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의 끈이 툭 끊어지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7년간의 감정도 결국 강하윤의 애교 섞인 말 한마디를 이길 수 없었다.내 영혼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너무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눈을 떠보니 벌써 다음 날 아침이었고 심은혁은 역시나 돌아오지 않았다.배가 좀 고파서 내비게이션을 켜고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식당을 선택했다.배가 든든해야 마음도 단단히 먹지.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심은혁과 강하윤이 눈에 들어왔다.두 사람은 마치 사랑에 빠진 젊은 커플처럼 다정하게 붙어 있었다.나를 보자마자 심은혁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허민주, 날 미행한 거야? 너 같은 여자가 또 어디 있겠어!”어이없어 한숨이 나왔다. 그래, 나처럼 한심한 여자를 또 어디서 찾겠나.“아니야, 밥 먹으러 왔어.”진작 눈여겨보던 식당이라 심은혁과 여러 번 같이 가자고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가차 없이 내 말을 끊었다.“난 그런 음식 싫어.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그런데 지금은 강하윤과 이곳에 있다.두 사람은 초호화 커플 세트 메뉴를 주문했고 모든 게 짝으로 되어 있고 스테이크는 하트 모양으로 잘려져 있었다.강하윤은 미소를 지으며 심은혁을 향해 애교를 부렸다.“은혁아, 이 식당 괜찮네. 마음에 들어.”심은혁도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맘에 들면 다음에 또 같이 오자.”그 모습이 내 두 눈을 아프게 찔러 마음속 한구석이 잘려 나간 것 같았다.이때 레스토랑의 웨이터가 두 사람 쪽으로 걸어갔다.“안녕하세요, 저희 레스토랑에서 커플이 함께 사진을 찍으면 밖에 있는 관람차를 무료로 탈 수 있어요!”강하윤은 그 말에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우와, 은혁아. 관람차 타러 가자! 높은 곳에서 포옹하면 정말 로맨틱할 것 같아!”심은혁은 강하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그렇게 심은혁과 강하윤 두 사람은 관람차를 배경으로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고 심은혁은 사진을 매장 내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였다
피곤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아빠가 나를 보고 놀라며 물었다.“우리 딸, 여긴 왜 왔어?”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엄마는 빨갛게 부은 내 눈을 보고 이미 짐작한 것 같다.“민주야, 엄마한테 말해봐. 심은혁 그 자식이 널 괴롭혔지?”코끝이 찡하며 울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려고 애썼다.“엄마, 아빠, 심은혁이 바람을 피웠어요. 나 이혼하고 싶어요.”엄마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나를 품에 안아주면서 목이 메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민주야,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엄마는 네 편이야.”방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꺼냈는데 어쩌다 무음으로 설정해 놓은 걸 알았다.수십 개의 부재중 전화가 떴지만 무시하고 휴대폰을 옆에 두었다.그런데 잠시 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전화기 너머로 심은혁이 짜증스럽게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허민주, 어디 있어? 이혼이 장난이야? 1시간 줄 테니까 당장 돌아와! 아직 59분...”미친놈.그의 협박에 콧방귀를 뀌었다.“이혼 합의서 책상 위에 있으니까 사인해.”그렇게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방에서 나오니 엄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전복죽을 끓이고 있었다.배가 고팠던 나는 허겁지겁 큰 그릇을 비웠다.휴대폰이 쉴 새 없이 진동해서 확인해 보니 회사 단톡방에 수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여러 명의 직원이 나에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민주 씨, 대표님이 정말 잘해주네요. 우리한테 한 달 휴가까지 줬어요. 다들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르죠?][민주 씨, 가서 오로라 보면 사진 많이 찍어와요!]이상한 느낌에 회사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모두 한마음으로 같은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대표님 최고!][대표님 최고!][대표님 최고!]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비로소 깨달았다.모두 심은혁이 나와 함께 여행을 가려고 전 직원에게 한 달 휴가를 준 줄 아는데 사실은 강하윤을 데리고 오로라를 보러 가려는 거다.심은혁 미친놈!나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당신 미쳤어?
