삑! 삑!눈이 천천히 떠졌다. 흐릿하게 보이는 천장의 형광등이 눈을 자극하며 머리에 신호를 보냈고 두통이 시작됐다. 나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들어 눈을 가리려고 했지만, 허리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번져서 비명을 지르며 베개 위로 다시 쓰러졌다.희미한 시야 너머로 윤아율이 내 곁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괜찮아? 드디어 꺴네.”“아... 아율...”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통증이 강해지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쉿, 진정해. 아무 말도 하지 마.”윤아율이 나를 달랬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을 풀자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나는 조금 안정된 다음에야 물었다.“여긴... 어디야?”“여기 병원이야.”윤아율은 부드럽게 대답했다.그녀의 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병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벽, 파란 커튼, 그리고 햇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구석의 의자와 물 주전자, 유리잔이 올려진 작은 테이블도 눈에 들어왔다.나는 병원에 오게 된 과정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제서야 기억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차은별과의 언쟁, 계단 아래로 떨어진 순간, 극심한 통증, 그리고... 아기!순간 공포가 엄습하며 본능적으로 손이 배로 향했다.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작은 생명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윤아율은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고 당황했다.“너 일단 움직이려고 하지 마! 내가 의사를 데려올게.”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병실에서 뛰쳐나갔다.곧 윤아율은 의사와 간호사를 데리고 돌아왔다. 의사는 중년의 친절한 표정을 가진 여자로 이름은 최나연이라고 했다.“깨어나셨네요.”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디 불편한 데 있어요?”“트럭에 치인 것 같아요.”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최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트럭에 치인 사람치고는 의외로 건강해 보이네요.”그녀가 농담을 던졌다.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지만 통증이 다시 올까 봐 크게 웃지는 못했다.최나연은 바로 진찰을
윤아율이 떠난 후에도 권사현은 잠시 시간을 뒀다가 나를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너 왜 그래?”“내가 뭘?”“아까 한 말 말이야. 넌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거야? 은별이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잖아.”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에는 혼란스러움이 묻어났다.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아직도 모르겠어? 난 차은별 씨 때문에 계단에서 떨어졌어. 근데 넌 나를 챙기기는커녕 차은별 씨한테 달려가더라? 그 후에도 나는 아율이한테 떠넘기고 차은별 씨 곁에 있었지. 난 너한테 도대체 뭐야? 이런 대접을 해도 가만히 있는 웃음거리 같은 건가?”권사현은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연서야,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봐.”그는 신중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단어를 조심스럽게 고르는 듯 말이다.“은별이는 임신 중이야. 아기한테 문제가 생기면 큰 일이라고. 그래서 은별이부터 챙겨준 거야. 하지만 난 너희 둘 다 병원에 데려왔어. 아율 씨를 부른 건 내가 두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야. 너한테는 이런 상황에서 의지할 사람이 많지만, 은별이한테는 아무도 없어.”나는 피식 비웃었다.“차은별 씨는 도대체 왜 병원에 있는 건데? 다친 사람은 나야.”“은별이는 너를 구하려다가 다쳐서 입원했어.”‘잠깐만, 차은별이 날 구하려고 했다고? 내가 잘못 들었나? 차은별은 분명히 나를 다치게 한 사람인데?’“그게 무슨 말이야? 차은별 씨가 날 구하려고 했다고?”“넌 의식을 잃어서 아무것도 모르겠지. 어쨌든 너 은별이한테 고맙게 생각해야 해.”나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게 무슨 말이냐니까?!”“어젯밤 네가 다짜고짜 화를 내며 가방을 챙겨서 나가려고 했다며? 그러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졌고, 은별이는 너를 구하겠다고 뛰어들다가 같이 미끄러졌어.”‘미친, 사현 씨한테는 이렇게 말한 거야? 악마 주제에 자기를 천사로 포장하는 인간도, 그걸 또 천사라고 믿는 인간도 참 어이없다.’“은별이가 이렇게 말했어.”“그래서 넌 그냥 믿었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채연서, 너 나한테 숨기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니야?”윤아율이 말했다.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병실에 우리 둘만 남아 있었다. 나는 권사현이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고 아침 식사와 약을 챙겨 먹은 덕에 상태가 많이 좋아져 있었다.“친구라면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는 건 섭섭해.”“알았어. 뭘 알고 싶은데?”나는 체념하며 물었다.“우선, 그 차은별이라는 여자는 누구야? 내가 전에 권사현이랑 같이 있는 걸 봤던 여자가 차은별이지? 걔는 대체 왜 너희 집에 있었고, 권사현이랑은 무슨 사이야? 권사현 그 인간이 엄청 신경 쓰는 것 같더라.”나는 오늘 하루에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또 쉬었다. 그리고 차은별이 권사현과 내 삶에 어떻게 끼어들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밀쳤다는 이야기와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빼놓았다.권사현은 나를 믿지 않았다. 증거 없이 이 문제를 계속 끌고 갈 수도 없었다. 