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은 자기한테서 받은 위자료로 혼수 준비를 하겠다는 안시연의 한마디에 화가 치밀어 올라 밤잠을 설쳤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는 텅 빈 침실에 앉아 있다가 탁자 위에 놓인 아침밥을 보고 내심 기뻐했지만, 어제 먹다 남은 음식을 데운 것임에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이때, 방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나더니 진수빈이 들어왔다.“진 비서가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아가씨께서 비밀번호를 알려주면서 대표님을 뵈러 올라가라고 하셨어요.”연정훈의 안색이 급격히 수그러들었다.“그녀가 진 비서한테 올라가라고 했다고?”“네! 조금 전 우연히 아가씨를 만났는데 출근 준비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대표님을 걱정하시더라고요.”진수빈은 계속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꺼냈다.“대표님, 오늘...”“금방 준비하고 내려갈 테니까 아래에서 기다려.”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면서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오늘 하루는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시연 아가씨도 점심에 돌아와서 밥을 차려주겠다고 하셨거든요.”연정훈은 어젯밤 자기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가 손수 점심을 차려주러 오겠다고 했다니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진수빈은 그의 마음이 조금 움직인 것을 눈치채고는 한마디 덧붙였다.“대표님께서 검토하실 자료들은 제가 서재에 놓을 테니 괜찮아지시면 보세요.”연정훈은 진수빈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고, 그녀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정인 과학기술.아침 일찍 도착한 양혁수는 안시연이 오기만을 기다렸고, 그녀는 어젯밤 일로 어색한 나머지 그를 보자마자 두피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이때, 양혁수가 그녀에게 다가오면서 한마디 했다.“장난 아니던데요?”안시연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진정시킨 후, 오는 길에 산 아침을 테이블 위에 놓으면서 물었다.“아침 먹었어요?”“날 주려고 산 거예요?”“많이 사서 나눠 먹어요.”“설마 이게 입막음 비용인 건가요?”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속으로 연정훈을 욕했고, 이내 컴퓨터를 켜면서 말했다.“빨리
안시연은 연정훈과의 일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양혁수와 얽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혁수 씨, 당신이 이 일에 정말 관심이 있어서 나랑 잘 지내려는 거면 몰라도, 다른 목적이라면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양혁수가 아무 대답이 없자, 그녀는 곧장 가방을 들고 벚꽃동으로 향했다.얼마 후,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집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서재에서 나지막하게 들리던 그의 목소리도 그녀가 거실로 들어가는 순간 멈췄다.안시연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만두를 만들 재료를 준비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40개가 넘는 만두를 빚었다.그녀가 찐만두를 식탁에 놓으려는 순간, 연정훈이 서재에서 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마주쳤다.곧이어 그가 식탁에 앉자, 안시연은 만두를 그의 앞에 놓았고 남은 만두들을 도시락통에 넣으면서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연정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결국 먼저 말을 건넸다.“넌 점심때 뭐 먹어?”안시연은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다가 답했다.“당신이랑 똑같이 만두를 먹어야죠.”그녀가 손수 만든 찐만두는 배가 고팠던 그의 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안시연은 이내 도시락통을 챙겨 현관문 쪽으로 갔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나 저녁에 운전 연습을 해야 해서 늦게 돌아올 것 같아요.”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신발 끈을 묶고 있는 그녀를 보고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냉담하게 말했다.“마음대로 해.”또다시 혼자 남겨진 연정훈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집안이 다시 차가워진 것도 모자라 앞에 놓인 만두마저도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그는 한꺼번에 만두 두 개를 집어서 입안에 쑤셔 넣었고, 몇 번의 젓가락질 만에 텅 비어버린 그릇을 보고는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서둘러 회사로 돌아온 안시연은 점심시간 때문인지 반쯤 비어 있는 사무실에 양혁수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안혁수는 그녀가 태연하게 자기를
