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선은 전은비가 이 가방을 손에 넣게 된 것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고 전은비의 인격에도 문제가 있다고 확신했다.이렇게 되자 전은비는 어쩔 줄을 모르며 바로 불같이 버럭 화를 냈다.“예선 씨, 일부러 이러는 거죠!”맞은편 남자도 못마땅해하며 예선을 비난했다.“너무 한 거 아니에요? 같은 직장 동료들끼리 평소에 의견이 좀 맞지 않은 것은 아주 다반사인데 그걸 회사 밖에서까지 이렇게 앙심을 품고 그래요? 나랑 은비 씨가 소개팅하고 있는 걸 뻔히 알고서도 이렇게 굳이 끼어들어 언짢게 만드는 거 예의가 아니잖아요? 게다가 은비 씨는 충분히 능력이 있는 여자예요. 그까짓 가방 하나인데 그거 못 사겠어요?”남자는 전은비의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호감을 느꼈는지 계속 전은비 편을 들며 말했다.예선은 아무것도 모르고 속고 있는 남자가 자신에게 하는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다.오히려 예선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전은비를 담담하게 바라볼 뿐이었다.“전은비 씨, 나 당신이랑 언쟁하고 싶지 않아요. 진실은 거짓을 이기는 법이니까요.”예선은 더는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전은비는 예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그러나 그때 식당 입구에서 다급하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전은비는 고개를 번쩍 들어 사영인을 보았고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예선아!”사영인은 예선이 말한 주소대로 얼른 달려왔고 예선을 보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 난처한 표정과 조마조마한 얼굴로 옆에 서 있는 전은비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사영인은 자신이 전은비와 약속한 일이 들킨 줄 알고 예선이 화를 낼까 봐 얼른 부드러운 어조로 사과했다.“예선아,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야?”예선은 사영인의 시선을 곁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이 이렇게 물어보는 걸 보니, 내 짐작이 맞나 보군요.”“그게...”“당신은 이 여자와 소향이라는 여자를 매수해서 회사에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고 있었죠. 이 여자들이
예선은 말을 마치고 단호하게 발길을 돌렸다.“예선아!”사영인은 황급히 뒤돌아 쫓아가려고 하다가 방향을 틀어 다시 휙 뒤돌아서서 노기 어린 눈빛으로 전은비를 노려보았다.“사실 당신 같은 사람이 무슨 목적과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는 한눈에 보여요. 예선이 어떻게 지내는지 좀 더 알기 위해서가 아니었더라면 당신 같은 사람은 감히 나한테 말할 기회조차 없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보니 이렇게 비싼 가방을 중간에서 가로챌 정도로 당신은 대담한 사람이었군요. 잘 들어요. 이 일은 법적으로 처리할 테니 경찰에서 찾아올 때까지 딱 기다려요.”사영인이 말을 마치고는 식당을 떠나 바로 예선을 뒤쫓았다.전은비는 놀라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고 남자의 화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전은비 씨, 이제 보니까 당신 동료가 당신을 모함한 게 아니었네요. 어떻게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댈 수가 있어요? 그래 놓고 버젓이 자신의 돈으로 샀다고 말을 해요? 난 정말 당신이 괜찮은 여자여서 사귀어 볼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속까지 완전히 썩어 있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당신 같은 사람을 알았다는 것 자체로도 굉장히 역겨워요.”“...”전은비는 남자에게 한바탕 욕을 먹었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방금 사영인이 법적 절차를 밟겠다고 한 것을 떠올리며 전은비는 당혹스러워하며 얼른 가방을 들고 식당을 나가려고 했지만 입구에서 식당 종업원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아직 음식값이 계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 남자는 떠났고 전은비는 어쩔 수 없이 음식값을 다 계산했다.원래는 맛있는 음식을 좀 얻어먹을 요량으로 일부러 고급 식당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자신이 옴팡 뒤집어쓴 것이었다.전은비가 식당을 나와 보니 사영인도 예선도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예선은 소군연에게 연락을 한 후 그를 만나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했다.소군연은 사영인이 뭔가 방법을 강구해서 예선에게 물건을 보냈을
두 명의 경찰이 들어오는 것을 본 전은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영인이 정말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던 사무실 동료들은 모두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아마도 경찰이 전은비를 찾으러 왔을 거라는 것은 알아차렸다.“전은비 씨가 누구세요?”경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수색했고 곧 당황해하는 한 사람을 보고 전은비임을 알아차렸다.“당신이 전은비입니까?”전은비가 어찌 감히 경찰 앞에서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녀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렸다.전은비가 자신임을 인정하자 경찰은 곧장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전은비, 당신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훔친 혐의로 고소되었어요. 즉시 경찰서로 가서 조사에 협조해 주십시오.”“뭐? 은비 언니가 남의 물건을 훔쳤다고? 설마 그 가방?”“전은비가 평소 남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남의 물건에 손까지 대다니!”“평소 허영심이 많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어쩐지 그녀가 방금 예선한테 그런 말을 하더라니. 가방은 원래 예선이 것이었는데 전은비가 훔친 거였어?”주변의 몇몇 여자 동료들이 수군거렸고 전은비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난감해졌다.“훔친 거 아니에요! 경찰관님, 오해가 있었던 것뿐이라구요.”전은비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고개를 돌려 예선을 바라보았다.“예선 씨, 정말 아무 설명 안 해 줄 거예요? 당신 모녀의 관계를 풀어 주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어요? 이 가방은 당신 어머니가 억지로 나한테 준 거라고요. 사실 받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지금 돌려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전은비가 사실을 왜곡하며 말하자 예선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해명을 하려거든 경찰한테 하세요. 당신이 억울한지 아닌지는 그들이 낱낱이 조사해 줄 거니까요.”“정말, 예선...”예선의 태도가 이렇게 단호할 줄은 몰랐다.전은비는 화가 나고 초조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결국 그녀는 많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선아, 잠깐만 기다려. 내 말부터 들어봐.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먼저 진정하고 엄마 말부터 좀 들어봐 줄래?”사영인은 예선 앞으로 다가와 우선 예선이 흥분하지 않도록 진정시켰다.