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이준이 아기 이름을 공개한 뒤, 이름이 적힌 종이 뭉치를 다시 아기에게 건넸다. 아기는 한 손으로 이름을, 다른 손으로는 칼을 쥐고,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칼을 만지작거렸다.주변 사람들은 그런 아기를 보며, 이름이 아이의 성격과 어울리긴 한다며 약간 음울하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오히려 형식적으로 칭찬을 하며 이승하와 서유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모두들 아기가 만족할 만한 이름을 찾았다며 기뻐했지만, 두 아이를 안고 있던 이연석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이 이름, 내가 지은 빵순이보다도 못한데? 누가 우리 둘째 형이랑 원수 지려고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원.”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원래 이름을 칭찬하던 상씨 집안 사람들은 순간 멈칫했다. 그 순간 상연훈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문밖을 향했고, 멀리 떨어진 철문 옆에 서 있는 곧고 단단한 그림자를 발견했다.검은색 중절모를 쓴 상철수는 안에서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며 이미 한 살이 된 증손자를 보고 싶었지만, 서유와 이씨 집안 사람들이 자신을 반기지 않을 것을 알고 들어가지는 못했다.상철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지팡이를 짚은 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과거 강중헌과의 싸움에서 다리에 총을 맞은 이후, 그는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나이가 들어 이제는 절뚝거리는 것쯤은 개의치 않았다. 다만 걷는 속도가 느려졌을 뿐이었다.느릿하게 걸어가는 동안, 이승하의 차가운 시선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 그 뒷모습을 무심히 스쳤다.얼마 후, 상철수는 힘겹게 차 문을 잡고 자리에 앉았다. 차 안에서 문을 닫고 운전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하려던 순간, 창문 가장자리에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닿았다.상철수는 그 뼈마디가 또렷한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고, 냉랭하고 무심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눈의 주인은 살짝 눈을 내리깔며 감정 없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전에 일, 감사드립니다.”그가 말하는 것은 수술실 문을 뜯고 서유를 구해준
이 말에 상준석은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몰라 멈칫했다. 그러나 상철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내가 서유에게 한 일은 떳떳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잔인하기까지 했어. 서유가 날 미워하는 게 낫지, 용서받고 싶지는 않아.”상준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늘 잘해주셨다. 늘 그가 잘생겼다고 칭찬하며, 국제적인 스타들보다도 나을 거라며 격려하셨다. 그런 좋은 할아버지가 이제 곧 떠난다니, 그는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상철수는 그의 마음을 읽은 듯, 상준석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준석아, 어릴 때 나는 너를 가장 좋아했단다. 네가 내가 떠나는 걸 견디기 힘들어할 걸 알지만, 인생은 결국 이런 순간을 맞이하는 법이다. 헤어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상철수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연기 속에서 그의 세월의 흔적이 깃든 얼굴은 담담하면서도 속세를 초월한 여유로움을 풍겼다.마치 젊은 시절의 상철수가 복수라는 신념 하나로 수많은 세월을 버텨낸 것처럼, 이제 모든 원한이 끝난 지금,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듯했다.상준석은 그런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기 싫어 고개를 돌렸고, 상태준 역시 고개를 숙이며 마음속의 아쉬움을 삼켰다. 반면, 상연훈은 이미 할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인 듯,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상철수는 시선을 상준석에게서 떼어내고 상연훈의 고요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서유에게 미안한 것 외에도, 너에게도 참 미안하구나.”그는 담배를 낀 손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그때 너는 이만큼밖에 안 되었지. 내가 네 아버지 손에서 너를 데려왔단다.”그는 말하며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널 데려오고 나서, 너의 어린 시절, 청소년기, 성인기를 형들과 다르게 만들어버렸어. 내가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더구나.”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세월이 깃든 눈에 후회와 안도의 감정을 담았다.“그래도 다행인 것은, 네가 그런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선함을 지키고 있다는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너희 할머니를
