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던 이연석은 손을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얼굴이 굳어졌다. 가까스로 가라앉은 분노가 다시 걷잡을 수 없이 하늘을 찔렀다. 심형진과 헤어지라고 했는데 헤어지기는커녕 이리 떡하니 손을 잡고 그 앞에 나타나다니. 참 대단한 여자다. 심형진은 사람들 속에서 구석진 소파에 앉아 희미한 불빛에 가려져 있는 이연석을 정확히 찾아냈다.“이연석 씨.”그는 그녀를 끌고 가까이 다가가 이연석의 앞에 우뚝 섰다. 이연석의 신분과 배경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했고 옆에 있는 명문 가문의 도련님들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시는 내 여자 친구 귀찮게 하지 말아요. 그렇지 않으면...”“그렇지 않으면요?”심형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연석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파 위의 남자는 턱을 치켜든 채 하찮은 표정으로 심형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그쪽 집안 세력으로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면 날 감옥에 가두어 두기라도 할 건가?”심형진은 말문이 막혔다. 맞는 말이었다. 이씨 가문의 사람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집안 배경이 당신보다 못한 거 맞아요. 하지만 모든 일은 이치를 따져야 하는 거예요.”“가혜가 내 여자 친구인 걸 뻔히 알면서도 가혜한테 이러는 건 경우가 아니죠.”“기본 예의도 없는 사람이 집안 배경이 좋으면 뭐 합니까?” “부도덕하고 교양도 없는 사람이...”거침없이 질책을 쏟아내는 심형진을 보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누구야? 간도 크네. 감히 이연석한테 교양이 없다고 하다니.”“글쎄. 대단한 용기야. 이연석을 저렇게 꾸짖는 걸 보면. 감탄스러워.”“감탄은 무슨. 죽고 싶어 환장한 거겠지. 연석아, 가만히 내버려둘 거야? 혼내줘야지.”한편, 단이수는 아무 말도 없이 옆에 있는 이연석을 흘겨보았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술잔을 잡은 손까지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단이수는 깊은 한숨을
주먹을 내리치려고 하는데 달려드는 정가혜를 보고 이연석은 주먹을 거두었다.이미 눈을 감고 얻어맞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살짝 당황했다.이연석이 주먹을 거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심형진의 얼굴만 내려다보았다. “선배, 괜찮아요?”그녀가 달려들 때 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괜찮아.”정가혜가 달려들어 자신을 감싸줄 줄은 몰랐다. 그녀를 위해 나선 일이 결코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많이 다쳤지만 의식은 잃지 않는 그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이연석을 돌아보았다. “이연석 씨, 날 괴롭힌 것도 모자라 지금 내 남자 친구까지 때린 거예요?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경찰서에서 봐요.”말을 마친 그녀는 심형진의 몸 위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밀쳐내고 심형진을 부축해서 VIP룸을 빠져나갔다. 해프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두 사람이 떠난 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잇달아 이연석을 부축했다.“일어나.”그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빨개진 두 눈으로 두 사람이 떠난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정가혜, 심형진과 헤어질 거라고 약속했잖아. 왜 그 약속 안 지키는 건데?정말 심형진을 좋아하게 된 거야?정말 그런 거라면 그럼 난? 난 어떡하라고...항상 체면을 중시하던 이연석은 친구들 앞에서 이런 낭패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근데 정가혜라는 여자 때문에 지금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바람이 빠진 공처럼 멍하니 앉아 있다. 누구를 닮은 건지? 생각해 보니 딱 예전 그의 모습이었다. 소중히 여기라고 했건만. 여자랑 다투지 말라고 했건만. 그렇게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쌤통이다. 단이수는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을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이쯤에서 하고 다들 그만 돌아가. 여기는 나한테 맡겨.”사람들은 이연석을 비웃지 않았고 그저 단이수에게 잘 타이르라고 당부한 뒤 자리를 떴다. VI
정가혜는 심형진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경찰에 신고했다.그 때문에 부산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연석은 경찰에 붙잡혀갔다.부산 경찰이 집안에 알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었던 그는 처음으로 순순히 경찰차에 올라탔다.경찰서에 들어서니 정가혜가 얼음주머니를 들고 심형진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 난 그는 콧방귀를 뀌며 머리를 한쪽으로 돌렸고 경찰은 그를 끌고 취조실로 향했다.왜 사람을 때렸냐고 한참이나 추궁했지만 그는 단이수 변호사만 불러달라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한밤중에 경찰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단이수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슬리퍼만 신은 채 경찰서로 달려왔다. 한참 동안 경찰 쪽과 얘기를 나눈 끝에 사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경찰은 마지막으로 충고 한마디 했다.“나중에 정가혜 씨가 이연석 씨를 성추행으로 고소한다면 법정에 서야 할 겁니다.”변호사인 단이수는 당연히 그 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경찰을 향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태도가 좋고 이연석도 모처럼 생떼를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은 사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취조실에 들어온 단이수는 이연석한테 밖에 있는 두 사람에게 사과를 하라고 했다.그들한테 사과라니? 그 순간, 이연석은 벌컥 화를 냈다.“나한테 지금 사과하라고 한 거야? 차라리 그냥 구속하라고 그래.”화가 치밀어오른 단이수는 눈을 희번덕거렸다.“사과 안 해? 그럼 너희 둘째 형이나 큰누나한테 연락할 거야.”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등을 돌렸다.“전화해. 형이랑 누나가 온다고 해도 절대 사과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심형진이 먼저 제 발로 찾아온 것이었고 정가혜가 그의 화를 돋운 것이었다. 근데 그가 왜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부산에서 이씨 가문의 명성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참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벌써 이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감히 날 괴롭혀?고집이 센 그가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를 않자 단이수도 그만 포기하고 혼자 밖으로 나와 정가혜와 심
