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안에서 19금의 장면이 펼쳐지려는 걸 본 부승희는 당황한 나머지 가볍게 헛기침했다.그 순간 반우희가 ‘앗’ 하고 짧게 소리를 내며 부승원의 무릎에서 미끄러질 뻔했다.부승원은 재빠르게 그녀를 단단히 붙잡아 품에 안았고 그제야 문 쪽을 바라보며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하지만 부승희는 익숙한 오빠의 단정한 인상 때문인지 그의 싸늘한 눈빛도 별로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오히려 눈가에 아직 남아 있는 감정이 더 민망했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쳇.’부승희는 손을 입에 가져갔다가 다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등 뒤로 돌렸다.“오빠 문이라도 좀 닫지? 너무 예의 없잖아.”부승원은 여동생임을 확인하자 살짝 표정이 풀렸지만 어색함을 감추려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오히려 반우희가 밝게 웃으며 부승희에게 손을 흔들었다.웨딩드레스가 무겁기도 할 텐데 그녀는 능숙하게 몸을 돌려 바닥에 내려선 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부승희 언니.”부승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아직도 언니라고 불러요? 며칠 뒤면 내가 반우희 씨에게 올케라고 불러야 할 텐데.”반우희는 헤헤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그게 뭐 어때서요? 그냥 각자 부르는 대로 부르면 되죠. 전 계속 언니라고 부를 테니까 언니는 저한테 올케라고 부르면 되고요.”부승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부승원은 말없이 안경을 챙겨 쓰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부승희를 훑어보았다.“또 살이 빠졌네요? 그리고 까매졌고.”그러자 반우희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건강미 넘치는 섹시한 스타일이네요!”부승희는 확실히 피부가 조금 까매지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섹시한 스타일은 맞았다. 짧은 스포츠 브라탑 위에 짧은 가죽 재킷을 걸쳐 한층 더 멋스럽고 당당한 분위기에 몸매 라인이 돋보였다.그녀는 반우희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우희 씨야말로 엄청 하얗고 통통하네요.”그러자 반우희는 더 가까이 다가와 볼을 쏙 내밀며 장난쳤다.부
이승우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에서 한은숙이 그를 맞이했다.이승우의 부모님은 늦게 결혼하고 늦게 아이를 낳은 부부였다. 한은숙은 아직 쉰을 조금 넘겼을 뿐이었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에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오랜만에 본 아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안쓰러움이 묻어 있었다.“아들아, 이리 와. 엄마가 좀 보자. 어디 다친 데는 없니?”이승우는 한은숙을 거실로 이끌며 소파에 앉아 있는 이상열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부드러운 말투로 한은숙을 안심시켰다.“괜찮아요. 그냥 살짝 긁힌 정도예요.”하지만 한은숙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얼굴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긴장했다.이승우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결국 이상열이가 냉담하게 쏘아붙였다.“괜찮으면 당장 집에 와야지? 네 엄마가 걱정하는 거 몰랐어?”그러자 한은숙은 즉시 이승우를 감싸며 이상열을 나무랐다.“얘가 제일 먼저 나한테 전화했어요. 무사한 거 알고 있었으니까 걱정 안 했죠. 그리고 사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와이프한테 가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와이프?”이상열은 비웃으며 말했다.“너무 과장하는 거 아니에요?”“내가 뭘...”“분명 같이 돌아왔겠죠.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부씨 가문 아가씨를 먼저 데려다주고 우리 집을 지나쳤을 텐데 예전에는 자주 놀러 왔던 우리 집에 몇 년째 얼굴도 비추지 않고 이번에도 인사 한마디 없이 그냥 지나갔어요.”이승우는 침묵했다.“...”한은숙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이승우를 바라보았다.“아직도 승희의 마음을 붙잡지 못한 거야?”“거의 잡았어요.”“그 말 이번에도 했잖아.”한은숙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이승우는 답답한 속을 품고 있었고 그때 이상열이 옆에서 한술 더 떠서 말했다.“나는 몇 년 있으면 칠십이야. 죽기 전에 손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아버지가 늦게 손자를 보는 건 아버지가 늦게 저를 낳으셔서 그렇잖아요.”한은숙은 이승우의 말에 맞장구치
