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밀리미터를 남긴 채, 구승훈의 주먹이 강하리의 얼굴 앞에 멈춰섰다.“맞을 각오로 들이미는 거야?”구승훔의 눈에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맺혔다.강하리는 꿋꿋하게 구승훈의 주먹을 노려보았다.겁이 안 났다면 거짓말이었다. 구승훈의 주먹질의 위력을 잘 아니까.하지만 주해찬이 맞게 가만둘 수는 없었다.자신 때문에 여러 번 수모를 겪은 주해찬이었다. 그 때마다 자신의 죄책감도 늘어났었다.“내 남친이 맞아서 가슴 아픈 것보단 그쪽한테 맞아 아픈 게 나을 것 같네요!”구승훈의 주먹이 한참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얼마나 지났을까, 냉소를 지으며 주먹을 거둬들이고는 직원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안도의 한숨을 내쉰 강하리는 주해찬을 몇 마디 위로하고는 뒤따라 들어갔다.조사는 세 시간 남짓이 진행되었고, 조사가 끝난 뒤 강하리는 유치실에 보내졌다.형식적인 조사를 마친 구승훈이 나와 보니 심준호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가라앉은 구승훈의 기운에 눌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조사관이 뒤따라 나와 도망치듯 사라졌다.“강찬수의 은행 계정들을 조사해 봤는데.”심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비합리적 계좌이체가 한 두번이 아니야. 최고 금액은 3년 전이었고. 소문 퍼뜨려 놨으니 누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지 살펴보기만 하면 돼.” 담배 한 대에 불은 붙인 구승훈이 심드렁하게 응, 대답했다.“표정이 왜 그래? 괜히 온 것 같아?”“무슨 헛소리야.”심군호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남들 다 외식하고 영화관 갈 때 데이트 코스가 경찰서인 게 좀 의례적이어서 그런다.”구승훈이 팽 콧방귀를 뀌었다.외식하고 영화관?나라고 안 그러고 싶겠냐고. 강하리가 기회를 줘야 말이지.자신을 거들떠도 안 보는데.생각할수록 기분이 더욱 엉망이 되었다.“주해찬에게 안겼어. 강하리.”푸념하듯 내 뱉은 말에 괘씸하게도 심준호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다.“둘이 사귀잖아. 허그가 다 뭐야.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저이씨, 뚫린 입이라고.”구승훈이 아픈 데만 골라 팩트
담배연기 속, 구승훈의 표정이 희미하게 보였다.어차피 끝날 계약, 지금 이러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강하리를 놓아주기 싫었다. 발버둥이라도 쳐서 그녀가 떠나가는 속도를 늦추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녀가 다른 남자 품에 안기는 건 더 싫었다.“이러면, 최소한 남은 시간이라도 내 것이 될 가능성이 있잖아.”심준호가 절친을 응시하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그 계약이 불난 집에 도적질이었던 건 알고 있지?”구승훈의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둘 사이에 가장 큰 장애물이 송유라란 것도.”“지금 네 그 집착이 승부욕이라면 일찌감치 접어둬. 하리 씨 되찾아서 정식으로 사귀고 결혼까지 갈 거 아니라면.”말을 마친 심준호가 구승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유유히 사라졌다.유치실.흉흉한 표정으로 구승훈이 유치실에 들어섰다.심준호의 충고가 귓가에 맴돌아쳤지만 애써 무시했다.승부욕든 진심이든 간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계약이 끝나더라도 강하리를 자신 곁에 남겨둘 수 있는 수단은 차고 넘쳤다.무슨 이유든 강하리를 놔주기 싫은 구승훈이었다.강하리 곁에 다가가 앉자 조건반사적으로 한 뼘 물러나 앉는 강하리.구승훈의 눈에 오기가 서렸다. 강하리 쪽으로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껌딱지세요?”노기 서린 눈으로 강하리가 구승훈을 쏘아본다.“추워서 그래. 붙어 앉으면 따뜻하잖아.”“…….”하다하다 저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강하리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더 움직일 데도 없었고, 그럴 힘도 나지 않았다.출혈 과다로 맥을 못 추는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아랫배가 쥐어짜는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항상 생리 주기가 불규칙적이던 그녀에게 급작스레 찾아온 생리통.“강하리.”미간을 찡그리는 강하리의 귓가에 울린 구승훈의 목소리.“또 뭡니까.”여러모로 아주 불편한 탓에 대답이 곱게 나오지가 않았다.“나랑 거래 하나 하자.”“싫어요.”“……들어보지도 않고?”구승훈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역정을 낸 탓일까. 강하리의 아랫배가 점
