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고귀하고 누구보다 우아했고 점잖았던 사람이 지금은 이렇게 외모를 신경 쓰지 않고 심지어 수염도 깎지 않았다. 미간에 남은 뛰어난 그의 기상만이 준수한 외모를 떠받치고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어오다 기모진을 위해 마련된 빈소를 보고 점점 입가에 웃음기가 번졌다.“기모진, 넌 여전히 지옥의 숙명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기묵비! 바로 네가 이 여자와 작당해서 내 아들을 죽였지!”위청재가 사실을 제대로 분간하지도 못하고 소만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기묵비는 대수롭지 않은 듯 냉소를 흘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소만리는 그를 가로막았고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기묵비, 당신은 초요를 죽였어요. 십여 년 동안이나 당신을 위해 진정으로 걱정하고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했던 여자를 죽이다니. 당신이야말로 지옥에 가야 할 거예요!”기묵비는 소만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 초요는 내가 죽였어. 내가 직접 사람을 시켜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쏴 죽였어.”이런 사실을 알게 된 소만리는 이미 많이 아팠음에도 지금 다시 초요를 생각하니 마음이 슬퍼지기 시작했다.“기묵비, 당신이 초요에 대한 상처를 이렇게 가볍게 말하다니, 정말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군요?”“죄책감?”기묵비는 가소로운 듯 웃으며 눈빛은 갑자기 진지해져 소만리에게 말했다.“기모진의 죄책감은 당신의 용서와 재결합으로 바꿀 수 있었지만 나의 죄책감은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까?”그 말을 듣던 소만리는 뜻밖에도 기묵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슬퍼하는 건가?“내가 마지막으로 일을 다 끝내면 내가 가야 할 곳으로 갈 거야.”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갑자기 날카로운 시선을 기 할아버지의 몸에 던졌다.소만리는 기묵비가 기 할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감하고 급히 다가가 그를 막았다.“기묵비, 잘못된 일이 또 잘못된 일을 부르는 짓은 더 이상 하지 마세요!”“잘못한 건 저 사람이야. 모든 비극은
기 할아버지는 정정한 기세로 기묵비를 제지했다.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소만리를 보고 그를 막고 있는 그녀를 만류하며 뒤에서 잡았다.“할아버지, 싫어요.”“걱정하지 마라.”기 할아버지는 소만리를 위로했다. 그리고 증오에 눈이 먼 기묵비를 향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이제 와서 보니 어쩔 수 없이 그 해의 진실을 너에게 말해야겠구나. 그렇지 않으면 넌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겠어.”이 말을 들은 기묵비는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을 살짝 풀었다.그 해의 진실?소만리는 설마 그 해의 사고에 정말 다른 진실이 있다는 건지 의아해했다.의외의 사고라면 달리 뭐가 있을 수가 있을까?위청재는 유달리 깜짝 놀라며 말했다.“진실? 설마 정말 아버님이...”“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기종영이 위청재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표정은 위청재와 마찬가지로 기 할아버지를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무슨 진실? 나를 속이려고 아무 핑계나 대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기묵비는 속으로는 알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여전히 의심을 가득 품고 말했다.기 할아버지는 태연하게 기묵비의 의문에 가득 찬 눈빛을 맞으며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확실한 것은 뜻밖의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교통사고라는 거야.”기 할아버지의 대답에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사람에 의해서 생긴 사고라니.소만리는 시종일관 사고를 일으킨 사람이 할아버지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그녀가 예상했던 것을 지금 할아버지의 입으로 들었다. 할아버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그 해 기묵비 넌 천진난만한 아이였고, 널 아끼고 사랑하는 부모가 있었지. 가족은 화목하고 행복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어.”할아버지의 회고는 계속 이어졌다.“내 부친은 늙어서 네 부친을 낳았기 때문에 네 부친에 대한 사랑이 지극정성이었지. 심지어 기 씨 그룹 전체를 네 부친에게 넘겨주겠다고 선언했지. 그러나 이런 편
