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닐 리가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5 챕터
제11화
하교 후 나는 유신우를 기다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반쯤 걸었을 때 뒤에서 터벅터벅 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가 유신우임을 알았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난 여전히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난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둘 것이고 그걸 나 혼자만의 일로 만들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 유신우는 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그 뒤로 우리는 단 한 번도 함께 등교하자고 약속한 적이 없었다. 비록 이따금 우연히 마주치긴 했지만 그저 간단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만 건넸을 뿐, 내가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유신우는 여러 번 길에서 멈춰 섰다. 날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입술을 깨무는 걸 보면 나한테 할 얘기가 있는 듯했는데 난 발견하지 못한 척 그냥 지나쳐 갔다.친구들은 그날 내가 교단에서 했던 말을 믿지 않았다. 나와 유신우가 십 년 넘게 붙어 지냈기 때문이다. 장겨울 말을 들어보니 이 일로 애들이 여러 번 모여서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유신우에게 화가 나서 그런 거라고, 내 화가 풀리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고 결론을 냈다고 한다.난 그들이 내린 결론에 가타부타 말을 얹지는 않았다. 안 믿어도 상관없었다. 그들의 뇌를 열어서 내 생각을 들이부을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다. 어차피 사실이 내 말을 증명해 줄 것이었다.목요일 6교시는 체육 시간이었다. 고3 학생은 다들 매일 교과서와 문제집들을 풀면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우중충한 분위기 때문에 선생님은 우리가 우울증에라도 걸릴까 봐 체육 시간이면 우리를 운동장으로 내쫓아서 몇 바퀴 달리게 했다.난 생리 때문에 배가 아파서 선생님에게 얘기해 나가지 않았다.체육 시간이 시작되고 20분쯤 지났을 때 한 여학생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다짜고짜 날 데리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수진아, 수진아. 유신우 축구하다가 다쳐서 피가 엄청 많이 나. 얼른 가봐.”그가 다쳤다는 말에 순간 이성을 잃은 나는 초조한 마음을 안고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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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내가 떠나는 건 모두의 예상을 비껴간 일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떠난 뒤 열띤 토론을 벌였다. 별의별 얘기가 다 나왔지만 난 못 들은 척했다. 걸음을 멈추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렀고 그 사건이 있고서 보름이 지났다. 난 조금 외로웠지만 동시에 아주 자유로웠다유신우의 얼굴이 가끔 머릿속에 떠오르긴 했지만 난 그의 얼굴이 떠오르면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리며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도저히 내 자신이 통제되지 않을 때면 문제집을 꺼내서 풀었다.그날 밤은 달이 아주 크고 별이 아주 밝았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나서 난 복습할 것들을 한가득 안은 채로 장겨울과 이세영과 인사한 뒤 홀로 집으로 돌아갔다.밤경치가 예뻐서 기분이 꽤 좋았던 나는 언젠가 들어봤었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걸었다.그러다 다음 가사가 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유신우가 갑자기 모퉁이에서 튀어나와 내 앞에 섰다.유신우는 아주 잘생겼다. 눈도 눈썹도 예쁘고, 피부는 하얗고 몸은 마르고 키가 컸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외모였다.그러나 아무리 잘생겨도 이젠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갑자기 그를 마주하게 되자 나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불쾌했던 기억이 순간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팠다.유신우와는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른쪽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떠나려고 했는데 유신우가 나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또 한 번 내 길을 막았다.난 조금 짜증이 나서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난 최대한 평온하게, 덤덤하게 말했다.“무슨 볼일 있어?”“볼일 없으면 너랑 같이 하교할 수 없는 거야? 예전에는 우리 항상 같이 집으로 돌아갔잖아.”난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예전이고 지금은 달랐다.“볼일 없으면 난 먼저 가볼게. 안녕.”