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숙은 이후 두 번이나 더 연락했지만 강하리는 만나지 않았고 일주일이 지나서 그녀의 사무실에 초대장이 도착했다.진강석의 80세 생일을 맞아 그녀를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강하리가 초대장을 보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진태형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마침 진태형의 전화가 걸려 왔다.“초대장 받았어?”강하리가 대답했다.“아빠, 저 갈게요.”어쨌든 그녀는 진태형의 딸이었고 진강석의 생일 잔치에 그녀가 참석하지 않으면 진태형의 체면이 구겨질 것 같았다.“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나 때문에 억지로 그럴 필요 없어.”하지만 강하리는 웃기만 했다.“제가 가서 당하는 걸 지켜만 보실 거예요?”진태형은 멈칫하다가 이내 웃었다.“그건 당연히 아니지.”말을 마친 그가 다시 물었다.“승훈이 돌아왔어? 걔 오면 같이 가자고 해. 난 그날 손님 접대하느라 너한테 계속 신경을 못 써줄지도 몰라”.강하리는 입술을 다물었다.“아직요.”진태형은 잠시 멈칫했다.“그럼 준호 보고 같이 가자고 해.”강하리는 전화를 끊고 옆에 놓인 꽃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동안 구승훈은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매일 사무실로 꽃다발을 보내주었다.요 며칠 구승훈에게 먼저 연락을 해봤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전화를 걸 때마다 구승훈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면서 휴대폰을 계속 꺼놓으니 구승재에게 연락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구승재는 형이 회의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강하리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밖으로 나서는 순간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차 옆에 서 있는 구승훈의 모습이 나타나자 그 화려한 네온사인이 전부 배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남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눈에는 온통 그리움뿐이었다.회사 앞에 서 있던 강하리는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꼈고 구승훈은 뒤돌아 차에서 리시안셔스를 잔뜩 들고 나오더니 걸음을 옮겨 강하리에게 다가왔다.“자기야, 나 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결국 이렇게 물었다.“구승훈, 도대
희미한 밤 불빛 속에서 여자의 눈동자는 밝았고 마치 자신의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듯 애틋한 물빛이 감돌았다.구승훈은 여자를 품에 꼭 안았다.“앞으로는 안 그럴게.”다소 잠긴 목소리에 강하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에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왠지 물어도 구승훈이 말하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당신 말엔 신빙성이 없어.”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구승훈을 밀어내지 않았다.지난 며칠 동안 그리웠던 것도, 애착이 갔던 것도 진짜였다.구승훈이 정말로 그녀에게 숨기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무사히 돌아왔으니 더 묻지 않아도 됐다.구승훈은 웃었다.“강 대표님 신뢰를 얻기 위해선 계속 노력해야겠네.”강하리가 콧방귀를 뀌었다.“알면 됐어.”구승훈이 문득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다가갔다.“그러면 이제 몸으로 강 대표님께 믿음을 줄게. 어때?”구승훈이 일부러 ‘몸’을 강조하자 강하리는 그를 노려보고는 곁을 지나쳐서 곧장 차로 향했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따라갔다.한 손은 주머니에, 다른 한 손은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는 그의 훤칠한 키가 불빛 아래서 더욱 돋보였다.진시연은 차에 앉아 핸들을 잡은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는 오늘 특별히 강하리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심준호가 사표를 내라고 했을 때 그저 예전처럼 겁을 주거나 경고하는 줄 알았는데 다음 날 병원 측에서 정말로 퇴사 절차를 밟으라고 통보할 줄이야.그 자리에서 바로 백아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백아영은 모든 일을 심준호에게 맡긴다는 말만 되풀이했다.바로 이어서 진태형에게 전화를 거니 평소 그녀를 아껴주던 진태형도 남의 결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말만 했다.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강하리를 찾으러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아직은 그 병원을 떠날 수 없었다.그런데 또다시 이곳에서 저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핸들을 꽉 잡은 진시연의 두 눈에 서늘함이 짙어졌다.왜, 그녀가 좋아하는 것, 중요하게 여기
“그래, 우리 연정이에게 완전한 가정을 만들어주자.”강하리는 구승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눈시울이 시큰거렸다.더 이상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평생 이 남자와 얽혀야 할 운명이라면 차라리 빨리 서로를 곁에 붙잡아 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삼촌이 말한 것처럼 서로 좋아하는 관계는 소중한 거니까.구승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별장으로 갈까? 콘돔 한 박스 샀는데 써보지 않을래, 강 대표님?”강하리는 깜짝 놀라서 재빨리 뻔뻔한 남자를 밀어내려는데 구승훈이 순순히 물러날 리 없었다.“한 번만 하고 돌아가는 건 어때?”강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고 구승훈은 직접 그녀의 손을 잡아 그곳에 갖다 댔다.“느껴져? 널 본 순간부터 원했어.”강하리는 단번에 손에 닿은 물건을 알아차리고 화가 나서 물건을 콱 잡았다.“참아!”며칠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그런 생각만 하다니, 어림도 없지!구승훈은 그녀의 귓불을 살며시 깨물며 옷 속으로 손이 파고들었다.“그러면 오늘은 내가 강 대표님을 모실게, 어때?”말을 마친 뒤 강하리에게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입술을 막았다.