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내문은 나중에 일이 어그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그래서 일부러 능청을 떨며 말했다.“내가 그때 이런 일 하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언니가 괜찮다고 날 타일렀죠. 절대로 나한테 누를 끼치지 않겠다고도 했구요. 할 수 없죠. 이미 일은 저질러졌으니까요. 우선 경찰이 언니를 찾아갔으니 조만간 나도 찾으러 오겠네요. 하지만 난 분명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마 언니는 연루될지도 몰라요.”영내문이 불평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전예진은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들이며 여전히 당황스럽고 두려운 모습을 보였다.“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난 그저 돈을 원했을 뿐이야.”전예진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말을 뚝 멈췄다.영내문에게 자신이 실제로는 차에 손대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영내문에게 노여움을 사게 될 것이고 돈도 다시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 갑자기 입을 꾹 닫았다.지금 그녀의 상황이 난처해질 수도 있는 입장이라 나중에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 영내문과의 친분이라는 카드가 쓰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그래서 결국 전예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영내문은 전예진을 보낸 후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중환자실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영내문은 멀리 예선과 소만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영내문은 소만리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예선과는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소만리와 예선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쳐다보았고 영내문임을 알고 소만리는 본능적으로 경계했다.지금 영내문의 도발적이고 도도한 눈빛만 봐도 소만리는 그녀가 분명 예선에게 뭔가 시비를 걸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역시나 영내문은 가까이 오더니 예선의 눈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거만한 자세로 예선을 보며 비웃었다.“왜 또 왔어요? 망신을 당하는 게 좋아서 또 왔어요? 나이 꽤나 먹어 가지고 도리를 알아야지. 아니, 오늘은 갑부 엄마 안 데리고 왔어요? 갑부 엄마가 있는데 왜 그렇게 움츠리고 앉
소군연의 모친은 소만리와 예선의 시선이 모두 자신의 뒤를 향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뒤돌아보았다.두 명의 경찰관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소군연의 모친은 깜짝 놀라 물었다.“경찰이 여기 웬일이세요? 누굴 찾으러 오셨어요?”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고 이윽고 뭔가 짐작이 가는 듯 예선에게 손가락질을 했다.“이 여자 잡으러 온 거죠? 내 아들은 이 여자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소만리는 소군연의 모친의 행동에 대해 정말 할 말을 잃었다.그러나 경찰이 예선을 찾으러 온 것은 아님을 확신했다.역시나 경찰은 소군연의 모친 옆에 서 있는 영내문에게 근엄함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당신이 영내문 씨 맞죠?”이를 본 소군연의 모친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저, 저기. 왜 내문이를 찾아요? 내문이가 뭘 어쨌는데요?”영내문은 소군연의 모친이 당황하고 놀란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녀는 경찰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다만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을 뿐이다.그녀는 일부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세상 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영내문이에요.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어요?”“전예진이 당신 친구 맞습니까?”경찰은 전예진의 사진을 내밀며 영내문 앞으로 다가왔다.“네, 내 친구 맞아요. 혹시 예진 언니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요?”“이 여자가 전예진이라는 걸 당신이 확인한 겁니다. 그렇죠?”경찰은 사진을 집어넣으며 찾아온 경위를 설명했다.“전예진은 다른 사람을 교사해 차량 번호 886 차의 브레이크를 고장 내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결국 그 차는 브레이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교통사고를 일으켰어요.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전예진이 사람을 사주하기 전에 당신이 그녀에게 삼천만 원을 보낸 정황이 포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예진이 당신의 지시를 받았다고 의심하는 겁니다.”“뭐라구요? 당신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경찰의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
소만리는 영내문의 얼굴에 매서운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했다.“차에 손을 댄 사람이 내 친구를 살해하려고 했다는 뜻이죠.”소만리는 ‘살해'라는 단어를 썼고 그것은 조금도 과장된 얘기가 아니었다.예선도 탐정 같은 소만리의 분석을 들은 후 등골이 오싹해졌다.알고 보니 영내문과 전예진이 손을 잡고 그녀를 해치려 했던 것이다.그리고 이번에는 명백히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예선은 소군연이 누워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었고 지체 없이 영내문한테 달려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영내문이 미처 대비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은 채 예선은 멱살을 잡자마자 바로 뺨을 한 대 갈겼다.“퍽!”“아!”영내문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영내문, 이 몹쓸 인간! 독사같이 악독한 여자야!”예선은 영내문을 향해 달겨들며 욕설을 퍼부었다.경찰과 소만리가 동시에 앞으로 나와 예선을 말리며 영내문에게서 떼어내었고 소군연의 모친은 영내문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보호했다.