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훅 들어온 예선의 말에 사영인과 예기욱은 자신들도 모르게 얼어붙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본 후 말없이 시선을 떨구었다.마치 자책하는 듯 또는 사죄하는 듯 아무 말이 없었고 세 사람을 둘러싼 정적이 조용히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예선은 이런 두 사람의 반응에 더욱더 의문이 들었다.“지난 십수 년 동안 전 혼자였어요. 매번 등하교 할 때마다 다른 애들이 엄마 아빠와 함께 오는 것을 보고 왜 우리 엄마 아빠는 날 내버려두고 떠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예선의 말에 사영인과 예기욱은 더욱더 깊은 죄책감에 빠졌다.“지난 시절 난 당신들이 너무나 미웠어요. 당신들과 화해는커녕 만나고 싶지도 않았어요. 당신들이 날 저버릴 땐 언제고 이렇게 떡하니 나타나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지도 이해가 안 돼요. 내가 무슨 장난감이에요? 당신들이 버릴 땐 버리고 갖고 싶을 땐 언제든지 가질 수 있는? 난 더 이상 그런 장난감이 아니라구요!”“아니야, 예선아. 어떻게 네가 장난감을 수 있겠어? 넌 나와 네 아빠의 보물이야.”사영인이 황급히 부정했다.밖에서는 큰 회사를 호령하는 여장부였던 사영인도 자식의 질타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었다.“그게 아니면 어떻게 같은 날 약속이나 한 듯이 날 떠날 수가 있어요?”예선은 이해하기 힘들었다.십 년이 넘도록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의혹은 정말이지 그녀에겐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마음을 가라앉히고 해명이라도 들어보자고 온 저에게 어떻게 잠자코 아무 말도 안 하실 수가 있죠? 나한테 설명해 줄 게 아무것도 없는 건가요? 왜 망설이는 거죠? 내 존재가 당신들의 일에 방해가 되었던 거네요. 날 버린 후 당신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고의 발전을 이루셨죠. 한 사람은 갑부가 되었고 한 사람은 귄위 있는 저명한 전문의가 되었죠. 참 대단들 하세요.”예선도 감정이 점점 더 격해지기 시작했다.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고아 생활을 해 온 걸 생각하니 스스로가 너무나 안타깝고 초라하
그해 그들은 일부러 자신의 딸을 버린 것일까?정말 그런 걸까?소만리는 예선을 아파트 아래층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기모진의 전화를 받고 차를 세워 잠시 통화를 했다.그러나 통화가 거의 끝날 때쯤 예선이 울면서 아파트에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닌가.소만리는 서둘러 기모진과의 통화를 마치고 얼른 차에서 내려 예선을 향해 달려갔다.“예선아!”예선은 소만리가 아직 있을 줄은 몰랐지만 소만리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속 억울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소만리!”“예선아, 왜 그래? 왜 우는 거야?”덩달아 울상이 되다시피한 소만리가 물었다.“왜? 엄마가 집에 안 계셔? 아니면 혹시 엄마가 네가 듣기 싫은 말을 하셨어?”“그들이 다 인정했어. 그때 일부러 날 혼자 내버려두고 떠났다는 걸!”예선은 눈물을 쏟으며 울부짖었다.예선이 슬픔에 잠겨 울자 소만리는 순간 멍해졌다.도대체 이 슬픔을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일부러 버렸다면 지금에 와서 그 이유를 물은들 어떤 대답을 들어도 예선에겐 또 다른 상처가 될 것 같았다.소만리는 마음 아파하며 예선을 꼭 껴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나가는 사람들은 소만리를 껴안고 통곡하는 예선을 이상한 눈으로 힐끔힐끔 쳐다보았고 예선이 실연을 당한 줄 알고 수군대며 지나갔다.소만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계속 예선을 안아주며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한참 후에야 예선은 울음을 그쳤다.저녁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얼룩진 뺨을 어루만졌다.예선을 코를 훌쩍이며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소만리, 오늘 밤은 너네 집에서 좀 머물고 싶은데 괜찮을까?”“물론이지. 어서 들어가자.”소만리는 얼른 예선을 부축하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예선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차에 올라탄 예선은 그 후로 내내 침묵을 지켰다.소만리는 예선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왔고 거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기모진을 보았다.기
