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곽의 폐공장.창밖은 이미 희뿌연 어둠으로 뒤덮였고 석양은 꼬리를 감춘 채 내일로 멀어져 갔다.소만리는 옆에 있던 예선을 쳐다보았다.예선은 매우 초췌해 보였다.“예선아.”소만리가 예선을 불렀다.“예선아, 배 안 고파?”예선은 힘겹게 눈꺼풀을 움직이며 매우 지친 듯 소만리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소만리, 나 너무 배고프고 졸려. 그 남자 우리한테 줄 먹을거리 사러 간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그놈은 아마 어디선가 딴짓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소만리가 짐작했다.“소만리, 정말 그 남자랑 거래를 할 거야? 너 그 남자 믿어?”예선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유, 난 소만영 같은 여자가 세상에서 제일 미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한 사람도 다 있어. 세상 참.”소만리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양심을 파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어. 하지만 난 그런 사람들 결국은 다 응당한 벌을 받을 거라고 믿어.”예선은 입꼬리를 구부리며 웃었다.“그런 인과응보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하느님이 빨리 와서 영내문을 막 혼내줬으면 좋겠어. 그런 여자는 천벌을 받아야 해.”“흥.”예선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입구에서 경멸하는 듯한 콧방귀 소리가 들렸다.소만리와 예선이 누군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여자의 거만하고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쩌죠? 당신이 실망할 것 같아서 말이에요. 왜냐하면 당신이 바라는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거든요.”예선은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뜨더니 고개를 들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소만리와 예선은 영내문이 거들먹거리며 의기양양하게 입구에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폐공장이라 공장 안은 매우 어두웠다.영내문은 마치 온몸에 음침한 기운을 휘감은 마녀 같았다.그녀는 밧줄로 묶인 채 폐공장에 갇혀 있는 예선을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영내문.”예선은 영내문을 바라보며 눈을 번쩍이고는 곁눈질로 소만리와 눈
”어유, 어쩌나. 두 사람의 두터운 우정, 눈물 나서 못 보겠네. 내가 다 마음이 아프네요.”영내문이 비아냥거렸다.“하지만 안심하세요. 그럴 줄 알고 당신 혼자 길을 떠나게 하지 않을 테니까요.”예선은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어 움직여 보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도무지 일어설 수가 없었다.“영내문, 당신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나와 당신 사이에 도대체 무슨 원한이 그렇게 깊은 거예요?”영내문은 예선이 한 말이 가소로운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예선, 당신 지금 나랑 무슨 원한이 이렇게 깊냐고 물었어요? 이것 참.”영내문은 갑자기 매서운 눈빛으로 발을 들어 예선의 어깨를 힘껏 걷어찼다.예선은 거의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영내문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예선은 고통스럽게 신음 소리를 내며 소만리 옆으로 나동그라졌다.“예선아! 예선아!”소만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예선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를 일으켜 세울 방법이 없었다.이런 모습을 보니 영내문은 더없이 통쾌했다.“예선, 이제 슬슬 겁이 나요?”영내문이 일어서며 물었고 예선 앞에 가서 쪼그리고 앉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예선의 멱살을 움켜쥐었다.그녀의 눈은 마치 사나운 맹수처럼 예선을 집어삼키려고 했다.“왜 내 남자를 빼앗았어요? 내가 군연 오빠를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지 알기나 해요? 당신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와 군연 오빠는 아무 일 없이 순조롭게 결혼했을 거라구요.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많은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라구요!”“영내문, 사람의 감정은 강요할 수 없는 거예요. 왜 소군연 선배가 당연히 당신과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소만리가 예선을 대신해 화를 내었다.“얼른 그 손부터 놔요!”“소만리, 입 닥쳐요!”영내문은 고개를 돌려 매섭게 소만리를 노려보았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예전에 기모진은 당신한테 관심도 없었고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당신이 끈질기게 매달리니까
영내문은 마치 사탄의 악마처럼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소만리와 예선은 마주 보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예선아, 너 괜찮아?”예선은 입꼬리를 구부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소만리, 걱정하지 마. 나 아직 버틸 수 있어.”이 말을 들은 영내문은 웃음을 뚝 멈추더니 순간적으로 야수같이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버텨? 뭘 어떻게 버틸 건데요?”예선은 이런 사악한 여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내가 지금은 갇혀 있지만 날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난 알아요. 영내문, 당신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에요.”“아직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정말 웃기는군요.”영내문은 냉소적으로 비꼬며 라이터를 켰다.라이터의 불꽃은 작았지만 만약 영내문이 정말로 그들을 불태울 마음이 있다면 폐공장 전체를 태우기에 충분했다.“예선, 이전에 두 번이나 운명을 피해 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안 될 거예요. 다시는 눈앞에서 당신이 살아날 기회를 주지 않을 거거든요.”영내문은 갑자기 이전의 일을 꺼냈다.소만리는 이전의 일을 떠올리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내문을 노려보았다.“영내문, 당신 소군연 선배의 집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를 고의로 저질렀다고 인정하는 거예요? 그 차를 운전한 사람이 예선인 줄 알고 일부러 부딪힌 거 맞죠? 일부러 예선을 차에 치어 죽이려고 한 거 맞죠?”영내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큰둥한 눈으로 소만리를 힐끗 쳐다보았다.“네, 그래요. 내가 일부러 부딪혔어요. 왜냐하면 그 차를 운전하고 있던 사람이 저 천한 여자인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속도를 내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저 여자를 죽이려고 했어요!”“하지만 생각지도 못했어요. 예선, 당신은 정말 억세게 운 좋은 여자예요. 매번 누군가가 당신을 대신해 재난을 막아주니 말이에요.”영내문은 갑자기 질투심이 가득 끓어오르는지 라이터를 끄고 화난 얼굴로 손을 뻗
