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이준이 아기 이름을 공개한 뒤, 이름이 적힌 종이 뭉치를 다시 아기에게 건넸다. 아기는 한 손으로 이름을, 다른 손으로는 칼을 쥐고,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칼을 만지작거렸다.주변 사람들은 그런 아기를 보며, 이름이 아이의 성격과 어울리긴 한다며 약간 음울하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오히려 형식적으로 칭찬을 하며 이승하와 서유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모두들 아기가 만족할 만한 이름을 찾았다며 기뻐했지만, 두 아이를 안고 있던 이연석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이 이름, 내가 지은 빵순이보다도 못한데? 누가 우리 둘째 형이랑 원수 지려고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원.”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원래 이름을 칭찬하던 상씨 집안 사람들은 순간 멈칫했다. 그 순간 상연훈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문밖을 향했고, 멀리 떨어진 철문 옆에 서 있는 곧고 단단한 그림자를 발견했다.검은색 중절모를 쓴 상철수는 안에서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며 이미 한 살이 된 증손자를 보고 싶었지만, 서유와 이씨 집안 사람들이 자신을 반기지 않을 것을 알고 들어가지는 못했다.상철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지팡이를 짚은 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과거 강중헌과의 싸움에서 다리에 총을 맞은 이후, 그는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나이가 들어 이제는 절뚝거리는 것쯤은 개의치 않았다. 다만 걷는 속도가 느려졌을 뿐이었다.느릿하게 걸어가는 동안, 이승하의 차가운 시선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 그 뒷모습을 무심히 스쳤다.얼마 후, 상철수는 힘겹게 차 문을 잡고 자리에 앉았다. 차 안에서 문을 닫고 운전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하려던 순간, 창문 가장자리에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닿았다.상철수는 그 뼈마디가 또렷한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고, 냉랭하고 무심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눈의 주인은 살짝 눈을 내리깔며 감정 없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전에 일, 감사드립니다.”그가 말하는 것은 수술실 문을 뜯고 서유를 구해준
이 말에 상준석은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몰라 멈칫했다. 그러나 상철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내가 서유에게 한 일은 떳떳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잔인하기까지 했어. 서유가 날 미워하는 게 낫지, 용서받고 싶지는 않아.”상준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늘 잘해주셨다. 늘 그가 잘생겼다고 칭찬하며, 국제적인 스타들보다도 나을 거라며 격려하셨다. 그런 좋은 할아버지가 이제 곧 떠난다니, 그는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상철수는 그의 마음을 읽은 듯, 상준석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준석아, 어릴 때 나는 너를 가장 좋아했단다. 네가 내가 떠나는 걸 견디기 힘들어할 걸 알지만, 인생은 결국 이런 순간을 맞이하는 법이다. 헤어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상철수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연기 속에서 그의 세월의 흔적이 깃든 얼굴은 담담하면서도 속세를 초월한 여유로움을 풍겼다.마치 젊은 시절의 상철수가 복수라는 신념 하나로 수많은 세월을 버텨낸 것처럼, 이제 모든 원한이 끝난 지금,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듯했다.상준석은 그런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기 싫어 고개를 돌렸고, 상태준 역시 고개를 숙이며 마음속의 아쉬움을 삼켰다. 반면, 상연훈은 이미 할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인 듯,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상철수는 시선을 상준석에게서 떼어내고 상연훈의 고요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서유에게 미안한 것 외에도, 너에게도 참 미안하구나.”그는 담배를 낀 손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그때 너는 이만큼밖에 안 되었지. 내가 네 아버지 손에서 너를 데려왔단다.”그는 말하며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널 데려오고 나서, 너의 어린 시절, 청소년기, 성인기를 형들과 다르게 만들어버렸어. 내가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더구나.”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세월이 깃든 눈에 후회와 안도의 감정을 담았다.“그래도 다행인 것은, 네가 그런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선함을 지키고 있다는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너희 할머니를
