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는 눈을 들어 기모진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그의 아름다운 미간에는 약간의 피곤함이 감돌았다.침대 위에 앉아 있는 소만리를 보고 기모진은 찌푸린 미간을 펴며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소만리. 내가 시끄럽게 해서 깼어?”소만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당신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기모진은 소만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소만리가 오해하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고객의 일이 좀 급해서 빨리 올 수 없었어. 미안. 내가 걱정시켰지.”기모진은 침대 곁으로 가서 머리를 숙여 소만리의 눈썹에 입을 맞추었다.소만리는 기모진의 몸에서 평소 그에게서 맡아보지 못한 낯선 냄새를 맡았다.그녀는 냄새에 매우 민감하여 잘못 기억하는 일이 없다. 이 독특한 향기는 강연이 풍기던 그 향수와 같은 냄새였다.기모진과의 사이에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에 소만리는 이 남자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믿기로 하고 소만리는 더 추궁하지 않고 일어나서는 예전처럼 두 아이의 아침밥을 차려주러 갔다.아침 식사를 마친 소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약을 먹었다.오늘은 월요일이라 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후 기모진은 소만리를 데리고 회사로 돌아왔다.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소만리는 강연이 프런트 데스크에 앉아 있는 걸 보았고, 그녀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직원들은 오늘 아침 특종 뉴스를 본 것 같았다. 특종 뉴스는 기모진이 묘령의 여인과 바깥에서 외도를 했다고 말했다. 하필 직원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나 기모진은 뉴스에 폭로된 일을 알지 못했고 강연을 보고는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꼈지만 동시에 강연이 소만리에게 쓸데없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어젯밤 일을 그는 결코 소만리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강연은 일부러 여기 온 것 같았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소만리에게 다가갔다.“기 사장님. 기 부인. 기다리고 있었어요.”“강연 씨가
”계약서상의 일은 내 비서와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다른 일이 없으시면 이만.”소만리는 말을 마치고 나서 옅은 웃음을 띠며 기모진의 팔짱을 꼈다.“여보. 우린 올라가요.”“그래요.”기모진은 소만리가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도록 발을 맞췄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강연은 소만리와 기모진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돌아서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수군 말하며 자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가방에서 가늘고 긴 담배를 꺼내 한 입 피웠다. 능숙하게 입으로 하얀 연기를 뱉어내며 중얼거렸다.“소만리. 두고 봐.”그녀는 입술을 깨물고는 한 번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지금 엘리베이터 안의 분위기는 유난히 조용했다. 기모진은 소만리의 평온해 보이지만 차가운 옆모습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소만리, 어젯밤에...”“어젯밤 당신 이제 보니 누구랑 사업 얘기하러 간 게 아니었어요. 당신 강연을 만나러 갔어. 당신들 밤새도록 같이 있었어요?”소만리가 돌리지 않고 물었고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그 여자가 당신 좋아해요?”기모진은 강연이 당치도 않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부인할 수 없었다.“소만리. 난 당신 이외의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소만리는 애틋하게 자신을 향해 있는 기모진의 눈을 바라보다가 남자의 품에 안겼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키스했다.“당신 말고는 그 누구도 안 돼.”소만리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고 기모진을 믿었지만 강연은 믿을 수가 없었다.기모진이 회의에 간 후 소만리는 오늘 아침 특종뉴스를 캡처해서 강자풍에게 보냈다.제발 강자풍이 그의 누나를 제대로 말려 주길 바랬다.이를 본 강자풍은 곧바로 강연에게 물었고 강연은 단번에 시인했다.“맞아. 난 그냥 기모진이 좋아. 어쩜 그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을까. 내가 어떻게 놔 둘 수 있겠어?”“강연, 그 사람 아내가 있어!”“나도 알아.
