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백산은 낮다면 낮고, 높다면 높은 해발이었다.이승우도 평소 등산을 자주 하는 편이었으나 부승희와의 등산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 뒤로는 처음이었다.그해 여름은 아주 더웠고 부승희는 등산하기 싫어 차량에서 버티고 있었다.이승우는 차 안으로 들어가 부승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승희야.”그러나 부승희는 못 들은 척 외면했다.“산에서 보는 일출이 그렇게 예쁘다는데?”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이승우는 주변을 뒤적이다가 얇은 잡지를 돌돌 말아 부승희의 귓가에 대고 살살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부승희는 결국 고개를 들어 이승우와 시선을 마주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잡지를 휙 던졌다.“그때의 넌 작은 산도 등산하기 싫어했잖아.”이승우의 말에 부승희도 자연스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차 안에서 귓가에 바람을 불던 이승우와 따듯하던 바람이 온몸을 간질거리게 했다.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승희는 이승우가 정말 자신의 귓가로 다가온 줄 알고 심장이 쿵쾅거렸으나 눈을 뜨니 돌돌 만 잡지가 보였고 순식간에 실망이 찾아왔었다.부승희는 이런 이승우가 참 미웠다.하지만 결국 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등산하게 되었다. 등산하는 내내 수많은 친구가 이승우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해 부승희는 또 한 번 화를 내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승우는 어쩔 수 없이 또 부승희를 달래주었고 부승희를 달래주기 힘든 여왕 같다며 별명까지 지어주었다. 부승희는 서운했다. 하고 싶지 않은 등산도 이승우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따라 나왔는데 또 많은 사람이 달라붙었으니. 그러나 이승우는 귀찮은 내색도 없이 친구들의 요청에 응했다.하지만 이제 이승우의 옆엔 오직 부승희 뿐이었다.산을 타고 올라가니 작은 절이 보였고 이승우는 밖에서 짧게 기도를 할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부승희는 이승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뭐해? 안으로 들어와서 향 피워야지.”‘여기까지 와서 안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이승우는 사실 무신론자였으나 부처님 앞에서 그
비 오는 날, 검은색 벤틀리 뒷좌석에서.차 안의 어두운 불빛 때문에 남자의 허리춤을 휘감고 있는 여자의 희고 부드러운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간지럽고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시연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튕기면서 눈앞의 사람이 빨리 끝내길 바랐다.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읍!”안시연이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몸짓을 멈추었다.“처음이야?”안시연은 몸을 불태우던 열기가 조금 식은 것 같았다. 잇따라 허전한 기분이 들더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더 단단히 감아 들었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정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그는 여자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긴장 풀어.”차 안의 온도가 급상승했다.정신은 흐릿했지만 이상하게 감각은 예민했다.안시연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더니 어금니를 깨물고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그녀는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만 했다.두 달 전, 그녀는 주지혁의 팔짱을 끼고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석했었다. 연정훈은 성진대학교의 우수 졸업자 겸 학부 특임 교수로서 그 동문 모임에 참석했는데 두 사람에게 선남선녀라며 칭찬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주지혁은 바람을 피워 곧 명문 가문 아가씨와 결혼한다.그리고 그녀는 연정훈의 아래에 누워 그가 순결을 앗아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경인시에서의 연씨 가문은 권력이 대단했다.연정훈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갑자기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정인 그룹을 맡았다.그리고 지금의 그는 경인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번듯해 보이더니 이런 일을 할 때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안시연을 사정없이 괴롭혔다.안시연은 하마터면 그의 차에서 숨이 멎을 뻔해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일이 끝난 후, 그녀는 옷을 꼭 껴안고는 힘이 풀린 채
