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사현은 어김없이 익숙한 다정한 남편처럼 보이려 애쓰며 말했다.“연서야, 오늘도 집에 안 들어올 생각이야?”나는 그의 질문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집으로 돌아갈 계획은 없었다. 언젠가는 돌아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적어도 오늘은 그날이 아니었다.“사현아, 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내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왜? 아직도 화가 나 있어? 제발, 연서야. 집에 가면 내가 다 설명할게.”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말이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하지만...”“그러지 마, 연서야. 제발 집으로 돌아가자. 계속 이렇게 도망칠 수는 없잖아.”나는 눈을 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내가 왜 낯선 사람을 막 들여보낸 그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뭐라고?”“아무 말도 안 했어.”나는 그의 물음에 얼른 말을 돌렸다.그때 강다빈이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강다빈에게 내 결혼 생활이 문제가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권사현이 곧이어 조수석에 앉았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일부러 못 본 척했다.“진짜 화난 거야?”그가 차 시동을 걸며 물었다.“그냥 집에 가자.”“네, 알겠습니다.”그는 농담 섞인 어조로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집으로 가는 길은 내내 적막했다. 차고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거실로 들어서니 차은별이 소파에 반쯤 누워 과자를 먹고 있었다. 임신한 사람이 먹기엔 썩 건강해 보이지 않는 간식이었다.내가 들어서자 그녀는 일어나려는 듯하다가 몸을 다시 뒤로 기대며 혀를 찼다. 아마 권사현인 줄 알았던 것 같다.“집에 돌아온 거예요?”그녀는 비꼬는 투로 말했다.“그래요, 내 집에 돌아왔어요. 그런데 차은별 씨, 좀 실망스러워 보이네요?”나는 조롱하며 말
권사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우리는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긴장감을 이어갔다.“방금 뭐라고 했어?”그는 충격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은 굳어 있었고 나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차은별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냐고 물었어.”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지만 분명 내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을 터였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조에는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좋아, 그럼 더 분명히 말할게.”나는 그의 반응에 지루함이 밀려와 본론으로 들어갔다.“요즘 많은 생각을 했어. 그리고 몇 가지를 깨달았지. 네가 아직도 차은별을 놓지 못한다면, 내가 널 그녀에게 보내 줄게. 첫사랑과 다시 함께하는 걸 막지 않을 거야. 우린 깔끔하게 끝내고 너희 둘이 원한다면 축복도 해줄게.”나는 일부러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을 마쳤다.“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권사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의 차분했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목울대가 긴장으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방금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혹시 윤아율이 그런 얘기를 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내가 혼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의 태도에 짜증이 밀려왔다.“아율이는 끌어들이지 마.”나는 낮게 말했다.“나도 어른이고 내 결정은 내가 내려.”단호한 목소리였지만 속으로는 그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 몰랐다는 생각이 스쳤다.“하지만 이건 네가 내릴 만한 결정이 아니야!”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날카롭게 반박했다.“그게 무슨 상관인데? 대답이나 해봐!”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우리
“진심이야?”윤아율이 전화기 너머에서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차은별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이 가!”사무실에 도착해 책상을 정리하자마자 나는 윤아율에게 전화를 걸어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전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듯했다. 그녀의 밝은 웃음소리가 전화 너머로 생생히 전해졌다.“솔직히, 차은별이 갑자기 화내면서 나한테 달려들 줄 알았어. 항상 자기 뜻대로만 하던 사람이 거절당하는 걸 처음 겪으니 정말 충격받은 것 같더라고.”“정말 잘했어! 이런 걸 더 자주 해야 해. 차은별에게도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만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줘야지.”윤아율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근데...”나는 갑자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사현이가 가끔씩 이렇게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게 마음이 아파. 이번에는 나를 지켜줬지만 다음번에는 또 차은별이 하자는 대로 따라줄까 봐.”“걱정하지 마, 연서야. 어젯밤에 권사현 씨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게 진심 아니었겠어?”“그랬지. 근데...”“네 남편은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런 남자 요즘 찾기 힘들어. 