강연이 요염한 자태로 웃으며 기모진을 향해 가까이 다가왔고,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는 소리 없이 하얀 연기를 흩날렸다.그녀는 지금 기모진이 얼떨떨해하며 어리둥절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마침 기회를 틈타 뽀뽀를 하려는데 곁눈으로 힐끗 보니 소만리가 손에 핸드폰을 쥐고 강연을 향해 카메라를 비추면서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었다.“강연 씨. 왜 계속 안 해요? 당신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요? 내가 도와줄게요.”소만리는 얇게 웃으며 비꼬며 말했다.“이따가 이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어떻게 유부남을 꼬셨는지 보여줄게요.”소만리의 맑고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기모진은 그제야 정신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조금 전 그 순간 그는 정말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강연은 담배꽁초의 불을 끄며 소만리를 향해 시큰둥하게 웃었다.“장난으로 한 거예요. 기 부인 그렇게 진지할 필요 없어요.”“강연 씨. 이런 농담은 다른 남자한테나 하세요. 내 남편 찾지 말고. 어쩠든 상간녀라는 타이틀은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게 아니니까요.”소만리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지만 눈빛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강연은 어렸을 때부터 강어의 손에서 컸기 때문에 이렇게 훈계하는 듯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얼굴빛은 약간 어두워졌지만 비웃음을 지으며 기모진을 바라보았다.“기 사장님. 내가 다시 뵈러 올게요.”강연은 한껏 도발하는 눈빛을 하고 웃으며 말했다. 소만리는 이 세상에 소만영보다 더 사악한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강연이 떠나고 나서야 소만리는 매서운 눈꼬리를 거두었고 뭔가 조금 불편한 듯 배를 만졌다.기모진은 이를 보고 긴장한 채 소만리 곁으로 다가갔다.“소만리, 괜찮아?”소만리는 기모진이 내미는 팔을 피하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아까 내가 들어가지 않았으면 당신들 사이, 한 단계 더 진전되었으려나?”기모진은 소만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소만리 그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그녀
하지만 이 악몽이 가져온 심리적인 영향 때문인지 소만리는 늘 속이 좋지 않았다.그녀는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고 기모진은 잠시 중요한 회의가 있어 같이 동행하지 못했다.소만리는 검사를 마치고 남사택에게 검사 결과를 건네주었고 남사택을 진지하게 읽어 내려갔다.“소만리. 내가 따로 약을 하나 더 처방해 줄게요. 이 약은 태아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아요. 주로 당신의 기분을 안정시키는 데 작용할 거예요. 매일 한 알씩이면 충분해요. 우선 출근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소만리는 임산부가 자주 감정 기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게다가 어젯밤 그 꿈이 그녀에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될 정도로 진짜 같았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사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그녀가 막 문을 나섰을 때 남사택 사무실의 작은방에서 유유히 한 사람이 나왔다. 강연은 담배를 피우며 연기를 마시고 다시 토해냈다.“보아하니 소만리한테서 조금씩 그 약 효과가 나오고 있는 모양이야.”남사택은 느긋하게 소만리의 진짜 검사 결과를 보며 말했다.“그래. 소만리는 곧 자신이 가장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눈앞에 일어났다고 상상하게 될 거야.”“내가 원하는 건 지금까지 뭐든 다 가졌어.”강연은 만족스러운 듯 빨간 입술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소만리, 어때? 난 하룻밤 사이에 당신한테서 모든 걸 뺏어올 수 있어.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완전히 내 것이 되고 온전히 날 따르고 온전히 날 사랑하게 만들 수 있어.”그녀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기모진이 이 연기에 중독되기를 기다리기엔 너무 시간이 걸려요. 좀 더 빠른 방법이 필요해요.”강연은 깊은 의지를 품고 자신의 계획을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소만리가 요 며칠 동안 집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강연은 수시로 기모진을 보러 사무실로 갔다.매번 그녀는 그녀가 특별 제작해 만든 담배를 피우며 일부러 기모진 앞에서 거드름을 피웠다.기모진은 극도로 반감을 가지고
소만리는 눈앞에서 남녀가 다정하게 껴안고 키스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이 여자는 당연히 사랑에 빠져 있었고 이 남자는...머릿속에 깊이 박힌 이 뒷모습의 실루엣은 절대 틀림없다.“기모진...”소만리는 심장이 날카롭게 베이는 듯이 아팠고 그녀의 기분도 한순간 뒤엉켜버린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감정이 점점 통제불능이 되는 것 같았다. 눈앞의 어슴푸레한 빛과 독특한 향기가 그녀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강연은 그 매혹적인 눈을 들어 얼굴이 창백해져 가는 소만리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기 부인, 오셨어요?”강연은 도도하고 조롱하는 듯 웃었고 한껏 도발하는 투로 말했다.“기 사장님의 키스 실력이 정말 좋아요. 이런 남자, 정말 헤어 나올 수가 없어요.”강연이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소만리는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킬 방법이 없었다.소만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남자의 뒤로 달려가서 그와 강연을 떼어놓은 뒤 말했다.“기모진. 당신 뭐 하는 거예요? 당신 미쳤어?”소만리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고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자꾸 시야가 흐려지는 것 같아서 똑똑히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사업하는데 판을 좀 벌이려는게 정상아냐. 뭘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어?”소만리는 정말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귓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히 진짜였다.“야단법석? 기모진.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어?”소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다 남자가 하는 말을 들었다.“지금 당장 나가. 강연과 내가 사업 얘기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이 대답에 소만리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심지어 눈앞의 사람과 사물의 경계가 탁해지고 흐려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강연은 소만리의 반응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소만리 뒤로 다가갔다.“기 부인
