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진은 갑자기 ‘모진 오빠’라고 부드럽게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서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소만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벚꽃 같은 분홍빛의 입술은 살짝 꿈틀댔다."대체 왜……."갑자기 소만리의 입에서 세 글자가 흘러나왔고 그녀의 눈썹은 더욱 찌푸려졌다.왜?지금 ‘대체 왜’라고 한 건가? 기모진은 불안하게 잠들어 있는 천미랍을 보고는, 더 정확하게 듣고자 그녀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왜, 날 안 믿는 거에요…….""팡!"기모진이 소만리의 귀에 얼굴을 대자 갑자기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결과적으로 그는 소만리가 중얼대는 말을 다 듣지 못했다. 기모진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사화정이 화를 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기모진, 지금 내 딸이 너 때문에 병상에서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 여자를 보고 있어?! 아주 사랑이 넘쳐 흐르는구나! 그리고 뻔뻔하게 지금 저 계집애한테 키스까지 하다니! 너는 만영이가 있는 이 곳에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었구나?!"키스를 했다고?기모진은 무표정하게 사화정을 바라보았다. 아마 방금 몸을 숙여 천미랍에게 다가가던 그의 몸짓이 사화정의 눈에 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분노에 가득 찬 사화정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가늘고 섹시한 입술이 유유하게 단어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 제가 그녀에게 키스했습니다만…. 그게 어떻다는 거지요?"사화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모진아,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만영이는 너를 위해…….""저와 만영이는 이미 파혼했습니다.”기모진은 얼음처럼 차갑게 말을 내뱉었고, 그의 가느다란 눈에는 불쾌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도대체 제가 몇 번을 강조해야 이 사실을 받아들이실 건가요?""너……."사화정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기모진, 넌 어쩜 이렇게 몰인정 하지? 만영이가 일편단심으로 널
잠들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자 머릿속의 그림이 마침내 선명해졌다. 갑자기 나타나 제 때 그녀를 살린 것은 바로 기모진이었다.그는 그 때 매우 긴장한 채로 그녀를 껴안고 진정시켜주었다. 그에게서 느낀 안정감으로 인해 그녀는 그에게 밀착했다…….”소만리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 리듬은 이전에 느껴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었다.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두 주먹을 쥐었다.‘설마 내가 어떻게 그 인간 때문에 설렌다고? 난 그가 싫다고!’그가 직접 나를 조금씩 나락으로 밀어 넣었을 때, 내 사랑은 이미 죽어버린 마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버렸다.물에 빠져본 사람은 다시는 바다를 사랑할 수 없다.하지만, 날 숨막히게 했던 그 고통들은 꼭 되갚아 주겠어.사화정이 소만영의 병실 입구로 막 돌아왔을 때, 마침 기모진도 병실 앞에 도착했다.그가 온 것을 보고 사화정은 자신의 말에 기모진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다.“결국 만영이가 걱정되긴 했나 보지?”사화정의 말투는 차가웠다."모진아, 우리 만영이 정말 가엾어.. 네 놈들에게 번갈아 당했다니……. 그 놈들이 우리 만영이를 망쳐놓았어… 모진이 네가 꼭 옆에 있어주고 잘 다독여 줘.애처로운 얼굴로 눈물을 훔치는 전예의 모습은 더없이 슬퍼 보였다.기모진은 미간을 잡고 차가운 눈빛으로 전예를 보았다.전예는 시치미를 뚝 떼고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기모진의 눈빛을 보자 놀라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병실에서 계속 만영이를 돌보고 계신 거 아닙니까? 만영이가 어째서 서곽에 있는 폐지 공장에 나타난 겁니까?”"내…내가 물을 받으러 잠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까 만영이가 없어진 거야!”전예는 변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만영이는 다리가 부러졌지 않습니까? 갑자기 걸어 나갔다는 말씀입니까?""그…그게 만영이를 누군가 납치해서 데려간 거야! 내 생각엔 분명 그 천미랍인가 뭐신가 하는 계집애가 만영이를 잡아오라고 한 게 틀림없어!"