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선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려 했다.그러나 강하고 힘찬 팔이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예선은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애썼지만 그 사람은 그녀를 더욱 세게 움켜쥐며 한쪽 옆으로 그녀를 끌고 갔다.예선은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그때 곁눈으로 무언가가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타당.”귀에 거슬리는 파열음이 났다.예선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괜찮아요?”낯익은 목소리가 예선의 귓가에 정겹게 들려왔다.예선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영민하게 생긴 나익현의 얼굴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사장님?”예선은 몹시 의아해하며 말했다.“나, 난 괜찮아요.”예선은 어리둥절해하며 방금 일어난 일에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그녀는 부서지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1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깨진 화분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방금 위에서 화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익현이 몸을 날려 예선을 잡아당긴 것이었다.예선은 깨진 화분을 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익현을 향했다.“사장님, 고맙습니다.”나익현은 신사답게 예선을 품 안에서 놓으며 깨진 화분을 쳐다보았다.그의 얼굴빛이 어둡게 굳어 있었다.“괜찮으시다니 다행이에요. 도대체 화분이 왜 떨어졌는지 알아봐야겠어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떨어뜨린 거라면 반드시 그 죄를 물어야죠.”나익현이 한 말을 듣고 예선은 의아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화분이란 것은 어쩌다가 부주의하게 떨어지기도 한다.그런데 왜? 누군가가 일부러 떨어뜨릴 수가 있을까?설마 누군가가 일부러 화분을 떨어뜨려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건가?나익현은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예선에게 물었다.“이 시간에 회사 로비에서 뭐하세요?”예선은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나익현과 발걸음을 같이 했다.“제가 담당하던 프로젝트의 설계도면에
”앗!”예선이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자 바탕 화면에 나타난 사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아무리 대범한 예선일지라도 그녀 역시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돌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예선을 더욱 뜨악하게 한 것은 어디선가 소름 끼치게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예선, 당신이 하는 짓을 하늘이 다 보고 있어요. 더 이상 당신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난 매일 밤 이렇게 당신을 힘들게 할 거예요...”예선은 깜짝 놀라 넋이 반쯤 나가긴 했지만 누군가 자신을 겁주기 위해 이런 짓을 꾸몄다는 것을 알고 얼른 감정을 추스르고 핸드폰을 들고 손전등 조명을 켰다.뚫어지게 주변을 살피고 있던 예선의 눈에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나익현의 얼굴이 나타났다.“무슨 일 있어요? 예선 씨, 어디 있어요?”“사장님, 저 여기 있어요.”예선이 당황한 가운데서도 핸드폰 조명을 흔들었다.나익현은 조명을 보고 얼른 예선의 곁으로 달려왔다.그의 잘생긴 미간에 걱정스러운 빛이 감돌았다.“어떻게 된 일이에요? 방금 예선 씨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내가 들어오자 사무실 입구에서 희미하게 사람 그림자가 지나가는 걸 보았어요. 그 사람 누구죠?”서늘한 기운이 예선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누군가가 자신이 사무실에 오는 줄 알고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려 한 것이 틀림없다.“누가 왔는지 모르겠어요. 왜 갑자기 조명이 꺼졌는지도요. 내 컴퓨터와 사무용 데스크톱이 공격당한 것 같아요.”“그런 일이 있었어요?”“죄송합니다, 사장님. 최근 저한테 일이 좀 있었어요. 아마도 누군가가 절 해칠 목적으로 이러는 것 같아요.”“그렇다면 내가 데려다줄게요.”나익현은 갑자기 손을 뻗어 예선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조심스럽게 끌고 밖으로 데리고 갔다.“회사 일은 당분간 다른 동료들에게 맡기는 게 좋겠어요. 지금 예선 씨는 누군가로부터 정체불명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까요. 예선 씨 안