난 또 한 번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유신우가 재빨리 내 팔을 잡았다.“나수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꼭 이렇게 무정하게 굴어야겠어?”“유신우, 나 집 갈 거야. 비켜줬으면 좋겠어.”“나수진.”유신우는 이를 악물고 낮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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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시간은 물 흐르듯 흘렀고 두 가족 사이도 한결 좋아졌다. 물론 예전처럼 친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와 유신우 사이에도 벽이 생겼다.난 그 뒤로 그의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집에 찾아간 적도 아주 드물었다. 우리 가족과 유신우의 가족이 함께 식사하게 되더라도 최대한 빠져나갔다. 그리고 유신우와 단둘이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최대한 그와 멀리 떨어진 채로 침묵을 유지했다.그해 설날, 우리 가족은 집에서 설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아저씨와 아줌마가 우리를 몇 번이나 초대했고, 결국 부모님은 그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했다.난 빠질 생각이었다. 어쩌다 휴일을 보내는 건데 푹 쉬고 싶었다. 그리고 유신우와 가까이 있는 게 싫었다. 유신우의 곁에 있으면 그의 차가운 표정과 무정한 말들이 떠올라서 괴로웠기 때문이다.난 유신우가 날 찾아올 줄은 몰랐다.난 소파에 앉아 헤드폰을 쓴 채로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유신우가 소리 없이 내 옆으로 와서 섰다.사실 난 그가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모른 척했을 뿐이다.유신우가 내 헤드폰을 벗겨버려서 난 어쩔 수 없이 눈을 떠야 했다.그의 이목구비는 여전히 준수했다. 난 한때 내가 좋아했던 그의 검은 눈동자에 비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무슨 일이야?”내가 입을 열었다.유신우는 내 곁에 앉았고 난 티 나지 않게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모습을 본 유신우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수진아, 사실 나 너한테 사과하려고 온 거야.”“뭐라고?”난 내 귀를 의심했다.“너한테 사과하려고. 그날은 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는데. 내가 널 좋아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널 진심으로 싫어했던 적은 없어. 앞으로도 난 너를 내 여동생처럼 여길 거야.”“그래서?”“그러니까 수진아, 앞으로 우리 같이 등하교하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엄마랑 너희 엄마가 우리 때문에 계속 걱정할 거야.”나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꽉 깨물었다. 그의 사과는 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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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소녀의 마음이, 그리고 유신우를 향한 나의 신앙과 미래를 향한 동경이 전부 거기에 적혀 있었다.그 일기들은 내 청춘이었다.피식 웃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유신우는 방문에 기대어 장난스럽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난 황급히 일기들을 서랍 안에 넣었고, 유신우는 날 향해 웃었다.“왔어?”“어, 잠꾸러기야. 이제 깨어났어?”유신우는 다가와서 엉덩이를 들어 내 책상 위에 앉더니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느껴졌다.나와 그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유신우가 갑자기 다가오자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불편함에 못 이겨 옆으로 피했다.“응.”예전이었다면 유신우가 내게 다가왔을 때 설렜을 것이다.그러나 이젠 그가 다가오면 피하고 싶었다.“수진아, 시험 어떻게 봤어?”유신우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즐거움이 보였다.“나 몇 번이나 왔었는데 그때마다 네가 자고 있었어. 너 정말 잘 잔다.”“그래.”난 고개를 숙이고 그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난 책상 위에 놓인 장식품을 만지작거리면서 그와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사실 난 시험을 꽤 잘 봤다. 하지만 나와 그 사이에는 이미 간극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더 이상 예전처럼 그와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없었고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다.내 마음을 통제할 수 없을까 봐, 다시 그에게 빠져들게 될까 봐 무서웠다.그리고 결국 내가 바쳤던 모든 것들이 우습게 될까 봐 무서웠다.유신우를 마주하게 되면 난 항상 자신을 타일렀다. 유신우는 오빠고 난 동생일 뿐이라고,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수진아, 솔직히 얘기해 봐. 너 여전히 나한테 화 나 있지?”