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그만 불러요. 보고 싶지 않아.”소만리는 그를 뿌리치고 눈물을 닦았다.“사실 난 당신이 날 잊었다고 탓한 적은 없어요. 당신이 날 구하기 위해 다쳤기 때문에 결국 강연에게 이용당하게 되었단 걸 알아요. 하지만 기억상실은 당신이 인간성을 잃고 내 부모님을 죽인 이유가 되지 못해요.”소만리는 계속 말했다.“기모진, 난 이제 당신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을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오르지만 그들을 위해 복수할 수도 없어요. 이런 심정을 알기나 해요?”소만리는 깊은 숨을 몰아쉬며 소파 앞으로 다가가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아기를 안아 들고 휴게실을 빠져나갔다.기모진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소만리가 방금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돌아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 같았다.가능하다면 그는 정말 자신의 목숨으로 사화정과 모현의 목숨을 바꿀 용의가 있었다.그녀가 더 이상 힘들지 않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속죄할 용의가 있었다.하지만 소만리, 당신은 나에게 다시는 속죄할 기회를 주지 않을 것 같군.소만리는 휴게실을 벗어나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계단 입구를 걸어가고 있는데 경연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소만리가 목소리를 듣고 막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경연은 마침 전화를 마치고 복도에서 나왔다. 소만리가 문밖에 있는 것을 보고 경연은 잠시 의아했지만 이내 온화한 웃음을 띠었다.그러나 소만리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기 사모님 괜찮아요?”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이제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끄떡하지 않아요. 아이들을 위해서 절대 쓰러지지 않을 거예요.”“그럼요.”경연은 소만리의 이런 강인함에 마음이 뭉클했고 소만리의 품에 안긴 작은 아기를 보았다.“내가 안아 봐도 돼요?”“당연히 되죠.”소만리는 아기를 조심스럽고 천천히 경연에게 건네주었지만 경연은 아직 아기를 안아본 경험이 없어서 얼른 바로 소만리에게 건네주었다.“기 사모님이 안고
”기 사모님은 보석 업계에서 유명한 디자이너니까 그림도 좀 연구하셨겠죠? 시간이 되면 서로 소통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어떠세요?”경연은 자신을 몇 번이나 도와줬고 겸손하고 교양 있는 점잖은 사람이어서 소만리는 거절하지는 않았다.한편 강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그러나 들어오자마자 강어가 직접 정면으로 뺨을 때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강연은 머리가 텅 비어버린 채 온몸이 얼어붙었다. 입에서도 따가운 피비린내가 났다. 강연의 뒤를 따라 걸어오던 양이응이 이 광경을 보고 옆에 서서 당황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오늘 이게 어떻게 된 거지?분명 오늘 소만리에게 굴욕을 주려고 나섰는데 왜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는 거지?이게 어떻게 되는 상황이야?강연은 뺨을 맞아 살짝 부어오른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오빠 미쳤어! 왜 날 때려!”“너 자신한테 물어봐. 오늘 뭐 하러 나갔어?”강어의 얼굴빛이 굉장히 어두웠고 마치 불쾌한 감정을 애써 참고 있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더 이상 말썽 부리지 말고 F국으로 돌아가서 너의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라고 말했지. 왜 자꾸 소만리를 건드리려고 해?”이 말을 듣자 강연은 차츰차츰 상황을 알게 되었다.“오늘 일어난 일은 소만리 때문이었어! 오빠 혹시 소만리 좋아해? 그 여자 때문에 날 두 번이나 때리고! 난 오빠 친동생이라구!”“만약 네가 내 친동생이 아니었다면 널 벌써 한 방에 죽였을 거야!”강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지만 여전히 애써 참아야 했다.“...”강연은 눈빛이 움츠러들어 숨도 삼킬 수 없었다.“왜 이렇게 소만리를 도와주는 거야? 설마 진짜 그 여자 좋아하는 거야?”“헛소리 작작해.”강어는 매서운 눈빛으로 사납게 양이응을 한 번 쓱 훑어보고는 말했다.“명심해. 다시는 소만리를 건드리지 마. 그렇지 않으면 그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야.”“...”강연은 화가 나서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그녀는 입가의