예선과 소만리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추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문 쪽을 경계했다.“딩동.”초인종이 다시 한번 울렸다.소만리는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다가가 문구멍으로 바깥을 살폈다.낯익은 얼굴이 보였다.“나익현?”소만리가 고개를 돌렸다.“나익현이야?”“사장님이?”예선도 의아해했다. 나익현은 방금 돌아가지 않았던가?무슨 일로 다시 돌아왔을까?예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문으로 다가와 바로 문을 열었다.나익현이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소만리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살짝 놀라며 말했다.“소만리 씨도 계셨네요? 예선 씨와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 있으니 사장인 저로서도 안심이네요.”그는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예선에게 건넸다.“아직 아무것도 안 드셨을 것 같아서요. 외출하거나 배달시키는 것도 좀 위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근처 식당에서 뭐 좀 샀어요.”나익현의 세심한 배려에 소만리와 예선은 모두 마음이 따뜻해졌다.“사장님,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막 소만리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어요. 소만리 집에는 식구도 많고 경호원도 있어서 누군가가 절 해치려 해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그거 잘 됐군요. 나도 우리 회사의 훌륭한 인재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아요. 더구나 예선 씨는 다희랑 친한 친구잖아요.”나익현은 미소를 지으며 아주 신사다운 자태로 소만리와 예선이 차에 올라타는 것을 지켜보았고 소만리의 차가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눈에서 보이지 않을 즈음에서야 마음을 놓고 자신도 그 자리를 떠났다.소만리는 무사히 기 씨 본가로 돌아왔고 예선에게 일어난 일을 들은 기모진은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났다.“영내문은 예선이 병원에 올 걸 예상하고 미리 카메라를 준비해 뒀던 거야. 예선이 흥분해서 자신을 자극하면 애처로운 척하며 연기를 한 후 그걸 인터넷에 올릴 심산이었던 거지. 그걸로 네티즌들의 동정을 얻을 생각으로 말이야.”“뒤에 예선이 영내문의 모친을 때리는 장면도 아마 영내문이 찍은 걸 거
비록 놀란 가슴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지만 예선은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녀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을 때 사영인과 예기욱이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그들도 예선의 상황을 모르지 않는 바였기 때문에 더는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았다.조심스러워하는 그들의 모습에 예선은 감동스러운 기운으로 마음이 뭉근해졌다.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내용으로 가득 찬 그들의 메시지를 보며 예선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에 잠겼다.그때 익숙한 전화벨 소리가 울리며 그녀를 다시 현실로 데려왔다.발신자 번호를 본 예선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핸드폰을 쳐다보았다.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화였다.“군연?”예선이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전화기 너머에서 온화한 소군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예선은 순간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모든 고민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군연, 이 시간에 왜 전화한 거예요?”“인터넷에 올라온 거 봤어. 미안하게 생각해. 미안해.”소군연의 말투에는 진심으로 미안함이 가득 묻어났다.“나 때문에 그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 내가 아니었다면 그런 갈등도 없었을 텐데. 괜찮아?”소군연이 미안하다고 할 땐 예선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괜찮냐고 묻는 그의 말에 예선은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러나 그녀는 있을 힘을 다해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자신의 우는 모습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오랜 침묵이 흘렀다.“예선, 듣고 있어? 혹시 당신 울어?”“아니에요. 나, 나 우는 거 아니에요.”예선은 아니라고 부정은 했지만 목소리에는 떨림과 훌쩍거림이 어려 있어서 누가 들어도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울지 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신 혼자 감당하게 하지 않을게. 그리고 영 씨 집안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할 거야. 다시는 당신이 억울함을 당하도록 내버려두
