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휘는 잠시 생각했다.“그래, 아는 사람을 찾아서 휴대폰을 고칠 수 있는지 알아볼게.”구승훈은 강하리의 방을 한 바퀴 둘러보며 강하리가 고등학교 시절 썼던 공책들을 챙겼고 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다.“그걸로 뭐 하려고?”구승훈은 웃었다.“고등학교 때의 강하리를 찾고 있어.”멈칫한 강하리가 시선을 피했고 구승훈은 두 사람이 떠나기 전에 사람을 불러서 자물쇠를 바꿨다.“내일 사람을 보내서 이곳을 깨끗이 치울 거야. 단서를 찾을 수 있는지 보자.”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믐날 밤은 곳곳에 화목한 기운이 감돌았고 명절 분위기가 가득했다.강하리는 계단 아래에 다다랐을 때 한숨을 내쉬었고 구승훈은 뒤에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추워?”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좀 걸을까?”구승훈이 말하며 강하리를 차에 태웠다.강하리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거절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안부사는 연성에서 비교적 유명한 곳으로 꼽히는데 이곳에서 연애운과 건강운을 빌면 유난히 신통했다.강하리가 구승훈에게 건넸던 염주 팔찌도 이곳에서 얻은 것이었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목을 잡고 야시장의 다양한 등불 사이를 걸었다.강하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잠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구승훈.”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응?”강하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두를 가리켰다.“나 저거 먹고 싶어.”구승훈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웃었다.“그리고? 또 뭘 원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이 웃었다.“알았으니까 기다려. 내가 가서 사 올게.”구승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두를 한 주머니 들고 왔고 강하리가 고개를 숙여 한입 베어 물었다.“맛있어?”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그의 부드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마주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맛있지는 않았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데다 자두는 아주 셨지만 어렸을 때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어렸을 때 나한테 사줬는데 기억
문연진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정신을 차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승훈 오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오빠라는 거 잘 알잖아!”구승훈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참, 알려줄게 하나 더 있어. 구정우가 먹은 약은 본인이 삼킨 거야. 그러니까 문연진, 처음부터 구정우가 널 함정에 빠뜨린 거라고, 알아들어?”하지만 문연진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말도 안 돼, 구정우가 어떻게 감히?” 구승훈의 얼굴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걔가 왜 못해. 너랑 자면 걔한텐 좋은 일밖에 없는데, 아니야?”말을 마친 구승훈은 문연진이 손을 놓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고 차 문을 쾅 닫아버렸다.“오빠!” 옆에 있던 구승유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나섰다.“어떻게 연진 언니한테 이럴 수 있어? 연진 언니가 어때서, 오늘 오빠를 위해 기도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하지만 구승훈은 곧바로 시동을 걸어 차를 몰고 떠났다.문연진은 하얀 얼굴로 한참을 서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아니, 아니야. 분명 강하리, 강하리 그 망할 년이야! 내가 받은 모욕 그년한테 다 돌려줄 거야!”그녀의 비명이 주위의 시선을 끌었고 구승유가 황급히 그녀를 끌어당겼다.“연진 언니, 목소리 좀 낮춰요.”하지만 문연진의 눈빛에는 불길한 독기가 번뜩였다.“승유야, 나 좀 도와줘. 넌 날 도와줄 수 있지?”구승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손목은 그녀의 손아귀에 잡혀 고통이 느껴졌다.“알았어, 도와줄게, 연진 언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언니 편이야.돌아오는 길에 강하리의 얼굴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오늘 밤 좋았던 기분이 문연진에 의해 모두 망가졌다.구승훈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아무 상관 없는 사람 때문에 기분 망치지 마.”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열두 시가 가까워졌다.구승훈은 차를 안정적으로 세운 뒤 조수석으로 가서 강하리가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강하리가 발을 뻗는데 문득 구승훈이 발목을 잡았다.“피곤
강하리는 남자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별처럼 반짝이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입꼬리가 잠시 올라갔다가 손을 들어 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그녀가 10년 넘게 사랑했던 남자다. 10년의 추억은 너무 많은 상처를 남겼고 그때 가서 다시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가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결국 대답할 수 없었던 그녀가 말을 돌렸다.“늦었으니까 가서 씻고 일찍 자.”말을 마친 강하리가 그를 밀어내고 홀로 테이블로 향했고 거기엔 구승훈의 술이 아직 남아있어 강하리는 아무 병이나 뚜껑을 열어 한 잔 따랐다.그러고는 술잔을 들어 천천히 홀짝였다.