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햇살이 희미하게 드린 마당에서 이유영은 손을 더듬으며 방향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부드럽지만, 단단한 손길이 이유영의 손목에 닿았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나지막이 말했다.“이런 건 하지 않아도 돼.”지난 생에서 이유영은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강이한은 그런 노력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믿었다.“정말 나을 수 있을까?”이유영의 마음을 점점 잠식하는 의문과 불안이 점점 더 짙어갔다.그 약은 너무나도 썼다. 그런 약을 먹는 것만으로도 나아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보여주고 있었다.“나을 수 있어.”강이한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엔 결의가 서려 있었다.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유영을 반드시 나아지게 할 것이다.“...”정말로 나아질 수 있을까?지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살아갔다. 그 어둠 속에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고통과 두려움이었다.적응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두려움은 이유영을 놓아주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또다시 어둠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은 이유영에게 너무도 큰 부담이었다. 지난 생은 방향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주었다.만약 방향을 잃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탈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이유영은 중요한 순간에 방향을 잃고 말았다.“강이한, 너 그거 알아?”“뭐?”“지난 생에서 나는 어둠 속에서도 모든 걸 잘 해냈어. 하지만 결국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었어.”“유영아...”“연기가 퍼질 때, 나는 탈출하려고 했어.”그렇다. 이유영은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하지만 결국 무엇이 이유영을 포기하게 했을까?“그런데 왜 결국 포기했는지 알아?”이유영은 처음으로 지난 생의 이야기를 꺼냈다.이유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과거를 직면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유영은 자신의 아픔을 마주할 용기를 내었다.“왜 포기했는데?”이 이유는 지난 생에서 강이한이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듣고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 그의 눈빛은 폭풍처럼 흔들렸고 이유영을 안고 있는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이유영이 그때 느꼈을 절망이 얼마나 깊었을까? 그 생각에 강이한의 몸은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그건 사실이 아니야. 내가 그랬을 리 없어!”강이한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어떻게 자신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었겠는가? 차라리 모든 고통을 자신이 짊어졌을지언정 이유영이 그런 절망을 겪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상황이 어땠든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유영아, 제발 나를 믿어줘.”강이한의 목소리는 다급했고 마음속 깊은 연민과 자책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강이한은 자책하며 정말 죽어야 할 존재는 자신이라고 생각했다.그때 이유영은 얼마나 깊은 절망 속에 있었을까? 이유영과 함께한 10년, 그 오랜 세월 동안 이유영에게 주입된 정보는 결국 이유영의 세상을 무너뜨렸다.이유영이 그 세상을 떠날 때, 어떤 고통과 절망을 안고 떠났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지금 강이한은 그 모든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왔다.“하지만 한지음이 내게 말했어. 한지음도 너의 아이를 가졌다고.”그때 이유영은 진정으로 무너져 내렸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한지음이 강이한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은 이유영의 마지막 희망을 앗아갔다.이유영은 절망적이었다.정보의 홍수는 끊임없이 이유영을 덮쳤고 이유영은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안고 있는 팔이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떨림은 이유영이 느꼈을 고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그때, 마지막 순간에 내 의식 속엔 너에 대한 증오뿐이었어.”이유영은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강이한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이유영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강이한은 모든 걸 깨달았다.이것이 바로 이유영이 강이한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였다.“알겠어. 더는 말하지 말자.”강이한은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이유영이 내뱉는 모든 말이 강이한의 가슴에 날카로운 칼
그때 어떻게 이유영에게 그런 걸 강요할 수 있었을까?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랬다. 강이한은 이유영에게 분명 강요하고 있었다.지난 생에서 한지음은 결국 이유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래서 강이한은 이번 생에서도 이유영이 이온유라는 아이를 받아들이고 잘 돌봐야 한다고 제멋대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이유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강이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유영은 누구에게도 빚진 게 없다는 사실을.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이유영은 늘 이렇게 말했다. 한지음이 마지막에 어떤 고통을 겪었든, 그건 한지음이 받아야 할 벌이었다고.그것은 한지음의 업보였다.결국 이유영은 그런 절망 속에서 세상을 떠났으니.“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강이한은 단어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이온유라는 아이를 받아들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한지음에게 빚진 게 있다고까지 인정하게 하려 했지?”사실 이런 건 쉽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숨이 막힐 듯했다. 그는 이유영에게 무엇 하나 요구할 자격조차 없었다. 어떤 자격도 없었다.이유영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심지어 월이를 희생해서 이온유를 구하려고까지 했잖아!”그 말은 차갑고도 날카로웠다.다른 일들은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 일만큼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내가 잘못했어.”강이한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고통과 절망으로 뒤엉켰다. 과거에 이유영이 겪어야 했던 바로 그 절망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 모든 고통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그를 집어삼켰다.강이한은 마음이 아팠다.이유영이 느꼈을 고통을 이제야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강이한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감당하기로 했다.“잘못했다고?”이유영은 강이한의 입에서 나온 ‘잘못’이라는 말을 들으며 비웃었다.“당신이 뭘 잘못했
