 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이승우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한가롭게 말했다. “누가 질투하는 건지는 모르는 일이지.”안시연이 이승우를 흘낏 쳐다보며 물었다.“뭐라고요?”이승우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 녀석 성이 양 씨라고 들었어요.”안시연은 부승희가 말했을 거로 생각했다. 그녀가 부승희에게 잠깐 언급했던 일이었다.이승우가 혀를 차며 말했다.“양아버지가 되는 건 쉽지 않겠어요.”안시연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말없이 영준이를 계속 돌보고 있었다.연정훈이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분명했고 나비는 일부러 연정훈에게 반항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시연은 둘이 평화롭게 지내길 기대하지 않았고 나비를 데리고 나가 사료를 먹이기로 했다.중간에 허 대표가 연정훈과 대화를 나누러 왔고 부승희는 안시연에게 야경을 보자고 불렀다.반 시간 뒤, 안시연이 돌아오니 나비가 연정훈 앞에서 비틀거리다 쿵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연정훈의 다리 위에 떨궜다.안시연은 당황했다.이승우가 말했다.“오호. 양아버지한테 큰절을 올리네?”안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급히 앞으로 다가갔다.연정훈은 얼굴을 찡그리며 나비의 머리를 들어 올리고 물었다. “
안시연이 손으로 가볍게 톡 건드리자, 단추는 쉽게 풀렸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안 걸려 있었어요.”연정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아까는 걸려 있었어.”안시연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실밥이 있는지 더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려 했다. 혹시 있다면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안시연은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바람에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그 순간, 연정훈은 안시연이 불편해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손을 들어 안시연의 허리 아래, 정확히는 가슴 옆 부분을 살짝 받쳐 주었다.안시연도 얇은 셔츠를 입고 있었기에 연정훈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안시연은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한 번 핥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목깃을 만지며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손가락 끝으로 실밥을 찾아냈다.“정말 있네요.”안시연은 연정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너한테 거짓말하겠어?”안시연은 잠시 생각하다 실밥을 바로 끊으려 했다.처음엔 한 손으로는 잘되지 않아 두 손을 사용했지만, 여전히 끊어지지 않았다.그때 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됐어. 내가 옷을 벗을 테니까, 그때 해. 실밥 하나 끊으려고 얼굴이 이렇게 붉어질 필요는 없잖아.”“모르는 사람은 마라톤이라도 한 줄 알겠어.”안시연은 연정훈의 농담에 얼굴이 더 붉어졌고 조용히 말했다.“그럼, 옷을 벗어요. 가위로 바로 잘라드릴게요.”“이 옷은 드라이해서 내일 입어야 해. 망치지 마.”“실밥만 자르면 돼요.”안시연은 말하며 일어섰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에 맞춰 셔츠를 벗어 주었다.방 안에 큰불이 켜져 있었고 비록 둘이 함께한 시간은 많았지만, 안시연은 연정훈의 근육질 가슴을 보고 살짝 얼굴을 돌렸다.안시연을 연정훈의 셔츠를 들고 가위를 찾으면서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연정훈은 순간, 안시연의 모습에서 아내 같은 따뜻함을 느꼈다.공기 속에는 부드러운 온기와 함께
나비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단순히 취해서 토한 것이었다.안시연은 나비를 안전하게 동물병원에 맡기고 다음 날 다시 데리러 가기로 했다.소란을 피우느라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어 있었다.병원 밖으로 나오고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왔다.찻집으로 돌아오니, 차향이 가득한 상쾌한 분위기였다.안시연은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찻집 안을 걸으면서 냄새를 없애는 게 좋겠어요.”“차라리 빨리 돌아가서 씻는 게 좋겠어.”연정훈은 그렇게 말했지만, 안시연의 제안대로 찻집의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밤이 깊어 정원사들은 이미 퇴근한 상태였다.가로등이 켜져 있었지만, 모든 구석을 비추지는 못했다.가장 어두운 구간에서는 손전등이 필요했다.안시연은 걷다 보니 어느새 연정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차나무는 생각보다 훨씬 컸고 뒤를 돌아보니 끝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안시연은 약간 무서워졌다.고개를 돌려보니 연정훈이 멀리 있는 것 같아 안시연은 서둘러 연정훈을 따라갔다.그러다가 실수로 연정훈의 뒤꿈치를 밟고 말았다.연정훈은 방비할 틈도 없이 안시연에게 밟혀 신발이 벗겨졌고, 맨발로 진흙을 밟으며 미끄러운 땅에 휘청거렸다. 