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던 그가 용기를 내어 옆에 있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로 마주친 시선, 피할 수 없는 시선에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애써 그를 보려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나한테 올래?”자신의 손 위에 놓인 커다란 그의 손을 보며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초라해진 자신을 싫어하기는커녕 그에게로 오라고 하다니...오랫동안 지옥에서 살아온 그녀가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미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은 그녀가 어찌 스캔들조차 하나 없는 좋은 남자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오빠.”그녀는 웃으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난 오빠 여동생으로 사는 게 좋아요.”자신이 부족하다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그를 거절했다. 그를 좋아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가볍게 툭 내던진 한마디 말. “오빠한테 딴 마음 같은 거 없었어요. 오빠 어머니가 날 강요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오빠랑은 함께할 수 없어요.”웃고 있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확인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두 눈은 진심을 얘기하듯 잔잔하기만 했다.한참 동안 쳐다보던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양복을 정리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그가 떠난 뒤, 그녀는 얼굴을 감싼 채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연훈 같은 남자는 훨씬 더 좋은 여자가 어울리니까.얼마 후, 병원에서 퇴원한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딸과 함께 둘이 지냈다. 다행히 주하늘을 따라다니며 일을 하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마음을 빨리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녀와 상연훈 사이에는 영원히 교차하지 않는 평행선이 있는 듯했다.그러다가 어느 파티에서 한 여인이 상연훈을 노리고 그의 술잔에 약을 탔다. 그 파티에 상윤별도 참석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고 의사가 올 때까지 버틸 수가 없었던
청첩장을 받은 서유는 그 위에 적힌 신부의 이름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셋째 오빠가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달빛이 쏟아지는 눈부신 밤, 으리으리한 성당 안에서 상연훈의 초호화 결혼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고급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그가 가슴에 하얀 장미꽃 한 송이를 달고는 맞은편 신부를 바라보는데 그의 시선은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상윤별이 입고 있는 하얀 웨딩드레스 위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수없이 박혀 있었고 불빛에 드레스가 더욱 반짝반짝 빛이 났다. 결혼식장은 세계 각지에서 온 하객들로 붐비었고 떠들썩한 분위기, 맛있는 음식, 귀한 술 등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은은한 음악에 맞춰 그가 신부의 손을 잡고는 천천히 무대 가운데로 걸어갔다.두 사람은 결혼반지를 교환하고 결혼 서약을 낭독하고...그가 신부의 뒤통수를 감싼 채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그녀에게 진한 키스를 했다. 오래 이어진 키스는 지난 몇 년간의 기다림에 대해 보상받으려는 것 같았다. 키스를 마친 그가 다시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상윤별의 딸을 어루만졌다.“이제부터 삼촌이 아니라 네 아빠가 될 거야. 허락해 줄 거지?”상윤별의 딸 제시카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의 폭행을 지켜보면서 아빠라는 존재가 무서웠다. 그러나 상연훈이 아빠가 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억 속에 상연훈은 엄마랑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만날 때마다 잘해주었고 몰래 용돈도 주고 학교에 보러도 왔었다. 삼촌이 표현에 서툴렀을 뿐, 엄마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아이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삼촌의 바람대로 엄마와 결혼했으니 딸로서 당연히 기쁜 일이었다. 제시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부터 아빠라고 불러도 돼요?”아이의 말에 행복한 미소를 짓던 그가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늘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있을 때, 성당 밖에서는 불꽃이 현란하게
제시카가 자리에 앉아마자 연이는 바로 케이크를 들고 제시카에게 건네주었다.“인형 친구, 무대에 오래 서 있어서 배고프지? 얼른 이거라도 좀 먹어.”혼혈 아이였던 제시카는 푸른 눈에 하얀 피부, 오뚝한 콧날을 가지고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반짝이는 별을 담고 있는 호수 같았다. 그런 여자아이는 연이의 눈에 그저 인형처럼 보였다. 연이는 자신도 제시카처럼 날씬하고 예쁘게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이모와 이모부의 정성 어린 보살핌에 연이는 점점 더 뚱뚱해졌고 나중에 크면 진짜 뚱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생각에 케이크를 손에 들고 있던 연이는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걸 모두 제시카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이제부터 난 다이어트할 거니까 네가 나 대신 다 먹어.”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예의상 연이가 건네주는 케이크를 건네받았다.“하나도 안 뚱뚱한데. 되게 귀여워.”연이가 싱글벙글 웃으면 대답했다.“제시카, 귀엽다는 말은 뚱보한테 쓰는 말이야.”어색한 웃음을 짓던 제시카가 손을 저었다.“미안,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 내가 한국어가 서툴러서...”천진난만한 연이보다 4살 어린 제시카는 뭐든 조심스러워 보였다. 열등감이 있는 건지 어린 나이에 말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줄도 알았고 상대가 기분 나빠하면 안절부절못하고 미안해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한테 매를 맞은 것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제시카의 얘기를 듣고 연이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제시카의 어깨를 토닥였다.“농담이야. 뚱보라고 해도 상관없으니까 미안해하지 마.” 여전히 미안하다고 하는 제시카를 보며 연이는 그녀와 함께 불꽃놀이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승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모부, 불꽃놀이 폭죽 가지러 갔다 올게요”이승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하준도 핑계를 대며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이내 이승하의 큰 손에 몸이 짓눌리게 되었다.“연이 누나는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않지만 넌 아니잖아.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 있어.”입을 삐죽거리며