네가 용서하고 다시 잘해보려고 노력해야 해. 차은별 같은 사람이 너희 사이를 흔들지 못하게 단단히 막아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네 남편이랑 솔직히 대화하는 게 중요해.”윤아율은 단호히 말했다.“알겠어. 그런데...”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강다빈 씨?”“저예요.”문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매니저 이준혁이었다.“미안, 아율아. 매니저가 와서 끊어야겠어. 점심시간에 다시 전화할게.”“그래, 나중에 얘기하자.”윤아율은 짧게 대답했고 나는 전화를 끊고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치마를 매만지며 문 쪽으로 다가가 말했다.“금방 나갈게요.”문을 열자, 이준혁이 단정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의 큰 키와 단호한 분위기가 눈에 띄었다.“안녕하세요, 매니저님.”내가 먼저 인사하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권사현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로 놀란 눈빛을 주고받았다.“방금 그 소리 뭐지?”나는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모르겠어...”권사현은 대답하려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하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외치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은별아!”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거실에 도착할 때까지 숨이 차오를 정도로 뛰었지만 거실에서 본 광경은 예상 밖이었다. 차은별은 소파에 늘어져 태연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다.“은별 씨, 뭐 하시는 거예요? 방금 그 비명은 뭐였어요?”나는 숨을 고르며 다급히 물었다.차은별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권사현까지 무시했다. 아침에 그녀의 요구를 거절당한 일 때문에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했다.“은별아, 지금 너랑 이야기하고 있잖아.”권사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렇게 소리를 질렀어?”차은별은 마침내 권사현을 쳐다보았지만 그 눈빛은 경멸이 담겨 있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네가 그렇게 비명을 지르니 연서랑 나 둘 다 무슨 일 난 줄 알고 놀랐잖아.”권사현이 진지하게 말했다.그러자 차은별은 비꼬는 말투로 대꾸했다.“네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한다고 생각해? 우리 20년이나 알고 지냈다면서, 네가 하는 건 다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받은 은혜를 갚으려는 행동일 뿐이지.”“은별아, 그런 말은 하지 마.”권사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하든 내 자유야. 비명 하나에 신경 쓸 사람이면, 아침에 내가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을 땐 왜 못 들은 척했어?”그 순간 나는 내 추측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차은별은 아침에 있었던 일로 여전히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나는 이미 중요한 약속이 있었고 대신 기사님을 보냈잖아. 내가 같이 갔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크게 달라지는데?”권사현이 지친 듯 대꾸했다.“당연히 다르지! 네가 같이 가면 내가 더 안전하다고 느낄 거잖아. 그리고 병원에서도 네
음식의 향으로 가득한 방 안에서 나는 남편 권사현을 바라봤다. 그의 짙은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오뚝한 콧대와 날렵한 턱선을 감쌌다.평범한 옷차림으로 가려지지 않는 존재감은 단연 압도적이었고 조각 같은 몸매는 잡지에서 막 걸어 나온 사람 같은 느낌을 줬다. 그런 남자가 바로 내 앞에 있었다.오늘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다. 이를 기념하며 나는 오붓한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평소 차가운 태도를 일관하던 그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줬다.그가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때는 정말 화를 내는 것도 어려웠다. 나는 오늘 특별히 그의 옆에 앉는 것이 아닌 마주 보는 자리를 선택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그의 반응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는 어제 주치의로부터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결혼기념일 저녁 식사 자리에서 전하기 위해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어떤 방식으로 전하든 전부 좋은 소식일 것이다. 결혼기념일과 새 생명이 함께 찾아온다면 오늘 식사 자리의 의미도 특별해질 것이다.“너무 맛있어.”권사현이 말했다.“셰프한테 당연한 말인데도 계속 감탄하게 돼.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나는 그의 칭찬에 잠깐 긴장했다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마워. 사현 씨한테서 들은 감탄은 언제나 뜻깊게 느껴져.”그도 미소를 지었지만 내 미소만큼 환하지는 않았다.“그런데 이렇게 많이 만들 필요는 없었어. 두세 가지로도 충분하잖아. 먹는 사람이 우리 둘밖에 없는데.”‘또 이런 식이야?’나는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 특별한 느낌을 주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그의 휴대폰이 울리며 평화로운 분위기를 깼고, 나도 말문이 막혀 버렸다.권사현은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곧이어 그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미안. 회사 연락이야. 꼭 가봐야 해.”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목이 메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실망을 감췄다.“괜찮아. 다녀 와. 난 여기 있을게.”내 목소리는 의도했던 것보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잘못 본 것이 아닌지 확인했다. 