부승원이 부승희를 향해 말했다.“많이 낡았는데 이참에 꺼내서 다시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부승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부승원이 바로 나무 상자를 열었다.남매는 테이블 앞에 옹기종기 붙어서 상자 안에 든 물건에 시선을 집중했다.부승희는 아예 허리를 숙여 상자 안으로 들어갈 기세였는데 고개를 드니 부승원도 꽤 집중한 눈치였다.그래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눈 깜짝할 사이에 오빠가 벌써 결혼을 다하네.”부승원도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흐른 게 믿기지 않았다. 아직도 부승희만 보면 작고 어리던 시절이 떠올랐다.“너도 많이 컸네.”부승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상자 안에 든 진주 목걸이를 가리켰다. 가문에 대대손손 내려온 진주 목걸이는 감탄사를 자아냈다.그러다 보니 아주 오래전, 어린 부승희가 부승원을 졸라 엄마의 보물 상자를 열어달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어린 부승희는 진주 목걸이를 보며 눈을 반짝이고 감탄을 늘어놨었다.부승원이 이런 부승희를 보다가 머리를 꾹 눌렀다.부승희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무게를 견디다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결혼하고 오빠 어디에서 지낼 거야?”“설마 우희 씨네 화려한 별장에서 지내는 거야?”부승원은 마른기침을 하면서 말을 고쳤다.“인테리어 새로 해서 이젠 그렇게 과하지 않아.”“흥, 안 믿어.”별로 이상할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부승원은 왠지 이 상황이 슬프게 느껴졌고 저도 모르게 부승희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이젠 빨리 자고 내일 봐.”부승희는 제 오빠를 방 밖으로 밀며 말했다. 널찍한 부승원의 등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부승원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부승원도 코를 훌쩍이며 다니던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다.그러자 눈시울이 점점 뜨거워졌고 부승희는 제 방문을 닫고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침대 끝에 걸쳐 앉으니 방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나무 상자의 진주 목걸이는 전등 불빛에 반짝거렸고 마치 동화 속에 나올법한 마법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아니야. 아버님께서 어머님을 얼마나 아끼시는데 내가 어떻게 어머님께 밥해달라고 조르겠어? 내가 졸랐다고 하면 아버님이 나 혼내실지도 몰라.”“안 그럴 거야.”이승우는 단번에 부승희의 말을 잘랐다.“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네가 좋아한다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셔서 밥 차려주실걸?”부승희는 웃음이 터졌다.“농담하지 마.”“농담 아니야. 오늘 밤에도 아버지가 네 얘기하셨어.”부승희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물었다.“나에 대해... 무슨 얘기를 했는데?”“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똑똑하고 예쁜 널 나와 맺어준다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했어.”“웃기지 마.”부승희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러나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아버님 눈이 얼마나 높으신지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버님 눈엔 어머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눈에 차지 않으실걸?”“어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니까 아버지도 그러는 거지.”부승희는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심장이 콩닥거리는 걸 느꼈다.핸드폰 너머 이승우도 조용했고 부승희는 혹시 자신의 심장 소리가 이승우에게 들릴까 호흡 소리도 작게 했다. “내일엔 뭐해?”이승우가 물었다.“모르겠어. 오빠가 볼일이 많아서 내가 좀 거들어줘야 할 것 같아.”“그래도 오후 일정이지 않겠어? 그러니까 오전엔 푹 쉬고 내가 데리러 갈게. 같이 아침밥 먹자.”“별로 나가고 싶진 않은데.”“그럼 점심 같이 먹을래?”어찌 되었든 꼭 만나고자 하는 이승우의 의지가 느껴졌다.부승희도 크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계속 툴툴거렸다.“뭘 또 같이 먹는다고 그래. 오빠도 오랜만에 돌아온 건데 친구나 거래처 사람들이나 만나. 나도 할 일이 산더미라고.”“거래처 만나기 전에 짧게 만나는 것도 안 돼?”왠지 이승우의 간절한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그럼 내일 아침 만나자. 내가 도시락 챙겨서 너희 집으로 갈게.”이승우가 자꾸 보채자 부승희는 잠이 점점 가셨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해가 뜨려면