사실 결국 돌아보면, 이유영은 연서가 아니었기에 끝내 강이한의 편애를 받을 수 없었다.연서가 없을 때 그 편애는 누구에게 갔을까? 한지음, 이온유였다. 그러나 유독 이유영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이유영은 이 스무날 동안 줄곧 생각해 왔다. 만약 연서가 있었다면, 강이한의 편애는 아마도 전부 연서에게 갔을 것이다. 한지음이 아무리 계산하고 또 계산해도 결국은 그랬을 것이다.이 편애는 이유영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유영은 본래 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일이 있을 때마다 당연히 잊히기 마련이었다.“유영아, 상황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사실.”“강이한, 이제 됐어.”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을 끊으며 한 글자 한 글자 똑똑히 말했다.끝내자.이 모든 것을 끝내자. 정말 이젠 충분하다.“유영아.”강이한의 목소리는 이미 팽팽했지만, 이유영의 말을 듣고 나니 더욱 가슴이 답답해졌다.무엇이 충분하다는 걸까?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유영아.”“의사 선생님께는 내가 알아서 찾아갈게. 너는 돌아가.”서주로 돌아가라는 말이었다.두 사람 사이는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고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굳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었다.“나와 너 사이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사실 너도 우리 사이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겠지?”단지 대역일 뿐인데, 마지막까지 가능할 리가 없었다.이유영은 한 번도 이렇게 평온했던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런 평온함은 강이한의 가슴을 답답하게 아프게 했다. 그는 이 평온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이것은 이유영이 강이한을 향해 소리치며 분노로 외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를 불안하게 했다.분노조차 없어졌기 때문이다. 강이한은 이유영의 마음속을 너무나 명확히 보았다.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유영은 이렇게 평온할 수 있었다.지금 이유영이 이런 평온함을 가진 이유는 이유영의 삶, 그리고 이유영의 미래 계획 속에 더 이상 강이한이
이 평온함은 강이한의 세계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어디선가 ‘윙’ 하고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이한 세계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그 소리는 마치 그의 내면에 깊게 박힌 감정을 쪼개고 흩뿌리는 메아리였다.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이유영이 겪어야 했던 모든 아픔을 이제는 강이한이 차례로 되새기며 겪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그를 파괴하는 기억의 폭풍이었다.한 여자가 처음엔 히스테릭하게 소란을 피우다가 고요해진다면, 그것은 실망과 고통이 충분히 쌓였음을 의미한다.“유영아, 아니야... 그럴 리 없어.”이유영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아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은 누구의 대신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독립된 존재로서 강이한을 마주했었다.이유영이 살짝 웃어 보였다.이유영의 눈앞은 어두웠고 세상이 흐릿하게 느껴졌다.사물조차 보이지 않는데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유영은... 볼 수 없었다.과거에는 정말로 알고 싶었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에 이제는 아예 알아보기를 포기한 것인지도 몰랐다.강이한은 이유영을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유영아, 너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이유영은 늘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특히 감정에 있어서만큼은 자존심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강이한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유영이 자신을 낮추는 듯한 말을 했을 때, 강이한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고 이유영의 말을 조금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이유영은 침묵했다.이미 할 말을 다 했으니, 더 이상 말을 덧붙일 이유가 없었다. 이 남자가 그것을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그의 몫이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그러나 강이한은 떠날 기색이 없었다.서주는 지금 혼란 그 자체였다. 많은 이들이 강이한을 찾고 있었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강이한은 이유영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때, 소식이 전해졌다.이온유의 병세가 재발했다는 것이다. 점
“유영아.”결국 강이한이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묻어 있었다.이유영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그릇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 동작에는 신중함이 가득했다.강이한이 수없이 시력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영은 여전히 어둠 속에 머물며 스스로 적응하려 애쓰고 있었다.과거, 전생에서 이유영은 결국 삶에 대한 희망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이번 생의 이유영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 많았다. 부모님, 오빠, 그리고... 월이. 그래서 어떤 상황이 와도 이유영은 살아가야만 했다.염 선생의 의술도 수술도 그것이 완벽한 해결책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유영은 누구에게도 희망을 걸지 않았다.그래서 이 어둠 속에서도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지만 이유영은 묵묵히 적응하고 있었다.그리고 곁에 있는 이 남자는... 결코 이유영의 의지가 되어준 적이 없었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은 그것을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었다.“떠날 거야?”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요했다.“유영아.”“가 봐.”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러나 그 차분함은 강이한의 마음을 단숨에 얼어붙게 했다. 강이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쓰라렸다.과거, 전생에서 강이한이 한지음을 위해 떠날 때마다 이유영의 불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이런 이유영을 보며 강이한의 마음속에 죄책감과 불안이 들끓었다. 요즘, 우천시에서 이유영과 함께하는 동안, 강이한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이유영과의 대화는 강이한의 내면을 죄책감으로 잠식해 갔다.“유영아.”강이한은 깊은숨을 내쉬며 이유영의 이름을 불렀다.이유영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러나 그 미소는 너무나 평온했다.“나도 알아. 생사가 걸린 문제잖아. 어쩔 수 없겠지.”이유영은 너무도 침착했다.이 말을 하는 도중에도 이유영은 침착함을 유지했다.이런 태도가 오히려 강이한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