”소만리, 당신도 이 천한 여자만큼 싫어!”영내문은 흉악한 얼굴을 보고도 소만리는 오히려 차분하게 미소를 지었다.“그래, 싫어? 난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왜 날 싫어하지?”“감히 나한테 그걸 물어?”영내문은 소만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솟구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감히 날 함정에 빠뜨리려 하다니. 하마터면 감옥에 갈 뻔했잖아!”“어? 내가 언제 그랬어?”소만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영내문, 뭐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내가 뭘 틀려? 난 절대 틀리지 않았어.”영내문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때 당신과 당신 남편 기모진이 이 천한 여자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일부러 날 끌어들이려고 연기했잖아. 다행히 내가 똑똑해서 상황을 모면하긴 했지만. 설마 잊었어?”화가 치밀어 오른 영내문의 목소리에 소만리는 여전히 침착하게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잊지 않았지. 하지만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상황을 잘 모면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예선이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 소군연 선배가 운전하지 않았더라면 사고를 당한 사람은 예선이 되었겠지. 경찰은 결국 당신의 죄를 묻지 못했어. 그건 당신이 상황을 모면한 게 아니라 돈으로 사람을 사서 당신을 도와준 사람을 배신한 대가로 얻은 것이지. 진짜 차에 손을 댄 사람은 당신이거든.”소만리의 말이 끝나자 영내문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했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영내문은 천천히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그녀의 눈빛마저 서늘한 한기가 감돌았다.“소만리, 당신은 정말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군.”영내문의 말은 얼핏 소만리를 칭찬하는 듯 보였다.소만리와 예선은 영내문이 스스로 인정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맞아, 내가 그랬어. 내가 예선의 차에 손을 댔지!”영내문은 마침내 자신의 입으로 인정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죄의식을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득의만만한 기세만이 가득했다.
”앗!”영내문이 쓰라린 비명을 질렀다.그녀의 손에서 라이터가 떨어졌다.그녀는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고 피가 줄줄 흐르는 자신의 손을 보며 비참한 표정을 지었고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아직 눈앞에 어떤 상황이 펼쳐졌는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그러나 곧이어 그녀의 눈에 경찰들이 총을 겨누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들어왔다.더욱 놀라운 것은 그 안에 기모진도 함께 있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기모진이 향한 곳은 영내문이 아니었다.그녀는 원망이 가득 서린 눈빛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는 얼른 소만리 곁으로 가서 그녀를 묶어 놓았던 밧줄을 풀어 주었다.소만리는 밧줄이 풀리자 얼른 몸을 돌려 예선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예선은 이미 기력이 다해서 쓰러져 있었다.“예선아! 예선아!”소만리는 예선을 애타게 불렀다.“예선!”갑자기 소군연이 황급히 모습을 드러내었고 정신을 잃은 예선을 덥석 안아 올렸다.“군연 오빠...”헐레벌떡 달려온 소군연이 예선을 껴안으면서 옆에 있는 자신은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영내문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손바닥이 아파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소군연이 예선을 안고 홀연히 떠나는 뒷모습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다.“영내문, 당신은 두 건의 심각한 형사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어요.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은 법정에서 증거로 쓰일 수 있습니다.”“...”경찰의 말을 들은 영내문은 갑자기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전에 없던 서늘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었다.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방금 자신이 의기양양하게 내뱉은 말들을 생각하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하하, 하하하하...”영내문은 웃다가 갑자기 이를 악물며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알고 보니 이게 또 함정이었군... 소만리, 또 당신이야?”영내문은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소만리를 노려보았다.“내가 이런 방법을 생