돌이 지난 양승윤은 이제 걸을 수도 있고 짧은 단어를 구사할 수도 있었다. 귀여운 멜빵바지에 예쁜 볼캡을 눌러쓴 모습에 언뜻 봐도 미모가 남달랐다. 게다가 방긋방긋 잘 웃기도 했는데 작고 소중한 아기 이발이 드러날 때마다 보는 이는 심장이 녹아내렸다.반우희의 거실엔 사람들로 빼곡했다. 반우희와 같이 일을 하던 동료들, 그리고 부승원 쪽 친척들까지 들어섰으며 신부 들러리들도 함께였다.양승윤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아이를 빙 둘러싸고 시선을 집중했다.양승윤은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잔뜩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저 멀리 엄마 양시연이 보이자 뒤뚱거리며 그곳으로 향해 달려갔다.사람들은 그 모습에 절로 엄마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가던 길에 부승희를 만난 양승윤이 발걸음을 뚝 멈춰 섰다.‘누구지? 전에 본 적이 없는데?’부승희는 허리를 숙여 보드라운 아기 볼을 슬쩍 매만졌다.“고모라고 불러.”“고고...”어눌한 발음에 사람들은 또 웃음이 터졌다.양시연도 미소를 지은 채로 아이를 제 옆으로 당겨 다시 발음을 교정해 줬다.“고모.”“고고!”“고모!”“고... 고고!”부승희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고 양승윤을 품에 안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양시연이 그 옆으로 다가가 아이의 볼캡을 다시 고쳐 씌워줬다.그때, 마침 표세연이 도착했다.거실은 이제 사람들로 꽉 차버렸고 스타일링을 도와주시는 스태프들까지 들어서니 아예 이동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게다가 승주마저 제 친구들을 한가득 초대를 해버렸다.부승희는 소란 속에서 자리 배정을 진행했고 양시연은 양승윤을 안아 들고 신부 방으로 숨어 들었다.반우희는 이제 막 메이크업을 시작했고 양승윤을 보자마자 두 팔을 활짝 벌렸다.“승윤아!”양승윤은 반우희와 아주 친했고 서둘러 양시연의 품에서 벗어나 뒤뚱거리며 반우희에게로 걸어갔다.양시연은 그 옆으로 다가가 양승윤의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승윤아, 우리 우희 고모한테 준비한 선물이 있잖아.”그리고 양승윤의 작은 주머니를 톡톡 두드렸다.그제야 떠오른 양승윤
놀랍게도 연정훈의 예상은 아주 정확했다.부승원이 신랑 들러리와 함께 집을 올라가는데 반우희가 침대 앉아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신랑 들러리들은 모두 반우희에게 집중을 기울였고 혹시나 해서 한 사람이 전담으로 반우희를 잡아두기도 했다.신부 들러리들은 모두 방문을 지키려 문 앞으로 모였고 양시연도 그 틈에 꼈으며 양승윤은 반우희에게 잠시 맡겨뒀다.준비한 대로 문밖 거실에서 부승희가 신랑 들러리들에게 어려운 퀴즈를 내고 있었다.반우희가 입을 벙긋거리자 눈만 깜빡이던 양승윤이 바로 입을 덥석 막았다.부승원은 어렵게 질문의 대답을 찾았고 드디어 방으로 움직이려는데 두 번째 미션도 이어졌다.양시연은 양승윤을 데리고 한쪽에 자리를 잡았고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예요?”“나야.”연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양시연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양승윤도 제 아빠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부승희는 문에 몸을 기댄 채로 다른 신부 들러리들과 시선을 주고받았다.“정훈 오빠는 무슨 일로 왔어요?”“난 신랑 들러리가 아니라 승윤이 데리러 왔어.”반우희는 예쁜 드레스를 입은 채로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그래요. 승윤이가 많이 따분해하는 것 같은데 얼른 승윤이 데리고 가세요.”부승희는 반우희를 힐끗 노려보며 말했다.“정훈 오빠, 우릴 바보로 보는 거예요? 미션도 없이 신부 만나시려는 거죠?”“난 정말 승윤이 찾으러 온 거야.”“정훈 씨 괜찮아요!”양시연이 적당한 타이밍에 끼어들었다.“내가 승윤이 잘 보살피고 있어요!”양승윤은 작게 종알거렸다.“읍!”양시연은 양승윤에게 뽀뽀하며 아이의 입을 막았다.“미션 완성 못 하시면 신부 못 만나요! 이런 꾀를 쓰지 말고 얌전히 미션 완성하세요!”그러자 신랑 들러리들의 작은 탄식이 이어졌다.부승희는 양시연을 향해 엄지척했다.부승희는 이어서 또 어려운 문제를 투척했고 오답을 말한 자는 작은 벌칙도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또 문을 똑똑 두드렸다.“시연아.”“정훈 씨,
예비부부 주변으로 종이 폭죽이 터지고 예쁜 컨페티와 꽃송이가 사방에 떨어졌다.양시연은 한편으로 물러서서 두 사람의 행복한 순간을 함께 했다.미션은 어영부영 끝이 났고 부승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옆으로 물러섰다.반우희는 예쁘게 꾸민 장미꽃 사이에 앉았고 웨딩 베일에 가려진 얼굴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부승원은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직접 구두를 신겨줬다.그리고 두 사람이 눈을 마주했다.부승원은 조금 가슴이 먹먹했으나 반우희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이에 주변 사람들도 웃음이 터졌다.부승원은 잠시 행동을 멈추더니 농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눈물 두 방울은 흘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반우희는 두 눈을 비비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글쎄요. 눈물이 나지 않는걸요?”‘이렇게 좋은 날에 왜 울지?’사람들은 평소 반우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고 이게 정말 반우희다운 모습이라 생각했다.드디어 구두까지 착용하고 이제 차를 타고 예식장을 옮겨 가야 했다.누나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기원하며 승주가 반우희를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승주는 1년 사이에 또 키가 껑충 껐고 아직도 어린 소년티가 났지만 반우희를 업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그런데 눈가가 조금 빨개진 승주를 보며 반우희가 이렇게 중얼거렸다.“너 정말 누나 안 떨어뜨릴 자신 있어?”“나 50킬로는 끄떡없어. 누나 50킬로 넘어?”“아니!”“그런데 왠지 요즘 살이 더 붙은 것 같은데?”“말이 되는 소리를 해!”남매가 작게 투덕거렸으나 말은 그렇게 해도 승주는 아주 든든하게 반우희를 안아 들었고 반우희 역시 행여나 승주가 다칠까 전전긍긍했다.그렇게 또 폭죽과 꽃잎이 흩날리는 축복을 받으며 승주는 반우희를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이번 결혼식을 위해 부승원은 전체 동네를 예쁘게 꾸몄고 주민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그동안 반우희와 동생들을 챙겨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결혼식 당일 소란에 미리 양해를 구했다.주변에는 예쁜 꽃잎과 컨