소만리는 망설이지 않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사영인의 목소리는 날개가 꺾인 새처럼 나지막이 가라앉아 있었다.“소만리,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해요. 나 예선이 엄마예요.”“알고 있어요, 아주머니.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소만리가 공손하게 물었다.그녀도 안다. 사영인이 왜 이 시간에 전화를 했는지.하지만 현재 예선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닌 소만리로서는 그렇게 간단히 내색할 순 없는 문제였다.“아이고.”사영인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방금 예선이랑 소만리가 아파트 아래층에 있는 걸 봤어요. 감히 그 아이의 심정을 더 건드릴 수가 없어서 안 내려갔어요. 지금 우리 예선인 좀 어때요? 좀 진정이 되었나요?”“지금은 좀 진정되었어요. 평온해 보이구요. 피곤해서 쉬고 싶다고 해서 전 나왔어요.”소만리가 사실대로 말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사영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염치없지만 정중하게 부탁의 말을 전했다.“소만리, 미안하지만 한 가지만 부탁할 게 있어요. 내일 시간 좀 내서 나를 한 번 만나 주었으면 좋겠어요.”사영인의 말을 듣고 소만리는 그녀가 한없이 무기력하고 자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응어리진 예선의 마음을 풀어주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소만리는 흔쾌히 사영인의 만남을 허락했다.소만리가 통화를 마치자 기모진은 얼른 소만리에게로 다가갔다.“소만리, 예선의 엄마가 왜 전화한 거야? 무슨 일이야? 예선이와 엄마 사이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싸웠대?”소만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예선이 아빠도 돌아왔어.”“예선이 아버지?”“응.”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것도 아주 권위 있는 뇌과 전문의로.”“한 사람은 갑부가 되었고 한 사람은 저명한 뇌과 전문의가 되었다 그 말이지. 예선이 부모님도 정말 심정이 복잡하시겠군.”기모진이 한탄했다.“그러게. 예선이 엄마 아빠는 아주 능력이 출중한 분이 되어서
예선은 기분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소만리에게 말했다.“소만리, 일어났어? 네 막내아들 너무 귀여워. 예전에는 결혼하면 여자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얘 보니까 남자아이도 괜찮을 것 같아!”소만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그럼 쌍둥이를 낳으면 되겠네. 한꺼번에 아들딸을 안아볼 수 있잖아. 그때 애 키우는 거 힘들다고 징징거리지 마.”“고생은 되겠지만 아이가 이렇게 귀여우면 고생도 할 만하고 생각해.”예선은 웃으며 막내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아이는 깔깔대며 웃었다.아이의 웃는 모습을 보고 예선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소만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왠지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네 말이 맞아. 제 몸에서 나온 아이를 보고 있으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니까. 아이가 웃으면 부모로서 아무리 힘들어도 다 참고 견딜 만해지거든.”소만리의 말을 듣고 예선의 얼굴이 살짝 어둡게 가라앉았다.예선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하지만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냐.”예선이 뼈가 들어간 말을 했다.소만리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자신이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걸 알았다.자신이 무심코 한 말이 의도치 않게 예선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소만리는 마음속으로 자책하며 다시 예선을 위로하려고 다가갔지만 예선은 이내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소만리, 나 이제 출근해야겠어. 그런데 나 오늘도 너네 집에 머물러도 돼?”“뭘 그런 걸 물어봐. 우리 사이에. 내 집이 네 집이지.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해도 돼. 아무도 너한테 뭐라고 할 사람 없어.”소만리는 일어나서 예선의 품에 있던 막내아들을 안아 들었다.“나도 마침 회사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가는 길에 데려다줄게.”“그래, 고마워.”예선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기분이 꽤 괜찮은 듯 보였다.그러나 소만리의 눈에는 오히려 그런 예선의 모습이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보기에