충격에 커진 눈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말이다.내 남편 권사현이 임신한 다른 여자의 곁에 서 있었다. 그녀는 내가 일하는 이 레스토랑에서 권사현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주장했다.그 여자가 했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았다.“내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려요. 당신 해고시킬 거니까요.”순간 심장이 요동쳤고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마치 배가 주먹으로 강타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사현 씨?”권사현은 내 시선을 마주했지만 표정은 태연했다.“어, 연서야.”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톤으로 말했다. 내가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나는 그의 설명을 기다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권사현이 대답하기도 전에 차은별이 먼저 놀란 얼굴로 말했다.“아, 당신이 연서 씨였어요? 아까는 미안해요. 저는 차은별이라고 해요. 사현이 친구요.”나의 무표정한 얼굴을 본 차은별은 계속해서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사현이는 제가 여기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제가 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여러모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거든요. 사현이는 정말 최고의 친구예요.”나는 권사현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친구?”나는 믿기 힘든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권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 친구. 은별이는 임신한 상태로 귀국했고 지금 의지할 데가 없어.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나는 여전히 설득되지 않았다. 내 시선은 차은별에게 옮겨졌다. 그녀는 연약해 보이는 태도를 유지하며 나의 양해를 구했다.“아이는...?”권사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내 애는 아니야. 오해하지 마.”나는 이제야 약간 안심하며 권사현을 믿기로 했다. 그 순간, 차은별이 목청을 가다듬으며 내
“아율아, 나 이제 끊어야겠어. 알려줘서 고마워.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윤아율과 전화를 끊고 나서도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권사현은 언제나 우아하고 배려심 깊으며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혼한 3년 동안 나는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는 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두둔했고 약속도 두 번이나 어겼다.나는 차에서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광경을 마주하고 말았다.차은별은 거실 소파에 편안히 앉아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권사현의 어머니 정미경도 함께 있었고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말하며 웃고 있었다. 권사현은 그들 옆의 싱글 소파에 혼자 앉아 있었다.“이게 다 무슨 일이죠?”나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물었다. 내가 다가가자 권사현은 몸을 일으켜 부드럽게 내 코트를 받으며 말했다.“어머니가 은별이를 보고 싶어 하셔서 데려왔어.”그의 톤은 절제되어 있었다.“그럼 나한테 말이라도 했어야지.”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이게 네가 말했던 조율이라는 거야?”권사현은 잠시 나와 눈을 맞췄다. 사과의 기색은 잠깐만 비쳤다. 그는 내 코트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제 이 상황은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차은별은 집주인인 양 태연하게 나를 보며 말했다.“아, 연서 씨. 반가워요. 저는 어머니랑 얘기 나누고 있었어요.”나는 차은별을 노려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리고 왜 어머님이 이렇게 친절하게 굴지?’정미경도 고개를 들어서 나를 봤다. 하지만 표정은 차은별과 말할 때처럼 따뜻하지 않았다.“왔니?”그녀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차은별을 바라봤다.“계속 얘기해 보렴, 은별아.”나는 집에서조차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모욕감과 창피함이 밀려왔다.권사현을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 한 순간 무너졌다. 지금은 그가 차은별과의 관계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단순
차은별은 권사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방금 들은 말을 되새기며 충격에 빠진 채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가슴이 아려왔다. 차은별의 말 때문만이 아니라, 그 말을 권사현이 아닌 차은별에게서 들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나는 권사현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를 완전히 무시한 채 지나쳤다. 그가 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연서야, 내 말 좀 들어줘.”권사현이 내 손을 잡으려고 하며 말했다.나는 그의 손을 툭 쳐내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눈물이 맺힌 채 방에 도착하자마자 침대 위로 쓰러졌다. 지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이때 내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발신자는 권사현이었다.[미안해.]나는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의 사과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겨우 잠들었을 때조차 뒤숭숭한 꿈이 이어졌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보니 내 곁은 텅 비어 있었다. 