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던 그가 용기를 내어 옆에 있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로 마주친 시선, 피할 수 없는 시선에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애써 그를 보려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나한테 올래?”자신의 손 위에 놓인 커다란 그의 손을 보며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초라해진 자신을 싫어하기는커녕 그에게로 오라고 하다니...오랫동안 지옥에서 살아온 그녀가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미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은 그녀가 어찌 스캔들조차 하나 없는 좋은 남자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오빠.”그녀는 웃으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난 오빠 여동생으로 사는 게 좋아요.”자신이 부족하다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그를 거절했다. 그를 좋아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가볍게 툭 내던진 한마디 말. “오빠한테 딴 마음 같은 거 없었어요. 오빠 어머니가 날 강요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오빠랑은 함께할 수 없어요.”웃고 있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확인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두 눈은 진심을 얘기하듯 잔잔하기만 했다.한참 동안 쳐다보던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양복을 정리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그가 떠난 뒤, 그녀는 얼굴을 감싼 채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연훈 같은 남자는 훨씬 더 좋은 여자가 어울리니까.얼마 후, 병원에서 퇴원한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딸과 함께 둘이 지냈다. 다행히 주하늘을 따라다니며 일을 하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마음을 빨리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녀와 상연훈 사이에는 영원히 교차하지 않는 평행선이 있는 듯했다.그러다가 어느 파티에서 한 여인이 상연훈을 노리고 그의 술잔에 약을 탔다. 그 파티에 상윤별도 참석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고 의사가 올 때까지 버틸 수가 없었던
청첩장을 받은 서유는 그 위에 적힌 신부의 이름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셋째 오빠가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달빛이 쏟아지는 눈부신 밤, 으리으리한 성당 안에서 상연훈의 초호화 결혼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고급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그가 가슴에 하얀 장미꽃 한 송이를 달고는 맞은편 신부를 바라보는데 그의 시선은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상윤별이 입고 있는 하얀 웨딩드레스 위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수없이 박혀 있었고 불빛에 드레스가 더욱 반짝반짝 빛이 났다. 결혼식장은 세계 각지에서 온 하객들로 붐비었고 떠들썩한 분위기, 맛있는 음식, 귀한 술 등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은은한 음악에 맞춰 그가 신부의 손을 잡고는 천천히 무대 가운데로 걸어갔다.두 사람은 결혼반지를 교환하고 결혼 서약을 낭독하고...그가 신부의 뒤통수를 감싼 채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그녀에게 진한 키스를 했다. 오래 이어진 키스는 지난 몇 년간의 기다림에 대해 보상받으려는 것 같았다. 키스를 마친 그가 다시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상윤별의 딸을 어루만졌다.“이제부터 삼촌이 아니라 네 아빠가 될 거야. 허락해 줄 거지?”상윤별의 딸 제시카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의 폭행을 지켜보면서 아빠라는 존재가 무서웠다. 그러나 상연훈이 아빠가 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억 속에 상연훈은 엄마랑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만날 때마다 잘해주었고 몰래 용돈도 주고 학교에 보러도 왔었다. 삼촌이 표현에 서툴렀을 뿐, 엄마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아이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삼촌의 바람대로 엄마와 결혼했으니 딸로서 당연히 기쁜 일이었다. 제시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부터 아빠라고 불러도 돼요?”아이의 말에 행복한 미소를 짓던 그가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늘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있을 때, 성당 밖에서는 불꽃이 현란하게
제시카가 자리에 앉아마자 연이는 바로 케이크를 들고 제시카에게 건네주었다.“인형 친구, 무대에 오래 서 있어서 배고프지? 얼른 이거라도 좀 먹어.”혼혈 아이였던 제시카는 푸른 눈에 하얀 피부, 오뚝한 콧날을 가지고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반짝이는 별을 담고 있는 호수 같았다. 그런 여자아이는 연이의 눈에 그저 인형처럼 보였다. 연이는 자신도 제시카처럼 날씬하고 예쁘게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이모와 이모부의 정성 어린 보살핌에 연이는 점점 더 뚱뚱해졌고 나중에 크면 진짜 뚱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생각에 케이크를 손에 들고 있던 연이는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걸 모두 제시카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이제부터 난 다이어트할 거니까 네가 나 대신 다 먹어.”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예의상 연이가 건네주는 케이크를 건네받았다.“하나도 안 뚱뚱한데. 되게 귀여워.”연이가 싱글벙글 웃으면 대답했다.“제시카, 귀엽다는 말은 뚱보한테 쓰는 말이야.”어색한 웃음을 짓던 제시카가 손을 저었다.“미안,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 내가 한국어가 서툴러서...”천진난만한 연이보다 4살 어린 제시카는 뭐든 조심스러워 보였다. 열등감이 있는 건지 어린 나이에 말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줄도 알았고 상대가 기분 나빠하면 안절부절못하고 미안해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한테 매를 맞은 것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제시카의 얘기를 듣고 연이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제시카의 어깨를 토닥였다.“농담이야. 뚱보라고 해도 상관없으니까 미안해하지 마.” 여전히 미안하다고 하는 제시카를 보며 연이는 그녀와 함께 불꽃놀이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승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모부, 불꽃놀이 폭죽 가지러 갔다 올게요”이승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하준도 핑계를 대며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이내 이승하의 큰 손에 몸이 짓눌리게 되었다.“연이 누나는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않지만 넌 아니잖아.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 있어.”입을 삐죽거리며