사영인이 소만리를 만나고자 한 이유도 사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그녀는 지금 예선과의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소만리를 통해 얘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다만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영인은 마음이 저릿해져 오며 예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소만리는 사영인이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알아차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예선이 울면서 말했어요. 부모님이 자신을 일부러 길거리에 버렸다고요.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이 말을 들은 사영인은 자책하듯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겨우 입을 열었다.“예선이 말이 틀린 건 아니에요. 그때 난 확실히 그 아이를 길거리에 혼자 내버려뒀어요. 구석에 숨어서 예선이 울먹거리며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어요. 그러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버렸죠.”사영인의 대답을 들은 소만리는 깜짝 놀랐다.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정말로 일부러 버렸다고?소만리는 그때 느꼈을 예선의 심정을 생각하자 마음이 너무나 아파왔다.예선이 이렇게 슬픈 마음으로 부모님을 미워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어떤 자식이 친부모에게 버림받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그때 왜 그러셨어요?”소만리는 혼자 버려졌을 예선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나서 말이 좋게 나오지 않았다.“엄마로서 아이를 낳았으면 당연히 책임지고 키우는 것이 숙명인데 어떻게 버렸다고 말씀하실 수 있어요?”“그 말이 맞아요. 소만리도 엄마니까 내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사영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 소만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이해가 되질 않아요.”사영인은 소만리가 화를 내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만약 아이를 떠나는 것이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면 소만리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사영인이 갑자기 이렇게 묻자
사영인은 갑자기 마음이 한결 놓였다.소만리가 예선에게 베풀어준 두터운 의리에도 감사했다.한편 예선은 당분간은 회사일에 전념하고 싶었다.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나다희는 우울해하는 예선을 보고 달달한 밀크티 한 잔을 사 주려고 했다.여자들은 종종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달달한 밀크티 한 잔이면 금방 기분이 풀릴 때도 있다.이건 순전히 나다희의 경험에서 우러난 생각이었다.나다희는 배달 주문을 하려고 핸드폰을 켰는데 마침 누군가가 테이블 위에 밀크티 두 잔을 턱 내밀었다.그녀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나익현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애프터눈 티야. 동료랑 같이 나눠 마셔.”나다희가 작은 입을 벌린 채 잠시 말을 잃었다.두 잔 가지고?두 잔 가지고 어떻게 사무실에 있는 동료들이랑 나눠 마시란 거지?이건 분명 나한테 신호를 준 거지? 예선과 둘이 마시라는?나다희가 자신의 생각을 간파한 것 같은 느낌이 들자 그는 사무실 안을 향해 말했다.“나머지 음료는 곧 배달될 거예요. 나다희, 우선 너네들부터 마셔.”나익현이 예선을 향해 힐끔 시선을 던지며 나다희에게 마저 말했다.“동료와 나눠 마시란 말 기억해.”말을 마친 나익현은 마침내 자기 사무실로 돌아갔다.“...”나다희는 앞에 놓인 밀크티와 조그만 상자를 보았다.상자를 열어 보니 티라미수 케이크 두 조각이 들어 있었다.그것도 스타 쉐프가 직접 만든 티라미수였다.나다희는 얼른 밀크티와 티라미수 케이크를 꺼내 예선에게 다가갔다.“예선 언니, 나랑 밀크티랑 티라미수 먹으며 잠깐 쉬어요.”나다희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예선은 정신을 차린 듯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나다희 씨, 나한테 뭐라고 말했어요?”나다희는 예선이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예선 언니, 뭘 그렇게 놀라요? 이러니 회사 사람들이 언니를 걱정하는 거예요.”예선은 자신을 걱정하는 나다희의 얼굴을 보며 고마움을 느끼고는 미소