부승원은 평소 과시욕이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우희와의 결혼식에는 디테일 하나하나 신경을 썼고 돈을 쏟아부어 준비했다.경인에 이름 좀 날린 사람이라면 모두 결혼식에 초대를 받았고 양석진도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례는 부승원의 할아버지와 연정훈의 아버지 두 사람이 맡았다.부승원은 반우희에게 가장 최고로 준비해 줬고 반 우희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게 느껴졌다. 부승원은 오직 반우희에게만 사랑을 쏟아부었고 이 세상 무엇보다도 반우희가 소중하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그러니 반우희는 부승원의 옆에서 행복할 일만 남았다.부승희는 양시연의 옆자리에 앉아 처음 반우희를 만났던 시절을 떠올렸다.“그때, 오빠랑 우희 씨는 어떤 사이였을까요?”양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잘 몰라도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제 느낌상으로는.”양시연이 말을 한 마디 더 보탰고 부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제 직감도 그래요.”요즘 들어 얼굴이 더 펴진 양시연을 보며 부승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정훈 오빠랑은 잘 지내는 거죠?”양시연은 어젯밤에도 꼭 붙어 지냈던 기억이 떠올라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뭐예요?”“왜 아직도 부끄러워하는 거예요?”양시연은 부승희의 장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서둘러 질문을 돌렸다.“그럼 승희 씨는 승우 씨랑 진도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그냥 그래요.”“뭐가 그냥인데요?”“돼지 키우고, 소도 키우고, 양도 키우고 있죠 뭐.”양시연이 말을 한 마디 더 보탰다.“승우 씨도 키우고?”부승희는 팔짱을 척 끼며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이에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어느새 모두 자리에 착석하고 예식이 시작되었다.예식이 끝나고 부승원과 반우희가 자리로 인사를 드리러 왔다.부승희와 이승우가 앉은 테이블은 거리가 꽤 있었다.부승희는 그쪽을 힐끔거리다가 이승우가 술잔을 받아 들고 가짜로 마시는 척만 하고 바닥에 슬쩍 흘리는 걸 목격했다.부승희는 절대 놓치지 않
갑자기 변여름에게 안겨진 양혁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노골적인 변여름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이 손 놔.”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손을 풀었다. 그리고 마주 향해 서서 양혁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바로 변여름의 곁을 지나쳐 떠나려 했다.“우리 사이 대화할 게 뭐가 더 있어? 한강시에서 이미 하고 싶은 얘기는 모두 끝났잖아.”‘이렇게 강하게 나오면 변여름도 별 수 있겠어?’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변여름은 웃음이 터졌다.‘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거지?’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오빠 지금 그렇게 강하게 나오면 아침에 있었던 일이 없었던 걸로 될 것 같아요?”“...”‘정말 미치겠네.’“오빠가 지금 떠나지 않고 남아준다면 앞으로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을게요.”양혁수는 다친 눈 때문에 짙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는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당황한 표정이 그대로 변여름에게 전해졌을 것이다.양혁수는 애써 덤덤한 척하며 변여름을 지나치려 했다.“아침엔 아무 일도 없었어. 굳이 꼽자면 자꾸 선을 넘는 너 때문에 참다 참다 떠나려는 것뿐이니까.”그러나 변여름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었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한숨을 내뱉었다.‘오빠는 계속 이런 말투로 나랑 대화하려는 걸까? 나도 이젠 조금 화가 나는데, 어떡하지?’변여름은 이를 꽉 깨물고 협박하듯 말했다.“오빠 잊으셨나 본데 여긴 제 집이에요.”“...”“이런 식으로 저한테 굴면 저 정말 화낼 거예요.”변여름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양혁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그 날 지혜 씨가 나한테 어떤 말을 했는지 오빠도 들었을 거예요. 그러다가 내가 정말 그렇게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양혁수는 어느 날인가 이성을 잃은 변여름이 정말 무슨 사달이라도 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양혁수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지혜 씨가 어떤 얘기를 해줬는지 어디 한 번 말해보든가.”“어떤 게 듣고 싶은데요?”“네 마
