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 님, 절대 예선의 말은 듣지 마세요. 헛소리예요. 예선이 제공한 증거는 분명 가짜예요. 왜냐하면 전 그 차의 브레이크를 절대 고장 내지 않았거든요.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아, 그 남자를 찾으면 당장 알 수 있어요.”“예선이 제공한 증거라구요?”경찰이 되물었다.전예진은 마치 고개가 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끄덕여 댔다.“예선이 날 신고해서 경찰관 님이 날 잡으러 온 거 아니었어요?”“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네요. 당신을 신고한 사람은 영내문이에요. 우리가 당신을 잡도록 증거를 제공한 사람도 영내문이구요.”“...”그 대답을 들은 전예진은 순간 그대로 얼어버렸다.잠시 후에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경찰에게 말했다.“그, 그게 정말 사실이에요? 정말 영내문이 날 신고했어요? 영내문이 증거를 제공했구요?”전예진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경찰은 영내문이 아까 제공한 증거를 얼른 찾아냈다.그것은 녹취록이었다. 전예진은 녹취록을 듣고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졌다.아까 경찰에 소환되어 취조를 받은 후 영내문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영내문과 나눈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녹취되어 있었다.당시 그녀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했었다.그런데 영내문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녀를 기다린 것이었다.전예진은 영내문이 이런 준비를 해 둘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녹취된 대화를 들으면서 전예진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영내문은 그때 자신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우며 자신과의 관계에 선을 그으려 했다는 것을 말이다.“경찰관 님, 이 대화는 영내문이 일부러 저한테 유도한 거예요. 영내문이 일부러 이렇게 한 거라구요! 처음부터 영내문은 이 일에서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 양 보일 속셈으로 날 유도한 거라구요. 내가 영내문을 믿다니! 지금 제가 여기 온 것도 다 영내문이 나한테 지시한 거예요. 그러니 이 일에서 영내문은 절대 벗어날 수 없어요! 아니 절대 그러면 안 돼요!”전예진은 창피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버럭 화를 내
경찰서에 들어올 때만 해도 영내문은 배짱이 두둑했지만 갑자기 전예진이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뭐라고?이 여자도 녹음을 했다고?뭘 녹음했다는 거지?설마 예선의 차에 손을 대자고 모의를 한 그때인가?영내문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소만리는 영내문의 눈에 미묘하게 스치는 흔들림을 포착했다.“전예진 씨, 녹취록이 있다니 뭘 녹음했다는 거예요?”경찰이 추궁했다.경찰의 말에 영내문의 마음은 뭔가 보이지 않는 것에 매달려 옴짝달싹 못할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전예진도 영내문의 눈빛에서 불안해하는 마음을 읽고는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그녀는 영내문에게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갑자기 예선의 얼굴에 시선을 떨어뜨렸다.“예선, 당신이 바보가 아니라면 누가 당신한테 앙심을 품었는지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난 당신과 어떤 원한도 없고 당신과 감정적으로 엮인 일도 없어요. 그러니 당신을 모함할 이유가 전혀 없죠. 내가 저지른 일은 모두 영내문이 시켜서 한 짓이에요!”“어디서 헛소리로 남을 모함하고 있어요!”영내문은 황급히 전예진을 다그치며 말을 끊었다.그러나 전예진은 시큰둥한 얼굴로 다시 영내문에게 눈을 흘겼다.“영내문, 이제는 너와 이렇게 논쟁하는 데 시간 낭비하는 것도 귀찮아. 너 예전에 내가 사는 집에 와서 그랬잖아. 요즘 너무 기분이 안 좋다고. 예선이라는 여자한테 혼꾸멍내 줘야겠다고 했지. 그래서 나랑 모의를 했잖아. 날 고객인 척 예선이 다니는 회사에 인테리어를 의뢰하자고. 사실 계약은 내 이름으로 했지만 그 계약의 배후에 실질 주모자는 너였잖아.”“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를 대며 예선이 하는 일에 시비를 걸었지. 그 이유는 예선한테 계속 모욕을 주고 싶어서였어. 그리고 음흉한 계획을 생각해 낸 거야. 이미 지난번에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한 그 사건 말이야!”영내문은 전예진이 그 일을 언급하길 바라지 않았지만 순순히 인정할 영내문도 아니었다.“언니, 난 정말이지 언니 혐의를 벗기게 해
