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모르게 그의 몸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달라붙어 아찔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남자의 애무는 끝이 없었고 그녀는 얕은 신음을 토해냈다. 결국 참을 수 없었던 그녀가 그를 향해 애원하자 남자는 그제야 그녀의 손을 잡고 옆에 놓인 콘돔을 집어 들었다.“해줘.”정신이 혼미해진 그녀는 한껏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새빨간 그의 눈동자를 따라 손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그 순간,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잡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남자에 의해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남자의 포악한 몸짓에 그녀는 이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온몸이 떨리면서도 그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를 썼고 자석처럼 그의 몸에 매달려 있어 등이 침대 시트에 닿지도 않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팽팽한 느낌에 그는 점점 더 깊숙이 들어왔고 절정에 이른 그가 결국 얕은 신음을 토해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그가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한 번만 더 해.”힘에 부친 그녀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 그녀를 자신의 아래로 가두어버렸다. 이제는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해도 몸이 후끈 달아올라 그녀는 흠뻑 젖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처음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즐기며 서로를 탐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모, 이모부. 하준이가 안 보여요. 얼른 나와보세요.”아이가 사라졌다는 말에 서유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흥미가 완전히 사라졌다. 급히 이승하를 밀어내고는 바닥에 흩어진 잠옷을 집어 들어 아무렇게나 몸에 걸치고는 문밖으로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어떻게 된 거야? 하준이가 왜 갑자기 없어져?”“저도 잘 모르겠어요. 공부 끝나고 방에 갔더니 아기 침대에 없는 거예요. 주 집사님이 별장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찾지 못했어요.”서유는 놀라서 심장이 벌벌 떨렸고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빛도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그녀는 비틀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까지 이승하는 서유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마다 아이를 먼저 재우고 나서 아이의 방으로 안고 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잠에서 깨어났고 자꾸 떼를 쓰는 바람에 둘만의 시간은 늘 아쉬움이 가득한 채로 끝이 났다. 예전처럼 뜨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그는 아이를 아예 이연석의 집으로 보내버렸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아이를 보내니 이연석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욕정이 많은 형이 아들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집으로 보낸다는 걸 그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여 이승하가 아이를 데려다줄 때마다 이연석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형을 비웃었다. 그러나 이승하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급히 자리를 떴다. 하지만 아들을 동생의 집에 보내는 방법도 얼마 되지 않아 쓸 수 없게 되었다. 오뚝이와 깡순이 남매가 하준이의 괴롭힘에 매일 대성통곡을 했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하준이는 이연석까지 괴롭히고 있었다. 어떻게 괴롭히냐는 서유의 물음에 그가 쌓인 불만을 토해냈다. “가혜 씨가 집에 있을 때는 그렇게 얌전히 잘 놀기만 하더니. 가혜 씨가 출근하기만 하면 떼를 쓰는 겁니다.”“육아 도우미의 손길도 거부하고 꼭 나한테만 안아달라고 하네요.”아이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겠는가? 그러나 하루 종일 안고 있는다면 아무리 체력이 좋은 남자라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하준이를 안은 채 울고 있는 두 아이까지 달래야 하니 정신이 없었다. 문제는 세 명의 아이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니 머리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컴퓨터를 연구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하준이를 돌려보냈다.형과 형수의 뜨거운 시간을 망칠 수밖에. 나부터 살고 봐야지. 이연석의 말을 서유는 믿기 어려웠다. 하준이는 평소에 말을 잘 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얌전한 아이였다. 정가혜도 그렇게 말하는데... 이연석은 하준이가 겉으로만 순진한 척하
이씨 가문의 삼 남매가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괴롭히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사실이 곧 원장의 귀에 전해졌고 유치원 원장은 이하준을 불러와 어디서 배운 나쁜 버릇이냐고 다그쳤다. 그 물음에 아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육성재 삼촌이라고 했고 유치원 원장은 서유에게 전화를 걸어 육성재가 어떤 사람인지, 왜 아이한테 이런 나쁜 것만 가르친 것인지 물었다. 마침 이하준을 보러 블루리도에 왔던 육성재는 유치원 원장의 말을 듣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서유의 핸드폰을 빼앗아 유치원 원장과 한참 동안 말다툼을 했다.유치원 원장은 아이가 현재 유치원에서 짱이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유치원생들과 싸움을 한다고 했다. 그제야 육성재는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와 확실히 관계가 있는 일이니까. 육성아가 결혼하고 나서 육성재는 바로 귀국했고 줄곧 블루리도 맞은 편의 별장에 묵고 있었다. 그는 툭 하면 찾아와서 이승하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승하가 없는 틈을 타서 하준이를 데리고 다니며 위세를 부렸다. 아이한테 아래 부하들을 데리고 다니는 게 얼마나 위풍당당한 일인지만 알려준 것뿐이었다. 싸움을 하라고 가르쳐준 적은 없는데... 그러나 육성재가 가르쳤든 가르치지 않았든 서유는 그가 더 이상 이하준에게 접근하는 걸 금했고 앞으로 아이를 보러 올 권한도 박탈해 버렸다. 어쩔 수 없었던 육성재는 하준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아이를 ‘납치’했다. 아이가 서유한테 자신이 결코 싸움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길 바라서였다. 길가에 서 있던 이하준은 턱을 치켜들고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는 한마디 내뱉었다.“호랑이 삼촌, 죄송해요. 유치원에 가고 싶지도 않고 혼나고 싶지도 않아서 삼촌이 가르쳐 준 거라고 했어요.”아이는 육성재와 김선우에게 각각 별명을 붙여줬는데 육성재는 호랑이 삼촌, 김선우는 작은 호랑이 삼촌이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더 가깝게 여긴 줄 알고 엄청 기뻐했다. 이승하에게 자랑을 하니 그는 피식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어린 하