상철수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서유는 아이를 안고 연이의 숙제를 봐주고 있었다. 연이의 성적은 별로였다. 특히 수학 성적이 별로였는데 기본적인 산수 문제조차도 어려워했다. 서유도 학교 다닐 적에는 수학을 가장 어려워했었다. 다행히 초등학교 수학 문제였기 때문에 가르치는 데 큰 문제 없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치고 있는데 품 안에 있던 아이가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연이의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피식피식 웃었다. 머리를 잡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연이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아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되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동그랗고 큰 눈을 들어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펜을 잡고 장난을 치던 이하준은 연이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이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흥.”콧방귀를 뀌는 아이를 보며 연이가 통통한 손을 뻗어 거만한 얼굴의 이하준을 가리키며 큰소리쳤다.“이모, 하준이가 날 도발하고 있어요.”수학책을 들춰보던 서유는 아이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였다.“그럴 리가. 하준이는 이제 고작 한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무슨 도발을 해?”연이는 하준이를 가리키며 발을 동동 굴렀다.“봐봐요. 나한테 고개를 치켜들면서 눈으로 날 비웃고 있잖아요.”책에서 시선을 떼고 아이를 쳐다보자 아이는 이내 고개를 떨구면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서유가 잡아당기자 아이는 일부러 손에 든 펜을 잡고 서유를 향해 환하게 웃기도 했다. 한 살배기 아이가 갑자기 얼굴을 확 바꾸는 모습에 연이는 깜짝 놀랐다.“이모, 하준이 얘... 좀 무서운 것 같아요.”아이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서유는 연이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이모랑 같이 잠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까?”하준이를 노려보고 있던 연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집에서 하준이랑 같이 있을 거예요. 하준이가 저녁에 잘 때 침대에 오줌 싸는지 안 싸는지 지
그동안 매일 아이를 안고 잤던 서유는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남편의 마음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저녁에 샤워 시키고 나서 연이랑 같이 재울게요.”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기분이 좋아진 건지 손을 뻗어 아들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가 고개를 확 돌리더니 서유를 덥석 껴안고는 그녀의 품에 안기며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허공에서 멈칫하던 그의 손은 이내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아이는 불쾌한 표정을 지은 채 작은 몸을 비틀었다. 그는 아이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리 어린아이가 아빠의 뜻을 알아차릴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알아차리면 뭐 어떠한가? 말도 못 하는 아이가 그에게서 서유를 빼앗을 수 있을까?잠시 후, 저녁을 마친 뒤 서유는 하준이를 안고 샤워하러 갔다. 집에 육아 도우미가 있긴 하지만 아이를 낳자마자 혼수상태에 빠졌던 터라 아이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최대한 아이를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이승하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씻긴 후, 목욕 수건을 집어 아이의 몸을 감싸고 다른 수건으로 아이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향긋한 아이를 보며 그녀는 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참지 못하고 아이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여보, 우리 하준이 너무 귀엽지 않아요? 매일 안고 있어도 놓기가 아쉬워요.”잠옷을 가지고 온 그가 욕조 옆에 걸터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았다.“요즘 무릎이 너무 아파. 이따가 좀 많이 주물러줘.”무릎이 아프다는 그의 말에 그녀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얼른 방에 가 있어요. 하준이 재우고 나서 마사지 해줄게요.”그가 발걸음을 옮기더니 아이의 앞으로 다가가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내가 재울게.”힘찬 손에 억지로 어깨가 눌린 아이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지만 아이가 어찌 그의 힘을 당해낼 수가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하는 아이를 안고 연이의 방으로 들어왔다. 한편, 저녁을 먹을 때 주태현은 오늘 밤 아이가 연