영내문의 모친은 생각하면 할수록 고소한지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영내문은 침대에 앉아 아무 표정도 없었다.마치 무슨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그때 떠들기 좋아하는 네티즌들이 어디서 들었는지 예선이 라이브 방송을 한다는 소식을 물어 날랐다.영내문은 바로 검색에 들어가 예선의 라이브 방송을 찾아냈다.네티즌들은 예선의 라이브 방송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더러운 입을 놀려 댔다.“예선, 뻔뻔스럽게 웬 라이브 방송?”“이 뻔뻔한 여자가 설마 이런 식으로 돈을 벌려는 건 아니겠지?”“난 나가요. 이거 뭐 하자는 거야, 이 여자?”“예선, 양아치 짓 그만해. 어서 나와서 영내문에게 사과나 해!”“정말 뻔뻔스러워! 영내문이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고 유서도 썼다는데, 당신은 아직도 살아 있다니! 정말 사람도 아닌 것 같아!”네티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욕설을 퍼부었다.한 마디 한 마디 예선은 모두 읽었다.예선은 침대에 누워 편안하게 댓글들을 보면서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는커녕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도 방금 샤워를 끝내고 누웠는데 갑자기 소만리의 핸드폰에 예선이 보낸 링크가 와 있었다.소만리는 예선의 라이브 방송을 보고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흥흥. 예선이 드디어 반격을 하는 건가? 난 예선이 계속 화를 참으려는 줄 알았어.”기모진은 소만리의 핸드폰 화면을 보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기모진이 손을 뻗어 소만리를 품에 안자 그녀도 다정하게 기모진의 따뜻한 가슴에 기대며 작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지금까지 적당한 기회를 못 찾았는데 이제야 기회가 찾아온 모양이야.”소만리는 라이브 방송을 핸드폰 화면 전면에 켰다.예선의 라이브 방송이 선명하게 보였다.곧 화면에는 병상 옆에 앉아 조용히 사과를 깎고 있는 영내문의 모친이 보였다.그 옆에는 영내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댓글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악랄한 댓글들과 영내문에게 사과
”어머! 어머! 예선이 이 여자 너무 소름 끼쳐! 영내문의 병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거야? 누가 영내문 연락처 가지고 있는 사람? 얼른 영내문한테 연락 좀 해요!”열성적인 네티즌들은 다급한 목소리로 영내문의 연락처를 찾고 있었다.이들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 갑자기 화면에는 혀를 내두를 만한 장면이 나타났다.영내문이 짜증스럽게 손을 내저으며 사과를 건네주던 자신의 엄마 손을 내쳤고 그 바람에 방금 깎은 사과가 바닥에 떨어졌다.“좀 조용히 해요. 성가시게 굴지 말고. 아휴, 짜증 나!”영내문의 모친은 영내문이 그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비록 딸이 왜 그러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편으론 영내문이 원래도 짜증이 많고 신경질적으로 구는 걸 익히 봐 왔던 터라 그러려니 했다.“우리 딸, 왜 그래? 예선이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는데 뭐가 문제야? 사람들이 죄다 예선이 욕만 하고 있고 입만 열면 모욕을 퍼붓고 있는데 왜? 아직도 기분이 덜 풀렸어?”“내가 화 안 나게 생겼어?”영내문은 퉁명스럽고 사납게 눈알을 부라렸다.“내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해 온 건 군연 오빠가 날 불쌍히 여겨 나를 아껴주며 나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를 하게 만들려고 그랬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냐구? 예선이 여기서 소란을 피울 때 군연 오빠가 어떤 태도를 보였냐구?”영내문은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그녀의 나쁜 본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그녀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사나운 표정을 과감 없이 드러냈다.“어렵게 어렵게 군연 오빠와 결혼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지금 어떻게 됐어? 군연 오빠 반응 봤지? 군연 오빠는 날 신경도 안 쓰고 예선이 그 여자 위로하느라 꽁무니도 안 보인다구.”영내문이 화를 내는 것을 보자 영내문의 모친은 다급하게 다가와 그녀를 달래었다.“엄마는 네가 그때 너무 불쾌해하는 걸 알고 바로 쫓아나갔어. 예선이 무방비 상태로 있을 때 뺨을 한 대 때렸고 사람들 많이 보는 데서