결국 연정훈은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뒤따르던 안시연도 피하지 못했다넓은 차밭에서 두 번의 쾅 소리만 들렸다.작은 찻잎들이 흔들리며 흙 속으로 떨어졌고, 풀숲의 새들이 놀라 날아갔다....긴 정적이 흘렀다.안시연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일어섰다.안시연의 시야는 캄캄했고 연정훈을 부축하려고 어리둥절하게 손을 뻗었다.“그만둬.”차분하면서도 무기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안시연은 대답하며 손을 거두었다.연정훈은 풀밭에 누워 머리 위의 달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편안히 누웠다.안시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여기 깨끗하지 않아요.”연정훈이 대답했다.“그냥 좀 쉬자.” 안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안시연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휴대폰을
안시연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연정훈에게 다가가 입술을 맞추었다. 두 손으로 연정훈의 얼굴을 감싸며 눈을 감은 채 안시연은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입술이 닿는 순간, 연정훈은 자연스럽게 안시연의 뒷머리에 손을 얹고 안시연을 감싸 안으며 주도권을 잡았다.안시연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 세상이 연정훈 하나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에 떠 있던 달조차 보이지 않았다.연정훈은 조심스럽게 외투를 안시연의 머리 뒤에 놓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 입맞춤을 했다.“음...”안시연은 조용히 연정훈의 부드러움을 받아들이며 숨결을 맞췄다. 주변을 둘러싼 차나무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열정은 마치 풀밭 위로 끝없이 번져 나갔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뜨겁게 키스했다.입술이 스치고 코끝이 닿으며 두 사람의 숨결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안시연은 몸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차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연정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안시연은 자연스럽게 몸을 밀착시키며 연정훈의 다리를 따라 움직임이 전해졌다.연정훈의 손길이 점점 더 대담해지며 안시연의 옷 아래로 부드럽게 스며들어 자유롭게 탐색했다.안시연은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한 숨소리를 내었고 고양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연정훈은 안시연이 흥분한 것을 알아차렸다.연정훈은 장난스럽게 멈추며 손에 힘을 주고 겁을 주듯 말했다.“누군가 와서 보면 어떡해요?”안시연은 눈을 겨우 뜨고 그 말에 놀란 듯 연정훈의 품에 파고들었다. 연정훈의 목을 감싼 손이 더욱 강하게 조여졌고 안시연은 다시 키스하려는 듯 고개를 들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도발에 이끌리며 더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고 외투로 그녀를 감싼 채 일어섰다. 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살짝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신발은 찾을 수 있을까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안시연은 그가 맨발로 돌아갈까 봐 걱정하며 입술을 적시고 신발을 찾아주겠다고 말하려 했다
“세상에, 두 분께서 얼마나 격렬하셨길래 계단을 올라갈 시간도 없으셨던 건가요?”아침 식당에서 부승희가 혀를 차며 말했다.안시연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수프를 마셨다.연정훈은 멀리서 몇몇 대표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 중이었다.아침에 연정훈은 안시연과 함께 샤워했고 그들이 원래 묵던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안시연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샤워를 마친 후, 집사가 그들의 휴대폰을 가져다주었다.“정원사가 찻집에서 찾았습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안시연은 카메라로 모든 장면을 확인했으리라는 것을 즉시 알았다.그 순간 안시연은 멍한 상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연정훈은 태연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안시연을 바라보더니 힌트처럼 말했다.“나무가 꽤 높았잖아.”안시연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그 상황은 정말 자업자득처럼 느껴졌다.정원사가 풀밭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봤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연정훈이 안시연을 안고 일어나는 모습을 봤을 가능성은 높았다.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게다가 안시연은 옷을 입을 때 몸에 남아 있는 자국을 발견했고 연정훈의 허리 쪽에 남은 긁힌 자국을 떠올리며 어젯밤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정말 미쳤던 것 같다.