”강하리!”구승훈이 잽싸게 의자 아래로 떨어지려는 강하리를 낚아챘다.강하리는 대답이 없었다.구승훈은 그제야 강하리의 이마가 식은땀 투성이란 걸 발견했다.“강하리! 왜 이래!”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움켜잡은 강하리의 두 손이 보였다.순간 구승훈은 짚이는 데가 있었다.“생리야?”아랫배에 닿는 구승훈의 손을 쳐낸 강하리.그러자 구승훈이 이번에는 강하리의 등과 두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올렸다.“이, 이거 놔…요.”중얼거리는 강하리의 말은 싸그리 무시한 채,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일단 문 좀 열어요. 심준호가 오면 수속 마저 마치는 걸로 하고.”구승훈의 말에 직원들이 급급히 문을 열었다.“나가셔서 왼쪽으로 얼마 안 가 병원이 있어요.”눈치 빠른 한 직원이 알려준 덕에 구승훈은 몇 분 만에 한 개인의원 앞에 도착했다.의사가 강하리에게 진통제 주사를 놔 주었고, 십여 분 동안 안정을 취한 강하리는 그제야 좀 나아진 느낌이 들었다.통증은 사그라들었지만, 몸이 오슬오슬 떨리기 시작했다.“추워?”낮게 깔린 음성.강하리가 대답하기도 전, 구승훈이 그녀를 끌어안았다.확 찌푸려지는 강하리의 미간에 구승훈이 재빨리 한 마디 덧붙였다.“좀 안고 있는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불쌍해 보여서 이러는 거니까 가만 있어.”“그 시커먼 속셈을 모를 줄 알고.”강하리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왜? 주해찬이 볼까 봐 두려운 거야?”“맞아요. 애인이 다른 사람과 껴안고 있는 거 좋아할 사람은 없잖아요.”강하리의 직설에 구승훈의 관자놀이가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다 지나간 일을 들먹이는 게 재밌어?”강하리가 냉소를 지었다.다 지나간 일이라고? 누구 맘대로?찢겨저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그리 쉽게 아물 리가.하지만 구승훈에게 이런 것까지 얘기해줄 필요는 없었다.얘기해도 이해하지 못할 거다.상처를 낸 사람과 상처받은 사람 마음이 같을 리가 없으니까.
구승훈의 품에서 안간힘으로 벗어난 강하리가 비칠거리며 밖으로 나갔다.경찰서에 구속은 안 당해도 될 것 같았지만, 핸드폰이 압수된 상태라 일단은 돌아가야 했다.그 뒤로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은 구승훈이 따라갔다.경찰서에 거의 도착할 때 쯤, 구승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강하리. 내기 할까? 난 네가 주해찬과 얼마 못 가 헤어진다는 데 걸 거야.”강하리가 이건 무슨 심보냐는 눈길을 보내왔다.“헤어진다 해도 그쪽이랑 엮일 일은 없을 거거든요?”핸드폰을 돌려받은 뒤 강하리는 바로 주해찬에게 전화했다.근처에 있었던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주해찬이 강하리 앞에 나타났다.“이렇게 빨리 온다고요?”믿을 수 없단 강하리의 말투에 주해찬이 빙그레 웃었다.“그러잖아도 먹을 것 사가지고 이쪽으로 오는 길이었어.”주해찬이 손에 든 포장을 흔들어 보였다.“진짜요? 선배 최고.”“그나저나 잘 해결된 거야?”걱정스레 묻는 주해찬.“잘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아요.”구승훈에게 반강제로 안겨 경찰서를 나올 때 얼핏 들은 게 있었다.심준호에게 부탁해 수속인가 뭔가를 하면 된다고 들었었다.“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배고프지, 일단 이거 먹을까?”한 시름 놓았다는 표정이 된 주해찬이 포장을 강하리 앞에 내밀었다.“돌아가서 먹어요.”“그래도 괜찮고. 내친김에 내가 맛있는 반찬 몇 가지 더 만들어 줄게.”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며 주해찬의 차로 다가갔다.그런 둘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만 보던 구승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생리대 필요하지 않아? 가서 사 올까?”주해찬이 멍해졌고, 강하리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냥 무시하고 가요 선배.”“이봐 주 도련님. 생리 기간에는 하면 안 좋단 것 쯤은 알고 있겠지?”‘저 인간이 무슨 개소리를…….’성질난 강하리가 가방에서 집히는 대로 구승훈에게 날렸다.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맞은 구승훈.날린 것은 향수병이었고 맞은 곳은 구승훈의 이마.삽시에 구승훈의 이마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아,