결국 내 말과 차은별의 말 중 하나를 믿는 문제로 끝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내 임신 소식은 아직 누구에게도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내 이야기가 끝나자 윤아율은 화가 나면서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이제 어떡할 거야? 권사현 친구라고 해서 계속 귀찮게 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차은별 씨 문제에서는 사현 씨도 남 같아. 그리고 차은별 씨는 사현 씨에 대해 나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어.”“이봐, 채연서 씨.”윤아율이 내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그렇다고 해서 열등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걔네 둘은 20년이나 알고 지냈다며. 너보다 많이 아는 건 당연해. 뭐가 됐든 다 지나간 일이야. 차은별이라는 여자는 과거에 있고 너는 현재와 미래에 있어.”윤아율의 말에 내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완벽한 위로의 말을 찾아내는 그녀에게 참 고마웠다. 그녀는 이렇듯 나를 위로할 말을 잘 알고 있었다.“내 친
부딪힌 상대를 올려다보니 젊은 남자였다. 그의 얼굴을 마주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깊은 눈동자는 나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고, 뚜렷하고 남성적인 이목구비도 잠시 말문이 막히게 했다.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서둘러 말했다.“죄송해요.”그의 휴대폰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뒹굴고 있었다.“그쪽 휴대폰인가요?”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얼른 다가가 주워서 그에게 건넸다.“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네요. 다시 한번 죄송해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사과드려야 할 것 같네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제가 길을 보지 않고 부딪혔으니 제 잘못이에요.”그는 낮고 따뜻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웃었다.“그럼 비긴 걸로 해요. 저도 부주의 했으니까요.”그의 말투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저는 한지훈이라고 해요.”내가 그와 악수하려는 순간 윤아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연서야! 너 그 새로 여기까지 온 거야?”나는 서둘러 손을 거두고 한지훈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윤아율을 향해 몸을 돌렸다.“미안, 잠깐 길을 헤맸어.”한지훈은 여전히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았다.“저쪽에 있던 사람, 권사현 씨 맞죠?”나는 곁에 있던 여자는 무려 친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묵묵히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사현의 명성을 생각하면 그를 알아본 것도 놀랍지는 않았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혹시 사현 씨를 만나러 왔어요?”“아뇨, 저는 그냥 여기서 당신과 마주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온 거예요.”나는 그의 말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무언가 더 말하기 전에 윤아율이 나를 끌어당겼다.“가자, 이제 돌아가야 해.”걸음을 옮기며 뒤돌아보니 한지훈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미소는 부드럽지만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윤아율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저 훈
사흘 후.“좋은 아침이에요.”최나연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병실로 들어왔다.“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어요. 연서 씨 이제 완전히 회복돼서 퇴원해도 좋아요. 남편분이 퇴원 서류에 서명하면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어요.”내 얼굴에 즉시 미소가 떠올랐다.“감사합니다, 선생님.”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건강 잘 챙기세요. 집에서도 조심해야 해요.”침대 옆에 앉아 있던 윤아율이 내 손을 잡고 환하게 웃었다.“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네. 정말 잘 됐어.”나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러니까. 신난다.”이때 권사현이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잘 잤어? 아침 식사 가져왔어.”“고마워.”나는 담담히 대답했다.사흘간 우리의 관계는 계속 어색했다. 거의 남처럼 지냈다고 보면 된다.권사현도 매일 짧게 안부를 묻는 걸 제외하고는 거의 나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마치 나를 떠나 차은별에게 가려고 서두르는 것 같았다.내가 불평했을 때, 그는 나에게는 윤아율이 있으니 불쌍한 차은별에게 양보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예민하고 잔소리 많은 아내로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퇴원 서류에 서명하고 올게. 너는 아침 먹고 있어.”권사현은 종이 가방을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을 여는 그를 불러 세웠다.“차은별 씨는 어때?”그의 어깨가 살짝 굳는 것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은별이도 오늘 퇴원해.”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나는 말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렇게 반응하는 데 익숙해졌다.권사현이 나가고 평소처럼 나와 윤아율만 남겨졌다. 윤아율은 내 슬픈 표정을 눈치챘는지 부드럽게 내 손을 꽉 잡았다.“괜찮아질 거야, 연서야. 걱정하지 마.”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차은별 씨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나 이제 이 결혼이 세 사람의 결혼처럼 느껴져.”“일단 몸부터 추스르자. 에너지를 보충해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거 아니야.”나는 마지