안시연은 경찰서에 세 시간의 취조를 받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는데, 이때 주지혁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어금니를 깨물다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지혁 씨,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요. 굳이 내 인생을 망칠 생각인가요?”그 8억은 분명 그가 그녀에게 직접 전화해 빼내라고 한 것이다.주지혁은 그녀의 분노를 예상했는지 덤덤하게 말했다.“시연 씨,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면 안 되었어요.”“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안 꺼내면 당신이 어떻게 조이현 씨를 안을 수 있겠어요?”안시연이 비꼬며 말했다.주지혁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이 뻔뻔스럽게 말했다.“나 다음 달에 이현이와 약혼해요. 하지만 난 이현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시연 씨, 3년만 기다려요. 3년 뒤면 내가 이혼하고 꼭 시연 씨와 결혼할게요.”안시연은 헛웃음이 나왔다.“그럼 3년 동안 나는 어떡하라고요.”“외국으로 유학 보내줄게요.”뻔뻔스럽네!명문 가문 출신인 조이현과 결혼은 해야겠고, 또 그 돈으로 안시연을 ‘내연녀’로 만들게 하다니, 어떻게 이런 염치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안시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지만 난 이미 다른 남자와 잤어요.”주지혁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농담은 하지 마요. 나 화나게 만들면 시연 씨에게 좋을 것 없어요.”안시연이 심호흡하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나 찾으러 와요. 내가 시연 씨 외국 보내줄게요.”“꿈 깨요!”주지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시연 씨, 만약 내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시연 씨는 돈의 행방을 모두 찾아내는 것으로 결백을 증명해야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나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8억이면 시연 씨 감옥에서 10년 갇히고도 더 남아요. 시연 씨가 감옥에 들어가면 누가 외할머니를 돌보겠어요?”안시연에게 힘이 남아돌았다면 진작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내가 정말
안시연은 그제야 연정훈 눈빛의 의미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그녀는 빠르게 거울 앞을 지나 옷을 벗고는 욕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다 씻고 나서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욕실 안에는 남성 가운 하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어젯밤 연정훈을 떠올렸는데 그가 여색을 밝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어쩌면 이미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녀는 가운을 입고 문을 열고는 조심스럽게 연정훈을 불러보았다.“연 교수님?”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빠르게 나가 데스크에 전화해 옷을 부탁하려고 했다.침대에 앉아 이제 막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정이슬이 그녀에게 보내준 스크린샷이었다.“시연아, 무슨 일이야? 전민준에게 부탁하러 간 거 아니었어? 왜 싸우게 된 거야? 그 새끼가 단톡방에서 너 꽃뱀이라며 욕하고 있어.”안시연이 단톡방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정말 정이슬의 말대로 전민준은 그녀에게 온갖 욕설과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거짓말에 사람들은 그에게 위로도 건넸다.[걸레 같은 년은 나도 싫어. 그 와중에 보답 없이 부탁하는 것 좀 봐. 퉤!]안시연은 이 보름 동안 불행의 시간을 보냈다.그녀에게 도움을 베푼 사람이 있기는커녕 지금 단톡방에서 또 이런 비난을 받고 있으니, 그녀는 분노가 끓어올랐고, 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 코끝이 찡했다.“옷은 이따가 누가 가져다줄 거야.”맑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그제야 연정훈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뭐야? 왜 소리를 안 내?’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연정훈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느긋하게 말했다.“난 대답했는데 당신이 못 들은 거야.”그 말인즉 자기 탓이 아니라는 뜻이었다.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발목에서 고통이 몰려와 그녀는 작은 신음을 뱉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게 되었다.연정훈
안시연이 얼어붙었다.잠깐 생각하고서야 그의 뜻을 알아챘다.어제는 그녀의 첫날밤이었고 연정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니 그의 뜻은 전에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는지 물어보는 것이었다.안시연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는데 그녀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그녀와 잠자리를 가져본 사람은 연정훈밖에 없었다.주지혁이 바람피우기 전 두 사람의 스킨십은 포옹과 키스에 그쳤고, 잠자리는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그녀는 경험도 없어 이런 얘기가 꺼내질 때마다 어색한 마음이 들곤 했다.연정훈이 또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그녀는 겨우 대답했다.“습관 되지 않아서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사실이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맑은 눈을 가진 그녀였기 때문이다.“넌 참 착한 여자야.”연정훈이 덤덤하게 뱉은 말에 안시연은 입술을 꽉 물었다.