결국 강이한은 떠났다.이온유의 병세가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이유영 앞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식당은 한동안 적막에 잠겼다.우지와 우현은 고개를 숙인 채 마음 아프게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아가씨.”우지가 앞으로 다가가 이유영을 안아주려 했다. 하지만 이유영은 차분히 손을 들어 우지의 움직임을 멈췄다.“편애가 뭔지 알겠죠?”편애.그랬다. 만약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 사람은 많은 순간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선택할 것이다.그리고 그 선택이 나를 향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결국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과거의 이유영은 이런 이치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깨달았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마음속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까? 물론 이유영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역으로서의 자리였다. 대역은 결코 그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아가씨, 이제 더는 신경 쓰지 말아요. 네?”우지가 다정하게 위로하며 말했다. 우지의 말에 이유영은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우지 씨.”“네, 아가씨.”“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해요.”세상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았다.과거 강이한과의 관계에서, 이유영은 자신을 너무 과신했다.그리고 그 과신은 결국 이유영에게 큰 상처와 고통을 남겼다.“네, 아가씨.”“...”“기억할게요.”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를 본 이상,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는지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자칫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되는 법이다....강이한은 우천시를 떠났다.강이한의 행적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박연준은 강이한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강이한이 우천시를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박연준은 즉시 우천시로 향했다.강이한은 서주에 도착했고 박연준은 우천시에 도착했다.다음 날 아침.이유영의 방에는 여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는 것처럼 박연준 또한 이유영에게는 마찬가지였다.남자는 이유영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유영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물었다.“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박연준의 질문에 이유영은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박연준은 조용히 의자를 끌어 이유영의 옆에 앉았다.테이블 위에는 우지와 우현이 정성껏 끓인 영양죽이 놓여 있었다. 대추를 넣어 이유영의 몸 상태를 배려한 것이었다.정씨 가문 사람들은 늘 이유영을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정말 미안해.”박연준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박연준의 사과는 알프산에서 있었던 일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는 단지 이유영이 연서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알프산의 눈과 태양이 이유영에게 이렇게 깊은 상처를 줄 줄은 몰랐다.이유영은 담담히 말했다.“결국 일어날 일이었어.”이유영은 박연준의 사과를 의외로 평온하게 받아들였다.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유영은 이제 그런 사람이었다.이유영에게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과거의 이유영이었다면 분명 감정을 폭발시키고 히스테릭하게 굴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이유영은 자신의 시력 문제에 대해서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과거 의사 선생님은 이유영의 눈은 수술 외에는 회복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다만 염 선생이 있었다면 수술 없이도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단지 가능성일 뿐, 절대적인 보장은 없었다.“네가 그랬어?”이유영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유영이 묻는 것은 이온유의 일이었다.강이한이 떠나자마자 박연준이 우천시에 나타난 것을 보고 이유영은 이 사건은 박연준과 관계있다고 생각했다.남자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이미 눈치챘군.”이유영은 냉소적으로 말했다.“역시 네가 꾸민 일이네.”강이한이 또다시 박연준의 손에 놀아난 것이다. 그리고 이유영 역시 다르지 않았다.이제는 강이한을 멍청
“배준석을 데려와.”배준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안과 전문의였다. 어린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른 인물이자 강이한과는 말할 것도 없이 깊은 친분이 있었다.“알겠습니다.”“그리고 수술할 때, 강이한이 용성시에 있었는지도 확인해.”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진영숙의 마음은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알겠습니다.”남기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진영숙은 소파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강이한이 사라지기 전, 이유영과 함께 우천시에 가서 진료를 보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곳의 염 선생이 이유영의 눈을 치료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그리고 그 누구도 지금 진영숙의 마음속 상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특히 지금 이유영의 눈이 치료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의심을 더욱 깊게 했다.