“네가 뭔데 감히 우리 내문이를 때려!”“내가 때린 건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사악한 악마예요!”예선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너...”소군연의 모친은 화가 나서 눈을 부라렸다.“너 무슨 근거로 내문이를 때린 거야? 군연이 교통사고는 너 때문이야!”“닥쳐요! 제발 그만 좀 하세요.”예선은 소군연의 모친의 입을 막았다.소군연의 모친은 갑자기 폭발하는 예선의 기세에 겁을 먹은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이 이렇게 분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지금 예선이 느끼는 분노와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예선은 두 눈이 붉어진 채 마치 온몸이 불길에 타오르는 듯했고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당신이 똑똑하지 않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소군연의 모친으로서 정말 이렇게까지 둔할 줄은 몰랐어요!”“...”소군연의 모친이 어이없어하며 얼굴이 벌게졌다.“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모든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보자 소군연의 모친은 그 자리에 멍하니 남겨졌다.교통사고가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주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소군연의 모친의 마음속에 원망이 더욱 커져갔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 일이 영내문과는 관련이 없다고 믿었다.영내문이 얼마나 착한데. 게다가 그녀는 종종 자신의 비위를 맞추며 명품 선물을 많이 하지 않았던가.그러다가 소군연의 모친은 갑자기 방금 예선이 한 말이 떠올랐다.영내문이 선물한 명품들이 다 짝퉁이라고?소군연의 모친은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바로 집으로 돌아가 영내문이 선물한 명품들을 당장이라도 감정 받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소군연의 상태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당분간은 중환자실 입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경찰서.영내문은 직접 취조실로 들어갔고 소만리와 예선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소만리는 예선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그녀를 우선 의자에 앉혔다.경찰서로 오는 길에서부터 지금까지 예선은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예선아. 무슨 하고 싶은 말 없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억지로 참지 않아도 돼. 내 앞에서는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구.”소만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은 다리 위에 올려져 있던 두 손을 확 끌어당겨 주먹을 불끈 쥐었고 입술을 앙다물며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이 세상에 인간성이라곤 없는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 거였어. 그것도 꽤 많이.”꾹꾹 참았던 예선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지금 분노로 얼마나 속이 끓어오르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어. 만약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했다면 난 아마 제대로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했을 거야. 하지만 양심 없는 사람들은 이런 비인간적인 일을 저지르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해.”소만리는 예선이
”예선 씨, 교통사고와 관련하여 문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젊은 경찰관이 길을 안내했다.소만리는 예선과 함께 사무실로 따라갔다.경찰들은 영내문에게 하던 것처럼 취조하듯 예선을 대하지는 않았다.교통사고의 원인에 대해서 설명했고 이전에 전예진과 영내문과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물었다.예선은 조금도 숨기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모두 말했다.“맞아요. 나와 그들 사이에 일이 있긴 했었죠. 그런데 난 이미 그 일이 일단락된 줄 알았어요. 그들이 내 차에 손을 댈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이 말을 하는 순간 예선은 다시 화가 솟구쳐서 감정이 약간 격앙되었다.“경찰관 님, 영내문이 전예진에게 지시해 내 차 브레이크에 손을 댔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거죠? 뜻하지 않게 내 남자친구가 내 차를 모는 바람에 사고가 난 거구요. 안 그랬으면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사람은 나였을 거예요. 경찰관 님, 이건 살인을 계획한 거라구요. 그들은 날 죽이려고 했어요!”“예선 씨, 진정하세요.”“예선아, 흥분하지 마. 이 일에 대해서 경찰이 반드시 명명백백히 밝혀주실 거야. 전예진과 영내문이 그런 짓을 했다면 분명 합당한 처벌을 받을 거야.”소만리가 예선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그 두 사람은 확실히 혐의가 있어요. 그러나 현재 영내문을 살인 교사 혐의로 기소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없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미 수사하고 있으니 곧 결과가 나올 거예요.”경찰은 예선에게 확실하게 말했고 예선에게 몇 가지 더 질문을 했다.십여 분 후 소만리는 예선과 함께 사무실에서 나왔고 마침 그때 영내문은 반대편에서 나왔다.침울한 얼굴을 하고 나오는 예선을 보고 영내문은 웃음을 터뜨리며 예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실망했어요? 난 절대 구속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난 하늘에 맹세코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죠. 경찰이 아무리 조사해 봐도 아무것도 못 찾을