방금까지 단톡방에서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받은 불공평한 대우까지 떠오르니 그의 말에 그녀는 왠지 모르게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분명 그녀는 잘못한 게 없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녀를 비난하곤 했다.연정훈이 무심하게 말을 뱉고는 약을 다 바른 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안시연이 서둘러 몸을 뒤로 뺐는데 허벅지 사이로 약간의 고통이 전해졌다.어젯밤의 부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연정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리를 모을 때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포착했다.“다리에도 상처가 있어?”그 얘기를 듣자, 안시연은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그녀의 눈가, 그리고 코끝이 빨개졌다.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는데 마치 비바람 속에 피어난 장미꽃 한 송이 같았다.연정훈이 한 발짝 다가서자, 안시연은 몸을 더 뒤로 뺐다.“안시연.”연정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녀는 긴장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뒤에 있는 침대 시트를 꽉 잡았다.연정
안시연은 테이블 위에 누워있었는데 마침 주인을 기다리는 정교한 선물 같았다.연정훈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는 달콤한 입술을 맛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여자가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풀었다.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가는 허리에 달라붙어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사실 아까 병풍을 사이 두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부터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탐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때 안시연은 전민준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연정훈은 목덜미를 물어뜯자, 안시연은 온몸에 전율이 퍼지는 것 같았다.점점 거칠어지는 남자의 숨소리와 손길, 그리고 자연스럽게 버클을 푸는 남자를 보며 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어두운 불빛 아래 뭔가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젖은 눈을 크게 뜨고는 빛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의 형체를 똑똑히 보려고 했다.연정훈 손에 낀 반지였다.그것도 약지에 끼어 있었다.순간 뜨겁게 달아오르던 안시연의 몸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대충 세어보니 연정훈도 거의 서른 되는 나이였다.명문 가문의 후계자라면 이 나이에 진작 결혼했을 텐데 말이다.“집중해.”남자는 여자의 귓불을 깨물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를 꽉 잡아 벌리려고 하자 안시연이 갑자기 몸을 뒤로 빼며 남자를 밀어냈다.“안 돼요!”연정훈의 새까만 눈동자는 욕망으로 타올랐다.그는 안시연이 그에게 도움을 부탁할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 조건을 내세울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그는 여자의 발목을 잡았다. 물론 상처 난 부위를 피해 잡았다.그리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힘으로 제압했다.안시연이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의 입술을 피했다.연정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숨을 헐떡이고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왜 그래?”“결혼하셨잖아요!”안시연이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주지혁이 바람피워서 마음고생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내연녀’라는 존재를 싫어했다. 그래서 절대 다른 사람의 결혼에 끼어들 생
호텔 로비에서.연정훈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샤워를 마쳤고 다른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였다.김세연이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임유정이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잡지 속의 주얼리를 가리키며 김세연과 얘기를 나눴다.연정훈이 걸어오자, 임유정은 바로 그를 발견했다.“정훈 씨.”그 말에 김세연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로 샤워한 사실을 알아차렸다.하지만 아들이 체면도 지켜줘야 했으니, 김세연은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왜 이제야 내려와? 나랑 유정이가 너 거의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덤덤한 얼굴로 소파 위에 앉고는 말했다.“데스크에서 약혼녀가 왔다고 하던데요. 약혼녀와의 첫 만남이니까 제대로 꾸미고 내려와야죠.”김세연이 의아한 얼굴을 보이고는 임유정에게 고개를 돌려다.임유정의 얼굴에 홍조가 띠더니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약혼녀? 데스크가 그래?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김세연은 그녀의 연기를 간파하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연정훈을 보며 말했다.