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은 단지 짧은 하룻밤이었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정말로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우지가 이유영에게 이불을 더 덮어주었지만, 여전히 추위를 느꼈다.그 추위는 마치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결국,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이 유난히 불편했다.결국 링거를 맞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이유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과거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병원에 데리고 올 때마다, 이유영은 항상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무서워하지 마.”박연준은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유영을 달랬지만, 이유영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이유영은 마치 모든 감각이 사라진 듯 무기력했다.연서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더욱 단단해진 듯 보였다. 기댈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박연준은 이유영과 자신 사이에 뚜렷한 벽이 느껴졌다.병실 침대에서.“물 좀 마셔.”박연준은 컵에 빨대를 꽂아 이유영의 입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나 이유영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목마르지 않아.”사람들은 열이 나면 몸이 뜨겁고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곤 했다.그러면 사람들은 물을 많이 마시려고 하는데 이유영은 그런 느낌 대신 온몸이 춥기만 했다.병원에서 제공한 얇은 담요는 추위를 막기에 역부족이었고 링거를 맞은 손등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감각이 팔 전체로 번졌다.“박연준.”“응?”“염 선생을 만나고 싶어...”이유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은 이유영이 왜 염 선생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예전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병원에 데리고 왔을 때, 진료 후의 협상은 모두 강이한과 염 선생이 나섰기 때문에 이유영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박연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염 선생은 왜 만나려고 해?”박연준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이유영이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이
염 선생의 눈빛에는 불편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전남편이든 현재 남편이든, 두 분 모두 이유영 씨를 아꼈다면 어째서 이유영 씨의 눈을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했나요?”눈은 사람의 창밖을 비추는 창문과도 같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신체 부위였다. 하지만 이유영의 눈은 심각한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특히 이유영이 정국진의 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비극은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석 달 후, 이유영 씨는 어떻게 되나요?”그 순간, 박연준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만약 석 달 후에도 아무런 개선이 없다면... 이유영 씨의 눈은 아마...”염 선생은 여기서 말을 멈추고 잠시 박연준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고 이어서 염 선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유영 씨의 두 눈은... 아마 복구가 불가능할 겁니다."“...”복구 불가능. 그 단어가 박연준의 머릿속에 깊게 새겨졌다. 박연준의 머릿속은 갑자기 울리는 폭발음으로 가득 찼다.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끔찍한 결과가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일지 상상조차 너무 끔찍했다.만약 이유영의 눈에 희망이 없다면, 이유영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박연준은 알고 있었다.“반드시 회복시켜야 합니다!”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결의와 위협적인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염 선생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저를 협박하는 겁니까?”박연준은 차갑게 말했다.“선생님의 아들, 염명훈 말입니다.”“뭐라고요?”“이유영 씨의 눈이 회복된다면, 선생님의 아들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염명훈. 염 선생이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이자 동시에 가장 문제를 일으키는 자식이었다. 염 선생이 은퇴를 결심한 이유도 상당 부분이 아들 때문이었다.“좋습니다.”현재 염명훈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 거래를 승낙하는 순간, 염 선생의 눈에는 깊은 체념과 결심이 스쳐 지나갔다.박연준은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렇다면 잘 부탁드립니다.”설득만으
병원 맞은편의 카페.박연준은 강이한을 깊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놀랍네. 이런 상황에서도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지금 서주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강이한의 차가운 눈빛에는 점점 더 날 선 위협이 깃들었다.“아무래도 엔데스 회장은 이번 달을 넘기지 못할 것 같네.”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찬 어조였다. 진실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었다.“이번 달은 못 넘긴다고?”엔데스 가문이 어떤 상황일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강이한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이어서 말했다.“게다가 지금까지도 엔데스 회장의 유언장은 나오지 않았다고 해.”따라서 이 시점에 작은 사고라도 발생하면, 그 결과는 대단히 끔찍할 수 있었다.서주는 지금 아주 중요하 시기를 맞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이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문서는 핵심 열쇠로 작용할 거였다.강이한은 박연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기봉...”그 세 글자를 뱉어내며 강이한은 이를 악물었다.전기봉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지만, 모두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박연준은 전기봉을 찾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어 보였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박연준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냉소를 띤 채 말했다.“전기봉, 네가 데리고 있지?”“박연준!”강이한은 이를 갈며 말했다.밖에서 떠도는 소문은 모두 박연준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돌린 것이 분명했다.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모든 걸 넘길게.”“...”그 뜻밖의 말에 강이한은 온몸이 굳어버렸다.모두 넘겨준다니?“전기봉의 행방을 찾는 즉시, 너에게 넘길게.”“무슨 뜻이야?”강이한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박연준은 대답 대신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며 눈빛에 결연한 의지를 담았다.박연준은 강이한의 물음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돌려 말했다.“염 선생이 그러더라고. 석 달 후에도 약이 아무 효과가 없다면... 이유영의