그건 곧 어젯밤 권사현이 여기서 잠을 자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도 늘 그렇듯 손님 방에서 잤을 것이다. 우리가 싸울 때마다 그랬으니까.‘설마 차은별이랑 같은 방에서 잔 거 아니야?’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속삭였다.잠시 그런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최근 일들로 권사현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권사현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준비를 마친 다음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권사현이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좋은 아침이야.”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래, 좋은 아침.”나도 쿨하게 대답하려고 애썼다.“연서야, 어제 일 말인데...”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쩌면 너무 차분했다.“은별이가 첫 임신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 나름대로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 나한테 그러는 거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은별이도 너한테 악의가 있는 건 아니야.”나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겠지만, 나는 오히려 다른
권사현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로 놀란 눈빛을 주고받았다.“방금 그 소리 뭐지?”나는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모르겠어...”권사현은 대답하려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하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외치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은별아!”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거실에 도착할 때까지 숨이 차오를 정도로 뛰었지만 거실에서 본 광경은 예상 밖이었다. 차은별은 소파에 늘어져 태연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다.“은별 씨, 뭐 하시는 거예요? 방금 그 비명은 뭐였어요?”나는 숨을 고르며 다급히 물었다.차은별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권사현까지 무시했다. 아침에 그녀의 요구를 거절당한 일 때문에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했다.“은별아, 지금 너랑 이야기하고 있잖아.”권사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렇게 소리를 질렀어?”차은별은 마침내 권사현을 쳐다보았지만 그 눈빛은 경멸이 담겨 있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네가 그렇게 비명을 지르니 연서랑 나 둘 다 무슨 일 난 줄 알고 놀랐잖아.”권사현이 진지하게 말했다.그러자 차은별은 비꼬는 말투로 대꾸했다.“네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한다고 생각해? 우리 20년이나 알고 지냈다면서, 네가 하는 건 다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받은 은혜를 갚으려는 행동일 뿐이지.”“은별아, 그런 말은 하지 마.”권사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하든 내 자유야. 비명 하나에 신경 쓸 사람이면, 아침에 내가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을 땐 왜 못 들은 척했어?”그 순간 나는 내 추측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차은별은 아침에 있었던 일로 여전히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나는 이미 중요한 약속이 있었고 대신 기사님을 보냈잖아. 내가 같이 갔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크게 달라지는데?”권사현이 지친 듯 대꾸했다.“당연히 다르지! 네가 같이 가면 내가 더 안전하다고 느낄 거잖아. 그리고 병원에서도 네
“진심이야?”윤아율이 전화기 너머에서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차은별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이 가!”사무실에 도착해 책상을 정리하자마자 나는 윤아율에게 전화를 걸어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전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듯했다. 그녀의 밝은 웃음소리가 전화 너머로 생생히 전해졌다.“솔직히, 차은별이 갑자기 화내면서 나한테 달려들 줄 알았어. 항상 자기 뜻대로만 하던 사람이 거절당하는 걸 처음 겪으니 정말 충격받은 것 같더라고.”“정말 잘했어! 이런 걸 더 자주 해야 해. 차은별에게도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만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줘야지.”윤아율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근데...”나는 갑자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사현이가 가끔씩 이렇게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게 마음이 아파. 이번에는 나를 지켜줬지만 다음번에는 또 차은별이 하자는 대로 따라줄까 봐.”“걱정하지 마, 연서야. 어젯밤에 권사현 씨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게 진심 아니었겠어?”“그랬지. 근데...”“네 남편은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런 남자 요즘 찾기 힘들어. 네가 용서하고 다시 잘해보려고 노력해야 해. 차은별 같은 사람이 너희 사이를 흔들지 못하게 단단히 막아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네 남편이랑 솔직히 대화하는 게 중요해.”윤아율은 단호히 말했다.“알겠어. 그런데...”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강다빈 씨?”“저예요.”문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매니저 이준혁이었다.