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일이냐? 군연이 너 지금 내문이와의 약혼이 가짜라고 말했어?”영내문의 부친이 추궁하고 나섰다.소군연은 정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내문이가 그렇게 제안했어요. 할아버지의 심신을 안정시키고 우선 병세가 안정되기를 바라면서요.”영내문의 부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연단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영내문을 바라보았다.“내문아, 군연이 말이 사실이니?”“...”영내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영내문의 모친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한 채 입을 열었다.“내문이가 어떻게 인륜지대사인 결혼을 가지고 장난칠 수 있겠어요? 이 여우 같은 기집애가 우리 내문이와 군연이가 결혼하는 꼴을 못 보겠기에 여기까지 와서 소란을 피운 거죠! 이렇게 뻔한 일을 당신은 어떻게 알아보질 못해요, 글쎄!”영내문의 모친은 목소리가 점점 더 격앙되었고 비웃으며 예선을 거들먹거렸다.“이 여자 좀 보세요. 집안 배경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반반한 얼굴 하나밖에 없잖아요.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도 보지 말아야지. 어디서 분수도 모르고 부잣집 며느리가 되려고 꿈을 꾸는 거야! 우리 내문이는 어릴 때부터 금이야 옥이야 키운 금지옥엽에다가 군연이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천생연분인데 도대체 누가 미운 오리고 누가 백조인지 보고도 아직 모르겠어!”“그리고 군연이 너, 너도 참 어리석구나.”영내문의 모친은 소군연을 향해 한마디 꾸짖었다.“할아버지 건강이 아직 안정된 상태가 아니라는 거 모르니? 아직도 왜 할아버지에게 충격을 주려고 하니? 할아버지가 혹시라도 중환자실에 들어가시면 어쩌려고 그러니? 두렵지도 않니?”영내문의 모친은 계속 할아버지를 거론하며 소군연을 압박하려고 했다.그러나 영내문의 모친이 말을 마치자마자 어디선가 차가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정말 어이가 없어서!”영내문의 모친이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나다희였다.그녀도 나다희를 잘 알고 있었다.
눈부신 다이아몬드 반지가 불빛 아래서 영롱한 빛을 뿜었다.그리고 소군연은 무릎을 꿇고 경건한 눈빛으로 예선을 바라보며 진심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예선, 비록 우리가 서로 함께 한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내 평생 함께 하고 싶고, 내 마음속에 두고 싶은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그는 고백을 하고 이어서 청혼을 했다.“예선, 나랑 결혼해 줘. 내 신부가 되어 줘.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하고 아껴줄게. 오직 당신만이 내 사랑이야. 아무도 필요 없어.”소군연의 마지막 절절한 고백은 꼭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는 말 같았다.영내문은 소군연이 자신을 가리키며 콕 찍어 하는 말처럼 들렸다!그녀는 마치 자신이 온갖 치욕과 모욕을 뒤집어쓴 것처럼 느껴져서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폭발하려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참았다.소군연이 청혼하는 장면은 모든 하객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한편 나다희는 살짝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그녀는 원래 예선을 자신의 오빠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다.그러나 감정적인 일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안다.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나다희는 누구보다 더 기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예선 언니, 얼른 대답하세요!”예선은 이런 상황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소군연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청혼할 줄은 정말 몰랐다.아직 먼 미래의 일일 것이라고 바라왔던 그날이 이렇게 훅 그녀 앞에 올 줄이야!게다가 그는 반지까지 이미 준비해 둔 것이었다.반지도 그냥 반지가 아니고 특별히 디자인한 것인 듯했다.왜냐하면 반지의 모든 요소가 다 그녀가 좋아하는 타입으로 디자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녀는 그제야 뭔가 알 것 같았다.이 반지는 소만리가 디자인한 것이 틀림없다.예전에 자신이 소만리에게 어떤 디자인의 주얼리를 좋아하는지 털어놓은 적이 있었고 언젠가 결혼하게 되면 그런 결혼반지를 꼭 소만리가 디자인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내문의 모친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누구세요? 내가 이 여우 같은 기집애를 혼내는 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여기는 내 딸과 사위의 약혼식장이에요. 당신 어디서 온 잡상인이에요? 누가 여기 들어오라고 했어요?”예선은 여자가 아까 영내문의 모친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마음이 불편했다.그래서 스스로 이 일을 해결해 보려고 나서려고 했는데 영내문의 부친이 급히 다가와 자신의 아내를 막아섰다.“이 분은 내가 모시고 온 손님이야. Y국에서 온 사 사장님이라고. 당신 함부로 입 놀리지 마!”영내문의 부친은 따끔하게 타일렀고 여자에게 웃으며 정중하게 사과했다.“사 사장님,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내 딸과 사위의 약혼에 모셨는데 이런 촌극을 보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영내문의 모친은 남편의 말을 듣고 얼굴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이, 이 분이 오늘 당신이 만난 사 사장님이에요?”영내문의 모친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사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난 사 사장님인 줄 몰랐어요. 사장님이 대단하신 건 남편한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어요. 한 여자가 자신의 사업을 그렇게 빛나는 경지까지 일으켜 세우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니까요! 정말 대단하십니다!”영내문의 모친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소군연의 모친은 옆에서 듣다가 충격에 휩싸였다.“이 분이 바로 그 Y국 갑부라고?”영내문의 모친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방금 내 남편과 비즈니스 거래를 하신 분이죠!”“죄송합니다만 당신이 뭔가 오해한 것 같군요. 오늘 당신 남편과의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어요.”여자는 거북해하며 냉랭하게 말했다.영내문의 모친은 이 말을 듣고 갑자기 멍해졌고 영내문의 부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사 사장님?”여자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영 사장님, 원래는 오늘 사장님과 거래를 해 볼까 하고 왔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싹 가셨어요. 사장님 부인의 행