기묵비는 기 할아버지가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위패 앞으로 가서 손을 내밀어 보니 위패 바로 뒤에 투명한 봉투에 담긴 메모리카드가 있었다.“이것은 그 해 네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던 그 차의 운행 기록이야. 녹취록도 있으니 네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야.”기묵비는 멍하니 그 메모리카드를 보다 갑자기 먹먹해졌다.그는 한참 동안 정신이 멍한 채 서 있다가 사람을 시켜 노트북 컴퓨터를 가져오게 했다.그는 컴퓨터를 켠 후 메모리카드를 넣고 실행했다. 곧 스피커에서 가장 익숙했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여보, 흥분하지 마. 우리에겐 묵비가 있어! 묵비는 우리가 없으면 안 돼. 여보 정신 좀 차려!?”바로 기묵비의 어머니 목소리였다. 그녀는 목소리가 떨리며 기묵비의 아버지를 부르고 있었다.“여보, 나 정말 괴로워. 이 세상은 정말 너무 고통스러워서 마주하고 싶지가 않아. 여보, 우리 여기 이 어두운 세상을 떠나자. 여보...”“안 돼! 여보! 안 돼...”여자의 놀란 고함소리와 함께 뒤이어 격렬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 다시 아무 소리도 없었다.기묵비는 이 운행 기록을 다 보고 난 후 손에 들고 있던 총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모든 힘이 온몸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듯했고 그대로 부모님의 위패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기 할아버지는 통탄하며 말했다.“너를 F국에 유학을 보낸 건 네 아버지의 유언이었어. 네 부친은 자신이 사업을 잘 못하면 네가 잘 해 줄 것을 바랬고, 네가 잘 해서 언젠가 출세하길 바랬어.”기 할아버지는 말을 이었다.“네가 F국에 있던 몇 년 동안 넌 내가 무관심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우리 가문의 기업이 방대하고 먹고 입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너 스스로 돈을 벌어 너의 생활비를 관리하고 생활하도록 한 것은 다 너를 연마시키기 위한 것이었어.”“언제나 몰래 너를 지켜봐 달라고 사람을 시켜 부탁했지. F국에서의 너의 상황을 매일 보고받았어. 너는 기 씨 가문의
소만리는 기모진의 사진을 어루만졌다.비록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혐오스러운 강연의 얼굴이 떠올랐다.“쯧, 이렇게 상심하고 있다니.”강연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려왔다.소만리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강연이 들어오는 걸음을 막았다.“꺼져. 넌 여기 환영 받지 못할 사람이야.”강연은 두 팔짱을 끼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나와 기 사장님은 친구예요. 지금 그가 죽었으니 빈소에 방문하는 건 인지상정이죠.”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걸어가 향 세 개를 가지고 불을 붙였다.소만리는 차가운 기세로 강연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막았다.“강연, 당신이 흑강당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여기는 F국이 아니야. 흑강당도 아니고. 내 남편은 너 같은 종류의 파렴치한 여자의 조문 따위 필요하지 않아. 당장 나가!”소만리는 강연이 가지고 있던 향을 빼앗아 화로에 던졌다.“껴져.”소만리는 체면 따위 강연한테 세울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강연은 입가에 머금고 있던 웃음기가 싹 가셨다. 약이 바짝 올라오기 시작했다.그때 위청재가 달려 나왔다.“소만리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모진이 친구가 빈소에 찾아왔는데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대접하니?”위청재가 강연을 옹호하였다. 소만리에게 적개심을 품은 사람이라면 위청재도 뒤처지지 않는다.강연은 위청재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보고 억울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어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기 사장님의 친구 강연이라고 해요. 이렇게 기 사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슬펐어요. 전 그저 향이나 몇 개 피워드리려고 왔는데 기 사모님이 저렇게 꺼지라고 하실 줄은 몰랐어요.”위청재는 이 말을 듣고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기 사모님? 허. 이 여자가 어떻게 기 사모님이야! 모진이가 이 여자 때문에 죽었는데!”“뭐라구요? 기 사장님의 죽음이 저 여자 때문이라고요?”강연은 이미 사실을 알고 있