“미안, 아율아. 매니저가 와서 끊어야겠어. 점심시간에 다시 전화할게.”“그래, 나중에 얘기하자.”윤아율은 짧게 대답했고 나는 전화를 끊고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치마를 매만지며 문 쪽으로 다가가 말했다.“금방 나갈게요.”문을 열자, 이준혁이 단정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의 큰 키와 단호한 분위기가 눈에 띄었다.“안녕하세요, 매니저님.”내가 먼저 인사하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권사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우리는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긴장감을 이어갔다.“방금 뭐라고 했어?”그는 충격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은 굳어 있었고 나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차은별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냐고 물었어.”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지만 분명 내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을 터였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조에는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좋아, 그럼 더 분명히 말할게.”나는 그의 반응에 지루함이 밀려와 본론으로 들어갔다.“요즘 많은 생각을 했어. 그리고 몇 가지를 깨달았지. 네가 아직도 차은별을 놓지 못한다면, 내가 널 그녀에게 보내 줄게. 첫사랑과 다시 함께하는 걸 막지 않을 거야. 우린 깔끔하게 끝내고 너희 둘이 원한다면 축복도 해줄게.”나는 일부러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을 마쳤다.“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권사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의 차분했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목울대가 긴장으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방금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혹시 윤아율이 그런 얘기를 한 거야?”그의 말에 나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내가 혼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의 태도에 짜증이 밀려왔다.“아율이는 끌어들이지 마.”나는 낮게 말했다.“나도 어른이고 내 결정은 내가 내려.”단호한 목소리였지만 속으로는 그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 몰랐다는 생각이 스쳤다.“하지만 이건 네가 내릴 만한 결정이 아니야!”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날카롭게 반박했다.“그게 무슨 상관인데? 대답이나 해봐!”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우리
권사현은 어김없이 익숙한 다정한 남편처럼 보이려 애쓰며 말했다.“연서야, 오늘도 집에 안 들어올 생각이야?”나는 그의 질문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집으로 돌아갈 계획은 없었다. 언젠가는 돌아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적어도 오늘은 그날이 아니었다.“사현아, 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내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왜? 아직도 화가 나 있어? 제발, 연서야. 집에 가면 내가 다 설명할게.”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말이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하지만...”“그러지 마, 연서야. 제발 집으로 돌아가자. 계속 이렇게 도망칠 수는 없잖아.”나는 눈을 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내가 왜 낯선 사람을 막 들여보낸 그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뭐라고?”“아무 말도 안 했어.”나는 그의 물음에 얼른 말을 돌렸다.그때 강다빈이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강다빈에게 내 결혼 생활이 문제가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권사현이 곧이어 조수석에 앉았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일부러 못 본 척했다.“진짜 화난 거야?”그가 차 시동을 걸며 물었다.“그냥 집에 가자.”“네, 알겠습니다.”그는 농담 섞인 어조로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집으로 가는 길은 내내 적막했다. 차고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거실로 들어서니 차은별이 소파에 반쯤 누워 과자를 먹고 있었다. 임신한 사람이 먹기엔 썩 건강해 보이지 않는 간식이었다.내가 들어서자 그녀는 일어나려는 듯하다가 몸을 다시 뒤로 기대며 혀를 찼다. 아마 권사현인 줄 알았던 것 같다.“집에 돌아온 거예요?”그녀는 비꼬는 투로 말했다.“그래요, 내 집에 돌아왔어요. 그런데 차은별 씨, 좀 실망스러워 보이네요?”나는 조롱하며 말
권사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차은별은 황급히 손을 떼고 돌아섰다. 차가웠던 눈빛은 순식간에 따스함으로 변했고 그녀의 이런 태도 변화는 언제 봐도 놀라웠다.“별일 아니에요. 연서 씨가 이제 막 도착해서 많이 걱정했다고 말하고 있었어요.”차은별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서야?”권사현은 내 이름을 부르며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말했다.“너 때문에 정말 걱정 많이 했어.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그냥 안전한 곳에 있었어.”나는 권사현의 눈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율 씨한테 연락했는데 너랑 같이 있지 않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신고하려다가 은별이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하더라고. 네가 괜찮을 거라 확신했다는데 정말 다행이야.”