소만리와 예선은 전예진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예선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은 영내문뿐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경찰이 아무리 전예진의 핸드폰을 뒤져도 그녀가 말한 영상을 찾지 못했다.담담하던 전예진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굳어졌다.“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방금 한 말 다 사실이에요. 녹화한 기록이 다 있다구요!”전예진은 자신의 핸드폰을 가져와 스스로 뒤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왜 영상이 없는지 알 것 같았다.CCTV 기록은 최대 보존 기간이 보름에 불과했던 것이다.그날의 기록은 마침 오늘 자동으로 삭제된 것이었다.영내문은 전예진의 허망한 표정을 보고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전예진 씨, 왜? 더는 연극을 못 하겠나 봐요? 흥! 언니가 말한 영상 같은 건 원래 있지도 않았잖아요. 경찰관 님, 전 지금 이 여자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겠어요. 제 명예를 더럽혔으니까요.”영내문은 내친김에 전예진을 반격했다.전예진은 고개를 번쩍 들었고 득의양양한 영내문을 노려보다 그대로 달려들었지만 경찰에게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영내문은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경찰에 연행되어 끌려가는 전예진의 뒷모습을 보며 돌아서서 소만리와 예선을 쳐다보았다.“좀 실망했어요?”예선의 말투에서 비아냥거림이 잔뜩 느껴졌다.“어쨌든 교통사고는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경찰은 영원히 날 잡을 수 없을 거예요. 증거가 없으니까요.”영내문은 예선을 향해 두 걸음 다가서더니 갑자기 눈빛이 매서워지며 말했다.“예선, 군연 오빠가 당신 대신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마음 아프지 않아요? 설령 이 일이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일어난 교통사고라 하더라도 군연 오빠한테 생긴 이 불행이 당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어요. 평생 그 죄책감의 그늘에서 살게 될 거예요. 군연 오빠가 사고를 당하게 된 절반의 책임은 분명 당신한테 있어요.”“영내문, 함부로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말아요. 경찰은 아직 증거를
소만리는 조금 전 영내문이 한 말로 예선이 심한 상처를 받았다는 걸 알고 위로했다.“예선아, 영내문이 한 말에 흔들리면 안 돼. 잘못을 저지른 건 브레이크에 손을 댄 그 여자라고.”소만리가 건네주는 위로의 말을 듣자 예선은 억눌렀던 서러움이 터져 나온 듯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사실 그 여자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야. 만약 외출한 사람이 나였다면 저기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나였을 거야. 군연이 날 대신 고통받고 있는 건 맞아.”예선은 눈물을 흘리며 흐릿한 시선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려고 애썼지만 이미 흐트러진 그녀의 시야는 그의 모습을 담지 못했다.소군연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심지어 얼굴과 머리에도 살갗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그런 소군연을 보면서 예선은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소만리는 티슈를 꺼내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했다.그러나 곧 소만리는 깨달았다.지금 예선에겐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없다는 걸.소군연의 상태가 호전되어야만 예선의 마음이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소만리는 그저 예선의 눈물을 닦아주며 옆에 앉아 함께 곁을 지켜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조금 늦은 시각, 기모진이 왔다.기모진은 소만리가 계속 예선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며 이것도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이대로 가다가는 두 사람 다 지쳐 나자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물론 마음 한켠에는 소만리를 더 아끼는 마음이 있긴 했다.소만리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슬쩍 곁눈질을 했다.그러자 그녀의 눈에 갑자기 기모진의 부드럽고 깊은 눈빛이 들어왔다.피곤에 절은 채 눈을 감고 잠시 쉬고 있는 예선을 보면서 소만리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기모진에게 다가갔다.두 사람의 눈에는 애처로움과 애틋함이 가득 흘러넘쳤다.“모진, 언제 왔어? 언제부터 여기 서 있었던 거야? 오래됐어?”기모진은 손을 들어 소만리의 귀밑머리를 쓸어주며 미소를 지었다.“아니, 방금 왔