기모진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식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지금까지 본 여자의 벗은 몸이라곤 소만리의 것뿐 이었다.소만영을 ‘임신’ 시켰다는 두 번의 잠자리 모두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고, 매번 술에서 깬 다음 날 소만영의 말에 의해 그들이 잠자리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다만 지금은, 소만영의 샤워하는 모습만 희미하게 보였을 뿐인 데도 거부감이 들었다."어허어헝헝… 왜… 흐엉엉엉…." 이 때 갑자기 소만영이 쓰라린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기모진은 그제서야 다시 정신을 차리고 침대 시트를 쥔 채 화장실로 들어가 소만영의 몸을 감쌌다.“어서 나와.”그는 그녀를 잡아 끌었고, 소만영의 두 다리가 멀쩡한 것을 알아차렸다.그의 눈가에 짜증이 스치며 불만이 가득 차 올랐고, 표정은 분노로 가득했다.소만영은 이런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 할 말만 해댔다. “모진아!” 소만영이 눈물을 흘리며 기모진의 품속으로 안겼다. 양팔은 마치 문어처럼 필사적으로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모진아.. 왜..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해? 그 건달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난 지금 너무 괴로워… 모진아.. 왜 하필 나야? 난 지금 너무 더러워… 정말 너무 더러워졌어! 흑흑흑…….”“모진아…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넌 이제 내가 필요하지 않겠지? 나한테 그랬잖아… 나는 모진이 네가 만났던 제일 순수하고 귀여웠던 여자애라고… 그런데 지금 나는… 지금 너의 아리는… 이제 더 이상 순수하지 않아…….”소만영이 또 다시 아리를 언급하는 것을 듣자, 기모진의 손가락이 조금씩 움츠러들었다.그의 아리..소만리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때 그는 그놈의 ‘아리’를 이미 마음 속에서 떠나 보냈다.그렇지만, 왜 인지 매번 아리가 언급될 때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하지만, 분명한 건. 그는 소만영에게 애착이나 연민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기모진은 모순적인 표정을 지었다. 소만영은 기모진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표
그녀는 열심히 변명을 늘어 놓았지만 기모진의 눈빛은 실망과 의심으로 가득 했다."모진아...”"넌 정말 어렸을 때 내가 알던 아리와 완전히 달라졌어." 기모진은 차갑게 웃었다. "내가 어디까지 생각한 줄 알아? 심지어 내가 어렸을 때 만난 그 애가 아닐 거라는 생각까지 했어.”이 말을 들은 소만영은 더욱 당황했다."그럴 리가! 모진아, 내가 바로 네가 알던 그 아리라고!""아리…."기모진은 소만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팔을 그녀의 손아귀에서 빼냈다."이 일은 내가 알아 볼 테니, 너와는 아무 관련 없어야 할거야."“…….”소만영은 그의 말을 듣고는 당황한 채 제자리에 서서 기모진이 떠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이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결코 기모진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이틀 후 소만리는 퇴원 수속을 마치고 곧장 소만영이 있다는 병실로 갔다.그녀가 문 앞에 도착하자 사화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만영을 위로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 화정의 말투는 모성애가 가득했다. 소만리는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마음 한 켠이 쿡쿡 쑤신 듯 아파왔다.저 추악한 악마를 지키고 계시다니….소만리는 갑자기 사화정이 일이 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자 잠시 비켜섰다. 그녀는 몸을 돌려서는 복도 모퉁이에 서서 사화정이 멀찍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소만리는 그제서야 천천히 소만영의 병실로 들어갔다.소만영은 사화정이 다시 돌아온 줄 알고 고개를 들자 소만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이 그 순간 일그러졌다."천미랍!""그래. 나야.” 소만리는 무심코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왜..? 혼자에요? 전 모진씨가 여기 같이 있을 줄 알고 일부러 찾아왔는데.”“…….”소만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천미랍씨. 말조심하세요. 당신이 이렇게 모진이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이 방금 한 말은 또