“데스크에서도 너랑 유정이가 선남선녀로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이런데도 기회 안 잡고 뭐 해?”임유정의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그녀는 김세연의 팔을 끌어안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김세연이 그녀의 팔을 툭툭 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연정훈을 흘겨봤다.연정훈은 기분이 좋았는데도 임유정이 연기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그는 김세연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너 집에 안 들어온 지 몇 달이나 됐잖아. 전화해도 계속 건성건성 대답하고. 유정이랑 밥 먹다가 네가 이곳에 묵고 있다는 걸 알았어. 아니면 엄마가 아들 얼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즘 바빠서요.”“핑계는.”김세연은 아들 얼굴 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 임유정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도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대신 네 엄마에게 안부도 물어
안시연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주지혁에게 준 집 열쇠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탁’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멀지 않은 곳에 양복과 구두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주지혁이었다.남자는 천생 배우라더니 주지혁도 다를 것 없었다.잘생긴 그는 평소 안시연에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지금 음침한 얼굴빛을 드러내 안시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안시연이 그를 쫓아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전민준 만나러 갔어요?”그는 분명 단톡방 내용을 봤을 것이다.안시연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와 더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누굴 만나든 당신과 상관없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죠? 열쇠는 여기 두고요.”불같이 화를 내는 안시연을 보더니 주지혁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자기에게도 이렇게 모질게 구는데 전민준 같은 인간에게 자존심을 굽혔을 리가 있을까?“시연 씨 일이니까 당연히 신경 써야죠.”안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주지혁이 한발 앞서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한쪽을 버리고는 여세를 몰아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거 놔요!”안시연이 소리를 질렀다.주지혁은 강세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소파에 눕혔다.“출국하는 거, 고민해 봤어요?”안시연이 발버둥 치더니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요!”주지혁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는데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빨갛게 물든 그녀의 입술을 발견해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다른 사람과 키스했어요?”안시연이 멈칫했다.곧이어 복수했다는 쾌감이 들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네, 키스했을 뿐만 아니라 잠자리도 가졌죠.”주지혁은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하지만 고집스러운 안시연의 얼굴을 보며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설득했다.‘나의 시연 씨는 절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자신의 추측에 힘을 실으려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시연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안시연은
가백산은 낮다면 낮고, 높다면 높은 해발이었다.이승우도 평소 등산을 자주 하는 편이었으나 부승희와의 등산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 뒤로는 처음이었다.그해 여름은 아주 더웠고 부승희는 등산하기 싫어 차량에서 버티고 있었다.이승우는 차 안으로 들어가 부승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승희야.”그러나 부승희는 못 들은 척 외면했다.“산에서 보는 일출이 그렇게 예쁘다는데?”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이승우는 주변을 뒤적이다가 얇은 잡지를 돌돌 말아 부승희의 귓가에 대고 살살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부승희는 결국 고개를 들어 이승우와 시선을 마주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잡지를 휙 던졌다.“그때의 넌 작은 산도 등산하기 싫어했잖아.”이승우의 말에 부승희도 자연스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차 안에서 귓가에 바람을 불던 이승우와 따듯하던 바람이 온몸을 간질거리게 했다.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승희는 이승우가 정말 자신의 귓가로 다가온 줄 알고 심장이 쿵쾅거렸으나 눈을 뜨니 돌돌 만 잡지가 보였고 순식간에 실망이 찾아왔었다.부승희는 이런 이승우가 참 미웠다.하지만 결국 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등산하게 되었다. 