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소군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어.”그때 이유영의 주변 사람들은 이유영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며 설득하려 했다.하지만 아무리 주변에서 말려도 이유영은 끝까지 버텨냈다.“화상이 심했던 부위는 살을 도려내야 했어. 지금 내 몸에 남아 있는 움푹 패인 흉터들은 그때 생긴 상처를 치료하면서 생긴 거야.”“...”“마취를 할 수도 없었어.”마취를 할 수 없었다는 이 말 한마디는 강이한처럼 강인한 사람마저 몸을 떨게 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몸에 남아 있는 흉터들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상처의 넓은 면적을 직접 본 그는 이유영이 겪었을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취 없이 그 모든 과정을 견뎌야 했다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사람들이 그러더라. 아이는 여자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존재라고. 전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는데 월이를 통해 그 뜻을 알게 됐어.”그때 이유영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지키겠다는 결심만큼은 굳건했다.이유영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가늠조차 어려웠다.“아무리 조심해서 약을 써도 내 몸 상태 탓에 결국 월이는 조산하게 됐어.”이유영은 마치 별일 아닌 듯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유영이 겪은 모든 과정이 너무도 무겁고 가혹하게 느껴졌다.“유영아...”강이한은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목구멍은 점점 더 조여 오는 듯했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알고 있어? 월이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거.”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다.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고통과 불안이 시작되었다.건강한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하물며 조산아를 키우는 데는 그보다 훨씬
모두가 아이가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했다.왜냐하면 아이가 건강해져야 이유영도 비로소 괜찮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유영의 차분한 말이 이어질수록 강이한의 가슴은 점점 더 답답하게 조여 왔다.“그 아이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님까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이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 아이를 데려가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는 거야?”이유영은 이런 이야기를 지금껏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었다.그러나 지금, 강이한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유영이 월이를 이용해 이온유를 구하지 못하게 막았는지를.그 아이는 이유영에게 보물 같은 존재였다. 언제라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간절히 붙잡고 있었던 아이였으니, 이유영이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강이한, 너 알아? 난 한 번도 너를 이렇게까지 미워해 본 적이 없었어.”“알아, 나도 알아.”강이한은 이유영을 끌어안으며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왜 이유영이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게 되었는지를.이유영은 단지 아이와 함께 평온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이유영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는 단순한 바람이 전부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원한을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 단순한 바람마저 결국 강이한의 손으로 모두 부숴버렸다. 그래서 이유영은 더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그렇게 두려움 속에 갇혀버렸다.그렇게 이유영은 강이한과의 싸움을 이어가며 아이와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미안해. 내가 잘못했어...”강이한은 더 이상 이유영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그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하고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었다.어디에도 즐거운 기억은 없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 심장은 항상 불타고 있었다.그 누구도, 월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지 못했다.“그만해.”“이게 네가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 아니었어?”“...”“이게 바로 그 아이를 키우며 우리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
한지음은 강이한에게 너무도 중요한 존재였다. 만약 강이한에게 또다시 기회가 주어졌다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오직 이유영과 아이뿐이었을 것이다.“유영아...”강이한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는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 심지어 고통받을 자격조차 없었다.아이와 함께 성장하며 곁을 지킬 권리도 자격도 없었고 이유영의 말처럼, 강이한은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강이한이 이유영의 곁에서 겪었던 내적 변화를.이유영을 바라볼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으로 아팠다. 그 고통은 뼛속까지 쓰라리고 깊게 파고들었다....점심이 되자 또다시 쓰디쓴 약이 준비되었다.그때 박연준이 찾아왔다.