소만리는 보조개가 핀 얼굴로 기모진을 바라보았고, 그녀가 한 말을 들은 소만영은 열이 올라 이마에 있던 핏줄들이 모두 터져버렸다."천미랍. 나와 모진이의 관계를 건드리려고 하지마. 모진이가 너에게 그런 말을 절대 하지 않을 걸.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나야. 그런데 어떻게 너와 결혼할 수 있겠어?"소만영은 흥분한 채로 침대에서 내려와 기모진 앞으로 달려간 뒤 눈물을 흘렸다."모진아.. 이 여자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야. 그렇지?""다 진짜야." 기모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고, 소만영을 어이없게 만들었다.소만리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모진아.. 이번에 날 구해준 덕분에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어. 정말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혹시 시간 있어?""시간 있어."소만리를 바라보는 그가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이제 완전히 다 나은 거야?""응! 난 괜찮아." 소만리는 빙그레 웃으며 소만영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이번 일로 위험에 처했었지. 정말 만영씨 덕분에 모진이가 저를 정말 많이 아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네요.”소만영의 얼굴빛이 변했다. 기모진이 갑자기 눈썹을 치켜 올리자 그녀는 황급히 울면서 화제를 돌렸다."왜? 왜 다들 이렇게 날 해치려고 하는 거야?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정말 내가 죽어야만 만족할 거야?"그녀는 울면서 호소하더니 손을 뻗어 소만리를 힘껏 밀어내고 병실 밖으로 뛰어나갔다.소만리가 휘청하는 것을 보고 기모진은 과감하게 팔을 내밀어 허리를 감싸 안았다.소만리가 무심코 기모진의 품에 안기자 그의 몸에서 나는 시원한 향기가 코끝을 맴돌며 그녀의 심장박동과 호흡을 어지럽혔다.그녀는 재빨리 기모진의 품에서 나와 바로 선 후 소만영이 달려간 방향을 바라보았다."쫓아가지 않으세요? 만약 그녀가 지난번처럼 건물에서 뛰어내린다면…….”소만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모진은 낮은 목소리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만약 그녀가 정말 죽고 싶었다면 지난 번에 건
소만리는 기모진의 깊고 가늠하기 어려운 눈동자를 응시하며,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낸 후 당당하게 차에서 내렸다.그녀의 등뒤로 기모진의 시선을 느낀 소만리는 거침없이 미소를 지었다.‘기모진.. 이제서야 소만영의 추악한 정체를 보기 시작하다니.그런데 어쩌지.. 안타깝게도 이미 늦어버린 걸.여태껏 내 몸과 마음이 받은 상처들이 아직 다 아물지도 않았어.. 지금의 천미랍을 통해 네 마음속의 죄책감을 달래려고 하지 마. 지금의 난 그저 너를 한 걸음 한 걸음 나락으로 빠뜨려 줄 뿐이니까.’......기모진은 소만리의 뒷모습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다 보고 나서야 핸들을 돌렸다.그는 또 88송이의 붉은 장미를 사서 묘지로 갔다.소만리의 묘비를 향해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마음 속으로 삼키는 그였다.한참이 지나서 그가 중얼거렸다."기회가 되면 내가 그녀를 데리고 널 만나러 올게 만리야. 넌 아마 깜짝 놀랄 거야. 이 세상에 정말 너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 테니까.."그는 묘비에 적힌 이름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초가을의 따스한 햇빛이 쏟아졌지만, 그의 마음 속에 드리워진 뿌연 안개를 걷어내진 못했다. 집으로 돌아간 후 기모진은 천미랍이 납치된 사건에 대한 조사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보고받았다.그 네 명의 양아치들은 모두 빠짐없이 소만영을 이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했다.그들은 번갈아 가면서 소만영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소만영이 그것을 원했다고 자백했다.기모진은 이 진술을 듣고 다시 한 번 거부감과 메스꺼움을 느꼈다.그녀가 이렇게 당하기를 분명히 원했다고?그는 이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도, 믿을 수 조차도 없었다.소만영은 그의 인생에서 그를 설레게 한 첫 번째 여자이자, 10여 년 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품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이제 하나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그 모든 일들이 소만영의 악랄한 성격을 드러냈기에 그는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더욱 더 이 사