“가혜 씨, 심형진 씨.”단이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가볍게 인사한 뒤 바로 용건부터 말했다.“이연석 쪽의 변호사입니다. 사적으로 이 일을 해결했으면 하는데요.”변호사라는 말에 정가혜와 심형진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우리는 합의를 볼 생각이 없습니다.”고의적 상해 혐의와 성추행으로 계속해서 그를 고소할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을 수없이 많이 겪어본 단이수는 별 반응 없이 두 사람을 향해 미소만 지었다.“당신들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심형진 씨가 먼저 도발한 거 아닌가요? 그래서 연석이가 충동적으로 반격한 거고요.”“내 여자 친구를 먼저 괴롭힌 건 그쪽입니다. 난 단지 그를 찾아가 몇 마디 경고했을 뿐이고요. 그쪽이 뭔데 날 때려요?”흥분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심형진을 보고 단이수가 그의 어깨를 누르며 그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흥분하지 말고 합의 조건부터 들어보시죠.”두 사람이 듣고 싶든 말든 단이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의자를 끌어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심형진 씨, 검사 보고서를 보니까 가벼운 상처일 뿐이던데요. 고소하기는 어려울 겁니다.”“이렇게 하죠. 병원비는 우리 쪽에서 전부 부담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피해보상으로 2천만 원 드리죠.”“그리고 연석이가 가혜 씨한테 무례하게 군 건 두 사람 사이를 오해하고 잠시 격분해서 이성을 잃었던 것뿐입니다.”“연석이를 대신해 가혜 씨한테 보상으로 1억 원을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어떠합니까?”그가 제시한 조건을 정가혜의 전남편 강은우라면 당연히 동의했겠지만 지금 그녀의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은 심형진이었다. “돈 따위 필요 없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생각 하지 말아요. 반드시 고소할 거니까 법원 소환장이나 기다리라고 하세요.”협상이 결렬되자 단이수는 천천히 위선의 웃음을 거두었다. “당신 얼굴에 난 그 상처로 연석이를 감옥에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이 사람은 안 되지만 난 할 수 있어요.”“정가혜 씨.”그가 그녀의 말을
단이수가 떠난 뒤 심형진은 정가혜의 손을 꼭 잡았다.“정가혜, 저 사람 말 마음에 두지 마. 너한테 겁주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니까.”그녀는 애써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이 자신 때문에 다칠까 봐 그게 제일 걱정되었다. 한편, 이연석은 단이수의 도움으로 이내 경찰서를 빠져나갔고 정가혜와 심형진은 경찰서 앞에 앉아 콜택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의 처지가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라니.호텔로 돌아온 그녀는 심형진에게 약을 한 번 더 발라주고 나서야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웠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멍하니 이불을 쳐다보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서유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모처럼 한가롭게 신혼여행을 즐기는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전화를 걸지 못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심형진을 찾아갔다.심형진은 한창 변호사와 통화 중이었다. 그녀는 그가 통화를 마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갔다.“선배, 변호사는 구했어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한테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했다.“변호사가 그러는데 단이수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최고의 변호사래. 재판에서 승소율이 거의 백 퍼센트. 당해낼 자가 없다고 하더라.”그녀는 단이수를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심형진은 계속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내가 선임한 변호사도 재판에 능하니까.”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선배. 고소는 나 혼자 할게요. 선배는 가족들도 있으니까 연루되지 않는 게 좋겠어요.”단이수의 말이 맞았다. 이연석을 고소한다고 하더라도 그한테 큰 영향이 없을 것이다.그러나 한 번쯤은 그를 혼내주고 싶었다. 제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지 말라고. 이연석이 어떻게 반격할지에 대해서는 사실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니까.그러나 심형진은 가족들이 있으니 그들한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이연석은 부잣집 도련님 중에서도 최고 가문의 도
한참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가 다시 핸드폰을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사촌 형한테 전화해 볼게. 그 형도 변호사야. 금융 쪽 재판에만 능하긴 하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거야.”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전화를 걸었고 이내 통화음이 연결되었다.일의 자초지종에 대해 얘기하자 전화기 너머로 상대방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형진아. 형이 안 도와준 게 아니라 중요한 건 너무 작은 사건이야. 법정까지 갈 정도가 아니라고.”“그리고 이연석의 전 여자 친구를 왜 건드려? 우리 집안이 그렇게 돈 많고 실력 있는 집안이냐?”“너도 이젠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니 부모님 생각도 해야지.”“그래. 알았어.” 사촌 형의 잔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심형진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를 끊은 후 그가 난감한 표정을 감추며 그녀를 향해 웃었다.