수면제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있도록 도와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술이 최적이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말을 돌린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 역시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아 가볍게 웃더니 두 팔로 그녀의 주위를 감싸며 자신도 술 한 잔을 따랐다.야릇한 행동에 그의 숨결이 강하리의 목덜미로 쏟아졌다.이 방에서 이보다 더한 짓도 수없이 했던 탓인지 지금 강하리의 심장이 드물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의 몸이 경직되며 술잔을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녀의 움직임을 전부 지켜보던 구승훈은 무의식적으로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술을 따른 그가 뒤에서 술잔을 들고 그녀의 잔에 부딪혔다.강하리는 뻣뻣한 손가락으로 잔을 잡고 있다가 곧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잔에 담긴 술을 들이켰다.밖에서는 한창이던 불꽃놀이가 어느새 멈추고 적막이 찾아왔다.두 사람 모두 다시 불을 켜거나 말하지 않았고 강하리는 연달아 술을 마시기만 했다.구승훈은 말리지도 않고 취하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동안 강하리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취하는 걸로 잠시나마 그녀의 긴장을 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차라리 맘껏 취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술 한 병이 비워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구승훈은 웃
구승훈은 강하리를 안아 들고 씻기고는 다시 침대에 눕히고 일어나 하는 도중 몇 번이나 울린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구승재, 구동근, 당연히 문씨 집안에서 걸어온 전화도 있었다.구승훈은 그 중 어느 쪽에도 전화하지 않고 바로 메시지를 확인했다.[문씨 집안이 구정우와 등을 돌렸어.][구정우가 할아버지한테 맞았어.][문연진이 자살하겠대.][우와, 이번 설엔 볼거리가 참 많은데 형이 없어서 아쉽네.]구승훈은 비웃었다. 그딴 걸 누가 본다고.그는 휴대전화를 옆으로 던져놓고 강하리를 품에 끌어안은 뒤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다음 날 강하리는 머리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누르려는데 그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고 익숙한 촉감에 그녀는 금방 깨달았다.아마 그녀는 현재 옷 한 벌 입고 있지 않을 거다.“일어났어?”이른 아침, 다소 잠긴 남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울려 퍼졌다.강하리는 머릿속이 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할 거 다 했으니까 이제 나 몰라라 하는 거야?”“구승훈 씨, 당신...”강하리의 얼굴이 빨개졌다.완전히 필름이 끊겼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상황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구승훈은 웃으며 손을 들어 휴대폰을 가져왔다.[하리야, 다시 말해 봐.][빨리 해, 멈추지 말고.]두 사람의 대화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오자 강하리의 머릿속이 윙윙거렸다.“하리야,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그때 정신을 차린 강하리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노려봤다. “구승훈 씨, 녹음까지 했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글쎄, 앞으로 밤에 지루함을 달래려면 네 목소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네.”강하리가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나가!”“부끄러워?”“나가! 나 좀 더 잘 거야.” 강하리는 그렇게 말하며 곧장 등을 돌렸고 구승훈도 그녀가 부끄러워한다는 걸 알기에 더 말하지 않았다.그녀는 지금 상
강하리는 눈을 번쩍 들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두 사람은 지금 무슨 사이일까. 같이 일하는 건데 밤도 보냈다.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하며 말했다.“구승훈 씨, 어젯밤에 내가 먼저 들이댄 거라고 해도 당신이 조금도 꼬드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피식 웃은 구승훈은 강하리가 그에 대해 잘 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어젯밤 그의 의도적인 유혹이 아니었다면 무슨 말을 해도 강하리가 먼저 원할 리는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런 건 절대 인정할 그가 아니었다.“하리야, 난 그냥 너한테 한번 입 맞춘 것뿐인데 네가 날 안고 안 놔줬어.”강하리는 믿기지 않았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구승훈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그래서 책임지기 싫어, 하리야?”강하리는 한참을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나보고 어떻게 책임지라는 거야?”구승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어젯밤 문 앞에서 내가 했던 그 질문 생각해 봐.”강하리는 멈칫했다. 복수가 끝나면 다시 그와 만나지 않겠냐던 말?그녀는 입술을 다물었다.“구승훈 씨, 난...”“일단 먹어.”구승훈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가로채며 강하리의 손에 숟가락을 건넸다.“하리야, 지금 대답할 필요 없어. 일이 다 해결되면 그때 대답해 줘.”강하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받아서 들었고 구승훈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오늘 바빠?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강하리는 고개를 숙이고 만두를 먹었다.“아니, 엄마 보러 갈 거야.”구승훈은 잠시 멈칫했다.“같이 가자.”말을 마치자마자 밖에서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승훈 오빠, 안에 있는 거 알아. 문 열어, 할 말이 있어.”문연진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고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멈칫했다.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볼일 봐. 엄마한테는 나 혼자 갈게.”구승훈도 바짝 뒤따라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같이 가자.”강하리는