집으로 가는 내내 나는 짜증에 시달렸다. 차은별은 일부러 나에게 과시라도 하는 듯 권사현에게 과도한 애정 표현을 했다.그녀는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거나, 장난스럽게 그의 팔에 매달리고는 했다. 그 와중에 룸미러를 통해 비웃는 눈빛을 내게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사현아, 음악 좀 틀어줄래? 나 지루해.”그녀의 콧소리가 차 안의 침묵을 깨며 울려 퍼졌다.“뭘 듣고 싶어?” “고등학교 때 우리 자주 듣던 노래 있잖아. 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그 노래 이제 내 플레이리스트에 없어.”권사현은 도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우리가 그렇게 좋아했던 노래가 없다고?”차은별이 입술을 삐죽이며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권사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 모습이 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그는 그녀와 있을 때 항상 편안해 보였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다.차은별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꺼내는 척하다가 갑자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어라, 내 폰 어디 갔지?”“넌 여전하구나.”권사현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차은별도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잠시 후 권사현은 말없이 글러브 박스를 열어 그녀의 휴대폰을 꺼내 건넸다. 차은별은 휴대폰을 받으며 가벼운 손 키스를 날린 뒤 노래를 틀었다. 차 안에는 Whitney Houston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I Will Always Love You...”차은별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권사현은 낮게 흥얼거리며 화음을 맞췄다. 그들의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과거의 추억을 끌어올리는 듯했다. 그걸 보고 있는 나는 속이 뒤틀리기만 했다.그 순간, 나는 내가 제삼자라는 걸 깨달았다. 보이지 않고, 무시당한 존재. 그들이 음악으로 교감하며 감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권사현은 자신의 행동이 날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알기나 할까?숨이 막힐 것 같은 상처의 고통에 숨 쉬는 것
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권사현을 바라봤다. 뭐라도 설명해 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나를 무시해 버렸다.‘이게 무슨 상황이야? 사현 씨가 나랑 상의도 없이 차은별을 집에 들이기로 한 거야?’“무슨 약속이냐고?”나는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더 단호하고 강경했다.“빨리 말해. 무슨 약속이냐고.”“말조심해.”권사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다가 차은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우리 전에 이미 얘기했잖아.”“무슨 얘기?”내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다른 사람을 우리 집에 들이는 거면 적어도 나한테 상의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네 아내고, 이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야!”차은별은 여전히 배에 손을 얹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도 동정을 끌어내려는 의도일 것이다.“사현아, 빨리 말해주자. 내가 자리를 잡고 집을 구할 때까지 여기 머물기로 합의했다고 말이야.”“자리를 잡아요?”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차은별 씨는 임신했어요. 불구자가 된 게 아니고요. 혼자 낯선 도시에 왔으면 빨리 적응할 생각부터 해야죠. 남한테 얹혀사는 게 아니라!”차은별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하지만 그녀가 반박하기도 전에 권사현이 끼어들었다.“연서야, 우선 내 말 좀 들어봐. 은별이는 남이 아니야...”“나한테는 남이야!”“채연서, 유치하게 굴지 말고 내 말부터 들어.”권사현이 날카롭게 말했다. 이제는 내 불만을 표출하는 것도 유치한 행동이 되었다.“은별이는 지금 아주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도움? 우리의 도움? 네 도움이라고 말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넌 지금 자기 아내도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이겠다는 거야? 그것도 나랑 상의 한마디 없이, 내 기분은 완전히 무시하고?”권사현은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이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자. 오늘은 이미 충분히 피곤했어.”“나중에 얘기하자고?”나는 언성을 높였다.“싫어. 지금 당장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가벼운 손길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눈을 떠보니 권사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저녁 준비 다 됐어, 여보.”그는 따뜻하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내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저녁?”나는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지금 몇 시야?”창문을 보니 밖은 벌써 어두웠고 방 안은 침대 옆 조명의 불빛으로 환했다.권사현이 웃으며 말했다.“너 네 시간이나 잤어. 너 원래는 잠이 별로 없지 않았어? 몸은 괜찮아?”“응, 괜찮아.”나는 재빨리 대답하며 침대에서 내렸다. 내가 최근 기운이 없고 자꾸 잠드는 건 임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궈사현에게 그 사실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그럼 다행이고. 