멍하니 한참 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엄마가 조용히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민주야, 최 씨 아줌마 아들 서준이가 이틀 전에 귀국해서 같이 밥 한번 먹자네.”말을 마친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이런 식으로 나에게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 주려는 걸 잘 알았다.하지만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내가 이런 방식을 거부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나는 별다른 기색 없이 미소를 지었다.“좋아요.”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일 수도 있었다. 이 나이에 부모님을 걱정시키다니.문제는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엉망이라는 거다.처음엔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어쩌면 수준 맞는 사람끼리 하는 사랑이 더 오래갈 수도 있었다.엄마는 내가 거절하지 않자 잔뜩 들떠서 두 손을 맞댔다.“그래그래, 잘됐네.”나는 아빠를 올려다보았다.“아빠, 저한테 돈 좀 주실 수 있어요? 회사 하나 차리고 싶어요.”아빠는 말없이 내 카드로 4억을 보냈다. 이 정도 돈이면 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심은혁이 나에게 회사 경영권을 돌려주지 않겠다면 나 홀로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다.부모님도 내가 정신을 차리는 모습에 기뻐했다.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순조롭게 새 회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한 달 만에 장소를 선정하고 인테리어 계획을 마무리하며 선금을 지불했다.혼자서 다 하려니 힘들긴 해도 보람찼다.모든 게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새 회사 인테리어가 거의 완성되어 가구 시장에 가서 테이블과 의자를 골랐다.주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입구에서 심은혁과 마주쳤다.놀랍게도 그의 수염은 덥수룩하고 셔츠는 구겨져 있었으며 검은 구두는 회색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과거 정갈하던 모습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나를 보자마자 심은혁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민주야, 집 나가고 내 번호까지 차단했더라.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여기 있다고 해서 왔어.”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는 내 눈동자에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또다시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과거 어느 날 심은혁이 갈비를 먹고 싶다고 해서 땡볕을 무릅쓰고 갈비를 사서 새콤달콤한 갈비찜을 만들어 회사로 보냈다.심은혁이 내가 만든 요리를 맛볼 생각에 잔뜩 들떴는데 강하윤은 자기 반려견이 갈비를 먹고 있는 사진까지 보냈다.[민주 씨, 밤비가 너무 짜게 먹는 걸 싫어하니까 다음엔 소금을 적게 넣어줘요.]생각을 갈무리하고 다시 눈앞에 초라한 남자를 보니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강하윤을 소유한 쾌감을 느끼고 그녀의 애교에 잔뜩 취해 있으면서 자기 부름에 순순히 응하는 내 다정함과 부드러움을 원하다니.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나.나는 피식 웃고는 언성을 높였다.“심은혁, 당신 참 뻔뻔해. 강하윤이랑 둘이 결혼식장에서 열정적으로 키스할 땐 내 감정이 어떨지 생각해 봤어? 같이 관람차 탔을 땐 왜 걔가 애 같다고 말하지 않았어? 왜, 누릴 거 다 누리고 나니까 다시 내가 잘해주던 게 그리워? 나랑 이혼만 해주면 난 당신이 몇 명의 여자랑 놀아나든 상관없어.”내 말이 허를 찔렀는지 그가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주변 사람들도 서서히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았다.구경꾼들이 많아지자 표정이 굳어진 심은혁은 체면을 잃었다는 생각에 발끈했다.“허민주, 너 진짜 가식적이구나. 일부러 밀어내는 척하면서 속으로 좋아하는 거 다 알아. 주제넘게 굴지 마! 나에 대한 마음이 없다면서 왜 우리 결혼반지는 계속 끼고 있어?”내 손에 있는 결혼반지를 흘끗 보았다. 5년 동안 꼈으니 이젠 작별을 고할 떄가 되었다.