구승훈이 비웃었다.구정우를 상대하게 도와준다고? 필요 없었다.지금 구씨 가문에 대해 그가 유일하게 걱정하는 건 구씨 가문을 벼랑 끝으로 몰면 할아버지가 강하리를 죽일까 봐 두려운 것뿐이었다.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구씨 가문을 막다른 길로 몰고 갔다.그는 구씨 가문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무너뜨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문제는 할아버지가 강하리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는 전제하에 구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승훈 오빠, 강하리가 줄 수 있는 것보다 우리 문씨 가문이 오빠한테 줄 게 더 많지 않아?” 문연진의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지만 구승훈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곧바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강하리는 고통으로 가득 찬 문연진의 눈을 볼 수 있었다.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눈을 내리깔았다.문연진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기뻐해야 하는데 그녀는 여전히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구승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문연진의 이깟 작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묘지에 도착한 두 사람이 주차하려는 순간 옆에 차 한 대가 멈춰 서는 것을 목격했다.강하리는 차에서 걸어 나오는 정양철을 보고 깜짝 놀랐다.설날부터 이곳에서 정양철을 만날 줄이야.“정 회장님?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정양철은 웃으며 말했다.“구동근 어르신께 인사하러 왔다가 들려서 친구 좀 만나려고요. 어머니 뵈러 왔어요?”강하리는 정양철을 바라보았다.“정 회장님 여기 친구도 있어요?”정양철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네, 사업을 오래 하면 사방에 친구가 생기는 게 좋은 점이죠.”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구승훈의 큰손이 그녀의 허리로 다가왔다.“가자. 정 회장님도 일 보세요.”하지만 정양철은 걸음을 옮겨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같이 가죠. 내 친구도 저 위에 있어서.”강
강하리는 구승훈과 더 따지지 않고 그대로 그의 손에 이끌려 아래로 내려갔다.두 사람이 막 차에 올라탔을 때 갑자기 구승훈의 휴대폰이 울렸다.구승재에게서 온 전화였다.“형, 강찬휘 부부가 죽었어.”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일이야?”“가스 폭발이야.”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강하리와 시선을 마주했고 강하리는 황급히 휴대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검색했다.아니나 다를까, 연성 남산구의 한 오래된 동네에서 가스 폭발이 발생해 2명이 사망하고 2명이 다쳤다는 내용이 떴다.구승훈은 기사를 보더니 잠시 후 차갑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확인하라고 한 건?”“통화 기록에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걸려 온 전화가 있는데 추적해 보니 해외에서 걸려 온 거고 계좌도 수상한 부분은 없어. 어젯밤 강찬수 집에서 나온 뒤 친구 집에 갔고 다른 사람과도 접촉한 적이 없어.”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그 친구 집에 가서 그쪽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어봐.”“알았어.”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구승재한테 알아보라고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괜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있나.어제만 해도 강찬수 집에 가서 이리저리 뒤지더니 오늘 바로 죽었다고?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강찬수가 죽었을 때랑 똑같은 느낌이다.둘 다 그들을 살펴보며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할 때 갑자기 죽어버렸다.하지만 지금 무슨 생각을 해도 소용없고 수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차에 시동을 걸어 출발했고 묘지를 벗어난 뒤에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파트로 가?” 정신을 차린 강하리가 답했다.“손연지 집으로 가.”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요하지 않고 그저 큰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졌다.“아직도 허리 아파?”강하리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이제 괜찮아.”구승훈은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차는 손연지의 집으로 향했고 멀리서 밑에 서 있는 주해찬이 보이자 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
주해찬이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선배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지? 복수는 할 수 있지만 구승훈과의 관계는 제대로 짚고 넘어갔으면 좋겠어.”그녀가 복수를 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강하리가 살아가기 위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하니까.하지만 그는 그녀가 구승훈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이기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기심은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그는 강하리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고 그 아픔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구승훈이 가져다준 것이었다.“하리야, 네가 원하는 게 뭐든 내가 다 도와줄 수 있어. 너...”“선배, 선배도 위험하다는 거 알잖아요.” 