내려갈까?”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침실을 나섰다. 다이닝 룸으로 가는 길에 내가 물었다.“저녁은 뭐 먹어?”“구운 감자, 브로콜리, 그리고 치킨 준비했어.”권사현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물도 겨우 끓이는 네가 그런 복잡한 요리를 만들었다고?”권사현이 잠시 멈추더니 살짝 웃으며 말했다.“은별이가 도와줬어.”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질투심이 내 가슴을 찔렀다.두 사람이 부엌에서 함께 웃고 요리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 상상이 내 질투심을 더 삼키기 어렵게 만들었다.나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떨쳐내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차은별은 식사를 차리고 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먼저 자리에 앉고 권차현이 뒤따라 앉았다.권사현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연서야, 은별이가 너한테 할 말이 있대.”차은별이 권사현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이 지었지만, 권사현이 그녀를 살짝 밀면서 재촉했다.“어서 말해.”그의 격려에도 차은별은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낸 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요즘 제 비이성적인 행동에 사과하고 싶어요. 기분이 자꾸 오락가락해서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임신을 못 해본
권사현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로 놀란 눈빛을 주고받았다.“방금 그 소리 뭐지?”나는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모르겠어...”권사현은 대답하려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하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외치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은별아!”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거실에 도착할 때까지 숨이 차오를 정도로 뛰었지만 거실에서 본 광경은 예상 밖이었다. 차은별은 소파에 늘어져 태연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다.“은별 씨, 뭐 하시는 거예요? 방금 그 비명은 뭐였어요?”나는 숨을 고르며 다급히 물었다.차은별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권사현까지 무시했다. 아침에 그녀의 요구를 거절당한 일 때문에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했다.“은별아, 지금 너랑 이야기하고 있잖아.”권사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렇게 소리를 질렀어?”차은별은 마침내 권사현을 쳐다보았지만 그 눈빛은 경멸이 담겨 있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네가 그렇게 비명을 지르니 연서랑 나 둘 다 무슨 일 난 줄 알고 놀랐잖아.”권사현이 진지하게 말했다.그러자 차은별은 비꼬는 말투로 대꾸했다.“네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한다고 생각해? 우리 20년이나 알고 지냈다면서, 네가 하는 건 다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받은 은혜를 갚으려는 행동일 뿐이지.”“은별아, 그런 말은 하지 마.”권사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하든 내 자유야. 비명 하나에 신경 쓸 사람이면, 아침에 내가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을 땐 왜 못 들은 척했어?”그 순간 나는 내 추측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차은별은 아침에 있었던 일로 여전히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나는 이미 중요한 약속이 있었고 대신 기사님을 보냈잖아. 내가 같이 갔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크게 달라지는데?”권사현이 지친 듯 대꾸했다.“당연히 다르지! 네가 같이 가면 내가 더 안전하다고 느낄 거잖아. 그리고 병원에서도 네
“진심이야?”윤아율이 전화기 너머에서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차은별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이 가!”사무실에 도착해 책상을 정리하자마자 나는 윤아율에게 전화를 걸어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전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듯했다. 그녀의 밝은 웃음소리가 전화 너머로 생생히 전해졌다.“솔직히, 차은별이 갑자기 화내면서 나한테 달려들 줄 알았어. 항상 자기 뜻대로만 하던 사람이 거절당하는 걸 처음 겪으니 정말 충격받은 것 같더라고.”“정말 잘했어! 이런 걸 더 자주 해야 해. 차은별에게도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만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줘야지.”윤아율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근데...”나는 갑자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사현이가 가끔씩 이렇게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게 마음이 아파. 이번에는 나를 지켜줬지만 다음번에는 또 차은별이 하자는 대로 따라줄까 봐.”“걱정하지 마, 연서야. 어젯밤에 권사현 씨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게 진심 아니었겠어?”“그랬지. 근데...”“네 남편은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런 남자 요즘 찾기 힘들어. 네가 용서하고 다시 잘해보려고 노력해야 해. 차은별 같은 사람이 너희 사이를 흔들지 못하게 단단히 막아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네 남편이랑 솔직히 대화하는 게 중요해.”윤아율은 단호히 말했다.“알겠어. 그런데...”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강다빈 씨?”“저예요.”