나의 냉랭함을 눈치챈 건지 유신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날 한동안 쳐다보더니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다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그러나 난 그의 손을 피했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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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옆 반에는 김현주라는 전학생이 있었다. 작은 키에 동그란 얼굴, 짧게 일자로 자른 단발머리, 그리고 웃을 때마다 보이는 대칭되는 작은 보조개까지, 아주 귀여운 여학생이었다.난 유신우가 그녀와 같이 다니는 걸 여러 차례 보았다. 손을 잡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난 몇 번이나 마음이 아팠다.수능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 답을 맞춰본 날, 유신우가 김현주의 손을 잡고 구석에 숨어 그녀와 같은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는 걸 난 내 두 눈으로 보았다. 유신우는 김현주의 기사가 되어 평생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고 했었다.당시 나는 마음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한 사람의 정력은 유한하다. 유신우는 기사가 되기를 선택했는데 어떻게 또 날 지켜주겠는가? 유신우는 그저 자신의 자책감을 덜고 싶었던 것뿐이다.나도 사람이다. 난 또 한 번 상처받기 싫었고, 더 오래 아프기 싫었다. 애정행각을 벌이는 그들의 모습을 매일 같이 지켜보는 건 내게 큰 상처였기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난 18년 동안 유신우에게 내 애정을 쏟았다. 그리고 이젠 날 위해 살 것이다.그러니까 그들과 같은 대학교에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나와 유신우는 같은 날 지망을 썼다.유신우는 지망을 다 쓴 뒤 토끼처럼 내 방으로 뛰어 들어와서 들뜬 목소리로 내게 선택했느냐 물었다.난 그의 눈동자가 빛나는 걸 보았다.그건 나 때문이 아니었고 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응.”“경한대 썼지? 올해 경한대에서 모집인원을 확대해서 너라면 분명 붙을 수 있을 거야.”“유신우, 김현주도 경한대 쓴 거야?”사실 묻고 싶지 않았다. 대답은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결국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여전히 유신우에게 희망을 품고 있다니, 얼마나 멍청한가? 하지만 유신우가 좋은 걸 어쩌겠는가? 유신우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활짝 웃었다.“응. 걔 엄청 소심하잖아. 내가 곁에 없으면 매일 울까 봐 겁나.”난 애써 슬프지 않은 척했다.유신우는 바보 같았다. 그를 그리워할 때 나도 매일 같이 울었었는데,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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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확인 버튼을 누르기 전, 난 지망을 경한대에서 다른 명문대 성문대로 고쳤다. 성문대의 한국화 전공은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또 많은 대가를 배출해 냈다고 한다.경한대에 가고 싶지 않은 나에게 성문대는 최고의 선택이었다.아저씨와 아줌마는 내게 경한대를 썼냐고 물었었는데 난 대충 얼버무렸다.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 난 오랫동안 넋을 놓았다.나와 유신우는 같은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 대학교를 다른 곳으로 간다면 나와 유신우 사이에 더욱 확실하게 선이 그어질 것이다.유신우는 자기 합격통지서를 들고 우리 집으로 달려와서 내걸 보고 싶다고 했다.“수진아, 네 합격통지서 좀 보자. 이건 내 거야. 너도 봐봐.”유신우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그건 내 기억 속 오랫동안 날 잠 못 들게 했던 미소였다.난 평온한 얼굴로 그에게 합격통지서를 건네주었다. 학교 이름을 확인한 유신우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뜻밖이라서, 놀라서 그랬을 것이다.난 어렸을 때부터 유신우의 말을 잘 따랐었다. 그래서 내가 대학교 지망 같은 중대한 일에 있어 그의 뜻에 어긋나는 결정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그는 내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란 걸, 그가 날 바꿔놓았다는 걸 의식하지 못한 듯했다.“수진아, 왜 그런 거야?”그는 상처받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유신우, 난 널 잃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팠어. 난 나까지 잃을 수는 없어. 넌 내가 필요 없고 날 사랑하지도 않잖아. 그러니까 날 그냥 보내줘.’“선생님이 성문대 한국화가 내게 더 잘 맞을 거라고 했거든.”난 덤덤히 웃으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난 내 대답을 들은 그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지 않았다.“망했다. 너 아직도 날 미워하는 거지? 네가 나랑 다른 대학교를 선택한 걸 우리 엄마가 알게 된다면 나 맞을지도 몰라.”“그럴 리가 없어. 우리 가까이 살아서 아줌마가 정말 널 때리려 한다면 내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내가 아줌마한테 직접 설명할게. 너 맞지 않게.”난 덤덤히 대답했다.