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옥죄며 초요를 압박하여 자백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예상치도 못하게 그녀가 눈앞에서 통쾌하게 터트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눈앞에서 이토록 아름답고 요염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의 기억 속에 달콤하고 청초한 해바라기 같았던 그녀와의 추억이 떠올랐다.기묵비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칼에 마음이 긁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초요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앞으로 끌어당겼다.“얼굴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왜 얼굴을 고친 거야? 내 앞에서 모르는 사람인 척하려고?”그의 어조는 차가웠고 눈빛은 매서웠다.그러나 지금 눈앞의 언초에게선 예전의 부끄러워하고 순종적이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가벼운 웃음조차 띠지 않은 채 말했다.“기 선생님은 정말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 거 같아요. 내가 성형을 한 건 누가 내 얼굴을 망가뜨렸기 때문이에요.”기묵비의 눈동자가 움츠러들었고 눈 밑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뭐라고? 네 얼굴이 망가져? 누가 그랬어!”“저도 그 사람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내가 당신 체면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내 얼굴을 망가뜨렸다는 건 알아요.”내 체면?기묵비는 정신이 멍해졌다.초요가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보다 지금이 더 끔찍한 일을 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더 추궁하고 싶었지만 초요는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뿌리치고 걸어갔다.기묵비는 단호하게 그녀를 잡았다. “어떻게 기모진과 사귀게 된 거야?”“무슨 상관이에요. “초요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를 보는 시선은 더 이상 예전에 그를 사모하던 눈빛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의 손을 빼내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기묵비의 손은 허공에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지금 이 순간 초요의 태도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잘 해 주는 것에 익숙했고, 항상 열정적이고 활기차게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에 익숙했다. 심지어 그녀가 자신을 수줍게 대하는 태도에 익숙했다. 그러
기모진은 병원에 이틀 동안 혼수상태로 누웠다가 드디어 정신이 조금씩 회복되었다.정신을 잃었던 이틀 동안 기모진은 소만리를 미치도록 그리워했다. 기묵비 곁에 머물고 있는 것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기묵비가 무슨 협박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된 것이었다.마침 그때 정신이 아득한 기모진의 눈앞에 소만리가 나타났다. 어김없이 기묵비도 같이 왔다.기모진이 부드러운 눈빛을 띠었다가 일순간 날카로워졌다.그는 아직 상처로 몸이 성치 않은데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소만리가 그때 성큼성큼 다가와 그를 막았다.“아직 조심해야 해요.”기모진은 다가온 소만리를 보고 얼른 소만리의 손을 잡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소만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기묵비가 당신 괴롭혀?”“넌 내가 소만리를 괴롭혔으면 좋겠어?”기묵비가 가볍게 웃었다.“난 여자나 괴롭히는 그런 남자가 아냐.”이 말을 듣고 기모진은 더욱 가소로운 듯 웃으며 말했다.“당신 이런 말 할 때마다 낯간지럽지 않나요? 당신한테 상처받아 두 번이나 유산한 여자 벌써 잊었어요?”기묵비의 얼굴빛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소만리도 그리고 기모진도 초요를 떠올렸다.그러나 소만리는 초요가 기묵비 때문에 두 번이나 유산한 것은 처음 알았다.초요는 막 일을 처리하고 병실에 들어가려는데 소만리를 보았다. 기묵비도 함께 보이자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행동했다.기묵비의 시선은 초요의 얼굴에 꽂혀 있었고 안색이 몹시 나빠졌다.“따라와 봐.”그는 여전히 초요에게 명령조로 말하고 돌아서며 병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호원 두 명에게 소만리와 기모진을 잘 지키라고 했다.초요는 원래 기묵비의 말을 무시하려고 했으나 잠시 기모진과 소만리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고 싶어서 따라 나갔다.조용한 병실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소만리는 조심스럽게 기모진을 침대로 부축하였다.그의 입술이 마르고 창백해지자 소만리는 그에게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주려고 돌아섰다. 그 순간 기