침대 위의 일은 그렇다 치고 더 골치 아픈 것은 침대 밖의 일이었다.안시연은 연정훈과의 관계가 분명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서로 눈을 마주칠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몇 번이나 안시연이 고개를 들면 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안시연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부승희는 혀를 차며 다시 말했다.“두 분 정말 애틋하시네요...”안시연은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접시에 있는 음식을 쿡쿡 찔러가며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반우희 씨는 어디 갔어요?”“택배 부치러 갔어요.”“네?”부승희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까 반우희 씨를 봤는데 몸집은 작지만 힘은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큰 가방 몇 개를 짊어지고 물건을 챙기듯이 가장
부승희가 말하자 안시연은 얼굴이 붉어졌다.아침에 일어난 이후로 안시연은 연정훈과의 어색한 관계에만 신경을 쓰느라 양 두 마리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 양을 데리러 가달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연정훈은 바쁘고, 테니스를 치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에 양을 데리러 가게 하는 것은 자원을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저 혼자 가면 돼요.”연정훈이 말했다.“나는 너를 위해서 가는 게 아니야.”안시연은 의아해했다.“나비에게 이제 마음의 빚을 지게 해야지. 내가 얼마나 자비로운지 깨닫게 하고 앞으로는 나에게 덜 침 뱉게 하려는 거야.”안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영훈 씨가 굳이 직접 갈 필요는 없어요. 어젯밤 나비를 병원에 데려갔다는 건 제가 자세히 설명할 수 있거든요.”“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낫지. 게다가, 누가 네가 이 기회를 독차지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겠어?”안시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이 정도로 말했으니, 이제는 말릴 수 없었다.양아버지가 자신의 평판을 개선하려는 이상, 아무도 연정훈을 막을 수 없었다.밖에는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연정훈이 차를 가지러 간 사이, 안시연은 정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부승원과 반우희는 마주 보고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부승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반우희는 급히 부승원을 막으며 간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아 빌었다.부승원은 안시연을 힐끗 보더니 불편한 듯 표정을 굳히며 차 문을 열어 반우희를 태웠다.안시연은 그 상황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마침 연정훈이 차를 몰고 안시연 앞에 도착했다.안시연은 차 문을 열고 탑승한 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바람을 쐬었다.연정훈이 말했다.“머리를 밖으로 내밀지 마.”안시연이 대답했다.“밖으로 내밀지도 않았어요.”“거의 절반이 밖으로 나와 있어.”안시연이 반박했다.“영훈 씨도 어젯밤에 밖으로 내밀었잖아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테니스는 연정훈이 즐기는 운동 중 하나라, 그를 이길 상대가 거의 없었다.안시연이 함께하자 허 대표는 여러 파트너를 바꿔가며 맞섰지만, 결국 패배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죠. 당신들 부부 팀을 상대하는 건 너무 버겁네요.”허 대표의 말에 안시연은 운동 후의 열기로 더욱 들떴다.연정훈은 물을 마시며 자연스럽게 반응했고 아무 일도 없는 듯했다.파라솔 아래에는 부승희와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잠깐 앉아 있어.”연정훈이 안시연에게 말했다.안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안시연은 혼자서 보충식이 마련된 곳으로 가, 연정훈을 위해 몇 가지 음식을 골랐다.뒤돌아보니, 연정훈이 휴대폰을 꺼내며 전화를 받으려 하고 있었다. “연정훈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음료부터 마셔요.”부승희가 농담하듯 말했다.그제야 안시연은 시선을 돌리며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멀리서 연정훈은 몇 번이나 걸려 온 낯선 번호를 보고 누군지 직감했다.연정훈은 질질 끄는 걸 싫어하는 연정훈은 전화를 받았다.이곳은 맑은 햇살과 차 향기로 가득했지만,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거칠고 냉랭해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듯했다. “연정훈...”듣기 거북한 목소리였지만, 연정훈은 금방 누구인지 알아챘다.소현주였다.연정훈은 감정이 복잡했다. 불쾌함은 있었지만, 예상보다 크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전화 너머에서는 아무 말 없이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용인시에 있어. 