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풍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가사도우미가 방금 만든 따끈한 도시락을 보온통에 넣고 필요한 물건을 다시 한번 세심하게 점검했다.준비가 거의 다 되었을 때 기여온도 씻고 내려왔다.그로부터 30분 후 강자풍은 기여온을 데리고 유치원으로 향했다.그들이 도착했을 때 유치원 입구에는 이미 많은 학부모와 아이들로 북적거렸고 다들 상기된 얼굴들이었다.강자풍은 기여온을 안고 들었고 사람들 속에서 채수연의 얼굴을 찾았다.“강 선생님.”채수연이 그들을 먼저 알아보고 강자풍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강자풍은 눈을 들었고 채수연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선생님, 오늘 아이들 돌보느라 고생하시네요.”“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뭘.”채수연은 손에 든 종이를 강자풍에게 건네주며 말했다.“봄 소풍 일정과 주의사항이에요. 먼저 한 번 훑어보시고 질문 사항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채수연은 기여온에게 시선을 돌려 미소 지었다.“여온아, 오늘 우리 좋은 추억 많이 만들자.”기여온은 채수연의 말을 듣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자신이 건넨 종이를 주의 깊게 읽고 있는 강자풍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더 이상 조바심 내지 않기로 했다.최근 그녀는 여러 정보들을 찾아보았고 그중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어 보이는 주장도 있었다.남자를 상대하는 데 때론 밀당이 필요한 법이다.밀당도 일종의 테크닉인 것이다.어쩌면 그동안 자신이 너무 열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강자풍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을 수 있다.그러니 이제는 조금 더 무신경한 듯 대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잠시 후 각 학급의 보호자들은 모두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전용 버스에 올라탔다.강자풍도 기여온을 데리고 버스에 올랐고 채수연은 강자풍과 기여온이 타는 버스를 힐끔 보고 그들과 같은 버스에 올랐다.차는 곧 시동을 걸었고 천천히 안정적으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버스 안의 분위기를 적절히 띄우는 것도 담임으로서 채수연
채수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동료에게 시선을 돌렸다.동료는 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강자풍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수연 씨. 강 선생님이 수연 씨 남자친구 아니었어요? 왜 계속 다른 여자랑 즐겁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설마 또 싸웠어요?”동료가 궁금한 듯 물었다.이전에 동료가 자신과 강자풍이 연인 사이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부인도 부정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동료는 강자풍이 채수연과 연인 사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그러나 채수연은 지금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인하는 쪽을 택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일단 일부터 하고 나중에 얘기해요.”채수연이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떠났다.동료는 더 이상 묻기가 민망해져서 자신도 업무로 돌아갔다.채수연은 일하러 간다고 그 자리를 떠났지만 신경은 온통 강자풍에게 쏠려 있었다.강자풍이 방금 그 젊은 엄마와 웃고 떠드는 것을 보고 채수연은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일부러 그런 건가?채수연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눈을 치켜떴다.그 젊은 엄마는 이혼녀였다. 싱글이란 뜻이다.설마 강자풍이 마음속으로 짝사랑하는 사람이 저 여자?이런 생각이 들자 채수연의 마음은 더욱더 복잡해졌다.생각하면 할수록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쉽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려다줄 때 이 젊은 엄마랑 알게 되어 둘 사이에 감정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채수연이 엉뚱한 생각에 온 신경을 쓰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옷자락을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눈을 들어 보았다.뜻밖에도 기여온이 가까이 와 있었다.채수연은 무의식적으로 방금 강자풍이 있던 쪽을 바라보았지만 강자풍은 그 자리에 없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기여온 앞에 쪼그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여온아, 무슨 일이야? 자풍 오빠는 어디 갔어? 왜 혼자 왔어?”기여온은 맑고 큰 눈을 깜빡이며 손에 들고 있던 티라미수
순간 채수연은 손에 들고 있던 티라미수 케이크에서 달콤한 향기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돌아섰고 다른 학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간식을 건네주자 미소를 지으며 고맙게 받아들였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음식들을 먹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설령 산해진미를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고 해도 지금 그녀에게는 오직 강자풍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채수연은 언짢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보니 강자풍은 보이지 않았고 눈앞에 그 젊은 엄마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젊은 엄마는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채수연에게 다가와 세련된 얼굴에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채 선생님, 평소 우리 아이 잘 돌봐주셔서 고마워요. 이건 제가 직접 만든 쿠키예요. 한번 드셔 보세요.”채수연은 여자가 건네준 쿠키를 받았는데 가지런하고 정갈하게 포장된 쿠키가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어 보였다.채수연은 지금 이걸 맛볼 기분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으며 화답했다.“어머니,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아이를 돌보는 건 제 임무예요. 특별히 이렇게 챙겨주실 필요 없어요. 이 쿠키는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게 좋겠어요. 전 다음 행사 때문에 가 봐야 해서 먼저 실례할게요.”채수연이 말을 마치고 돌아섰고 거절당한 젊은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어린아이는 못내 서운한 눈치였다.선생님이 자신의 엄마가 건넨 선물을 거절했으니 아이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어린아이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맥없이 제자리로 돌아갔고 젊은 엄마의 손에 쿠키 상자가 그대로 들려 있는 것을 본 강자풍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채 선생님이 받지 않으셨어요?”“마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채 선생님이 다 못 드신다고 다른 사람들 나눠주는 게 좋겠다고 하시네요.”젊은 여자는 사실대로 대답했고 서운해하는 아들을 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아유, 섭섭했어? 기분 나쁘게 생각할 필요 없어.