아기는 누군가가 자신을 안는 것을 느낀 듯 크고 동그란 눈을 번쩍 떴다.어린 아기를 안고 있던 남자는 이를 보고 어리둥절했지만 곧 이 순진무구한 눈동자에 마음속까지 부드럽고 따스해졌다.“꼬물이라고 했지?”기모진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배를 가리키며 이 귀여운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아기가 기모진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작은 입을 헤벌쭉 벌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아기의 웃는 얼굴을 보고 기모진이 목젖을 움찔거리며 주체할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그날 소만리가 그의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조산하던 장면이 그의 머릿속에 아프고 괴롭게 떠올랐다.그녀는 그렇게 힘겹고 아픈 몸을 버텨내며 끈질긴 의지로 온몸을 불살라 겨우 7개월 남짓한 미숙아를 낳았다.그때 그녀는 땀으로 온몸이 적셔져 안색이 눈처럼 창백했다.그리고 그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를 ‘모진’이라고 불렀다.그러나 그는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마지막 순간에야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아기가 한 달 가까이 인큐베이터에 더 있은 후에야 정상 아기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모진의 가슴은 더욱 미어져왔다.“꼬물아, 미안해. 아빠는 좋은 아빠가 아냐.”기모진은 아기의 얼굴에 머리를 숙이고 가볍게 뽀뽀했다.이 뽀뽀는 깊은 미안함과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어린 녀석은 수정구슬 같은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기모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무의식적으로 해맑게 웃으며 하얗고 통통한 작은 발로 기모진의 몸을 걷어찼다.“정말 귀여워. 역시 내 아들다워.”기모진은 뿌듯한 듯 말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그는 소만리에게 들킬까 봐 걱정되었다.지금 그녀는 자기 부모님을 죽인 살인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기모진은 그녀에게 더 이상 가슴 찢어지는 어떤 고통도 주고 싶지 않아서 아기를 내려놓고 나가고 싶었다.그러나
소만리는 아기를 내려놓고 기저귀를 점검해 보았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소만리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아기를 안아 들고 병원에 가보려고 했다.“소만리, 내가 안아 볼게.”기모진은 자세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청해 보았다.“방금 내가 안았을 때 아기가 안 울었거든.”소만리는 그를 차갑게 쳐다보았다.“당신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아기는 아예 깨지도 않았을 거야. 내가 겨우 재워놨는데 들어와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소만리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아이가 다른 이유로 울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은 이성적으로 이 남자를 대할 방법이 없었다.“소만리, 내가 아기를 안게 해 줘. 정말 아까 내가 안았을 때 안 울었어.”기모진은 다시 한번 청했다.그러나 소만리는 끝내 아기를 기모진에 주지 않았고 오히려 비꼬아 웃었다.“당신 이제야 이 아기가 당신 아들이라는 걸 알았어?”“소만리.”“기모진, 난 정말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 정말로 당신이 기억을 잃었던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구. 내가 원망하는 건 당신이 기억을 잃고 인간성도 잃었다는 거야.”그녀는 가능한 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면서 말했다.“그날 간호사가 말하기를 당신이 병실에 들어갔다 나온 후 아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쇼크를 받았다고 했어. 당신이 강연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정말 이렇게 어린 아이에게까지 손을 댈 수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어.”소만리가 계속 말을 이었다.“나중에 내가 당신을 찾으러 갔을 때 당신 또 뭐라고 했어?”소만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죄책감과 미안함에 더욱 얼굴이 일그러지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이 내 목을 조르며 말했지. 내 아기랑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허. 무슨 상관?”“그래, 모두 내가 자초한 거야. 내가 자초한 거라구. 왜 당신 같은 남자를 사랑해서...”소만리는 자조하며 쓴웃음을 지으며 품에 안겨 우는 아기를 내려다보았고 그녀의 눈물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뺨을 타고 흘러