날 데리러 올 수 있어?”“...”“연정훈...”“안 돼.”소현주는 연정훈이 자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연정훈의 차가운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소현주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이 흐려졌다.연정훈은 이미 소현주의 상황을 알고 있었고 소현주가 왜 갑자기 전화했는지 짐작했다.다름 아닌 결혼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연정훈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연정훈은 겉으로는 냉담하고 속마음도 차가웠던 연정훈은 가차 없이 말을 내뱉었다. “다시는 전화하지 마. 잘 살고 싶다면 최고의 변호
양혁수가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안시연은 양혁수를 거의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딸은 어디 있어? 카메라 좀 돌려봐.”안시연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양혁수의 목소리를 듣고 잠시 멍해졌다.딸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일어섰다.연정훈은 방에 없었지만, 아침 식사로 양주의 특산 요리를 가득 차려놓고 간 듯했다. “나비는 자고 있어요. 조금 있다가 영상으로 보여줄게요.”안시연이 대답했다. “연정훈이 내 애기들 학대하지 않았겠지?”연정훈의 이름을 듣자, 안시연의 마음이 다시 답답해졌다.“연정훈 얘기는 그만 해요. 누가 나비를 학대하겠어요? 기분 나쁘면 침부터 뱉는데.”안시연이 말했다.양혁수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역시 내 딸이야.”안시연은 양혁수가 나비의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양혁수는 답답했던 모양인지 다시 곧 놀러 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미리 알렸다. “양혁수 씨, 그냥 쉬세요.”안시연이 다급히 말했다. “너희는 잘 놀면서 나보고 쉬라고?” “양주에는 딱히 재미있는 것도 없어요.”“재미없는데 왜 너희는 계속 양주에 있는 거야?”안시연이 대답했다. “저도 곧 돌아가려고요.” “너 경인시로 돌아간다고? 그럼 난 안 갈래.”안시연은 어이없었다.이 도련님은 정말 철부지 같다.양혁수가 다시 말했다.“양주에 특산품 좀 사다 줘.”안시연은 살짝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양주랑 경인시가 겨우 두 시간 거리인데 무슨 특산품이 있겠어요?” “디저트.”“경인시에서도 충분히 먹을 수 있잖아요...” “특산품 안 사 오면 나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알 거다.”안시연은 솔직히 양혁수를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다른 일들로 마음이 복잡했던 안시연은 양혁수와 말다툼할 기분이 아니었고 나비와 연정훈을 생각하며 일단 부탁을 받아들였다.전화를 끊고 나서 안시연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를 주문해 포장한 후, 특급 배송으로 양혁수에게
전주에서 돌아온 후 배여진은 조용히 떠났다.이승우의 말에 따르면 아마 이혼하러 돌아간 듯했고 선기현이 직접 와서 그녀를 데려갔다고 했다.“직접 데리러 왔다면 그래도 아직 감정이 남아 있는 거 아니야?”부승희가 말했다.이승우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건 감정이 남아서가 아니라 당장 이혼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거지.”‘쓰레기 같은 남자.’부승희는 거칠게 욕을 퍼붓고는 고개를 홱 돌려 물었다.“야 너랑 선기현 씨 친하잖아. 근데 너한테 밥 안 사줬어?”“사줬지. 며칠 전에 도착해서 저녁에 술 한잔하자고 했어.”“근데 왜 안 갔어?”“나는 흠집 있는 친구 안 사귀어. 깨끗하게 살아야 하니까.”부승희는 어이없었다.“...”‘멍청이.’배여진과 선기현을 보고 있자니 마치 이승우와 부승희의 반면교사 같아서 이승우는 괜히 불안해졌다.그 골칫거리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놓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두 건물에서 키우던 돼지들이 비정상적으로 집단 폐사했다. 게다가 다른 두 곳에서는 식품회사가 찾아와 협력을 논의하면서 일이 급증했다. 두 사람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한 명은 반바지 차림으로 회의실에서 협상하고 다른 한 명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돼지 수의사들과 함께 치료에 매달렸다.여름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날씨는 더욱 후덥지근해졌다.부승희는 돼지 전염병 문제를 해결한 후 사무실에서 이승우와 협력 건을 논의했다.그녀는 파초심 두 개를 가져와 하나를 이승우에게 건넸다.이건 열대 지역에서 가져온 거였는데 돼지들에게 먹일 수는 있지만 돼지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승희는 두어 번 먹어보니 수분이 많아서 그런지 꽤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이승우는 한입 베어 물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쓰레기통에 던졌다.“돼지도 안 먹는 걸 왜 먹어?”이승우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부승희는 찌꺼기를 뱉으며 말했다.“나중에 남편을 고를 때 ‘파초심을 좋아할 것'이라는 조건을 꼭 추가해야겠다.”이승우가 움찔했다.