붕대를 갈아주는 내내 변여름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양혁수는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용히 넘어가면 이 아침의 헤프닝도 그냥 없던 일처럼 흘러갈 수 있었다. 게다가 변여름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걸 보면 아마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그렇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오후가 되자 담당 의사가 찾아와 눈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고정되어 있던 장치들을 모두 제거하고 당분간 붕대만 감으면 되었다. 비록 외출할 때는 보호안경을 착용해야 했지만 적어도 눈을 뜨고 앞을 볼 수는 있었다.붕대 아래 빈틈으로 시야가 확보되자 양혁수는 가장 먼저 주변을 훑어보았다.‘다행히 별문제 없군.’그러면 이제 도망칠 일만 남았다.‘오늘 밤, 무조건 떠나야 해.’드디어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된 만큼 더 이상 미련 가질 이유가 없었다.이렇게 결정을 내린 후, 변여름이 혹시라도 방에 들이닥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변여름은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양혁수는 곧장 연락을 돌려 출발 시간을 조율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짐을 간단하게 정리했다.그리고 침대 옆 서랍을 열어 짐을 꺼내려는데...‘뭐지?’서랍 안을 가득 채운 수상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들이 ‘홀로 달랠 때’ 사용하는 그런 도구들이었다.‘뭐야, 이거?’비록 그 전에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서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고 있었고 이건 분명 이전에는 없던 물건이었다.그리고 생각해 보니 붕대를 풀기 전 변여름이 방을 여러 번 들락거렸고 서랍에도 손을 댔던 것 같았다.양혁수는 한숨을 뱉으며 서랍을 조용히 닫았다.‘변여름은 이미 눈치채고 이런 걸 준비한 거야... 정말 미친 거 아니야?’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시간이 촉박해 다시 서랍을 열어 신분증과 필요한 서류들을 챙겼다.그렇게 짐을 다 싸고 마지막으로 코트까지 집어 들려던 순간.“딸깍.”너무도 기가 막힌 타이밍에 딱 맞춰서 방문이 열렸다.양혁수는 선글라스를 쓴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좁은 시야안으로 변여름
쿵!양혁수는 혼자 바닥에 나가떨어졌다.급하게 침대를 벗어나려다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너무 서둘렀고 뭔가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이다.변여름은 순간적으로 잠에서 깨어나 자리에 벌떡 앉았고, 양혁수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놀란 변여름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오빠! 괜찮아요?”양혁수는 단 1초도 더 변여름 옆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고 최대한 평온한 척하며 변여름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썼다.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양혁수는 변여름이 뭐라 묻기도 전에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다행히 화장실로 가는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화장실 문이 닫히고 변여름은 그 앞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상황을 되짚어 보니 방금 너무 깊이 잠들어 있었던 게 후회됐다.‘설마 나 안겼던 거야? 에이. 그냥 꿈이겠지.’변여름은 말없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명확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라 다음 계획을 정하기가 어려웠다.그런 생각 하고 있는데 화장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변여름은 움찔했다가 곧바로 문을 두드렸다.“오빠, 샤워하는 거예요?”‘설마 샤워기 소리인 건가? 눈 다친 사람이 무리하면 안 되는데!’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물소리는 계속됐다.양혁수가 진짜 화가 났다면 변여름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람을 시켜 상황을 확인해 봐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물소리가 멈췄다.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양혁수가 걸어 나왔다.변여름을 스치듯 지나칠 때 양혁수에게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변여름은 아무 말없이 욕실로 들어가 무슨 상황인지 확인해 봤다.예상과는 달리 화장실 안에는 따뜻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양혁수는 따뜻한 물을 전혀 쓰지 않은 것 같았다.‘지금 11월인데? 찬물 샤워를 했다고?’변여름은 양혁수가 너무 화가 나 풀 곳이 없어 이렇게 화풀이를 한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양혁수에게 다시 이런 식으로 다가가지 않겠