강하리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난 선배한테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이유가 없어요.”주해찬의 가슴에 저릿한 고통이 느껴졌고 한참 후 그가 쓴웃음을 내뱉었다.자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는 게 싫은 것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그를 자기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닐까?주해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오늘 그녀가 홀로 외롭게 명절을 보내고 있을까 봐 온 건데 지금 보니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주해찬은 잠깐만 머물다 떠났다.강하리는 이후 며칠 동안 입찰 준비에 매진했고 구승훈과도 만나지 않았다.손연지가 연성으로 돌아온 건 설날이 지나고 6일째 되는 날이었다.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가 우는소리를 했다.“하리야, 나 짜증 나 죽겠어. 올해 엄마가 나한테 소개팅을 몇 번이나 주선해 줬는지 알아?”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러면 그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있어?”손연지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마. 다 이상한 놈들이야.”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물었다.“노민우는 연락 안 왔어?”손연지는 멈칫했다.노민우... 연락이 오긴 했다.심지어 설날 당일에 그녀의 고향 집까지 찾아왔는데 그 멍청이가 올 거면 혼자 오지 여자까지 데리고 왔다는 거다. 일부러 기분 나쁘게 하려고 그러는 건지.“내 앞에서 그 자식 얘기 하지 마
심준호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깊은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며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리 오늘 나한테 전화해서 이혼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했어. 알아서 잘 처리해.”심준호는 옆에 있던 임희주를 흘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더러운 곳에서 너무 오래 굴러다니지 마. 아니면 나중에 아무도 너를 구해줄 수 없을 거야.”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심준호는 몸을 돌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돌아서서 임희주를 바라보았다.어둑한 조명 아래, 그녀의 얇은 시폰 드레스는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희미한 불빛에 속살이 아스라이 비쳤다.구승훈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의 눈에 스쳐 간 것은 혐오였다.“임 선생, 아직 볼 일 남았어요?”임희주는 추위에 몸을 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할 말이 있어서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소였다. 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임희주 씨, 계속 이러시면 담당 의사 바꾸는 수가 있어요.”임희주는 추위에 입술을 떨며 구승훈에게 달려들어 몸을 기대려던 순간, 구승훈에게 몸이 닿기도 전에 노진우가 그녀를 가로막았다.“임 선생님, 사회면에 오르고 싶으신가요?”그 말에 임희주는 이를 악물었다.그녀의 시선이 뜨겁게 불타올랐다.“구승훈 씨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구승훈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지더니 눈빛에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임 선생 말을 제가 어떻게 믿죠?”임희주는 입술을 깨물더니 눈가에 금세 촉촉한 이슬이 맺혔다.“저를 그렇게도 못 믿으세요?”“우리 사이에 신뢰라는 게 있었나요?”그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노진우에게 시선을 돌렸다.“돌려보내.”노진우는 즉시 그녀에게 다가갔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점점 멀어져가는 구승훈의 뒷모습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여초연!”구승훈은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보았다.그의 눈빛에
“그래, 삼촌이 도와줄게.”심준호는 전화를 끊고 미간을 찌푸리며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자선 경매는 이미 끝난 상태였고 구승훈은 마지막으로 귀걸이 한 쌍을 낙찰받았다.옆에 있던 임희주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구 대표님, 그 귀걸이 누구한테 선물하시려고요?”구승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귀걸이를 챙기며 답했다.“아무한테도 안 줘요. 그냥 자선 행사일 뿐이에요.”임희주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구승훈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그럼 제가 하나 얻어도 될까요?”그 순간, 구승훈이 걸음을 멈췄다.그가 천천히 돌아서 임희주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 선생, 주제 파악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임희주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낙찰받아 놓고 선물도 안 하면 아깝잖아요.”“아까워도 임 선생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구승훈은 단호하게 말하며 준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 집에 모셔다드려.”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구 대표님께서 직접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준봉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임희주의 앞을 막아섰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마지막까지 구승훈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차에 올랐다.숙소에 도착하자, 임희주의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확인한 임희주의 손가락이 순간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망설이다가 이를 악물고 전화를 받았다.