구승훈이 서늘해진 눈길로 주해찬을 돌아보았다.“나랑 강하리 사이 일인데 그쪽이랑은 무슨 상관?”삐딱해진 구승훈의 말투. 딱 싸움이 또 일어날 각이었다.강하리가 급급히 두 사람 사이에 막아섰다.“치료비 대 줄게요. 얼마면 돼요?”“강하리. 내가 그깟 치료비가 없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걸로 보여?”강하리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차단 해제할 테니까 치료비 나가는 대로 영수증 보내요. 계좌이체 해 드릴게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주해찬의 차에 올랐다.구승훈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 차 한 대가 그의 앞에 멈춰섰다.심준호가 차에서 내려 강하리한테 다가갔다.“여긴 나한테 맡기고 얼른 들어가서 쉬도록 해요.”고개를 끄덕인 강하리가 차 문을 닫았고, 주해찬의 차가 멀어져갔다.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 차를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병원 데려가 줄까? 피 많이 나는데.”눈살 찌푸리는 심준호를 보는체도 않고 구승훈이 차에 올라타 쌩하니 가 버렸다.주해찬의 차 안.분위기가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미안해요 선배.”“왜 네가 미안한데. 말썽 피우는 건 구승훈인데.”주해찬이 웃으며 대답했다.“그게 다 나 때문이잖아요. 내가 없었다면 선배가 욕보일 일은 없었을텐데.”자책감이 강하리를 휩쓸었다. 주해찬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주해찬이 강하리의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하지만 그게 더 서글펐다.저 과분한 죄책감이 자신과의 거리감에서 나온 거니까.거리낌 없는 연인 사이었다면 자신에게 기대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우리 연인 사이잖아. 뭐든 함께 부딪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강하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선배는 억울하지 않으세요?”“뭐 약간? 하지만 행복감이 더 많아서 별로 느껴지지도 않는걸.”잠시 멈췄던 강하리가 환하게 웃었다.“고마워요 선배.”“쓸데없는 생각 말고. 난 너만 있으면 돼.”주해찬이 강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로터스가든.손연지는 야근이란 톡만 남긴 채 집에 없었다.밤
”또 무슨 일이죠?”미간을 잔뜩 찌푸린 강하리가 전화를 받았다.“핸드폰 주인 여자친구시죠? 남친분이 지금 많이 취하셔서 데리러 오셔야 할 것 같아요.”……어?멍해졌던 강하리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죄송한데 전화 잘못 거셨어요. 모르는 사람입니다.”“그럴 리가요. 연락처에 첫 번째로 저장된 번호인걸요. 게다가 손님분이 계속 이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연락처에 승재라고 저장된 번호에 전화해 보세요.”‘이 정도면 많이 도운 거다.’강하리는 바로 통화를 끊어버렸다.“구승훈?”주해찬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선배, 일찍 자요.”주해찬의 눈에 착잡함이 스쳐지났다.분위기 다 잡친 마당에 다시 키스를 시도할 수도 없었다.“그래. 하리 너도 일찍 자.”같은 시각, 어느 칵테일바.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던 웨이터가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 뻗은 남자를 돌아보았다.잔뜩 퍼마시긴 했지만, 구승훈은 아직 완전히 필름이 끊긴 건 아니었다.알코올로 그리움을 마비시켜 보려고 했지만 깔끔하게 실패한 상태.술기운에 제어가 잘 안 되는 머릿속에서 자꾸만 강하리의 모습이 새어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더 괴로워졌다.남아있는 한 줌의 이성은 강하리에게 전화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기 바빴다.겨우 차단 해제했는데 또 차단당하면 영영 풀려날 것 같지 못해서.고달팠다. 눈가가 시큼해날 만큼.술자리가 끝난 밤, 전화하면 자다가도 데리러 오던 강하리는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괴로워하는 자신만 밖에 덩그러니 남겨놓은 채.정신줄 다잡고 강하리 대신 부른 게 대리운전이었다.알코올 냄새 풀풀 풍기며 아파트에 돌아온 구승훈의 모습에 가정부 아줌마가 경악했다.“대, 대표님? 대체 얼마나 드신 거예요. 세상에! 이마에 상처는 또 뭐고요?”구승훈이 콧방귀를 풍 뀌었다.“하아리, 아가씨가 선물해준 거.”“네에? 두분 또 다투셨어요?’“그으럴 리가요. 내가아, 강하리 을마나 아끼는데에.”혀 꼬부라진 소리로 대답한 구승훈이 피식 웃는다.구승훈을 부축해 겨우 소