이유영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지금...”“넌 이미 이유영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줬어. 이유영은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그녀는 평생토록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였다.박연준은 강이한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박연준 자신은?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늘 모든 사람을 조종하던 강이한이 이번에는 스스로 그 틀에 갇힌 셈이었다.이유영의 눈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박연준의 마음속은 폭풍처럼 요동쳤다.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혼란스러웠다.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가 끝나게 된 이유는 강이한의 우유부단함이 컸다.하지만 자신이 꾸민 일과 계산도 분명히 한몫했다.만약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심으로 대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감옥에서 일어난 화재 같은 비극도 이유영의 삶에 없었을 것이다.그 화재만 없었다면, 이유영의 눈은 무사했을 것이다.“하하, 참 우습군!”오랜 침묵 끝에 강이한이 비웃음을 터뜨렸다.“이건 네가 내게 진 빚이야.”진 빚? 그렇다.강이한은 연서와 관련된 일로 박연준에게 진 빚이 있었다. 하지만 그 빚을 갚기 위해 이유영을 이용하는 건 지나치지 않나?“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품은 마음을 오래전부터 알아차렸다.그렇지 않았다면 이유영이 연서에 대해 알아갈 무렵, 박연준이 급히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다.그 모든 행동은 박연준이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했음을 보여줬다.그리고 그 당황의 이유는 바로 이유영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이유영과의 관계를 위해 박연준에게 길을 내주어야 한다는 뜻인가?강이한은 박연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속여왔으면서, 진실이 뭔지 알고나 있어?”진실?오랫동안 사람들을 조종하며 살아오다 보니, 박연준은 자신조차 진실을 혼동하고 있었다.박연준의 눈빛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강이한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박연준, 감정이라는
연서.그 이름은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오랫동안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운 존재였다. 그 기억은 피처럼 생생하면서도 잔인했다.만약 이유영이 이번에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강이한과 박연준은 평생 서로를 외면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강이한은 박연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박연준, 참 가엾네.”연서… 박연준은 연서에게 흔들린 적이 있었던가? 그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연서를 데려가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었다.“가엾든 말든 상관없어. 그렇게 할 거야, 말 거야?”그가 말하는 것은 서주였다. 강이한은 그의 말을 듣고 조소를 터뜨렸다.“평생 계획하던 일을 이제 와서 포기하겠다고?”과거 박연준의 계획 중심에는 항상 서주가 있었다.처음엔 연서가 그 중심이었고 이후엔 이유영이 그 중심이었다. 박연준의 복잡한 속내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강이한조차 박연준의 속내를 완벽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런 박연준이 이제 와서 포기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그 말 뒤에는 분명 다른 꿍꿍이가 숨겨져 있을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박연준은 단호히 말했다.“나는 이유영만 있으면 돼.”다른 건 모두 필요 없었다.과거의 교훈은 피로 새겨진 기억처럼 그에게 깊게 남아 있었다. 이번만큼은 무의미하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이번에는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웃기지 마,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놓고 이렇게 대립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강이한의 눈에 비친 박연준은 감정을 논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이유영만 원한다고?“이유영은 사람이야. 살아있는 사람!”이유영은 물건이 아니었다.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사람의 감정은 상호 존중이 기본이다. 과거에는 몰랐던 이 사실을 강이한은 이제야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박연준은 냉소적으로 되받아쳤다.“이유영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나 보군.”박연준은 강이한이 우천시를 떠
두 사람은 전통 사옥으로 돌아왔다.빗물이 지붕을 타고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이유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곳의 기후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빗소리는 이유영에게 잔잔한 평온을 안겨주었다.“아가씨, 점심으로 탕을 끓였습니다.”우지가 말했다. 병원에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던 이유영에게 보양식은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건강도 되찾았으니 이제 든든하게 먹어야 했다.“네.”우지가 조용히 이유영에게 속삭였다.“아가씨, 아까 강 선생님께서 통화 중이셨는데, 전기봉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 같았습니다.”“...”이유영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을 거라 오랫동안 확신해 왔다.“네, 알겠어요.”어두운 방. 이유영은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이유영은 전기봉 문제를 끊임없이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강이한과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망가졌음에도 이유영은 여전히 강이한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유영을 외부와 철저히 차단했다.