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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담초별하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12-08 02:26:27
나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한상우와 함께한 지난날의 모든 사진을 뒤적였다.

사진 속의 우리는 늘 행복하고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간단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울다 지쳐 숨이 가빠지고, 눈은 점차 메말랐다. 머릿속에는 행복했던 장면들이 끊임없이 스쳐 갔지만, 심장을 찌르는 고통은 그것들이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임을 깨닫게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이곳에 단 1분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머무는 스위트룸은 건물 꼭대기 층에 있었다.

천장을 통해 가장 밝은 별을 볼 수 있는 방이었다.

이 층에는 두 개의 스위트룸만 있었다.

그렇기에 방을 나설 때, 자연히 다른 방의 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상우 오빠, 나 예뻐?”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문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듯했다.

“직접 확인해봐.”

그건 상우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온몸이 마비된 듯했으며, 손가락은 멈추지 않고 떨렸다. 마음속에서는 계속 문을 열어보라는 목소리가 울려댔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 문을 열 용기가 없었다.

겨울밤의 고요 속에서, 나는 홀로 밤새도록 거리를 배회했다.

넘어져도 몸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엄마가 집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죽일 년,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아! 내가 여기서 너 기다리느라 아침부터 얼마나 추웠는지 알아!”

엄마의 욕설은 이미 익숙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었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못 들었어?”

“들었어.”

나는 차갑게 대답하며 방으로 들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더는 가져갈 것도 없었다.

그냥 대충 몇 벌만 챙겼다.

“너 어디 가려고? 어디 가냐고!”

엄마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상대할 힘이 없었다.

“상우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어. 그래서 난 이곳을 떠날 거야.”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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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조금만 더 늦게 열었더라면, 문 밖에서 한민석과 한상우가 싸움을 벌일 뻔했다.“이게 누구신가요? 상우 씨 아니세요? 학생인 여자친구와 함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민석은 의도적으로 말하며 비꼬았고, 상우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민석조차 알고 있는 걸 보면, 그들의 관계는 이미 모두에게 알려진 듯했다.그러고 보니 내가 몇 번 회사에 들렀을 때, 회사 사람들이 나를 보며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시선을 보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내가 너무 둔했던 건지, 아니면 상우가 너무 잘 감췄던 건지, 1년 동안 단 한 번도 소문을 들은 적이 없었다.“가요.”나는 짐을 끌어내며 민석에게 건넸고, 민석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었다.“수연아, 너 어디 가려고? 저 사람과 함께?”상우는 내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민석이 가로챘다.민석은 상우의 손을 막으며 나를 뒤로 보호하듯 서서, 조롱하듯 웃으며 말했다.“수연 씨가 어딜 가든 상관없잖아요. 수연 씨 남편도 아니면서, 뭔 자격으로 간섭하려는 거에요?”민석의 말은 상우의 급소를 찌른 듯했다.이윽고 상우의 눈은 더욱 붉어졌다.“수연아,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우리 바로 결혼하자. 내가 너에게 최고의 결혼식을 해줄게. 평생 네 곁에 있을게. 제발.”상우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간절히 애원했다.“상우야.”나는 평온한 표정으로 상우를 바라봤다. 목소리는 약간 부드러워졌고, 상우의 눈에는 희미하게 희망이 피어올랐다.그러나 나는 그에게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필요 없어.”차갑게 내뱉은 한 마디를 남기고, 나는 민석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나는 HM 그룹 근처에 있는 집을 빌렸다.환경이 마음에 들었다.“우리 회사에 들어오려면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민석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말에 나는 긴장했다.그 후 일주일 동안, 민석은 밤낮 없이 나를 도와 비즈니스 전반에 대해 가르쳤다. 업계 동향부터 작고 큰 일까지 하나하나 친절히 설