변여름은 쪼그려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바라봤다.양혁수가 눈을 다치지 않았다면, 지금쯤 분명 얼굴을 잔뜩 굳힌 채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훈계를 늘어놓았을 것이다.그 생각만 하면 변여름은 미소가 새어 나왔고 잠기운에 반쯤 잠긴 두 눈을 비비며 말했다.“오빠, 저한테 그런 말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잖아요. 저 같은 사람은 차라리 죄를 더 지으면 지었지, 억울하게 뒤집어쓰는 건 못 참아요.”양혁수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런데 변여름이 갑자기 손을 뻗더니 슬쩍 양혁수의 손을 잡았다.“저 오빠한테 키스한 적도 없고, 안아본 적도 없어요.”변여름은 아주 태연하게 한숨까지 쉬면서 말하는데, 그 말 속에 담긴 뜻이 분명했다.‘그러니까 괜히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이럴 거면 차라리 지금 제가 오빠한테 키스라도 해버릴까요?’이제는 아예 돌려 말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다른 여자였으면 양혁수가 욕이라도 내뱉었겠지만 변여름한테는 뭐라 하기도 참 애매했다.‘이걸 정말 때릴 수도 없고, 함부로 욕도 못 하니 원 참...’하지만 양혁수는 눈이 안 보이니 그저 소파에 기대앉아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그러자 변여름은 더 들이대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저는 그냥 오빠가 걱정돼서 그랬어요. 방에는 절대 들어가지도 않고 거실에서만 잤어요.”“난 노지혜 같은 사람 아니에요. 괜히 어설픈 짓 해서 오빠한테 책임지라고 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주무세요, 네?”본인도 어린애면서, 꼭 어린애를 달래듯 한 말투였다.양혁수는 그 말에 설득당하게 아니라 너무 피곤해 더 따질 기운이 없어 이 정도로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며칠 후면 떠날 거고, 잠깐 변여름에게 져준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변여름은 그날 밤에도 거실에서 잤고, 양혁수는 방으로 들어갔다.그렇게 또 한 번, 양혁수가 본인의 원칙을 하나 내려놓았다.그다음 날, 낮잠을 자다가 몸을 살짝 돌리
양혁수는 보지 않아도 현재 변여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었다. 아마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수 무구한 표정을 하고 있으나 그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할 것이다.양혁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그럴 가능성없지 않잖아.”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그럼 내 걱정이 터무니없는 걱정은 아니지 않아?”“네. 맞아요.”이번에도 변여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수비 대신 공격을 하면 뻔뻔한 변여름을 제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변여름은 생각보다도 더 강적이었다.“걱정도 참. 내가 정말 보고 싶었다면 여기 카메라라도 달아놓으면 그만이잖아요.”양혁수는 경악을 했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렸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농담이에요.”“오빠 걱정하지 마요. 나 그렇게 변태 아니에요.”‘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고.’변여름의 말에 양혁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고 이 욕실에 정말 카메라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그때, 변여름이 갑자기 손을 뻗어 셔츠 가장 윗단추를 건드렸다.깜짝 놀란 양혁수는 서둘러 뒷걸음치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변여름.”그러나 변여름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다시 천천히 걸어와 계속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손목을 잡았고 변여름이 덤덤하게 말했다.“오빠, 셋 셀 때까지 이 손 안 놓으면 오빠 목욕할 때 나 몰래 들어올 거예요. 그리고 오빠가 잠 들었을 때 몰래 방으로 들어올 거예요.”이어 변여름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셋...”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렸다.변여름은 정말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긴장에 숨을 헐떡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을 웃음을 꾹 참고 남은 셔츠 단추를 모두 풀었다.그리고 양혁수가 셔츠를 벗는 동안 뒤를 돌아 프라이버시를 지켜줬다.몇 초 뒤, 변여름은 양혁수의 셔츠를 받아 쥐고 문밖으로 향했다.“오빠 나 정말 나가요. 도움 필요하면 남자 도우미 부를 테니 말해요.”