“미안, 빼는 걸 깜박했네.”말을 마친 뒤 바로 약지에서 반지를 빼서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쓸모없는 건 쓰레기지.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고.”심은혁은 얼굴이 빨개지며 이를 악물었다.“허민주, 선 넘지 마. 7년 동안의 감정을 네가 그렇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어? 네가 날 쫓아다닌 거 전교생이 다 알아. 나랑 결혼한 게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며? 영원히 나랑 헤어지지 않겠다고 말했던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하윤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이혼으로 협박한다고 은혁이 마음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 마요.][은혁이가 사랑하는 건 나고 은혁이 회사, 돈, 집도 전부 내 거예요.][난 곧 사모님이 될 거예요.]묵묵히 답장을 보냈다.[현실은 한낱 내연녀일 뿐인데.][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녀죠.]저 멍청한 여자는 집이 내 명의로 되어있는 건 알까.참, 회사도 원래 있던 곳에 능력 좋고 믿을만한 인재들을 골라 따로 단톡방을 만들었다.그들에게 새로운 회사를 설립할 건데 괜찮다면 새 회사로 입사해도 좋다고 했다.연봉은 이전과 동일하고 보너스는 더 많으면 많았지 줄지는 않는다고 했다.직원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동의했다.[민주 씨, 대표님이 데려온 여자가 매일 회사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요.][자기가 사모님인 줄 안다니까요. 예전에 민주 씨랑 사이좋았던 직원들은 전부 해고해서 오래된 직원들 속이 말이 아니에요.][민주 씨, 걱정 마요. 민주 씨 말이면 우리는 바로 따라갈 테니까요.]그들의 말에 마음은 다시 한결 가벼워졌다.쓰레기 같은 남자를 버리니 모든 게 좋아졌다.한 달 후, 새로운 회사가 멋지게 문을 열었고 기존 회사의 직원 절반이 모두 나를 선택했다.그래서 특별히 개업식까지 열었다.고개를 들어보니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임서준이 보였다.행사에 꽃부터 좌석 배치, 음식과 음료까지 모두 임서준이 직접 준비하느라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재벌가 아들이 아니라서 나도 그를 좋게 보기 시작했다.모두 잔을 들고 나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민주 씨, 축하해요!”이때 갑자기 호텔 문이 열리더니 심은혁이 새빨간 눈으로 걸어 들어왔다.“허민주, 원하는 걸 이뤘네. 날 너한테 굴복시키는 게 네 목적 아니었어? 그렇다면 네가 이겼어.”나는 덤덤하게 그를 바라보았다.“미친 소리 마, 우린 이미 이혼했어.”심은혁이 성큼 다가왔다.“나 아직 이혼 서류에 사인 안 했어. 우린 아직 부부야. 예전에 널
이 말을 듣고도 내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사랑이 없으니 사람이 잔인하고 매정해진다.“심은혁, 그날 내가 얼마나 전화했는데 네가 다 끊어버렸잖아. 그때 넌 뭐 하고 있었어? 아, 강하윤이랑 열정적으로 키스하느라 바쁘지 않았어?”옆에 있던 강하윤이 불쌍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와인을 들고 다가왔다.“민주 씨, 그때 그렇게 다급한 상황인 줄 몰랐어요. 은혁이 용서해 주면 안 돼요? 은혁이랑 이혼하고 바로 다른 사람 찾았잖아요. 은혁이 마음속엔 민주 씨밖에 없어요. 술 한잔 건배하고 예전 일은 다 잊는 게 어때요?”모두의 기대 속에 나는 그녀의 손에서 와인 잔을 받아 들었다.그러고는 그녀의 머리에 들이부었다.순식간에 강하윤의 머리에서 붉은 와인이 흘러내려 화장을 더럽혔고 온몸이 엉망진창이 되었다.강하윤은 당황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울면서 심은혁에게 달려갔다.“은혁아, 저 빌어먹을 여자가 나한테 이랬어. 네가 꼭 복수해 줘.”하지만 강하윤이 아무리 울부짖어도 심은혁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토록 다정하고 아끼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의 눈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민주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약속할게, 이제부터는 너만 사랑할게. 우리 다시 함께하자, 응? 관람차도 타고, 아이슬란드에 가서 오로라도 보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말만 하면 데려다 줄...”