  • 10년의 낙하   제14화

    “수연아, 제발 날 떠나지 마. 날 떠나지 말아줘!”한상우는 무릎을 꿇은 채, 붉어진 눈으로 간절히 애원했다.“상우야, 나도 한때는 정말 네 곁에 있고 싶었어. 너와 결혼하고, 우리 둘만의 아이를 낳는 그런 삶을 꿈꿨지.”나는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상우를 바라봤다.그러나 평온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돌아갈 수 없어.”신뢰와 충실함은 내가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마지막 선이었다. 그러자 상우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내 이름을 울부짖었다.“나가. 앞으로 날 찾지 마.”나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수연아, 혹시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야? 병원에 가보자, 응?”상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그냥 나가줘. 이제 널 보고 싶지 않아. 우리가 이렇게 오래 함께했는데, 더 이상 추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 여기까지 하자, 상우야.”“수연아.”나는 상우를 문 밖으로 밀어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마. 듣기만 해도 역겨워.”그리고는 문을 닫았다.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이윽고 밤이 되자, 나는 한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신이 말한 그 일, 해볼게요.”사실 나도 긴장됐다. 직장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주소 알려줘요. 내일 내가 데리러 갈게요.]전화기 너머로 민석의 숨겨진 미소가 느껴졌다.그날 밤, 나는 또다시 끝없는 불면증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나는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한민석 씨,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겁니까?”문 밖에서는 상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상우가 아직도 가지 않은 거야?’

  • 10년의 낙하   제13화

    나는 몸부림쳤지만, 한상우는 오히려 더욱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거칠게 내뱉는 상우의 숨결이 내 얼굴에 닿았다. 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상우의 손길을 피했다.“수연아!”상우는 얼굴을 찌푸리며, 마치 버려진 강아지처럼 애처롭게 나를 바라봤다.“상우야, 이게 다 무슨 의미야?”나는 상우를 차갑게 바라보며, 조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수연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상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정말 모르는 거야? 그렇다면 네 목 뒤에 있는 키스 마크는 수진이 내게 과시하려고 남긴 거겠지.”나는 냉담하게 말했다. 마음속 남아 있던 미미한 애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너.”상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완전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내가 어떻게 아는지 궁금해? 하!”나는 상우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보였다.그러나 눈물은 멈출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 상우를 밀쳐내며, 나는 히스테리컬하게 울부짖었다.“9주년 기념일 때부터 너희는 시작했지! 10주년 기념일 때는 내 옆방에서 잠자리를 가졌잖아! 상우야, 나도 감정이 있어!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붙잡지 않을게.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날 모욕하는 거야!”나는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상우와 거리를 두었다.“수연아.”상우가 다가오려 하자, 나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집어 던졌다. 이윽고 상우의 이마에 맞아 피가 흘렀다.“그리고 네가 바꾼 반지! 상우야, 정말 웃기지 않니? 우리가 10년이나 함께했는데, 나는 몇 년을 기다렸지만, 넌 여전히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잖아! 우리 커플링?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지!”“수연아, 내가 잘못했어! 제발 날 떠나지 마!”상우는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네가 먼저 날 버렸어.”나는 점차 냉정함을 되찾으며, 완전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상우야, 이제 더 이상 널 기다리고 싶지 않아.”“미안해! 수연아, 미안해. 내가

  • 10년의 낙하   제12화

    “뭐라고요?”한민석은 내 말에 잠시 당황한 듯 물을 마시는 시늉을 했다.“얼마 전에 귀국했어요. 오늘은 그저 당신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럼 수연 씨, 정말 대단하네요. 아, 저는 그 일을 두고 수연 씨와 따지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니에요.”“따질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그 업계를 떠났거든요. 더 할 말 없으면 먼저 일어날게요.”“왜 다시 시도해보지 않죠? 그때 그렇게 뛰어났던 자신을 되찾고 싶지 않나요?”민석의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이건 제 명함입니다. 혹시 마음이 바뀌면 제 회사로 와주세요.”민석은 진지한 표정으로 명함을 내밀었다.알고 보니 민석은 그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HM 그룹의 대표였다.“왜죠? 민석 대표님 주변에 인재가 넘쳐날 텐데, 왜 저를 스카우트 하려는 거죠?”“제가 대표니까요. 제가 원하는 사람을 고를 수 있거든요.”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서며 말했다.내 착각일까, 민석의 귓불이 약간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그날 밤, 나는 호텔에 머물기로 했다.호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민석의 명함을 쓰레기통에 던졌다.그러나 한밤중에 나는 갑자기 깨어났다. 침대에서 뛰쳐나와 쓰레기통을 뒤져 그 명함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는 민석의 연락처를 휴대폰에 저장했다.다음 날 아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아침 식사 배달인 줄 알고 문을 열었는데, 문 밖에는 화가 난 얼굴로 서 있는 한상우가 서 있었다.상우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적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던 순간은, 그의 사업이 잘 풀리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한 번은 협상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상우가 완전히 지친 모습으로 내게 와 품에 안겼었다.[그 사람들이 나한테 여자를 보냈다니까! 내가 아내가 있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그런 사람들과는 절대 협력할 수 없어!]그때도 상우는 이런 식으로 화를 냈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상우는 왜 이런 모습으로 또다시 나타난 걸까.’“수연아, A시에 갔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