상철수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서유는 아이를 안고 연이의 숙제를 봐주고 있었다. 연이의 성적은 별로였다. 특히 수학 성적이 별로였는데 기본적인 산수 문제조차도 어려워했다. 서유도 학교 다닐 적에는 수학을 가장 어려워했었다. 다행히 초등학교 수학 문제였기 때문에 가르치는 데 큰 문제 없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치고 있는데 품 안에 있던 아이가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연이의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피식피식 웃었다. 머리를 잡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연이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아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되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동그랗고 큰 눈을 들어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펜을 잡고 장난을 치던 이하준은 연이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이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흥.”콧방귀를 뀌는 아이를 보며 연이가 통통한 손을 뻗어 거만한 얼굴의 이하준을 가리키며 큰소리쳤다.“이모, 하준이가 날 도발하고 있어요.”수학책을 들춰보던 서유는 아이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였다.“그럴 리가. 하준이는 이제 고작 한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무슨 도발을 해?”연이는 하준이를 가리키며 발을 동동 굴렀다.“봐봐요. 나한테 고개를 치켜들면서 눈으로 날 비웃고 있잖아요.”책에서 시선을 떼고 아이를 쳐다보자 아이는 이내 고개를 떨구면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서유가 잡아당기자 아이는 일부러 손에 든 펜을 잡고 서유를 향해 환하게 웃기도 했다. 한 살배기 아이가 갑자기 얼굴을 확 바꾸는 모습에 연이는 깜짝 놀랐다.“이모, 하준이 얘... 좀 무서운 것 같아요.”아이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서유는 연이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이모랑 같이 잠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까?”하준이를 노려보고 있던 연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집에서 하준이랑 같이 있을 거예요. 하준이가 저녁에 잘 때 침대에 오줌 싸는지 안 싸는지 지
그동안 매일 아이를 안고 잤던 서유는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남편의 마음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저녁에 샤워 시키고 나서 연이랑 같이 재울게요.”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기분이 좋아진 건지 손을 뻗어 아들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가 고개를 확 돌리더니 서유를 덥석 껴안고는 그녀의 품에 안기며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허공에서 멈칫하던 그의 손은 이내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아이는 불쾌한 표정을 지은 채 작은 몸을 비틀었다. 그는 아이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리 어린아이가 아빠의 뜻을 알아차릴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알아차리면 뭐 어떠한가? 말도 못 하는 아이가 그에게서 서유를 빼앗을 수 있을까?잠시 후, 저녁을 마친 뒤 서유는 하준이를 안고 샤워하러 갔다. 집에 육아 도우미가 있긴 하지만 아이를 낳자마자 혼수상태에 빠졌던 터라 아이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최대한 아이를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이승하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씻긴 후, 목욕 수건을 집어 아이의 몸을 감싸고 다른 수건으로 아이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향긋한 아이를 보며 그녀는 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참지 못하고 아이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여보, 우리 하준이 너무 귀엽지 않아요? 매일 안고 있어도 놓기가 아쉬워요.”잠옷을 가지고 온 그가 욕조 옆에 걸터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았다.“요즘 무릎이 너무 아파. 이따가 좀 많이 주물러줘.”무릎이 아프다는 그의 말에 그녀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얼른 방에 가 있어요. 하준이 재우고 나서 마사지 해줄게요.”그가 발걸음을 옮기더니 아이의 앞으로 다가가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내가 재울게.”힘찬 손에 억지로 어깨가 눌린 아이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지만 아이가 어찌 그의 힘을 당해낼 수가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하는 아이를 안고 연이의 방으로 들어왔다. 한편, 저녁을 먹을 때 주태현은 오늘 밤 아이가 연