소군연의 모친은 안절부절못했다.그녀는 사실 예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소군연의 곁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소군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소군연의 모친은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고 다짜고짜 소군연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간호사는 소군연의 상황이 급작스럽게 돌아가서 지금 응급처치실에서 응급 처치를 받고 있다고 했다.소군연의 모친은 온몸이 뻣뻣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지체할 사이도 없이 바로 처치실로 달려갔다.멀리서 예선과 소만리, 기모진이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냐구? 우리 군연이가 어떻게 된 거야?”소군연의 모친은 큰소리로 물으며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소만리는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을 들었고 다급한 표정으로 소군연의 모친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다.소만리는 의식적으로 예선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녀를 보호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기기에서 뭔가 움직임이 감지되어서 의사가 안에서 소군연 선배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어요.”“기기에서 뭔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고? 분명 군연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그래서 처치실로 온 거라고.”소군연의 모친은 화가 난 얼굴로 예선을 쏘아보며 역시나 예선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다 너 때문이야! 군연이가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라고! 그때 내가 마음이 약해지지 말았어야 했어. 너랑 군연이 절대로 사귀지 못하게 말렸어야 했다구!”이 말을 듣고 소만리는 마음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그녀가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하려는 순간 기모진이 먼저 입을 열어 소군연의 모친에게 마구 화를 냈다.“당신은 차에 손을 대고 교통사고를 일으킨 범죄자는 탓하지 않고 어떻게 당신 아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을 비난하고 있어요? 머릿속에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소군연의 모친은 기모진이 버럭하자 표정이 굳어졌고 어떻게 이걸 되받아칠까 궁리하고 있는
소만리는 사영인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구석에 앉아 있던 예선도 사영인의 출현에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반응을 보였다.그러나 영내문은 순간 숨이 멎을 듯 화들짝 놀랐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눈앞에 서 있는 사영인을 보았다.이 여자가 지금 무슨 말을 입에 올린 건가?배워 먹지 못한 것이 입을 함부로 놀리냐고? 게다가 깡패 같은 여자?영내문은 지금까지 어디서나 당당한 여자였다.어렸을 적부터 금의야 옥이야 귀하게 여겨주는 환경에서 자랐고 어디서나 밝고 명랑하고 애교가 넘치는 공주였다.그런데 지금 뭐? 배워 먹지 못한 깡패! 이 말이 분명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영내문의 얼굴에서 사영인은 영내문이 어떤 심정인지 충분히 읽었으나 결코 자신의 말을 바꾸지 않았다.“내 말 들었어? 이 깡패 같은 아가씨야! 당장 내 딸한테 사과해!”사영인은 다시 한번 더 반복하며 영내문을 깡패 같은 아가씨라고 불렀다.영내문은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감히 날 그렇게 부르다니! 당신이 돈이 있으면 다예요? 돈이 많은 게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예? 돈 있다고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예요?”영내문은 성난 얼굴로 마구 퍼부었지만 사영인은 오히려 침착하고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돈 있는 게 결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돈이 정말 많은 상류층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질 않거든. 그들은 자신의 돈으로 사람들을 도왔으면 도왔지 남을 괴롭히는 데 자신의 돈과 권력을 쓰지 않아. 하지만 당신은 좀 다른 것 같군. 당신이 이전에 한 일은 내가 모두 알고 있어. 그래서 당신이 파렴치하고 인간쓰레기라는 걸 더 이상 변명할 필요가 없어.”“...”영내문은 이 말을 듣고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파렴치하고 인간쓰레기라는 말에 그녀는 온몸에서 불쾌함이 느껴졌다.“사과 안 해?”사영인이 다시 한번 더 요구했다.영내문은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