양혁수는 축축한 건 질색이라 평소 머리가 완전히 건조될 때까지 말리는 편이었다.양혁수는 드라이어를 들고 능숙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바람을 조절했고 그 바람에 양혁수가 입은 셔츠 자락이 말리면서 양혁수의 탄탄한 몸이 그대로 드러냈다.변여름은 원래 가만히 서서 양혁수가 필요할 때 물건을 건네줄 생각이었다.하지만 주변에 은은하게 샴푸 향이 퍼지고 변여름의 시선은 자꾸 두어 개 단추를 풀어 헤쳐 드러난 양혁수의 쇄골로 향했다.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지고 저도 모르게 자꾸 양혁수를 힐끔대다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변여름은 슬그머니 자세를 틀어 양혁수를 등지고 벽을 바라보며 반성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이어 소리가 멈췄다.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양혁수는 무심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런데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도 예뻤다.‘안돼! 이 음란 마귀야 멈춰!’변여름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제 볼을 꽉 꼬집었다.‘좀 참으라고!’“여름아.”양혁수의 부름에 변여름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왜요, 오빠?”“목욕물 받아놓고 나가줘.”이제 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변여름을 부려 먹었다.“알았어요.”변여름은 양혁수가 소파에 앉는 걸 확인하고 욕실로 향했다.그 사이, 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시원한 과일 주스를 마시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유리컵을 내려놓자마자 변여름이 욕실에서 나오며 말했다.“오빠, 준비 끝났으니까 들어가요.”“혼자 할 수 있으니까 이만 나가.”“오빠 들어가는 것까지 도와주고 나갈게요.”양혁수는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머리를 대신 감겨주는 건 그렇다 쳐도, 씻는 건 꽤 사적인 영역이었다.솔직히 변여름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욕실 안은 바깥보다 더 축축했다.변여름은 양혁수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가며 어느 물건은 어디에 두었는지 설명해 줬다.양혁수는 일
양혁수는 어릴 때부터 타고난 인기에 지금껏 받은 고백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그런데 서른네 살이 되는 해에 족히 열 살은 더 어린 꼬마에게 고백 폭탄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며칠을 곱씹어본 끝에, 양혁수는 결론을 내렸다.이건 마치 산적 두목한테 납치당한 기분이었다!그러나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산적 두목은 말투가 부드럽고 귀에 착 감기는 데다, 모든 일에 적당히를 알고, 양혁수를 모시는 방식도 너무 완벽해서 반박할 구석이 없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양혁수는 불평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양혁수가 두 번의 진료를 받고 일상생활이 가능해지자, ‘두목’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양혁수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비서 노릇도 하고, 가끔은 가정부 노릇도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읽어야 하는 서류들은 미리 검토한 후 요점만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고, 업무 효율은 원래 비서보다 더 뛰어났다. 게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준비한 과일을 다양한 모양 틀로 찍어냈다.처음엔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 먹다 보니 과일을 입에 넣기 전에 오늘엔 별 모양인가, 하트 모양인가 확인하는 버릇까지 생겼다.그리고 무엇보다 변여름은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즐거워했다. 가끔 양혁수가 작은 부탁을 하면, 대단한 일이라도 된 듯 기뻐하며 도왔다.지친 기색 없이 기꺼이 헌신하는 변여름 덕분에 양혁수는 점점 더 게을러졌고, 어느새 낮잠까지 챙겼다.낮잠 자다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어김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깼어요?”‘지금 일상이 신선놀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반려동물이 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양지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양혁수는 내심 양지원이 오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양지원이 봤다면 또 놀려댈 게 뻔했다.차츰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고 굳이 급히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다 생각한 양혁수는 바로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붕대만 풀면 바로 떠날 것이라 계획을 차렸다.해가 질 녘, 변여