저녁 10시.부승희는 농장에서 자리를 찾아 뜨끈한 만둣국을 한 입 크게 넣었다.멀지 않은 곳에 운전기사가 차를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가는 게 보였다. 어두운 가로등 불빛 아래 홀로 도망 다니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이승우는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전화를 돌렸다.“오빠, 적당히 해. 너무 과하게 하지 말고.”부승희의 말에 이승우는 그 앞으로 걸어와 만둣국을 슬쩍 바라봤다.“더 있어?”“아니. 태오 씨가 마지막 하나 남은 만둣국 사준 거야.”정태오는 농장 경비원이었는데 스무살은 막 넘긴 순수한 청년이었다.부승희는 국물을 들이켜며 뿌듯해했다.이승우는 부승희가 대체 어느 부분에서 뿌듯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만둣국을 먹게 돼서 뿌듯한 건가?이승우는 부승희의 앞으로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나 두 개만 줄래?”“싫어. 나 먹을 것도 부족하단 말이야.”이승우는 말이 없었다. 그저 그 옆에 놓인 숟가락으로 만두 하나를 훔쳐 입에 넣었다.“오빠!”“나 경찰에 신고했어.”이승우는 부승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부승희는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왜?”“그 사람들이 이 야심한 밤에 무리 지어 다니며 바가지를 씌우는 행위가 합법은 아니잖아.”이승우는 어느새 만두를 두 개째로 입에 넣었다.부승희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무사히 돌아왔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자들끼리 하산하다가 저 무리를 만났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니 이승우가 세 번째로 만두를 훔치려 했다.부승희는 모기를 때리듯 이승우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깜짝 놀란 이승우가 고개를 번쩍 들고 말다툼이라도 하려는데 황규식이 이승우를 향해 걸어왔다.이승우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고 창피한 줄도 몰랐다.“무슨 일이에요?”황규식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견인된 차량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급하게 차량을 구해뒀는데 오늘 밤 떠나실 겁니까? 아니면 하룻밤 묵을 겁니까?”“아니에요. 내일
부승희는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그런데 이승우가 대신 외투를 고쳐 덮어주며 다시 제 어깨에 눕혔다.“좀 더 눈 붙여. 도착하면 깨워줄게.”부승희는 정말 피곤했기에 군소리 없이 다시 머리를 기댔고 제 어깨에 올라온 이승우의 손을 휙 내쳤다.“잠시만 눈 좀 붙일게.”부승희는 다시 눈을 감기 전에 저 사람을 혼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이승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안심해.”“응...”차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창가의 풍경은 빠르게 바뀌었다.고르게 들려오는 부승희의 숨소리에 이승우는 제 어깨를 고정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이렇게 부승희가 제 어깨에 기대 잠을 자던 게 언제 적 일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이승우는 여유를 만끽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런데 고개를 드니 기사 남몰래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 게 보였다.이승우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더 경계심을 높여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기사는 껌을 꺼내 이승우에게 권했다.“저는 괜찮습니다.”기사는 덤덤하게 껌을 다시 내려놓았고 이따금 말을 걸었다.부승희는 말소리가 거슬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이승우가 말했다.“기사님, 제 여자 친구가 잠이 들어서요.”‘그러니까 좀 조용히 해.’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이승우는 겨우 표정을 풀었으나 허리에 따끔 하고 고통이 느껴졌다.“쓰읍.”이승우가 아픈 곳을 살살 매만지는데 부승희가 나른해진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지금 또 어디에서 개수작을 부리는 거야.”그러자 이승우는 마른기침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잠든 거 아니었어?”“...”[지금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번만큼만 넘어가 줘.]마지막 한 마디는 이승우가 타자해서 부승희에게 보여줬다.부승희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다시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나 다시 잔다.”“그래그래. 푹 자.”차량은 계속 달려 농장으로 향했고 이승우는 직원에게 문자를 보내 여러 사람을 불러 농장 입구에서 대기하라고 했다.바가지 씌우는 것도 모자라 부승희를 힐끔거리는