”강 선생님.”채수연이 강자풍의 발걸음을 성큼성큼 따라가며 용기를 내었다.“강 선생님 혹시 제가 싫으신 건 아니죠?”채수연의 질문에 강자풍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고 도리어 기여온은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채수연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어린아이인 기여온이 무슨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겠는가.기여온은 채수연을 바라보았던 시선을 거두어 계속해서 산길을 오르는데 여념이 없었다.이때 강자풍이 채수연에게 말했다.“채 선생님, 왜 그렇게 물어보시는 거예요?”강자풍이 마침내 자신을 상대하는 것을 보고 채수연은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다소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별다른 건 아니고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어서 강 선생님이 말씀이 없으신가 했어요.”“채 선생님은 생각이 많으신 게 틀림없어요. 선생님은 우리 여온이 담임이시고 난 선생님으로 존중할 뿐이에요. 어떻게 제가 싫어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어요?”강자풍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원시원하게 대답하자 채수연은 갑자기 맥이 풀렸다.선생님으로 존중할 뿐이라고?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고 이어서 강자풍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리고 여온이가 선생님을 많이 좋아해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 특별히 티라미수 케이크를 준비해서 선생님께 드린 거예요. 혹시 못 보셨나요? 케이크 상자 안에 여온이가 직접 쓴 카드가 있을 텐데.”“...”채수연의 발걸음이 갑자기 뚝 멈췄다.알고 보니 티라미수 케이크는 강자풍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오로지 기여온의 마음뿐이었던 것이다.처음부터 끝까지 채수연 자신만의 착각일 뿐이었다.채수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감에 휩싸였고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졌다.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강자풍은 이미 기여온과 함께 그녀를 앞장서 가고 있었다.거의 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 사람들은 정자 근처에 앉아서 쉬면서 음식도 먹고 물도 마시면서 체력을 보충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이 젊은 엄마와 나란히 앉아 서로의 아이를 살뜰히
”맞아요. 강 선생님, 커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이런 식으로 상대를 힘들게 하면 안 되죠. 채 선생님은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집안 형편도 좋고 무엇보다 채 선생님이 강 선생님을 엄청 잘 챙겨주잖아요.”“그날 강 선생님이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갔을 때도 채 선생님이 다급하게 CCTV 화면을 복사해 달라고 부탁해서 부리나케 뛰어간 거예요. 그렇게 해서 강 선생님은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지만 채 선생님은 돌아와서 원장 선생님한테 꾸중 들었어요. 채 선생님이 얼마나 강 선생님을 많이 생각하는지 아셔야 해요.”“강 선생님, 우리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에요. 이렇게 좋은 여자를 힘들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강자풍은 두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지만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강자풍이 표정을 가다듬고 뭐라고 설명하려고 했을 때 채수연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김 선생님, 이 선생님. 지금 강 선생님이랑 무슨 얘기하신 거예요?”두 선생님은 채수연이 긴장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역시나 강자풍과 채수연이 싸운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 채 선생님. 그냥 강 선생님이랑 얘기 좀 나눴어요. 그럼 우리 먼저 돌아갈게요. 커플끼리는 많은 말이 필요 없잖아요. 한 마디면 다 풀릴 일이에요. 너무 따지지 말구요.”“...”채수연이 채 묻기도 전에 두 선생님은 발길을 돌렸다.하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말을 듣고 채수연은 지금 무슨 상황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채수연은 동료들이 강자풍을 따로 불러내 태평양처럼 넓은 오지랖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지금 채수연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어색하고 민망해서 미칠 것 같았다.“죄, 죄송합니다.”채수연이 얼른 강자풍에게 사과했다.“선생님들이 저와 강 선생님 사이를 오해했나 봐요.”강자풍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를 하든 말든 저한테는 중요하지 않아요. 제 임무는 여온이
강자풍의 목소리에 기여온은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기여온의 표정에 나타난 미세한 변화를 강자풍은 한눈에 감지했다.기여온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여온아, 어디가 아픈지 오빠한테 말해 줄 수 있겠어?”강자풍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고 발걸음도 눈에 띄게 빨라졌다.기여온은 작은 손을 들어 명치 위에 놓았다.강자풍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품에 안은 기여온을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채수연은 그리 멀지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강자풍과 기여온의 뒷모습을 보며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방금 강자풍과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쓸쓸한 마음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고 마음 한켠에는 그를 향한 원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자신이 뭐가 부족한 것인지 스스로를 뒤돌아보았다.