문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매니저 이준혁이었다.“미안, 아율아. 매니저가 와서 끊어야겠어. 점심시간에 다시 전화할게.”“그래, 나중에 얘기하자.”윤아율은 짧게 대답했고 나는 전화를 끊고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치마를 매만지며 문 쪽으로 다가가 말했다.“금방 나갈게요.”문을 열자, 이준혁이 단정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의 큰 키와 단호한 분위기가 눈에 띄었다.“안녕하세요, 매니저님.”내가 먼저 인사하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권사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우리는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긴장감을 이어갔다.“방금 뭐라고 했어?”그는 충격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은 굳어 있었고 나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차은별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냐고 물었어.”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지만 분명 내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을 터였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조에는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좋아, 그럼 더 분명히 말할게.”나는 그의 반응에 지루함이 밀려와 본론으로 들어갔다.“요즘 많은 생각을 했어. 그리고 몇 가지를 깨달았지. 네가 아직도 차은별을 놓지 못한다면, 내가 널 그녀에게 보내 줄게. 첫사랑과 다시 함께하는 걸 막지 않을 거야. 우린 깔끔하게 끝내고 너희 둘이 원한다면 축복도 해줄게.”나는 일부러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을 마쳤다.“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권사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의 차분했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목울대가 긴장으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방금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혹시 윤아율이 그런 얘기를 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내가 혼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의 태도에 짜증이 밀려왔다.“아율이는 끌어들이지 마.”나는 낮게 말했다.“나도 어른이고 내 결정은 내가 내려.”단호한 목소리였지만 속으로는 그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 몰랐다는 생각이 스쳤다.“하지만 이건 네가 내릴 만한 결정이 아니야!”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날카롭게 반박했다.“그게 무슨 상관인데? 대답이나 해봐!”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우리
권사현은 어김없이 익숙한 다정한 남편처럼 보이려 애쓰며 말했다.“연서야, 오늘도 집에 안 들어올 생각이야?”나는 그의 질문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집으로 돌아갈 계획은 없었다. 언젠가는 돌아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적어도 오늘은 그날이 아니었다.“사현아, 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내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왜? 아직도 화가 나 있어? 제발, 연서야. 집에 가면 내가 다 설명할게.”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말이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하지만...”“그러지 마, 연서야. 제발 집으로 돌아가자. 계속 이렇게 도망칠 수는 없잖아.”나는 눈을 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내가 왜 낯선 사람을 막 들여보낸 그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뭐라고?”“아무 말도 안 했어.”나는 그의 물음에 얼른 말을 돌렸다.그때 강다빈이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강다빈에게 내 결혼 생활이 문제가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권사현이 곧이어 조수석에 앉았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일부러 못 본 척했다.“진짜 화난 거야?”그가 차 시동을 걸며 물었다.“그냥 집에 가자.”“네, 알겠습니다.”그는 농담 섞인 어조로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집으로 가는 길은 내내 적막했다. 차고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거실로 들어서니 차은별이 소파에 반쯤 누워 과자를 먹고 있었다. 임신한 사람이 먹기엔 썩 건강해 보이지 않는 간식이었다.내가 들어서자 그녀는 일어나려는 듯하다가 몸을 다시 뒤로 기대며 혀를 찼다. 아마 권사현인 줄 알았던 것 같다.“집에 돌아온 거예요?”그녀는 비꼬는 투로 말했다.“그래요, 내 집에 돌아왔어요. 그런데 차은별 씨, 좀 실망스러워 보이네요?”나는 조롱하며 말
권사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차은별은 황급히 손을 떼고 돌아섰다. 차가웠던 눈빛은 순식간에 따스함으로 변했고 그녀의 이런 태도 변화는 언제 봐도 놀라웠다.“별일 아니에요. 연서 씨가 이제 막 도착해서 많이 걱정했다고 말하고 있었어요.”차은별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서야?”권사현은 내 이름을 부르며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말했다.“너 때문에 정말 걱정 많이 했어.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그냥 안전한 곳에 있었어.”나는 권사현의 눈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율 씨한테 연락했는데 너랑 같이 있지 않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신고하려다가 은별이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하더라고. 네가 괜찮을 거라 확신했다는데 정말 다행이야.”