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선의 말에 사영인은 물론 옆에 있던 소군연도 눈이 동그래졌다.그들은 예선이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사영인은 예선의 말에 깜짝 놀라 몇 초 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가 조금씩 실감이 나는지 몇 년 동안 그녀의 얼굴에서 보지 못했던 환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번거롭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나도 번거롭지 않아. 엄마 내일 하나도 바쁘지 않아. 예선아, 넌 내일 일 끝나고 천천히 내려오면 돼. 아무리 늦어도 엄마는 널 기다릴 거야!”사영인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그래, 그럼 너희들 일찍 쉬어. 엄마도 이제 갈게. 군연, 예선이 잘 부탁해. 나 먼저 갈게.”“네, 어머니. 안녕히 가세요. 예선이는 저한테 맡겨두세요. 잘 돌볼게요.”소군연은 믿음직스럽게 약속했다.사영인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뻐하는지 그도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사영인이 돌아서는 뒷모습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기뻐하는지가 느껴질 정도였다.예선은 그 자리에 서서 사영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눈을 돌려 조용히 눈시울을 붉혔다.소군연은 예선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감지했고 문을 닫은 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집안으로 돌아왔다.“아까는 정말 당신이 끝까지 어머님한테 차갑게 대하는 줄 알았어. 당신과 어머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님이 당신한테 미안해하시고 당신을 걱정하고 배려하고 계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예선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안타깝게도 그 관심과 배려가 너무 늦었다는 거죠.”소군연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 줄 수 있겠어?”예선은 소파에 살며시 앉아 잠시 머뭇거린 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우리 부모님은 성격이 맞지 않아서 갈라섰어요. 엄마는 사업을 하고 싶어 했고 아빠는 엄마가 가정은 돌보지 않고 자신의 일만 생각한다며 무책임하다고 싸우셨죠
소군연의 진심 어린 대답을 듣고 나니 예선의 눈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소군연은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예선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는지 소군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이제야 그는 예선이 친어머니에게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완전히 이해가 되었다.왜냐하면 그녀는 너무도 어린 나이에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이 상처는 언젠가 치유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소군연은 예선의 곁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그녀가 푹 쉬도록 하기 위해서 늦게까지 머물지 않았다.그런데 그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부모님이 거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소군연을 보자마자 소군연의 모친은 황급히 그에게 달려와 그를 끌어당겼다.“그 예선이라는 여자가 정말 Y국 갑부 사영인의 딸이란 말이야? 네가 좀 더 일찍 말해 줬더라면 우리가 이런 번거로운 일은 안 했을 거 아니니.”소군연의 모친은 오히려 소군연을 원망하기 시작했다.“예선의 집안 사정을 일찌감치 알려주었으면 나와 네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는 절대 반대하지 않았을 거야.”소군연은 모친의 말을 듣고 너무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모친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내가 예선과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는 정말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예선의 집안 배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아직도 어머니는 그 이치를 모르시는 거예요?”소군연이 약간 화가 난 것을 보고 소군연의 모친은 서둘러 발뺌을 했다.“아, 아니 네 말이 맞아. 지금은 어떻든 좋아. 이 혼사에 나와 네 아버지는 아무 불만이 없어. 하지만 할아버지가...”할아버지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꾀병을 부리고 영내문과의 약혼을 몰아붙였다는 사실을 소군연은 여전히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아무리 할아버지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절대 따르고 싶지 않았다.소군연의 모친이 말끝을 흐리자 소군연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가 또 왜요?”“할아버지
예선은 컵을 든 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길을 막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이 사람들은 사무실에서도 남의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정평이 나 있었다.예선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들이 왜 자신의 앞길을 막고 서 있는지 알 것 같았다.그러나 그녀는 모른척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두 분, 무슨 일이에요? 나랑 차라도 한잔 하시게요?”전은비와 소향은 이 말을 듣자마자 동시에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예선 언니만 괜찮다면 우리는 언니와 함께 모닝커피 마시고 싶어요!”“맞아요. 우리도 너무 바라던 바예요. 예선 언니!”전은비와 소향이 자신을 이렇게 부르는 것을 듣고는 예선은 자신의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그녀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소향 언니, 은비 언니 지금 뭐하는 거예요? 난 언니들보다 입사도 늦고 경력도 짧아요. 그런데 날 언니라고 부르다니, 그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예선은 말을 마치고는 그녀들을 돌아서 곧장 탕비실로 향했다.전은비와 소향은 서둘러 예선을 따라갔고 이 모습을 본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은비 언니와 소향 언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왜 예선 씨한테 언니라고 부르는 거죠?”마침 상쾌한 발걸음을 이끌며 사무실로 들어서던 나다희는 사무실에서 동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을 멈추고 탕비실 쪽을 바라보았다.사무실 사람들은 나다희가 오는 것을 보고 더 이상 큰소리로 수군거리기 어려웠는지 입을 다물었다.감히 이 사무실에서 누가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겠는가?무슨 일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나다희는 동료들의 표정 변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탕비실로 향했다.그녀는 전은비와 소향이 예선을 둘러싸고 인터넷에서 떠들어대는 얘기들을 추궁하는 모습을 보았다.“예선 언니, 남자친구가 경도 4대 귀족 중 하나인 소 씨 집안 도련님이었구나. 너무 대단하다.