“고수가 얼마나 맛있는데요!”사실 양씨 가문에서는 양혁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고수를 좋아했다.“세상에서 제일 징그러운 채소가 고수예요!”“에이, 난 전 세계에서 고수를 심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멈추었고, 양혁수는 자기를 밀어내려는 안시연의 마음도 모른 채 또다시 말을 걸었다.“점심때 정훈 씨를 만나러 갔어요?”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투덜대기 시작했다.“시연 씨는 자존심도 없어요? 그 사람한테 팔려 간 것도 아닌데 점심시간까지 짬 내서 보고 오고, 피곤하지도 않나 보네요.”그러나 곧장 그녀의 허탈한 표정을 보고 혀를 내두르더니 말을 바꿨다.“그한테 팔렸다고 가정해도 약속을 어기는 것도 안 되는 거예요?”“혁수 씨, 계약을 위반하면 위약금이란 걸 내야 해요.”“내가 대신 내줄게요!”“그러면 내가 혁수 씨한테 팔려 가는 거잖아요?”“전 정훈 씨와 달리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라서 당신만 원한다면 평생 지켜줄 자신이 있어요”안시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됐어요, 뭐니 뭐니 해도 나 자신한테 의지하는 것이 제일 믿음직한 것 같네요. 내가 능력이 생기는 날이면, 무조건 나 자신부터 되찾을 거예요!”그녀는 자기가 연정훈에게 빼앗긴 건 단지 일 년의 시간만이 아니라 자존감과 자신감도 포함되었다고 생각했기에 하루빨리 모든 걸 되찾을 거라고 다짐했다.양혁수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고집이 세요, 난 정말 정훈 씨랑은 완전 다르다니까요!”“난 그 누구의 소유물이 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따라다닌다는 단어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난단 말이에요!”“설마 정훈 씨가 당신과 결혼하길 바라는 건가요?”안시연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그럼, 나랑 결혼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요?”양혁수가 조심스럽게 건넨 물음에 그녀가 잠시 멍하니 있더니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별로예요.”사실 양혁수도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그녀를 보면 볼수록 왠지 모르게 친분이 있는
차는 미리 연습장에 빼놓았다.안시연이 차에서 내리고 연정훈도 따라 내렸다.안시연이 연정훈을 살짝 곁눈질하자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운전해 봐. 얼마나 연습했는지 내가 봐줄 테니까.”안시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요즘 들어 연정훈에게 맞짱 뜰 정도의 배짱이 생기긴 했으나 학생이 시험을 두려워하는 건 뼛속 깊이 새겨진 흔적 같았다.“아직 한 번밖에 연습해 보지 못했는데요.”“그럼 그 한 번의 연습 결과를 볼게.”연정훈이 먼저 연습장 안으로 들어섰다.이 부근은 종합 서킷장이었는데 운전 연습하는 곳은 그저 부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추가 구역 같았다.저녁이 되어도 연습장은 대낮처럼 밝았다.연정훈을 발견한 코치는 바람처럼 사라지며 조수석을 연정훈에게 양보했다.안시연은 이를 악물며 차에 올라탔다.바로 시동을 걸려는데 연정훈이 물끄러미 안시연을 쳐다봤다.그 시선에 안시연은 멈칫했다.‘왜, 왜 그러지?’“안전벨트.”“아, 맞다!”코치라는 허울을 쓴 연정훈 앞에서 안시연은 순한 양이 되었다.안전벨트를 얌전히 착용하고 안시연은 또 연정훈의 눈치를 살폈다.다른 실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운전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안시연은 이어질 지시를 기다렸다.그러나 연정훈은 차 시동이 걸어지기를 가만히 기다렸고 안시연도 마찬가지였다.한참 정면을 직시하던 안시연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말 안 해요?”???안시연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시작, 이라고 말해야 해요.”“...”연정훈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시작.”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긴 한숨을 내뱉은 뒤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시동이 걸리고 다이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0위로 수치가 올라간 걸 확인하고 안심을 했다.조작을 마치고 안시연은 한참 머리를 굴리며 양혁수가 저번 시간에 알려준 걸 뒤집었다.‘아 맞다 기어!’‘기어 먼저 바꿔야 해.’안시연이 손을 뻗자 연정훈은 가만히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고개를 돌린 안시연이 조심스러운 눈길로 연정훈의 눈치를 살폈다.