등산하는 내내 수많은 친구가 이승우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해 부승희는 또 한 번 화를 내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승우는 어쩔 수 없이 또 부승희를 달래주었고 부승희를 달래주기 힘든 여왕 같다며 별명까지 지어주었다. 부승희는 서운했다. 하고 싶지 않은 등산도 이승우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따라 나왔는데 또 많은 사람이 달라붙었으니. 그러나 이승우는 귀찮은 내색도 없이 친구들의 요청에 응했다.하지만 이제 이승우의 옆엔 오직 부승희 뿐이었다.산을 타고 올라가니 작은 절이 보였고 이승우는 밖에서 짧게 기도를 할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부승희는 이승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뭐해? 안으로 들어와서 향 피워야지.”‘여기까지 와서 안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이승우는 사실 무신론자였으나 부처님 앞에서 그
이승우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타이어를 확인했고 따라 내린 부승희는 이러한 상황에도 아주 덤덤해 보였다. 부승희는 트렁크에 비상 타이어가 없다는 말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정범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하라고 지시했다.“오빠, 견인 부르고 오 사장한테 차량 새로 부탁해.”이승우는 오정범이 액운을 불러온 거라 투덜거렸다.그러나 사건은 꽤 빨리 해결되었다.이승우가 전화를 걸고 있는데 부승희가 핸드폰을 뒤적이며 이렇게 말했다.“오빠, 여기 콜택시 잡혀.”그러자 이승우는 오정범에게 걸고 있던 통화를 바로 종료하고 부승희의 핸드폰을 바라봤다.“너 콜택시 별로 안 좋아하잖아.”“돼지 농장도 운영하는 내가 그런 걸 따질 것 같아?”‘내가 언제 그렇게 까다로웠다고.’부승희는 고개를 숙이며 핸드폰을 조작했다.“일단 이 차량 길가에 가져다 대고 견인 차량이 오면 맡기고 택시 타자. 더 질질 끌다가는 해가 떨어지겠어.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택시 타서 여기 근처 왔다가 차량 구해서 다시 전주로 돌아가는 거야.”“그래.”두 사람은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5억이 넘는 차량을 아무렇게나 길가에 세워두고 콜택시를 부르기 시작했다.가백산은 해발이 높지는 않았지만 풍경이 좋았고 등반하고 하산까지 소요 시간은 6시간 정도였다.초여름이고 산이다 보니 온도는 아주 낮았다. 게다가 이름 모를 벌레들도 많았다.등산 전, 이승우는 가방에서 스프레이를 찾아 부승희의 팔과 다리에 분사했다.부승희는 큼지막한 돌멩이에 앉아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았고 이승우가 이렇게 세심한 건 미처 몰랐다고 생각했다.그때, 갑자기 나타난 한 여자가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며 이승우를 불렀다.“저기, 혹시 스프레이 좀 빌릴 수 있을까요?”이승우가 물었다.“몇 명인데요?”여자는 더 쑥스러워하며 멀지 않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웬걸, 척 보아도 여덟명이나 되어 보였고 모두 반소매 반바지 차림이었다.이승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그쪽 한 명에게 빌려주는 건 몰라도 저렇게
아침 아홉 시.부승희는 창가에 앉아 주먹밥을 우걱우걱 씹었다. 그리고 옆에서 무서운 속도로 비빔밥을 해치우는 이승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정말 멍청하기도 하지. 또 이승우의 말에 홀랑 넘어가 버렸으니.저녁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긴 개뿔, 이승우는 다크써클 하나 없었고 비빔밥을 바닥까지 싹싹 비웠다.부승희는 너무 졸려 차에 올라 주먹밥을 몇 입 먹다가 바로 잠에 들었다.눈을 뜨니 차량은 어느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백미러로 뒤를 살펴보니 다섯 대 트럭이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트럭에는 모두 건강한 돼지들이 타고 있었다.돼지들이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큰 귀를 펄럭이는 모습이 꽤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부승희는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이승우에게 말을 걸었다.“오정범 사장네 양계장 사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이승우가 바로 대답했다.“초기에만 140억 투자가 필요한데 별로 내키지는 않아.”부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돼지 농사도 제대로 손에 익지 않았는데 닭까지 넓힐 생각은 없었다.“그럼 투자는 조금만 하자. 오 사장이 그동안 우리 많이 도와줬잖아.”이승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먼저 돼지들을 2번 농장으로 보냈고 직원에게 사인을 받은 뒤 새로운 기지를 둘러봤다. 그리고 풍경 좋은 길을 따라 오정범이 산속에 만든 양계장으로 향했다.오정범도 경인 출신이었고 이승우와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오정범은 가정 환경은 평범했지만 성격이 좋아 여전히 이승우 무리와 잘 어울려 지냈다.부승희는 양계장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오정범네 농장을 둘러보다가 신선한 닭으로 튀긴 닭 다리를 건네받고 드디어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또한 오정범은 말을 참 재밌게 하는 편이었고 오정범이 입만 열면 부승희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그날 오후, 오정범이 떠나려는 두 사람에게 며칠 더 지내다가 가도 된다며 잡았다.부승희가 말했다.“저희 등산가기로 해서 이만 가볼게요.”“등산이요?”오정범이 바로 말을 붙였다.“설마 가백산 말하는 거예요?
