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진은 천미랍을 데리고 사월산까지 차를 몰았다.저녁 안개가 짙은 가을 황혼에,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것은 추억의 맛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녹나무는 그 때 그 시절처럼 여전했지만, 사람의 얼굴만 달라졌을 뿐이다.지난 번 기모진이 소만영을 여기에 데려온 것을 목격한 후로 소만리는 이곳을 싫어했다.그녀는 소만영이 기모진에게 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소만영과 기모진이 어렸을 때 만났던 일은, 마치 기모진을 처음 만났던 자신의 경험과 매우 흡사했다. 이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소만영이 날 가지고 노는 것일까?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고개를 돌리자, 기모진이 와인 한 병의 마개를 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 때문에 갑자기 기분이 안 좋은 거죠?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기분 전환을 하다니, 여기 뭐 특별한 게 있나요?"소만리는 그에게 다가가 의문스러운 듯 묻기 시작했다."설마 여기.. 소만영씨와의 추억이 깃든 곳인가요?"‘퐁’소만리의 질문이 끝나자 마개가 열렸다.소만리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는 기모진의 섹시한 입가가 꿈틀댔다. 그의 엷은 웃음은 황혼의 주황색 노을에 비쳐 요염하고 매혹적으로 보였다."만약, 당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버린다면, 기분이 좋을까?""가장 중요한 것이요?"소만리는 기모진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그게 뭔데요?"그녀는 따져 물었지만 기모진은 신비로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차에서 와인 잔 두 개를 꺼내 술을 따르고 한 잔을 소만리의 앞으로 건네 주었다."같이 술 마셔줘."그의 낮은 목소리와 말투는 다소 위압적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사람을 애매하게 만들었다.소만리는 술잔을 받아 시원하게 마셨다.예전에는 절대 하지 못하던 것들을, 지금의 천미랍은 거의 다 할 줄 알게 되었다.술을 마시는 것은 더욱이 말할 것도 없이….기모진은 소만리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었다. 그녀 뒤의 저녁노을은 매우 아름다
차갑게 웃고 있는 소만리의 눈에는 빈정거림이 가득했다. 기모진.. 아직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그래서 예전의 소만리든 지금의 천미랍이든 모두 소만영에게 모함을 당해도 싸다는 건가?너의 눈에는 소만영이 무엇을 잘못하든 모두 옳은 것으로 보이는 거지? 그런 거지?소만리는 하이볼을 손가락으로 조용히 쥐었고 기모진은 무언가를 중얼대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서야 그는 밤처럼 깊은 검은 눈을 천천히 들고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그녀에게 빚을 졌어요."그는 이와 같은 아리송한 답안을 내놓았다.소만리는 왠지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그녀에게 무엇을 빚졌는데요?"기모진은 소만리의 맑고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았다."제가 그녀에게 약속했던 것을 해주지 못해서, 그냥 다른 방법으로 보상해주려고 합니다."그의 대답을 듣고 소만리는 나지막이 비웃었다.소만영에 대한 약속을 못 지켜서 보상을 하겠다고?그런데 기모진.. 당신은 나와 한 약속을 지킨 적이 있던가? 나에게 어떤 보상을 해줬지?내가 어렸을 때 당신을 알았던 과거를 이야기했을 때 당신은 나를 완전히 부정하고 그 때의 약속도 부정 했었어."미안해요. 더 이상 못 있을 것 같은데요."소만리는 가볍게 웃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모든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야 하죠.""그 날 제가 당신을 구했으니 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말했죠. 그럼.. 당신이 이 일을 계속 따져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나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기모진은 그렇게 간단명료하게 소만리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녀는 의아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살짝 취기가 올라있는 조각 같은 얼굴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천리야.. 모천리..지난 십여 년 동안 어찌해서 뭐가 옳고 그른지 분간도 제대로 못하는 그런 남자를 그리워하고 사랑했니?"그렇다면 제가 도와 드릴게요."소만리는 하이볼