상연훈의 결혼식이 끝난 뒤, 서유는 두 아이를 데리고 며칠 동안 상씨 가문에서 머물다가 귀국했다. 모든 것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두 부자간에 별로 말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름 평안한 생활이었다. 조지와 심이준 그리고 심혜진 세 사람은 가끔 연이를 보러 왔고 몇 번 마주치다 보니 나중에는 아예 짝을 지어 같이 연이를 보러 왔다. 심이준은 여전히 게임을 좋아하고 금 모으기를 좋아했고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보기에는 날라리 같아 보여도 지현우와 김초희가 남긴 회사를 꽤나 잘 관리하고 있었다. 두 나라를 오고 가는 게 불편했던 그는 아예 두 회사를 합병했고 김초희와 지현우가 만나 사랑한 곳에서 회사를 설립하고 우희건설이라고 회사 이름까지 개명했다. 두 정상급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회사는 그의 홍보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김초희를 안타까워했고 어떤 사람은 지현우를 안타까워했다. 쌍방에서 끊임없이 말다툼이 오갔지만 어느 누구도 어긋난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었다. 한편, 나이가 든 조지는 더 이상 메스를 들지 않았고 자신의 능력을 학생들에게 다 가르쳐주었다. 그는 낚시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자연을 만끽하는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오직 하나 변하지 않은 건 매년 심이준, 심혜진과 함께 연이를 만나러 오는 것이었다. 인생의 배우자를 찾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세 사람 중 심혜진은 유일하게 행복한 끝이 없는 사람이었다. 암에 걸린 그녀는 연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항암치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심씨 가문과 지씨 가문의 재산을 모두 연이에게 넘긴 탓에 연이는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돈이 많은 여자가 되었고 평생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심혜진이 죽던 날 서유는 연이
심혜진의 장례식이 끝난 뒤, 서유는 연이를 데리고 김초희를 보러 갔다. 두 사람이 김초희의 무덤으로 다가가 제사를 지낼 때, 하늘에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이하준을 차에 홀로 남겨둔 채 검은 우산을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가 우산을 씌워주었다.차에 홀로 남은 이하준은 차창 옆에 기대어 턱을 괴고는 화가 잔뜩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음에 또 제사를 지낼 기회가 생긴다면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여기저기 마구 뛰어다닐 생각이다. 아빠가 뭐 어쩌겠어?서유는 연이를 데리고 김초희와 지현우를 위해 제사를 지낸 뒤, 주서희를 보러 파미란으로 향했다.매년 주서희의 기일이면 늘 이곳에 찾아왔었다. 하준이가 두 살이 되던 해, 서유는 아이한테 주서희의 무덤 앞에서 인사를 건네라고 하였다. 현재 다섯 살이 된 하준이는 이미 제사 절차에 익숙해진 듯 국화꽃을 무덤 앞에 놓고는 주서희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넸다.그러더니 이승하가 한눈을 판 사이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뒤돌아서서 도망쳤다. 멀리 가기도 전에 큰손이 아이의 옷깃을 잡았고 아이의 작은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씩씩거리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던 윤주원이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제사가 끝나면 나랑 같이 서재에 갈래? 의학 지식을 가르쳐줄게.”하준이는 파미란에 오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이곳에 오면 의학 지식을 가르쳐주는 윤주원 삼촌이 있었으니까. 나이가 어려서 아직 잘 알아듣지는 못하더라도 하준이는 흥미를 느끼고 더 많이 가르쳐달라고 윤주원을 졸랐다.윤주원이 서재로 데리고 가겠다는 말에 하준이도 순간 얌전해졌다. 하준이는 말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관심 있는 사람이나 일이어야 인내심을 갖고 몇 마디 할 뿐 평소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기 일쑤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들은 하나하나 다 배웠었다. 김선우의 게임 실력, 육성재의 부하를 관리하는 능력, 상연훈의 총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주서희의 기일이 지나면 택이의 기일이 다가왔고 서유와 이승하는 아이를 데리고 Y국으로 향했다. 검은색 고급 차량이 멈추는 순간, 이하준은 숲속에서 사슴 한 마리가 뛰쳐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슴을 쫓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이승하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어른들이 한눈을 판 사이 그가 차 문을 열고 숲속으로 달려갔다.그 모습에 서유는 얼른 차에서 내려 아이의 뒤를 쫓아갔고 차 안에 앉아 있던 이승하가 손을 흔들자 소수빈과 소지섭이 바로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을 뒤따라갔다. 묘원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이승하는 차에서 내려와 트렁크를 열고 국화꽃 한 다발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택이의 무덤 앞에 가서 허리를 굽히고 꽃을 내려놓았다. “택이야, 하준이랑 같이 너 보러 왔어.”매년 똑같은 말로 시작해 비석에 새겨진 택이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택이가 살아있었다면 소수빈과 소지섭처럼 하준이를 많이 예뻐했겠지... 어쩌면 그들보다 더 예뻐하지 않았을까? 