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잡고 살며시 자신의 배에 얹었다.“대답이 만족스러워요?”기모진은 어리둥절하여 잠시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그러나 점차 그는 소만리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깨달았다. 그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약간 볼록한 아랫배를 가볍게 매만졌다. 마음속에 전에 없던 기쁨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아이.나와 소만리의 아이.기모진은 유감스럽게도 소만리가 임신했을 때 한 번도 곁에서 아껴주고 돌봐준 적이 없었다.심지어 그녀의 배는 한번도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소만리의 몸 상태를 생각하니 그의 가슴은 또 한 번 미어졌다.아이와 소만리 사이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소만리였다. 기모진은 소만리에게 그녀의 몸 상태에 대해 설명하기로 결정했다. 입을 떼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기모진, 나 기란군이랑 여온이 가졌을 때 당신 한 번도 내 곁에 있어준 적이 없었어요.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아빠 노릇 꼭 해야 해요. 그리고 내 말대로 경도로 돌아가요.”기모진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읊조렸다. 여온.여온의 원수는 아직 갚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그가 읊조리는 모습을 보자 소만리는 걱정스럽게 따져 물었다.“기모진, 당신 내 말 들었어요? 당신 다시는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내 말 들어요.”“알았어.”기모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하고 깊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소만리, 나 당신 말 들을게.”소만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기모진이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는 모습을 보고 그가 여전히 돌아가기를 꺼린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기모진은 살짝 멍해졌다가 이내 기쁜 듯이 깊은 눈을 들었다.소만리는 그를 향해 미소 지었고 입술 옆에 흘러내린 보조개는 기모진의 눈 속에서 달콤하게 피어났다. 그는 소만리가 그에게 이렇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달콤하고, 아름다웠다.기모진은 뜻밖에도 눈
”기묵비,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기묵비,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이 한마디는 기묵비의 심장을 관통하였고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타고 내려 뭔가가 몸속에서 부서져 내려앉는 것 같았다.초요는 단호하고 냉담하게 기묵비의 손을 밀치고 더 이상 한치의 미련도 없이 말했다.“기묵비, 정말 당신한테 실망했어요. 지난 10년 동안 보살펴 주신 은혜는 꼭 갚을게요. 앞으로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마음의 빚이 없어요.”그녀는 돌아서 가려고 했지만 잠시 할 말이 또 생각났다.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더 이상 사람을 시켜 내 약혼자를 건드리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제일 먼저 그 불명예스러운 영상을 경찰서에 보내버릴 테니까요.”기묵비는 이 말을 듣고 눈빛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그는 차가운 눈으로 초요가 돌아서는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초요, 당신 지금 다른 남자를 위해 감히 나를 협박하는 거야?”초요가 걸음을 잠시 멈추고 차갑게 돌아서며 말했다.“지금 내게 있어 당신이야말로 나와 전혀 상관없는 남자예요.”기묵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멀어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 밑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질투와 분노가 굽이치고 있었다.초요, 네가 기모진 때문에 나를 배신하다니.보아하니 너도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것 같진 않군.병실 안에서 소만리는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일어서서 떠날 준비를 했다.기모진은 그녀의 손을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소만리, 얼른 빨리 다시 검진을 받아. 시간 끌지 말고.”소만리는 의아한 눈으로 기모진을 바라보았다. 이때 방문이 열리고 초요가 들어왔다.낯익은 느낌을 주는 이 얼굴을 보며 소만리는 예의 바르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언초 양, 그럼 당신 약혼자 잘 보살펴 주세요. 전 이만 갈게요.”“소만리, 걱정 마세요. 모진 오빠 잘 돌