경찰은 영내문이 여러 심각한 형사 사건에 연루되어 있고 영내문의 차에 치여 사망한 가족이 영내문을 고소했기 때문에 특히 이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영내문은 곧 검찰에 기소되었다.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궁지에 몰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여러 가지 죄목들이 성립된 가장 큰 이유는 그녀 스스로 직접 털어놓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영내문은 여전히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다.“판사님, 제가 당시에 한 말은 모두 지어낸 거예요. 전 정말 예선의 차에 손대지 않았어요. 고의로 사람을 치지도 않았구요. 더군다나 예선과 소만리를 납치하지도 않았어요. 전 단지, 단지...”“마지막 한 수를 잘못 두는 바람에 당신은 지금까지의 모든 죄를 털어놓게 되었죠. 결국 당신의 완패예요.”소만리의 목소리가 증인석에서 들려왔다.그녀는 계속된 궤변을 늘어놓은 영내문을 보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영내문, 더 이상 변명하려 하지 마세요. 당신의 그 어떤 변명도 사실을 뒷받침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의 모든 범죄에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요.”“뭐?”영내문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증거? 그 증거가 도대체 어디 있어요?”“당신이 직접 인정했다는 것보다 더 강력하고 믿을 만한 증거는 없어요.”소만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영내문, 궁금하죠? 어떻게 경찰이 폐공장에 미리 잠복해 있었는지?”영내문은 영문을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뭐? 경찰이 잠복했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영내문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당신도 사람을 돈으로 매수했잖아요.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매수했죠.”“뭐라고요?”영내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소만리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난 그 건달과 거래했어요. 당신이 얼마를 주면 난 그에게 그 두 배를 주겠다고 했죠. 나중에 그 건달이 당신한테 한 말은 모두 내가 시킨 거예요. 난 그 건달에게 아직 예선을 어떻게 처리할지 준비가 되어
영내문은 거의 고함에 가까운 소리로 미친 듯이 소리치며 포효했다.이 광경을 보고 있던 영내문의 부친은 초조하고 불안해서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영내문은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그녀의 앞날은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그러나 예선은 미친 듯이 날뛰는 영내문을 그저 담담하게 바라볼 뿐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오히려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지금까지 정말 파란만장했던 그 모든 일들이 끝났다.지금 예선은 너무나 홀가분하고 후련했다.자신을 병적으로 괴롭히던 영내문이 결국엔 자신이 저지른 일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영내문은 유죄를 인정한 후 죄명이 확정되었다.여러 가지 죄명이 더해졌지만 영내문은 단호하게 항소의 뜻을 밝혔다.예선은 그런 영내문의 모습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판결이 끝나자 소만리와 함께 법정을 떠났다.입구를 나서자 화창한 햇살이 사방으로 부서졌다.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그동안의 서늘했던 기운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예선은 편안하게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오늘 햇살은 어떤 날보다도 더 포근한 것 같아. 소만리, 우리 봄기운이나 마음껏 만끽해 볼래?”소만리도 흔쾌히 승낙했고 예선의 팔짱을 끼고 진심으로 홀가분한 웃음을 지으며 떠났다.소군연 집안에도 영내문이 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소군연의 모친은 놀라지 않았을 수 없었다.영내문이 형을 선고받았다는 말에 왠지 섬뜩하기도 하고 후한이 두렵기도 했다.영내문이 그렇게 악랄한 사람이었다니.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영내문은 항상 사근사근한 아가씨였다. 소군연의 모친한테는 항상 순둥이처럼 고분고분했다.그런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짓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소군연의 모친은 생각하면 할수록 소름이 끼치고 두려웠다.그녀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평소에는 그리 순한
”군연아, 군연아.”소군연의 모친이 막아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아버님, 보셨죠? 군연이가 기억을 잃었는데도 그 예선이라는 여자한테 저렇게 온 신경이 쏠려 있으니 원. 군연이 그 여자를 못 내려놓는 게 확실해요. 영내문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라면 우리도 더는 군연이를 영내문한테 떠밀지는 못하겠어요. 그래서 말인데 아버님, 예선이라는 여자 우리 집안에 들이는 거 허락하실 건가요?”“흥!”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어림도 없지. 그동안에도 들이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들일 생각하지 마. 사실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 여자랑 연관이 있는 거야.”“하긴.”소군연의 모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만약 예선이 없었다면 군연이는 이미 내문이랑 결혼했을 것이고 그 이후의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사실 영내문도 어찌 보면 자꾸 예선이 그 여자가 치고 올라오니까 그런 끔찍한 짓을 하게 된 거예요.”“어쨌든 그 예 씨 성을 가진 사람은 우리 집에 들어올 수 없어. 그 여자만 없으면 우리 집안에 분란이 일어날 일이 없어.”소군연의 할아버지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소군연의 모친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마음속으로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영 씨 집안과의 혼담도 깨진 마당에 예 씨 쪽과도 희망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영내문이 투옥된 이후 영내문의 모친은 하루 종일 영 씨 그룹의 변호인단과 만나 차후의 일을 논의했고 좀 더 강한 변호사가 없나 수소문해 영내문의 항소에 힘을 쏟았다.그러나 결국 영내문의 항소는 기각되었다.영내문의 재판에는 너무나 많은 죄목이 걸려 있었고 모든 것에는 증거가 확실해서 항소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영내문의 모친은 기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그녀에게 영내문은 오직 하나뿐인 금지옥엽 딸이었다.어릴 때부터 영내문을 품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었고 금이야 옥이야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