어머니로서 그런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이유영이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든 진영숙은 강이한이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이라면 이유영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오늘, 이유영이 청하시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진영숙의 마음은 피가 더욱 아파졌다.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그 아이는 정말로 강이한을 똑 닮았다....한편 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방문객들을 침착하게 맞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예기치 않게 여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긴장감이 맴돌았다.특히 여진우에게서 풍기는 것은 단순한 차가움 이상의 것이었다.소은지는 말없이 찌푸린 눈으로 여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조용히 소은지를 응시했다.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무슨 일이에요?”“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는 건 소은지 씨도 알고 있죠?”“알아요.”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세상 모든 이가 아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두 사람의 10년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걸까? 사랑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은 대체 어디 갔을까?’이유영은 풍산 그룹에서 나오기 전, 진영숙에게 아이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진영숙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시윤이 방으로 들어섰다.“사모님.”“왜... 도대체 왜...”진영숙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감정은 이미 한계를 넘어 통제 불능 상태였다.시윤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에 대해 그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진영숙 곁에 있었던 이들은 예전에 진영숙과 이유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결국 인과응보라고 여겼다.“이유영에게 다 말했어. 하지만...”진영숙은 여기까지 말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강이한이 끝내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진영숙은 모두 이유영에게 털어놓았다.하지만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이유영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강이한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사람 같았다.“사모님, 작은 사모님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어쨌든...”시윤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가 결국 말을 멈추고 진영숙을 바라보았다.과거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진영숙도 이유영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미 모든 대가를 치렀다.하지만 여전히 과거를 놓아주지 않는 이유영이 마냥 이해되지 않았다.‘아무리 미워도 지금 강이한이 사라진 마당에 그 분노를 조금은 억누를 수도 있지 않을까?’과거에 무슨 원한이 있었든 이렇게까지 무심할 일이란 말인가? 강이한은 서주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졌다.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도 여전히 냉정한 이유영의 태도에 진영숙은 마음이 아팠다.“대체 어떻게 해야 그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왜 박연준의 사람들조차
“강이한은 2년 동안 자신을 가둔 채 보냈어.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지금의 이유영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담담한 걸까?심장이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걸까?“네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겨내기 시작했어.”그때를 떠올리자 진영숙은 한층 더 괴로워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강이한은 아직도 그 안에 있었고 이건 그가 내린 선택이었다.“강이한은 지금 혼자 그 벌을 받는 거야. 네가 겪었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겪고 있어. 알기나 해?”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저 자기만 강이한 곁에서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강이한이 결국 이유영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끝을 맞았다. 그녀를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이제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아무 미동도 없이 모든 것을 보고만 있었다.이 모든 사실을 이유영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진영숙은 생각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영숙이 이런 사실을 이유영에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너무 차갑게만 강이한을 생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강이한의 실종에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했다.강이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랐다.진영숙의 삶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그녀는 이유영만 편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친듯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든 걸 다 말했음에도 이유영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건 그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였어요.”“...”순간 머릿속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말을 뱉는 사람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하지만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한지음의 존재는 그녀에게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했고 연서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정말이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경고할게요. 제 딸에게 다시는 접근하지 마요. 그 아이는 강이한과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이유영!”진영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녀의 눈빛 속엔 끓어오르는 분노가 맺혀 있었다.