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곰곰이 생각한 뒤,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에서 답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신을 언제 사랑하게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이 긴 머리를 좋아한다는 말에 난 머리를 길렀고 위가 안 좋은 당신을 위해 담백한 죽 한 그릇이라도 끓여주고 싶었죠.”“매번 당신이 날 데리러 올 때면 난 너무 기뻤어요. 화가 난 채로 떠나는 당신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고요. 당신의 눈빛 하나, 몸짓 하나,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을 때부터인 것 같아요.”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며 그의 눈에는 애틋함이 더욱 짙어졌다.도대체 언제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한 시간이 많을수록 점점 정이 들었다고만 했다. 그녀는 그와 함께하면서 저도 모르게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아마 그 마음은 그녀 자신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는 그녀 또한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늦은 것은 아니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다. 서로 어긋났던 시간들이 아까웠다. 서로 사랑을 해도 부족할 시간이었을 텐데. 이승하는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썹을 어루만졌다. “더 이상 당신 다치게 안 해.”그녀는 웃음을 머금고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창밖에는 아직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고 식당에는 사랑하는 남녀가 다정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했다.한편, 지현우의 위치를 알아낸 택이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승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스, 지현우는 이미 귀국했고 현재는 그의 별장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전화를 받은 이승하는 품에 안겨 달콤한 잠을 자고 있는 서유를 내려다보았다.그녀가 잠에서 깨기라도 할까 봐 그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녀의 손을 살짝 밀어내고 이불을 젖힌 뒤 침대에서 내려왔다.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목소리에 차가움이
가는 도중에 갑자기 택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보스,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습니다. 지현우의 별장으로 바로 오세요.”한 손으로 차를 몰던 남자는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무슨 일이야?”전화기 맞은편,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택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와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던 그의 눈동자에서 창밖에서 흩날리는 눈보차처럼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굳은 얼굴로 전화를 단번에 끊어버리는 그는 이내 방향을 바꾸어 지현우의 별장으로 향했다. 한편, 잠에서 깨어난 서유는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만져보았고 차가운 기운이 손끝에 전해졌다.어디 갔지?당황한 그녀는 얼른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불을 켜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슬리퍼도 신지 못한 채 그녀는 욕실과 옷방 그리고 서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공포와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녀는 외투를 걸치고 맨발로 2층에서 뛰어 내려와 주태현의 방문을 두드렸다.“주 집사님, 이 사람 어디 간 거예요?”잠에서 깨어난 주태현은 정신없이 일어나 문을 열었고 초조해하는 그녀를 다독였다.“도련님께서 볼일이 있으신 것 같아요. 서유 씨도 알다시피 처리해야 할 일이 이리 수시로 생기게 됩니다.”김씨의 신분에 대해서 서유도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주태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매번 무사히 돌아오시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그러나 서유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불안했다. 바로 이때, 거실 구석에 놓인 전화기가 갑자기 울렸다.주태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전화기를 쳐다보았다.“이상하네. 이 전화기는 오랫동안 울린 적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한밤중에 울리는 거지?”전화 소리에 그녀는 당황한 마음을 억누르고 주태현을 따라 그 전화기를 향해 걸어갔다.전화를 받자마자 주태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면서 그가 고개를 돌려 서유를 쳐다보았다.“지씨 라는 남자가 서유 씨를 찾는데요.”지씨? 설마 지현우? 그가 어떻게 이 별
자신을 잡아당긴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본 순간, 생기를 되찾았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가 싹 가셨다. 창백한 얼굴로 재빨리 차 문을 밀었지만 그녀는 이미 차 안으로 완전히 끌려 들어간 상태였고 차 문이 잠겨져 있는 상태였다. 차에서 내릴 수 없었던 서유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지현우를 쳐다보았다. “날 놔준 거 아니었어요? 왜 또 찾아온 거예요?”흰 셔츠를 입은 깔끔한 남자가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살짝 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요.”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고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그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그 모습에 놀란 서유는 연신 뒤로 물러났다. “뭐 하는 거예요?”지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가까이 다가왔고 그녀를 차창까지 내몰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감쌌다.차갑고 낯선 촉감이 얼굴이 닿는 순간 그녀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나 건드리지 말아요.”그녀의 얼굴, 그녀의 몸 구석구석 모든 곳은 이승하만의 것이었고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현우는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녀의 두 손을 꽉 잡고는 그녀를 차창에 밀쳤다. 흐릿한 시선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닿았다. 한참 동안 지켜보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지현우 씨, 당신 이러는 거 언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그 말을 들은 남자는 흠칫하더니 이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가까이 다가갔다.그러다가 그녀의 붉은 입술에 거의 다 닿았을 때, 그가 갑자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놀라움에 온몸을 떨고 있던 서유는 점차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미쳤어요?”한참 동안 웃던 그가 그녀를 풀어주고는 몸을 곧게 펴고 앉아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초희야, 나 너한테 잘못한 것 없어. 이 여자한테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하늘에서 나 원망하지 마.”그 말에 흠칫하던 서유는 복잡한 얼굴로