임서준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심은혁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민주한테 그렇게 상처를 줘놓고 어디 뻔뻔하게 그런 말을 해? 앞으로 민주가 가고 싶은 데는 나랑 함께 갈 거야. 넌 여기서 당장 꺼져!”심은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임서준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민주야. 내가 자존심도 다 버렸는데 기회조차 주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너만 사랑할게...”그의 헛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막았다.임서준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고는 바로 호텔 밖으로 나를
유산으로 인해 아직 통증이 남아있는 배를 어루만졌다.‘미안해, 아가. 잘못된 타이밍에 너를 이 세상에 오게 해서.’몸과 마음의 고통을 견디며 강하윤이 올린 영상을 다시 보러 갔다.영상 속 강하윤의 얼굴은 복숭앗빛으로 붉었고, 눈빛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영상 아래에는 이미 수많은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내가 현장에 있었어. 심은혁과 강하윤이 프렌치 키스를 했다고!][세상에, 심은혁 대단하다. 저 기술이면 어떤 여자가 안 넘어가겠어. 하윤이 얼굴까지 빨개졌네.][역시 아내보다 밖에 있는 여자가 낫지.]1분 뒤 심은혁과 강하윤은 마지못해 떨어졌고 영상은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친구들의 부추김에 강하윤은 몇 개의 댓글만 골라 답글을 달았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랑 은혁이는 아무 사이 아니고 우린 친구야, 좋은 친구!][너희들 계속 그런 말 하면 뚱녀 씨가 화낼 거야!]그녀가 말하는 뚱녀 씨는 바로 나였다.어릴 때 병에 걸려서 호르몬제를 먹고 60㎏까지 살이 쪘는데 지금은 45㎏을 유지하고 있었고 심지어 강하윤보다 말랐다.그런데도 심은혁이 옆에 있으면 강하윤은 여전히 날 뚱녀 씨라고 불렀다.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는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었다.어쩐지 심은혁이 몇 년 동안 연락이 없던 동창의 결혼식에 참석하더라니.수억짜리 계약까지 미루고 신랑 들러리를 서러 갔다.처음에는 우정이 돈독한 줄 알았는데 첫사랑 강하윤이 신부 들러리였기 때문이었다.제일 멍청한 건 나였다.이제 이 관계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저녁이 되어서야 심은혁은 술에 흠뻑 취해 돌아왔고 흰 셔츠에 남은 빨간 립스틱 자국 몇 개가 눈에 거슬렸다.그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지만 나는 침대에 누워 가만히 있었다.심은혁은 내 품에 머리를 파묻고 달래듯 사과했다.“여보, 오늘 하윤이랑 게임을 한 것뿐이야. 내가 신랑 들러리이고 하윤이는 신부 들러리라 어쩔 수 없었어.”어쩔 수 없었다고?열렬히 키스하는 심은혁의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희열과 뿌듯함이
이 말을 듣고도 내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사랑이 없으니 사람이 잔인하고 매정해진다.“심은혁, 그날 내가 얼마나 전화했는데 네가 다 끊어버렸잖아. 그때 넌 뭐 하고 있었어? 아, 강하윤이랑 열정적으로 키스하느라 바쁘지 않았어?”옆에 있던 강하윤이 불쌍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와인을 들고 다가왔다.“민주 씨, 그때 그렇게 다급한 상황인 줄 몰랐어요. 은혁이 용서해 주면 안 돼요? 은혁이랑 이혼하고 바로 다른 사람 찾았잖아요. 은혁이 마음속엔 민주 씨밖에 없어요. 술 한잔 건배하고 예전 일은 다 잊는 게 어때요?”모두의 기대 속에 나는 그녀의 손에서 와인 잔을 받아 들었다.그러고는 그녀의 머리에 들이부었다.순식간에 강하윤의 머리에서 붉은 와인이 흘러내려 화장을 더럽혔고 온몸이 엉망진창이 되었다.강하윤은 당황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울면서 심은혁에게 달려갔다.“은혁아, 저 빌어먹을 여자가 나한테 이랬어. 네가 꼭 복수해 줘.”하지만 강하윤이 아무리 울부짖어도 심은혁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토록 다정하고 아끼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의 눈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민주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약속할게, 이제부터는 너만 사랑할게. 우리 다시 함께하자, 응? 