남자의 민첩한 손놀림이 그녀의 몸 곳곳에 불을 지폈고 그가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릴 때쯤 강하리가 갑자기 그를 밀어냈다.“일단 먼저 돌아가.”구승훈은 웃었다.“알았어, 그러면 오늘 밤에 강 대표님 제대로 모실게.”그녀가 원한다는 듯이 말하는 상대에 강하리는 얼굴이 타는 듯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강하리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았다.“젖었어? 어디 봐.”강하리의 얼굴에 또 한 번 홍조가 올라왔다.“닥쳐!”개자식!구승훈은 더 이상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시동을 걸어 차를 몰고 나갔다.별장으로 돌아오자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연정이가 보행기를 탄 채 달려왔고 구승훈의 곁에 도착하자 연정이는 작고 뚱뚱한 두 손을 쭉 뻗으며 구승훈을 향해 웅얼거렸다.누가 봐도 아빠에게 안아달라고 조르는 모습이라 구승훈은 연정이를 안아 볼에 뽀
구승훈은 강하리의 입술을 깨물며 샤워기 아래로 그녀를 안고 갔다.머리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은 달아오른 불을 끄기는커녕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원해? 자기야, 말해봐.”구승훈이 턱을 잡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머릿속이 윙윙거리던 강하리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그녀가 깨물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구승훈이 강하리를 들어 올려 벽에 밀쳤다.구승훈이 얼마나 그녀를 탐했는지는 모른다. 그저 모든 게 끝났을 때 강하리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안아 침대에 눕혔고 강하리는 몸을 뒤척이며 잠이 들었다.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구승훈은 입술에 뽀뽀한 뒤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은 이미 흠뻑 젖어 있는 자기 셔츠 단추를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풀었다.단추가 풀리면서 그의 몸에 난 상처가 드러났다.최면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고 그는 점점 더 마음속의 난폭함을 참기 힘들어졌다.마치 잠깐의 고통만이 마음속 짜증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구승훈은 무표정하게 웃옷을 벗고 샤워했다.차가운 물이 몸을 적시자 구승훈은 쓴웃음을 내뱉으며 자신의 욕망을 내려다보았다.그는 강하리를 원했다.하지만 지금 당장은 강하리가 기꺼이 응한다고 해도 그녀 앞에서 감히 옷을 벗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욕실에서 나온 구승훈은 침대에서 단잠을 자는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들고 뒤돌아 발코니로 갔다.휴대폰에는 노민준과 구승재에게 걸려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있었고 구승훈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노민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왜 또 갔어?”구승훈은 개의치 않는 어투로 대꾸했다.“효과 없잖아.”노민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났다.“효과가 없으면 치료 안 할 거야? 승훈아, 포기하지 마. 나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담배를 한 모금 머금더니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이렇게 물었다.“형, 확실하게 대답해 줘. 이 약으로 고칠 수 있어?”희망이 없다면 그도 더 발
“당신 원하면 해.”구승훈은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자기야, 내일 침대에서 못 일어날까 봐 걱정되지 않아?”강하리가 웃었다.“할 거야?”숨이 멎은 구승훈이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았다.“아니, 우선은 강 대표님이 재워주는 걸 누리고 싶어.”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안아 침대에 눕혔고 강하리는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잘 자, 구승훈.”구승훈은 웃었다.“잘 자, 자기야.”강하리는 구승훈의 품에 몸을 밀착했고 구승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꽉 안았다.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침실에서 강하리의 귀에는 구승훈의 심장 박동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두 사람은 더 말하지 않았다.고요한 방 안에서 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사랑해.”강하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을 떠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나도 사랑해.”언제 잠이 들었는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구승훈은 곁에 없었고 연정이도 누군가 안고 간 뒤였다.강하리는 침대에 앉아 구승훈이 누웠던 곳을 바라봤다.다소 구겨진 이불을 만지던 그녀의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릴게.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구승훈.”구승훈은 바쁜지 강하리가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강하리도 굳이 묻지 않고 평소처럼 연정이에게 밥을 먹인 뒤 사무실로 갔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있었고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데 안예서가 뒤에서 은근하게 웃으며 말을 붙여왔다.“대표님, 곧 좋은 일 생길 것 같은데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굳어졌다. 구승훈은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래도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오늘 일정은 뭐야?”안예서는 서둘러 강하리에게 하루 일정을 알렸고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는 꽃을 옆으로 치웠다.안예서가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대표님,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린 임명우 씨 기억하시죠?”강하리는
