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이준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때, 지현우의 몸은 이미 얼어붙어 있었다.그는 영안실에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흰 천으로 덮인 지현우를 보고 있었다.서유가 본 것과 달리 지금 이 순간의 지현우는 깨끗이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그는 잠든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에 누워 있었다. 아무런 죽음의 기운도 없이 고요했다.심이준은 다가가 손을 내밀어 지현우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스승님...”그는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지현우가 잘 때 누군가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일어나 상대방을 한 대 때렸을 것이다.그런 지현우였는데, 지금은 조용히 누워 그의 방해를 받고 있지 않았다.심이준은 코끝이 찡해지며 갑자기 눈시울을 붉혔다.“스승님, 왜 이러고 계세요? 제가 이길 때까지 기다려준다고 하셨잖아요?”그가 출사하던 날, 지현우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이준아, 네가 나보다 더 많은 트로피를 받으면 내가 너를 위해 황금 오두막을 지어줄게.”지현우는 심이준이 황금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가끔 작은 황금을 사서 그의 황금 창고에 넣었다.분명 심이준을 위해 산 것이지만 입으로는 앞으로 돈이 없으면 그 황금 창고를 턴다고 했다.그의 스승님은 좋은 사람도, 철저한 나쁜 사람도 아니지만 슬픈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는 표현을 잘 못 하는 것 같고 항상 반대로 말해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오직 심이준만이 그가 외롭다고 여겼다.가끔 그가 김초희의 사무실에서 혼자 멍하니 있는 것을 보면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럴 때마다 심이준은 그를 웃기려고 노력했다.비록 허술한 농담이었지만 지현우는 항상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한마디 했다.“이준아, 가죽이 근질근질하지?”그러면 심이준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가죽은 괜찮은데 살이 가려워요. 스승님께서 좀 긁어주실래요?”심이준은 얼어붙은 지현우의 몸을 바라보며 울면서 말했다.“스승님, 나 가죽이 가려워요. 일어나서 좀 긁어주시면 안 돼요?”분명히 우스꽝스러운 말인데 조
심이준은 무릎을 꿇고 지현우를 향해 세 번 절했다.그는 지현우와 약속했다. 획득한 트로피가 스승님을 능가하면 지현우는 그에게 황금오두막을 지어주겠다고.하지만 이번 생은 불가능해졌다.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또 지현우의 제자로 살 수 있기를 바랐다.그때가 되면 심이준이 황금오두막을 지어 스승님께 드릴 것이다.이번 생에 받은 은혜를 보답할 겨를도 없이 가버렸으니...심이준이 무릎을 꿇고 오열하자 조지가 손을 뻗어 어깨를 툭 쳤다.“임종 전에 소유했던 회사를 이준 씨에게 맡기고 갔어요.”“이준 씨가 회사를 이끌고 전 세계를 제패하기를 바랐어요.”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는 늘 심이준을 강하게 만들었다.그의 스승님은 생전에 그를 후원하고 가르쳤고, 죽을 때까지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천성이 쾌활하던 심이준은 순간 모든 것이 무너졌다.서유는 여전히 병실에 앉아 이승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이승하는 택이를 보내 케이시의 전용기를 막으라고 지시했지만 아직 결과를 얻지 못했다.서유는 조지를 통해 케이시가 연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총 쏘는 것만 가르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케이시의 목적은 간단했다. 바로 연이가 직접 자신의 친아버지를 죽이게 하기 위해서였다.지현우가 유언을 남기지 않더라도 서유는 연이가 이렇게 미친 양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걸 놔두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반드시 연이를 데려와야 했고, 연이에게 걱정 없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주어야 했다.이것이 그녀가 언니와 형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택이의 전화가 걸려왔다.서유는 재빨리 몸을 곧게 펴고 긴장한 표정으로 이승하의 휴대폰을 바라보았다.남자는 그녀 앞에서 숨김없이 핸즈프리를 켰고, 이내 택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스, 죄송합니다. 착오가 생겨 목표물을 요격하지 못했습니다.”이 말을 들은 이승하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까짓 것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해? 너희들 대체 뭐 하는 거야?”전에 이승하가
서유는 강세은을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지만 매번 그녀를 볼 때마다 그녀에게서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온몸에서 풍기는 고귀함 때문에 저도 모르게 그녀 앞에서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서유의 손을 잡고는 깍지를 끼었다.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꼭 잡고 늘씬한 다리에 그녀의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강세은을 바라보았다.“케이시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봐. 아니면 본사로 돌아가서 벌을 받던지.”인사치레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일 얘기를 하는 것을 보고 강세은은 그가 서유의 오해를 살까 봐 이러는 것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승하를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왔다.더는 긴 말 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가방에서 검은색과 흰색이 섞여 있는 가면을 꺼내 이승하에게 건네주었다. 그건 양아버지의 가면이었다. 이승하한테 지씨 가문과 왕실 사이의 원한에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한편, 지현우가 케이시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지씨 가문에서 알게 되었고 현재 Y국의 행세는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부 왕실의 일원들은 이승하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 일에 끼어든다면 S 조직까지 연루됐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가면을 건네받은 이승하는 손가락으로 몇 번 문지르더니 옆으로 내동댕이쳤다.“지씨 가문과 왕실 사이의 일은 상관할 생각 없어. 그러나 내 아내의 조카딸은 반드시 내가 직접 찾아올 거야.”강세은은 양아버지의 충고조차 듣지 않는 그를 향해 눈을 흘기더니 이내 서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대표님, 아버지께서는 대표님과 서유 씨의 결혼을 못마땅해하셨지만 대표님의 선택을 존중하셨어요. 그러니 대표님께서도 아버지의 결정을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S 조직은 그녀의 양아버지가 만든 조직이었다. 비록 현재는 이