“바람둥이는 언제가 되었든 또 떠날 사람이라고 했어.”부승희가 말을 이었다.“바람둥이가 왜 괜히 바람둥이겠어? 바람처럼 떠나고 사라지니 바람둥이라고 하는 거지.”“사람은 변해.”이승우의 말에 부승희가 대답했다.“그래도 타고난 본성 같은 건 있는 거잖아. 본성은 쉽게 안 바뀌어.”“네가 사람의 본성에 대해 뭘 그렇게 잘 안다고 그래? 인간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것에 동물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이승우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그러자 부승희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세상에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도 있잖아.”그리고 한 손가락으로 이승우의 턱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오빠는 어떤 사람인데?”“난 좋은 사람이지. 본인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부승희는 헛웃음을 내쉬었다.이게 최근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모습이었다. 연인이라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인이 아니라고 하기엔 모호했다.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그쪽으로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여진이랑 가깝게 지내지 마. 괜히 네가 옆에서 지내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내일엔 나랑 원주 다녀오자. 여기에서 키운 돼지도 그쪽에 배송해 주고.”“우리가 직접 돼지 배송도 해?”“할 일도 없는데 원주나 다녀오지 뭐.”“오빠 지금 여진 언니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여진이가 전주로 온 뒤로 계속 귀가 간지러운데 너라면 안 무섭겠어?”“귀 간지러우면 귀나 파.”“...”이승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그래. 내일 다녀오지 뭐. 마침 가백산 등산하고 싶었는데.”“볼일 마치면 같이 가자.”부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식사를 마치고 부승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그런데 선기현이 오빠한테 연락은 했어? 두 사람 정말 이혼한대? 여진 언니 엄청 힘들어 보이던데.”“그래도 소용없어. 이미 마음 떠난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이승우는 다 먹은 밥상을 치우기 시작했다.부승희는 소파에
배여진의 충고를 부승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이승우에 대해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배여진의 말이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배여진과 선기현이 결혼식에 부승희는 신부 들러리로 참석했고 배여진은 부승희더러 몇 년만 더 기다리면 이승우가 진심으로 다가올 거라며 충고해 줬었다.그런데 배여진은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바탕으로 말을 바꿔 새로운 충고를 하지 않는가?부승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언니 괜한 충고는 하지 말고 좀 더 생산적인 일이나 하세요.’날이 어두워지고 배여진은 자리를 비워 전화를 받았다. 돌아올 때는 눈가가 빨개진 걸 보아 선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라 추측이 되었다.부승희는 배여진을 호텔로 바래다주고 본인은 돼지 농장으로 돌아왔다.요즘 농장은 시설이 많이 바뀌어 이제 건물에서도 돼지를 키울 수 있었다. 부승희가 평소 지내는 곳이 바로 돼지 농장의 옆 건물이었다.부승희가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누군가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을 하는 게 보였다.그 인기척에 고개를 든 이승우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집이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나 보네?”부승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키를 찾으려 가방을 뒤적였다.“왜 왔어?”“왜라니.”이승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물건을 들어 보였다.“농장에 돼지 사료가 떨어졌다고 해서 가지고 온 거잖아.”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오빠나 챙겨 먹어. 난 됐어.”그리고 이승우의 다른 손에 들려 있는 도시락을 보며 질문을 이었다.“그건 뭔데?”이승우는 짐을 집안으로 옮기며 말했다.“흰죽.”부승희는 또 쯧 하고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아침에 막 도착한 간장게장이야. 며칠 전에 먹고 싶다고 했잖아.”이승우는 부승희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그 말에 부승희는 괜스레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았다.피곤해진 부승희는 크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까딱 움직이며 지시를 내렸다.“냉장고에 스팸 있으니 구워줘. 샤워만 하고 올 테니 같이 먹자.”이승우는 곧장 주방으로