박연준은 강이한과 서재에서 두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서재에서 나왔을 때의 무거운 분위기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서주 쪽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우현 씨.”“네, 아가씨.”우현이 이유영의 부름에 공손히 다가왔다.“국물 맛있네요. 한 그릇 더 줘요.”두 사람의 무거운 분위기가 이유영의 마음속에 묘한 위안을 주는 듯 이유영의 말투는 가벼웠다.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유영과 강이한, 그리고 박연준 사이의 관계였다.두 사람이 고통 속에 있을 때만 이유영의 마음은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듯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눈에서 무겁고 복잡한 감정을 읽어냈다.이유영은 두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다.이번 생에서 두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그들을 미워하며 마주할 때마다 이유영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이건 인과응보와도 같았다.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이용하지 말라는 말이 떠올랐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들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과거의 강이한과 박연준은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아가씨.”우현은 조심
“한지음이 당신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게, 내가 마지막으로 알아낸 사실이었어.”이유영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유영이 강이한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여자가 이런 고통을 감내했다면 어떤 보상으로도 그 상처를 메울 수는 없을 것이다.그들은 그것이 전생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유영이 강이한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강이한이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이유영의 분노를 촉발하기에 충분했다.그것은 한 여자가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그 아이는 존재하지 않아!”강이한은 지금껏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설명하지 않았다.왜냐하면 과거에 한지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유영의 반응은 너무 격렬했기 때문에 이유영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이유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어떤 일이 있었던지 지금은 분명히 해명해야 했다.“갈 거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이한의 온몸이 굳어졌다.이유영의 말은 너무도 날카로웠다. 때로는 이유영의 날카로운 직감이 강이한의 가슴을 찌르고 아프게 했다.강이한은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그 고통은 너무도 쓰라리고 견디기 힘들었다.“떠나는 게 나을 거야. 서주에 너무 오래 머물렀잖아. 네가 돌아갔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기대되네.”이유영의 말은 마치 비웃음과도 같았다.엔테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금, 가문의 모든 구성원이 그 문서를 손에 넣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그리고 그 문서의 절반은 강이한의 손에 있었다.하지만 절반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온전한 문서가 있어야만 가치가 있었다.문제는 전기봉이 행방불명 상태라는 것이다. 문서의 절반을 가진 강이한에게 이 문서는 귀중한 자산이 아니라 끝없는 골칫거리일 뿐이었다.게다가 그의
과거에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겼으면서 이제 와서 단 하나의 일로 모든 걸 정리하겠다고 생각하다니?갑자기, 허리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순간, 이유영이 강이한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따뜻한 숨결이 얼굴에 닿았고 그와 동시에 키스가 마치 폭풍처럼 이유영을 휘감았다.이유영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강이한의 손길은 더욱 강하고 거칠게 그녀를 붙들었다. 그의 숨결에는 알 수 없는 절망과 말을 잃은 듯한 깊은 고통이 서려 있었다.마치 자신을 뼛속 깊이 각인시키려는 듯한 격렬한 집착이 느껴졌다.강이한의 따뜻한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그리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그렇게 해줄게.”서주의 혼란이 자신을 옭아매기 위한 덫이라면, 강이한은 이유영이 원하는 대로 해줄 각오를 다졌다.만약 이것이 이유영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강잏나은 모든 걸 감내하겠다고 다짐했다.“이건 네가 해주는 게 아니야. 그건 네 죄에 대한 당연한 대가일 뿐이야.”이유영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눈동자의 이유영은, 내뱉는 말마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차갑게 꽂혔다.이유영을 품에 안고 그녀의 숨결을 느끼면서도 그 숨결에서 단 한 점의 온기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강이한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이유영은 마치 온기를 잃은 사람 같았다.어쩌면 이유영이 가진 마지막 온기는 강이한이 스스로 다 소진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것은 차가움뿐이었다.“네 말이 맞아. 이건 내가 받아야 할 대가야.”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반복하며 인정했다.하지만 강이한이 그게 무엇이든 이유영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다짐했다.강이한의 키스가 다시 한번 이유영을 집요하게 덮쳤다. 그 속에는 강이한의 절박함과 미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이유영의 손은 강이한의 손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강이한은 이유영을