강하리는 구승훈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더군다나 맞은편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 있자 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구승훈의 정상적인 사교 활동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다가가 묻지도, 방해하지도 않았다.그런데 정주현이 그녀의 표정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바람피우는 현장 목격한 건가요?”강하리는 다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아니요.”이런 면에서 강하리는 구승훈을 믿었다.다만 구승훈이 저 여성과 밥을 먹는 것이 그녀에게 숨기는 일과 관련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을 뿐이었다.강하리는 사실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다른 사람들은 알아도 자신은 알면 안 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연정이 사건 때도 구승훈은 노진우를 믿을지언정 그녀를 믿지는 않았다.강하리는 눈가의 상실감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고 정주현은 보기 드문 미소를 지었다.“여전히 저 사람에게 잘해주네요.”정주현의 말투에는 무의식적으로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났지만 그 역시 자신과 강하리 사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가지 않고 되물었다.“어떻게 지냈어요?”정주현의 얼굴에 번지던 미소가 갑자기 사라졌다.요즘 어떻게 지냈냐고? 굳이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엉망이다.사실 그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그조차 모르겠다.정양철과 줄곧 사이가 돈독했던 그였고 정양철이 업무상 아무리 엄격하게 요구해도 그에겐 좋은 아버지였다.그래서 정양철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지만 증거까지 나온 이상 믿을 수밖에 없었다.정주현은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냥 그렇죠.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하니까. 그냥... 하리 씨 볼 면목이 없네요.”강하리는 잠시 정주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그쪽이랑 상관없어요.”정주현이 웃었다.“그럼 뻔뻔하게 친구 해도 돼요?”강하리도 웃었다.“당연하죠.”정주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렸고 두 사람은 이
하지만 구승훈의 숨김과 솔직하지 못한 태도는 강하리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화가 났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뒤 강하리를 품에 안고 입을 열었다.“제 아내, 강하리에요.”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자 구승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내 체면 좀 살려주면 안 돼, 여보?”강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여자의 시선이 반짝이더니 강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녕하세요, 사모님. 전 구승훈 씨 담당 정신과 의사, 여나경이라고 해요.”강하리는 멈칫하다가 구승훈의 불면증이 떠올라 그를 슬쩍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이 사람 상태 어때요?”구승훈의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지고 여자는 눈치껏 웃으며 말했다.“복잡한 경우라 치료 과정도 번거로울 수 있지만 제가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강하리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여자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러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여자가 가고 구승훈은 힘껏 강하리의 허리를 꼬집었다.“정주현이랑 밥 맛있게 먹었어?”강하리는 곧장 그의 손을 떼어냈다.“다른 여자랑 밥 맛있게 먹었어?”구승훈이 웃었다.“그래도 강 대표님이랑 먹는 게 맛있지.”강하리는 능글맞게 웃는 남자를 보며 문득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젯밤 혼자 발코니에 서 있을 때처럼 왠지 이 남자가 홀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구승훈, 당신 몸...”구승훈은 속으로 흠칫하며 조용히 강하리를 품에 안고 만족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강 대표님 걱정하는 눈빛을 보니 다 나은 것 같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구승훈의 품에 기대어 안겼고 구승훈의 눈동자는 한층 어두워졌다.강하리가 걱정한다는 걸 잘 안다.예전 같았으면 걱정해 주는 그녀의 모습에 날 듯이 기뻐했을 텐데 지금 상황에서는 강하리가 알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지금은 감히 프러포즈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 약은 그에게 시한폭탄과
강하리의 입꼬리가 움찔했다.건너편 사옥에 새로 회사가 들어왔다는 건 아는데 에비뉴와 정안 그룹일 줄은 몰랐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됐다.그렇지 않고서야 구승훈이 왜 회사 근처 식당에 나타났겠는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연성으로 안 돌아가?”구승훈의 눈동자는 온통 그녀로 가득 찼다.“너랑 아이가 어디 있으면 나도 함께 할 거야.”강하리가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나도 꼭 B시에 있을 필요는 없어. JM의 업무는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까.”어쨌든 연성은 구씨 가문의 영역이었고 연성에 깊게 뿌리 박은 구씨 가문은 B시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구승훈이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네가 다시는 가족과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네가 연인이든 가족이든 둘 다 가졌으면 좋겠어, 자기야.”두 사람 중에 적어도 한쪽은 가족의 사랑을 받아야 하니까.강하리의 코끝이 갑자기 시큰해지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예물도 도착했는데 그러면 결혼할래, 구승훈?”