만약 이유영이 외부와 연결될 수 있었다면, 이미 세상은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조용히 문이 열리며 강이한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우지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고 이제 방 안에는 이유영과 강이한만 남았다.“우지가 네게 모든 걸 말했나 보군.”강이한의 목소리는 깊고 무거웠다.“...”우지를 우연히 본 걸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소식을 전한 걸까? 하지만 이유영이 표정은 평온했다. 이유영은 그의 질문에 흔들림 없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외부와 연락할 수 있다면, 그 소식을 당장 퍼뜨릴 거야.”“...”“네 약점을 당장 적들에게 넘겨버릴 거야!”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는 그 말에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매우 아팠다.박연준의 말처럼 이유영은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이유영은 이제 대놓고 그를 배신하려 했다.그것도 강이한의
처음엔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데려갔다니, 그는 무슨 권리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 아이가 그의 딸이 아니더라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 아이는 이유영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생명이었다. 강이한에겐 그 아이에게 손댈 자격조차 없었다.그 며칠은 아이와 이유영 모두에게 끔찍한 악몽이었다.이유영은 지금도 병원을 헤매며 미친 듯 아이를 찾았던 날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밤낮없이 걱정하며 엄마로서 견딜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이유영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결국, 당신은 아이가 당신 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온유를 살리기 위해 그 아이를 이용하려고 했어.”어떤 이유를 들어도 강이한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다.결국, 마지막 순간에야 강이한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과 모든 진실을.하지만 그런데도 강이한은 끔찍한 선택을 했다. 그래서 이유영은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그때, 그 아이가 울면서 밥도 먹지 않고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었을 때... 강이한, 정말 그 순간조차도 넌 아무런 동정심도 못 느꼈어?”“...”그 말은 강이한의 가슴을 깊숙이 찔러왔다.숨이 턱 막히며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동정심이 없었을까?사실 그도 동정심을 느꼈다.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강이한이 느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그 아이가 소중했고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미어졌다. 그러나 이온유의 위급한 상태는 강이한을 잔인한 선택의 기로로 몰아넣었다.“이유영, 나는...”강이한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으나 이유영의 앞에서는 어떤 말도 무의미했다.그 사건은 지금도 강이한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유영뿐만 아니라 강이한 역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갑자기 화제를 돌려 물었다.“
이유영은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보기에 너희 둘은 똑같은 부류야. 다 좋은 사람이 아니야.”이유영의 비웃음은 강이한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이유영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연서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 이유영은 두 사람 중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강이한의 가슴은 미어지듯 아팠다.이유영이 무슨 말을 해도 그 말 하나하나가 강이한의 가슴에 상처를 새겼다.“전기봉의 소식이라니, 하하!”그 유혹이 얼마나 강력한지, 이유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번에는 강이한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사실, 이유영은 이미 강이한의 선택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이 과거 이온유 사건 때처럼 반복될지 확인하고 싶었다.그의 행동이 과거 이온유 때와 같을지 알고 싶었다.이온유가 위급했던 그때, 강이한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이유영을 떠났다.“서주의 모든 것은 네가 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아, 유영아. 나를 성급히 판단하지 마.”이유영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강이한은 신중히 말을 꺼냈다.이유영이 서주의 복잡한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특히 지금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욱 알 길이 없었다.강이한은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이유영이 극단적인 결론을 내릴까 봐 걱정했다.예전 이온유의 사건처럼.“흥!”이유영이 코웃음 쳤다.강이한의 말을 듣기 전에, 이유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기봉의 소식을 듣고 나서 강이한이 어떻게 행동할지.이유영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강이한의 진심을 확인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그러지 않아도 돼.”이유영은 차갑게 대답했다.사실, 강이한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선택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유영의 차가운 말투는 강이한을 더욱 아프게 했다.너무 쓰리고 아렸다.병원에서 돌아온 후에
“강이한은 2년 동안 자신을 가둔 채 보냈어.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지금의 이유영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담담한 걸까?심장이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걸까?“네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겨내기 시작했어.”그때를 떠올리자 진영숙은 한층 더 괴로워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강이한은 아직도 그 안에 있었고 이건 그가 내린 선택이었다.“강이한은 지금 혼자 그 벌을 받는 거야. 네가 겪었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겪고 있어. 알기나 해?”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저 자기만 강이한 곁에서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강이한이 결국 이유영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끝을 맞았다. 