상연훈의 결혼식이 끝난 뒤, 서유는 두 아이를 데리고 며칠 동안 상씨 가문에서 머물다가 귀국했다. 모든 것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두 부자간에 별로 말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름 평안한 생활이었다. 조지와 심이준 그리고 심혜진 세 사람은 가끔 연이를 보러 왔고 몇 번 마주치다 보니 나중에는 아예 짝을 지어 같이 연이를 보러 왔다. 심이준은 여전히 게임을 좋아하고 금 모으기를 좋아했고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보기에는 날라리 같아 보여도 지현우와 김초희가 남긴 회사를 꽤나 잘 관리하고 있었다. 두 나라를 오고 가는 게 불편했던 그는 아예 두 회사를 합병했고 김초희와 지현우가 만나 사랑한 곳에서 회사를 설립하고 우희건설이라고 회사 이름까지 개명했다. 두 정상급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회사는 그의 홍보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김초희를 안타까워했고 어떤 사람은 지현우를 안타까워했다. 쌍방에서 끊임없이 말다툼이 오갔지만 어느 누구도 어긋난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었다. 한편, 나이가 든 조지는 더 이상 메스를 들지 않았고 자신의 능력을 학생들에게 다 가르쳐주었다. 그는 낚시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자연을 만끽하는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오직 하나 변하지 않은 건 매년 심이준, 심혜진과 함께 연이를 만나러 오는 것이었다. 인생의 배우자를 찾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세 사람 중 심혜진은 유일하게 행복한 끝이 없는 사람이었다. 암에 걸린 그녀는 연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항암치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심씨 가문과 지씨 가문의 재산을 모두 연이에게 넘긴 탓에 연이는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돈이 많은 여자가 되었고 평생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심혜진이 죽던 날 서유는 연이
심혜진의 장례식이 끝난 뒤, 서유는 연이를 데리고 김초희를 보러 갔다. 두 사람이 김초희의 무덤으로 다가가 제사를 지낼 때, 하늘에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이하준을 차에 홀로 남겨둔 채 검은 우산을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가 우산을 씌워주었다.차에 홀로 남은 이하준은 차창 옆에 기대어 턱을 괴고는 화가 잔뜩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음에 또 제사를 지낼 기회가 생긴다면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여기저기 마구 뛰어다닐 생각이다. 아빠가 뭐 어쩌겠어?서유는 연이를 데리고 김초희와 지현우를 위해 제사를 지낸 뒤, 주서희를 보러 파미란으로 향했다.매년 주서희의 기일이면 늘 이곳에 찾아왔었다. 하준이가 두 살이 되던 해, 서유는 아이한테 주서희의 무덤 앞에서 인사를 건네라고 하였다. 현재 다섯 살이 된 하준이는 이미 제사 절차에 익숙해진 듯 국화꽃을 무덤 앞에 놓고는 주서희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넸다.그러더니 이승하가 한눈을 판 사이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뒤돌아서서 도망쳤다. 멀리 가기도 전에 큰손이 아이의 옷깃을 잡았고 아이의 작은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씩씩거리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던 윤주원이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제사가 끝나면 나랑 같이 서재에 갈래? 의학 지식을 가르쳐줄게.”하준이는 파미란에 오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이곳에 오면 의학 지식을 가르쳐주는 윤주원 삼촌이 있었으니까. 나이가 어려서 아직 잘 알아듣지는 못하더라도 하준이는 흥미를 느끼고 더 많이 가르쳐달라고 윤주원을 졸랐다.윤주원이 서재로 데리고 가겠다는 말에 하준이도 순간 얌전해졌다. 하준이는 말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관심 있는 사람이나 일이어야 인내심을 갖고 몇 마디 할 뿐 평소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기 일쑤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들은 하나하나 다 배웠었다. 김선우의 게임 실력, 육성재의 부하를 관리하는 능력, 상연훈의 총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주서희의 기일이 지나면 택이의 기일이 다가왔고 서유와 이승하는 아이를 데리고 Y국으로 향했다. 검은색 고급 차량이 멈추는 순간, 이하준은 숲속에서 사슴 한 마리가 뛰쳐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슴을 쫓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이승하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어른들이 한눈을 판 사이 그가 차 문을 열고 숲속으로 달려갔다.그 모습에 서유는 얼른 차에서 내려 아이의 뒤를 쫓아갔고 차 안에 앉아 있던 이승하가 손을 흔들자 소수빈과 소지섭이 바로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을 뒤따라갔다. 묘원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이승하는 차에서 내려와 트렁크를 열고 국화꽃 한 다발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택이의 무덤 앞에 가서 허리를 굽히고 꽃을 내려놓았다. “택이야, 하준이랑 같이 너 보러 왔어.”매년 똑같은 말로 시작해 비석에 새겨진 택이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택이가 살아있었다면 소수빈과 소지섭처럼 하준이를 많이 예뻐했겠지... 어쩌면 그들보다 더 예뻐하지 않았을까? 