멈칫한 구승훈은 씁쓸함이 가슴에 밀려왔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강 대표님, 그렇게 급한가?”강하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나랑 결혼할 거야?”구승훈의 눈에 머금었던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손가락이 강하리의 눈가에 닿았다.“자기야, 준비할 시간 좀 줘.” 강하리는 쓴웃음을 내뱉었다.“알았어, 기다릴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곧장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복잡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회사 앞에 서서 얼굴을 찡그렸다.그가 돌아서서 길 건너편으로 걸어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구승재는 진작 위에서 구승훈과 강하리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사람이 화해했는지 확인하려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하지만 아래에 내려오자 형이 찌푸린 얼굴로 걸어올 줄이야.‘쯧... 아직 화해 못 했네.’“형, 하리 씨가 아직 용서 안 해준대?”구승훈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눈가에 억눌린 짜증을 내비
“그동안 누가 임희주를 지원했는지 조사해 봐.”준봉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러나 사무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한마디 했다.“임희주와 여초연 씨의 관계를 확인해 줘.”...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심문석은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결혼식의 모든 과정과 세부 사항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강하리는 처음에는 노인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심문석이 바빠지자 오히려 더 건강해 보였고 그녀는 그가 바쁘게 지내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이 시기 구승훈은 유난히 바빠 보였다.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고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피곤함을 숨기지 못했지만 강하리는 그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시곗바늘은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강하리는 옆에 빈 침대에 잠시 눈을 두고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에서 우유 한 잔을 데웠다.서재의 불빛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서재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문을 열고 들어간 강하리는 우유를 책상 위에 놓았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휴대폰 화면을 끄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나에게 주는 거야?”구승훈이 그렇게 물었을 때 강하리는 그를 꾸짖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냥 ‘응’하고 대답한 후 그의 옆에 앉았다.“내가 도와줄 일이 있어?”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도와줄 거야?”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 부하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러 온 거야.”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이제는 에비뉴와 정안 모두 강 부장이 최대 주주라서 그런 것들이 다 중요하겠지.”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의자 하나를 가져다 앉아 책상 위의 서류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그녀는 금세 서류에 몰입했고 구승훈은 그녀 옆에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서재의 불빛은 따뜻하지 않았지만 강하리가 앉자 공간 곳곳이
차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구승훈은 팔꿈치를 팔걸이에 올린 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준봉은 그가 곧 움직일 거라 예상했다.심지어 M국으로 떠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30분이 흘러도 구승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준봉이 막 입을 떼려던 순간 구승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노진우에게 사람을 데리고 곧장 그 장소로 가라고 해. 그가 출발하면 구승재에게 연락해 조용히 그쪽으로 가게 해. 노진우가 움직이는 순간 구승재는 바깥을 봉쇄하도록 해.”준봉은 잠시 말을 잃었다.“대표님, 혹시 함정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몸을 기댄 구승훈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그는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여초연은 복수를 위해서라면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그가 아는 여초연이라면 일부러 그를 또 다른 함정으로 유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쉽게 자신의 흔적을 드러낼 리 없었다.그때 노연정을 납치했던 일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이 몇 년 간 여초연은 분명 자신의 세력을 키워왔을 것이다.그는 여초연을 항상 감시할 사람을 배치해 두었지만 그녀가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여초연은 별다른 은폐 없이 M국으로 갔고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한 점은 나문빈이 너무 빨리 그녀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사실이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가장 큰 손실은 단지 노연정을 곁에 두는 시간이 짧았고 그 사이 구승훈과 강하리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그녀가 계획한 대로 그 약물이 그의 몸에 투여되었다.여초연의 계획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짜여 있었고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 구승훈과 강하리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여초연이 이렇게 허술한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다.게다가...구동근이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구승훈은 구동근과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지만 여초연보다는 그를 조금 더 신뢰하는 편이었다.한편 M국에서 여초연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집사에게서 휴대폰을 건네