그녀가 깨어났을 때 이승하는 이미 Y국으로 떠난 상태였다. 그에게 거의 화를 내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화가 나서 온몸이 떨렸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Y국으로 같이 가자고 했던 사람이 그녀가 잠든 사이에 홀로 떠났다.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아직 비행기 안이라고 짐작했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때, 정가혜가 노크를 하고 들어와서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는 그녀를 부축했다.“왜 바닥에 앉아 있어?”심장이 떨려 그녀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였고 벽 구석에 몸을 기대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감을 찾았다.“이 사람 언제 간 거니?”정가혜는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힌 뒤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아침에 떠났어. 지금쯤 아마도 비행기 안이겠지. 걱정하지 마. 도착하면 너한테 연락할 거라고 했어.”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미간을 눌렀다.“케이시가 현우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가기 전에도 이렇게 마음이 불안했었어. 나 지금 너무 불안해.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단 말이야.”그 생각에 그녀는 다시 핸드폰을 들고 Y국으로 가는 비행표를 예약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정가혜가 그녀를 막아섰다.“이승하 씨가 너한테 집에서 푹 쉬라고 했어. 반드시 언니의 아이를 데리고 올 거라고도 했고.””정가혜는 그녀의 핸드폰을 낚아채며 말을 이어갔다.“지금 너한테는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 지현우 씨 부모님이 오셔서 지현우 씨의 시신을 가져가겠다고 해. 조지는 너희 언니와 함께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대로 시신을 가져가는 걸 막고 있어. 지금 병원에서 양쪽이 옥신각신 다투고 있는 모양인데 서희 씨가 너한테 결정을 내리라고 하더라.”부모가 아들의 시신을 찾아가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지현우가 언니와 함께 있고 싶다는 유언을 서유에게 남긴 이상 이 일은 서유가 결정해야
그녀는 서유를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서유 씨, 당신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아들을 잃은지 얼마 안 된 심혜진의 첫마디가 자신의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라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던 심혜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면 그만, 김씨 가문의 비밀은 김초희가 죽은 후 영원히 땅속에 파묻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눈앞의 고아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답을 들은 심혜진은 영안실로 들어갔고 옆에 있던 중년 남자가 서유를 향해 입을 열었다.“현우의 시신은 우리가 가지고 갈 겁니다.”서유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언니와 함께 묻히겠다는 형부의 유언이 있었어요. 데려가실 수 없습니다.”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지강현은 안색이 어두워졌다.“현우는 내 아들입니다. 현우를 데려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게다가 현우와 김초희는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형부라니요?”서유는 담담하게 한마디 내뱉었다.“결혼했었어요.”언니의 신분으로 지현우와 결혼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혼인 서류까지 만든 적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 관계가 유효하다. 지강현도 이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이혼하지 않았냐는 말 한마디를 내뱉고 말길을 돌맀다. “지씨 가문의 자손은 우리 가문의 공동묘지에 묻혀야 합니다. 이 일은 상의할 여지가 없어요. 우리가 서유 씨를 이리 찾아온 건 통보하기 위함이지 상의하러 온 거 아니란 말이에요.”사실 서유는 지현우의 시신을 강제로 남겨둘 자격이 없었다.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있던 그녀가 뭔가를 제안했다.“저도 마침 Y국에 가려던 참이에요. 언니의 무덤을 Y국으로 옮길 테니 언니와 형부를 함께 지씨 가문의 공동묘지에 묻는 건 어떠할까요?”언니는 어려서부터 Y국에서 자랐고 국적도 Y국이었다. 그 나라에 언니의 모든 추억이 담겨 있었다. 언니와 형부가 함께 묻
점잖은 지강현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내 아들의 시신을 어디에 묻을지 의논하고 있을 뿐인데 미움을 산다니?”어쩐지 서유 이 아가씨가 단호하게 말을 하더라니. 이제 보니 이씨 가문이라는 세력을 믿고 있었던 거야. 그러나 이런 배짱은 결국 남자가 준 것이겠지.지강현은 내심 서유를 얕잡아봤다. 김초희처럼 신분도 배경도 없이 현우에게 빌붙어 평생을 괴롭히고 죽어서까지도 사람들을 못살게 굴면서 현우의 목숨까지 빼앗아 간 그런 여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속셈을 눈치챈 서유였지만 그녀는 온통 다른 데 신경을 쓰고 있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잘 생각해 보시고 4시간 후에 답을 주세요.”4시간 후면 이승하의 비행기가 Y국에 도착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녀는 Y국으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지현우는 지강현의 아들이다. 