  • 10년의 낙하   제11화

    “지금은 나도 벗어났어. 매일 제 방식대로 살다 보니, 사실 그 사람이 없어도 저는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상희 씨, 고마워요.”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그러자 한상희는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더니, 차를 몰아 한 음식점 앞에 멈췄다.“수연아, 들어가서 내 이름을 대면 돼. 안에 누가 기다리고 있으니 꼭 들어가 봐.”상희는 내게 눈을 깜빡이며 웃었고, 나는 그녀에게 등 떠밀리듯 식당으로 들어갔다.이윽고 상희의 이름을 대자 직원은 나를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예전에 한 번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지만, 이 위치는 예약하기가 매우 어려웠다.한상우조차 이 자리를 잡는 건 쉽지 않았었다.“수연 씨, 또 뵙네요.”자리에는 병원에서 봤던 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수연은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그러나 그 남자는 정중하게 내게 앉기를 권하며 메뉴를 내밀었다.“저는 한민석이라고 합니다. 누나에게 수연 씨를 모셔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실례가 되진 않았죠?”민석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 네. 민석 씨, 안녕하세요.”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로 민석을 쳐다봤다. 그러나 기억을 되짚어봐도 이 남자와 관련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그저 몇 년 전 저를 이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을 뿐이에요.”민석은 턱을 손으로 받치고 말하며, 눈동자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렸다.“민석 씨,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바로 하세요. 괜히 서로 감정을 낭비하지 맙시다.”나는 차갑게 말했다.“몇 년 전, 누나의 입찰서를 내가 직접 준비했거든요. 그게 내 첫 프로젝트였는데, 갑자기 나타난 경쟁자에게 졌죠.”민석은 실눈을 뜬 채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어딘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솔직히 아직도 그게 좀 억울하긴 해요.”어린아이 같은 말투였다.“오, 그건 저도 처음 입찰서를 썼던 때였어요.”나는 차갑게 받아쳤다.

  • 10년의 낙하   제10화

    밖에서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김수연?”나는 뒤돌아보았다.우아하고 기품 있는 한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바로 기억나지는 않았다.“정말 너구나?”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한상희였다. 그녀는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나 기억 안 나? 나야, 한상희. 몇 년 전에 우리 입찰 경쟁했던 거 기억 안 나? 그때 너희 회사 막 설립했을 때였잖아. 난 그때부터 네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아, 상희 씨, 안녕하세요.”나는 정중히 인사했다.몇 년 전, 나는 한상우와 함께 회사를 운영하며 바쁘게 지냈었다.그리고 회사가 점점 성장하면서 상우는 내가 외부 활동을 자제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상우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나는 직장을 떠나게 되었다.“그런데 요즘 왜 너 소식이 없는 거야? 반면 너랑 같이 일했던 그 상우라는 사람은 정말 잘나가더라.”“몇 년 전에 직장을 떠났거든요.”“아쉽네. 네 재능으로라면 이 분야에서 큰 빛을 발했을 텐데.”상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혹시 같이 밥 한 끼 할래?”상희는 정중히 제안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상희의 차에 올랐다.“너 상우 결혼했어? 그때 너희 둘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 상우가 널 바라보는 눈빛에서 사랑이 느껴졌어.”나는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우린 헤어졌어요. 그 사람, 다른 여자가 있었거든요. 내가 알아채버렸죠.”상희는 잠시 침묵했다.곧이어 차가 급정거했다.“사실 나도 아주 깊었던 사랑을 한 적이 있어.”상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 남편과는 10년을 함께했고, 결혼한 지는 5년이 흘렀지. 그 사람은 내 모든 감정을 이해해줬고, 어릴 때부터 나를 가장 사랑해준 부모님도 그 사람이 나를 누구보다 잘 보살펴 준다고 인정할 정도였지. 그런데 내가 가장 그 사람을 사랑하던 해에 세상을 떠났어.교통사고를 당했거든. 그 사람은 나를 끝까지 지키려고 했지만, 결국 본인이 떠나버렸지.”나는 조용히 상희의 이야기를