전은비와 소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 오늘 아침에 찍은 동영상을 다시 스트리밍했다.보면 볼수록 부럽고 질투가 났다.어떻게 예선의 집안 배경은 이렇게 좋을까? 갑부 엄마에, 돈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예선은 커피를 한 잔 마신 후에도 전은비와 소향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녀는 바쁘게 일을 했고 거의 12시가 다 되어가자 낯선 번호로 문자 메시지를 한 통 받았다.짧은 메시지였다.“예선아, 엄마는 밑에 와 있어. 시간 되는 대로 내려와. 엄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메시지를 보니 예선의 가슴이 두근거렸다.“예선 언니, 점심시간 다 됐는데 같이 먹을래요?”나다희가 다가왔다. 예선은 핸드폰 화면을 닫고 일어났다.“다희 씨, 나 오늘은 약속이 있어요.”“오오, 그 잘생긴 남자친구 맞죠? 아니지, 지금은 약혼자인 거죠.”나다희는 장난스럽게 예선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눈짓하며 말했다.예선의 뺨이 살짝 뜨거워진 것은 소군연이 생각났기 때문이다.“아니요.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약속이 있어요.”예선이 가방을 들고 나갈 준비를 하며 말했다.“아니라구요? 얼굴 빨개졌는데요.”나다희는 예선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예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다희를 돌아보며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예선의 심장이 궤도를 이탈해 마구 뛰기 시작했다.잠시 후 만나게 될 친엄마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까?그녀는 엘리베이터가 아래층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생각에 잠겼다.식당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예선은 고민에 잠긴 듯 발걸음을 늦추었다가 잠시 머뭇거렸다.식당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마음속에 점점 긴장감이 엄습해왔다.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버린 여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왜 그런지 가슴이 두근거렸고 긴장되었다.복잡한 마음을 안고 예선이 도착해 보니 사영인의 모습은
사영인은 예선과의 관계를 좁히려고 애썼지만 예선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고 예선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조용히 앞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예선이 자신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사영인의 입가에도 웃음이 사라졌다.“예선아...”“유전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갑자기 예선이 입을 열었다.사영인은 멍한 표정으로 예선을 바라보았고 뒤이어 예선이 입을 여는 소리를 들었다.“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는 당신들의 냉혈한 유전자를 물려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어린아이를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다니.”예선의 말을 듣자마자 사영인의 마음은 순식간에 강력한 펀치를 맞은 듯 먹먹해졌다.하지만 이 충격이 아무리 아프고 무거워도 그녀는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할 수가 없었다.냉정하게 아이를 버리고 간 자신이 아이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었다.걱정 없이 행복해야 할 어린 시절은 무책임한 부모에 의해 영원히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다.“예선아, 엄마가 너무 잘못했어. 이 사과가 너무 늦었다는 것도 잘 알아. 엄마는 너한테 용서해 달라고 강요하지 않아. 다만 매일 이렇게 얼굴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사영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예선을 바라보며 약간의 관심과 반응을 기대했지만 예선은 여전히 냉담했다.“오늘 오라고 한 건 사실 당신과 식사를 하거나 당신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가능한 한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거예요.”“...”예선의 대답에 사영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뜻밖에도 이것이 예선이 자신을 만나자고 한 이유였다.어젯밤 사영인은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딸이 마침내 자신에게 만회할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사실 예선은 단지 그녀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어젯밤에는 날 도와주셔서 고마웠어요. 오랜 시간 동안 난 부성애와 모성애 없이 혼자 있는 것
사영인이 슬픔에 잠겨 괴로워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낯선 두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전은비와 소향이 웃는 얼굴로 환하게 인사를 했다.“안녕하세요. 예선 씨 어머니시죠? 우리는 예선 씨 직장 동료예요.”사영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티슈를 꺼내 눈가의 눈물을 훔쳐내고 날카로우면서도 예리해 보이는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그녀는 전은비와 소향을 한 번 훑어본 후 눈빛이 약간 부드러워졌다.“아, 예선이 직장 동료들이세요?”“네.”전은비와 소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는 예선 씨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요. 평소에는 점심도 같이 먹고 가끔 회식도 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아까 예선 씨한테 점심때 같이 밥 먹자고 했더니 누구 만날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뜻밖에도 여기서 만나네요. 우리도 마침 옆 테이블에 있었거든요. 들으려고 그런 건 아닌데 어쩌다가 두 분 대화를 듣게 되었지 뭐예요.”“그랬군요.”