그가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는 건 사실 서유의 동의가 없어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유언 때문에 서유를 이리로 불러 통보하려 했었다. 마지막 유언을 서유에게 한 것이니 그녀가 동의하면 좋겠지만 동의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데려갈 생각이었다.근데 서유가 곧 이승하의 아내가 될 사람이라니. 일이 좀 까다롭게 되었다.지강현은 심혜진에게 이 상황을 알리고 그녀한테 결정하라고 하였다.“김초희를 공동묘지에 묻고 우리 집안의 며느리로 인정하든지 아니면 JS 그룹의 안주인과 맞서 현우를 강제로 데리고 가든지. 당신이 결정해.”서유가 이승하의 약혼녀라는 말에 심혜진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저 여자가 이승하의 약혼녀라는 말이에요?”지강현은 짜증 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냥 별 볼 일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이승하의 약혼녀일 줄이야.”심혜진은 눈물을 닦으며 손을 약간 떨었다.“저 여자와 김초희가 누구의 딸인지 알아요?”그는 그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저들이 누구의 딸이든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그와는 확실히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녀와는 관계가 있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하가 문자를 보내왔다.[당신이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게 아니야. 난 당신이 위험해질까 봐 그래.][약속할게. 이틀 뒤에 꼭 돌아갈 거니까 화내지 마. 응?]그녀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그의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알았어요. 집에서 기다릴게요.]그녀는 확실히 그한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를 따라 Y국으로 간다면 그의 약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의 발목을 잡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바꾼 서유는 이승하가 답장을 보낸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잠시 후, 그녀가 지현우의 부모님을 찾아가려는 찰나 조지가 원장실로 들어와 그녀에게 USB를 건네주었다.“이건 케이시 집 영화관에서 찾은 거예요. 안에는 언니가 현우 씨한테 남긴 영상이 들어있어요. 아직 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죠? 받아요.”눈시울이 붉어진 조지를 보니 아마 계속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조지는 특히 이 영상을 보고는 더 슬프게 울었다. 언니의 영상이라는 말에 서유는 가슴이 아팠고 손이 떨렸다. 주서희는 컴퓨터를 내어준 뒤 정가혜와 함께 원장실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서유는 컴퓨터에 USB를 꽂은 뒤 동영상을 클릭했고 이내 모니터에 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이때의 김초희는 이미 병든 상태였기 때문에 피부색이 칙칙하고 근육도 위축되어 사진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픈 와중에도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화장도 하고 옷까지 정성껏 골라서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니 아마 지현우에게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고 싶었던 것 같았다. 예전에 그녀도 곧 세상을 떠날 것을 알았을 때 늘 화장으로 창백한 얼굴을 가렸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기고 싶었었다. 언니가 지현우의 이름을 부를 때부터 그녀는 언니가 지현우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서유는 언니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심혜진은 부잣집 사모님답게 고상한 모습을 보이며 예의 바르게 서유를 향해 설명했다. “서유 씨, 초희가 현우를 쫓아다닐 때부터 난 우리 집안에 들어올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었어요. 근데 우리 가문의 며느리가 안 돼도 괜찮다고 초희가 그러더군요. 그저 현우 옆에만 있겠다고 했어요. 우리 같은 집안에서는 비슷한 집안의 여자를 며느리로 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초희한테는 명분을 줄 것 같지 못해요.”서유는 심혜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근데 심혜진은 줄곧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고 그 모습이 서유는 수상쩍었다. “아주머니, 혹시 저 아세요?”심혜진은 남편의 손을 잡고 몸을 살짝 떨면서 괜찮은 척 입꼬리를 올렸다.“난 계속 Y국에서 살았어요. 서유 씨를 알 리가 없죠.”근데 왜 날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걸까?서유가 입을 떼려는 찰나 심혜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서유 씨, 내 뜻은 분명히 전달했어요. 언니가 명분도 없이 현우 옆에 있었던 거예요. 살아 생전에 원하지 않던 명분이니 아마 죽어서도 개의치 않을 거예요.”언니가 살아있을 때, 심혜진은 이미 언니한테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 박아 두었었다. 그럼 처음부터 언니가 싫었다는 건데, 지금 심혜진의 말을 들어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아주머니, 저희 언니가 현우 씨를 쫓아다닌 건 맞지만 일방적으로 그랬던 건 아니에요. 현우 씨도 언니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언니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사랑했었죠. 언니에 대한 편견으로 세상을 떠난 언니를 모욕하지 마세요.”서유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켜버린 심혜진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비로소 용기를 내어 서유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던 눈동자도 금세 처져버렸다. 아내의 이런 약한 모습에 지강현은 아내가 괴롭힘이라도 당한 줄 알고 화를 벌컥 냈다.“서유 씨,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서유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다른 뜻은 없어요. 그저 한평생 희생만 하다 간 언니를 위해 명분 하나쯤 얻고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