손연지는 강하리와 천아름의 손을 잡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이런 사람들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진짜 역겹다니까요.”천아름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손연지를 따라가며 뒤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던졌다.“여씨 가문의 두 분 내 가게에서 당장 꺼져요.”여명희는 순간 얼어붙었다.“천아름 씨, 미쳤어요? 이런 천한 년 하나 때문에 우리를 쫓아내겠다고요?”천아름은 걸음을 멈추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쫓아내는 게 아니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거죠.”그러고는 매장 직원을 향해 손짓하며 덧붙였다.“앞으로 이 두 사람 내 모든 매장 출입 금지야. 알아들었지?”그러자 강하리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두 분은 심 씨 가문 명의로 된 모든 장소에 출입할 수 없어요.”그렇게 단호하게 선언한 후 더 이상 그녀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손연지와 함께 매장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온 뒤 손연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통유리 창에 몸을 기댄 채 안쪽을 몰래 들여다봤다.“하하. 저렇게 분노에 차서 발악하는 꼴을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요.”그러더니 갑자기 강하리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하리야,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이 울분을 풀지도 못했을 거야. 너 모를 거야 그때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쁜이 정말 고마워...”그러자 천아름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말을 끊었다.“저기...나한테는 고맙다는 말 없어요?”손연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고마워요!”천아름은 손연지에게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웃었다.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래요? 결혼할래요? 내가 말인데 나랑 같이 지내면 앞으로 주얼리랑 옷은 내가 다 사줄게요.”“콜!”옆에서 듣고 있던 강하리는 입을 삐죽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손연지의 해맑은 웃음을 보자 결국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천아름 씨, 고마워요.”강하리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천아름은 손을 휘휘 저으며 시큰둥하게 답했다.“우리 사이에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해요? 진짜로 고맙다면 당신 남편
여명주가 반박하려는 순간 강하리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작업실의 주인인 천아름이었다.천아름은 짙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 크고 우아한 웨이브 헤어 거기에 하이힐까지 착용하고 있었다.강하리 옆에 멈춰 선 천아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 오랜만이에요.”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이 마주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그때 경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에비뉴를 인수하고 나서야 강하리는 그 두 개의 약혼반지가 사실 천아름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에비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을 뿐이었다.천아름은 조용히 강하리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여전히 마음에 드세요?”강하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합니다.”천아름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반지가 예쁜 게 아니라 사실은 당신의 손이 예쁜 거예요. 구승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그 순간 손연지가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승훈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하리를 사로잡을 수 있었겠어요?”천아름은 손연지를 향해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역시 미녀끼리는 생각도 비슷하네요.”셋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여명주는 그들 사이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이건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천아름 씨, 이게 무슨 뜻이죠?”천아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여명주 씨 B시에서는 당신네 가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면 노민우 씨를 붙잡아다 가문 재정을 끊고 강제로 결혼이라도 시키시지 그러세요? 그런데 왜...”천아름은 옆에 있던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쁜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소연지입니다.”“아. 맞아요. 소연지