이 대답을 듣고 소만리는 뭔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걸 알았다.그러나 남녀의 힘은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소만리는 차 안에 처박혔고, 차는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렸다.경호원은 이 광경을 보고 승합차를 뒤쫓아가는 동시에 얼른 기묵비에게 전화를 걸었다.“사장님, 누가 소만리 아가씨를 끌고 갔습니다!”“뭐?”기묵비는 가슴이 타들어갔고 그때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그는 전화를 힐끗 보고 차츰차츰 알게 되었다.그는 단호하게 전화를 받았고 저쪽에서 남자의 도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기 사장님, 제게 올 시간이 있으신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기 사장님께 드릴 따뜻한 홍차 우려놨어요.”“당신이 소만리를 데려갔다고?”“전 단지 기 부인에게 차나 한 잔 대접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아니. 기 사장님도 오셔도 됩니다. 언제나 환영이죠.’전화기 저쪽의 남자는 태도가 굉장히 오만했다.기묵비는 차갑고 침착하게 말했다.“내가 지금 당장 갈 테니 소만리 절대 건드리지 마. 안 그러면 당신들 톡톡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그럼 빨리 오시죠. 안 그러면 내가 소만리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요.”남자의 협박하는 목소리가 떨어졌고 전화는 끊겼다.기묵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달려갔다.소만리는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 어느 바에 끌려가 있었다.눈앞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람이 세상 불손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이 사람은 힐끗 봐도 인물이 출중해 보였다. 눈꼬리 아래쪽에 있는 점을 보니 역시 그의 이목구비는 여자보다 더 요염할 정도로 아름다웠다.은빛 짧은 머리는 온몸에 스며있는 자만심을 한껏 더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하듯 그는 소만리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으음. 이 분이 기 사장님이 총애한다는 그 분이시로군. 역시 굉장한 미인이야.”그는 매끈한 목소리로 감탄하듯 말했다.그는 갑자기 머리를 숙여 소만리의 귓가에 다가가 귓속말로 경박스럽게 말했다.“음. 미녀 누나
만약 기 사장님이 승낙하지 않는다면 이 미녀 누나는 아마 무사히 이 대문을 나서기 어려울 거예요. 그쵸? 미녀 누나.”이 남자의 도도한 모습과 기묵비의 냉담한 얼굴을 보니 소만리는 양쪽 다 돕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지금 자신을 돕고 기모진을 돕고 싶을 뿐이다.기묵비가 머뭇거릴 때 소만리는 유유히 일어나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누가 이 대문을 나서겠다고 했나요?”소만리의 말에 기묵비와 강자풍는 동시에 당황하였다.두 남자는 소만리의 여유로운 미소에 시선을 떨어뜨리며 의아함과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소만리 당신 무슨 소리야? 여기 있을 거야?”기묵비는 기가 막혔다.소만리는 담담하게 기묵비를 힐끗 흘겨보더니 아름다운 눈을 강자풍의 얼굴에 떨어뜨렸다.“우리 강자풍 동생의 대접은 아주 세심했는데 제가 어찌 누나로서 가고 싶겠어요.”강자풍의 눈빛은 밝아졌고 입꼬리를 들썩이며 말했다.“누나 진심이에요?”“당연히 진심이지.”소만리는 오만한 시선으로 기묵비의 어두워져가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말했다.“난 진작부터 이 남자랑 함께하기 싫었어. 동생이 능력이 있으면 날 좀 뺏어가 봐.”강자풍은 뭔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소만리를 바라보았다. 소만리는 흔들리지 않고 태연한 척 말했다.“왜? 동생 그렇게 못하겠어? 기묵비가 무서워?”“허. 내가 무서워한다고?”강자풍은 피식 웃었다. 역시 이런 젊고 씩씩한 애송이에겐 자극적인 도발이 먹혔다.“기묵비 들었어? 당신 여자가 당신이랑 있기 싫대. 그렇지만 난 내가 한 말은 지킬게. 남미 쪽 사업은 당신이 맡고, 암시장 쪽은 내가 맡고.”기묵비는 그를 무시한 채 소만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소만리, 당신 정말 안 갈 거야?”소만리는 비꼬며 말했다“어딜 가든지 죄수처럼 감시 당하고 있느니 이왕 이렇게 됐으니 신선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기묵비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주먹을 불끈 쥐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사람들을