권사현의 말에 차은별은 승리한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나는 속으로 비웃음을 참았다. 차은별이 기다리자고 한 건 내 안전 때문이 아니라 권사현이 나를 찾지 못하게 하려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완벽하게 착한 사람인 척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연서야, 네가 들은 말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알아.”권사현이 내 손을 잡으려다 멈추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잠시 상처받은 듯한 표정이 스쳤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그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내 말 좀 들어봐...”“사현아, 지금 그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옷 갈아입으러 잠깐 온 것뿐이야. 일이 늦으면 안 되니까 서둘러야 해.”권사현의 얼굴에 실망이 드리웠지만 그는 담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나도 일하러 가야 하니까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게. 차로 데려다줄게.”내가 거절하려던 순간 차은별이 나섰다.“사현아, 이미 늦었잖아. 연서 씨도 이제 집에 왔으니 스스로 출근할 수 있을 거야.”“난 대표라 조금 늦어도 괜찮아. 연서야, 준비하고 와. 기다릴게.”권사현은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 아율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율이가 데려다줄 거야.”나는 서둘러 말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이 없는 날이라 정말 감사했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은 뒤 TV를 보는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었다. 윤아율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연서야.”그녀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옆 소파에 앉았다.“무슨 생각해?”나는 그녀를 한 번 흘끗 보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끝난 거야?”이 질문은 윤아율이 새벽에 일어나 집 입구 양옆에 있는 꽃들을 다듬고 있었기 때문에 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일을 다 끝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응. 이제 꽃들이 훨씬 깔끔해졌어.”“몇 시간 동안 일했으니 아침 좀 먹어야지.”나는 TV에 계속 시선을 둔 채 말했다.“글쎄... 네가 TV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꽃 다듬고,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심지어 아침까지 먹었어. 임산부는 다 너처럼 게으르고 둔한 거야?”나는 멈칫하며 되물었다.“뭐?”그리고 그녀를 제대로 보기 위해 돌아보았다. 그녀는 정말 샤워를 했고 머리도 젖어 있었으며 새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어쩔 수 없잖아.”나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네가 아무것도 못 하게 하니 TV라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야지.”“음... 그래?”윤아율이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그럼 내일은 뭐 할 생각이야? 출근 안 해?”나는 TV에서 시선을 떼고 윤아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내일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나서 출근할 거야.”“진심이야? 가정을 지키고 싶다면 도망치는 것부터 멈춰. 권사현 말을 들어보는 게 좋을지도 몰라. 누가 알아? 그 새로 그 여자가 권사현한테 더 들러붙을지? 절박한 상태에서 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을 거야.”나는 잠시 멍하니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 그런 관점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대화를 엿들었을 때, 권사현은 키스에 대해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았었다. 윤아율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차은별이 권사현에게 들러붙었을 가능성도 있었다.“권사현이 조금 멍청한 짓을 한 건 맞지만 그래도 괜찮은 남편이라
나는 윤아율의 말을 곱씹으며 잠시 멈췄다. 그러다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거 농담이지?”“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윤아율이 단호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이혼이라...’나는 그 단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비현실적이고 낯설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왜 내가 이혼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 결혼에 모든 걸 쏟아부었고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애썼는데 말이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아니야, 그건 말도 안 돼.”나는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나 진심이야. 넌 권사현한테 망설임의 대상이 되어서 안 돼. 넌 권사현의 아내야. 제발 생각 좀 해 봐. 권사현은 성인이고, 이제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해야 해. 만약 차은별한테 남은 정이 있다면 만나게 되겠지. 하지만 아니라면 확고하게 행동해야 해. 그 첫 단계가 차은별을 적절한 위치에 두는 거야. 차은별이 있을 곳은 너희 삶도, 너희 부부의 집도 아니야!”그녀의 말은 직설적이지만 정확했다.“...네 걱정 이해해, 아율아.”나는 조용히 말했다. 적절한 말을 찾으려고 애쓰면서 말이다.“하지만... 난 잘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내가 임신 중일 때 이혼하는 게 옳은 일일까? 결혼 생활에 힘든 시기가 생기는 건 당연하잖아. 문제를 악화시키는 대신 고쳐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넌 그게 문제야, 연서야.”“무슨 문제?”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넌 이 결혼이 깨지는 게 두려워서 무시당하면서도 참으려고 해. 임신 여부와 상관없이, 상대가 누구든 설사 친척이라고 해도 너희 집에서 살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연서야, 네가 이렇게까지 버티는 거 네 엄마처럼 실패한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서잖아. 그러니까...”“그만!”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어떻게 지금 그 얘기를 꺼낼 수 있어? 내가 그 얘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잖