유신우는 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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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엄마는 내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 옷자락으로 울어서 빨개진 눈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성문대 좋은 학교더라. 한국화 전공은 경한대보다 더욱 훌륭하고. 그곳에서 학교 잘 다녀. 최대한 석박사 과정까지 수료했으면 좋겠다. 나랑 너희 아빠는 몇 년 뒤 은퇴할 거야. 그곳에 남고 싶다면 우리가 거기로 이사 갈게. 그러면 너희 아빠도 북부 지역의 뚜렷한 사계절과 추운 겨울을 경험할 수 있겠다.”“왜 울고 그래? 신혁이 거기 있잖아. 내가 보기엔 신혁이가 신우보다 훨씬 듬직해. 그리고 신혁이도 우리 수진이를 잘 챙겨줬었잖아. 신혁이가 있으니 우리 딸은 분명 괜찮을 거야.”아빠와 엄마의 배려와 애정에 내 마음속의 우울과 미련이 옅어졌다.그때 나는 유신우의 곁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지망을 쓸 때 온전히 나만 고려했었다. 그래서 아저씨 집에 아들이 한 명 더 있고, 그 오빠가 내가 선택한 성문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는 걸 잊었다.어떤 일들은 운명일지도 몰랐다. 돌고 돌아, 나는 또 유신우 가족의 곁에서 살게 되었다.그래도 다행히 상대는 유신우가 아니라 항상 날 여동생처럼 아껴주던 유신혁이었다.유신우는 나보다 하루 일찍 떠났다. 그를 배웅해 주고 싶었지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니 집 문을 나설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현관문 렌즈를 통해 몰래 그를 보았다.유신우는 큰 캐리어를 끌고, 큰 가방을 메고 우리 집 문 앞에 2분간 서 있었다.나는 내가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걸 유신우에게 들킬까 봐 서둘러 코와 입을 막고 숨소리를 죽였다.아저씨가 재촉하고 나서야 유신우는 걸음을 뗐다.그의 꼿꼿한 뒷모습과 뻣뻣한 머리, 심플한 티셔츠와 청바지, 검은색 스니커즈까지, 그에게서 활력이 느껴졌다.난 문을 사이에 두고 유신우가 한 걸음, 한 걸음 집을 떠나는걸, 내 세계에서 떠나는 걸 지켜보았다.그의 뒷모습은 계단에서 사라졌다. 난 비틀거리면서 베란다로 나가 구석에 몸을 숨긴 채 천천히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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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그러고 나서는 자주 연락하지 않았다. 보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적도 많았다.유신우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와 만나고 있었고 난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도, 나의 사적인 감정 때문에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그가 보고 싶어도 먼저 그에게 문자를 보낸 적은 없었다.연락을 줄이는 건 몹시 어려웠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난 그를 떨쳐내기로 맹세했다.겨울 방학 때쯤 유신우는 내게 언제 돌아가냐고 연락했다.난 휴대전화 속 그 몇 글자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난 생각하지 않고, 보지 않으면 정말로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그가 보낸 문자를 보았을 때, 그리움은 마치 휘몰아치는 태풍처럼 내 마음을 휩쓸었다.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그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면서 바보처럼 울었다.난 여전히 그를 좋아했고, 여전히 그를 잊지 못했다.하긴, 18년의 세월을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을까?하지만 잊지 못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우리는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내게는 내 세계가 있었고 유신우에게는 유신우의 세계가 있었다. 난 한참을 고민하다가 답장을 써 내려갔다.[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어차피 길이 겹치는 것도 아닌데 난 신경 쓰지 마.]그날 오후, 유신우는 인스타에 게시물을 올렸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글과 함께 사진 두 장이 업로드되었는데 한 장은 항공권 두 장의 구매 내역이었고, 다른 한 장은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사진이었다.마음이 너무 아팠다.난 홀로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향하는 기나긴 여정에 올랐다.북부 지역은 겨울 방학이 긴 편이라 나는 집에서 오랫동안 편하게 지낼 수 있었고, 매일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건 내가 대학교에 있을 때 꿈에도 바라던 것이었다.유신우는 나보다 며칠 일찍 돌아왔다. 내가 돌아온 걸 알게 된 뒤 그는 이따금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나와 대화를 나눴다.유신우는 매번 웃는 얼굴로 날 찾아왔다. 난 그것이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화해를 청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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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순간 심장이 아팠다. 