“왜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은 거야?”“브레이크 안 밟았어요.”“그럼 차는 왜 갑자기 멈췄을까?”안시연의 얼굴은 빨갛게 익었고 급하게 숨을 내몰았으며 미간도 한껏 찌푸렸다.연정훈은 사람을 가르치던 그 포스가 돌아왔는지 아주 엄격하게 굴었다.“다시.”안시연은 차에 오른 뒤로 긴장해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코치가 아닌 연정훈이다 보니 더더욱 손에 땀을 쥐었다.안시연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오늘 안 바빠요?”“운전이나 해.”“서킷 경기 곧 시작한대요.”“오늘 운전하다가 서킷장까지 돌진하지 말고.”안시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연정훈 앞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안시연이 말했다.“이만 볼일 보러 가요. 코치한테서 배우면 돼요.”연정훈의 시선에 안시연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코치님이 더 잘 가르치기도 하고요.”“액셀을 브레이크로 밟는 네가 내 실력을 논하는 거야?”“...”안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이렇게 말했다.“양혁수가 가르쳐줬을 땐 운전 잘했단 말이에요.”연정훈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으며 잘못 들은 게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양혁수와 함께 있었다는 걸 신경 쓸 게 뻔했으므로 일부러 자극해 연정훈을 떠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예상대로 확실히 화가 나긴 했다.평소의 그는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았지만 안시연은 손쉽게 그의 기분을 좌지우지했다.차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찾아왔다.연정훈은 머리가 찢어질 것처럼 지끈거렸는데 고개를 돌리자, 운전대를 잡고 있는 안시연이 아까보다 더 긴장 해하는 게 느껴졌다.연정훈은 심호흡을 길게 했고 안시연이 짜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왔다.“운전 시작.”안시연은 깜짝 놀랐다.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는 얼굴에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너와 양혁수 사이 있었던 일은 그 후에 다시 말해.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도 코스를 완주해야 할 거야!”연정훈이 명령을 내렸다.안시연의 멋대로 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이에
“안시연 씨도 같이 가는 거예요?”양민아가 물었다.어젯밤 그 일로 안시연의 이름을 언급하는 양민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안시연은 눈치껏 연정훈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은 절대 그 손을 놓지 않았다.“부승희가 널 꼭 데려오라고 했어.”“나한텐 연락이 없었어요.”“나한테 했다니까?”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찐친 모임”에 왜 “가짜 여친”을 굳이 데려가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더구나 미래 아내 후보도 이 자리에 함께이지 않는가?안시연은 다시 손을 빼내려고 시도했지만, 연정훈은 그녀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양민아는 안색 한번 변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이 세 사람의 조합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별석으로 이동하는 길 내내 사람들의 의아한 눈초리가 그들을 향했다.안시연은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부승희의 시선마저 자신과 양민아 사이를 오가는 게 느껴졌다.자리에 앉자마자 부승희가 어깨에 팔을 걸어왔다.“양민아가 괴롭혔어요?”“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거예요.”안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부승희가 쯧 하고 소리를 내더니 안시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쭉 밀었다.“바보예요? 그런 우연이 어디 있어요.”안시연은 그 뜻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입을 삐죽였다.“우연이 아니더라도 양민아 씨의 표적은 제가 아니었어요.”부승희가 입을 매만졌다.“하긴, 그렇긴 하죠.”부승희는 소파에 등을 기댔고 시선은 한우빈과 부승원 옆자리를 향했다. 양민아는 연정훈에게 꼭 붙어 무언가 속닥이고 있었다.“하여간 조심 좀 해요. 언젠간 크게 다치는 수가 있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시던 안시연이 멈칫했다.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부승희의 말은 연정훈의 결혼을 의미했다.그리고 부승희가 안시연의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양민아 삼촌 양석진이 승진하는 건 기정사실로 된 거래요. 그 아래 사람들은 대부분 연정훈 할아버지의 후배들이고요.”안시연은 이러한 일에 문외한이었으므로 눈만 껌벅였다.“그러니까 두 가문이 서로 공유한다는