소만리가 차로 돌아오자 지하 주차장의 공기는 그녀의 기분을 그렇게 많이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았는데도 운전대를 잡은 그녀의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그녀는 자신에게 냉정해지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이미 다시 운전할 힘이 나지 않았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기모진과 강연의 키스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여자의 의기양양한 미소와 남자의 못마땅해하는 눈매는 마치 그 해 자신을 대하는 기모진의 냉혹한 태도와 같았다.하지만 소만리는 항상 기모진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운전할 상황이 되지 않아서 계속 차 안에서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기모진과 강연이 한 방에 있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상하니 소만리는 가슴이 먹먹하고 너무나 아팠다.그녀는 계속 여기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소만리는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는데 기모진이 이쪽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남자는 지금 옷차림이 단정하고 늠름하고 기품이 우아했다. “기모진.”소만리가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기모진이 소리를 듣고 한 걸음 내디뎠다. 그가 고개를 들어 보니 소만리는 얼굴이 창백하고 눈빛에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소만리. 당신 어떻게 여기 있어?그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때 그의 부드러운 말투는 아까의 그 냉담함과는 정반대였다.소만리는 눈앞에 있는 잘생긴 얼굴을 보며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자신의 감정을 달래려고 안간힘을 썼다.“기모진.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서 당신 날 속이고 몰래 강연과 함께 있어요?”조금 전 강연과 함께 저녁을 먹은 일을 소만리가 알게 된 것을 생각하며 기모진은 미안함을 느꼈다.“소만리. 당신을 속이려고 한 게 아니야.”그는 설명을 하며 손을 뻗어 소만리의 손을 잡았다.“손대지 마요. 더러워.”소만리는 그를 피했다. 기모진은 가슴이 두근거렸고 허공에 뜬 손바닥은 공허했다.소만리에게 내쳐진 것 같
기모진은 갑자기 무거운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충돌 소리를 들었다.그는 소만리가 화가 나서 물건을 던지는 줄 알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조마조마했다.“소만리, 괜찮아?”그가 문을 두드리며 가볍게 소리쳤다.“소만리, 아무 일 없는 거지?”기모진이 자꾸 물었지만 소만리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져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된 기모진은 문을 열려고 계속 시도했지만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소만리, 당신 안에서 뭐해? 소만리!”기모진의 목소리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라 했다.그는 베개를 던져버리고 긴 다리를 들어 올려 문고리 쪽을 걷어찼다.문을 발로 걷어차자 드디어 문이 열렸고 기모진은 침대 옆에 쓰러져 있는 소만리와 바닥에 널브러진 알약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갑자기 공포가 밀려와 가득 채웠다.“소만리!”그는 빠른 걸음으로 소만리 곁으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소만리의 백지장 같은 창백한 얼굴을 보자 기모진은 온몸이 혼란스러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소만리, 일어나! 소만리! 소만리!”기모진이 아무리 소리쳐도 소만리는 대답이 없었다. 기모진은 즉시 소만리를 안아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달려갔다.의사는 소만리에게 여러 가지 검사를 했는데 별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소만리는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기모진은 병상을 지키며 소만리의 차가운 손을 잡고 가볍게 키스했다.여전히 의식이 없는 소만리를 바라보는 그의 근심 가득한 눈빛은 애틋함과 미안함으로 일그러졌다.그런데 갑자기 한 여인의 그림자가 그의 시야에 들이닥쳤다.강연은 활짝 웃으며 문설주에 기대어 말했다.“기 사장님, 당신 어디가 제일 매력적인 줄 아세요? 방금 같이 당신이 그렇게 아내를 아끼고 걱정하며 바라볼 때라니까요.”기모진은 소만리의 손을 이불 밑에 넣고 벌떡 일어나 강연한테 향했다.“나가세요.”기모진이 차가운 기운이 넘실대는 눈빛으로 말
”헛소리하는 게 아니에요.”강연은 핸드폰에 저장된 동영상 파일을 열어 기모진에게 핸드폰을 건넸다.동영상은 얼마 전 소만리가 호텔 방에 기모진을 찾으러 들어온 것을 찍은 것이었다.기모진은 동영상을 다 보고 동영상 속의 대화도 다 들은 후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왜냐하면 동영상 속의 소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와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낯선 남자를 기모진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기모진은 소만리가 당시 왜 그녀를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고 더럽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동영상 속 이 남자는 분명히 그가 아니었다. 생김새도 전혀 달라 옷차림만이 비슷한 것만 빼면 조금도 이 남자가 기모진과 닮은 구석이 없는데 소만리는 정말로 이 남자를 기모진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강연,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소만리가 이런 거야!”기모진은 강연에게 물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보이지 않는 사슬이 가슴을 옥죄는 것 같았다.소만리가 그 남자를 기모진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녀가 얼마나 괴롭고 실망했을지 그는 상상할 수 있었다.강연은 손에 들고 있던 핑크색 알약 한 봉지를 기모진의 손에 던졌다.“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환각 약물이에요.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기모진은 손안에 있는 가늘고 긴 분홍색 알약을 보았고 주머니에서 그가 소만리를 위해 매일 지니고 다니는 약을 꺼내어 보았다. 완전히 똑같았다.그의 머릿속에서 무섭고 두려운 예감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기모진은 주먹을 불끈 쥐고 알약을 움켜쥐었다.알고 보니 남사택이 준 약은 환각 작용이 있는 것이었다. 남사택.“잔인한 사실 한 가지 알려드리자면 남사택은 그냥 단순한 의사가 아니에요. 당신 아내는 남사택의 실험 대상일 뿐이에요.”실험 대상!이 네 글자를 소만리의 몸에 쓰다니. 기모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러나 강연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그 해 소만리가 남사택의 약을 먹고 무사히 아이를 낳았든 지금 태아를 안전하게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