위층으로 올라오던 서유는 총소리에 깜짝 놀라더니 계단 손잡이를 꽉 잡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고 사람들 사이로 유리집의 광경을 보고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총을 마구 쏘는 이승하를 무의식적으로 바라보았고 총을 쥔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그가 이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승하에게 뛰어가려던 그때 지현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승하 씨가 스스로 알아차리게 해요. 안 그러면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이런 일은 가짜와 진짜를 떠나 가시처럼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의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현우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서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가뜩이나 마음에 상처가 많은 사람이에요. 이렇게 상처 주는 거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그 말에 지현우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잔인하다고요?”실소를 터뜨리던 그가 천천히 웃음을 거두고는 멀리서 이승하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적어도 저 사람이 본 건 가짜잖아. 내가 본 건 진짜였다고.”그가 작은 목소리로 한 마디 중얼거리더니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유를 쳐다보았다. “누가 더 잔인할까요?”반짝이던 그의 눈빛은 점차 빛을 잃어가면서 절망적으로 변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유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예전에 언니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하는 모습을 그가 직접 목격했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언니를 사랑하는 만큼 언니를 원망하고 있었고 죽기보다 못한 고통 속에서 살고 있어도 언니를 따라가지 않았던 것이다. 서유는 그와 언니 사이에 도대체 어떤 원한이 있는지 모른다. 그저 지금 지현우의 모습은 어둠에 휩싸인 사람처럼 전혀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죽고 싶어도 다른 세상에서 또다시 언니를 만나게 될까 봐 그게 두려워서 죽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언니를 그리워하는 모순된 감정 때문에 그는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
이승하는 그 여자를 한 번 쳐다보고 두 번 다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보면 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는 서유의 손을 잡고 유리방으로 나온 뒤, 차가운 목소리로 택이에게 명했다. “저 여자 얼굴 망가뜨려.”이 세상 그 누구도 서유와 닮은 얼굴을 가질 수 없었다. 옆모습이라고 해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망가뜨리라고 하는 말에 그 여자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급히 용서를 구했다.“대표님, 일부러 서유 씨 행세를 한 건 아니에요. 저도 그냥 분부대로 한 일이라고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목소리까지 똑같은 두 사람, 서유조차도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하물며 이승하가 어찌...서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꿇어앉아 애걸복걸하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지금은 불쌍해 보이지만 자신의 행세를 하며 이승하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 심각한 트라우마가 생긴 이승하를 생각하며 서유는 동정심을 거두었다. 이승하는 뒤에서 용서를 비는 소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애틋한 눈빛으로 서유를 쳐다볼 뿐이었다.“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그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그녀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지현우 씨가 날 데리고 온 거예요.”그 말에 이승하는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침대에 있는 저 여자를 용서할 수는 있어도 지현우는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 인간 지금 어디 있어?”옥상 입구 쪽을 바라봤지만 지현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지현우가 도망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아래층에서 갑자기 술병이 타일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 옆에 앉아 있는 지현우는 비싼 손목시계를 찬 손에 와인 한 잔을 들고 고개를 젖혔다. 바 위에 매달린 크리스털 램프에서 빛이 흘러 내려와 그의 잘생긴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그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로지 술을 마시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서유는 Y국에서 그와 함께 지내던 시절에도 그가 이리 혼자 술
