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선 씨, 교통사고와 관련하여 문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젊은 경찰관이 길을 안내했다.소만리는 예선과 함께 사무실로 따라갔다.경찰들은 영내문에게 하던 것처럼 취조하듯 예선을 대하지는 않았다.교통사고의 원인에 대해서 설명했고 이전에 전예진과 영내문과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물었다.예선은 조금도 숨기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모두 말했다.“맞아요. 나와 그들 사이에 일이 있긴 했었죠. 그런데 난 이미 그 일이 일단락된 줄 알았어요. 그들이 내 차에 손을 댈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이 말을 하는 순간 예선은 다시 화가 솟구쳐서 감정이 약간 격앙되었다.“경찰관 님, 영내문이 전예진에게 지시해 내 차 브레이크에 손을 댔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거죠? 뜻하지 않게 내 남자친구가 내 차를 모는 바람에 사고가 난 거구요. 안 그랬으면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사람은 나였을 거예요. 경찰관 님, 이건 살인을 계획한 거라구요. 그들은 날 죽이려고 했어요!”“예선 씨, 진정하세요.”“예선아, 흥분하지 마. 이 일에 대해서 경찰이 반드시 명명백백히 밝혀주실 거야. 전예진과 영내문이 그런 짓을 했다면 분명 합당한 처벌을 받을 거야.”소만리가 예선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그 두 사람은 확실히 혐의가 있어요. 그러나 현재 영내문을 살인 교사 혐의로 기소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없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미 수사하고 있으니 곧 결과가 나올 거예요.”경찰은 예선에게 확실하게 말했고 예선에게 몇 가지 더 질문을 했다.십여 분 후 소만리는 예선과 함께 사무실에서 나왔고 마침 그때 영내문은 반대편에서 나왔다.침울한 얼굴을 하고 나오는 예선을 보고 영내문은 웃음을 터뜨리며 예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실망했어요? 난 절대 구속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난 하늘에 맹세코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죠. 경찰이 아무리 조사해 봐도 아무것도 못 찾을
예선과 소만리는 영내문의 이런 가식적인 모습을 보면서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아무리 영내문이 그녀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도 그녀들은 영내문과 이 일이 절대 무관하다고 믿지 않는다.그러나 결국 영내문은 잔뜩 허세를 부리며 경찰서를 나섰다.“경찰관 님, 수사 방향을 잘못 잡은 거 아닌가요? 이 일은 분명 방금 저 여자와 관련이 있다구요. 나와 전예진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어요. 저 영내문이라는 여자와 나 사이에 앙금이 있는 거라구요.”예선은 앞에 있는 경찰관에게 호소했다.“죄송합니다. 우리는 절차와 증거에 따라 수사하고 있어요. 현재 우리가 확보한 증거로 볼 때 이번 교통사고는 확실히 영내문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영내문이 제공한 단서로 볼 때 전예진이 이 일의 확실한 주모자예요.”“전예진이 주모자라는 증거가 뭐예요? 도대체 영내문이 제공한 증거라는 게 뭐냐구요?”소만리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혹에 대해 물었다.“영내문이 제시한 증거가 놀랍게도 전예진이 주모자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혹시 영내문이 자신이 한 짓이 곧 발각될 것을 알고 혐의를 벗기 위해 사전에 이 증거를 준비한 거 아니에요?”“그게...”소만리가 그렇게 묻자 경찰관도 곤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듣고 보니 좀 의문점이 많은 것 같네요. 상부에 보고해야겠어요. 일단 다른 일이 없으시면 두 분은 먼저 가셔도 됩니다. 이후의 수사는 은밀히 진행될 거예요.”“그런데...”“예선아, 우리 일단 가자.”소만리는 예선의 손을 잡았다.“가자.”예선은 여전히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소만리의 뜻에 순순히 응했다.왜냐하면 예선은 이 세상에서 소군연을 제외하고 자신에게 가장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소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한 사람이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그 사람을 똑바로 대면할 수가 없었다.차에 올라타자 예선이 입을 열었다.“소만리, 방금 왜 내 입을