“우지 씨.”“네, 아가씨.”“오늘 제가 입은 옷, 무슨 색이에요?”이유영이 갑자기 물었다.이유영은 평소 이런 일상적인 질문을 잘 하지 않았다. 가끔 정원에 어떤 꽃이나 나무가 있는지 정도만 묻곤 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도 비참했지만, 자신이 입은 옷의 색조차 알 수 없는 현실은 그녀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베이지색입니다.”우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답했다.우지는 이유영의 눈이 하루빨리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랐다.이전에 이유영의 시력은 좋지 않았어도 적어도 자신이 입은 옷의 색 정도는 알 수 있었다.빛을 완전히 잃기 직전, 이유영은 몹시 두려워했다. 무엇보다도 월이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월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할까 봐, 그게 가장 두려웠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강이한은 떠났지만 박연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다음 날 아침, 이유영은 박연준에게서 희미하게 풍겨오는 비릿한 물냄새를 감지했다. 이유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결코 기분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강이한은 서주로 돌아갔어?”“너도 이제 돌아가.”서주라.생각하지 않아도 서주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혼란 속에는 이유영의 손길도 있었다.이유영은 일부러 그 혼란을 조성해 강이한에게 넘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유영은 전혀 만족을 느낄 수 없었다.박연준은 조용히 이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유영아,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거야?”“흥!”화가 안 풀렸냐고? 그 말은 너무 가볍게만 느껴졌다.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한 화가 아니라 깊은 원한이 자리하고 있었다.“전기봉의 정보는 강이한에게 넘겨줬어.”“...”전기봉?이유영은 이전에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만약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었다면 엔데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이곳에 더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그
박연준은 전기봉의 행방에 대한 소식을 강이한에게 전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곁을 떠났다. 누구라도 알 수 있듯 박연준이 전달한 내용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그러나 강이한에게 주어진 것은 명백히 선택지였다.결국 강이한은 서주와 이유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고 그의 선택은 서주였다.이유영의 가슴 한구석이 답답함에 서서히 조여 왔다.그 느낌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이유영, 넌 참 똑똑해.”박연준이 이유영을 바라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내가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너희들이 하라는 대로 따르라는 거야?”이유영의 말투에는 날카로운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정말 그래야만 하는 걸까?강이한에게는 분명히 선택지였다. 하지만 이유영에게도 선택지는 있었다. 그리고 이유영은 그 선택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박연준, 아직도 모르겠어?”이유영은 냉소적으로 말했다.“평생 네 얼굴을 보지 않게 되길 기도해. 그렇지 않으면... 난 널 갈기갈기 찢어버릴지도 몰라.”이유영의 한마디 한마디는 날이 서 있었다.“...”그렇다면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증오하는 걸까?확실히 이번 일로 인해 이유영의 마음속 미움은 더욱 깊어졌다.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진심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두 사람을 산산이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박연준은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유영아!”“날 위해 서주의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말하려고?”이유영의 말투에는 조롱이 가득했다.모든 걸 내려놓았다.박연준이 전기봉의 소식을 강이한에게 전한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이게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난 네게 부탁한 적 없어.”이유영의 목소리는 냉랭했다.“세상엔 네가 준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법은 없어.”결국 박연준이 전기봉의 소식을 강이한에게 전한 것은 일방적인 희망일 뿐이었다.박연준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 이유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흔들리는
강이한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유영은 그의 곁에 없었다.이 사실은 임소미와 정국진의 마음에 깊은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에게 있어 강이한이란 사람은 원래부터 신뢰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은 우천시에 있어요.”우천시?거긴 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임소미와 정국진은 우천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살기 좋고 환경이 쾌적한 곳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정작 그곳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강이한이 이유영을 생판 낯선 그곳에 버려두었다는 말인가?“대체 무슨 속셈이야?”정국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이한에게 다가가며 전례 없이 날카롭고 위협적인 어조로 물었다.강이한은 담담히 대답했다.“염 선생을 찾아냈어요.”염 선생?정국진과 임소미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이름을 두 사람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과거 이유영의 두 눈이 큰 상처를 입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바로 염 선생이었다.