“두 분 택시 잡으려는 거죠?”가장 앞장선 남자가 물었다. 그러나 평범한 택시 기사 같지 않은 거들먹거리는 말투였다.이승우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따로 부른 차가 있으니 괜찮습니다.”그 말에 기사는 바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여긴 그런 평범한 차량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했다.“우리도 엄연히 택시 운전하는 사람인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우리 차에 타도 다 똑같아요.”그때 부승희의 핸드폰이 울렸고 콜택시 운전기사가 걸어온 전화였다.“손님, 차량이 안으로 진입이 불가능해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는데 차라리 다른 차량 잡는 게 어때요?”부승희는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이젠 하다 하다 택시 운전기사들도 독점이라는 걸 하는 모양이었다.그들은 두 사람이 콜택시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걸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이승우는 아무나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그러나 기사의 더러운 시선이 자꾸 부승희에게로 향하는 걸 보며 생각을 바꿨다.이 야심한 시간에 본인 혼자였다면 몰라도 지금은 부승희가 옆에 있었다.저 사람들은 말이 좋아 운전기사였지 독점 운영하는 걸 보아 어쩌면 깡패 일까지 겸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승우는 먼저 상황을 안정시키고 안전하게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라 생각되었다. “그쪽 차에 타면 바로 떠날 수 있어요?”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두 사람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손님, 우린 미터기로 계산 안 해요. 인수로 계산하지.”“네, 상관없어요. 얼마면 되는데요?”“어디로 가세요?”이승우는 주소를 말했다.“한 사람 오만원.”‘세상에 말도 안 돼.’목적지에서 가백산까지의 거리는 콜택시로 고작 만원이 되지 않는 거리였다.비록 두 사람에게 있어 오만원과 만원은 큰 차이가 없었지만 바가지 씌우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부승희는 몰래 이승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고 이승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부승희의 손을 꼭 잡아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가백산은 낮다면 낮고, 높다면 높은 해발이었다.이승우도 평소 등산을 자주 하는 편이었으나 부승희와의 등산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 뒤로는 처음이었다.그해 여름은 아주 더웠고 부승희는 등산하기 싫어 차량에서 버티고 있었다.이승우는 차 안으로 들어가 부승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승희야.”그러나 부승희는 못 들은 척 외면했다.“산에서 보는 일출이 그렇게 예쁘다는데?”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이승우는 주변을 뒤적이다가 얇은 잡지를 돌돌 말아 부승희의 귓가에 대고 살살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부승희는 결국 고개를 들어 이승우와 시선을 마주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잡지를 휙 던졌다.“그때의 넌 작은 산도 등산하기 싫어했잖아.”이승우의 말에 부승희도 자연스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차 안에서 귓가에 바람을 불던 이승우와 따듯하던 바람이 온몸을 간질거리게 했다.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승희는 이승우가 정말 자신의 귓가로 다가온 줄 알고 심장이 쿵쾅거렸으나 눈을 뜨니 돌돌 만 잡지가 보였고 순식간에 실망이 찾아왔었다.부승희는 이런 이승우가 참 미웠다.하지만 결국 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등산하게 되었다. 등산하는 내내 수많은 친구가 이승우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해 부승희는 또 한 번 화를 내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승우는 어쩔 수 없이 또 부승희를 달래주었고 부승희를 달래주기 힘든 여왕 같다며 별명까지 지어주었다. 부승희는 서운했다. 하고 싶지 않은 등산도 이승우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따라 나왔는데 또 많은 사람이 달라붙었으니. 그러나 이승우는 귀찮은 내색도 없이 친구들의 요청에 응했다.하지만 이제 이승우의 옆엔 오직 부승희 뿐이었다.산을 타고 올라가니 작은 절이 보였고 이승우는 밖에서 짧게 기도를 할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부승희는 이승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뭐해? 안으로 들어와서 향 피워야지.”‘여기까지 와서 안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이승우는 사실 무신론자였으나 부처님 앞에서 그