저도 모르게 그의 몸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달라붙어 아찔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남자의 애무는 끝이 없었고 그녀는 얕은 신음을 토해냈다. 결국 참을 수 없었던 그녀가 그를 향해 애원하자 남자는 그제야 그녀의 손을 잡고 옆에 놓인 콘돔을 집어 들었다.“해줘.”정신이 혼미해진 그녀는 한껏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새빨간 그의 눈동자를 따라 손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그 순간,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잡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남자에 의해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남자의 포악한 몸짓에 그녀는 이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온몸이 떨리면서도 그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를 썼고 자석처럼 그의 몸에 매달려 있어 등이 침대 시트에 닿지도 않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팽팽한 느낌에 그는 점점 더 깊숙이 들어왔고 절정에 이른 그가 결국 얕은 신음을 토해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그가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한 번만 더 해.”힘에 부친 그녀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 그녀를 자신의 아래로 가두어버렸다. 이제는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해도 몸이 후끈 달아올라 그녀는 흠뻑 젖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처음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즐기며 서로를 탐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모, 이모부. 하준이가 안 보여요. 얼른 나와보세요.”아이가 사라졌다는 말에 서유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흥미가 완전히 사라졌다. 급히 이승하를 밀어내고는 바닥에 흩어진 잠옷을 집어 들어 아무렇게나 몸에 걸치고는 문밖으로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어떻게 된 거야? 하준이가 왜 갑자기 없어져?”“저도 잘 모르겠어요. 공부 끝나고 방에 갔더니 아기 침대에 없는 거예요. 주 집사님이 별장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찾지 못했어요.”서유는 놀라서 심장이 벌벌 떨렸고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빛도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그녀는 비틀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까지 이승하는 서유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마다 아이를 먼저 재우고 나서 아이의 방으로 안고 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잠에서 깨어났고 자꾸 떼를 쓰는 바람에 둘만의 시간은 늘 아쉬움이 가득한 채로 끝이 났다. 예전처럼 뜨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그는 아이를 아예 이연석의 집으로 보내버렸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아이를 보내니 이연석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욕정이 많은 형이 아들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집으로 보낸다는 걸 그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여 이승하가 아이를 데려다줄 때마다 이연석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형을 비웃었다. 그러나 이승하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급히 자리를 떴다. 하지만 아들을 동생의 집에 보내는 방법도 얼마 되지 않아 쓸 수 없게 되었다. 오뚝이와 깡순이 남매가 하준이의 괴롭힘에 매일 대성통곡을 했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하준이는 이연석까지 괴롭히고 있었다. 어떻게 괴롭히냐는 서유의 물음에 그가 쌓인 불만을 토해냈다. “가혜 씨가 집에 있을 때는 그렇게 얌전히 잘 놀기만 하더니. 가혜 씨가 출근하기만 하면 떼를 쓰는 겁니다.”“육아 도우미의 손길도 거부하고 꼭 나한테만 안아달라고 하네요.”아이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겠는가? 그러나 하루 종일 안고 있는다면 아무리 체력이 좋은 남자라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하준이를 안은 채 울고 있는 두 아이까지 달래야 하니 정신이 없었다. 문제는 세 명의 아이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니 머리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컴퓨터를 연구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하준이를 돌려보냈다.형과 형수의 뜨거운 시간을 망칠 수밖에. 나부터 살고 봐야지. 이연석의 말을 서유는 믿기 어려웠다. 하준이는 평소에 말을 잘 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얌전한 아이였다. 정가혜도 그렇게 말하는데... 이연석은 하준이가 겉으로만 순진한 척하