택이라면 하준이를 안아 목말을 태워주고 하준이가 제멋대로 괴롭혀도 그냥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택이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택이가 하준이의 손을 잡고 석양이 쏟아지는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그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크고 작은 그림자가 머릿속에 희미하게 그려졌다. 현실이 아닌 모습이라 할지라도 이승하는 너무 그리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니 택이의 얼굴도 점차 흐릿해졌다. 점점 택이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았고 마치 영화가 끝난 것처럼 모든 것이 허무하게 변하고 사람의 얼굴마저도 세월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택이의 묘비를 잡고 과거를 회상하며 택이의 모습을 점차 잊어가고 있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때, 검은색 코트에 베레모를 쓴 그림자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묘원의 다른 입구로 들어왔다. 이승하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육성아가 자신을 보면 화를 내고 자신 때문에 아픈 기억이 되살아날까 봐 그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묘비를 한번 쓰다듬고는
한편, 나이가 꽉 찼는데도 아직까지 결혼을 안 한 이지민 때문에 유나희는 속이 타들어 갔다. 딸이 최적의 출산 시기를 놓칠까 봐 유나희는 명문 가문의 자제들 중에서 신랑감을 고르기에 바빴고 중매인을 통해 선 자리를 알아보았다. 선을 보러 가서 이지민은 상대를 정중히 거절하였고 자꾸만 늘어나는 선 자리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본가로 달려가 유나희한테 이런 쓸데없는 짓은 이제 그만하라고 하였다. 최근 몇 년 동안, 이지민이 본가에 돌아온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매번 이진철이 꾀병을 부리며 연락해야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 아직도 그 당시의 일을 마음에서 놓지 못하고 유나희를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은 듯하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후회가 된 유나희는 그녀를 볼 때마다 고양이가 호랑이를 마주보듯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나이가 들어서 아이가 없으면 많이 외롭고 아쉬울 거야...”그 말에 소파에 앉아 있던 이지민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어떤 부모가 있으면 어떤 자식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난 내 자식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리 모질게 대하는 악덕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차라리 나아요. 그 피가 어디 가겠어요? 굳이 자식들 괴롭히지 말고 나 혼자 사는 게 낫지.”가시가 박힌 말을 평생 재벌가 사모님으로 살아온 유나희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 당시의 일은 확실히 그녀가 잘못한 것이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지민아. 엄마는 죽기 전에 네가 결혼하는 걸 꼭 보고 싶어서 그래.”이지민은 피식 웃었다.“이수 오빠랑 날 그렇게 반대하고 온갖 방법으로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더니. 이제는 결혼을 하라고요? 어떻게 그 말이 그리 쉽게 나올 수 있어요?”유나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잘못은 저지르면 언젠가는 벌을 받게 될 거라더니 그 업보가 이리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 상대가 친딸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답답한 가슴을 움켜쥐고 차가운 얼굴의 이지민을 쳐다보던 그녀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그녀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마도 송사월이 서유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바라보면서였을 것이다.서유가 그에게 일어서길 원했기 때문에, 이미 삶을 포기하고 싶었음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모든 치료의 고통을 견디며 의사에게 협조했고, 마침내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이들은 진작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송사월은 서유가 느끼는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참고 또 참으며 살아갔다.심지어 깊은 밤, 자살을 시도할 만큼 괴로웠던 순간도 수없이 많았지만, 정신을 차릴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살아가야 한다고 되뇌었다.이지민은 그런 송사월을 보며 그가 정이 깊은 사람임을 느꼈고, 점점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토록 순수한 사랑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인지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그녀가 송사월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을 때, 단이수는 늘 조용히 이지민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오늘 밤, 비가 내렸다. 맞은편 건물에 살고 있던 단이수는 커튼을 살짝 열고, 빗방울이 창문을 타고 흐르는 사이로 혼자서 창가에 앉아 국수를 먹고 있는 이지민을 바라보았다.그녀가 자신을 알아챌까 두려워 불을 켜지 못한 단이수는, 어둠 속에서 구원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쥐처럼 숨죽이며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았다.그도 자신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곁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뿐이었다.사실 단이수는 이지민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얼마나 사랑했느냐 하면, 밤낮으로 잠들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할 정도였다.결국 위암에 걸리고 말았지만, 남은 시간을 그녀 곁에서 보낼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모른다고 해도, 그는 그저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이지민은 국수를 다 먹고 난 후 잠시 창가에 앉아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의 불이 꺼지면서 단이수가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