영내문은 거만하게 눈썹을 치켜올렸고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오만함이 가득했다.그녀는 비록 예전에 자신과 전예진의 일로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지금 이 일로 꽤나 체면을 회복했다고 믿었다.지금 어찌 보면 자신이 예선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비록 소군연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예선이 병실에 와서 소란을 피운 것에 대해 자신이 따지고 들면 소군연 쪽에서도 아무 말 없이 무사히 결혼식을 치르려 할 것이다.영내문의 모친은 영내문이 이렇게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이자 자신도 덩달아 교만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내문아, 우리 딸 정말 똑똑해. 사람 마음을 이리도 잘 조종할 줄 안다니까.”영내문의 모친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네티즌들을 한껏 비웃었다.“우리 딸 말이 딱 맞아. 네티즌들은 어쩜 이리도 쉽게 속는다니? 우리가 매수한 댓글 부대까지 합해서 이 기세로 쭉 나간다면 예선은 절대 이 판세를 뒤집지 못할 거야.”“흥! 그러게 누가 나한테 맞서래? 뭘 좀 알고 덤벼야지.”영내문은 의기양양하게 병상에서 내려왔다.인터넷에 떠도는 동영상에서 보이던 연약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이 모든 것이 자신은 동정심을 얻고 예선에게는 누명을 씌우기 위한 계략이었던 것이다.영내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과 모친의 일거수일투족이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더욱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서랍에 숨겨둔 담배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아주 능숙한 손놀림으로 피우기 시작했다.영내문의 모친은 이런 딸의 모습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분명 영내문이 담배를 피우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담배 피우는 것이 죄악은 아니었다.다만 온화하고 고귀한 척하는 영내문의 외향과 달리 너무나도 능숙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그녀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뜨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영내문은 담배를 피우며 창가로 가더니 갑자기 냉소를 터뜨렸다.“예선이 그 여자 엄마가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뭘 어쩔 거야? 아무리 돈
”카메라?”영내문의 모친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이거 네가 지난번에 설치해 둔 거 아니었어?”“내가 한 거 아니야! 내가 한 건 이미 뗐어!”영내문은 펄쩍펄쩍 뛰었고 카메라에 실행 중인 붉은 점을 보고 있자니 온몸이 다 타들어갈 지경이었다.“누가 이 카메라 여기 둔 거야? 누구야!”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물었고 애써 진정하며 곰곰이 과거를 되돌아보았다.“예선, 그래. 예선이 그 여자야! 그 여자라구! 그 여자 말고는 아무도 병실에 오지 않았잖아! 이 미친 여자가! 지금 우리 대화도 녹음되고 있는 걸 거야. 인터넷에 올리려고 이런 짓을 꾸민 거야!”“뭐라고!”영내문의 모친은 깜짝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내문아, 정말 예선이 그 여자가 맞아? 그 여자가 이렇게 똑똑하다고?”“퍽!”영내문은 카메라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고개를 돌려 핸드폰을 집어 들고 허둥지둥 예선의 전화번호를 찾아 주저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연결음이 한 번 울리자마자 바로 걸렸다.영내문은 전화가 걸리자마자 다짜고짜 욕을 퍼부었다.“예선! 이 비열한 여자! 감히 내 병실에 카메라를 설치해 두다니! 도대체 뭘 찍은 거예요? 인터넷에라도 올리려고 그런 거예요? 지금 내 체면을 짓밟으려고 이러는 거냐구요?”영내문의 목소리가 유난히 초조하고 다급했다.전화기 너머의 예선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자 영내문은 멈추지 않고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예선,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당신이 뭔데, 감히 뭔데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감히 뭔데 내가 이러냐고?”잠시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마침내 예선이 입을 열었고 담담한 그녀의 말투는 영내문을 한껏 비꼬고 있었다.“영내문, 누가 누굴 보고 감히 이럴 수 있냐 어쩌냐 말하는 거예요? 도대체 누가 더 비열한지 모르겠군요. 처음에 계획적으로 날 모함에 빠뜨릴 생각을 한 사람이 누구예요? 심지어 날 죽이려고도 했잖아요. 아니에요?”예선은 얼음장같이 차갑게 그러나 매서운 눈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