이씨 가문의 삼 남매가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괴롭히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사실이 곧 원장의 귀에 전해졌고 유치원 원장은 이하준을 불러와 어디서 배운 나쁜 버릇이냐고 다그쳤다. 그 물음에 아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육성재 삼촌이라고 했고 유치원 원장은 서유에게 전화를 걸어 육성재가 어떤 사람인지, 왜 아이한테 이런 나쁜 것만 가르친 것인지 물었다. 마침 이하준을 보러 블루리도에 왔던 육성재는 유치원 원장의 말을 듣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서유의 핸드폰을 빼앗아 유치원 원장과 한참 동안 말다툼을 했다.유치원 원장은 아이가 현재 유치원에서 짱이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유치원생들과 싸움을 한다고 했다. 그제야 육성재는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와 확실히 관계가 있는 일이니까. 육성아가 결혼하고 나서 육성재는 바로 귀국했고 줄곧 블루리도 맞은 편의 별장에 묵고 있었다. 그는 툭 하면 찾아와서 이승하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승하가 없는 틈을 타서 하준이를 데리고 다니며 위세를 부렸다. 아이한테 아래 부하들을 데리고 다니는 게 얼마나 위풍당당한 일인지만 알려준 것뿐이었다. 싸움을 하라고 가르쳐준 적은 없는데... 그러나 육성재가 가르쳤든 가르치지 않았든 서유는 그가 더 이상 이하준에게 접근하는 걸 금했고 앞으로 아이를 보러 올 권한도 박탈해 버렸다. 어쩔 수 없었던 육성재는 하준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아이를 ‘납치’했다. 아이가 서유한테 자신이 결코 싸움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길 바라서였다. 길가에 서 있던 이하준은 턱을 치켜들고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는 한마디 내뱉었다.“호랑이 삼촌, 죄송해요. 유치원에 가고 싶지도 않고 혼나고 싶지도 않아서 삼촌이 가르쳐 준 거라고 했어요.”아이는 육성재와 김선우에게 각각 별명을 붙여줬는데 육성재는 호랑이 삼촌, 김선우는 작은 호랑이 삼촌이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더 가깝게 여긴 줄 알고 엄청 기뻐했다. 이승하에게 자랑을 하니 그는 피식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어린 하
이하준이 다섯 살이 되던 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김선우가 카지노에서 타짜를 만나게 되었는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결과 처참히 패배했고 결국 속옷 차림으로 김종수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이승하가 하준이를 혼내던 것처럼 김종수도 몽둥이를 들고 김선우를 호되게 때렸다. 너무 창피해서 그 후로 김선우는 다시 카지노에 가지 않았다. 문제는 이걸 이하준한테 몰래 가르쳐준 것이다.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던 이하준은 김선우의 가르침을 받고 도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다행히도 도박 자체인 놀음이 아니라 암호 풀이에 더 관심을 가졌다. 매번 그가 암호 풀이 장난감을 가져올 때면 이하준은 아무 말도 없이 서재의 카펫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그 모습을 보면서 김선우는 이승하한테 호되게 매를 맞은 것 때문에 아이가 저리된 거라고 이승하의 탓을 했다. 하준이 일에는 참견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이승하의 말도 듣지 않고 그는 계속 블루리도에 남아있었다. 결국 이승하한테 뺨을 얻어맞은 뒤 집으로 돌아갔고 집에 가서 김종수한테 일러바치니 또다시 뺨을 얻어맞았다. 허구한 날 놀고먹기만 하는 아들이 빨리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김종수는 가문에서 가장 험한 일을 아들한테 맡겼다. 해외에서 패거리들과 몇 번 크게 싸우고 반쯤 죽도록 맞고 나니 김선우도 많이 얌전해졌다. 더 이상 횡포를 부리지도 않고 사람들과 싸우지도 않고 김씨 가문의 정규 사업들을 맡기 시작했다. 그럼 최소한 얻어맞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한편, 육성재는 지난 2년 동안 LK 그룹을 이끌고 북미 시장의 진출에 힘을 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씨 가문의 넷째 이동하도 북미 시장을 넘보고 있었고 이승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상씨 가문에서는 이동하에게 프로젝트를 많이 넘겼다. 이동하가 북미 프로젝트를 많이 따낸 것을 보고 육성재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고 직접 K국까지 가서 상연훈을 만났다. 5년이 지난 지금, 상연훈은 큰 형의 자리를 이어받아 서광그룹의 대표이사뿐만 아니라 상씨 가문의 권력자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