저도 모르게 그의 몸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달라붙어 아찔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남자의 애무는 끝이 없었고 그녀는 얕은 신음을 토해냈다. 결국 참을 수 없었던 그녀가 그를 향해 애원하자 남자는 그제야 그녀의 손을 잡고 옆에 놓인 콘돔을 집어 들었다.“해줘.”정신이 혼미해진 그녀는 한껏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새빨간 그의 눈동자를 따라 손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그 순간,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잡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남자에 의해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남자의 포악한 몸짓에 그녀는 이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온몸이 떨리면서도 그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를 썼고 자석처럼 그의 몸에 매달려 있어 등이 침대 시트에 닿지도 않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팽팽한 느낌에 그는 점점 더 깊숙이 들어왔고 절정에 이른 그가 결국 얕은 신음을 토해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그가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한 번만 더 해.”힘에 부친 그녀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 그녀를 자신의 아래로 가두어버렸다. 이제는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해도 몸이 후끈 달아올라 그녀는 흠뻑 젖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처음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즐기며 서로를 탐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모, 이모부. 하준이가 안 보여요. 얼른 나와보세요.”아이가 사라졌다는 말에 서유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흥미가 완전히 사라졌다. 급히 이승하를 밀어내고는 바닥에 흩어진 잠옷을 집어 들어 아무렇게나 몸에 걸치고는 문밖으로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어떻게 된 거야? 하준이가 왜 갑자기 없어져?”“저도 잘 모르겠어요. 공부 끝나고 방에 갔더니 아기 침대에 없는 거예요. 주 집사님이 별장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찾지 못했어요.”서유는 놀라서 심장이 벌벌 떨렸고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빛도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그녀는 비틀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까지 이승하는 서유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마다 아이를 먼저 재우고 나서 아이의 방으로 안고 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잠에서 깨어났고 자꾸 떼를 쓰는 바람에 둘만의 시간은 늘 아쉬움이 가득한 채로 끝이 났다. 예전처럼 뜨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그는 아이를 아예 이연석의 집으로 보내버렸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아이를 보내니 이연석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욕정이 많은 형이 아들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집으로 보낸다는 걸 그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여 이승하가 아이를 데려다줄 때마다 이연석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형을 비웃었다. 그러나 이승하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급히 자리를 떴다. 하지만 아들을 동생의 집에 보내는 방법도 얼마 되지 않아 쓸 수 없게 되었다. 오뚝이와 깡순이 남매가 하준이의 괴롭힘에 매일 대성통곡을 했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하준이는 이연석까지 괴롭히고 있었다. 어떻게 괴롭히냐는 서유의 물음에 그가 쌓인 불만을 토해냈다. “가혜 씨가 집에 있을 때는 그렇게 얌전히 잘 놀기만 하더니. 가혜 씨가 출근하기만 하면 떼를 쓰는 겁니다.”“육아 도우미의 손길도 거부하고 꼭 나한테만 안아달라고 하네요.”아이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겠는가? 그러나 하루 종일 안고 있는다면 아무리 체력이 좋은 남자라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하준이를 안은 채 울고 있는 두 아이까지 달래야 하니 정신이 없었다. 문제는 세 명의 아이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니 머리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컴퓨터를 연구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하준이를 돌려보냈다.형과 형수의 뜨거운 시간을 망칠 수밖에. 나부터 살고 봐야지. 이연석의 말을 서유는 믿기 어려웠다. 하준이는 평소에 말을 잘 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얌전한 아이였다. 정가혜도 그렇게 말하는데... 이연석은 하준이가 겉으로만 순진한 척하