기묵비가 하는 말을 듣고 초요는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기묵비를 밀치려고 할 때 기묵비는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당신 뭐 하는 거야! 기묵비!”초요는 힘껏 발버둥 쳤으나 도무지 기묵비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자신에게 반항하는 초요에게 기묵비는 눈 밑에 더욱 광기를 띤 채 몰아붙였다.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를 거역한 적이 없었다.절대!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소파에 내던지고 그녀의 외투를 찢을 듯이 하였다. 예전의 온화함은 온데간데 없었다.초요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을 참고 두 손으로 기묵비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그녀는 이 남자가 자신에게 이런 일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는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줄곧 이런 관계를 맺었었다.초요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기묵비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그녀를 움켜쥐고 말했다.“이제 기억 나나? 어? 예전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이런 시간들을 보냈는지 기억해?”초요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사랑했었던, 그러나 이제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이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기묵비를 못 본 체하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묵비는 초요의 마음이 이미 떠났다고 확신하였다.“날 봐.”기묵비는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며 살며시 불렀다. 눈 밑에는 파도가 세차게 일었다.“나 때문에 네가 두 아이를 잃어서 내가 싫어? 그럼 지금 바로 돌려주지.”...기모진은 하루 종일 병원에 누워 있자니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 초요가 슬슬 걱정되지 시작했다.당연히 소만리도 걱정되었다.소만리가 돌아가자 그는 상처가 심하게 아팠음에도 약을 먹을 기분조차 나지 않았다.그는 소만리가 재검진을 받았는지 어떤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녀의 병세가 점점 심각해질 것이다.그는 소만리가 심하게 피를 토하고 생명까지 위태로웠던 순간들을 떠올리기조차 싫었다.떠올리는 것조차도 그의 몸과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다.기묵비는 흡족히 만족한 후에
어둠이 깊어갈 때 기묵비가 몹시 침울한 얼굴로 기모진의 병실을 찾아왔다.보아하니 온화하고 기품 있는 얼굴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기모진, 네가 어떻게 했길래 초요가 그렇게 네 말을 잘 듣는 거야? 네가 원하는 건 여자든 사업이든 내 것을 뺏어야 하는 거야?”기모진은 병상에 누워서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했다.“뺏어간 건 사람이든 물건이든 결국 다 빠져나가게 돼요. 기묵비, 예전에 초요가 목숨을 다해 당신을 사랑했었는데 당신이 소중히 여기지 않았죠.”기묵비는 마치 천하의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그럼 너는 애당초 소만리를 그렇게 아낀 적 있어? 소만리는 너 때문에 다치고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왜 아직도 너 같은 이런 찌찔한 남자를 놓지 못하는 거야?”기모진은 가늘고 깊은 눈을 번쩍 뜨며 눈빛이 싸늘해져 말했다.“당신이나 나나 피차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적어도 난 돌아왔어요. 당신은요? 초요가 당신을 위해 강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던진 후 잠시라도 후회해 본 적 있어요? 없을 걸요. 만약 있었다면 바로 내 아내에게 매달리지 않았을 거예요.”“네 아내?”기묵비는 비웃으며 말했다.“너의 아내는 지금 이미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어.”기모진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상처 부위가 당겼다.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기묵비, 뭐라고요? 당신 내 아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저 그녀가 자발적으로 다른 남자 품에 안긴 거지. 이 사람은…”“이 사람, 나 말이에요?”병실 입구에서 청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모진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보았다.강자풍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어느 부잣집 거만한 자식처럼 거들먹거리며 들어왔다.“제 소개부터 할게요. 나 흑강당 2인자 강자풍이요.”강자풍은 기묵비를 한 번 힐끗 보며 말했다.기묵비는 무슨 짓을 한 건지. 흑강당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 기모진은 어안이 벙벙하였다.기묵비는 불쾌한 표정을 말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