부승희처럼 과한 리액션을 취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시연도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부승희는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이승우와 한판 붙으려 했다.이승우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촌스럽긴. 키스도 아니고 볼에 뽀뽀한 거로 그러는 거야? 안시연 옆에 앉았기 망정이지 나도 너한테 뽀뽀 안 해.”“한번 제대로 맞아볼래!”두 사람은 위아래로 뛰어다니며 아웅다웅 싸워댔다. 안시연은 이승우가 워낙 개방적인 스타일이라며 자신을 다독이며 연정훈이 있는 곳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연정훈의 안색은 어두워 보였으며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또 어쩌면 처음부터 이쪽에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양민아는 술잔을 들고 연정훈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연정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안시연은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부승희의 빈자리를 보며 안시연은 심심해졌다. 그래서 지루한 마음으로 기둥에 몸을 기댔다.가만히 서킷장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사람들 사이로 서킷복으로 무장한 사람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두 사람 사이 많은 인파가 모여있었지만 상대의 시선이 본인을 향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양혁수라는 것도 알아차렸다.“내가 초대할 땐 오지 않더니 연정훈이 초대하면 오는 거야?”질투가 났다는 걸 전혀 숨기지 않는 모습이었다.안시연은 어이가 없었지만 양혁수가 곧 경기에 참여할 거라는 생각에 대충 변명을 하기로 했다.“옆 연습장에서 운전 연습하고 있는데 부승희 씨가 초대해서 온 거에요.”틀린 말은 아니었다.“그 말 믿어볼게.”“이번 경기에서 이기면 상품은 선배 줄게.”안시연은 경기에 참여한 선수들을 보며 양혁수가 이길 가능성이 미약하다고 생각했다.“그래요. 열심히 해봐요.”그때, 특별석 룸 문이 열리고 웨이터 해산물 파스타를 들고 안시연 앞으로 걸어갔다.“맛있게 드세요.”안시연이 멈칫했다.“저는 주문하지 않았는데요...”그 말을 마
파스타를 입에 넣으려던 안시연의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부승희에게 물었다.“양혁수 씨는 F1을 예전부터 했던 거예요?”“프로 선수야.”부승희의 말에 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아까 경기에서 우승하면 상품을 자신에게 주겠다는 양혁수의 말이 떠올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양혁수가 우승하면 안 되는데.’안시연은 다시 침착하게 파스타를 입에 넣었는데 떨리는 동공에 마음이 들켜버렸다.연정훈은 이런 그녀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옆자리에서 부승희와 양민아는 또 말다툼하며 서로 비아냥거렸다.“유치한 사람이 위험한 스포츠에 빠지는 거예요.”“사람마다 추구하는 게 다른 거예요.”부승희는 양민아에게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정훈 오빠가 제일 대단해요. 어릴 때부터 이런 경기에는 관심도 없고 사람이 늘 진중하고 성숙하고 말이에요.”그 점에 대해서는 양민아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양민아가 연정훈을 가장 좋아하는 점이 바로 진중한 모습이었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연정훈은 어떤 일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천문을 좋아했지만 깔끔하게 포기하고 전과를 했다.소현주를 사랑했지만 헤어지고 미련조차 가지지 않았다.과감하고 진중하고 냉정한 연정훈만이 양민아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안시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사람들은 연정훈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진짜 연정훈은 그렇게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남들보다 조금 더 감정을 잘 숨길 뿐이었다.천문을 포기했다고 해도 서재의 반 이상의 서적은 천문에 관한 내용이었다.소현주와 헤어졌다고 해도 소현주를 위해 제작한 목걸이는 아직도 서랍 깊숙이에 남아있었다.보기에 우아하고 멀쩡한 사람 같아 보여도 울타리에 가둬놓은 안시연에게만은 사리사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그러니 한마디로 정리하면 연정훈은 의관을 갖춘 짐승에 불과했다.그 생각에 안시연은 입꼬리가 꿈틀거렸다.고개를 들자 연정훈이 가만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어쩐지 자신의 속마음을 그에게 모두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