택이라면 하준이를 안아 목말을 태워주고 하준이가 제멋대로 괴롭혀도 그냥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택이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택이가 하준이의 손을 잡고 석양이 쏟아지는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그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크고 작은 그림자가 머릿속에 희미하게 그려졌다. 현실이 아닌 모습이라 할지라도 이승하는 너무 그리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니 택이의 얼굴도 점차 흐릿해졌다. 점점 택이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았고 마치 영화가 끝난 것처럼 모든 것이 허무하게 변하고 사람의 얼굴마저도 세월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택이의 묘비를 잡고 과거를 회상하며 택이의 모습을 점차 잊어가고 있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때, 검은색 코트에 베레모를 쓴 그림자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묘원의 다른 입구로 들어왔다. 이승하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육성아가 자신을 보면 화를 내고 자신 때문에 아픈 기억이 되살아날까 봐 그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묘비를 한번 쓰다듬고는
한편, 나이가 꽉 찼는데도 아직까지 결혼을 안 한 이지민 때문에 유나희는 속이 타들어 갔다. 딸이 최적의 출산 시기를 놓칠까 봐 유나희는 명문 가문의 자제들 중에서 신랑감을 고르기에 바빴고 중매인을 통해 선 자리를 알아보았다. 선을 보러 가서 이지민은 상대를 정중히 거절하였고 자꾸만 늘어나는 선 자리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본가로 달려가 유나희한테 이런 쓸데없는 짓은 이제 그만하라고 하였다. 최근 몇 년 동안, 이지민이 본가에 돌아온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매번 이진철이 꾀병을 부리며 연락해야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 아직도 그 당시의 일을 마음에서 놓지 못하고 유나희를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은 듯하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후회가 된 유나희는 그녀를 볼 때마다 고양이가 호랑이를 마주보듯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나이가 들어서 아이가 없으면 많이 외롭고 아쉬울 거야...”그 말에 소파에 앉아 있던 이지민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어떤 부모가 있으면 어떤 자식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난 내 자식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리 모질게 대하는 악덕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차라리 나아요. 그 피가 어디 가겠어요? 굳이 자식들 괴롭히지 말고 나 혼자 사는 게 낫지.”가시가 박힌 말을 평생 재벌가 사모님으로 살아온 유나희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 당시의 일은 확실히 그녀가 잘못한 것이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지민아. 엄마는 죽기 전에 네가 결혼하는 걸 꼭 보고 싶어서 그래.”이지민은 피식 웃었다.“이수 오빠랑 날 그렇게 반대하고 온갖 방법으로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더니. 이제는 결혼을 하라고요? 어떻게 그 말이 그리 쉽게 나올 수 있어요?”유나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잘못은 저지르면 언젠가는 벌을 받게 될 거라더니 그 업보가 이리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 상대가 친딸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답답한 가슴을 움켜쥐고 차가운 얼굴의 이지민을 쳐다보던 그녀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그녀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마도 송사월이 서유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바라보면서였을 것이다.서유가 그에게 일어서길 원했기 때문에, 이미 삶을 포기하고 싶었음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모든 치료의 고통을 견디며 의사에게 협조했고, 마침내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이들은 진작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송사월은 서유가 느끼는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참고 또 참으며 살아갔다.심지어 깊은 밤, 자살을 시도할 만큼 괴로웠던 순간도 수없이 많았지만, 정신을 차릴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살아가야 한다고 되뇌었다.이지민은 그런 송사월을 보며 그가 정이 깊은 사람임을 느꼈고, 점점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토록 순수한 사랑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인지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그녀가 송사월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을 때, 단이수는 늘 조용히 이지민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오늘 밤, 비가 내렸다. 맞은편 건물에 살고 있던 단이수는 커튼을 살짝 열고, 빗방울이 창문을 타고 흐르는 사이로 혼자서 창가에 앉아 국수를 먹고 있는 이지민을 바라보았다.그녀가 자신을 알아챌까 두려워 불을 켜지 못한 단이수는, 어둠 속에서 구원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쥐처럼 숨죽이며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았다.그도 자신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곁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뿐이었다.사실 단이수는 이지민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얼마나 사랑했느냐 하면, 밤낮으로 잠들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할 정도였다.결국 위암에 걸리고 말았지만, 남은 시간을 그녀 곁에서 보낼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모른다고 해도, 그는 그저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이지민은 국수를 다 먹고 난 후 잠시 창가에 앉아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의 불이 꺼지면서 단이수가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