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는 소군연이 다급한 노크 소리에 얼굴을 찡그렸다.“군연아, 어서 문 열어.”그의 모친이 계속 재촉하며 문을 두드렸다.소군연은 방문을 열기 위해 몸을 일으켰고 문을 열자 애타는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짜증스럽게 말했다.“무슨 일이에요? 왜 이렇게 급하게 날 찾는 거냐구요?”“내문이한테 큰일이 났어!”소군연의 모친이 말했다.소군연은 모친의 말을 듣고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한편 이런 일로 자신을 성가시게 한 것인가 생각하니 짜증이 밀려왔다.“무슨 일인데요?”“내문이가 유서를 남기고 약을 먹었어!”소군연의 모친의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지금 병원 응급실에 있어. 내문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군연아, 어쨌든 너도 어서 가 봐야 해.”상황을 알게 된 소군연은 주저하지 않고 코트를 집어 들었고 모친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응급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의사가 막 나오고 있었다.소군연은 영내문의 부모가 급히 달려가 영내문의 상태에 대해 의사에게 묻는 모습을 보았다.의사는 보호자들을 편안하게 달래며 상황을 설명했다.“두 분 안심하세요. 방금 위세척에 성공했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환자 몸이 많이 허약해 있어서 휴식을 잘 취해야 해요. 되도록이면 환자를 자극하지 말고 환자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자극받아서 환자 상태가 급격히 안 좋게 진행될 수도 있어요.”“고마워요. 닥터 류.”영내문의 부친은 의사와 친분이 있는 것 같았다.“내문이만 아무 일 없으면 그걸로 됐어요.”영내문의 모친은 옆에서 눈물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그러다가 소군연과 그의 모친이 오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화가 나서 소군연에게 달려들어 한바탕 꾸짖었다.“소군연, 우리 내문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다른 사람이랑 짜고 이렇게 내문이 마음을 아프게 하다니. 네가 조금이라도 우리 내문이 생각했더라면 아이가 이런 끔찍한 생각을 하진
”안녕히 계세요, 군연 오빠. 꼭 행복하셔야 해요.”영내문의 서명을 끝으로 편지는 마무리되어 있었다.상처를 입은 뒤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영내문의 심정이 행간마다 알알이 읽혀지는 유서였다.“군연아, 내문이는 널 위해 이런 선택을 한 거야.”소군연의 모친은 옆에서 영내문의 유서를 함께 보며 소군연에게 말했다.“내문이는 정말 바보야. 다른 사람 때문에 이런 못난 생각을 하다니.”“예선과 소만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내문이가 가장 슬퍼한 건 네가 내문이를 믿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야.”영내문의 모친이 강조하듯 말했다.“군연아, 내문이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지만 네가 내문이를 잘 보살펴줘야 해. 방금 의사도 그랬듯이 내문이는 어떤 자극도 받으면 안 돼.”소군연은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사실 낯설었지만 영내문의 유서를 보고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영내문의 모친은 소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마음이 놓였다.하지만 유서에 적힌 내용을 생각해 보니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기 씨네 본가.마침 식사 시간이어서 소만리의 가족은 모두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예선은 소만리의 막내아들을 잠시도 손에서 떼지 않고 그에게 밥을 떠먹이고 있었다.소만리는 막내아들과 함께 있는 예선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소만리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첫술을 뜨려고 했을 때 가사도우미가 급히 달려왔다.“사모님, 어떤 여자가 화가 나서 뛰쳐 들어왔어요. 꼭 사모님과 예선 씨를 만나야 한다면서요.”소만리와 기모진은 서로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그 여자가 누구일까 의아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영내문의 모친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당신들 지금 희희낙락 즐겁게 식사할 기분이 나요?”영내문의 모친은 다짜고짜 퍼부었다. 귀부인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위청재는 영내문의 모친을 잘 알고 있었다.평소 귀부인 모임에서 종종 만났던 사이인데 다짜고짜 들어와 소만리를 향해 욕설을 퍼붓자 위청재는 일어나서 소만리 앞을 막아섰다.