강하리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은 그 모습을 보며 저절로 입꼬리를 올렸다.“떠나기 아쉽네.”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노민준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지만 구승훈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정 안 되겠으면 강하리 씨에게 솔직하게 말해. 그러면 강하리 씨도 기꺼이 너와 함께 돌아갈 거야. 그리고 계속 숨기기만 하면 강하리 씨도 불편할 거잖아?”구승훈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그는 작업실 안에서 웃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다.노민준은 더 할 말이 없었고 그때 서야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손연지 씨 지금 어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궁금해?”노민우는 급히 두 번 응답했다.“그러면 직접 와서 보면 되잖아?”“손연지 씨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구승훈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그때 내가 나가라고 했을 때는 왜 안 나갔어?”노민우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그것도 그렇네.”구승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준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희주를 철저히 조사해 줘.]강하리는 마침내 손연지에게 어울리는 주얼리를 골랐다.손연지는 몸에 맞춰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강하리는 그 웃음이 예전처럼 맑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다.감정의 상처는 결국 스스로 치유해야 했고 강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연지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주얼리를 고른 뒤 강하리는 손연지와 함께 의류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곧 결혼식인데 다른 건 안 고를 거야?”손연지가 물었다.강하리는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구승훈이 몇 벌 주문해 놨고 또 에비뉴에서 우리 결혼식에 맞는 주얼리 세트를 준비해 줬어.”손연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놈의 자본주의.”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두 사람은 웃으며 의류
구승훈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왜 갑자기 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째려보며 말했다.“안 오면 당신이 예쁜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못 볼 거 아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질투나?”“아니.”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에는 질투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실제로 구승훈과 임희주 사이에 아무 일이 있을 거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그저... 다른 여자가 어떤 면에서 그녀의 남편을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잡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어쩌지?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침대에 묶어 두는 건 어때? 복수의 기회를 줄게.”강하리는 질색을 하며 손을 빼냈다.“염치를 좀 챙겨.”구승훈은 웃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휴대폰이 옷 속에서 가볍게 진동했지만 그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눈빛이 깊어졌다.마침내 강하리는 차를 개인 작업실 앞에 세웠고 구승훈이 주문한 주얼리를 오늘 착용해 보려고 했다.마침 이틀 후 손연지의 생일이었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휴식 중인 틈을 타 그녀를 불러냈다.강하리가 차에서 내리자 손연지는 작업실의 큰 창문 앞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녀는 강하리를 보고서야 마치 살아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손연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손연지 씨, 이렇게 한가해요?”손연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강하리를 따라 들어가자 직원이 다가왔다.“구승훈 씨, 주문하신 주얼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구승훈은 대답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나서 직원에게 말했다.“주얼리는 내 아내에게 전달하세요.”그러고는 강하리를 향해 말했다.“전화 받고 올게. 주얼리 먼저 착용해 보고 안 맞으면 다시 수정해 달라고 하면 돼.”강하리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았는데 화면에 나타난 이름은 노민준이었다.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손
‘심리 의사들은 원래 이렇게 강한 심장을 가진 걸까 아니면 이 임 선생이 유독 뻔뻔한 걸까? 만약 이 사람이 노민준 씨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대표님은 진작 화를 냈을지도 몰라.’하지만 임희주는 분위기를 살피고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바로 다른 치료 방안을 구승훈에게 설명했다.“간단히 말하면 이전 치료 방안은 증상을 억제하는 방식이었어요. 예를 들어 노민준 씨가 처방한 약들도 증상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죠. 하지만 이런 억제는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해 약효가 떨어지면 증상이 더 심해질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억제보다는 근본적인 해소를 목표로 하는 방향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약효를 완전히 끌어낸 뒤 점차 증상을 약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물론 한 번에 모든 약효를 없애는 건 아니고 몸과 신경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이 방법은 다소 위험할 수도 있어요. 구승훈 씨가 신중히 고민한 후 결정하시면 좋겠습니다.”임희주가 말을 마치자 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준봉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이 방법을 선택하면 어떤 위험이 따를까요?”