이승우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타이어를 확인했고 따라 내린 부승희는 이러한 상황에도 아주 덤덤해 보였다. 부승희는 트렁크에 비상 타이어가 없다는 말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정범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하라고 지시했다.“오빠, 견인 부르고 오 사장한테 차량 새로 부탁해.”이승우는 오정범이 액운을 불러온 거라 투덜거렸다.그러나 사건은 꽤 빨리 해결되었다.이승우가 전화를 걸고 있는데 부승희가 핸드폰을 뒤적이며 이렇게 말했다.“오빠, 여기 콜택시 잡혀.”그러자 이승우는 오정범에게 걸고 있던 통화를 바로 종료하고 부승희의 핸드폰을 바라봤다.“너 콜택시 별로 안 좋아하잖아.”“돼지 농장도 운영하는 내가 그런 걸 따질 것 같아?”‘내가 언제 그렇게 까다로웠다고.’부승희는 고개를 숙이며 핸드폰을 조작했다.“일단 이 차량 길가에 가져다 대고 견인 차량이 오면 맡기고 택시 타자. 더 질질 끌다가는 해가 떨어지겠어.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택시 타서 여기 근처 왔다가 차량 구해서 다시 전주로 돌아가는 거야.”“그래.”두 사람은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5억이 넘는 차량을 아무렇게나 길가에 세워두고 콜택시를 부르기 시작했다.가백산은 해발이 높지는 않았지만 풍경이 좋았고 등반하고 하산까지 소요 시간은 6시간 정도였다.초여름이고 산이다 보니 온도는 아주 낮았다. 게다가 이름 모를 벌레들도 많았다.등산 전, 이승우는 가방에서 스프레이를 찾아 부승희의 팔과 다리에 분사했다.부승희는 큼지막한 돌멩이에 앉아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았고 이승우가 이렇게 세심한 건 미처 몰랐다고 생각했다.그때, 갑자기 나타난 한 여자가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며 이승우를 불렀다.“저기, 혹시 스프레이 좀 빌릴 수 있을까요?”이승우가 물었다.“몇 명인데요?”여자는 더 쑥스러워하며 멀지 않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웬걸, 척 보아도 여덟명이나 되어 보였고 모두 반소매 반바지 차림이었다.이승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그쪽 한 명에게 빌려주는 건 몰라도 저렇게
아침 아홉 시.부승희는 창가에 앉아 주먹밥을 우걱우걱 씹었다. 그리고 옆에서 무서운 속도로 비빔밥을 해치우는 이승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정말 멍청하기도 하지. 또 이승우의 말에 홀랑 넘어가 버렸으니.저녁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긴 개뿔, 이승우는 다크써클 하나 없었고 비빔밥을 바닥까지 싹싹 비웠다.부승희는 너무 졸려 차에 올라 주먹밥을 몇 입 먹다가 바로 잠에 들었다.눈을 뜨니 차량은 어느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백미러로 뒤를 살펴보니 다섯 대 트럭이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트럭에는 모두 건강한 돼지들이 타고 있었다.돼지들이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큰 귀를 펄럭이는 모습이 꽤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부승희는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이승우에게 말을 걸었다.“오정범 사장네 양계장 사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이승우가 바로 대답했다.“초기에만 140억 투자가 필요한데 별로 내키지는 않아.”부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돼지 농사도 제대로 손에 익지 않았는데 닭까지 넓힐 생각은 없었다.“그럼 투자는 조금만 하자. 오 사장이 그동안 우리 많이 도와줬잖아.”이승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먼저 돼지들을 2번 농장으로 보냈고 직원에게 사인을 받은 뒤 새로운 기지를 둘러봤다. 그리고 풍경 좋은 길을 따라 오정범이 산속에 만든 양계장으로 향했다.오정범도 경인 출신이었고 이승우와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오정범은 가정 환경은 평범했지만 성격이 좋아 여전히 이승우 무리와 잘 어울려 지냈다.부승희는 양계장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오정범네 농장을 둘러보다가 신선한 닭으로 튀긴 닭 다리를 건네받고 드디어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또한 오정범은 말을 참 재밌게 하는 편이었고 오정범이 입만 열면 부승희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그날 오후, 오정범이 떠나려는 두 사람에게 며칠 더 지내다가 가도 된다며 잡았다.부승희가 말했다.“저희 등산가기로 해서 이만 가볼게요.”“등산이요?”오정범이 바로 말을 붙였다.“설마 가백산 말하는 거예요?