"사실, 나 좋아하지?"그의 매혹적이고 섹시한 목소리가 따스한 숨결과 함께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느껴지는데 그게.."그의 말투는 확신에 찬 듯했다. 술기운이 도는 요염한 기모진의 눈에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듯한 자신감이 차 있었다.갑작스럽게 다가온 기모진이 이런 말을 하자 소만리는 내심 당황스러웠다."술에 취하신 것 같네요."소만리는 담담하게 말하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진짜 취한 거야? 아니면 취한 척하고 있는 거야?"취하니까 진짜 좋은데, 술에 취하면 다시 그녀를 볼 수 있는데… 하핫..”그가 살짝 웃으며 말하자, 마지막에 말한 “그녀”라는 단어는 잘 들리지 않았다.저녁 바람이 불어와 그의 이마 위로 내려온 잔머리를 살짝 흐트러뜨렸지만, 그의 눈빛은 한 순간 부드러워졌다. 어슴푸레한 밤 그의 가늘고 긴 눈동자에는 소만리가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깊은 애정으로 물들었다.그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또 다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숨결에서 느껴진 와인 향이 그녀의 얼굴에도 스며드는 듯했다."정말 보고 싶었다고…"갑자기 그는 소만리에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소만리의 심장이 갑자기 떨려왔다. 그를 밀어내려고 하자 기모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서로의 살이 닿자 그녀는 기모진의 두 눈을 놀란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미묘하게 흔들리는 촛불 같았다. 그녀의 뺨이 갑자기 따뜻하게 데워지기 시작했다."기모진씨! 먼저 저 좀 놔 주실래요?""아니.. 다신 널 놓지 않을 게…”그리고 그는 손끝으로 그녀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눈썹을 건드렸다. 그의 손길은 마치 자신이 매 순간 소중이 여기는 보물들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소만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한 순간 마음이 어수선했다.그녀는 기모진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눈에서 출렁이는 부드러운 물결을 볼 수 있었다. 만약 다시 한 번 그런 눈빛을
기모진의 동공이 움찔했다."그러니까.. 어젯밤에 우리가..."그가 말을 하는 동안 천미랍은 고개를 끄덕였다.순간 기모진의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가득했다.그는 눈앞에 있는 이 여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 호감은 모두 소만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가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말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소만리를 잃은 후에 그는 그녀 외의 여자와 어떠한 스킨십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가 천미랍에게 접근한 것은 사실 사심 때문이었다. 바로 소만리와 똑같은 얼굴을 보면서 구차함과 아쉬움을 달래고 싶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지금은...그는 갑자기 자신이 쓰레기 같다고 느꼈다.그녀에 대한 애정이 깊은 줄 알았는데, 결국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자 결과적으로 당황하고 심란해 하는 걸 보니.."당신의 모습을 보니 고민이 많은 것 같은데요? 당신이 그렇게 치를 떨며 혐오하던 전처를 떠올리게 해서 징그럽고 더러워요?"천미랍의 냉소적인 말에 그의 이성이 돌아왔다.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새벽빛 아래 수수하고 맑았다. 예전의 소만리의 그 얼굴 그대로였다. 이렇게나 아름답고 맑은 사람에게 ‘더럽다’는 단어가 관련되어 있을리가?비록 어젯밤 일들이 세세하게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는 어젯밤, 소만리와 관련된 따스하고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기모진의 복잡한 눈빛을 보며 소만리는 조용히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쌀쌀맞게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기모진씨 다시는 절 찾아오지 마세요. 우리는 여기 까지니까."그녀는 차갑게 말하고는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기모진은 그제서야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천미랍씨."그는 그녀를 쫓아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그녀를 끌어당겼다.그러나 소만리는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벗어나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 어느 순간 발 밑에 무언가 밟힌 듯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들 사이의 분위기가 왠지 이상하게 변했다. 하지만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도 미묘한 부분도 있는 것 같았다.기모진은 소만리를 끌어안고 3분가량의 거리를 걸었다.