여자의 말이 떨어지자 소군연의 모친 일행은 얼떨떨해졌다가 잠시 후 저마다 얼굴에 비꼬는 웃음이 번졌다.예선은 그 사람들의 비꼬는 웃음에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여자를 쳐다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을 눈빛으로 전했다.여자는 예선의 눈빛을 보고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아차렸다.그녀는 예선의 뜻을 어기고 싶지 않았지만 눈앞의 사람들의 태도에 가만히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사 사장님, 방금 우리 소 씨 집안이 예선을 넘봤다고 했습니까? 허, 어디서 그런 생각을 한 거죠? 우리 소 씨 집안은 경도 4대 귀족 중 하나로 명예와 명성, 재력 모두 갖춘 집안으로 경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데 저 여자는...”소군연의 모친은 갑자기 경멸하는 눈빛으로 예선을 힐끔 바라보았다.“내가 진작에 사람을 시켜서 저 여자의 배경을 좀 알아봤죠. 아주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고아예요. 이렇게 혼자인 몸을 어떻게 사 사장님은 우리 집안이 넘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네, 맞아요. 사 사장님. 이 예선이란 여자야말로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를 함부로 쳐다보는 염치없는 여자라구요.”영내문의 모친은 말참견을 하면서도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말도 잊지 않았다.“사 사장님, 비록 사업상의 일은 내가 잘 모르지만 방금 실언하신 건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하지만 사람들도 다 보는 눈이 있어요. 이 여자는요, 말 그대로 소 씨 집안의 돈을 노리고 이렇게 끈질기게 군연이에게 매달리는 거라구요. 이 집안에 가장 어울리는 여자는 내 딸이에요!”“그런 우스운 소리는 그만하세요!”소군연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내 마음속에는 예선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없어요. 다른 어떤 여자가 와도 나 소군연과는 상관이 없어요. 내 평생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오직 예선이뿐이라구요!”“...”영내문의 모친은 영내문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소군연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영내문은 이 말을 듣고 더욱 난감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영내문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사영인은 그녀의 뺨을 때렸다.영내문은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번쩍 들어 사영인을 바라보았다.“당신, 왜, 왜 내 딸을 때려!”영내문의 모친이 급히 영내문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감싸며 화가 난 얼굴로 사영인을 노려보았다.“내 딸이 무슨 잘못을 했어요? 천하의 나쁜 년은 예선이 이 여잔데, 당신이 무슨 근거로 간섭을...”“내가 예선이 엄마예요. 엄마로서 본능적으로 딸을 지키는 건 당연한 거죠!”“...”“...”사영인의 말이 약혼식장을 울렸고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몇 초가 지나자 분위기는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뭐? 소군연의 청혼 상대가 Y국 갑부의 딸이라고?”“설마? 지금 Y국 갑부의 딸이라는 사람이 소 씨 집안을 넘본 그 예선이라는 여자를 말하는 거야? 일이 이렇게 된 거였구나!”사람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하지만 소군연의 모친과 영내문의 모친은 모두 아연실색하여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자신들이 방금 들은 것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예선은 자신과 여자의 관계가 이렇게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여자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예선, 이게 사실이야?”소군연도 충격과 당혹감으로 휩싸인 채 물었다.이때 소군연의 모친을 비롯한 사람들은 모두 예선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녀의 입만 쳐다보았다.예선은 소군연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예선이 사영인과의 관계를 인정하자 소군연의 모친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들었다.이 상황을 기뻐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예선의 모친은 Y국의 갑부였고 소군연은 이미 예선에게 청혼해서 예선의 답을 받은 상태였다.이렇게 되면 그녀는 앞으로 갑부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가 되는 것이다!영내문의 집안과는 순식간에 비교가 되었고 대단하게 보였던 영내문의 집안도 예선에 의해 한순간 그 빛이 가려졌다.하지만 사영