그녀를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이제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아무 미동도 없이 모든 것을 보고만 있었다.이 모든 사실을 이유영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진영숙은 생각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영숙이 이런 사실을 이유영에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너무 차갑게만 강이한을 생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강이한의 실종에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했다.강이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랐다.진영숙의 삶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그녀는 이유영만 편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친듯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든 걸 다 말했음에도 이유영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건 그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였어요.”“...”순간 머릿속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말을 뱉는 사람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하지만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한지음의 존재는 그녀에게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했고 연서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정말이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경고할게요. 제 딸에게 다시는 접근하지 마요. 그 아이는 강이한과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이유영!”진영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녀의 눈빛 속엔 끓어오르는 분노가 맺혀 있었다.하지만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이유영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진영숙은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냉정하다는 말을 들은 이유영의 입가엔 오히려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냉정하다고?’“지금 강이한이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두 철수한 것에 대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사실상 생사불명이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유영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할 수 있다니 진영숙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차갑고 무정했다.아무리 돌이라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면 어느 정도는 온기가 스몄을 텐데 이유영은 아니었다.강이한이 생사불명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한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냉정하다고요?”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진영숙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분노만 가득했다.“그럼 아니야?”‘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생사불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조차 이유영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
한 시간 뒤, 이유영은 풍산 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진영숙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빛엔 깊고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뜻밖에도 박연준은 진영숙을 파리에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그녀 스스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강이한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손에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진영숙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네가 강이한의 딸을 낳았다니 믿기지 않는구나.”“...”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차디찼고 이어지는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왜요? 뱃속에서 죽이지 못해서 화가 났어요?”그 말에 진영숙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그녀의 눈에 스치는 감정은 슬픔이었다.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듯 쓸쓸함이 스며들었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남은 건 흩어진 슬픔뿐이었다.이유영의 싸늘한 태도 앞에서 진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우리 애 어디 있는지만 말해줘.”긴 시간이 흘렀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강이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이유영뿐이라 믿고 있었다.박연준이 사람들을 풀어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진영숙도 기약 없는 기다림만 계속됐다.박연준은 그녀와 함께 서주로 가자고 했지만 진영숙은 끝내 따라나서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른다고 했잖아요.”“정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진영숙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뭐라고요?”‘무엇을 의심하란 말이지?’“내가 들은 바로는 강이한이 너를 우천시로 데려갔던 건 염 선생을 찾기 위해서였대. 그땐 너도 몰랐겠지.”“...”“그런데 네 수술 시기에 맞춰 각막이 정확히 준비돼 있었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이 상황을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그 말에 이유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그