하지만 그때 마침 염 선생은 은퇴한 상황이었고 그 뒤로 두 사람을 포함한 누구도 염 선생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그런데 강이한이 지금 염 선생을 찾아냈다는 말인가?그런데도 임소미는 여전히 강이한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이유영이 우천시에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 강이한은 왜 이곳에 왔을까?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걸까?“치료 중이예요. 곧 결과를 알게 될 거예요.”강이한은 무심하게 말했다.강이한의 태도는 어딘가 묘하게 이상했다. 정국진은 이를 간파하고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나 강이한은 두 사람을 지나쳐 식탁에 앉아 있는 월이를 바라보았다.아이의 기억은 정말로 짧았다. 강이한을 보자마자 무서워하며 나쁜 사람이라고 외쳤던 월이는 지금 강이한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간 임소미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아이의 심리 회복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제 월이의 마음속에는 어떤 두려움도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그만 쳐다봐!”임소미는 본능적으로 강이한의 시선을 막
“반드시 확인해야 해요.”현우의 불확실한 대답에 소은지의 답답했던 가슴이 순간 목까지 차올랐다.지금의 전기봉은 비록 인장만큼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만 아직 핵심 인물임은 분명했기에 이런 상황에서 실수는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현우는 더욱 깊은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봤다. 소은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었고 소은지는 강렬한 현우의 시선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윙윙윙.”소은지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현우의 휴대전화가 진동했고 현우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현우는 굳은 얼굴로 일어섰고 긴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의 모습은 더욱 날카롭고 위엄 있어 보였다.그 기세에 소은지의 마음도 거세게 요동쳤다.“알았어.”현우는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현우의 시선은 소은지에게로 향했고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다.“잠깐 나갔다 올게요.”“저한테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어요.”소은지는 어색하게 말했다.최근 몇 달 동안 늘 바빴던 현우이기에 굳이 어디 가는지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현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소은지를 향해 말했다.“그 사람, 시험하려 하지 마요.”현우는 지금 소은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엔데스 회장이 돌아가기 전, 현우는 항상 본가에 머물렀지만 소은지는 계속해서 엔데스 명우와 대립했다.하지만 지금 상황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엔데스 가문이 중요한 시기를 맞게 된 지금, 소은지가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엔데스 명우의 한계를 건드릴 것이다.설선비 사건이 채 마무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설유나마저 목숨을 잃었다.엔데스 명우는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소은지에게 돌렸고 용서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소은지의 말에 현우의 미간은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소은지가 돌아서서 떠나려고 할 때, 멀리서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
정국진과 임소미는 부모로서 이유영이 강이한과 박연준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 누구도 강이한이 이유영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런 선택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이유영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지금 그녀는 우천시에 있었고 염 선생님의 약이 그녀에게 효과가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유영은 어떤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이에 그들은 마음을 조이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유영에게 알리지 마세요!” 임소미는 잠깐의 고민을 거친 후 정국진에게 말했다.“당신 지금?”“그건 그 사람이 유영이에게 빚진 것이에요!”정국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임소미가 이 문제에 대해 고집을 세우며 말했다.맞는 말이다.그것은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빚진 것이기 때문에 이제 어떤 고통을 겪든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비록 독한 마음을 먹고 그렇게 말했지만 임소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퍼지고 있었다.이유영과 강이한 두 사람의 감정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복잡했다.이유영이 강이한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해 스스로 어둠 속에 뛰어드는 것을 보았을 때 이유영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괴로움을 느꼈다....소은지도 그 뉴스를 보았다.이유영과 박연준이 혼인 신고를 마쳤다는 기사를 본 순간 그녀는 이유영이 머지않아 수술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방에 들어올 때 마침 소은지가 한숨을 쉬며 휴대전화를 내려놓는 모습을 본 엔데스 현우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가 돌아온 걸 보고 품속의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유영이와 박연준 씨가 결혼했대요.”이 말을 하는 그녀의 시선은 한순간도 엔데스 현우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엔데스 현우의 표정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유심히 살펴보았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엔데스 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그것