사영인이 말을 끊었음에도 예선은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고 차분하게 사영인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그럼 말씀해 보세요.”예선이 일단 화를 내지 않자 사영인은 말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도 마음을 한 번 더 가다듬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예선아, 엄마는 네가 날 아주 싫어한다는 걸 알아. 엄마는 어떤 변명도 핑계도 대고 싶지 않아. 백 번 말해도 엄마가 잘못한 거야. 하지만 예선아, 우리는 결국 모녀지간이야. 넌 결국 내 몸에서 나온 내 딸이라고. 엄마는 정말 이런 상태로 너와 연이 끊기는 게 너무 안타까워.”사영인은 말을 하면서 어느새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예선아, 제발 엄마한테 만회할 기회를 주면 안 되겠니?”사영인은 조심스럽게 간청했다.주머니 속에 감춰진 예선의 두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사영인의 눈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후회와 기대가 담겨 있는 것이 예선의 눈에도 보였다.하지만 예선은 사영인이 자신을 두고 가버린 그때 자신이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예선.”예선이 침묵을 지키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막막해하고 있을 때 어디서 왔는지 소군연이 나타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어머니도 계셨네요.”소군연은 예의 바르게 사영인에게 인사했다.사영인도 방긋 웃으며 소군연에게 화답했다.그러고 나니 경직되었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소군연은 웃으며 예선의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어 자신의 손과 마주 잡았다.예선의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그는 따뜻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깍지를 끼웠다.자신의 온기가 조금이나마 예선의 얼어버린 마음을 녹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어머니도
나다희에게 호되게 욕을 먹고 난 후 전은비는 이를 악물며 나다희와 예선을 매섭게 노려보았다.“예선, 당신 정말 음흉한 사람이네요. 앞으로 누가 감히 당신과 동료가 되려고 하겠어요? 당신과 동료가 되면 이렇게 모함당해서 전과를 남기게 될 텐데 말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은 반드시 죗값을 받을 거예요!”전은비는 예선을 향해 한바탕 저주를 퍼붓고 나서 돌아섰다.나다희는 전은비가 떠나는 쪽을 바라보며 경멸하는 눈빛으로 냉소를 날렸다.“무슨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예선 언니의 물건을 훔친 도둑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저런 저주를 퍼붓는 거야! 정말 성격뿐만 아니라 머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야.”나다희는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돌려 예선을 위로했다.“예선 언니, 저런 사람 상대하지 말아요. 심보가 고약해서 다른 사람 물건에 손을 댄 자신을 탓해야지 어디서 아무 상관없는 언니를 야단쳐요, 야단치길!”“다희 씨, 고마워요.”예선은 웃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사실 그녀는 전은비가 떠드는 말은 조금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사무실에 있던 다른 직원들은 아무도 감히 말을 하지 못했고 모두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일을 했다.그러나 쉬는 시간에 나다희와 예선이 자리를 비우자 그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그리고 소향은 예선의 엄마인 사영인이 자발적으로 자신과 전은비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강조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고 사무실 사람들에게 자신은 그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느라 바빴다.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예선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예선도 바보가 아닌 이상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 터였다.하지만 예선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원래 이 세상 모든 사람들한테서 이해받기란 불가능한 일이다.그녀는 그들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오직 자기 자신만 신경 쓰기로 했다.그리고 나다희가 예상한 대로 예선이 디자인팀 매니저로 승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옳다구
예선은 사람들이 일부러 자신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임을 알고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이런 일은 팔자가 좋아서 되는 게 아니에요. 능력이 없으면 그만한 자리에 앉지 못해요.”“그건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소향이 반박했다.“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거죠?”예선은 날카로운 시선을 들어 소향에게 돌렸다.소향의 뭐라고 말하려다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마침 나익현이 말끔한 차림을 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여성을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여러분, 잠시 하던 일을 멈추어 주세요.”나익현은 목소리를 내어 누군가를 소개하기 시작했다.“이 분은 디자인팀에 새로 오신 주 매니저님입니다. 앞으로 디자인팀의 크고 작은 일은 이 분이 다 관리할 거예요.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이 분에게 말씀드리세요.”나익현의 소개가 끝난 후 예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멍한 표정을 지었다.나다희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그녀는 분명 예선이 그 자리에 앉을 거라고 들었는데 왜 갑자기 사람이 바뀐 거지?“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새로 온 매니저로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앞으로 업무와 관련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절 찾아주세요.”그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자기소개를 했고 디자인팀 매니저 자리는 그녀 자신의 자리임을 분명히 밝혔다.소향과 다른 동료들은 모두 당황하고 의아한 눈으로 예선을 바라보았지만 예선은 유난히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잠시 후 나익현이 새로 온 매니저와 자리를 떠나자 사무실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졌다.“예선 언니, 어떻게 된 일이에요? 회사에서 언니를 승진시키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며칠 전에 사장님한테 불려갔었잖아요? 그때 승진 얘기 안 했어요?”나다희는 회사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친오빠를 사장님으로 부르고 있었다.나다희의 말에 주위 사람들도 호기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예선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예선은 나다희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이 일에 관해 말씀하셨지만 거절했어요.”