하지만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이유영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진영숙은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냉정하다는 말을 들은 이유영의 입가엔 오히려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냉정하다고?’“지금 강이한이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두 철수한 것에 대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사실상 생사불명이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유영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할 수 있다니 진영숙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차갑고 무정했다.아무리 돌이라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면 어느 정도는 온기가 스몄을 텐데 이유영은 아니었다.강이한이 생사불명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한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냉정하다고요?”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진영숙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분노만 가득했다.“그럼 아니야?”‘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생사불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조차 이유영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
한 시간 뒤, 이유영은 풍산 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진영숙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빛엔 깊고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뜻밖에도 박연준은 진영숙을 파리에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그녀 스스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강이한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손에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진영숙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네가 강이한의 딸을 낳았다니 믿기지 않는구나.”“...”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차디찼고 이어지는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왜요? 뱃속에서 죽이지 못해서 화가 났어요?”그 말에 진영숙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그녀의 눈에 스치는 감정은 슬픔이었다.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듯 쓸쓸함이 스며들었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남은 건 흩어진 슬픔뿐이었다.이유영의 싸늘한 태도 앞에서 진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우리 애 어디 있는지만 말해줘.”긴 시간이 흘렀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강이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이유영뿐이라 믿고 있었다.박연준이 사람들을 풀어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진영숙도 기약 없는 기다림만 계속됐다.박연준은 그녀와 함께 서주로 가자고 했지만 진영숙은 끝내 따라나서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른다고 했잖아요.”“정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진영숙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뭐라고요?”‘무엇을 의심하란 말이지?’“내가 들은 바로는 강이한이 너를 우천시로 데려갔던 건 염 선생을 찾기 위해서였대. 그땐 너도 몰랐겠지.”“...”“그런데 네 수술 시기에 맞춰 각막이 정확히 준비돼 있었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이 상황을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그 말에 이유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그
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묻지 말라고?’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소은지에 관한 것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여진우는 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늘 그렇듯 그들은 단순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지는 이제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야.”그 말에 이유영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소은지가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라고?’이미 어지러웠던 머릿속은 그 말 한마디에 더욱 복잡하게 뒤엉켰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오늘 송씨 가문 소식은 들었어?”“들었어.”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그 소식을 접한 뒤, 파리 전체가 마치 안개 속에 잠긴 듯 모든 게 흐릿하고 불길했다.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여진우의 품에 안긴 순간, 이유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짓눌렸다. 그의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느낀 이유영은 무언가 정말로 큰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긴 침묵이 흐른 후, 이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찾았어?”지금 그 도장과 문서는 엔데스 가문 사람들에게 극도로 민감한 존재였다.그 하나가 모든 걸 좌우할 수도 있었다.도장 이야기가 나오자 여진우는 그녀를 더 꼭 안아주며 낮게 말했다.“아무 일 없으면 곧 나올 거야.”그 말은 다짐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로 같았다. 그 도장이 어떤 의미인지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잠시 뒤, 여진우는 자리를 떴고 정국진도 오늘 집에 없었다.백산 별장에는 임소미와 이유영, 그리고 조기 교육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월이만 남아 있었다.월이는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방 안을 돌아다녔고 그 모습은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예전엔 조기 교육 센터에 가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즐거운 듯 아침마다 스