”뭐? 예선이 날 신고했다고? 그 여자가 무슨 증거가 있어서 신고한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전예진이 강력히 부정했다.영내문은 귀찮다는 듯 눈을 흘기며 말했다.“그 여자가 어떻게 언니를 신고했는지 나도 몰라요. 어쨌든 지금 경찰이 언니를 잡으러 사람을 보냈대요. 방금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갔다가 직접 들은 얘기에요. 그러니 언니 얼른 지금 도망가야 해요.”“도망가라고? 내, 내가 지금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어?”전예진은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서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영내문을 보았다.“내문아, 너 날 도와줘야 해. 널 위해서야 이건.”“날 위해서라구요? 언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요? 돈을 위해서가 아니고요?”영내문은 전예진의 입을 막아 버렸고 전예진이 함부로 말할 수 없도록 단호하게 말했다.“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 일에 있어서 나도 피해자예요. 그때 언니가 나한테 계속 예선을 혼내줘야 한다고 부추겼잖아요.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됐어요? 난 분명히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언니 때문에 말려들게 생겼어요. 사법 기관의 일을 방해한 죄로 피소될 수도 있다구요. 정말 피곤하게 생겼다니까!”이 말을 들은 전예진은 더욱 불안해졌다.“너도 날 도와줄 수 없다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해? 어떡하냐구!”전예진은 당황스러워하며 횡설수설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두 눈을 번쩍 떴다.“누가 날 도와줄 수 있을지 알 것 같아! 그는 내가 차에 손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줄 수 있을 거야! 소군연의 교통사고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난 기껏해야 사법 수사 방해죄 정도일 거야! 그 정도면 감옥에 갈 필요 없이 벌금으로 끝날 거라구!”전예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웃음이 번졌다.그러자 영내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며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소만리는 나무 뒤에 숨어 이 말을 엿들으면서 상당히 궁금해졌다.설마 이 일이 정말 영내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그러면 전예진이 말한 그 사람은 또 누구란
전예진은 차에서 내린 경찰에게 달려가 더없이 절실하고 다급하게 말했다.“경찰관 님, 저 자수할게요. 제가 다른 사람을 시켜 예선의 차에 손을 대도록 사주했다는 거 인정해요!”멀리서 전예진의 외침 소리를 들은 영내문은 얼굴을 찌푸렸다.저 멍청이!그녀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자신이 계획한 것의 반대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경찰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겐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이다.경찰은 전예진의 ‘자수'에 의구심을 가졌고 동시에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소만리와 영내문, 그리고 차에서 내리고 있는 예선을 바라보았다.전예진은 바로 경찰차에 실려 경찰서로 갔고 소만리와 예선도 뒤따라 갈 준비를 했다.그때 갑자기 영내문은 소만리의 차 옆으로 와서 소만리와 예선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차 문을 열어 뒷좌석에 털썩 올라탔다.“누가 타라고 했어요? 어서 나가요.”예선은 영내문을 보고 언짢은 얼굴로 화를 냈다.“시간 낭비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빨리 경찰서에 따라가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어서 빨리 운전이나 하세요.”영내문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그녀는 마치 예선과 소만리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자신의 말대로 따라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그러나 잠시 후 영내문은 차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소만리가 운전석에서 내려 영내문의 차 문 옆으로 와서 단호하게 차 문을 열었다.“내려요.”소만리는 냉랭한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만약 차에서 내리지 않는다면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어요. 하긴 그렇게 되면 당신은 더 빨리 경찰서에 도착할 수 있겠네요.”“...”영내문은 소만리가 하는 말을 듣고 약간 정신이 멍해졌다.영내문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소만리는 전화를 걸려고 바로 핸드폰을 꺼내었고 그 모습을 본 영내문은 차에서 냉큼 내렸다.소만리는 문을 닫고 차