배여진과 선기현은 결혼 4년 차였지만 결혼 생활에 금이 생겼다.선기현 쪽에서 남은 감정이 없다며 평화 이별을 요구했다.배여진은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의 옆을 지켜온 소꿉친구였고 가문끼리도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배여진은 선기현을 몰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짝사랑하다가 포기했고 부모님이 찾아준 남편감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나타난 선기현이 결혼을 뒤엎고 배여진을 설득해 결국 결혼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게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사랑을 했던 두 사람이었는데 남은 감정이 없다는 말 한마디에 이혼이라니, 이건 배여진더러 죽으라는 소리였다.부승희와 배여진은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 배여진이 전주로 찾아왔다는 소식에 부승희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배여진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이승우가 부승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부승희는 배여진과 또 몇 명의 부잣집 자녀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배여진은 여전히 기분이 저기압이었고 사람들은 배여진더러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며 다독였다.부승희는 말없이 배여진을 살폈다.“여보세요? 너 지금 어디야?”“나? 지금 보드게임 하고 있는데.”“너 왜 그렇게 안일해? 오늘 피키 아기 낳을 것 같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잖아.”부승희는 멜론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낳으면 낳는 거지. 피키 오빠가 키우고 있잖아. 이따가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잔소리하긴.’한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들은 피키, 그리고 아이를 낳는다는 소식에 말없이 귀를 쫑긋거렸다.배여진이 고개를 돌려 먼저 입을 열었다.“승우 오빠?”부승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너 지금 안 오면 후회할지도 몰라. 네가 내기에서 지게 내가 조작할 수도 있어.”부승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아 짜증 나.’부승희와 이승우는 전주에서 농장을 차린 지 벌써 6개월이 되었다. 최근 돼지 농장까지 확장했는데 부승희와 이승우는 각각 몇 마리를 배정해 누가 더 많이 아기 돼지를 받을 수 있는
정인 그룹.도시의 네온 불빛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무실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작게 숨을 헐떡였고 연정훈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양시연은 머릿속이 텅 비어졌고 고개를 들어 천장의 크리스털 전등을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감정에 양시연은 자신이 파도가 되어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연정훈은 멈추지 않고 양시연에게 다가갔고 양시연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그러다가 양시연을 제품에 기대게 한 연정훈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다정하게 닦아줬다.불빛이 어두운 사무실에서 양시연은 자신을 향한 연정훈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은 양시연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가 아직 수술 자국이 남아있는 배로 향했다.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그 흉터를 가렸고 목소리는 이미 낮게 잠겨 있었다.“보지 마요... 못생겼잖아요.”그러나 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잡고 손등에 짧게 키스하고 또 흉터에도 입맞춤했다.뜨거운 연정훈의 온도가 흉터에서 전해지고 그 온기는 빠르게 심장까지 타고 올라갔다.양시연은 길게 숨을 내쉬고 연정훈의 품에 안겨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아니. 전혀 못생기지 않았어.”연정훈은 이 흉터를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고 양시연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했다.양시연은 진심 어린 연정훈의 말을 들으며 연정훈의 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연정훈은 두 팔로 지탱한 채로 양시연의 귓가에 속삭였다.귓가에 뜨거운 숨이 전해지자 양시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연정훈이 움직이는 대로 다시 온몸을 맡겼다.사무실엔 달빛조차 비춰들지 않았다. 오직 침대 헤드 불빛 하나만 존재했는데 연정훈은 오직 자기 눈에만 이 광경을 담고 싶었다.양시연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양시연이 잠이 든 뒤로 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을 품에 안고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색색 숨소리를 내는 양시연은 잠결에도 미소를 지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 하얀 피부가 드러났으며 하얀 피부는 연정훈의 단단하고