관람차도 타고, 아이슬란드에 가서 오로라도 보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말만 하면 데려다 줄...”임서준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심은혁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민주한테 그렇게 상처를 줘놓고 어디 뻔뻔하게 그런 말을 해? 앞으로 민주가 가고 싶은 데는 나랑 함께 갈 거야. 넌 여기서 당장 꺼져!”심은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임서준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민주야. 내가 자존심도 다 버렸는데 기회조차 주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너만 사랑할게...”그의 헛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막았다.임서준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고는 바로 호텔 밖으로 나를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하윤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이혼으로 협박한다고 은혁이 마음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 마요.][은혁이가 사랑하는 건 나고 은혁이 회사, 돈, 집도 전부 내 거예요.][난 곧 사모님이 될 거예요.]묵묵히 답장을 보냈다.[현실은 한낱 내연녀일 뿐인데.][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녀죠.]저 멍청한 여자는 집이 내 명의로 되어있는 건 알까.참, 회사도 원래 있던 곳에 능력 좋고 믿을만한 인재들을 골라 따로 단톡방을 만들었다.그들에게 새로운 회사를 설립할 건데 괜찮다면 새 회사로 입사해도 좋다고 했다.연봉은 이전과 동일하고 보너스는 더 많으면 많았지 줄지는 않는다고 했다.직원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동의했다.[민주 씨, 대표님이 데려온 여자가 매일 회사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요.][자기가 사모님인 줄 안다니까요. 예전에 민주 씨랑 사이좋았던 직원들은 전부 해고해서 오래된 직원들 속이 말이 아니에요.][민주 씨, 걱정 마요. 민주 씨 말이면 우리는 바로 따라갈 테니까요.]그들의 말에 마음은 다시 한결 가벼워졌다.쓰레기 같은 남자를 버리니 모든 게 좋아졌다.한 달 후, 새로운 회사가 멋지게 문을 열었고 기존 회사의 직원 절반이 모두 나를 선택했다.그래서 특별히 개업식까지 열었다.고개를 들어보니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임서준이 보였다.행사에 꽃부터 좌석 배치, 음식과 음료까지 모두 임서준이 직접 준비하느라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재벌가 아들이 아니라서 나도 그를 좋게 보기 시작했다.모두 잔을 들고 나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민주 씨, 축하해요!”이때 갑자기 호텔 문이 열리더니 심은혁이 새빨간 눈으로 걸어 들어왔다.“허민주, 원하는 걸 이뤘네. 날 너한테 굴복시키는 게 네 목적 아니었어? 그렇다면 네가 이겼어.”나는 덤덤하게 그를 바라보았다.“미친 소리 마, 우린 이미 이혼했어.”심은혁이 성큼 다가왔다.“나 아직 이혼 서류에 사인 안 했어. 우린 아직 부부야. 예전에 널
이 말을 듣고 또다시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과거 어느 날 심은혁이 갈비를 먹고 싶다고 해서 땡볕을 무릅쓰고 갈비를 사서 새콤달콤한 갈비찜을 만들어 회사로 보냈다.심은혁이 내가 만든 요리를 맛볼 생각에 잔뜩 들떴는데 강하윤은 자기 반려견이 갈비를 먹고 있는 사진까지 보냈다.[민주 씨, 밤비가 너무 짜게 먹는 걸 싫어하니까 다음엔 소금을 적게 넣어줘요.]생각을 갈무리하고 다시 눈앞에 초라한 남자를 보니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강하윤을 소유한 쾌감을 느끼고 그녀의 애교에 잔뜩 취해 있으면서 자기 부름에 순순히 응하는 내 다정함과 부드러움을 원하다니.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나.나는 피식 웃고는 언성을 높였다.“심은혁, 당신 참 뻔뻔해. 강하윤이랑 둘이 결혼식장에서 열정적으로 키스할 땐 내 감정이 어떨지 생각해 봤어? 같이 관람차 탔을 땐 왜 걔가 애 같다고 말하지 않았어? 왜, 누릴 거 다 누리고 나니까 다시 내가 잘해주던 게 그리워? 나랑 이혼만 해주면 난 당신이 몇 명의 여자랑 놀아나든 상관없어.”내 말이 허를 찔렀는지 그가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주변 사람들도 서서히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았다.