“부러워?”옆에 있는 남자가 불만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그래, 부러워. 내가 저 여자였으면 좋겠어. 저 남자 정말 잘생겼어!”“알았어. 그만 입 다물어.”남자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이유영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그 미소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오직 박연준뿐이었다.혼인 신고 절차는 복잡했지만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서류에 사인할 때 박연준이 이유영 대신 사인을 했다. 원칙상 이러면 안 되지만 이유영이 시각장애인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잘생긴 남자가 시각장애인과 결혼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당연히 축복할 만한 일이었다.시청에서 나온 박연준는 두 사람의 혼인 관계 증명서를 문기원에게 건넸다.“얼른 가봐.” 박연준의 목소리는 깊고 무게가 있었다. 문기원은 박연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비록 아직 3일이 남아있지만 박연준은 이유영의 눈이 더는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걸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곧 파리로 돌아갈 예정이기에 돌아가기 전에 그들을 막는 장애물은 모두 제거해야 했다.“유영아, 결혼 축하해.” 박연준이 이유영의 귀에 가볍게 입맞춤하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유영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이유영이 대답했다.“결혼 축하해!”그 다섯 글자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었고 예리한 비수처럼 박연준의 가슴에 박혔다. 가슴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지만 박연준은 그 고통과 씁쓸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함께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그는 이를 악 물고 모든 어려움을 견뎌낼 것이다.그 누구도 미래에 이유영이 박연준와 강이한 사이에서 어떤 소용돌이를 일으킬지 몰랐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그녀의 눈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이유영이 눈을 회복한 후 무엇을 할지는 모르지만 박연준와 강이한은 반드시 그녀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할 것이다....박연준은 이미 현실을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줄어들수록 박연준은 더없이 고통스러웠다. 그의 곁에 있는 이유영은 남자의 호흡이 아주 거칠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그가 어떤 심정으로 이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가늠할 수가 있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유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어때? 무슨 느낌이야? 눈이 좀 보여?”박연준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불안한 감정이 묻어났지만 이유영은 여느 때처럼 단호하게 답했다.“아니.”또다시 같은 대답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동안 얼마나 반복된 질문이고 얼마나 반복된 대답인지도 모른다.그 순간 그녀는 박연준의 숨결이 한층 더 날카롭게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그건 단순한 긴장감이 아니라 마음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터져나오는 무언가를 필살 적으로 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그 감정은 너무나도 복잡했다.박연준이 도대체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느낄 수 있었다.마침 식사를 마친 뒤, 박연준은 서재에서 한 시간 동안 통화를 했다. 그가 누구에게 전화를 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전화를 마치고 서재에서 나오는 박연준의 표정이 많이 굳어져 있었다.“같이 갈 곳이 있어.”박연준이 깊이 한숨을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 잔뜩 긴장한 것 같은 남자와는 달리 이유영은 무덤덤한 말투로 물었다.“어딜 가려는 건데?”“시청.”이유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우지와 우현은 숨을 죽인 채 서로를 힐끔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길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다가 “풉!”하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에서 무궁무진한 조소가 느껴졌다.“네가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이번에는 누구도 이용하지 않을 테니까 마음 놓아도 돼.”그의 말에 이유영은 여전히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그래?”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박연준은 가슴을 찌르는