“바람둥이는 언제가 되었든 또 떠날 사람이라고 했어.”부승희가 말을 이었다.“바람둥이가 왜 괜히 바람둥이겠어? 바람처럼 떠나고 사라지니 바람둥이라고 하는 거지.”“사람은 변해.”이승우의 말에 부승희가 대답했다.“그래도 타고난 본성 같은 건 있는 거잖아. 본성은 쉽게 안 바뀌어.”“네가 사람의 본성에 대해 뭘 그렇게 잘 안다고 그래? 인간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것에 동물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이승우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그러자 부승희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세상에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도 있잖아.”그리고 한 손가락으로 이승우의 턱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오빠는 어떤 사람인데?”“난 좋은 사람이지. 본인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부승희는 헛웃음을 내쉬었다.이게 최근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모습이었다. 연인이라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인이 아니라고 하기엔 모호했다.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그쪽으로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여진이랑 가깝게 지내지 마. 괜히 네가 옆에서 지내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내일엔 나랑 원주 다녀오자. 여기에서 키운 돼지도 그쪽에 배송해 주고.”“우리가 직접 돼지 배송도 해?”“할 일도 없는데 원주나 다녀오지 뭐.”“오빠 지금 여진 언니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여진이가 전주로 온 뒤로 계속 귀가 간지러운데 너라면 안 무섭겠어?”“귀 간지러우면 귀나 파.”“...”이승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그래. 내일 다녀오지 뭐. 마침 가백산 등산하고 싶었는데.”“볼일 마치면 같이 가자.”부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식사를 마치고 부승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그런데 선기현이 오빠한테 연락은 했어? 두 사람 정말 이혼한대? 여진 언니 엄청 힘들어 보이던데.”“그래도 소용없어. 이미 마음 떠난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이승우는 다 먹은 밥상을 치우기 시작했다.부승희는 소파에
배여진의 충고를 부승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이승우에 대해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배여진의 말이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배여진과 선기현이 결혼식에 부승희는 신부 들러리로 참석했고 배여진은 부승희더러 몇 년만 더 기다리면 이승우가 진심으로 다가올 거라며 충고해 줬었다.그런데 배여진은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바탕으로 말을 바꿔 새로운 충고를 하지 않는가?부승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언니 괜한 충고는 하지 말고 좀 더 생산적인 일이나 하세요.’날이 어두워지고 배여진은 자리를 비워 전화를 받았다. 돌아올 때는 눈가가 빨개진 걸 보아 선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라 추측이 되었다.부승희는 배여진을 호텔로 바래다주고 본인은 돼지 농장으로 돌아왔다.요즘 농장은 시설이 많이 바뀌어 이제 건물에서도 돼지를 키울 수 있었다. 부승희가 평소 지내는 곳이 바로 돼지 농장의 옆 건물이었다.부승희가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누군가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을 하는 게 보였다.그 인기척에 고개를 든 이승우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집이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나 보네?”부승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키를 찾으려 가방을 뒤적였다.“왜 왔어?”“왜라니.”이승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물건을 들어 보였다.“농장에 돼지 사료가 떨어졌다고 해서 가지고 온 거잖아.”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오빠나 챙겨 먹어. 난 됐어.”그리고 이승우의 다른 손에 들려 있는 도시락을 보며 질문을 이었다.“그건 뭔데?”이승우는 짐을 집안으로 옮기며 말했다.“흰죽.”부승희는 또 쯧 하고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아침에 막 도착한 간장게장이야. 며칠 전에 먹고 싶다고 했잖아.”이승우는 부승희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그 말에 부승희는 괜스레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았다.피곤해진 부승희는 크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까딱 움직이며 지시를 내렸다.“냉장고에 스팸 있으니 구워줘. 샤워만 하고 올 테니 같이 먹자.”이승우는 곧장 주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