위청재가 하는 말에 화가 난 영내문의 모친은 화를 주체하다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서 가져온 유서를 꺼내 위청재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위청재가 언짢은 표정으로 영내문의 모친이 던지는 종이를 받아들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이게 뭐예요? 왜 나한테 던져요?”“내 딸 유서예요!”영내문의 모친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위청재, 내 딸 유서 똑똑히 보세요. 설마 다 보고 나서도 당신 며느리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말은 못 할 거예요.”영내문의 모친이 노여움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소만리는 아침에 소군연의 집에 찾아가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영내문의 유서?”예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소만리의 막내아들을 안고 얼른 위청재한테 다가갔다.위청재가 이른바 유서를 열자 소만리도 그 내용을 바로 알아차렸다.유서에는 자신이 매우 슬프고 억울하다는 영내문의 호소가 여기저기에 담겨 있었다.그녀는 소만리와 예선이 자신을 모욕하고 게다가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소군연에게 상심한 채 이런 결심을 했노라 구구절절 써 놓았다.유서 말미에는 자신의 부모에게 아무도 탓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며 끝내 소군연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도도 보였다.얼마나 의리가 깊고 착하고 다정한 여자로 보이고 싶었을까.하지만 소만리의 눈에 비친 영내문의 유서는 수상한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위청재, 똑똑히 봤어요? 당신 며느리가 얼마나 사악한 짓을 했는지 이제 알겠어요? 난 이 일을 인터넷에 공개할 거예요. 반드시 내 딸을 위해 정의를 되찾을 거라구요!”영내문의 모친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을 뻗어 유서를 다시 집어 가려고 했다.그러나 위청재는 급히 손을 뒤로 뺐다.“위청재,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내 딸 유서 돌려줘요!”영내문의 모친은 손을 내밀어 악랄하게 말했다.위청재는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내 며느리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난 확신할 수 있어요. 이 유서를 인터넷에 공개한다면 아마 당신의 체면이 곤두박
소만리는 거침없고 당당한 자세로 영내문의 모친에게 유서를 건넸다.“가져가세요. 인터넷에 폭로를 해서 댓글 부대를 동원해 날 공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진실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내 막내아들보다 더 순진한 거예요.”“...”영내문의 모친은 연거푸 퍼붓는 소만리의 반박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녀는 소만리가 들고 있던 유서를 빼앗고는 화가 난 듯 소만리를 가리켰다.“소만리, 기 씨 집안과 모 씨 집안이 당신 뒷배에 있다고 너무 기고만장해 있지 마세요. 내가 기어코 이 일을 인터넷에 폭로할 거예요. 그 후에 당신이 얼마나 우쭐해하는지 내가 똑똑히 지켜볼 거예요! 흥!”영내문의 모친은 성난 눈으로 소만리를 쏘아보며 휙 돌아섰다.영내문의 모친이 떠나자 소만리는 눈엣가시 같은 사람이 없어져서 속이 후련했지만 예선은 짐짓 소만리가 걱정되기 시작했다.“소만리, 너 언제 영내문을 찾아갔었어?”일이 이렇게 되자 소만리도 더는 예선에게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소만리가 입을 떼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기모진이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소군연과 영내문이 다음 주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어제 전해 듣고 오늘 일부러 찾아간 거였어. 아마 그 일로 소군연이 영내문을 의심하면서 결혼을 꺼려 한 것이 일의 발단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기모진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의 통찰력은 역시 대단했다.소만리 역시 기모진의 생각에 동의했다.소군연이 영내문과 소만리의 대화를 듣고 영내문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자 영내문은 기억을 잃은 소군연이 자신을 믿게 할 좀 더 강한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그리하여 영내문은 자살을 가장하게 된 것임에 틀림없다.하지만 예선은 이 얘기를 듣고 나서 도저히 침착할 수가 없었다.“군연과 영내문이 결혼한다고? 다음 주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예선은 이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예선아, 지금은 냉정해야 해. 소군연 선배는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영내문한테 이용당했고 영내문은 그런 선배에게