최근 들어 무엇 때문인지 통화를 할 때마다 임소미가 자꾸 강이한을 입에 올렸기에 이유영은 매번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버렸다.그 남자는 그녀에게 있어 마치 금기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친어머니인 임소미가 이야기해도 그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녀의 감정이 심하게 요동쳤다.전화기 너머의 임소미도 그런 변화를 감지한 듯 더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다른 일 없으면 저 먼저 끊을게요.”“그래, 몸조심해.”“알겠어요.”이유영은 임소미가 그녀의 복잡한 감정을 눈치챌까 두려워 서둘리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고 혼자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는 이유영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 며칠 전 여진우로부터 전화가 와서 강이한이 파리로 왔기에 정씨 가문이 그를 철저히 경계하고 있으니 월이를 데려갈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유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그 남자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월이를 보러 간단 말이야?’...저녁때가 되자 박연준이 돌아왔다.그가 염 선생님을 만나고 온 이후로 아무리 바빠도 거의 모든 식사를 이유영과 함께했다. 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한순간이라도 이유영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사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박연준은 고집을 세우며 끝까지 버티려 하고 있다.우지가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약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아가씨, 약입니다.”이유영은 말없이 그녀 앞에 놓인 약 그릇을 집어 들더니 박연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들이켰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설탕과 함께 그대로 삼켜버렸다.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빈 그릇이 탁자 위에 세기 내리박혔다. 맑은소리가 울려 퍼지며 비수처럼 박연준의 가슴 한가운데를 깊숙이 찔렀다.“저녁은 됐어.”사실 번마다 이렇게 많은 약을 마시고 나면 이유영은 더는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 항상 밥을 먹어야 한다고 고집하던 박연준도 오늘만큼은 아무 말 없이 보내주었다.우지는 조심스레 이유영을 씻기고 그녀를 부축해서 침대
박연준은 강이한처럼 이유영이 파리 쪽과 연락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설령 연락된다고 하더라도 이유영은 우지에게 지금 그녀의 상황을 말하지 못하게 했다.현재 엔데스 가문과 서주 쪽은 이미 커다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진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이유영은 자신의 가족들이 그녀를 너무 걱정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에서도 “필요 없어요.”라고 대답을 했다.그녀는 박연준이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 하는지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박연준이 또다시 자신을 이용하려 든다면 그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과거 이유영은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에서 벌어진 다툼 때문에 큰 상처를 입었었다. 그 트라우마 때문에 현재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얼음처럼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이때 임소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통화 내내 임소미는 이유영을 걱정하는 말뿐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요즘 느낌이 좀 와요.”“정말이야? 이젠 보여?”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임소미의 목소리는 잔뜩 긴장해 있었고 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저도 보였으면 좋겠어요.’사실,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된 순간부터 이유영은 알고 있었다. 이젠 다시 빛을 되찾는 것이 사치스러운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대체 언제부터 광명을 되찾으려 하는 마음조차 사치가 되어버렸을까?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답답함이 밀려오며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이 온몸을 옭아맸다.“엄마, 곧 괜찮아질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이유영은 그저 이런 말로 임소미를 안심시키는 것 외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우천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언제나 온몸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도 몰랐다.깜깜한 밤마다 이유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필사적으로 빛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이 어둠 속에서도 뭔가를 볼 수 있다면 언젠가 다시 빛을 되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틀렸다. 결국은 다시 한번 절망할 뿐이었다. 빛을 되찾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
이유영이 발을 떼려던 순간, 허리 쪽에서 힘이 느껴졌다. 남자의 차가운 향기가 이유영에게 스며들었다.“...”박연준이었다.방금 서재에 있지 않았던가?박연준은 이유영을 안아 품에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으로 들어온 박연준은 이유영을 의자에 앉혔다. 우현은 이유영이 좋아하는 과일차를 끓이러 갔고 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박연준에게서 흘러나오는 무거운 기운이 느껴졌다.이유영은 짜증이 난 듯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박연준도 이유영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도대체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그 말에는 답답함과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감정과 기운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우리 결혼하자.”“...”박연준의 갑작스러운 말에 이유영의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결혼?사실 청하시를 떠난 후, 파리에서 보낸 매일 그들은 결혼할지 말지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었다.