남기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오늘은 몇 명이나 더 찾아올 것 같아요?”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탐색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남기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지금으로서는 일곱째 도련님 쪽에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말뜻은 분명했다. 소은지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하라는 경고였다.소은지의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가능하다면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 늪으로 끌어들인 건 도대체 누구였을까?엔데스 명우. 그 이름이 떠오르자 소은지의 머릿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다시 어른거렸다.송연미가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소은지는 조용히 물었다.“남기 아저씨, 지금 제가 떠난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송씨 가문의 결정을 떠올리자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뚜렷해졌다.남기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신 이후로 일곱째 도련님은 송연정 아가씨와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요?”‘그렇다면 송연미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소은지가 생각에 잠기자 남기가 말을 이었다.“일곱째 도련님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십니다. 송씨 가문과 선을 그은 걸 보면 뭔가 그 속셈을 알아보신 듯합니다.”“...”“그리고 지금 사모님을 떠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사모님이 이 자리를 지켜주셔야 다른 사람들이 넘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물론입니다.”남기의 말에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우천시에 있었을 때,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며느리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송씨 가문이었다.예전엔 현우를 지지하는 송씨 가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오늘 송연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자 송씨 가문 회장님의 인품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그 사실을 인식하자 오히려 마
사실 모든 기회는 그녀가 온갖 노력을 다해 엔데스 운빈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그 순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씨 가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왜 송연정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은 끝내 선택하지 않았던 걸까?’처음엔 그 이유가 운빈과의 관계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느닷없이 엔데스 신우와의 혼사를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송연미는 문득 깨달았다.그 모든 결정의 이면엔 현우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결국 현우의 태도가 아버지의 선택을 바꿔 놓은 것이다.“현우를 만나야겠어.”송연미는 온몸을 떨며 소은지를 바라봤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현우를 직접 만나서 물어야 했다.차가운 엔데스 가문의 셋째 사모님으로 불리던 그녀는 지금 반산월에서 감정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몇 년 전, 현우가 파리를 떠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떤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 오랜 기다림 끝에 현우가 돌아왔고 그녀는 현우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단호히 끊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현우였다.“네 전화도 받지 않는데, 널 만나고 싶어 할까?”소은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 한마디가 송연미는 더 깊이 무너졌다. 이미 흔들리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그 순간 완전히 부서지는 듯했다.그녀의 눈빛엔 절망이 가득했다.“그래도 현우를 꼭 만나야 해.”송연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엔데스 신우와의 결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결정 앞에서 그녀는 늘 무기력할 뿐이었다.그동안 엔데스 운빈 곁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는지 모른다.그리고 현우가 돌아오자 그녀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하지만 지금 현우는 그녀를 차갑게
소은지는 조용히 송연정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았다.그녀의 눈빛엔 이미 무거운 결심이 내려앉아 있었다.송연정 역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 속에는 오래 참아온 비통함이 스며 있었고 그 아래엔 날 선 증오가 번득였다.“왜 엔데스 신우랑 결혼시키려는지 알아?”“왜?”‘엔데스 운빈과의 관계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또다시 다른 사람과의 혼사를 이야기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한때 송연정을 ‘넷째 사모님’으로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지금은 어떤 상황이 되어 버린 걸까?’“왜냐하면 네가 아직 여기에 있기 때문이야.”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 아버지는 송연정과 현우의 혼사를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돌아오면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거야.”“...”“넌 우리 아버지가 그냥 호의로 누굴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은지, 대체 얼마나 더 망쳐야 속이 시원하겠어?”“...”“지금 엔데스 가문 상황이 현우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모르는 거야?”송연정은 마치 이 모든 일이 소은지 탓이라도 되는 듯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실제로 소은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송연정과 현우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란히 서곤 했다.소은지는 배경도 권력도 없는 외국 여자일 뿐이었다.파리 사람들은 모두 송씨 가문과 현우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고 가문 안팎의 관심은 오롯이 현우에게 쏠려 있었다.그렇다면 그녀가 이혼을 택한 건 단지 운빈과의 관계가 아니라 엔데스 가문 자체와 더 깊은 얽힘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그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현우와 다시 함께 할 수 있으니까.소은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잊었어? 내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유, 바로 너 때문이야.”그 말에 송연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입술이 달싹였으나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나만 없으면 가문이 너를 선택했을 것 같아? 결국 가문이 택한 건 송연정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