화장실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와 진지하게 소만영을 옹호했다.기모진의 눈빛에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스쳐 지나갔다.“어머니께서 만영이를 여기에서 지내라고 하셨다구요?""만영이가 여기 와서 사는 게 어때서? 원래 너의 약혼녀지 않느냐? 란군이까지 더해 너희는 이미 한 집안 사람이야. 이왕 한 집안 사람이 된 바에는 같이 사는 거지!"기씨 부인의 말은 확고하여 기모진의 표정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오히려 더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만영이가 이번에 이런 일을 당했으면, 너는 약혼자로서 이 아이를 위로하고 토닥여 줄 책임이 있잖니! 하루 종일 그 여우 같은 년과 히히덕 댈 것이 아니라!"기씨 부인은 소만영의 어깨를 다정하게 톡톡 두드리더니 정색을 하면서 기모진을 바라보았다."모진아. 이 어미는 네가 줄곧 자신의 주관이 또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반드시 내 말을 좀 들어야겠다. 당장 그 천미랍과 연락을 끊길 바란다. 그 계집애는 딱 봐도 좋은 애가 아니야. 만영이가 이번에 당한 일은 그년이랑 관계가 없을 수가 없어!""사진은 네가 뗐어?"갑자기 기모진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소만영과 기씨 부인은 동시에 멍해졌다. 기씨 부인은 겁 없이 입을 열었다."내가 떼라고 한 거다. 그 천한 것이 죽은 지 얼마나 되었는데, 아직도 사진을 가지고 뭐 하는 거야? 나는 보기만해도 치가 떨린다! 앞으로 사진을 걸려면 너와 만영이의 웨딩 사진을 걸어라!"기씨 부인은 팔짱을 꼈는데, 온몸으로 냉기가 느껴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이방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내가 치우라고 했다. 그 천한 년과 관련된 물건들만 골라 다 갖다 버리라고 했으니까 그리 알아라!"말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기모진은 몸을 휙 돌려 옷장 앞으로 다가갔다.그가 옷장 문을 열자 소만리가 생전에 입었던 옷들은 남김 없이 정리되었고 대신에 소만영의 비싼 치마들이 잔뜩 걸려있었다.옷장 손잡이를 잡고 있던 그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그의 하얀
기모진은 천미랍을 데리고 사월산까지 차를 몰았다.저녁 안개가 짙은 가을 황혼에,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것은 추억의 맛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녹나무는 그 때 그 시절처럼 여전했지만, 사람의 얼굴만 달라졌을 뿐이다.지난 번 기모진이 소만영을 여기에 데려온 것을 목격한 후로 소만리는 이곳을 싫어했다.그녀는 소만영이 기모진에게 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소만영과 기모진이 어렸을 때 만났던 일은, 마치 기모진을 처음 만났던 자신의 경험과 매우 흡사했다. 이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소만영이 날 가지고 노는 것일까?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고개를 돌리자, 기모진이 와인 한 병의 마개를 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 때문에 갑자기 기분이 안 좋은 거죠?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기분 전환을 하다니, 여기 뭐 특별한 게 있나요?"소만리는 그에게 다가가 의문스러운 듯 묻기 시작했다."설마 여기.. 소만영씨와의 추억이 깃든 곳인가요?"‘퐁’소만리의 질문이 끝나자 마개가 열렸다.소만리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는 기모진의 섹시한 입가가 꿈틀댔다. 그의 엷은 웃음은 황혼의 주황색 노을에 비쳐 요염하고 매혹적으로 보였다."만약, 당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버린다면, 기분이 좋을까?""가장 중요한 것이요?"소만리는 기모진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그게 뭔데요?"그녀는 따져 물었지만 기모진은 신비로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차에서 와인 잔 두 개를 꺼내 술을 따르고 한 잔을 소만리의 앞으로 건네 주었다."같이 술 마셔줘."그의 낮은 목소리와 말투는 다소 위압적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사람을 애매하게 만들었다.소만리는 술잔을 받아 시원하게 마셨다.예전에는 절대 하지 못하던 것들을, 지금의 천미랍은 거의 다 할 줄 알게 되었다.술을 마시는 것은 더욱이 말할 것도 없이….기모진은 소만리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었다. 그녀 뒤의 저녁노을은 매우 아름다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