구경꾼들이 많아지자 표정이 굳어진 심은혁은 체면을 잃었다는 생각에 발끈했다.“허민주, 너 진짜 가식적이구나. 일부러 밀어내는 척하면서 속으로 좋아하는 거 다 알아. 주제넘게 굴지 마! 나에 대한 마음이 없다면서 왜 우리 결혼반지는 계속 끼고 있어?”내 손에 있는 결혼반지를 흘끗 보았다. 5년 동안 꼈으니 이젠 작별을 고할 떄가 되었다.“미안, 빼는 걸 깜박했네.”말을 마친 뒤 바로 약지에서 반지를 빼서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쓸모없는 건 쓰레기지.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고.”심은혁은 얼굴이 빨개지며 이를 악물었다.“허민주, 선 넘지 마. 7년 동안의 감정을 네가 그렇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어? 네가 날 쫓아다닌 거 전교생이 다 알아. 나랑 결혼한 게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며? 영원히 나랑 헤어지지 않겠다고 말했던
멍하니 한참 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엄마가 조용히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민주야, 최 씨 아줌마 아들 서준이가 이틀 전에 귀국해서 같이 밥 한번 먹자네.”말을 마친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이런 식으로 나에게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 주려는 걸 잘 알았다.하지만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내가 이런 방식을 거부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나는 별다른 기색 없이 미소를 지었다.“좋아요.”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일 수도 있었다. 이 나이에 부모님을 걱정시키다니.문제는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엉망이라는 거다.처음엔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어쩌면 수준 맞는 사람끼리 하는 사랑이 더 오래갈 수도 있었다.엄마는 내가 거절하지 않자 잔뜩 들떠서 두 손을 맞댔다.“그래그래, 잘됐네.”나는 아빠를 올려다보았다.“아빠, 저한테 돈 좀 주실 수 있어요? 회사 하나 차리고 싶어요.”아빠는 말없이 내 카드로 4억을 보냈다. 이 정도 돈이면 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심은혁이 나에게 회사 경영권을 돌려주지 않겠다면 나 홀로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다.부모님도 내가 정신을 차리는 모습에 기뻐했다.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순조롭게 새 회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한 달 만에 장소를 선정하고 인테리어 계획을 마무리하며 선금을 지불했다.혼자서 다 하려니 힘들긴 해도 보람찼다.모든 게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새 회사 인테리어가 거의 완성되어 가구 시장에 가서 테이블과 의자를 골랐다.주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입구에서 심은혁과 마주쳤다.놀랍게도 그의 수염은 덥수룩하고 셔츠는 구겨져 있었으며 검은 구두는 회색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과거 정갈하던 모습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나를 보자마자 심은혁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민주야, 집 나가고 내 번호까지 차단했더라.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여기 있다고 해서 왔어.”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는 내 눈동자에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아빠가 나를 보고 놀라며 물었다.“우리 딸, 여긴 왜 왔어?”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엄마는 빨갛게 부은 내 눈을 보고 이미 짐작한 것 같다.“민주야, 엄마한테 말해봐. 심은혁 그 자식이 널 괴롭혔지?”코끝이 찡하며 울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려고 애썼다.“엄마, 아빠, 심은혁이 바람을 피웠어요. 나 이혼하고 싶어요.”엄마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나를 품에 안아주면서 목이 메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민주야,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엄마는 네 편이야.”