”...”소군연의 모친은 들을 때는 배짱 좋게 들었지만 사영인이 그렇게 세세히 지목하며 말하자 그녀는 갑자기 체면이 깎이는 것 같아서 이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흥.”소군연의 모친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존중? 당신 딸이 굳이 우리 아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 저렇게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는데 존중은 무슨 존중? 내가 왜 그래야 되나요? 하물며 우리 소 씨 가문은 경도에서 명문가로 손꼽히는데 전국을 뒤져 며느리를 찾는다면 찾는 거지 그게 뭐 어쨌다는 거예요?”소군연의 모친이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며 말하자 예선을 제외한 소만리와 사영인은 도무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부인,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닌가요? 찰거머리라니요? 어떻게 당신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묘사할 수가 있어요? 게다가 예전에 예선이 소군연 선배를 떠나려고 했을 때 소군연 선배가 강력히 말려서 예선이 선배 곁에 남은 거라고요. 내가 그때 공항에서 직접 봤어요.”소만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조했다.“분명히 둘 다 서로 사랑해서 함께하는 건데 당신은 지금 예선을 몹쓸 거머리 취급을 하고 있잖아요. 아무리 예선이 미워서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당신 아들의 선택인데 존중해 줘야죠.”“...”소만리의 말이 떨어지자 소군연의 모친은 반격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 입을 오므렸다.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은근슬쩍 가장자리로 물러났다.영내문도 소군연의 모친 뒤를 따르며 말했다.“어머니, 저 사람들이 하는 헛소리 들을 필요 없어요. 지금까지 어머니가 군연 오빠한테 얼마나 잘 했는지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아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은 누구한테도 비교되지 못할 만큼 어머니는 잘 하셨어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요.”영내문의 말을 듣자 소군연의 모친은 갑자기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내문아, 네 말이 맞아. 내가 엄마로서 아들을 위해서 한 일인데,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이 세상에 엄마가 당신 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에요.”사
”사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사위분은 반드시 깨어날 거라고 확신합니다.”의사는 매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환자가 지금 매우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조만간 깨어날 거라고 믿어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따님과 사위분이 함께 할 날도 머지않을 거예요. 곧 깨어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소군연이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날 거라는 의사의 말에 예선의 얼굴에는 순간 환한 미소가 번졌다.“정말요? 의사 선생님, 그게 정말이에요?”예선이 감격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깨어날 거라고 확신해요. 그런데 부상자와는 어떤 관계십니까?”“부상자의 약혼녀예요.”소만리가 예선을 대신해 대답했다.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이분이 사장님의 그 귀한 따님이셨군요. 그럼 약혼자 옆에 잘 계시면서 많이 격려해 주세요. 전 반드시 환자분이 조만간 깨어날 거라고 믿어요.”긍정적인 의사의 답변을 들은 예선은 거의 흐느끼듯 울었다.한번 울음이 터지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다.소군연의 모친도 기뻐서 눈시울을 붉혔다.“의사 선생님, 정말 내 아들이 깨어날 수 있을까요?”“네, 확실합니다.”의사의 대답은 여전히 확고했다.소군연의 모친은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며 영내문에게 고개를 돌렸다.“내문아, 앞으로도 군연이 잘 부탁한다. 네가 돌봐주면 군연이 훨씬 빨리 회복될 수 있을 거야.”영내문의 얼굴에는 순간 웃음이 떠올랐다.“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기대 저버리지 않을게요. 최선을 다해 군연 오빠 돌보면 오빠도 얼른 털고 일어날 거예요.”영내문은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말을 마치며 예선을 흘겨보았다.마치 소군연의 모친이 자기 편임을 자랑하는 듯했다.“보호자분은 그 마음이면 충분해요. 환자를 돌보는 데는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옆에 있던 의사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영내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고 이해할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