모든 면에서 어디 내놔도 떨어지지 않는 그녀였다.그런데 이 남자에게서는 조금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도대체 자신의 어디가 못나서 이렇게 된 건지 그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그녀는 강자풍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은 그 여자가 누군지 궁금했다.심란한 마음을 안고 생각에 빠져 있던 채수연의 눈에 갑자기 강자풍의 뒷모습이 들어왔다.그는 그 산길을 뛰다시피 하며 내려가고 있었다.그렇게 험한 산은 아니지만 그래도 산길은 산길이었다.게다가 지금 강자풍은 기여온을 안고 달리고 있었다.채수연이 황급히 뒤쫓아갔다.“강 선생님, 강 선생님!”그녀가 소리치며 쫓아오자 옆에 있던 다른 학부모와 아이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들리는 채수연의 목소리가 강자풍에게는 들리지 않는지 강자풍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강 선생님!”채수연이 더욱 발걸음을 재촉하며 뒤쫓아갔다.너무 급하게 달려서 였을까.그녀는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아얏!”채수연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
강자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기모진과 소만리에게 기여온을 잘 돌보겠다고 약속한 것에 대한 안도이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존재 자체로서 소중한 기여온에 대한 안도이기도 했다.이 아이의 건강과 안정은 그에게 무엇보다 더 중요했다.기여온이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안정을 되찾은 뒤 강자풍은 기여온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집에 돌아온 그는 가사도우미에게 영양가 있는 간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는 기여온을 안고 침실로 돌아갔다.기여온은 피곤한 듯 맑고 큰 눈을 거불거리며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여온아, 졸리면 자. 자고 일어나면 오빠가 맛있는 거 줄게.”강자풍의 눈에는 기여온을 향한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기여온은 강자풍이 한 말을 들은 듯 큰 눈을 껌뻑이며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기여온이 편안하게 잠이 드는 모습을 본 강자풍도 마치 안식처를 찾은 듯 마음이 고요해졌다.그가 원하는 것도 이런 평온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귀염둥이, 마음 편하게 좀 자. 오빠는 영원히 여온이랑 함께 할 거야.”강자풍은 마음속으로 다짐하듯 되뇌이며 침대 한쪽 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핸드폰을 꺼내 이것저것 뒤적이던 강자풍은 그제야 받지 못했던 부재중 전화를 살펴보았다.대부분 채수연에게서 온 전화였고 그가 본 적 없는 낯선 번호로 온 전화도 몇 개 있었다.하지만 이토록 많은 전화가 온 것을 강자풍은 그동안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했다.알고 보니 핸드폰이 무음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그는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채수연에게 기여온을 데리고 병원에 갔던 일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아까 기여온이 그의 품에 안겨 숨을 가늘게 쉴 때는 오직 기여온의 건강만 염려되어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강자풍은 채수연에게 전화를 하려고 핸드폰을 들었다.그때 마침 채수연에게서 전화가 왔다.“강 선생님!”다급하고 초조한 듯한 채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선생님, 드디어 받으셨네요.”“죄송해요, 채 선생님. 선생님한테 말씀드린다는
강자풍은 동료 선생님의 지적에 약간 억울해하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강자풍은 동료 선생님과 언쟁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오히려 기여온은 매우 궁금한 듯 큰 눈을 깜빡이며 강자풍을 바라보았다.기여온의 작은 머릿속에 남자친구라는 단어에 대해 깊은 궁금증은 생긴 적은 처음이었다.유치원이 마치는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강자풍은 기여온을 데리러 왔다.이번에는 아침에 만났던 그 선생님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왔는데 역시나 언짢은 듯한 표정이 가득했다.“강 선생님, 정말 한가하시네요. 아직도 자기 여자친구한테 찾아가 보지 않다니. 아이한테는 이렇게 지극정성이면서 왜 여자친구한테는 이렇게 소홀한 거예요? 채 선생님은 강 선생님 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거라구요.”동료 선생님은 또 한 번 강자풍에게 ‘훈계’를 했다.강자풍은 적잖이 곤혹스러웠다.채수연이 자기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다니!그는 더 묻지 않았다.굳이 채수연과의 관계를 바로잡아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하면서 그녀의 체면을 깎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동료 선생님은 강자풍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빴지만 더 이상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강자풍은 기여온을 데리고 차에 올랐고 뒷좌석에 앉아 있는 기여온을 돌아보며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우리 지금 병원에 잠깐 들렀다 가자.”기여온은 수정 같은 맑은 눈망울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마치 병원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혹시 아직도 자신의 몸이 좋지 않은 걸까?강자풍은 기여온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한눈에 알아보고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여온이 담임 선생님 보러 가는 거야.”그제야 의혹이 풀린 듯 기여온은 작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좌석에 놓여 있는 안개꽃 다발을 바라보았다.안개꽃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기여온은 잠자코 창밖에 시선을 돌리며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