순간 소만리의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문을 열어 떨리는 손으로 구급차를 부르려고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차 앞으로 달려가 피로 물든 손을 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소만리, 우리 다시 시작해...”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진 기모진이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소만리의 눈물은 조용히 흘러내렸고 마음속에서는 온갖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했다.그녀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긴 했지만 그가 사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도착했고 기모진의 부상도 곧 안정되었다.그는 내상은 없이 대부분 외상이었다. 왼손이 조금 심하게 다쳐서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없었고 왼쪽 종아리에도 상처가 나서 피가 많이 흘렀다.기모진은 또 흐릿하게 꿈을 꾸기 시작했다.요트가 폭발하는 꿈을 꾸었고 소만리가 그를 떠나는 꿈을 꾸었다.그는 손을 뻗어 소만리의 손을 잡았다. 목구멍에서 애틋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소만리, 가지 마.”그가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두 눈을 번쩍 떴다.그러나 눈앞에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는 육경의 모습이 보였다.“사장님, 깨어나셨군요.”기모진은 자신이 육경의 손을 잡은 것을 보고 방금 꿈을 꾸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올라서 잠시 멍하게 있다가 재빨리 육경의 손을 놓았다.“흠흠.”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육경은 급히 그를 부축하며 다행스런 표정으로 말했다.“사장님 드디어 기억을 되찾으셨어요.”기모진은 멈칫하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여기 있지?”“사장님, 또 기억을 잃으셨어요? 오늘 아침 사장님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교통사고?”기모진은 애써 생각을 해보려고 했지만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생각도 흐릿해져 있었다.이렇게 심각한 사고를 당했는데도 그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그가 기억하는 것은 소만리가 그에게 다가와 다시 시작하자고 한 말뿐이었다.기모진은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소만리는?”
”엄마 금방 올 거야.”기란군은 길가를 쳐다보며 서운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참, 아빠는 언제 집에 오는지 몰라?”“아빠? 여온이는 아빠 만난 지 너무 오래됐어.”기여온은 작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여온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아빠는 여전히 기묵비였고 맑은 유리구슬 같은 큰 눈에 쓸쓸함이 밀려왔다.그런데 어둡게 가라앉으려던 눈동자에 갑자기 알록달록한 빛깔이 두 남매의 눈에 들어왔다.화려한 색깔로 포장된 작은 사탕으로 만든 꽃다발이 기여온 앞에 나타났다.“어?”여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큰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오빠, 너무 예뻐.”기란군은 사탕 꽃다발을 든 손을 따라 쳐다보았더니 그다지 단정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 보였다.“누구세요?”기란군은 여온을 자신의 뒤로 오게 한 후 경계하는 눈빛으로 강자풍에게 물었다.강자풍은 여전히 껄렁껄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강자풍은 다소 불만스러운 듯 기란군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여온이 친구야.기란군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강자풍을 훑어보았고 잠시 후 기여온이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하얀 머리 오빠~”기여온이 강자풍을 알아보고 말했다.강자풍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그 은발은 이미 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기란군은 기여온이 ‘하얀 머리 오빠'라고 하는 말을 듣고 조금 경계심을 풀었다.“오빠, 이 하얀 머리 오빠는 내 친구야. 내가 막대 사탕도 줬거든.”“맞아.”강자풍이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그래서 오빠가 지금 여온이 주려고 이렇게 막대사탕을 많이 들고 왔지, 좋아?”“이렇게 많은 걸 다 여온이 주는 거야?”기여온이 즐거워서 큰 눈을 반짝였다.차가 막혀서 소만리는 조금 늦게 유치원에 도착했는데 차를 세우고 보니 어떤 남자가 두 아이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걱정이 되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야 강자풍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강자풍은 소만리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소만리는 강자풍을 한 번 힐