“네가 무슨 방법이라도 대서 날 국내로 보내줘.”양혁수가 변백호를 향해 말했다.양혁수가 정신을 차린 뒤로 변백호는 처음 병실을 찾았다.변여름은 방금 병실을 나섰고 엉망인 양혁수의 입가를 보며 변백호는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이 되었다.“눈이 회복될 때까지 두 날만 더 쉬어.”양혁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타박상뿐이고 안구는 다치지도 않았다면서 뭔 회복을 기다리는 거야?”“서둘러줘. 오늘 밤, 늦어서 내일 아침엔 돌아가야 해. 국내에 할 일이 많다고.”변백호는 바로 양혁수의 마음을 쿡 찔렀다.“너 여름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양혁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너희 부모님께 말 좀 잘해줘. 난 네 매부 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으니까.”“말해봤자 소용없어. 여름이는 너만 좋아하니까.”변백호가 바로 받아쳤고 양혁수는 이런 변백호를 노려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너 정말 미쳤어? 나한테 여동생이 있었다면 띠동갑 되는 남자한테는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절대 보내지 않을 거야. 너라도 정신 제대로 차려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여름이 다리를 분질러라고?”변백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양혁수는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하지만 사실 양혁수는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그러니까 너희 부모님께 말해서 여름이 좀 잘 타일러줘.”“소용없어. 오히려 두 분이 여름이 돕겠다고 나설지도 몰라. 우리가 오랜 친구인 걸 보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걸.”“...”변백호는 양혁수에게 충고를 남겼다.“네가 정말 여름에게 마음이 없다면 너무 티 내지는 말고 당분간만 참아줘. 갖지 못하는 것에 더 목을 매게 된다는 말도 있잖아. 일단은 옆에 두고 여름이가 차츰 관심이 식을 때까지 내버려둬. 그렇게 같이 지내다가 너한테 질리면 가버릴 수도 있잖아.”“...”‘그걸 충고라고! 정말 하나도 도움이 안 돼!’양혁수는
양혁수는 숟가락에 닿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그러나 국물 맛은 여전했으며 짭짤한 새우젓의 맛만 추가되었을 뿐이었다.말없이 입안의 것을 씹고 있는데 변여름이 물었다.“입에는 맞아요?”“그래...”변여름은 다행이라며 중얼거렸고 자연스럽게 양혁수의 숟가락 위로 반찬을 집어주었다. 양혁수는 본인이 우연히 반찬을 집은 건지 아니면 반찬이 밥에 잘 섞여 있던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입에 넣고 국물도 한술 떴다.양혁수는 본인의 의지대로 스스로 밥을 먹었고 변여름도 자신이 먹여주겠다고 떼를 쓰지 않고 몰래 집어주고 있으니 두 사람 분위기도 차츰 풀렸다.하지만 몰래 반찬을 집어주는 것도 사실 먹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양혁수가 이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고 변여름은 어느새 깨끗하게 씻은 딸기를 양혁수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아...”그러나 양혁수는 입을 벌리지 않고 손으로 받으려 했다.“오빠는 손도 안 씻었잖아요.”“...”겨우 딸기 하나라는 생각에 양혁수는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렸다.그렇게 물꼬를 트고 나니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일이 번졌다.딸기에 이어 변여름은 손수 치킨을 한입 크기로 잘라 양혁수에게 건넸다.그렇게 한입씩 먹여주며 변여름이 말했다.“오빠가 자고 있을 때 연락이 네 통 정도 걸려 왔는데 하나는 지원 이모이고 다른 전화는 회사 사람인 것 같아요.”입을 꾹 다물고 있던 양혁수는 핸드폰을 건네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변여름이 건네온 치킨에 말문이 막혔다.“오빠, 이 집 치킨 맛있으니까 많이 먹어요.”양혁수는 입 안 가득 찬 치킨에 말을 잇지 못했으나 변여름은 양혁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핸드폰을 건넸다.그러다 보니 양혁수는 지금 변여름이 자신을 ‘먹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고 아주 자연스레 변여름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변여름이 질문을 이었다.“조원희라는 사람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다시 걸까요?”두 번이나 걸었다는 건 필시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