  • 10년의 낙하   제9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그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매우 매력적인 그의 눈에는 나른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나는 그를 무시한 채 조용히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마침 내 차례가 된 듯했다.필요한 검사를 받은 후, 의사가 말했다.“임신한 지 한 달이 넘었네요.”한 달 전, 단 한 번의 부주의로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이다.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막상 듣고 나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나와 한상우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상우를 위해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지우겠습니다.”나는 아무 표정 없이 말했다.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약간의 미련을 애써 눌러가며 말이다.“뭐라고요?”의사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지금 바로 이 아이를 없애고 싶어요.”나는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이렇게 차분하고 단호하게 뱃속의 아이를 포기하는 사람은 보기 드무네요.”의사는 내게 한 번 힐끗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상대가 당신에게 아이를 낳아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결단을 내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죠. 검사 결과가 괜찮으니 바로 수술을 준비하면 됩니다.”“감사합니다.”검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상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수연아, 도착했어? 잠깐 못 봤을 뿐인데 너무 보고 싶어. 수연아, 그래서 말인데 우리 아이 하나 낳아볼까? 너처럼 귀여운 딸이면 좋을 것 같아.]지금쯤 상우는 강수진을 품에 안고 이런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아마도 수진과의 외도를 미안해하며 보낸 말이겠지.’하지만 이제 그런 건 더 이상 나와 상관없다.나는 상우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한 뒤, 담담하게 수술실로 걸어 들어갔다.수술은 무사히 끝났다.그리고 휴식을 마친 뒤, 나는 퇴원을 준비했다.

  • 10년의 낙하   제8화

    나는 작은 짐가방을 끌며 집을 나섰다.적당한 집을 구하기 전,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그래서 나는 먼저 병원으로 갔다.대기실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무심코 집에 설치된 CCTV를 열어보았다.몇 년 전, 한상우와 나는 길고양이를 주워왔다. 그리고 고양이가 걱정돼서 집에 CCTV를 설치했었다.그러나 1년 전, 그 고양이가 세상을 떠났다.그런데도 CCTV는 치우지 않았다. 화면에는 상우가 강수진에게 문을 열어주는 장면이 멈춰 있었다.‘상우, 참 조급했구나.’눈물이 다시 떨어지며 시야가 흐려지고, 심장은 마구 찢어질 듯 아팠다.“고양이를 데려오지 마. 수연이도 눈치챌 거야.”상우가 수진을 문밖에서 막아섰다.상우의 목소리는 엄격했고, 거스를 수 없는 분위기였다.“오빠가 전에 키웠던 고양이가 하얀 고양이라면서. 내 고양이도 하얀 고양이야. 오빠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수진은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나는 수연이랑 함께 키운 고양이만 좋아해. 그 고양이는 마당에 두고, 안으로 들이지 마!”상우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진은 결국 고양이를 밖에 두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방 안을 둘러보며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살폈다. 눈빛에는 어딘가 부러움이 묻어 있었다.“여기야. 옷 벗어.”상우가 소파에 앉아 차갑게 말했다.“방에서는 안 돼?”수진이 조심스레 물었다.“거긴 나와 수연이의 방이야.”상우의 목소리가 점점 더 불만스럽게 변했다.“수진아, 우리도 꽤 오래 사귀어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 줄 알았는데.”그러자 수진은 서둘러 옷을 다 벗고는 상우 품으로 뛰어들었다.나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났다.“저기요, 병원에서 지금 무슨 영화를 보고 계신 건가요?”갑자기 귓가에 부드럽고 유쾌한 목소리가 들렸다.살짝 농담 섞인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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