방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꺼냈는데 어쩌다 무음으로 설정해 놓은 걸 알았다.수십 개의 부재중 전화가 떴지만 무시하고 휴대폰을 옆에 두었다.그런데 잠시 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전화기 너머로 심은혁이 짜증스럽게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허민주, 어디 있어? 이혼이 장난이야? 1시간 줄 테니까 당장 돌아와! 아직 59분...”미친놈.그의 협박에 콧방귀를 뀌었다.“이혼 합의서 책상 위에 있으니까 사인해.”그렇게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방에서 나오니 엄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전복죽을 끓이고 있었다.배가 고팠던 나는 허겁지겁 큰 그릇을 비웠다.휴대폰이 쉴 새 없이 진동해서 확인해 보니 회사 단톡방에 수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여러 명의 직원이 나에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민주 씨, 대표님이 정말 잘해주네요. 우리한테 한 달 휴가까지 줬어요. 다들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르죠?][민주 씨, 가서 오로라 보면 사진 많이 찍어와요!]이상한 느낌에 회사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모두 한마음으로 같은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대표님 최고!][대표님 최고!][대표님 최고!]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비로소 깨달았다.모두 심은혁이 나와 함께 여행을 가려고 전 직원에게 한 달 휴가를 준 줄 아는데 사실은 강하윤을 데리고 오로라를 보러 가려는 거다.심은혁 미친놈!나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당신 미쳤어?
머릿속의 끈이 툭 끊어지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7년간의 감정도 결국 강하윤의 애교 섞인 말 한마디를 이길 수 없었다.내 영혼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너무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눈을 떠보니 벌써 다음 날 아침이었고 심은혁은 역시나 돌아오지 않았다.배가 좀 고파서 내비게이션을 켜고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식당을 선택했다.배가 든든해야 마음도 단단히 먹지.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심은혁과 강하윤이 눈에 들어왔다.두 사람은 마치 사랑에 빠진 젊은 커플처럼 다정하게 붙어 있었다.나를 보자마자 심은혁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허민주, 날 미행한 거야? 너 같은 여자가 또 어디 있겠어!”어이없어 한숨이 나왔다. 그래, 나처럼 한심한 여자를 또 어디서 찾겠나.“아니야, 밥 먹으러 왔어.”진작 눈여겨보던 식당이라 심은혁과 여러 번 같이 가자고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가차 없이 내 말을 끊었다.“난 그런 음식 싫어.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그런데 지금은 강하윤과 이곳에 있다.두 사람은 초호화 커플 세트 메뉴를 주문했고 모든 게 짝으로 되어 있고 스테이크는 하트 모양으로 잘려져 있었다.강하윤은 미소를 지으며 심은혁을 향해 애교를 부렸다.“은혁아, 이 식당 괜찮네. 마음에 들어.”심은혁도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맘에 들면 다음에 또 같이 오자.”그 모습이 내 두 눈을 아프게 찔러 마음속 한구석이 잘려 나간 것 같았다.이때 레스토랑의 웨이터가 두 사람 쪽으로 걸어갔다.“안녕하세요, 저희 레스토랑에서 커플이 함께 사진을 찍으면 밖에 있는 관람차를 무료로 탈 수 있어요!”강하윤은 그 말에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우와, 은혁아. 관람차 타러 가자! 높은 곳에서 포옹하면 정말 로맨틱할 것 같아!”심은혁은 강하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그렇게 심은혁과 강하윤 두 사람은 관람차를 배경으로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고 심은혁은 사진을 매장 내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였다