거의 이십 년이 흘렀지만, 리모델링을 했을 뿐 보건소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보건소에서 상냥하게 소만리를 치료해주었던 여의사를 다시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백발의 그녀는 정년 퇴직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이 일에 대한 애착으로 여전히 여기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기모진이 소만리를 안고 진찰실로 들어가자 그 의사는 한 눈에 기모진을 알아보았다."아~ 그 때 그 총각이구나, 기억나. 얼굴이 그때랑 별반 다를 게 없네."그 의사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소만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잠시 뒤 상처를 붕대로 잘 감아주었다.소만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드렸다.여의사는 방긋 웃으며 돋보기를 잡고 소만리를 유심히 살폈다."그 해에도 둘을 보니 꼭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같이 다니고 있군요."소만리는 깜짝 놀라 자신이 계속해서 하던 고민을 마음 속 깊이 묻어두었다. 그리곤 일부러 의심스러운 척하며 물었다.“그 해라면.. 혹시?”"맞아! 그 때도 이 총각이 아가씨를 업고 이렇게 왔었죠.. 그 여름날에, 아가씨를 업고 그 마을길을 달려 왔으니까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어.. 걱정을 얼마나 하던지 말할 것도 없고! 그 두 아이들 모두 그 당시에 유난히 참하게 생겨서 이 늙은이가 잊지 않았지요.”그녀 말고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그러나 이 사람은 그 때의 기모진이 아니었다.그는 이미 오래 전에 그 기억을 지워 버렸다..그녀는 옆에 서있던 기모진을 바라보았으나, 뜻밖에도 그의 얼굴은 유난히 어두웠고 두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왜? 기무진… 당신이 혐오하는 그때가 생각나서 그러는 거야? 평생을 약속했던 전처가 생각나서?’"됐어요! 젊은이, 아내를 데
소만영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모진아,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야?""잃어버린 건가?" 기모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아니야! 내가 그걸 어떻게 잃어버리겠어!” 소만영은 다급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나에게 준 물건인데. 항상 잘 간직하고 있지~""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데?" 기모진은 의심스러운 듯 소만영을 바라보았다."……" 소만영은 또 다시 당황하며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았다."모진아, 내가 그 몇 년 동안 정말 너를 걱정해왔는지 의심하고 있는 거야? 난 당연히 네가 준 답례품을 항상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네가 믿지 못하겠다면 당장 찾아서 보여줄 수 있어!”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뛰어나갔다.삼십 분쯤 흘렀을까.. 소만영은 나뭇잎으로 만든 작은 책갈피를 품은 채 다시 돌아왔다. 책갈피는 진짜 나뭇잎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투명한 코팅지 사이에 끼어 있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뭇잎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모진아, 이것 봐."소만영은 달콤한 웃음으로 책갈피를 건네며 넌지시 말했다. “모진아.. 나 정말 그때가 그리워. 그 때 네 마음속엔 오직 나 밖에 없었잖아."기모진은 소만영이 하는 말을 차분하게 들으며 손을 뻗어 책갈피를 집어 들었다.이 책갈피는 확실히 그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이로써 소만영은 그 때 자신이 만났던 그 소녀가 맞는다는 것이 확실해졌다.그는 마음속에 생겼던 의심을 거두고 그녀에게 책갈피를 되돌려주었다.소만영은 이를 보고 슬며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최근 기모진이 자신을 심문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사람을 시켜 기모진의 어제 행적을 살펴보도록 요청했다. 그 결과 그녀는 기모진이 사월산에 다녀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아마 그곳에서 그는 그녀에 대해 의심하게 할 만한 사람이나 무엇인가를 만났을 가능성이 컸다.다행히도 조금 전 그녀는 집에서 소만리에게서 훔친 일기장을 찾았는데, 거기에 그 책갈피가 끼