사영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예선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선의 삶에 대해 단편적이나마 알고 싶었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우호적으로 대하며 잠시 앉으라고 권했다.전은비와 소향은 한번 찔러나 보려고 말을 걸었던 건데 생각지도 못하게 같이 착석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그녀들은 예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아는 대로 말을 했고 나머지는 아무렇게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그러나 사영인은 그 말조차 진지하게 듣고 나서 답례로 그들에게 고급 스파 이용권 두 장을 주었다.자리를 떠나기 전에는 그들에게 고급 음식을 사 주기까지 했다.전은비와 소향은 그런 선물은 받을 수 없다고 겉으로는 한사코 사양했지만 결국 시치미를 뚝 떼고 손에 쥐게 되었다.사영인이 식당을 떠난 후 두 사람은 젓가락을 들고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은 채 만족스럽게 먹기 시작했다.“돈이 좋긴 좋아. 이십만 원짜리 고급 스파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줄 수 있고 이런 비싼 일식도 턱하니 계산하고 가다니 말이야. 난 한 달에 한
예선이 소군연에게 말하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에 팍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사영인이었다.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사영인뿐이었다.소군연도 순간 똑같은 예상을 했다.“아마 당신 어머니일 거야. 어머니가 정말 당신을 아끼시는 것 같아.”예선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그들의 관심이 가장 필요로 할 때는 날 버리기로 결심해 놓고 이제 와서 관심을 가져요? 이미 너무 늦었어요. 지금은 더 이상 그들의 늦은 관심 따위 필요하지 않아요.”그녀는 소군연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난 지금 당신의 관심과 사랑만으로 충분하거든요.”소군연은 예선의 말뜻을 헤아리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눈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올랐다.그 이후로도 예선은 종종 각종 물건들을 받았고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영인이 준 것이라고 추측했다.그러나 사영인은 어떻게 매번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이렇게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건지 예선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예선은 사영인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도록 누군가를 사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속에서 바로 거부감이 치솟았다.확실한 증거도 없었고 그렇다고 사영인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싫었다.그러나 예선은 옆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관찰하는 것 같은 낌새를 슬슬 느끼기 시작했다.유심히 관찰해 본 결과 예선은 전은비와 소향이 최근에 매우 윤택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두 사람은 걸핏하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고급 스파에 가서 마사지를 했다는 둥 하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게다가 요즘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둘 다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이 가방은 아는 사람이나 연고가 있지 않으면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이런 여러 정황들로 미루어 본 결과 예선의 마음속에 점점 수렴되는 부분이 있었다.어느 날 예선은 점심시간에 일부러 나가지 않고 탕비실에서 아무거나 꺼내서 음식을 데워 먹었다.나다희는 예선
역시 예선의 예상대로 전은비와 소향은 제일 먼저 사영인에게 이 상황을 보고했다.예선이 가장 좋아하는 가방 스타일을 알게 된 사영인은 한 명품 가게의 점장에게 얼른 그 가방을 가져오게 했다.잠시 후 사영인은 사람을 시켜 예선이 근무하는 회사로 보내서 전은비에게 가져가라고 했다.전은비는 다음날 예선이 출근하기 전에 예선의 캐비닛에 넣으라는 지령을 받았다.전은비는 사영인이 주는 사례금을 받고 당연히 지령대로 일을 해 줘야 하지만 그 가방을 손에 넣게 되자 마음이 흔들렸다.그 가방은 정말 너무 예쁘고 질감도 최고였다.무엇보다 이 가방은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한정판이었다.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전은비의 마음은 흔들렸다.그녀는 가방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어차피 나중에 사영인에게는 예선에게 이미 보냈다고 하면 그뿐이다.사영인이 직접 사무실에 와서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결정을 내린 후 전은비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그 가방을 숨겼다.예선은 자신이 가방을 갖고 싶다는 의사를 비추면 이전에 다른 물건들처럼 그 가방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이렇게 되자 예선은 자신이 너무 깊이 생각한 것이 아닌가 의아해하며 그 일을 잊었다.주말이 되어 소군연은 예선을 데리고 고급 레스토랑에 왔다.소군연의 부모는 이미 일찍부터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소군연은 이미 예선에게 의향을 물어본 뒤 그녀를 데리고 그의 부모님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자리에 앉은 예선은 소군연의 부모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그러나 그녀는 조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자신과 소군연의 사랑은 부모님의 인정이 없어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오히려 부모의 명성과 배경이 자신들의 사랑을 좌지우지할 여지를 주게 되어 불편하게 느껴졌다.예선은 비록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스스럼없는 태도로 소군연의 부모와 대화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