안 그래도 마음속으로 묻고 싶은 말이 있던 차였다.그러나 막상 차에 올라타자 예선은 오히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녀는 차창 밖으로 오가는 차들을 바라보았다.갑자기 쓸쓸하고 헛헛한 감정이 밀려왔다.“내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말이에요. 내 차에 타기로 하셨을 땐 뭔가 나한테 물어보고 싶었던 거죠, 그렇죠?”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깨고 갑자기 나익현이 입을 열었다.예선은 정면을 바라보며 운전하고 있는 나익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잔잔한 미소를 띠며 신사다운 기품을 내뿜고 있는 나익현의 옆모습은 말 그대로 아주 그림 같았다.예선은 그의 말에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사장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긴 해요.”“예 교수님에 관한 겁니까?”나익현이 정곡을 찌르며 물었다.그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한 말을 하자 예선은 흠칫 놀랐다.“사실은 나도 어느 정도 예상했었거든요.”나익현이 이렇게 말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지난번에 회사 근처에 있는 아파트로 예선 씨 데려다주다가 예 교수님을 만났잖아요. 그때 예 교수님과 예선 씨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성도 둘 다 예 씨라 그렇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그냥 가볍게 생각했는데 정말로 부녀관계일 줄은 몰랐어요.”나익현의 말을 듣자 예선은 자신도 모르게 침묵에 잠겼다.내가 그 사람이랑 닮았다고?침묵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예선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그분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그분? 아, 예 교수님 말이에요?”“네.”예선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지금으로선 그를 정식으로 ‘아빠'로 칭할 방법이 없었다.나익현은 예선의 그런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지난 2년 동안 아버지는 계속 머리가 아프다며 불편해하셨어요. 때로는 기절할 정도로 심하셨죠. 여러 방면의 교수님들을 수소문하다가 결국 예 교수님께 부탁했죠. 이 방면에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권위를 가지고 계신
예선은 잠시 멈칫했다.예기욱이 어떤 심정인지 짐작이 갔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어렸을 때 엄마 아빠는 절 버리셨어요. 최근에야 두 분이 절 찾아오셨죠.”예선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마침 전방의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다.차가 멈추었고 나익현은 예선에게 시선을 옮겼다.그의 눈에는 안타까움과 충격이 함께 떠올랐다.“그게 사실이라면 예 교수님 같은 뛰어난 인재가 젊은 나이에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얘긴데,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 아니에요?”“오해 아니에요.”예선이 부정했다.“제가 직접 그들에게 물어봤어요. 진짜 일부러 날 버렸냐고. 그들이 모두 인정했구요.”예선의 대답을 들은 나익현은 여전히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때로는 우리가 직접 본 것도 사실이 아닐 때가 있잖아요.”“하지만 그들이 당시 날 원하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에요.”예선의 말을 듣고 나익현도 더 이상 뭐라고 말하기가 난감했다.그는 예선이 더 이상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그 일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30분 정도 후 나익현은 예선이 알려 준 주소로 그녀를 데려다주었다.소만리는 원래 예선을 태우고 집으로 올 생각이었는데 30분 전에 예선이 집에 데려다줄 사람이 있다고 하길래 혼자 집으로 돌아온 터였다.나익현이 대문 앞에서 신사적인 자태를 뽐내며 차에서 내려 예선을 위해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것을 본 소만리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나익현 사장님이시죠?”나익현은 소만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아, 안녕하세요. 전에 비즈니스 모임에서 한번 뵈었었죠.”“어쩐지 낯이 익다 했어요.”소만리는 웃으며 예의 바르게 말했고 안으로 들어가서 차나 한잔하고 가라고 나익현에게 청했으나 그는 볼일이 있다며 그냥 돌아섰다.소만리는 예선을 돌아보며 말했다.“널 집에 데려다준다던 사람이 회사 사장님이었어? 어떻게 너한테 이렇게 잘 해 줘? 설마 너한테 호감 있는 거 아니야?”“그럴 리가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