”디자이너 분께서 도착하셨습니다.”예선의 옆에 있던 남자는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공손하게 통보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예선에게 알렸다.“예선 씨, 이 분은 이 집의 주인이신 전예진 씨입니다.”예선은 인터넷에서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재벌 2세 전예진일 줄은 몰랐다.그러나 예선을 놀라게 한 사람은 이 인플루언서가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는 여자 영내문이었다.일이었기 때문에 예선은 사적인 일은 접어두고 예의 바르고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의뢰인에게 다가갔다.“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게 된 디자이너...”“자기소개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누군지 아니까요.”전예진은 예선의 말을 끊고 짙은 화장을 한 얼굴에 오만불손한 표정을 지으며 예선을 향해 말했다.“다른 사람 약혼식장에서 소란을 피우고 다른 사람의 약혼자를 빼앗아간 여우 같은 여자, 예선이죠?”전예진의 대답에 옆에 있던 영내문은 낄낄대며 뭔가 재미난 구경이라도 난 듯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예선, 친한 언니가 돈을 주고 고용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당신일 줄은 몰랐네요. 세상 참 좁아요. 아니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뭐 그런 건가?”예선은 침착한 표정으로 두 여자가 던지는 냉소적이고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유유히 입을 열었다.“세상이 너무 좁은 게 아니라 다른 속셈이 있는 소인배들이 일부러 우연한 만남을 가장한 것 같은데요. 그 소인배가 누구인지는 당신이 가장 잘 알 거라 생각해요.”“...”득의양양했던 영내문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흔들리지 않고 담담한 예선의 모습을 보고 영내문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영내문은 자신의 기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도 함부로 일을 저지르지도 않고 가만히 곁에 있던 전예진에게 곁눈질을 했다.전예진은 영내문의 눈짓을 알아차리고는 뭔가 트집을 잡으려고 일 얘기를 시작했다.“예선 씨, 이런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합시다.”“내 디자인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의뢰인의
”뭐라고요? 원하는 디자인을 보여달라고요?”전예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아니 어떻게 당신은 일을 이렇게 쉽게 하려고 해요? 지금 남의 디자인을 베끼자는 거예요? 너무 쉽게 돈 벌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예선은 전예진이 고의로 자신의 말을 왜곡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침착하게 설명했다.“고객님, 원하는 디자인을 보여달라고 한 것은 고객님이 어떤 디자인 스타일과 취향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서에요.”“아, 그런 뜻이었구나.”전예진은 그제야 예선의 말뜻을 이해하였고 입가에 여전히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이제부턴 내 친한 동생인 내문이와 얘기하세요. 이 집은 내가 사서 내문이한테 주는 거니까 내문이가 좋아하는 대로 꾸미게 해 주세요. 어서 내문이 의견 들어보세요.”예선이 아무 눈치도 없는 바보도 아니고 이쯤 되자 영내문이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음을 확실하게 깨달았다.영내문은 거만한 눈빛으로 예선을 흘겨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골탕을 먹여 볼까 하는 표정이 얼굴 가득 들어차 있었다.그녀는 예선의 엄마가 Y국 최고 갑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재정적인 면에서는 자신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경지이며 소군연이 지금 예선을 얼마나 총애하고 사랑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이 모든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하지만 약혼식에서 호되게 구긴 체면과 억울함을 이번 기회에 꼭 예선에게 돌려주고야 말 것이다!예선은 자신의 일을 방해하려는 그들의 수작에 걸려들었음을 알고도 여전히 전문가다운 텐션을 유지하며 영내문에게 실내 디자인에 관련된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영내문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아서 예선이 몇 마디 하자마자 바로 그녀의 말을 끊고 같은 질문을 하고 또 하며 예선을 계속 골탕 먹였다.그러나 예선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 하나 없었고 시종일관 침착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이었다.일 얘기는 거의 두 시간 동안 이어졌고 영내문은 피곤한지 사람을 시켜 커피와 간식거리를 좀 사 오라고 했다.예선은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