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묻지 말라고?’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소은지에 관한 것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여진우는 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늘 그렇듯 그들은 단순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지는 이제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야.”그 말에 이유영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소은지가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라고?’이미 어지러웠던 머릿속은 그 말 한마디에 더욱 복잡하게 뒤엉켰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오늘 송씨 가문 소식은 들었어?”“들었어.”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그 소식을 접한 뒤, 파리 전체가 마치 안개 속에 잠긴 듯 모든 게 흐릿하고 불길했다.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여진우의 품에 안긴 순간, 이유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짓눌렸다. 그의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느낀 이유영은 무언가 정말로 큰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긴 침묵이 흐른 후, 이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찾았어?”지금 그 도장과 문서는 엔데스 가문 사람들에게 극도로 민감한 존재였다.그 하나가 모든 걸 좌우할 수도 있었다.도장 이야기가 나오자 여진우는 그녀를 더 꼭 안아주며 낮게 말했다.“아무 일 없으면 곧 나올 거야.”그 말은 다짐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로 같았다. 그 도장이 어떤 의미인지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잠시 뒤, 여진우는 자리를 떴고 정국진도 오늘 집에 없었다.백산 별장에는 임소미와 이유영, 그리고 조기 교육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월이만 남아 있었다.월이는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방 안을 돌아다녔고 그 모습은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예전엔 조기 교육 센터에 가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즐거운 듯 아침마다 스
남기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오늘은 몇 명이나 더 찾아올 것 같아요?”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탐색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남기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지금으로서는 일곱째 도련님 쪽에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말뜻은 분명했다. 소은지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하라는 경고였다.소은지의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가능하다면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 늪으로 끌어들인 건 도대체 누구였을까?엔데스 명우. 그 이름이 떠오르자 소은지의 머릿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다시 어른거렸다.송연미가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소은지는 조용히 물었다.“남기 아저씨, 지금 제가 떠난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송씨 가문의 결정을 떠올리자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뚜렷해졌다.남기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신 이후로 일곱째 도련님은 송연정 아가씨와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요?”‘그렇다면 송연미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소은지가 생각에 잠기자 남기가 말을 이었다.“일곱째 도련님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십니다. 송씨 가문과 선을 그은 걸 보면 뭔가 그 속셈을 알아보신 듯합니다.”“...”“그리고 지금 사모님을 떠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사모님이 이 자리를 지켜주셔야 다른 사람들이 넘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물론입니다.”남기의 말에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우천시에 있었을 때,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며느리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송씨 가문이었다.예전엔 현우를 지지하는 송씨 가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오늘 송연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자 송씨 가문 회장님의 인품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그 사실을 인식하자 오히려 마
사실 모든 기회는 그녀가 온갖 노력을 다해 엔데스 운빈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그 순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씨 가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왜 송연정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은 끝내 선택하지 않았던 걸까?’처음엔 그 이유가 운빈과의 관계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느닷없이 엔데스 신우와의 혼사를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송연미는 문득 깨달았다.그 모든 결정의 이면엔 현우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결국 현우의 태도가 아버지의 선택을 바꿔 놓은 것이다.“현우를 만나야겠어.”송연미는 온몸을 떨며 소은지를 바라봤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현우를 직접 만나서 물어야 했다.차가운 엔데스 가문의 셋째 사모님으로 불리던 그녀는 지금 반산월에서 감정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몇 년 전, 현우가 파리를 떠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떤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 오랜 기다림 끝에 현우가 돌아왔고 그녀는 현우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단호히 끊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현우였다.“네 전화도 받지 않는데, 널 만나고 싶어 할까?”소은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 한마디가 송연미는 더 깊이 무너졌다. 이미 흔들리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그 순간 완전히 부서지는 듯했다.그녀의 눈빛엔 절망이 가득했다.“그래도 현우를 꼭 만나야 해.”송연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엔데스 신우와의 결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결정 앞에서 그녀는 늘 무기력할 뿐이었다.그동안 엔데스 운빈 곁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는지 모른다.그리고 현우가 돌아오자 그녀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하지만 지금 현우는 그녀를 차갑게