”경찰관 님, 절대 예선의 말은 듣지 마세요. 헛소리예요. 예선이 제공한 증거는 분명 가짜예요. 왜냐하면 전 그 차의 브레이크를 절대 고장 내지 않았거든요.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아, 그 남자를 찾으면 당장 알 수 있어요.”“예선이 제공한 증거라구요?”경찰이 되물었다.전예진은 마치 고개가 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끄덕여 댔다.“예선이 날 신고해서 경찰관 님이 날 잡으러 온 거 아니었어요?”“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네요. 당신을 신고한 사람은 영내문이에요. 우리가 당신을 잡도록 증거를 제공한 사람도 영내문이구요.”“...”그 대답을 들은 전예진은 순간 그대로 얼어버렸다.잠시 후에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경찰에게 말했다.“그, 그게 정말 사실이에요? 정말 영내문이 날 신고했어요? 영내문이 증거를 제공했구요?”전예진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경찰은 영내문이 아까 제공한 증거를 얼른 찾아냈다.그것은 녹취록이었다. 전예진은 녹취록을 듣고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졌다.아까 경찰에 소환되어 취조를 받은 후 영내문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영내문과 나눈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녹취되어 있었다.당시 그녀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했었다.그런데 영내문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녀를 기다린 것이었다.전예진은 영내문이 이런 준비를 해 둘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녹취된 대화를 들으면서 전예진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영내문은 그때 자신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우며 자신과의 관계에 선을 그으려 했다는 것을 말이다.“경찰관 님, 이 대화는 영내문이 일부러 저한테 유도한 거예요. 영내문이 일부러 이렇게 한 거라구요! 처음부터 영내문은 이 일에서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 양 보일 속셈으로 날 유도한 거라구요. 내가 영내문을 믿다니! 지금 제가 여기 온 것도 다 영내문이 나한테 지시한 거예요. 그러니 이 일에서 영내문은 절대 벗어날 수 없어요! 아니 절대 그러면 안 돼요!”전예진은 창피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버럭 화를 내
경찰서에 들어올 때만 해도 영내문은 배짱이 두둑했지만 갑자기 전예진이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뭐라고?이 여자도 녹음을 했다고?뭘 녹음했다는 거지?설마 예선의 차에 손을 대자고 모의를 한 그때인가?영내문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소만리는 영내문의 눈에 미묘하게 스치는 흔들림을 포착했다.“전예진 씨, 녹취록이 있다니 뭘 녹음했다는 거예요?”경찰이 추궁했다.경찰의 말에 영내문의 마음은 뭔가 보이지 않는 것에 매달려 옴짝달싹 못할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전예진도 영내문의 눈빛에서 불안해하는 마음을 읽고는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그녀는 영내문에게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갑자기 예선의 얼굴에 시선을 떨어뜨렸다.“예선, 당신이 바보가 아니라면 누가 당신한테 앙심을 품었는지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난 당신과 어떤 원한도 없고 당신과 감정적으로 엮인 일도 없어요. 그러니 당신을 모함할 이유가 전혀 없죠. 내가 저지른 일은 모두 영내문이 시켜서 한 짓이에요!”“어디서 헛소리로 남을 모함하고 있어요!”영내문은 황급히 전예진을 다그치며 말을 끊었다.그러나 전예진은 시큰둥한 얼굴로 다시 영내문에게 눈을 흘겼다.“영내문, 이제는 너와 이렇게 논쟁하는 데 시간 낭비하는 것도 귀찮아. 너 예전에 내가 사는 집에 와서 그랬잖아. 요즘 너무 기분이 안 좋다고. 예선이라는 여자한테 혼꾸멍내 줘야겠다고 했지. 그래서 나랑 모의를 했잖아. 날 고객인 척 예선이 다니는 회사에 인테리어를 의뢰하자고. 사실 계약은 내 이름으로 했지만 그 계약의 배후에 실질 주모자는 너였잖아.”“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를 대며 예선이 하는 일에 시비를 걸었지. 그 이유는 예선한테 계속 모욕을 주고 싶어서였어. 그리고 음흉한 계획을 생각해 낸 거야. 이미 지난번에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한 그 사건 말이야!”영내문은 전예진이 그 일을 언급하길 바라지 않았지만 순순히 인정할 영내문도 아니었다.“언니, 난 정말이지 언니 혐의를 벗기게 해