”요트에서 사살당한 일은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죠?”소만리는 직설적으로 물었다.기묵비는 고개를 저었고 눈에는 더 이상 나쁜 기운이나 숨김이 없었다.“초요의 말이 맞았어. 몇 년 동안 나는 그저 모진을 질투하고, 그가 나보다 잘 지내는 것을 질투하고, 그가 당신을 얻을 것을 질투했어. 그렇지만 사실은...”그가 가볍게 스스로를 비웃었고 초요의 유골이 담긴 조그만 유리병 목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며 말했다.“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했을 때 속죄하러 갈 거야.”이 말을 듣자 소만리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기묵비, 당신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는 거예요?”기묵비는 그저 웃으며 차가운 유리병을 만져 볼 뿐이었다.“초요는 내가 뭘 할지 다 알고 있을 거야.”소만리는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기묵비의 깊은 회한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기 씨 그룹의 모든 주식을 이미 당신 명의로 다 옮겼어. 변호사가 처리 중이야. 내가 비록 불법 거래를 했지만 지금 기 씨 그룹의 자금은 모두 깨끗하게 처리되었어. 앞으로 그룹은 당신에게 맡기겠어.”그는 정중하게 말하고 소만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소만리, 미안해.”기묵비는 사과의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묵비.”기 할아버지가 급히 다가와 그를 불렀다.기묵비가 걸음을 멈추자 그 가냘픈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묵비야. 모진도 이미 떠났는데 너마저 떠나면 안 된다. 기 씨 그룹은 네가 관리해야 해.”“소만리가 저보다 더 잘 할 거예요. 게다가 난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해요.”기묵비는 이 말을 남기고 바로 돌아섰다.온갖 평지풍파를 다 겪은 듯 노련하고 침착한 기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기묵비는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더욱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죄송합니다. 큰아버지. 제가 그 동안 오해했습니다.”“윗사람이 어떻게 아랫사람한테 그런 걸 따지겠느냐. 묵비야. 가지 마라. 여기가 너의 집이다.”기 할아버지의 만류하는 눈빛에 절절한 기대가 가득했다.기묵비는 더 마음이
이 말을 듣자 강연은 갑자기 두 눈이 번쩍 뜨였다.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침대에 앉아 있는 남자가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보고 있다가 문득 사람의 인기척이 들리자 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강연은 이 황홀한 복숭아꽃 같은 눈빛을 보고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드디어 깨어났군요.”...경도.한 달이 지나자 소만리는 매일 일에 매달리며 자신의 상념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뱃속의 아이와 귀여운 두 아이를 위해서 그녀는 긍정적으로 밝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여전히 기모진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외로운 밤을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월요일 아침 소만리는 일찍 기 씨 그룹으로 왔다. 일찍이 기모진이 앉아 있던 그 자리에서 그녀는 온갖 잡다한 서류들을 능숙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다.조회시간이 되어 그녀는 회의를 하러 갔다. 그녀는 이미 기 할아버지가 인정한 기 씨 그룹 신임 최고 경영자이고 명실상부한 사장이었지만 여전히 직원들에게 사장 사모님이라고 부르도록 했다.이 호칭은 그녀로 하여금 기모진이 마치 세상에 살아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했다. 이런 착각이 그녀에게 가슴에 난 아픔을 치유해 주었다.금세 점심시간이 되어 소만리는 점심을 먹으러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비서가 와서 말했다.“사모님, 경강 그룹의 책임자인 경연이 향수의 출하 날짜 변경과 디자인 일로 사모님을 특별히 찾아뵙고 상의 드리고 싶다고 합니다. 지금 바로 옆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고객이 왕이지. 소만리는 바로 갔다.마침 점심시간이라 점심을 먹으면서 일 얘기를 하는 것은 사업상 자주 있는 일이었다.소만리는 식당으로 갔고 만나는 장소가 수없이 많은 추억이 남아 있는 식당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비록 그 기억들이 모두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모든 순간에 그가 있었고 소만리에게는 다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었다.예전에 앉았던 그 창가 자리,