권사현이 떠난 뒤, 나는 걱정으로 가슴이 타들어 갔다.‘차은별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집을 떠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배가 아프다고?’권사현이 이 상황을 잘 처리할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어느 한순간 나는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은별이 처음부터 권사현이 떠나는 걸 원하지 않았던 만큼 집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계략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너무 피해망상적이고 불안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연기 중이라면 정미경까지 끌어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나는 더 초조해졌다.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권사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심각한 문제라면?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집으로 가야만 했다. 권사현이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니까.망설임 없이 나는 옷을 집어 들고 입었다. 가방을 챙기고 호텔 밖으로 서둘러 나갔다. 택시를 불러 집 주소를 알려주고는 차에 올라탔다. 차가 달리는 동안 나는 점점 초조해졌고 기사에게 더 빨리 가달라고 요구했다. 다행히 기사도 별다른 말 없이 내 요청을 들어주었다.몇 분 뒤, 택시는 집 대문 앞에 멈췄다. 나는 요금을 지불하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권사현의 차가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었다. 운전석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시동은 켜진 상태였다. 나는 시동을 끄고 문을 닫은 뒤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집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권사현과 차은별이 어디 있는지 궁금했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대신 그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거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차은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 소리를 엿들었고, 그때 들은 말이 내 심장을 산산조각 냈다.“너희 둘이 키스했다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권사현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나를 보았다. 현장에서 발각된 도둑과 같은 모양새였다.“연서야, 내
[권사현 시각]------“사현아,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은별이가 방금 나한테 전화 왔어. 배가 아프다고 하더라. 복통이 심한 것 같아...”어머니의 말에 나는 바로 얼어붙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뭐라고요?!”외마디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 은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안 돼...”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급히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패닉 상태에 빠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무슨 일이야?”채연서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녀가 언제 침대에서 일어났는지조차 몰랐다. 내 머릿속에는 최악의 상황들에 관한 상상으로 가득 찼다.“나 무서워. 무슨 일인데? 누구한테서 온 전화야?”그녀가 다시 물으며 내 생각을 끊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나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단어들이 뒤엉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은별이가... 어머니한테 전화했어... 은별이가 아프대. 배가 많이...”채연서의 눈에 놀라움이 비쳤다.“무슨 일이 생긴 거야?”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모르겠어. 가서 확인해야 해. 집으로 가야 해.”“알았어. 그럼 나도 같이 갈게.”나는 고개를 흔들며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으며 말했다.“아니, 넌 여기 있어. 내가 처리할게...”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는 차 키를 집어 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선택해 두 계단씩 뛰어 내려갔다.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느끼며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교통 규칙도, 경찰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차은별에게 빨리 도착하는 것이다.운전하는 내내 죄책감이 나를 갉아먹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의 함께 가자는 말을 들어야 했었다. 이제 그녀는 위험에 처했고 모든 것이 내 잘못이었다.대형 교차로에서 길이 막히자 앞에 있던 느린 운전자를 향해 욕이라도 할 뻔했다. 나는 핸들을 꽉 쥐며 계속 중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