권사현의 말에 차은별은 승리한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나는 속으로 비웃음을 참았다. 차은별이 기다리자고 한 건 내 안전 때문이 아니라 권사현이 나를 찾지 못하게 하려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완벽하게 착한 사람인 척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연서야, 네가 들은 말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알아.”권사현이 내 손을 잡으려다 멈추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잠시 상처받은 듯한 표정이 스쳤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그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내 말 좀 들어봐...”“사현아, 지금 그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옷 갈아입으러 잠깐 온 것뿐이야. 일이 늦으면 안 되니까 서둘러야 해.”권사현의 얼굴에 실망이 드리웠지만 그는 담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나도 일하러 가야 하니까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게. 차로 데려다줄게.”내가 거절하려던 순간 차은별이 나섰다.“사현아, 이미 늦었잖아. 연서 씨도 이제 집에 왔으니 스스로 출근할 수 있을 거야.”“난 대표라 조금 늦어도 괜찮아. 연서야, 준비하고 와. 기다릴게.”권사현은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 아율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율이가 데려다줄 거야.”나는 서둘러 말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이 없는 날이라 정말 감사했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은 뒤 TV를 보는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었다. 윤아율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연서야.”그녀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옆 소파에 앉았다.“무슨 생각해?”나는 그녀를 한 번 흘끗 보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끝난 거야?”이 질문은 윤아율이 새벽에 일어나 집 입구 양옆에 있는 꽃들을 다듬고 있었기 때문에 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일을 다 끝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응. 이제 꽃들이 훨씬 깔끔해졌어.”“몇 시간 동안 일했으니 아침 좀 먹어야지.”나는 TV에 계속 시선을 둔 채 말했다.“글쎄... 네가 TV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꽃 다듬고,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심지어 아침까지 먹었어. 임산부는 다 너처럼 게으르고 둔한 거야?”나는 멈칫하며 되물었다.“뭐?”그리고 그녀를 제대로 보기 위해 돌아보았다. 그녀는 정말 샤워를 했고 머리도 젖어 있었으며 새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어쩔 수 없잖아.”나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네가 아무것도 못 하게 하니 TV라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야지.”“음... 그래?”윤아율이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그럼 내일은 뭐 할 생각이야? 출근 안 해?”나는 TV에서 시선을 떼고 윤아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내일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나서 출근할 거야.”“진심이야? 가정을 지키고 싶다면 도망치는 것부터 멈춰. 권사현 말을 들어보는 게 좋을지도 몰라. 누가 알아? 그 새로 그 여자가 권사현한테 더 들러붙을지? 절박한 상태에서 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을 거야.”나는 잠시 멍하니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 그런 관점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대화를 엿들었을 때, 권사현은 키스에 대해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았었다. 윤아율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차은별이 권사현에게 들러붙었을 가능성도 있었다.“권사현이 조금 멍청한 짓을 한 건 맞지만 그래도 괜찮은 남편이라
나는 윤아율의 말을 곱씹으며 잠시 멈췄다. 그러다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거 농담이지?”“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윤아율이 단호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이혼이라...’나는 그 단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비현실적이고 낯설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왜 내가 이혼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 결혼에 모든 걸 쏟아부었고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애썼는데 말이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아니야, 그건 말도 안 돼.”나는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나 진심이야. 넌 권사현한테 망설임의 대상이 되어서 안 돼. 넌 권사현의 아내야. 제발 생각 좀 해 봐. 권사현은 성인이고, 이제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해야 해. 만약 차은별한테 남은 정이 있다면 만나게 되겠지. 하지만 아니라면 확고하게 행동해야 해. 그 첫 단계가 차은별을 적절한 위치에 두는 거야. 차은별이 있을 곳은 너희 삶도, 너희 부부의 집도 아니야!”그녀의 말은 직설적이지만 정확했다.“...네 걱정 이해해, 아율아.”나는 조용히 말했다. 적절한 말을 찾으려고 애쓰면서 말이다.“하지만... 난 잘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내가 임신 중일 때 이혼하는 게 옳은 일일까? 결혼 생활에 힘든 시기가 생기는 건 당연하잖아. 문제를 악화시키는 대신 고쳐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넌 그게 문제야, 연서야.”“무슨 문제?”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넌 이 결혼이 깨지는 게 두려워서 무시당하면서도 참으려고 해. 임신 여부와 상관없이, 상대가 누구든 설사 친척이라고 해도 너희 집에서 살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연서야, 네가 이렇게까지 버티는 거 네 엄마처럼 실패한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서잖아. 그러니까...”“그만!”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어떻게 지금 그 얘기를 꺼낼 수 있어? 내가 그 얘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잖