임희주는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약효를 모두 끌어낼 경우 증상이 얼마나 심각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렇기에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준봉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반면 구승훈은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구승훈이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방안을 만든 사람이 누구죠? 노민준인가요?”임희주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제가 만든 방안이지만 노민준 씨와도 논의했습니다. 그는 이 방법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어요.”구승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생각해 보겠습니다.”임희주는 한 발짝 다가서며 덧붙였다.“빠른 답변 부탁드려요.”구승훈은 대답 없이 조용히 카페
구동근은 방에서 밤새 소란을 피운 끝에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실려 갔다.그는 병원에 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도착한 후에도 구승훈의 철저한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휴대폰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그가 난동을 부린 탓에 병실은 엉망이었지만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직도 부수고 있네요? 그럼 내가 잠깐 밖에서 기다렸다 들어올까요?”구동근은 화가 나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이미 말했잖아. 여초연 씨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구승훈은 대꾸하지 않은 채 보온병에서 밥을 퍼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건가요?”구동근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확실히 몰라. 여초연 씨가 떠날 때 난 보내주기로 약속했고 그 이후로 여초연 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어. 물론 나중에 행방을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얻은 단서는 거의 없었고 여초연 씨는 아마도 M국에 있을 거야. 그 팔찌는 어제 아침 하인이 집 앞에서 발견한 거야. 안에는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고 여초연 씨의 필체로 ‘너희 부인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어.”말을 마친 구동근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여초연 씨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결국 내가 여초연 씨에게 휘둘리고 있었더라고. 만약 그때 여초연 씨가 너에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넌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있었을까?”구동근은 말을 마친 뒤 묵묵히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때 너희가 여초연 씨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여초연 씨가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죠. 결국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밖으로 나온 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 속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그가 조롱하는 대상이 다른 사
강하리는 구승훈이 그 팔찌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아마 그 감정 속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이 시점에서 여초연이 팔찌를 보내는 것은 분명 도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구승훈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느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내가 안아줄까?”구승훈은 억지로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그럼 강 부장님은 어떻게 나를 위로할 생각이에요?”강하리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키스해 주고 안아주고 오빠라고 불러주면서 달래주면 되지 않을까?”구승훈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고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그는 빗속을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그때 그는 매우 슬펐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 느꼈다.구승훈이 강가에 서서 몸을 던지려는 순간 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구승훈 오빠.”그가 돌아보자 한 어린 소녀가 비를 맞으며 구승훈에게 달려와 작은 분홍색 우산을 그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구승훈 오빠, 슬퍼하지 말아요.”그 말이 끝나자 그녀는 젖은 옷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비가 내리는 중에 힘겹게 사탕 포장을 뜯고 그에게 사탕을 건네주었다.“달콤한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빗속에서 소녀는 반달처럼 꺾인 눈으로 웃으며 물었다.“달콤해요?”구승훈은 그때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저 그 장면이 떠오르자 가슴속에 있던 서글픈 감정이 점차 따뜻하게 변해갔다.그의 어린 시절은 아마도 온통 계산과 속임수로 가득했을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의 마음에 조금의 사랑도 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잊힌 구석에서 어린 시절의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그것은 구승훈의 삶에 존재한 빛과 같았고 아주 달콤했다.강하리는 구승훈이 말하지 않자 여전히 그가 마음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