이하준이 다섯 살이 되던 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김선우가 카지노에서 타짜를 만나게 되었는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결과 처참히 패배했고 결국 속옷 차림으로 김종수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이승하가 하준이를 혼내던 것처럼 김종수도 몽둥이를 들고 김선우를 호되게 때렸다. 너무 창피해서 그 후로 김선우는 다시 카지노에 가지 않았다. 문제는 이걸 이하준한테 몰래 가르쳐준 것이다.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던 이하준은 김선우의 가르침을 받고 도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다행히도 도박 자체인 놀음이 아니라 암호 풀이에 더 관심을 가졌다. 매번 그가 암호 풀이 장난감을 가져올 때면 이하준은 아무 말도 없이 서재의 카펫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그 모습을 보면서 김선우는 이승하한테 호되게 매를 맞은 것 때문에 아이가 저리된 거라고 이승하의 탓을 했다. 하준이 일에는 참견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이승하의 말도 듣지 않고 그는 계속 블루리도에 남아있었다. 결국 이승하한테 뺨을 얻어맞은 뒤 집으로 돌아갔고 집에 가서 김종수한테 일러바치니 또다시 뺨을 얻어맞았다. 허구한 날 놀고먹기만 하는 아들이 빨리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김종수는 가문에서 가장 험한 일을 아들한테 맡겼다. 해외에서 패거리들과 몇 번 크게 싸우고 반쯤 죽도록 맞고 나니 김선우도 많이 얌전해졌다. 더 이상 횡포를 부리지도 않고 사람들과 싸우지도 않고 김씨 가문의 정규 사업들을 맡기 시작했다. 그럼 최소한 얻어맞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한편, 육성재는 지난 2년 동안 LK 그룹을 이끌고 북미 시장의 진출에 힘을 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씨 가문의 넷째 이동하도 북미 시장을 넘보고 있었고 이승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상씨 가문에서는 이동하에게 프로젝트를 많이 넘겼다. 이동하가 북미 프로젝트를 많이 따낸 것을 보고 육성재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고 직접 K국까지 가서 상연훈을 만났다. 5년이 지난 지금, 상연훈은 큰 형의 자리를 이어받아 서광그룹의 대표이사뿐만 아니라 상씨 가문의 권력자
서유의 미모에 반해 점차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 여자가 잘되기를 바라니 그게 사랑 아니겠나?지금처럼 서유가 출산의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남편과 아들,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진심으로 기뻤다. 가끔 이승하와 싸우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가정을 파괴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영원히 할 수가 없었다. 이번 생에는 말하지 못할 이 사랑을 가슴속 깊이 파묻은 그가 술잔을 들고 상연훈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예쁜 여자 좋아합니다. 서유 씨보다 더 예쁜 여자분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마음을 감쪽같이 속인 것인지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던 상연훈은 결국 단서를 찾지 못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죠. 그러나 육 대표님 안목이 워낙 높아서 쉽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런 여자를 만난다면 육 대표님한테 소개해 주죠.”피식 웃던 육성재는 술잔을 들어 상연훈과 건배했다.“예쁜 여자도 좋지만 좋은 프로젝트도 나한테 남겨주시죠. JS 그룹 혼자만 크게 성장하면 서광그룹도 발밑에 밟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난 상관없습니다. JS 그룹이라면 얼마든지요.”그 말에 육성재는 또다시 화를 벌컥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두 사람이 말다툼할 때, 레스토랑에서 귀청이 찢어질 듯한 뺨 소리가 들려왔다. 뺨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바닥에 쓰러지더니 한참 동안 일어나질 못하였다. “상윤별, 똑똑히 들어. 내가 누구를 만나든 그건 내 마음이고 널 때리고 싶으면 때릴 거야. 상씨 가문의 수양딸이라고 네가 날 우습게 봐?”별 관심이 없었던 상연훈은 상윤별이라는 이름에 고개를 돌렸고 마침 그녀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자를 짚고 일어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 반쪽이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앞으로 다가가 남편 앤드류의 팔을 잡아당겼다.“할 말 있으면 돌아가서 해. 밖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앤드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사실 상연훈은 그녀가 미웠다. 분명히 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그녀는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것도 집안을 제외하고는 전혀 내세울 것이 없는 날라리 재벌 2세. 그녀가 앤드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지금껏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놀 줄 알고 여자를 달래줄도 알고 때릴 줄도 아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지금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걸 누구를 탓하겠는가? 자업자득인 것이지... 다만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날 밤,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상윤별이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채 그를 찾아와 애원했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그는 한밤중에 이불을 젖히고 창가에 서서 마당 건너편 그녀가 이 집에 살았을 때 머물렀던 방을 보며 넋을 잃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꿈속의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아당기며 끊임없이 소리치는 장면이었다.