권사현이 떠난 뒤, 나는 걱정으로 가슴이 타들어 갔다.‘차은별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집을 떠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배가 아프다고?’권사현이 이 상황을 잘 처리할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어느 한순간 나는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은별이 처음부터 권사현이 떠나는 걸 원하지 않았던 만큼 집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계략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너무 피해망상적이고 불안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연기 중이라면 정미경까지 끌어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나는 더 초조해졌다.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권사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심각한 문제라면?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집으로 가야만 했다. 권사현이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니까.망설임 없이 나는 옷을 집어 들고 입었다. 가방을 챙기고 호텔 밖으로 서둘러 나갔다. 택시를 불러 집 주소를 알려주고는 차에 올라탔다. 차가 달리는 동안 나는 점점 초조해졌고 기사에게 더 빨리 가달라고 요구했다. 다행히 기사도 별다른 말 없이 내 요청을 들어주었다.몇 분 뒤, 택시는 집 대문 앞에 멈췄다. 나는 요금을 지불하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권사현의 차가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었다. 운전석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시동은 켜진 상태였다. 나는 시동을 끄고 문을 닫은 뒤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집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권사현과 차은별이 어디 있는지 궁금했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대신 그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거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차은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 소리를 엿들었고, 그때 들은 말이 내 심장을 산산조각 냈다.“너희 둘이 키스했다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권사현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나를 보았다. 현장에서 발각된 도둑과 같은 모양새였다.“연서야, 내
[권사현 시각]------“사현아,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은별이가 방금 나한테 전화 왔어. 배가 아프다고 하더라. 복통이 심한 것 같아...”어머니의 말에 나는 바로 얼어붙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뭐라고요?!”외마디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 은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안 돼...”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급히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패닉 상태에 빠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무슨 일이야?”채연서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녀가 언제 침대에서 일어났는지조차 몰랐다. 내 머릿속에는 최악의 상황들에 관한 상상으로 가득 찼다.“나 무서워. 무슨 일인데? 누구한테서 온 전화야?”그녀가 다시 물으며 내 생각을 끊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나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단어들이 뒤엉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은별이가... 어머니한테 전화했어... 은별이가 아프대. 배가 많이...”채연서의 눈에 놀라움이 비쳤다.“무슨 일이 생긴 거야?”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모르겠어. 가서 확인해야 해. 집으로 가야 해.”“알았어. 그럼 나도 같이 갈게.”나는 고개를 흔들며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으며 말했다.“아니, 넌 여기 있어. 내가 처리할게...”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는 차 키를 집어 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선택해 두 계단씩 뛰어 내려갔다.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느끼며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교통 규칙도, 경찰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차은별에게 빨리 도착하는 것이다.운전하는 내내 죄책감이 나를 갉아먹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의 함께 가자는 말을 들어야 했었다. 이제 그녀는 위험에 처했고 모든 것이 내 잘못이었다.대형 교차로에서 길이 막히자 앞에 있던 느린 운전자를 향해 욕이라도 할 뻔했다. 나는 핸들을 꽉 쥐며 계속 중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