몇 초 뒤 기묵비가 돌아보자 저녁 햇살이 그의 각진 이목구비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온화한 얼굴에는 보기 드문 근심이 나타났다."미랍아.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 정말 네가 말한 대로 할 생각이야? 넌 가까스로 그의 마수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또 다시 그 속박으로 돌아간다고?"그의 부드러운 말투는 봄바람이 부는 것 같았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소만리는 잠깐 멈칫했으나, 그녀의 맑은 눈에는 복수의 빛이 일었다.그들이 지금까지 내게 준 상처와 굴욕은 다 참아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두 사람이 한 패가 되어서는 내 아이의 뼈까지 재로 만들어 뿌린 죄는 절대 용서할 수가 없어요. 이 원수는 죽어서도 갚아줄 거에요."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온화한 얼굴에는 쉽게 지울 수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고, 눈빛은 단호하면서도 날카로웠다.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복수란 바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리라!그런 그녀의 눈빛을 보자 기묵비는 더 이상 그녀를 타이르지 않았다.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애석한 듯이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해주었다.“어떻게든 당신 자신을 보호하고, 어려움이 생기면 꼭 나를 찾을 것을 약속해요.”소만리는 잠시 멍해졌다. 기묵비의 부드러움에 눈빛속의 원한이 점점 녹아내렸다.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눈앞의 온기 가득한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묵비씨 고마워요. 제가 복수하면 당신 곁으로 돌아갈 테니, 그때 염염이와 함께 F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할 게요. 조금만 기다려줘요.”"좋아요.기묵비는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어 소만리를 살며시 품에 안았다.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꼭 끌어안은 기묵비는, 마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깊이 간직한 듯 보였다.......소만영은 기모진의 별장에서 만족스럽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란군에 대한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기모진과 다시 결혼할 수 있도록 연극을 해서라도 이 아이에게 잘해주는 척을 해야 했기에..평
소만리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기란군을 향해 달려갔다. 소만리의 본능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더라도 제일 먼저 아이를 보호하는 것을 택했다.기란군을 꼭 안은 소만리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했고, 자신의 몸과 차의 본체가 맞닿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부상을 각오하고 있었다.짧은 순간, 누군가 참혹한 교통사고가 발생할 것이라는 생각에 놀라 비명을 질러 댔지만, 통제 불능이었던 차가 갑자기 멈춰섰다.소만영은 멀리서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속으로 욕을 해댔다.‘저 차가 저 눈엣가시 같은 천미랍이랑 기란군 둘 다 한꺼번에 치어 죽여 버리길 바랬는데!’그 시각, 차가 멈추자 소만리는 온 세상이 고요해진 것을 느꼈다.조심스럽게 기란군을 놓아준 그녀는, 자신의 품에 꼭 안겨 있는 꼬마를 보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군군~ 괜찮아. 이 미랍 누나가 널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 말은 꼭 지킬 거거든."소만리는 손을 들어 사랑스럽게 기란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꼬마는 순수한 그 커다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 속에는 말해야 할지, 아니면 그만두어야 할지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엄마..."그는 또 한 번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소만리는 어리둥절하여 잠시 멍하니 있었다. 강렬한 쓰라림과 아픔이 그녀의 마음을 아리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다시 기란군을 끌어안으며 안타까워했다.분명 소만영이 그에게 못되게 굴어, 그를 사랑하는 엄마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 아찔하거나 울적할 때마다 소만리를 엄마라고 부르는 게 틀림없었다."군군아!" 그제서야 소만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능청스럽게 들렸다.“천미랍! 그 손 못 놔?! 누가 내 아들을 건드리래?”소만리가 눈을 들자 강한 힘에 의해 밀려났고, 그와 함께 그녀의 품 안에 있던 기란군도 소만영에게 억지로 끌려갔다."군군아, 괜찮아? 방금 엄마가 깜짝 놀라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고."소만영은 기란군을 끌어안고 걱정하며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척했다.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