예선과 소만리는 영내문의 이런 가식적인 모습을 보면서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아무리 영내문이 그녀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도 그녀들은 영내문과 이 일이 절대 무관하다고 믿지 않는다.그러나 결국 영내문은 잔뜩 허세를 부리며 경찰서를 나섰다.“경찰관 님, 수사 방향을 잘못 잡은 거 아닌가요? 이 일은 분명 방금 저 여자와 관련이 있다구요. 나와 전예진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어요. 저 영내문이라는 여자와 나 사이에 앙금이 있는 거라구요.”예선은 앞에 있는 경찰관에게 호소했다.“죄송합니다. 우리는 절차와 증거에 따라 수사하고 있어요. 현재 우리가 확보한 증거로 볼 때 이번 교통사고는 확실히 영내문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영내문이 제공한 단서로 볼 때 전예진이 이 일의 확실한 주모자예요.”“전예진이 주모자라는 증거가 뭐예요? 도대체 영내문이 제공한 증거라는 게 뭐냐구요?”소만리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혹에 대해 물었다.“영내문이 제시한 증거가 놀랍게도 전예진이 주모자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혹시 영내문이 자신이 한 짓이 곧 발각될 것을 알고 혐의를 벗기 위해 사전에 이 증거를 준비한 거 아니에요?”“그게...”소만리가 그렇게 묻자 경찰관도 곤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듣고 보니 좀 의문점이 많은 것 같네요. 상부에 보고해야겠어요. 일단 다른 일이 없으시면 두 분은 먼저 가셔도 됩니다. 이후의 수사는 은밀히 진행될 거예요.”“그런데...”“예선아, 우리 일단 가자.”소만리는 예선의 손을 잡았다.“가자.”예선은 여전히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소만리의 뜻에 순순히 응했다.왜냐하면 예선은 이 세상에서 소군연을 제외하고 자신에게 가장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소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한 사람이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그 사람을 똑바로 대면할 수가 없었다.차에 올라타자 예선이 입을 열었다.“소만리, 방금 왜 내 입을
”뭐? 예선이 날 신고했다고? 그 여자가 무슨 증거가 있어서 신고한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전예진이 강력히 부정했다.영내문은 귀찮다는 듯 눈을 흘기며 말했다.“그 여자가 어떻게 언니를 신고했는지 나도 몰라요. 어쨌든 지금 경찰이 언니를 잡으러 사람을 보냈대요. 방금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갔다가 직접 들은 얘기에요. 그러니 언니 얼른 지금 도망가야 해요.”“도망가라고? 내, 내가 지금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어?”전예진은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서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영내문을 보았다.“내문아, 너 날 도와줘야 해. 널 위해서야 이건.”“날 위해서라구요? 언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요? 돈을 위해서가 아니고요?”영내문은 전예진의 입을 막아 버렸고 전예진이 함부로 말할 수 없도록 단호하게 말했다.“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 일에 있어서 나도 피해자예요. 그때 언니가 나한테 계속 예선을 혼내줘야 한다고 부추겼잖아요.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됐어요? 난 분명히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언니 때문에 말려들게 생겼어요. 사법 기관의 일을 방해한 죄로 피소될 수도 있다구요. 정말 피곤하게 생겼다니까!”이 말을 들은 전예진은 더욱 불안해졌다.“너도 날 도와줄 수 없다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해? 어떡하냐구!”전예진은 당황스러워하며 횡설수설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두 눈을 번쩍 떴다.“누가 날 도와줄 수 있을지 알 것 같아! 그는 내가 차에 손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줄 수 있을 거야! 소군연의 교통사고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난 기껏해야 사법 수사 방해죄 정도일 거야! 그 정도면 감옥에 갈 필요 없이 벌금으로 끝날 거라구!”전예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웃음이 번졌다.그러자 영내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며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소만리는 나무 뒤에 숨어 이 말을 엿들으면서 상당히 궁금해졌다.설마 이 일이 정말 영내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그러면 전예진이 말한 그 사람은 또 누구란
전예진은 차에서 내린 경찰에게 달려가 더없이 절실하고 다급하게 말했다.“경찰관 님, 저 자수할게요. 제가 다른 사람을 시켜 예선의 차에 손을 대도록 사주했다는 거 인정해요!”멀리서 전예진의 외침 소리를 들은 영내문은 얼굴을 찌푸렸다.저 멍청이!그녀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자신이 계획한 것의 반대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경찰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겐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이다.경찰은 전예진의 ‘자수'에 의구심을 가졌고 동시에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소만리와 영내문, 그리고 차에서 내리고 있는 예선을 바라보았다.전예진은 바로 경찰차에 실려 경찰서로 갔고 소만리와 예선도 뒤따라 갈 준비를 했다.그때 갑자기 영내문은 소만리의 차 옆으로 와서 소만리와 예선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차 문을 열어 뒷좌석에 털썩 올라탔다.“누가 타라고 했어요? 어서 나가요.”예선은 영내문을 보고 언짢은 얼굴로 화를 냈다.“시간 낭비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빨리 경찰서에 따라가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어서 빨리 운전이나 하세요.”영내문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그녀는 마치 예선과 소만리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자신의 말대로 따라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그러나 잠시 후 영내문은 차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소만리가 운전석에서 내려 영내문의 차 문 옆으로 와서 단호하게 차 문을 열었다.“내려요.”소만리는 냉랭한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만약 차에서 내리지 않는다면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어요. 하긴 그렇게 되면 당신은 더 빨리 경찰서에 도착할 수 있겠네요.”“...”영내문은 소만리가 하는 말을 듣고 약간 정신이 멍해졌다.영내문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소만리는 전화를 걸려고 바로 핸드폰을 꺼내었고 그 모습을 본 영내문은 차에서 냉큼 내렸다.소만리는 문을 닫고 차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