금발이라는 말에 양시연은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나도 금발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경인으로 돌아가기 전에 정훈 씨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헤어 디자이너 쌤이 추천해 주는 금발로 한 거예요. 금발 하면 이목구비도 더 살고 카리스마도 넘칠 거라고 해서요.”“나한테 카리스마 넘치게 보이고 싶었어?”양시연은 앞장을 서서 걸었고 양손을 등 뒤로 모은 채로 말했다.“뭐 그런 것보다 절대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연정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시연은 정말 그렇게 해냈으니 말이다.그날 밤, 연정훈은 양시연의 변화에 깜짝 놀랐었다. 파격 변신한 외관과 한껏 여유로워진 모습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식에 더 놀랐었다.“그때 날 처음 보고 어떤 생각을 했어요?”양시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취재하듯 물었다.연정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사실 널 만나기 전에 승원이가 보내온 사진으로 확인했었어. 조금 놀라기도 했는데 솔직하게 말한다면 너무 예뻤어.”“정말요?”양시연이 고개를 쳐들고 연정훈을 바라봤다.“그런데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했던 거예요?”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시연의 손을 잡았다.“항상 날 버리고 떠나는 사람은 너였다고 생각하는데?”양시연은 입을 삐죽였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그럼 그 뒤로는 어떻게 생각했는데요?”연정훈은 대답이 없었고 양시연이 대신 기억을 불러왔다.“그날 정훈 씨 엄청 차가웠는데 혹시 날 보고 이가 부득부득 갈렸던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사실 차가운 척을 했던 거였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당장 양시연을 잡아 제 곁에 두고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토로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으니 말이다.연정훈은 입을 달싹이다 다시 양시연의 옆자리에 섰다. 그때 길 한복판에 즉석 복권 가게가 보였다.“즉석 복권 사줄까?”“네?”양시연은 연정훈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전에도 나한테 즉석 복권 사줬던 거 기억
이미 지난 지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아이까지 생겼는데 양시연은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다.그냥 오늘처럼 농담으로 꺼내는 경우는 있었다.두 사람은 한참 속닥거리며 대화를 주고받았고 이제 흥미를 잃은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와인잔을 내려두고 양시연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여기에도 사람이 꽤 많네요.”“다들 볼일이 있나 보지. 우린 숨만 돌리고 다시 올라가자.”양시연은 연정훈의 뒤를 따랐고 호기롭게 행사장을 나서는 연정훈을 보며 왠지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롭게 느껴졌다.“처음 만났을 땐 정훈 씨가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계속 무게만 잡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이 먹고 점점 더 유치해지는 것 같은데요.”연정훈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꽤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앞으로 나이에 관한 얘기는 하지 말자.”“뭐예요? 화났어요?”“그래.”양시연은 웃음이 터졌다.“언제 나이에 그렇게 신경을 썼다고 그래요?”연정훈은 몸을 벽에 기대며 말했다.“예쁜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면 그냥 넘어갈지 몰라도, 못생긴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면 완전 실례라는 거 알지?”양시연은 바로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이젠 나이 얘기하면 서운할 나이가 됐다는 말이네요.”양시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정훈 씨 생일 지나면 서른 네살이네요.”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연정훈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연정훈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양시연을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다.양시연은 꾹 참던 웃음이 터졌고 연정훈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남자는 마흔이 넘으면 성숙한 와인이라는데 정훈 씨는 아직 한창 청춘이니까 벌써 속상해하지 마요.”연정훈은 그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고 양시연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양시연은 자연스레 연정훈의 품에 안겼다.“그러면 머리가 다 헝클어진다고요.”“내가 다시 빗겨줄게.”“됐거든요. 저번에 립스틱 발라준다고 했다가 끊어졌잖아요.”양시연은 입을 삐죽였으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연정훈의 품에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