뭐?강연은 알아듣지 못하고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목이 조여져 숨을 쉴 수가 없었다.뭐지???소만리가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강연의 목덜미에 바짝 조였다.강연은 소만리가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녀는 있는 힘껏 저항하며 벗어나려 애썼지만 소만리가 이렇게 센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놔...줘! 소만리 너 이거 놔...줘.”강연은 눈을 부릅뜨고 협박하며 저항하자 소만리는 오히려 더욱더 힘을 주어 마구 발버둥 치던 강연을 벽에 들이대었다.이 순간 그녀의 가을빛 갈색 눈동자에는 선홍색으로 맹렬하게 굳어지며 증오의 폭풍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사화정과 모현의 처참한 죽음을 떠올리며 소만리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소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강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점점 숨이 막혀 저 밑바닥에서부터 고통이 밀려왔다.엄마, 아빠...그것은 그녀가 많은 시간 동안 바래왔던 부성애와 모성애였다.그녀가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되찾은 집이었다.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이 변태 같은 악랄한 여인이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이용해서 모두 망가뜨렸다!강연은 이미 손발이 차가워지고 있었고 눈을 부릅떴다.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시작했다.기모진은 병실에서 이 소리를 들었고, 그다지 옳은 행동 같이 들리지 않았다.그는 다리에 난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아이에게 병실에서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며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서둘러 병실 앞으로 나갔다.밖으로 나오자마자 숨통이 끊어질 것 같은 강연을 보고 그는 급히 달려가 소만리를 안았다.“소만리, 어서 놔!”그는 그녀를 말렸다.하지만 소만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강연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일말의 복수에 조금은 통쾌함을 느꼈다.기모진은 더욱 초조해져서 소만리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녀의 힘은 지금 너무나 강했고 온몸에는 더더욱 막을 수 없는 분노가 퍼지고 있었다.“소만
방금과 같은 상황을 강연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소만리가 그런 행동을 할 줄은 몰라 정말 깜짝 놀랐다.잠시 후 소만리의 격렬한 감정이 조금 잦아져서 자신을 안고 있던 남자를 배척하는 눈빛으로 밀어내며 말했다.“다시는 건드리지 마세요.”기모진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고 텅 빈 품을 마주하게 되자 갑자기 심장에 또 하나의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소만리.”“5분만 더 시간을 줄 테니 5분 후에 기란군과 여온이를 데리러 올게요.”소만리가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그때 두 아이가 병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기란군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엄마, 아빠 싸워요?”기모진은 얼른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소만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어떻게 그래? 엄마 아빠 안 싸워. 걱정하지 마.”소만리는 저항하는 눈빛으로 기모진을 바라보았지만 성숙한 아들이 걱정하는 것을 덜어주기 위해 방긋 웃었다.“잘생긴 오빠, 여기 많이 빨개.”기여온은 기모진의 왼쪽 종아리를 가리키며 궁금해했다.소만리가 시선을 내려 보니 기모진의 종아리에 상처가 갈라지고 검붉은 피가 거즈에 흠뻑 스며들어 붉게 물든 것을 보았다.그녀는 못 본 척하려고 했지만 결국 의사를 불러 기모진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 5분도 이미 지났지만 두 아이는 여전히 기모진과 떨어지기 아쉬워했다.“아빠, 언제 집에 올 거야? 아빠 보고 싶었어.”기란군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기모진을 바라보았다.어릴 때부터 기모진 곁에서 자라서 관계가 형성된 덕분인지 기모진에 대한 애정이 유달리 깊은 아이였다.기모진은 미안한 듯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빠가 이따 너희들과 같이 집에 갈까?”“정말요?”기란군이 기뻐서 놀라며 말했다.기모진은 서리빛처럼 차갑게 서 있는 소만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소만리는 그가 말로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가 정말 퇴원할 줄은 몰랐다.육경이 차로 그를 마중하러 왔다. 기모진은 다친 다리를 무릅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