소만리와 예선은 전예진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예선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은 영내문뿐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경찰이 아무리 전예진의 핸드폰을 뒤져도 그녀가 말한 영상을 찾지 못했다.담담하던 전예진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굳어졌다.“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방금 한 말 다 사실이에요. 녹화한 기록이 다 있다구요!”전예진은 자신의 핸드폰을 가져와 스스로 뒤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왜 영상이 없는지 알 것 같았다.CCTV 기록은 최대 보존 기간이 보름에 불과했던 것이다.그날의 기록은 마침 오늘 자동으로 삭제된 것이었다.영내문은 전예진의 허망한 표정을 보고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전예진 씨, 왜? 더는 연극을 못 하겠나 봐요? 흥! 언니가 말한 영상 같은 건 원래 있지도 않았잖아요. 경찰관 님, 전 지금 이 여자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겠어요. 제 명예를 더럽혔으니까요.”영내문은 내친김에 전예진을 반격했다.전예진은 고개를 번쩍 들었고 득의양양한 영내문을 노려보다 그대로 달려들었지만 경찰에게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영내문은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경찰에 연행되어 끌려가는 전예진의 뒷모습을 보며 돌아서서 소만리와 예선을 쳐다보았다.“좀 실망했어요?”예선의 말투에서 비아냥거림이 잔뜩 느껴졌다.“어쨌든 교통사고는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경찰은 영원히 날 잡을 수 없을 거예요. 증거가 없으니까요.”영내문은 예선을 향해 두 걸음 다가서더니 갑자기 눈빛이 매서워지며 말했다.“예선, 군연 오빠가 당신 대신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마음 아프지 않아요? 설령 이 일이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일어난 교통사고라 하더라도 군연 오빠한테 생긴 이 불행이 당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어요. 평생 그 죄책감의 그늘에서 살게 될 거예요. 군연 오빠가 사고를 당하게 된 절반의 책임은 분명 당신한테 있어요.”“영내문, 함부로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말아요. 경찰은 아직 증거를
소만리는 조금 전 영내문이 한 말로 예선이 심한 상처를 받았다는 걸 알고 위로했다.“예선아, 영내문이 한 말에 흔들리면 안 돼. 잘못을 저지른 건 브레이크에 손을 댄 그 여자라고.”소만리가 건네주는 위로의 말을 듣자 예선은 억눌렀던 서러움이 터져 나온 듯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사실 그 여자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야. 만약 외출한 사람이 나였다면 저기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나였을 거야. 군연이 날 대신 고통받고 있는 건 맞아.”예선은 눈물을 흘리며 흐릿한 시선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려고 애썼지만 이미 흐트러진 그녀의 시야는 그의 모습을 담지 못했다.소군연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심지어 얼굴과 머리에도 살갗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그런 소군연을 보면서 예선은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소만리는 티슈를 꺼내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했다.그러나 곧 소만리는 깨달았다.지금 예선에겐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없다는 걸.소군연의 상태가 호전되어야만 예선의 마음이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소만리는 그저 예선의 눈물을 닦아주며 옆에 앉아 함께 곁을 지켜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조금 늦은 시각, 기모진이 왔다.기모진은 소만리가 계속 예선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며 이것도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이대로 가다가는 두 사람 다 지쳐 나자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물론 마음 한켠에는 소만리를 더 아끼는 마음이 있긴 했다.소만리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슬쩍 곁눈질을 했다.그러자 그녀의 눈에 갑자기 기모진의 부드럽고 깊은 눈빛이 들어왔다.피곤에 절은 채 눈을 감고 잠시 쉬고 있는 예선을 보면서 소만리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기모진에게 다가갔다.두 사람의 눈에는 애처로움과 애틋함이 가득 흘러넘쳤다.“모진, 언제 왔어? 언제부터 여기 서 있었던 거야? 오래됐어?”기모진은 손을 들어 소만리의 귀밑머리를 쓸어주며 미소를 지었다.“아니, 방금 왔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