이씨 가문의 삼 남매가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괴롭히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사실이 곧 원장의 귀에 전해졌고 유치원 원장은 이하준을 불러와 어디서 배운 나쁜 버릇이냐고 다그쳤다. 그 물음에 아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육성재 삼촌이라고 했고 유치원 원장은 서유에게 전화를 걸어 육성재가 어떤 사람인지, 왜 아이한테 이런 나쁜 것만 가르친 것인지 물었다. 마침 이하준을 보러 블루리도에 왔던 육성재는 유치원 원장의 말을 듣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서유의 핸드폰을 빼앗아 유치원 원장과 한참 동안 말다툼을 했다.유치원 원장은 아이가 현재 유치원에서 짱이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유치원생들과 싸움을 한다고 했다. 그제야 육성재는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와 확실히 관계가 있는 일이니까. 육성아가 결혼하고 나서 육성재는 바로 귀국했고 줄곧 블루리도 맞은 편의 별장에 묵고 있었다. 그는 툭 하면 찾아와서 이승하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승하가 없는 틈을 타서 하준이를 데리고 다니며 위세를 부렸다. 아이한테 아래 부하들을 데리고 다니는 게 얼마나 위풍당당한 일인지만 알려준 것뿐이었다. 싸움을 하라고 가르쳐준 적은 없는데... 그러나 육성재가 가르쳤든 가르치지 않았든 서유는 그가 더 이상 이하준에게 접근하는 걸 금했고 앞으로 아이를 보러 올 권한도 박탈해 버렸다. 어쩔 수 없었던 육성재는 하준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아이를 ‘납치’했다. 아이가 서유한테 자신이 결코 싸움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길 바라서였다. 길가에 서 있던 이하준은 턱을 치켜들고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는 한마디 내뱉었다.“호랑이 삼촌, 죄송해요. 유치원에 가고 싶지도 않고 혼나고 싶지도 않아서 삼촌이 가르쳐 준 거라고 했어요.”아이는 육성재와 김선우에게 각각 별명을 붙여줬는데 육성재는 호랑이 삼촌, 김선우는 작은 호랑이 삼촌이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더 가깝게 여긴 줄 알고 엄청 기뻐했다. 이승하에게 자랑을 하니 그는 피식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어린 하
이하준이 다섯 살이 되던 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김선우가 카지노에서 타짜를 만나게 되었는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결과 처참히 패배했고 결국 속옷 차림으로 김종수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이승하가 하준이를 혼내던 것처럼 김종수도 몽둥이를 들고 김선우를 호되게 때렸다. 너무 창피해서 그 후로 김선우는 다시 카지노에 가지 않았다. 문제는 이걸 이하준한테 몰래 가르쳐준 것이다.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던 이하준은 김선우의 가르침을 받고 도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다행히도 도박 자체인 놀음이 아니라 암호 풀이에 더 관심을 가졌다. 매번 그가 암호 풀이 장난감을 가져올 때면 이하준은 아무 말도 없이 서재의 카펫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그 모습을 보면서 김선우는 이승하한테 호되게 매를 맞은 것 때문에 아이가 저리된 거라고 이승하의 탓을 했다. 하준이 일에는 참견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이승하의 말도 듣지 않고 그는 계속 블루리도에 남아있었다. 결국 이승하한테 뺨을 얻어맞은 뒤 집으로 돌아갔고 집에 가서 김종수한테 일러바치니 또다시 뺨을 얻어맞았다. 허구한 날 놀고먹기만 하는 아들이 빨리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김종수는 가문에서 가장 험한 일을 아들한테 맡겼다. 해외에서 패거리들과 몇 번 크게 싸우고 반쯤 죽도록 맞고 나니 김선우도 많이 얌전해졌다. 더 이상 횡포를 부리지도 않고 사람들과 싸우지도 않고 김씨 가문의 정규 사업들을 맡기 시작했다. 그럼 최소한 얻어맞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한편, 육성재는 지난 2년 동안 LK 그룹을 이끌고 북미 시장의 진출에 힘을 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씨 가문의 넷째 이동하도 북미 시장을 넘보고 있었고 이승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상씨 가문에서는 이동하에게 프로젝트를 많이 넘겼다. 이동하가 북미 프로젝트를 많이 따낸 것을 보고 육성재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고 직접 K국까지 가서 상연훈을 만났다. 5년이 지난 지금, 상연훈은 큰 형의 자리를 이어받아 서광그룹의 대표이사뿐만 아니라 상씨 가문의 권력자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