달았던 수박이 순간 맛없어졌다.난 유신우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수박 껍질을 그릇 위에 놓은 뒤 지저분해진 내 몸을 닦았다.‘유신우, 그거 별 뜻 없이 한 말이야?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거야? 널 좋아했던 나는 얼마나 노력해야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까?’난 어쩌면 평생 묵묵히 내 어린 시절의 감정을 안고 외롭게 홀로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유신우는 진짜 너무 지독했다.날 좋아하지 않는 걸로도 부족해 이젠 나 혼자 편안하게 살려는 것마저 방해하려고 했다.‘제발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줘, 제발!’두 가족은 설날을 함께 보냈다.우리 세 식구는 아저씨의 초대를 받았다. 엄마와 아줌마는 설날 메뉴를 고민했고 아빠와 아저씨는 TV를 보면서 수다를 떨었다.TV에서 설날 특집으로 나오는 각종 예능과 드라마 때문에 명절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난 할 일이 없어서 몇 번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아줌마가 날 잡으며 유신우의 방에 가서 놀라고 했다.난 거절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에 찾아가지도 않았다. 난 소파 구석 자리에 앉아서 휴대전화를 보았다.예전에 있었던 일이 좌우명처럼 항상 내 머리 위에 떠 있어 잊을 수가 없었다. 유신우는 그 일로 내게 사과를 했지만 난 여전히 그가 껄끄러웠다.난 내가 너무 속 좁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 됐든 내 마음에 남은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고, 어쩌면 영원히 아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그를 좋아하면서도 그와 가까워지는 걸 피하려고 했다. 난 왜 이러는 걸까?“왜 혼자 여기 이러고 있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갑자기 휴대전화를 빼앗긴 나는 깜짝 놀랐다.유신우는 키도 컸고 팔도 길었다. 그는 한 손으로 소파 손잡이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었다.난 너무 심심해서 예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는 그 드라마가 재밌어서가 아니라 아주 길어서 시간을 때우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드라마 보고 있는데 왜 뺏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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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유신우는 내게 휴대전화를 던져주었고 나는 황급히 받았다. 곁눈질로 본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난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떻게 그와 지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가까이 있으면 싫어했고 너무 멀어져도 싫어했다.내가 어떻게 하든 유신우는 항상 트집을 잡았다.휴대전화를 받은 나는 드라마를 볼 생각이 사라졌다. 나는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을 끊임없이 곱씹었다.여자들은 너무 생각이 많다니.여자들이라는 건 나와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 유신우는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특이해서 여자애들과 지내는 걸 싫어했고 난 그의 곁에 있는 유일한 여자애였다. 유신우가 가리킨 다른 상대가 김현주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유신우는 단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줬던 애정은 오롯이 내 일이었다.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뒤 휴대전화 갤러리를 클릭한 나는 오랫동안 소장해 왔던 사진들을 하나둘 삭제하기 시작했다.그건 내게 살갗을 벗기는 것만큼 고통스럽고 아쉬운 일인 동시에 또 아주 평온한 일이었다.전부 삭제하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9시쯤, 유신혁에게서 영상 통화가 걸려 왔고 다들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수진아, 이리 와. 신혁이가 너한테 할 얘기가 있대.”난 얌전히 아줌마 곁에 앉았다. 휴대전화 속 유신혁은 웃음기 띤 눈빛으로 조용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수진아, 교수님이랑 이곳저곳 다니느라 널 마중 나가지 못했네. 어때? 학교는 괜찮아?”“응.”1년 못 본 사이에 신혁 오빠는 더욱 성숙해진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유신우도 잘생겼는데 유신혁은 유신우보다 더욱 준수했다. 특히 눈가의 점 때문에 아주 매혹적인 느낌을 주었다.“먹는 건 괜찮아?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어?”“안 빠졌는데? 음식은 입맛에 잘 맞는 것 같아. 특히 떡갈비가 맛있어.”나의 식탐 많은 모습에 유신혁은 활짝 웃으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그래, 나 3, 4월쯤 돌아갈 건데 그때 떡갈비 사줄게.”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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