강하리가 경찰서에 도착해 보니 구승훈이 기다리고 있었다.한 쪽 바지춤에 손을 올리고 차에 기댄 채.이마에 붙인 밴드만 아니었다면 그야말로 순정만화 남주가 따로 없었다.강하리에게까지 그렇게 보인 건 아니었지만.무시한 채 곧장 경찰서로 들어서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몇 걸음에 따라잡았다.“저 후져 보이는 차는 뭐지? 주해찬이 사 준 건가?”그림 같은 입술에서 튀어나온 하찮기 그지없는 말투.그걸 귓등으로 흘려버리는 강하리의 손목이 또 덥석 잡혔다.“야. 묻고 있잖아. 귀 먹었어?”퍽!구승훈의 정강이에 강하리의 킥이 날아들었다.순식간에 얼굴이 구겨진 구승훈이 신음을 흘리며 강하리를 잡았던 손을 놓고 정강이를 부여잡았다.“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또 함부로 손 대면 더 윗쪽 차버릴 겁니다.”서늘한 강하리의 경고.“강하리 너……. 무슨 여자가 발길질이…….”이제 보니까 성격만 야생마인 줄 알았더니 발질질도 영낙없는 야생마다.투레질을 하는 야생마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강하리가 경찰서에 들어섰다.“강찬수 씨가 진 거액의 빚을 받으러 온 일수꾼이라고 합니다. 빚재촉을 하려고 따라붙었다가 두분이 나타나는 바람에 숨어있었고, 두분이 간 다음 빚을 받으려가다 강찬수 씨가 칼을 들고 협박하는 바람에 실랑이를 벌이다가 실수로 죽였다네요.” 경찰의 진술을 들은 강하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증거는 확보했나요?”“강찬수 씨 손톱에서 나온 DNA와 용의자의 DNA가 일치해요. 용의자가 진술한 시간과 위치도 일치하고요. 다른 의문 있으십니까?”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다고?바로 그 때,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골목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면, 왜 골목 바로 앞 CCTV에는 용의자가 전혀 찍히지 않은 걸까요? 그리고 피해자 몸에서 발견됐다는 그 DNA. 그게 용의자가 사건 발생 당시 남긴 DNA라는 증거는 있는 겁니까?”담당 경찰이 멍해졌다가 한참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용의자가 한 짓이 아니라면, 이유 없이 자수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이유가 왜 없어
무표정한 얼굴의 구승훈.하지만 왠지 칭찬해달라는 분위기가 풍겨오는 건 기분 탓일까?강하리는 구승훈에게서 눈깅을 돌려버렸다.모든 절차가 끝나고 경찰서에서 나오니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구승훈이 또 강하리 앞을 막아섰다.정강이 로우킥이 효과(?)가 있었던지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진 않았지만.“이번에는 뭔가요?”강하리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강찬수에게 물어보려던 거, 그거 뭐야?”잠시 망설이던 강하리는 자신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구승훈에게 털어놓았다.어찌 됐건 구승훈이 이 사건에 말려든 건 자신 몫도 있었으니까.“그러니까 네 생각엔, 누군가가 입막음을 했다 이거지?”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의심 가는 사람은 있고?”강하리는 대답이 없었다.하지만 구승훈을 바라보는 눈길은 그녀의 대답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구승훈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저도 모르게 송유라는 아니라고 튀어나올 뻔했다.그녀일 수가 없었다. 일거수일투족이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핸드폰 등 통신기기통제는 물론, 지난 경험으로 화장실에 보낼 때에도 시간 제한을 두었다.허나 말해봤자 무슨 쓸모가 있을까. 강하리에게는 송유라를 두둔하는 변명거리로밖에 안 들릴 건데.강하리가 코웃음을 치고는 자신의 차에 다가가 차 키를 눌렀다.운전석 문이 열리는 순간.터엉!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구승훈이 문을 도로 닫아버렸다.그리고는 길다란 두 팔을 쭉 내밀어 차를 짚었다.운전석 문 앞에 있던 강하리가 순식간에 구승훈의 품에 갇힌 자세가 되었다.“또 어쩌자는 건가요?”밉도록 익숙한 그 남자의 냄새가 훅 풍겨왔다. 강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구승훈의 뜨거운 눈빛이 강하리의 입술에 박혔다. 목울대가 두 번 요동을 쳤다.정말이지, 못 본지 며칠이나 됐다고, 미치도록 보고싶었다.꼼짝 못 하고 자신의 품 속에 갇힌 강하리를 보니 억눌렀던 욕구가 쑴펑쑴펑 솟구쳤다.구승훈의 눈이 점점 더 깊어졌다. 길다란 손가락이 강하리의 입가를 스쳐 지나갔다.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강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