영내문은 사실 줄곧 거짓말을 해왔기 때문에 이번 일 또한 그녀가 벌인 자작극임에 틀림없다고 예선은 확신했다.사실 영내문은 지금 정신도 맑았고 몸에도 아무런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영내문은 지금 자신의 모친이 먹을 것을 사러 나간 틈을 타서 편하게 핸드폰을 들고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네티즌들이 소만리에 퍼붓는 욕설을 흐뭇하고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소군연이 자신을 보러 온 게 아닌가 생각하며 얼른 핸드폰을 내려놓고 허약한 척 누웠지만 들어온 사람이 예선이라는 걸 보고는 정신이 멍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그저 멍한 눈으로 예선의 눈빛을 살피며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허약한 척 자세를 유지했다.“예선, 당신이 여긴 웬일이에요? 누가 당신한테 이 병실에 들어와도 된다고 했어요? 당신 얼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영내문은 눈살을 찌푸리며 언짢은 표정으로 예선을 바라보았다.“엄마! 엄마! 어디 있어?”영내문은 유난히 힘없는 목소리로 병실 밖을 향해 자신의 모친을 불렀다.예선은 시치미를 떼고 있는 영내문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영내문, 여기 나 말고 아무도 없으니 아픈 척 연기하지 않아도 돼요.”자신에게 다가오는 예선을 바라보며 영내문은 더욱 당황스러워했다.“예선,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난 정말 당신 보고 싶지 않으니까.”영내문은 일부러 연약한 투로 말하며 더욱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당신이 군연 오빠를 많이 좋아한다는 거 알아요. 난 당신이랑 싸울 마음이 없다구요, 알겠어요? 당신이 군연 오빠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난 아무것도 따지지 않을게요. 나중에 내가 돌아가서 군연 오빠와의 결혼식을 취소하도록 부모님을 설득할게요. 그러니 날 내버려둬요. 소만리가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게 좀 해 달라구요. 난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요...”이렇게 말하면서 영내문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예선은 영내문의 거짓 연기를 두 눈 뜨고 보기
”나 좀 살려 줘. 군연 오빠, 제발 살려 줘.”영내문은 문 쪽을 바라보며 살려 달라고 말했다.예선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곁눈으로 살짝 보니 정말로 소군연의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영내문은 예선이 한눈을 판 사이 자신의 손을 확 잡아당겨 몸을 기울였고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아...”영내문이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질렀다.예선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소군연도 깜짝 놀라 영내문 앞으로 달려왔다.“일어나.”소군연이 영내문을 부축했다.영내문은 훌쩍거리며 소군연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군연 오빠, 난 정말 살고 싶지 않은데 왜 날 일으켜 세우는 거예요? 그냥 죽어 버리게 날 내버려둬요...”“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소군연이 타이르며 자신의 가슴에 기댄 영내문의 얼굴을 살짝 밀어냈다.하지만 영내문은 그냥 물러나기 싫은 눈치였다.예선은 그 모습이 눈에 거슬려 얼른 영내문을 잡아당겨 침대 위로 힘껏 올렸다.“이제 그만해요! 영내문, 당신의 연기는 정말 연기대상감이에요!”“딸깍!”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영내문의 모친이 화가 나서 예선의 곁으로 달려왔다.“이 여시 같은 여자가 내 딸 병실에는 웬일로 온 거야! 감히 우리 내문이를 괴롭히다니! 너란 여자는 어쩜 이렇게 질기고 악랄한 거야?”예선은 침착하게 영내문을 힐끔 쳐다보았다.“누가 악랄한지는 당신들이 더 잘 알 텐데요.”“너...”“그만둬요. 진실은 묻힐 수 없어요.”예선은 영내문의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병실을 나오기 전에 의미심장한 눈으로 소군연을 쳐다본 후에야 발길을 옮겼다.예선이 나가자 소군연도 망설임 없이 그녀를 뒤쫓았다.이를 본 영내문의 두 눈은 질투심으로 활활 타올랐다.영내문의 모친은 자신의 소중한 딸이 이렇게 언짢아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예선을 뒤따라 나갔다.병실 밖으로 나가자 영내문의 모친은 소군연이 예선을 부르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영내문의 모친이 달려 나와서 예선은 제대로 방어할 겨를이 없었다.