만약 이유영이 정국진의 서재에서 그 사진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아마 이미 결혼했을 것이다.정국진과 강이한의 사진 때문에 이유영과 박연준의 결혼 이야기는 의심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다.박연준은 우천시에 처음 왔을 때, 결혼을 이야기했었다.그때 이유영은 우천시 쪽에서 아버지에게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었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수년간 강이한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이유영을 그 계획에 끌어들였다.이유영은 박연준이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믿지 못했다.결혼은 박연준에게 그저 이익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또한 이유영은 정씨 가문의 외동딸이었다. 정국진을 등에 업고 있으니 박연준이 이용할 대상이었을 것이다.“흥!”이유영은 비웃음에 박연준의 마음은 점점 가라앉았다.결국 그는 폭발하고 말았다.“이유영, 넌 왜 항상 의심만 하는 거야?”그렇다. 이유영은 의심하고 있었다.정국진이 자신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계속 청혼하는 것이라고 의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두 사람은 이유영에게 연서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박연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그리고 그는 수년간 그 감정을 이용해왔다.과거, 강이한은 그를 얼마나 괴롭게 만들었던가!그리고 이제 그는 강이한에게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게 해줄 것이다.지금 강이한은 그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연준의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강이한은 알고 있었어?”박연준은 강이한이 연서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었다.문기원은 이마를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아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만약 몰랐다면 어떻게 이유영에게 그렇게 깊이 빠져들 수 있었을까?박연준은 처음에는 이유영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집착 때문에 그 감정을 숨겨왔다. 그 집착은 박연준의 눈을 가려 버렸다.이제 모든 것이 드러났다.그는 분노를 넘어 마음속에 폭풍이 몰아쳤고 결국 그 폭풍은 이유영이라는 이름에 잠잠해졌다.“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니...”박연준은 작게 되뇌었다.그 순간, 아무도 그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강이한... 알고 있었으면서 왜?의심할 여지 없이 과거 그 사건이 그들 사이에 큰 영향을 미쳤고 박연준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그 일은 박연준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큰 영향을 받은 상황에서 만약 강이한이 연서와 회장 사이의 계약과 약속을 박연준에게 말했더라면...박연준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기조차 싫었다.“일단 나가 있어.”순간적으로 박연준은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눈을 감는 순간,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스쳤다.문기원은 알고 있었다.박연준은 이미 의심하고 있었지만 진실이 드러나자 그 충격은 엄청났다.“그럼 저는 이만 나가겠습니다.”문기원은 눈을 감고 있는 박연준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문기원이 나가자, 서재에는 박연준만 남았다.박연준은 눈을 뜨자 눈빛은 차가운 얼음처럼 빛났다.그의 온몸에서 말없는
“그래.”이유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사실 그녀는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두 사람이 뭔가 더 말하려던 순간, 문기원이 방으로 들어왔다.“선생님.”문기원은 박연준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이유영을 한 번 더 살펴보았다.박연준은 문기원이 어떤 소식을 가지고 왔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서재로 가자.”“네.”박연준은 이유영의 작은 손을 놓으며 일어서서 이유영의 몸에 덮인 담요를 정성스럽게 정리해 주었다. 그의 부드럽고 다정한 행동에 문기원은 마음이 아팠다.둘은 서재로 향했다.이유영은 어둠 속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눈을 뜨든 감든 온통 어둠뿐이었고 이제는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서재 안.분위기는 매우 무거웠고 긴장감이 감돌았다.박연준은 손에 담배를 끼고 연기를 깊게 들이켰지만 가슴속의 답답함은 가라앉지 않았다.문기원은 관련 자료를 박연준에게 건넸고 박연준은 자료를 훑어보았다.“모두, 진짜야?”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함과 무게감이 묻어났다.문기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모두 사실입니다.”정말 대단한 연서로군!박연준의 마음은 이 자료를 보는 순간 무너져 내렸다.연서.박연준과 강이한의 세계에서 연서는 숨 막힐 듯 완벽한 존재였다.연서와 얽힌 과거의 일은 그들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던 일들이었고 그 사건은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가 틀어지게 만든 주요한 이유였다.“늙은이가 정말 잔인하군!”박연준의 말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의 마음속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박연준이 예상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강이한은 지금 어때?”최근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약의 효과가 있는지 끊임없이 물어보았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강이한과의 우정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 연서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이 사실을 강이한에게 더는 말할 필요가 없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