“오빠, 나 좀 구해줘요. 죽을 것 같아요...”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투신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그녀가 지금껏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앤드류와의 결혼 생활 내내 그녀는 끊임없이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도저히 견디지 못할 때면 상씨 가문으로 돌아와 하소연했었다. 그러나 상연훈의 어머니는 다 그렇게 산다며 참고 이혼하지 말라고 그녀를 설득했고 이 일을 절대 상연훈에게 알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어쩔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혼자 모든 일을 짊어져야 했고 최근 들어 앤드류의 여자관계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남편의 일에 관심이 없었지만 앤드류는 그녀가 사사건건 관여한다고 그녀를 모욕했다.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에게 손지껌을 하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맨주먹이었다가 나중에는 무기까지 들었다.반쯤 죽도록 그녀를 때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여덟 살이 된 딸아이한테까지 손을 댔다.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는 딸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반항했다. 서로 밀고 당기는 사이 그녀는 차라리 같이 죽자라는 생각에 앤드류를 잡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던 그가 용기를 내어 옆에 있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로 마주친 시선, 피할 수 없는 시선에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애써 그를 보려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나한테 올래?”자신의 손 위에 놓인 커다란 그의 손을 보며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초라해진 자신을 싫어하기는커녕 그에게로 오라고 하다니...오랫동안 지옥에서 살아온 그녀가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미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은 그녀가 어찌 스캔들조차 하나 없는 좋은 남자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오빠.”그녀는 웃으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난 오빠 여동생으로 사는 게 좋아요.”자신이 부족하다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그를 거절했다. 그를 좋아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가볍게 툭 내던진 한마디 말. “오빠한테 딴 마음 같은 거 없었어요. 오빠 어머니가 날 강요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오빠랑은 함께할 수 없어요.”웃고 있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확인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두 눈은 진심을 얘기하듯 잔잔하기만 했다.한참 동안 쳐다보던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양복을 정리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그가 떠난 뒤, 그녀는 얼굴을 감싼 채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연훈 같은 남자는 훨씬 더 좋은 여자가 어울리니까.얼마 후, 병원에서 퇴원한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딸과 함께 둘이 지냈다. 다행히 주하늘을 따라다니며 일을 하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마음을 빨리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녀와 상연훈 사이에는 영원히 교차하지 않는 평행선이 있는 듯했다.그러다가 어느 파티에서 한 여인이 상연훈을 노리고 그의 술잔에 약을 탔다. 그 파티에 상윤별도 참석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고 의사가 올 때까지 버틸 수가 없었던
청첩장을 받은 서유는 그 위에 적힌 신부의 이름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셋째 오빠가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달빛이 쏟아지는 눈부신 밤, 으리으리한 성당 안에서 상연훈의 초호화 결혼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고급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그가 가슴에 하얀 장미꽃 한 송이를 달고는 맞은편 신부를 바라보는데 그의 시선은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상윤별이 입고 있는 하얀 웨딩드레스 위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수없이 박혀 있었고 불빛에 드레스가 더욱 반짝반짝 빛이 났다. 결혼식장은 세계 각지에서 온 하객들로 붐비었고 떠들썩한 분위기, 맛있는 음식, 귀한 술 등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은은한 음악에 맞춰 그가 신부의 손을 잡고는 천천히 무대 가운데로 걸어갔다.두 사람은 결혼반지를 교환하고 결혼 서약을 낭독하고...그가 신부의 뒤통수를 감싼 채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그녀에게 진한 키스를 했다. 오래 이어진 키스는 지난 몇 년간의 기다림에 대해 보상받으려는 것 같았다. 키스를 마친 그가 다시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상윤별의 딸을 어루만졌다.“이제부터 삼촌이 아니라 네 아빠가 될 거야. 허락해 줄 거지?”상윤별의 딸 제시카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의 폭행을 지켜보면서 아빠라는 존재가 무서웠다. 그러나 상연훈이 아빠가 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억 속에 상연훈은 엄마랑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만날 때마다 잘해주었고 몰래 용돈도 주고 학교에 보러도 왔었다. 삼촌이 표현에 서툴렀을 뿐, 엄마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아이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삼촌의 바람대로 엄마와 결혼했으니 딸로서 당연히 기쁜 일이었다. 제시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부터 아빠라고 불러도 돼요?”아이의 말에 행복한 미소를 짓던 그가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늘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있을 때, 성당 밖에서는 불꽃이 현란하게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