‘그녀의 여동생'이라는 말을 듣고 서유는 문득 지현우가 언니의 심장을 포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에 휩싸인 지현우를 바라보던 그녀는 동정 어린 눈빛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지현우는 바에 팔꿈치를 괴고는 손에 든 술잔을 가볍게 흔들면서 고개를 돌리고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네요. 서유 씨한테 그리 상처를 주고도 용서받을 수 있었다니. 하지만 난 평생 그럴 수 없게 됐어요.”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이승하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더 들어갔고 지현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더 복잡해졌다.김초희와 지현우 사이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승하는 공감할 수 없었다.하지만 서유의 용서를 받았다는 그 말이 이승하의 마음을 쿡 찔렀다.만약 서유의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면 아마 그도 지금의 지현우와 같은 처지였을 것이다. 이승하의 복잡한 마음을 알아차린 지현우는 시선을 돌리고 잔을 비운 뒤 술잔을 던졌다. 술잔은 허공에서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더니 다시 타일 위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바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유리 파편을 밟으며 자신을 겨누고 있는 총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서유의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갔다.고개를 숙이고 서유의 심장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고 이내 이승하가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 여자는 내 여자예요. 어딜 감히 함부로 만지는 겁니까?”지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싸늘한 이승하를 바라보며 미친 사람처럼 실없이 웃었다.“참 웃기는군요. 내 여자가 그녀의 심장으로 당신의 여자를 구했습니다. 근데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는 겁니까?”이승하는 그를 단번에 밀어내고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내 여자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건드리려고 한 겁니까?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무슨 자격이요?”지현우는 차디찬 벽에 기대어 눈시울을 붉히며 콧방귀를 뀌었다.“내 여자의 심장이 없었다면 당신의 여자는 진작에 죽었을 겁니다.”“내 여자가 구
“형부.”지현우의 모습에 깜짝 놀란 서유는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때, 키가 크고 늘씬한 남자가 그녀보다 한발 빠르게 반응했다. 그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 단번에 지현우의 손에 있던 총을 빼앗았다.남자의 손에 떨어진 총이 그 위에서 한 바퀴 돌더니 총구가 다시 지현우에게로 향했다. “내 여자를 괴롭히고 이리 쉽게 죽음으로 사죄하다니. 이건 경우가 아니지.”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이승하가 차갑게 한마디 내뱉고는 총구를 아래로 내려 지현우의 허벅지 쪽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불구가 되든지 감옥에 가든지 둘 중 하나 선택해요.”총을 빼앗긴 지현우는 한 손으로 바를 집고 서서는 무심하게 이승하를 쳐다보았다.“내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 겁니까?”이승하의 단호한 성격이라면 그의 여자를 괴롭히고 다치게 한 이상 분명 그를 죽이려 했을 것이다.근데 생을 마감하려 했던 그의 손에서 이승하가 총을 빼앗았다는 건 그가 죽기를 원치 않다는 뜻이다. “왜죠?”무뚝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이승하는 전혀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난 당신이 죽기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기를 바랍니다.”차가운 그의 눈빛을 쳐다보며 지현우는 피식 웃었다. 지현우는 다시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따른 뒤 한 모금 살짝 마시고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지난 몇 년 동안 난 죽기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낮은 그의 목소리는 이승하에게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남은 생은 속죄하면서 살아요.”이승하는 그의 허벅지에 총을 겨누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는 찰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우리 삼촌 괴롭히지 말아요.”연이는 조지의 몸에서 허우적거리며 내려오더니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현우의 앞으로 달려와서는 짧은 팔을 활짝 펴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 “잘생긴 아저씨, 왜 우리 삼촌한테 총을 대고 있어요?”연이는 통통하고 작은 얼굴을 들고는 포도알같이 까만 눈을 깜박이
서유는 놀라서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연이를 안아 올려 조심스럽게 조지에게 맡긴 뒤, 다시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갔다.그녀는 총을 내려놓지 않은 이승하를 잠시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승하 씨, 지현우 씨랑 잠깐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의 말에 흠칫하던 그는 서유가 지현우와 말을 섞는 것이 내키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뜻대로 천천히 총을 내려놓았다.그녀가 지현우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이승하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여기서 얘기해.”서유는 이승하를 한번 쳐다보고는 바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술을 마시고 있는 지현우를 쳐다보았다.“형부, 아까 형부가 본 게 전부 사실이라고 했었죠? 근데 그 생각 안 해봤어요? 언니는 당신을 10년 동안 사랑했어요. 그런 언니가 쉽게 당신을 배신할 리가 없잖아요. 분명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예요. 한 번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녀는 조지의 품에 안긴 채 작은 목소리로 흐느끼고 있는 연이를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난 연이가 당신과 언니의 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지현우는 술잔을 꽉 쥐며 차갑게 웃었다.“유전자 검사 결과 친자관계가 아니었어요.”그 역시 의심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 검사는 조지가 직접 한 검사였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틀릴 리가 없지 않겠는가? 유전자 검사를 이미 했다는 말을 듣고 서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고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연이가 당신과 언니를 닮은 것 같지 않아요?”그 말에 몸이 굳어진 지현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연이를 쳐다보았다.닮았다고?닮았다면 난 왜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걸까?전혀 믿지 않는 지현우는 술잔을 비우고는 서유를 향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언니의 명성을 회복시키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날 그 희생양으로는 생각하지 말아요.”말을 마친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팔을 벌리고는 이승하를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었다.“이 대표님,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