“사모님.”여초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사모님인 건 기억하나 보네? 구승훈이랑 재밌게 놀아나느라 다 잊은 줄 알았거든.”임희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사모님, 그럴 리가요.”여초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네가 어떤 존재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구승훈을 이용해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그 말에 임희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사실이었다.구승훈이 강하리와 헤어졌다고 해서 자신에게 감정을 가질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희주는 포기할 수 없었다.만약에, 아주 만약에 구승훈을 정말로 붙잡을 수
최하영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강하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노민우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방금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구승훈한테 전화가 와서 하리 씨 도착했는지 묻더라고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민우는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하려다 강하리가 화제를 돌렸다.“최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최하영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리다 말고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왜요?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까요?”최하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하리 씨라면 언제든지 가능하죠.”“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예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요.”강하리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천아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비쳤다.“예쁘지?”배경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예뻐.”“기분 좋아졌어?”“응.”손연지는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행복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과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곁에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천아름이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연지가 구승훈을 봤대. 병원 앞에서 그 여자랑 말다툼하고 있었대.”강하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좀 조심할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에 글쎄 구승훈이 그 여자 데리고 파티에 가고는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랐어. 흥!”강하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래? 둘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흥! 진짜 좋았다면 그 여자 욕먹게 그렇게 내버려뒀겠어? 난 구승훈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친구야,
“말도 안 돼요.”노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인수 건의 다음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요즘 기명 제약 주식을 누군가가 계속 사들이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하리 씨가 시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강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조사 안 해 봤어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리 씨가 한 줄 알았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강하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마치 질기게 달라붙는 벌레처럼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하리를 따라다녔다.“안 대표님도 누구 데리러 오셨습니까?”노민우가 먼저 나서며 강하리 앞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를 가렸다.하지만 안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제 인사도 안 해줘요? 아 깜빡했네요. 이제 심씨 가문의 아가씨죠?”그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일부러 한 마디 덧붙였다.“심씨 가문의 아가씨면 뭐 해요? 결국엔 남자한테 버려진 신세가 됐는데.”그 말을 들은 노민우의 얼굴빛이 변했다.“안현우, 그만둬!”하지만 안현우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비웃으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왜? 아직도 이 여자랑 자고 싶어?”순간, 노민우는 안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안현우는 비틀거리며 손가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맞췄지? 아니면 둘이 이미 잤나? 어땠어, 좋았어?”눈이 뒤집힌 안현우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너 이 새끼, 미쳤어?”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뭘 그렇게 흥분해? 우리 중에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기나 해?”노민우가 이를 악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그냥 가요. 저딴 놈이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강하리가 급히 차 문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