사영인은 추상같은 호된 경고를 내던졌지만 예선을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이 가득했다.소군연은 예선의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지금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예선의 대단한 신분이 폭로되어서가 아니라 예비 장모에게 사위로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영내문은 얼굴을 가렸고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오늘 이 촌극에서 결국 웃음거리가 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비즈니스 거래도 망쳤고 혼사도 망쳤다.게다가 지금 소군연의 모친은 웃음거리가 된 영내문은 안중에도 없고 예선이라는 갑부 며느리가 생겨서 너무나 기뻐하고 있었다.가짜 약혼식이 한바탕 소동을 벌인 채 엉망진창으로 끝난 후 소군연의 모친과 그 일행은 집으로 돌아왔다.돌아온 후에도 갑부 며느리를 두게 생겼다는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모두들 흥분과 기쁨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 그게 사실이에요? 예선이 그 여자가 Y국 갑부의 딸이라니?”소군연의 모친은 감탄해 마지않으며 자신의 남편에게 말했다.“거짓말일 수가 있겠어? 그 사영인이라는 사람은 나도 경제 신문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어. 아주 유능하고 대단한 사업가야.”소군연의 부친의 입에서는 사영인을 향한 칭찬의 말들이 가득했다.망설임 없이 예선의 모친에 대한 평판과 비즈니스상의 지위를 인정했다.이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만면에 기쁜 빛을 숨길 수가 없었다.그러나 소군연의 부친은 그 모습이 못마땅한 듯했다.“예전에는 그렇게 싫어하다가 지금은 이렇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니, 원. 영 씨 집안사람들이 줏대도 없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고 욕이라도 할까 두렵지가 않아?”“내가 영 씨 집안을 두려워할 게 뭐가 있어요? 게다가 당신도 보셨다시피 우리 군연이는 내문이를 전혀 좋아하지 않아요. 난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내문이한테 기회를 주기 위해 내 의리를 다했다구요!”소군연의 모친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세를 전환했고 고개를 돌려 소군연의 할아버지가 소파에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
결국 이 사달이 나게 된 단 한 가지 이유는 소 씨 집안사람들이 예선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두 집안이 동원하여 이 판을 짰다는 것이다.소만리는 이 말을 듣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예선을 생각하니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졌다.“그 나다희라는 여자는 정말 영리하고 정의로운 것 같아. 널 위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게 맞서다니.”예선도 소만리의 말을 듣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맞아. 나다희는 정말 용감하고 정의로워. 나한테도 정말 잘 해 줘.”“아...”소만리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사실 말이지. 너한테 잘 해 주는 사람이 또 있는데 말이야.”“알아. 소만리, 너라는 거.”예선은 아무 생각 없이 소만리라고 대답했지만 소만리는 이를 부정하는 대답을 했다.“아니, 네 엄마.”“...”소만리의 말이 끝나자 예선은 갑자기 침묵했다.“예선아, 타인의 감정을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난 네 어머니가 너에게 보상하고 싶어 하시는 마음을 알 것 같아. 그리고 널 그렇게 내버려둔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고 느껴져.”소만리는 차분하게 예선을 설득하려고 했다.“예선이 네가 사실은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다시 받고 싶어 한다는 것도 난 알아. 너나 나나 다 같은 경험을 했잖아. 너 자신에게도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어머니께도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소만리와의 전화를 끊고 난 예선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생각에 잠겼다.소군연은 그녀가 뭔가 깊은 고민에 잠겼다는 걸 알아차렸다.“예선, 아직 어머님이 밖에서 기다리시는 것 같아. 오늘은 바깥 기온도 매우 낮은데. 계속 이렇게 문 앞에서 기다리시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 우선 어머님을 안으로 모시는 게 어떨까?”소군연은 아주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예선은 이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얼굴을 찌푸리자 소군연은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꼭 안으로 모시지 않아도 돼. 뭐 하긴, 오늘은 어차피 많이 늦긴 했어
예선의 말에 사영인은 물론 옆에 있던 소군연도 눈이 동그래졌다.그들은 예선이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사영인은 예선의 말에 깜짝 놀라 몇 초 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가 조금씩 실감이 나는지 몇 년 동안 그녀의 얼굴에서 보지 못했던 환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번거롭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나도 번거롭지 않아. 엄마 내일 하나도 바쁘지 않아. 예선아, 넌 내일 일 끝나고 천천히 내려오면 돼. 아무리 늦어도 엄마는 널 기다릴 거야!”사영인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그래, 그럼 너희들 일찍 쉬어. 엄마도 이제 갈게. 군연, 예선이 잘 부탁해. 나 먼저 갈게.”“네, 어머니. 안녕히 가세요. 예선이는 저한테 맡겨두세요. 잘 돌볼게요.”소군연은 믿음직스럽게 약속했다.사영인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뻐하는지 그도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사영인이 돌아서는 뒷모습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기뻐하는지가 느껴질 정도였다.예선은 그 자리에 서서 사영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눈을 돌려 조용히 눈시울을 붉혔다.소군연은 예선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감지했고 문을 닫은 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집안으로 돌아왔다.“아까는 정말 당신이 끝까지 어머님한테 차갑게 대하는 줄 알았어. 당신과 어머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님이 당신한테 미안해하시고 당신을 걱정하고 배려하고 계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예선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안타깝게도 그 관심과 배려가 너무 늦었다는 거죠.”소군연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 줄 수 있겠어?”예선은 소파에 살며시 앉아 잠시 머뭇거린 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우리 부모님은 성격이 맞지 않아서 갈라섰어요. 엄마는 사업을 하고 싶어 했고 아빠는 엄마가 가정은 돌보지 않고 자신의 일만 생각한다며 무책임하다고 싸우셨죠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