소군연 또한 이를 막지 못하는 바람에 예선의 얼굴은 영내문의 모친에게 심한 일격을 당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수군대며 모여들었다.“아주머니,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매몰차게 때릴 수 있어요?”소군연이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예선을 대신해 화를 내며 영내문의 모친에게 물었다.영내문의 모친은 아직도 화가 사그라들지 않는지 예선을 가리키며 사정없이 퍼부어 대었다.“군연아, 넌 내 사위야. 그런데 어떻게 이 여우 같은 여자를 두둔하는 거냐! 이 여자 때문에 네 아내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넌 네 아내 곁을 지키기는커녕 이 버러지 같은 여자를 따라 나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이러고도 어떻게 내문이한테 떳떳할 수 있겠니?”영내문의 모친의 고함 소리에 지나가던 구경꾼들은 모두 놀라 다들 한 마디씩 덧붙였다.“뭐? 이 여자가 다른 여자의 남편이랑 바람을 피웠다고?”“생긴 걸 보니 그런 짓 할 여자로 보이네!”“저 남자도 참 못났다! 어떻게 자기 아내를 놔두고 다른 여자랑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저러고 있대! 맞아도 싸. 나 같았으면 저 남자도 한 대 때렸어!”영내문의 모친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기 편에 서서 예선을 향해 욕을 퍼붓는 것을 보고 마음이 얼마나 후련한지 말도 못 했다.예선도 옆에서 수군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못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맞은 뺨을 감싸고 있을 뿐 아무 반응 없이 가만히 침묵하고 있었다.그러나 소군연은 침착할 수가 없었다.그는 눈썹을 곤두세우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영내문의 모친을 쏘아보았다.“아주머니, 내가 왜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아주머니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나와 아주머니의 딸은 처음부터...”“소군연, 너와 내 딸은 분명 결혼 날짜를 잡았고 다음 주에 결혼할 예정이야. 그런데 날 장모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가? 소군연, 그게 사람으로서 할
”너...”“당신이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하니까 당신이 가르친 딸도 사람들한테 미움을 받는 거라구요.”“...”영내문의 모친은 예선이 자신을 가르치려 들 줄은 몰랐다.창피해서 그런 건지 아파서 그런 건지 애꿎은 뺨만 화끈화끈거렸다.“예선,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더 이상 내 딸 모욕하지 마!”“내가 모욕했는지 아닌지 여기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당신과 당신 딸 영내문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나와 군연이 사귈 때 당신 딸이 얼마나 사악한 짓을 많이 했는지 말이에요. 당신의 목소리가 군중들을 홀릴 수는 있지만 정의는 곧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거예요. 진실은 잠시 자리를 비울 뿐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요. 결국 언젠가는 밝혀지죠.”예선은 자신이 할 말을 마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구경꾼들은 예선을 쳐다보며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길을 열어주었다.보아하니 모두들 그녀의 기세에 겁을 먹은 것 같았다.영내문의 모친은 분명히 자신이 한 수 위에 있다고 여겼었는데 어느새 자신이 오히려 어릿광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런데 곧이어 일어난 일은 영내문의 모친에게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안겨주었다.누군지 모르지만 예선이 영내문의 모친 뺨을 때리는 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 것이다.동영상은 예선이 영내문의 모친 뺨을 때리는 부분만 있고 그전의 상황은 없었기 때문에 예선은 네티즌들의 키보드 아래 욕받이 대상이 되어 버렸다.네티즌들은 예선이 영내문의 모녀를 괴롭힌다고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퍼붓고 있었다.정말 터무니없는 주장들이 난무했다.소만리도 이 영상을 보았지만 예선이 영내문의 민낯을 들추기 위해 병원에 찾아갔다가 도리어 당하게 된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예선은 병원에 가서 영내문의 민낯을 낱낱이 밝힐 작정이었지만 가식의 가면을 뒤집어쓴 영내문의 계략에 말려 헛수고를 한 셈이 되어 버렸다.소만리와 예선을 더욱 놀라게 한 사실은 예선이 병원에 갔을 때 영내문이 병실 밖에서 일어난 일 모두를 카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