그랬다. 심은혁과 나는 연애 7년, 결혼 5년째다.내가 심은혁을 쫓아다닌 건 전교생이 다 아는 사실이었고 역시나 바람대로 그와 결혼했다.결혼 후에는 부모님이 넘겨준 별장에서 살았고 난 모든 재산을 털어 심은혁에게 회사를 차려주었다.그리고 아버지가 가진 자원을 활용해 연간 수십억을 벌어들이는 회사로 성장시켰다.5년 만에 심은혁은 단숨에 잘나가는 대표님이 되었고 결혼식 날, 그는 사람들 앞에서 맹세했다.“여보, 앞으로 평생 잘해주고 평생 당신만 사랑할 것을 맹세해.”그땐 행복에 푹 빠져서 기꺼이 뒤로 물러나 심은혁에게 회사의 경영권을 통째로 넘겨주었다.순식간에 부자가 된 심은혁은 곧바로 소꿉친구인 강하윤을 자기 비서로 데려왔다.예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나는 노발대발했고 심은혁은 고고한 척 내가 속이 좁고 생각이 편협하다며 질책하기 바빴을 거다.하지만 그는 내가 회사 클라이언트와 술을 마시다가 출혈 때문에 병원에 실려 간 뒤에야 임신했고 유산까지 하게 됐다는 걸 모른다.심은혁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그가 전부 끊어버렸다.알고 보니 당시 심은혁은 강하윤과 격렬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갑자기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심은혁의 공격적인 표정을 보며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밖에는 천둥소리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내 기분만큼이나 우울한 날씨다.“심은혁, 우리 이혼해. 집이랑 차는 내 소유니까 회사 주식을 반씩 나누면 되겠네.”이 말을 들은 심은혁의 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허민주, 너 미쳤어? 난 그냥 키스 한번 한 건데 이혼하자고? 네가 이렇게 속 좁은 여자인 줄은 몰랐네!”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심은혁의 휴대폰이 때마침 울렸다.전화기 너머에서 청아하고 사랑스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혁아, 번개 때문에 너무 무서워. 나 혼자 집에 있는데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심은혁은 그 말을 듣고 부드럽게 위로했다.“그래,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부드러운 말투다.전화를 끊은
유산으로 인해 아직 통증이 남아있는 배를 어루만졌다.‘미안해, 아가. 잘못된 타이밍에 너를 이 세상에 오게 해서.’몸과 마음의 고통을 견디며 강하윤이 올린 영상을 다시 보러 갔다.영상 속 강하윤의 얼굴은 복숭앗빛으로 붉었고, 눈빛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영상 아래에는 이미 수많은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내가 현장에 있었어. 심은혁과 강하윤이 프렌치 키스를 했다고!][세상에, 심은혁 대단하다. 저 기술이면 어떤 여자가 안 넘어가겠어. 하윤이 얼굴까지 빨개졌네.][역시 아내보다 밖에 있는 여자가 낫지.]1분 뒤 심은혁과 강하윤은 마지못해 떨어졌고 영상은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친구들의 부추김에 강하윤은 몇 개의 댓글만 골라 답글을 달았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랑 은혁이는 아무 사이 아니고 우린 친구야, 좋은 친구!][너희들 계속 그런 말 하면 뚱녀 씨가 화낼 거야!]그녀가 말하는 뚱녀 씨는 바로 나였다.어릴 때 병에 걸려서 호르몬제를 먹고 60㎏까지 살이 쪘는데 지금은 45㎏을 유지하고 있었고 심지어 강하윤보다 말랐다.그런데도 심은혁이 옆에 있으면 강하윤은 여전히 날 뚱녀 씨라고 불렀다.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는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었다.어쩐지 심은혁이 몇 년 동안 연락이 없던 동창의 결혼식에 참석하더라니.수억짜리 계약까지 미루고 신랑 들러리를 서러 갔다.처음에는 우정이 돈독한 줄 알았는데 첫사랑 강하윤이 신부 들러리였기 때문이었다.제일 멍청한 건 나였다.이제 이 관계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저녁이 되어서야 심은혁은 술에 흠뻑 취해 돌아왔고 흰 셔츠에 남은 빨간 립스틱 자국 몇 개가 눈에 거슬렸다.그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지만 나는 침대에 누워 가만히 있었다.심은혁은 내 품에 머리를 파묻고 달래듯 사과했다.“여보, 오늘 하윤이랑 게임을 한 것뿐이야. 내가 신랑 들러리이고 하윤이는 신부 들러리라 어쩔 수 없었어.”어쩔 수 없었다고?열렬히 키스하는 심은혁의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희열과 뿌듯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