“동창 중에도 변호사 하는 애 있어. 다시 전화해 볼게.”또다시 핸드폰을 집어 드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얼른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선배, 그만해요.”핸드폰 화면을 누르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시선을 뗀 그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그만 하라고?”“두 변호사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이길 수 없다고...“하지만...”그녀는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렇게 해요. 단이수 씨 찾아가서 합의 조건에 대해 말해볼게요. 이연석 씨가 선배한테 사과하고 앞으로 다시는 날 찾아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합의해요.”“이연석 씨가 동의하지 않을 거야.”“일단 해볼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단이수가 남긴 명함을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까스로 다시 잠이 든 단이수는 새벽 5시에 걸려 온 전화를 듣고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누구예요? 이 새벽에 뭔 전화입니까?”“단 변호사님. 정가혜입니다.”전화기 너머로 부드럽고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합의 조건을 바꿨으면 하는데요.”그녀의 목소리에 단이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타협할 줄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타협할 줄은 몰랐다. “조건
한편, 부산 출장이었던 이지민은 친구로부터 이연석이 클럽에서 사람을 때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늦은 시간에 이연석의 별장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남자를 향해 한소리했다.“오빠,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뭐 하러 가혜 씨 남자 친구한테 주먹질을 해?”술에 취해 흐릿해진 시선 속에서 이지민의 윤곽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밀쳤다.“신경 꺼.”그녀는 손에 든 가방을 내려놓고 술병을 빼앗았다.“그만 마셔. 이렇게 마시면 위가 남아나겠어?”허구한 날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먹고 놀기만 하니. 둘째 오빠한테 사진이라도 보내 혼내주라고 하고 싶었다. 그녀가 술병을 빼앗자 이연석은 벌컥 화를 났다.“여기서 귀찮게 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힘이 딸린 그녀는 술병을 빼앗지 못해 화가 났다.“그래. 아예 마시고 죽어. 나도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까.”그 말을 뿌리치고 돌아서는데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렸을 때부터 늘 오빠들의 기에 눌려 자랐기 때문에 그들이 그녀의 말을 들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승연 언니의 말이라면 오빠가 새겨들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한 이지민은 별장을 나와 이승연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에야 차를 몰고 별장을 떠났다.마침 부산에 있었던 이승연은 그 얘기를 듣고 바로 차를 타고 이연석의 별장으로 향했다. 만취한 채로 겨우 침대에 엎드려 잠을 청하려는데 이승연의 경호원에게 들려 욕조에 던져졌다.“물 틀어놔. 이놈 정신 좀 차리게.”경호원이 물을 틀자 그가 정신을 차렸다. 허우적거리며 욕조에서 나와 숨을 돌리던 그는 차갑고 굳어있는 이승연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었다.“누나?”구역질이 나는 걸 억지로 참으며 욕조 아래의 계단에 거꾸로 앉아 욕조 가장자리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누나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의 입에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이 다 나오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노릇이다.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그녀는 가슴이 아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연석아, 네가 가혜 씨를 좋아하는 마음은 이해하는데. 하지만 가혜 씨 마음도 헤아려야 하는 거 아니니?”“가혜 씨가 너한테 마음이 없다면 네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건 오히려 가혜 씨한테 미움만 더 사게 될 거야.”그런 건가? 내가 지금 소란을 피우고 있는 건가? 왜 다들 내가 소란을 피운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정가혜 그 여자가 먼저 날 화나게 한 건데 말이다.“누나. 가혜 씨가 나한테 이러는 건 내가 싫어서 그런 걸까요?”그 말에 그녀는 흠칫했다. 바보 같은 동생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아직 구별이 잘 안되나보다. 그동안 사귀었던 여자 친구한테는 마음을 줘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제 겨우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그 물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정가혜와 만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는 이승연도 잘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더 이상 정가혜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동생을 타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연석.”그녀는 그를 부축하며 말을 이어갔다.“일단 집에 가자. 가혜 씨한테는 내가 물어볼게. 너에 대한 마음이 어떤 건지. 여전히 널 좋아하고 있다면 설득해 볼게. 하지만 너에 대해 마음을 접었다면 너도 나랑 약속해. 다시는 찾아가지 않겠다고.”겉으로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좋든 싫든 절대 놓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한편, 정가혜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송사월을 보러 갔다. 그녀는 어젯밤에 이연석과 심형진이 싸운 일에 대해 송사월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다. 그저 병원에 일이 있어서 심형진이 먼저 서울로 돌아갔다는 핑계만 댔다.송사월은 그 말에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주서희가 혼인신고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정가혜와 함께 쇼핑몰로 가서 주서희에게 줄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