귓가에 경연이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만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경연 씨가 계셔서 다행이에요. 고맙습니다.”소만리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웨이터가 이 장면을 보고 빨리 와서 사과하고 소만리에게 식사대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소만리는 추궁하지 않았고 경연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회사로 돌아왔다.돌아와서 소만리는 결혼반지를 열심히 다시 디자인했다.이튿날 그녀는 일찍 기 씨 집안에 도착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기모진이 떠난 지 49일이 지났고 오늘은 49재를 지내는 날이었다.소만리가 현관에 들어서자 위청재는 이상야릇한 괴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흥.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해? 아주 슬픈 척 무거운 표정을 연기하는 모습이라니. 아주 배우가 따로 없구나.”많은 친척들과 친구들이 기모진에게 향을 피우고 있었고 불사를 하는 스님들도 경을 읽으며 그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소만리가 자기를 무시하자 위청재는 얼굴을 찌푸렸고 어투는 더 거칠어져서 말했다.“소만리. 너 여기서 모진에 대한 정이 깊은 듯 그렇게 연기하지 마라. 넌 예전부터 모진에게 무슨 일이 생기길 고대했었잖아. 모진이가 죽었으니 가장 기뻐할 사람은 너지.”방금 밖에서 돌아온 기종영은 문으로 들어오자마자 위청재가 소만리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그는 급히 가서 가로막았다.“위청재, 당신도 좀 이제 그만해. 정말로 소만리가 모진이를 신경 쓰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모진이의 유복자를 뱃속에 품고 이렇게 고생하고 있겠어? 당신 너무 심하게 말하지 마!”“무슨 유복자. 이 아이는 모진이의 아이가 아닐지도 몰라!”위청재가 내뱉은 말은 두뇌의 사고체계를 전혀 거치지 않고 나온 것이다.소만리는 몸을 홱 돌리며 말했다.“어머니. 기모진에 대한 내 감정을 의심할 수도 있고 하루 종일 공연히 나를 겨냥해 퍼부으실 수 있지만 내 아이를 모욕하지는 마세요.”“너...”위청재는 지지 않고 얘기하려다 입을 다물
차창을 사이에 두고 소만리는 오매불망 그리던 얼굴을 보았다.그녀는 급히 차창을 내리고 멍하니 옆 차 조수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겹겹이 쌓인 빗발 사이로 남자의 강직하고 아름다운 옆얼굴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소만리는 믿을 수 없어 눈을 의심했고 가슴이 점점 뛰기 시작했다.“모진...”그녀가 가볍게 부르자 차 안에 있던 남자는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천천히 옆얼굴을 돌렸다.하필 그때 공교롭게도 녹색불이 켜지고 차가 ‘휙' 소리를 내고 그녀의 눈앞을 지나갔다.마치 지금 이 순간 일어난 일처럼 느꼈지만 환상이었다.소만리는 뒤에서 재촉하는 경적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액셀을 밟았다. 그러나 방금 그 차는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녀는 그 차의 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소만리는 즉시 사람을 통해서 알아보려 했으나 소득은 없었다.모진, 내가 너무 당신이 그리워서 환각을 일으킨 걸까?그녀는 자문했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다음날 소만리는 회사에 막 도착해서 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한 무리의 가십 매체 기자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질문을 퍼부어댔다.“기 사모님, 경연과 개인적으로 사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인가요?”“당신은 이미 당신이 기 사모님이라는 신분을 잊은 거 아닙니까?”“누군가가 당신을 겉으로만 사랑하는 척했다고 폭로했는데 사실 기 사장님을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거 아닙니까? 뱃속의 유복자도 단지 기 씨 그룹을 물려받을 카드로 쓰신 거 아닌가요?”“경연은 이미 약혼녀가 있는데 당신이 이렇게 하면 상간녀가 되는 거 아닌가요? 기 사모님, 당신 생각으로는 명성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소만리는 의혹에 가득 찬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경멸하는 눈빛을 하고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으며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내 생각엔 당신들처럼 진실을 쫓는척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사람들이 정말 혐오스러워요.”“...”한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