소은지는 조용히 송연정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았다.그녀의 눈빛엔 이미 무거운 결심이 내려앉아 있었다.송연정 역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 속에는 오래 참아온 비통함이 스며 있었고 그 아래엔 날 선 증오가 번득였다.“왜 엔데스 신우랑 결혼시키려는지 알아?”“왜?”‘엔데스 운빈과의 관계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또다시 다른 사람과의 혼사를 이야기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한때 송연정을 ‘넷째 사모님’으로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지금은 어떤 상황이 되어 버린 걸까?’“왜냐하면 네가 아직 여기에 있기 때문이야.”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 아버지는 송연정과 현우의 혼사를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돌아오면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거야.”“...”“넌 우리 아버지가 그냥 호의로 누굴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은지, 대체 얼마나 더 망쳐야 속이 시원하겠어?”“...”“지금 엔데스 가문 상황이 현우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모르는 거야?”송연정은 마치 이 모든 일이 소은지 탓이라도 되는 듯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실제로 소은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송연정과 현우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란히 서곤 했다.소은지는 배경도 권력도 없는 외국 여자일 뿐이었다.파리 사람들은 모두 송씨 가문과 현우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고 가문 안팎의 관심은 오롯이 현우에게 쏠려 있었다.그렇다면 그녀가 이혼을 택한 건 단지 운빈과의 관계가 아니라 엔데스 가문 자체와 더 깊은 얽힘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그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현우와 다시 함께 할 수 있으니까.소은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잊었어? 내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유, 바로 너 때문이야.”그 말에 송연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입술이 달싹였으나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나만 없으면 가문이 너를 선택했을 것 같아? 결국 가문이 택한 건 송연정이었어
소문에 의하면 그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소은지의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은 멍 자국과 턱을 스친 붉은 흔적을 본 남기는 조금 전 상황이 심상치 않았음을 곧장 눈치챘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남기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 괜찮으니까.”“네.”남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짙은 걱정이 남아 있었다.이건 시작에 불과했다.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피하려 하고 아무리 그와의 악연을 끊으려 해도 엔데스 가문은 그녀를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것을.일단 엔데스 명우를 몰아냈지만 이건 단지 서막에 불과했다.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서둘러야 해요.”소은지는 조용히 남기에게 말했다.지금 그녀는 현우의 행방을 최대한 빨리 알아내야 했다.물론 이유영의 말처럼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 오히려 가장 좋은 소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이곳은 파리다. 이 도시에서 현우는 어떤 존재였던가?이곳은 그가 살아온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잔인하리만큼 차가운 현실을 안겨주고 있었다.누가 보아도 가슴 아픈 상황이었다.“네.”남기는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연미가 반산월로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그녀의 방문은 소은지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요즘 송연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느낀 이후로 소은지는 그녀를 더욱 경계하고 있었다.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긴장감이 흘렀고 소은지는 앞에 놓인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차분히 말을 꺼냈다.“현우 씨가 너한테 말했겠지?”그 말을 하며 소은지는 차가운 시선으로 송연미를 바라봤다.송연미도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고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현우 씨는 네가 반산월로 날 찾아오는 걸 좋아하지 않아.”“현우는 더 이상 날 만나지 않으려고 해.”송연미는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알도 하지 않았다.“내 전화도 받지 않아.
분위기는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소은지와 엔데스 명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현우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그날부터 모든 건 이미 끝나 있었는지도 모른다.이제는 서로의 뺨까지 내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명우의 웃음이었다.냉담하고 음울한 웃음이었고 소은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잔혹함과 함께 묘한 흥미가 서려 있었다.“소은지, 잘하고 있어.”그가 비웃듯 말했다.“74호는 감히 하지 못했던 걸 엔데스 가문의 일곱 번째 며느리는 해내는구나.”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상반된 두 신분에 대해 조롱하고 있었다.명우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좋아. 아주 좋아.”그가 성큼 소은지 앞으로 다가갔고 흥미로 가득 찼던 눈빛은 이내 사나워졌다.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소은지의 턱을 움켜쥐었고 거칠게 턱선을 문지르며 위협의 기운을 내뿜었다.“지금 이 모습,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어.”소은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분질러버릴 듯한 목소리였다.하지만 소은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은 그럴 능력이 없어.”“흥! 그래?”“그럼.”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몇 년 동안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뼈마디가 부러지는 고통을 주며 괴롭혀왔다.그런 그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굴복한 적은 없었다.그녀는 강했고 절대 쉽게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명우가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무언가에 의해 산산이 갈라졌다.소은지는 오늘 엔데스 명우가 끝까지 덮어두려 했던 금기를 건드리고 있었다.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그래, 넌 아직도...”명우의 입에서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소은지가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